'2008/01'에 해당되는 글 27건
- 2008/01/31
-
2008/01/26
매개의 욕망, 욕망의 매개 (17)
-
2008/01/25
미연시 개론 (15)
- 2008/01/24
- 2008/01/23
- 2008/01/23
- 2008/01/22
- 2008/01/21
- 2008/01/20
- 2008/01/20
부산으로 내려갔어야 했다는 때늦은 후회. 왜 에반게리온 덕후가 아닌 척, 무심한 척 하고 있었을까. 평일 낮시간 극장을 반쯤 채운 이들은 바로 내 또래의 남성들이었다. 커플이 셋, 억지로 끌려온 조카인 듯한 꼬맹이가 둘. 그들은 엔딩 크래딧이 올라가기 전에 극장을 떠났다. 나머지 남성들은 미사토 상의 서비스가 올라오는 순간까지 극장에 잠자코 앉아 있었다. 극장에서 나갈 때 두명의 남성이 "카오루가 몇번째 사도였지?"라는 토픽으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런 건 잊어버렸다.)
취향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본 적은 많았지만, 이런 식의 세대 체험은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TV판의 내용과 똑같은 장면들이, 템포가 좀 빠르게 진행되는 것이 어색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반게리온 초호기가 발진하고, 미묘하게 편곡된 "엔젤즈 어택"이 흘러나오는 순간, 내 정신줄이 요단강을 건너갔다.
십년 전에는 에반게리온이라는 작품 자체가 우리와 함께 사춘기였다. 규정되기 힘든 불명료함과 멋있어 보이려는 강박 같은 것이 작품에 있었고, 그래서 우리 모두 그를 더욱 사랑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그는 그때의 인간관계를 좀 더 깔끔하게 정리한다. 대사는 예전과 별 차이가 없지만, 인물들 간의 관계는 훨씬 깔끔하다. 겐도우와 신지, 신지와 미사토, 겐도우와 레이, 그리고 레이와 신지......
미사토의 비중이 커진 것이 마음이 든다. 대위 미사토는 중령 미사토로 승진(?)도 했고, 겐도우와 신지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자임한다. 자신은 초호기 파일럿을 믿고 있으니, 사령관님도 아들을 믿어 달라고 요구하는 미사토의 모습은 십 년전에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믿음에 부응하여, 에바 초호기가 다시 양전자포를 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기어갈 때, 눈물이 났다.
미사토의 어른스러운 지원을 받은 신지는 더 차분해졌다. 그를 둘러싼 환경은 예전과 다를 바 없지만, 소년은 자기가 원하지 않은 상황을 주체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곤경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가령 가출하는 장면은 예전에는 그야말로 가출이었지만, 이번에는 그저 바람 좀 쐬러 다녀온 듯한 느낌이 들 정도. "이제 됐어. 미사토 상 옆으로 데려다줘!" 그렇게 외치자 네르프의 직원들이 나타난다. 님아 좀 짱인듯......
2,3,4편 모두 기대가 된다. 제작진들은 드라마와 영화의 문법의 차이를 알고 있는 것 같다. 초호기와 영호기가 같이 출격하는 장면을 1편의 클라이맥스로 설정한 것은 탁월했다. 레이와 신지가 가까워지는 과정에 대해서도 대사 몇 개로 잘 추려서 정서적인 느낌을 전달했다. 훗날 "보꾸와 보꾸다." "와따시와 와따시..." 따위의 말들을 지껄이며 긴 사색(?)에 빠지는 신지와 레이의 내면세계를 영화는 어떻게 표현할지 기대가 된다.
담배피는 리츠코 상의 모습 하악하악. TV판 한화에 등장한 주제에 팬이 많으셨던 카오루 사마가 마지막에 등장해 주시니 포만감 충족. 근데 제레 영감탱이들은 좀 비중이 떨어진 것 같지 않아? 겐도우의 계획을 처음부터 암시해 버리니, 제레가 겐도우의 상사라는 느낌이 별로 들지가 않는단 말이지. 영상의 진전이 만들어낸 에바와 사도의 전투씬만으로도 이 시리즈의 존재 가치는 충분하고, 무언가 훨씬 더 깔끔하게 이해되는 결론을 줄 거라는 -에바에게 결코 기대하지 않았던- 엄청난 기대마저 들게 만든다.
알몸의 레이가 신지로부터 몸을 돌려 팬티를 입는 순간, 같이 본 친구는 자신의 사이키가 소년 시절로 존트해 버리는 줄 알았다고 낄낄거렸다. 나는 레이빠가 아니므로 그런 일은 없었다. 하지만 2편에서 아스카짱의 노란 원피스가 바람에 넘어가 버리는 장면을 본다면, 흠좀무...... 퇴행이 시작될 지도 모르겠군.
그래, 그런 것이다. 90년대 소년들의 자살을 만류했던 거대한 자기 위안의 판타지다. 우타다 히카루의 OST가 그렇게 좋다고는 볼 수 없지만, 에바가 무엇인지는 확실히 얘기해 주고 있다. 이카리 신지 14세, 내가 사랑했던, 죽어버리고 싶을 때 나 대신 찌질거려줬던 고마운 그 소년이 돌아왔다. 살아서 청년이 된 우리에게, 여전히 신화로 살아 있는 그 소년이.
P.S 일본에서 잠깐이나마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하고, 그 결과 수입단가가 높아져서, 현재 에반게리온은 1편만 계약이 된 상태. 2편부터는 극장에서 볼 수 없을지 모른다. 불안하다. 다시 극장에 가서 미약한 힘이나마 보태야겠다. 누군가의 말처럼 에반게리온을 다운로드 받아 보는 것은 배신이다. 자 일단 CGV로 가시라니까. 제발 2편도 극장에서 보자구요.
| 진보신당 칼라tv 스텝 처절한기타맨 님의 전경 앞 공연(?) (5) | 2008/05/29 |
|---|---|
| 디 워는 어떻게 ‘애국주의 동맹’을 해체시켰나? (17) | 2008/03/01 |
| 에반게리온 서 : 그 소년이 돌아왔다! (8) | 2008/01/31 |
|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 로망이 아닌, 어떤 몸부림 (1) | 2008/01/14 |
| 왕과 나 : 거세의 두 가지 방식 (0) | 2007/11/27 |
| <미녀들의 수다>와 자밀라 (1) | 2007/11/21 |
거의 5년에 걸쳐서 쓰여진 글들이다. 어떤 의미에선, 최근으로 올수록 평가가 점점 박해지고 있다. 내가 진중권 책 중 최고로 치는 건 <폭력과 상스러움>인데 이 책에 대한 리뷰가 없다. 지금 나에겐 이 책이 없는데, 다시 구하면 제대로 된 리뷰를 해봐야겠다. 간단하게 말하면 나는 <폭력과 상스러움>의 진중권이 탁월한 매개자이면서 한국 사회에 적합한 이데올로기 비판가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보지만, 지금의 진중권은 출판시장의 교양도서 포멧에 흡수되었다고 본다.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당신이 하는 일은 정말 대단한 일이에요, 라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많지도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결코 그의 잘못도 아니다.
진중권은 매개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커다란 골칫거리를 던져줬는데, 그건 진중권의 글이 너무 쉽다는 사실이었다. 이택광은 언젠가 자기도 <미학 오딧세이>와 같은 책을 기획하고 있었는데, 이 책이 나오는 순간 책을 보고 그냥 때려쳤다고 말했다. 이것보다 더 쉽게는 못 쓰겠더라는 거다. 그 정도로 쉽게 쓸 수 있는 건 그 자체로 탁월한 재능인데, 사람들이 너도 진중권처럼 쉽게 써야 된다고 말하면 암담하다. 그리고 쉽게 쓴다는 건 모종의 생략을 수반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왜 <미학 오딧세이>와 같은 책이 나오지 않고, 그리하여 이 책이 여전히 진중권의 연금보험으로 남아 있겠는가. 학자로선 그렇게 쓰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개정판 서문에서 스스로 말했듯이, 대학원생 진중권은 미학사를 총괄적으로 정리하겠다는 젊은이 특유의 새파란 무모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의 말대로, "책은 적당히 무식할 때 써야 한다. 너무 무식하면 책을 쓸 수가 없고, 너무 유식하면 책이 영원히 안 나온다."
내 글에 대해 말한다면, 나는 내가 글을 어렵게 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얼마전에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지인이 "요새 글이 더 어려워졌어."라고 충고하던데 속으로 "그럼 키보드 워리어질 할 때 글이랑, '제 글 좀 사주세요 굽신굽신-' 모드에 있는 사람의 글이랑, 호흡이 다른게 당연하지-"하고 말았다. 나는 내가 똑똑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글을 잘 쓴다고도 생각하지 않지만, 적게 읽고 빨리 이해하는 재능과 읽는 이들에게 살인적으로 친절한 성격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매개가 적성이 맞다느니 그딴 소리를 하고 있는 거다. 나보고 글 어렵다는 사람들에겐, 아마도 이택광의 책을 선물해주는 게 해법인듯 싶다.
이택광 역시 매개를 추구하는 이가 한국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례이다. 학계는 그가 공부를 안 한다고 비방한다고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글을 읽기 어려워 한다. 그래도 그 역시 에세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는 보여주고 있다. 덧붙여, 택광 선배가 하는 일중 한국 사회에 꽤 쓸모있는 일 중 하나는 나에게 술을 사는 것이다. 병아리에게 모이를 주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관점에서 생각할 때는, 매개의 욕망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건 점점 더 자기 자신을 한국 사회의 어느 곳에서도 거주하기 적합하지 않은 몸으로 만들어 나간다는 말과 같다. 요새들어 이 한 몸 누일 곳은 어디인가라는 고민을 진지하게 하는 중이다.
| 군대에서 영어 몰입 교육을? (17) | 2008/02/07 |
|---|---|
| "엄마의 늪"? 먼저 경제적 문제로 접근해 보자. (16) | 2008/02/01 |
| 매개의 욕망, 욕망의 매개 (17) | 2008/01/26 |
| 20대 부자되는 14가지 방법? 나에게 대입해 보니...... (17) | 2008/01/20 |
| 고민 (32) | 2008/01/12 |
| 보급병의 추억 (20) | 2008/01/05 |
| [씨네21/유토디토] 스타리그 예찬 (11) | 2008/02/15 |
|---|---|
| [펌] 이중등록, 魂의 전쟁 - 魂의 시대를 추억하며 / Raight (9) | 2008/02/14 |
| 미연시 개론 (15) | 2008/01/25 |
| [펌] 김택용의 대 저그전 수비력 / FELIX (0) | 2008/01/06 |
| 이윤열 vs마재윤 : 듀얼토너먼트 E조 승자전 08.01.04 (8) | 2008/01/05 |
| 프로게이머로 만든 매직 더 개더링 카드 (7) | 2008/01/01 |
수능에서 분리된 한국형 토익시험을 실시할 것이라는 보도에 이어 수학 과학 등 일반과목도 영어로 수업할 수 있다는 이경숙 인수위원장의 말이 보도되었다. 두 가지 정책 모두 말하기 쓰기가 가능한 영어 교육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덧붙여 영어 사교육비를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이명박 당선자의 발언도 운위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조치가 오히려 사교육을 확산시킬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이다. 지금 인수위의 아마추어리즘은 참여정부를 가볍게 찜져먹고 있는데 어떤 언론도 그 단어를 입에 올리지는 않는 걸 보니, 역시 초록은 동색이고 가재는 게편인 모양이다. 하지만 이 정책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그들의 주장의 진의를 충분히 검토해보고 그 효용성을 평가하는 것이 좋겠다.
어느 경제신문이 1면에서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일반과목 영어수업을 통해 영어 말하기와 쓰기 능력을 배양한 국가들은 경쟁력이 향상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핀란드나 덴마크, 싱가포르 등의 성공사례를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영어를 가르칠 수 없는 교사가 없다면 일반과목 영어수업론은 현존하는 우리 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라 대체역사물과 같은 SF의 영역으로 넘어가 버린다. 마치 영어 공용화론이 그렇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그들도 얘기했듯이, 이 정책이 시행되려면 외국의 성공사례와 마찬가지로 교사의 영어권 국가로의 해외연수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즉, '일반과목 영어수업'론을 위한 필요조건을 그들이 내세우는 당위와 함께 엮어서 서술하면 다음과 같은 주장이 도출된다.
첫째, 한국 경제의 침체는 영어 능력의 부재와 큰 관련이 있다. 영어 말하기 능력과 쓰기 능력의 배양은 국가경쟁력 향상을 위해 거부할 수 없는 당위다.
둘째, 그 당위는 모든 초중고교급 교사들의 2-3년 가량의 해외연수를 국비로 지원해서라도 해결해야 할만큼 심각하다. 우리는 그러한 천문학적인 비용의 지출을 마땅히 감수해야 한다.
이러한 얘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을까. 상식으로 따진들 경제학적으로 따진들 결론은 비관적일 것 같다. 먼저 첫째 논거부터 검토해 보자. 이것은 증명될 수 없는 얘기이다. 현재의 영어광풍은 국가경쟁력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다. 영어실력이 향상되면 한국의 국가경쟁력이 다소 향상되기는 하겠으나, 지금까지 대한민국이 영어실력으로 경제를 키워왔던 나라는 아니었고, 그 구조가 하루아침에 달라질 것 같지도 않다. 물론 영어실력이 유능한 인재가 필요한 일자리가 있겠으나, 그 일자리를 채울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전국민의 영어교육이 필요하다는 당위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오히려 일자리가 지극히 부족한 한국의 경제상황이 영어광풍을 불러일으켰다는 주장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많은 직장에선 영어능력이 직접적으로 필요하지는 않지만, 수많은 지원자들 중에서 일부를 추리기 위해 토익 점수나 토플 점수를 보게 되었다. 기업의 취업담당자가 "우리도 토익점수가 영어실력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토익점수가 높다는 사실은 지원자의 성실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경쟁률이 높아질수록 당연히 커트라인은 높아질 수밖에 없고, 예비 구직자인 학생들은 그 기준에 맞추기 위해 영어교육에 힘쓰게 되었다. 중산층이 사교육에 돈을 쓰는 이유는 제자식을 취직시키기 위해서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입시제도만으로 사교육을 해소할 수 있다고 믿은 참여정부만큼이나, 현재의 인수위는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또한 일반과목 영어수업의 사례에는 성공사례만이 존재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도 지적되어야 한다. 영어가 사실상 공용어로 쓰이는 필리핀에서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수준높은 영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ASIA 6호에 나온 필리핀의 사례를 보면 추상적인 과학과 수학개념을 이해하려는 아이는 먼저 낯선 어휘와 씨름해야 하기 때문에, 결국은 기계적인 암기, 즉 주요단어나 정의, 계산법을 단순암기하는 것으로 학습이 전락하고 말았다고 한다. 필리피노로된 교재로 과학과 수학을 가르쳤을 때 학생들의 성적이 크게 향상되었다는 사례도 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일반과목 영어수업'은 학생들의 영어실력을 향상시키기 전에 학생들의 수학실력과 과학실력을 현저히 떨어뜨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에 하나, 누군가가 마술지팡이를 휘둘어 인수위가 원하는 교육환경을 만들어 준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솔직히 말하면 나는 대한민국이 망한다고 생각한다. 한국 경제가 유지되는 이유는 한국인들이 한국어밖에 못 해서 다른 곳으로 도망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영어를 능통하게 구사하는 구직자들이 한국에서 직장을 잡지 못한다면, 그들은 당연히 미련없이 외국으로 나갈 것이다. 한국에서 합당한 평가를 받기 어려운 고급인력부터 먼저 그렇게 될 것이다. 그때는 삼성이 눈물 콧물 흘리며 사죄를 한다 하더라도 아무도 들은체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상상해보면, 인수위의 상상력은 나름대로 윤리적이긴 하다. 단, 국가를 위해서라기보단, 한국인 개개인들을 위해서.)
첫째 논거의 주변에 붙여 그들은 "영어 사교육을 줄여주겠다."는 주장도 덧붙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영어 사교육이 성행하는 원인은 공교육이 영어 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므로, 공교육에서 영어 교육을 강도높게 실시하면 문제는 해소될 거라는 주장이다. 우스운 얘기다. 법으로 사교육을 금지하고 학생들을 새벽까지 학교에 붙잡아 놓는다면 몰라도, (물론 이런 짓을 하면 안 된다.) 무한경쟁체제가 존재하고 공부는 하면 할수록 이득이라는 합리적인 기대가 존재하는 한 사교육은 성행할 수밖에 없다. 미션의 난이도가 높아지면 당연히 지출비용은 증가한다. 게다가 국가경쟁력 운운과 사교육 줄이겠다는 주장이 양립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만일 그들의 주장대로 영어 말하기 능력과 쓰기 능력의 배양만이 국가경쟁력 향상의 길이라면, 그 길을 지향하는 사교육 역시 전적으로 긍정되어야 한다.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국가가 지출해야 할 비용을 대신 지출하는 이들을 왜 비난한단 말인가? 그렇게 해서라도 영어만 잘하면 되지.
그래도 지금까지 얘기는 주장의 영역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둘째 논거를 검토하면 상황은 더 참담해진다. 현존하는 모든 교사를 몇년씩 해외에 연수보내는데 드는 비용은 얼마일까? 모르긴 몰라도 천문학적일 것이다. 어쩌면 우파들이 그토록 현실성 없다고 비난했던 민주노동당의 '무상의료 무상교육' 공약을 가볍게 능가할 만한 수준일 것이다. 대한민국의 실정에서 그런 일을 추진해야 하는가? 그보다 더 급한 일은 없는가? 그것만이 당장 필요하다는 사실에 모든 사람이 동의하고 있는가? 국가의 역할이 필요한 다른 일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가령 빈곤층에 대한 지원은 그런 일보다 훨씬 도덕적이고 효용성이 있다. 빈곤층의 자녀들에게도 노동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은 국가에게도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들에 대한 고민은 없이 '작은 정부'를 말하던 정부가 대운하와 교사 해외연수에 천문학적인 돈을 쓴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일까? 오늘자 동아일보 사설은 "작은 정부화 방해는 반국민적 행위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공무원 자르는 거 방해하지 말라는 얘기다. 공무원 줄이면서 혈세를 펑펑 써대면 그게 '작은 정부'가 되는 길인지 묻고 싶다. 앞서 언급했던 일반과목 영어수업을 통해 성과를 거둔 몇몇 국가들은 북유럽 국가들과 싱가포르, 즉 이른바 '큰 정부'를 가진 나라다. 국가가 세금을 많이 징수하고 그 세금을 통해 정책을 펼치는 것이 자연스러운 나라들이다. 그런 국가들의 정책을 모방하려면 적어도 '작은 정부'니 뭐니 하는 소리는 집어치워야 하고 그들 국가가 국민들의 생활을 어떻게 보살피고 있는지도 참조해야 한다. 참여정부의 소소한 복지예산 증가를 문제삼던 그 입으로 인수위원장의 헛소리를 비난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모든 사실을 감안하면서도, 오직 영어실력 배양만이 국가 중대사이고,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선 막대한 혈세 지출을 감수할 수 있다고 치자. 그렇더라도 정책의 순서가 잘못되었다. 인수위는 영어 시험을 손대기 전에 먼저 교사들의 해외연수를 논했어야 했다. 모든 교사들의 해외연수는 당장의 예산에는 불가능할 것이므로, 먼저 영어교사들에 대한 해외연수 방안부터 논하고 시험을 바꾸든지 했어야 했다. 정책은 그렇게 가능한 방향으로 순차적으로 가는 것이다. 무턱대고 시험부터 바꾸면 당연히 사교육이 성행하고, 이미 사적으로 돈을 쓰고 있는데 정부가 세금을 쓰는 것을 납득할 리 없다. 이 대목만 보면 인수위가 처음부터 생각을 하고 정책을 내놓는 것인지 이미 뱉어놓은 말을 수습하기 위해 다음 말을 내뱉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하지만 인수위의 주장을 그저 성토만 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은 아닐 것이다. 인수위의 정책이 갈팡질팡하는 데에는 사람들이 교육정책에 요구하는 바가 분명하지 않다는 사실에도 하나의 이유가 있다. 사실 사람들의 바램은 모순된다. 그들은 이명박에게 성장제일주의를 바라고, 또한 서민층을 보듬아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런 모순된 욕망은 충족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합리적 문제해결 방식이 부족한 곳에서 우리는 좌파니 우파니를 따지기 전에 말이 되는 소리를 추구해야 할 것 같다.
앞에서 충분히 증명된 것과 같이 인수위가 교육정책에 설정한 목표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1) 국가경쟁력 향상 2) 사교육비 경감이다. 비록 우선순위의 차이는 있었을지라도, 참여정부 역시 이와 비슷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1)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나는 이 문제에 대답할 수 있는 식견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현재 한국의 국가경쟁력의 문제가 과연 교육개혁을 통해 극복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우석훈과 박권일의 <88만원 세대>와 <샌드위치위기론은 허구다>가 이 문제와 관련된 생각을 하게 해주었으니, 그들의 다음 작업을 기다릴 뿐이다.) 2)의 문제가 과연 큰틀에서의 대입제도 변경을 통해 극복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나는 사교육비 문제는 마땅히 계층적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사교육을 실시할 형편이 못 되는 빈곤층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 사교육을 받지 않고 자란 학생의 노동자로서의 능력이 사교육을 받고 자란 이들과 너무 벌어지지 않도록 국가 권력이 공교육을 조직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겨우 겨우 사교육을 따라가고 있는 중하층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 이들 계층은 어떤 부분에서 자녀의 사교육비를 지출하고 있는지를 따져보고, 그들의 부담을 덜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아마 태권도나 피아노 학원의 부담이 경감되면 그들은 다음으로 영어학원을 찾을 지도 모른다. 사교육비 자체는 줄어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그들의 계층적 위치는 상승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교육을 통한 신분상승의 욕망이 다른 어느 사회보다 강한 한국 사회에서, 사교육 자체를 악으로 단죄해서는 문제의 해법을 찾을 수 없다. 사교육의 문제는 국민 모두에게 단일한 문제가 아니라 계층의 문제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각각의 계층별로 사교육의 양태를 분석하고 검토하여, 아래로부터 그들의 부담을 경감하는데 힘써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야 그들은 실질적인 경감이 이루어졌다고 느낄 것이다. 여기까지는 우파와 좌파의 구별도 없다. 우파들의 입장이란, 국가가 책임져야 할 것은 오직 빈곤층 뿐만이라는 것이다. 좀더 진보적인 입장이라면 빈곤층 뿐만 아니라 노동계급 전체의 교육을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식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인데, 그 책임의 정도의 문제에 있어선 물론 여러가지 입장이 있을 수 있다. 대체로 이 정도 지점에서 시작해야 우리는 정책들의 경쟁, 대중적 설득의 과정, 그리고 대중들의 합리적 선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중산층의 사교육비 지출은 우파적 시각에서 볼 때는 "자율적인 경제주체가 합리적인 선택을 통해 비용을 지출하고 있으면서도, 괴롭다고 난리를 치는 촌극"에 지나지 않는다.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았다고 환호하는 보수진영에서 사교육비 경감을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다는 사실은 눈꼴사납다. 이런 사회에선 우파도 우파가 아니고, 좌파도 좌파가 아니다. 향후 교육정책의 기조에 대해 고민하면서, 우리는 한국 사회의 담론지형도가 어떻게 일그러져 있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 [씨네21/유토디토] 누가 10대와 20대를 분리하는가 (19) | 2008/06/06 |
|---|---|
| [대학내일] 교육현장에 상륙한 ‘규제 완화’ 광풍 (3) | 2008/04/28 |
| '일반과목 영어수업'론과 교육정책의 기조에 대해 (12) | 2008/01/24 |
| [프레시안] '코리아 연방제'? '개 풀 뜯어 먹는 소리'! (2) | 2007/11/27 |
| [프레시안] "바야흐로 '구렁이들의 전쟁'이 도래했다." (29) | 2007/10/08 |
| [펌] 김구 선생이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는 시발놈들. (35) | 2007/08/14 |
| 문어체 소년의 인용구 노트 - 8 언젠가는? (1) | 2008/02/21 |
|---|---|
| [시사in] 내 인생의 책 :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36) | 2008/02/11 |
| 판타스틱 새해맞이 이벤트 (0) | 2008/01/23 |
| 헛소리에 관하여 (1) - 철학적 헛소리 (11) | 2008/01/22 |
| 문어체 소년의 인용구 노트 - 7 어떤 고아의식 (0) | 2008/01/21 |
|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 작품별 별점평 (3) | 2008/01/20 |
외국인 혐오증(Xenophobia)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것은 이른바 ‘보수언론’들이 주동하는 것도 아니고, 인터넷에서 찾아보기 쉬운 시민들의 자발적인 정서다. 언론들은 이제야 이 현상에 주목하기 시작했지만, 사실 누리꾼들의 반응을 유심히 지켜봤다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천 참사에 희생당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누리꾼들의 싸늘한 반응은 이례적인 것이 아니다.
|
| 한윤형 서울대 인문 01 (대학내일 405호) |
| [프레시안] 새로운 진보정당, 이렇게 만들자 (5) | 2008/02/18 |
|---|---|
| 레비나스라는 지젝주의자와의 덧글 논쟁 (18) | 2008/02/05 |
| [대학내일] 우려되는 외국인 혐오증 (1) | 2008/01/23 |
| [펌] 딴지일보 주대환 인터뷰 (2) | 2008/01/19 |
| 경제학자 이준구의 대운하 비판과 논쟁의 향방 (16) | 2008/01/16 |
| [펌] 정치적 소수자의 탄생, 노정태 2003/12/30 (2) | 2008/01/10 |
몇 년 전 왜 나는 키보드 워리어였던 것일까, 오늘날까지도 나는 왜 블로그를 이렇게 열심히 운영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니까 싸그리 다 합쳐서 도대체 나는 왜 이모양 이꼴로 살고 있는 것일까, 라고 묻는다면, 다른 종류의 멋지고 듣기 좋은 이유를 갖다붙일 수도 있겠지만, 결국엔 '헛소리를 참지 못하는 성질머리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나는 헛소리에 종종 신경질을 부리고 있으며, 그 신경질의 결과물을 가끔 블로그에 올린다.
하지만 그건 정말이지 광대무변한 모래사장에서 홀로 삽질을 하면서 신경질을 부리는 것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일이다. 수년 간 신경질을 부려왔음에도 불구하고 헛소리는 생기고, 또 생기고, 마치 가나안땅에 꿀 흐르듯 그칠 줄을 모른다. 그러니까 좀 더 생산성 있는 일은 헛소리를 유형별로 정리하여, 어느 듣보잡이 나타날 때마다 "넌 1번!!" "넌 4번!!!" 이런 식으로 외쳐주는 일일 것이리라. 물론 이래봤자 그들이 자기 스스로 그러한 사례에 해당됨을 결코 인정하지는 않겠지만, 대저 글로써 하는 일이라는 건 언제나 그 정도의 효용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1)이라고 붙이기만 하면 더 이상 연재가 진행되지 않았던 징크스가 있긴 하지만, 해야 할 일은 머리속에 떠오른 김에 바로 시작해야겠다.
----------------------------------------------------------------------------------------------------
먼저 나는 헛소리의 첫 유형으로 '철학적 헛소리'를 선택했다. '철학적 헛소리'라는 정의는 어떤 문제에 관해 논의할 때 철학적 논의를 끌어들이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철학의 논의는 꽤 많은 문제에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만일 어떤 이가 그 논의와 관련된 철학적 담론을 활용한다면 그건 비난받을 일이 아니며, 게다가 그 활용이 유효적절하다면 찬사를 받아 마땅할 것이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철학적 헛소리'란 그 논의가 이루어지기 위해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상식적 지반을 무시하고 근본으로 되돌아가 논의에 초를 치는 시도를 가리킨다. 이런 시도는 철학적 용어나 철학자들을 인용하면서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철학에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도 철학적 헛소리를 지껄일 수 있다. 아마 그들은 논의 전개에 무지한 사람들이거나 논의 자체를 어지럽히려는 악의를 가진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헛소리를 '메타적 헛소리'라고 칭하는 것이 더 적절했을 것이나, 좀 더 쉽게 이해받기 위해 철학적 헛소리라는 명법을 택했다.
지금까지 무슨 소리하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으셨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예시를 들어드릴 테니까. 자 여러분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더 효과적인 공부방법은 무엇인가에 대해 토의하고 있었다고 치자. 이런저런 얘기가 나오다가, 당신은 "노력은 하지 않고 시험 합격하게 해달라고 방안에 정안수 떠놓고 기원하는 행위"를 규탄 내지 경멸의 사례로 제시했다. 논의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시험을 잘 볼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당신의 잘난 척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철학적 헛소리꾼'은 곧바로 이토록 타당한 상식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커리큘럼대로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이 물 떠다놓고 비는 사람보다 시험에 더 잘 합격한다는 보장이 어디 있죠?"
이런 질문은 아무도 하지 않기 때문에 당신은 당혹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논의를 여러 사회문제로 돌려본다면, 이런 질문을 받게 되는 일도 흔하다.) 그러나 당신이 세심하고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대개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설명을 하게 될 것이다. 첫째,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더 많이 붙는다. 즉, 그 명제는 경험으로 확인될 수 있다. 둘째, 시험공부하는 내용은 시험범위 안에 있는 것이고, 시험공부에 사용되는 여러 테스트는 실제 시험과 유사한 것이다. 비슷한 것을 대비한 사람이 더 높은 점수를 받는 것은 이성적으로 당연하다. 즉, 이 명제는 인과론으로도 확인될 수 있다. 당신이 사태를 이처럼이나 간명하게 설명할 수 있을 확률도 그리 높진 않겠지만, 그래봤자 문제는 끝나는 것이 아니다. 철학적 헛소리는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을 위해 존재한다. 그는 당신의 논리적 공세에서 벗어나기 위해 두발 정도 뒤로 물러나 뒷짐지고 이렇게 답할 것이다.
"경험적 근거라구요? 아, 귀납추리겠군요. 논리학 교과서 보면 아시겠지만, 귀납추리는 정당화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과론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결국엔 인과론 역시 귀납추리를 통해 정당화되는 것에 불과하죠. 그러니까, 지금 당신이 내세운 근거들은 정당화가 안 된 신념들에 불과하고, 당신은 아직 제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에헴-."
이제 졸지에 당신은 시험공부 얘기를 하다가 인식론의 영역으로 끌려들어와 버렸다. 애초의 문제와 상관없는 영역으로 왔다는 것을 알고 무시하고 싶겠지만, 그러기엔 이런 헛소리에 휘둘리고 있다는 사실에 분이 풀리지 않는다. 당신은 귀납추리나 인과론을 우리 인간이 평소에 잘 활용해서 살고 있음을 몇 가지 적절한 예시를 통해 설명하려 들 것이다. 이렇게 했다면 분명 철학적 헛소리꾼이 바라는 만큼 멀리까지 온 것이다. 그는 다시 한번 두발 정도 뒤로 물러나 이렇게 답할 수 있다.
"지금 말씀하신 모든 것이 바로 귀납추리로군요. 귀납추리를 귀납추리를 통해 정당화하려고 하다니, 순환논증의 오류라는 건 아시겠죠? 에헴, 에헴-."
이러다보면 본래의 논의는 온데간데 없다. 지금 극단적인 사례를 제시한 것이기 때문에, 철학적 헛소리꾼의 논변의 수준이 높아져 버렸다. 사실 그의 견해는 데이비드 흄의 인과론 비판을 투박하게 요약한 것이다. 그 견해는 철학적 문제를 다루는 맥락에서는 매우 훌륭한 것이며,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러나 상식적인 문제에 대해 토론할 때엔 쓸모가 없는 말이다. 철학은 도대체 저것들이 존재하기는 하는가라는 문제부터 고민하게 되는 것이 보통인데, 그럼 꼬르륵 소리가 나서 밥한공기를 먹을 때마다 세계의 시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생각해야 한단 말인가? 손가락이 종이에 베었다면 대일밴드를 붙이면 된다. 어머니 뱃속으로 되돌아가 DNA를 수선해보자는 족속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는 없다. 그리고 우스운 얘기지만, 흄의 철학 전체를 바라보면 그는 우리가 평소에 가지고 있는 신념들이 그릇된 것이라고 규탄한 것도 아니다. 대개의 철학적 헛소리는 이처럼 단편적인 것을 맥락에서 떼어내어 특수한 것에 적용하면서 생겨난다.
저런 친구들을 만나면 밀폐된 방안에 가둬놓고 밖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좋겠다. "어이, 친구. 데이비드 흄에 따르면, 오늘 자네가 밥을 안 먹어서 배고픔을 느꼈다 하더라도, 그 인과성이 반드시 내일에도 실현되리라는 보장이 없네. 즉, 내일의 자네는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을 수가 있어. 그런 추론은 그 반대의 것에 전혀 모순되지 않아. 그러니까 그냥 참으라구. 나는 자네에게 고통을 줄 의도가 전혀 없네." 매일 아침 한번씩 이런 얘기를 들려주면 그는 매번 자신의 견해를 재확인하면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다가 언제 꺼내 주냐고? 흠, 별로 꺼내줄 생각이 없는데......
앞서 얘기했듯 이 정도의 헛소리는 그래도 정연한 편에 속한다. 한국 사회에서 쥐뿔도 모르면서 아는 척 하는 인간들에게서 자주 들을 수 있는 철학적 헛소리는 이와 같은 종류의 것이다. "훗, 니체가 이성을 작살낸지가 언젠데 아직도 이성적 추론이 어쩌구 하고 있어?" 이를테면 메타적 문제로 점프해서 논의를 거부하려는 자신의 치사한 심리를 회의주의 혹은 해체주의 철학자들의 권위를 빌려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럼 이들이 어줍잖게 철학자 이름 들먹이며 정당화하는 심리는 대체 어떤 것일까? 그것은 철학을 전혀 모르는 이들이 지껄이는 '철학적 헛소리'의 실례를 통해 확인될 수 있다.
사례 1) 이 블로그에서 가져옴
훈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 애니매이션을 보려고 해도 한 두개만 봐가지곤 진가를 모르는데..."
이런게 니 '취향'이라는 거야....^^
2007/08/30 15:49
지금 이 사람은 "다섯 편의 로맨스 드라마를 본 사람은, 한 편의 로맨스 드라마를 본 사람보다 장르에 대해 더 잘 알 확률이 높다."와 같은 성격을 가진 명제를 '취향'이라고 몰아붙이고 있다. 즉, 논쟁을 동등한 층위에서 하려고 하지 않고 (가령 왜 그게 로맨스 드라마냐는 둥. 너희들이 로맨스 드라마를 많이 봤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는둥. 너희들이 많이 봤긴 했지만, 그래도 너희들의 인식은 저열하다는 둥) 어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