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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윤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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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에 해당되는 글 31건

  1. 2008/03/31
    진중권과 함께하는 진보신당 인터넷방송 다시보기(3월30일) (1)
  2. 2008/03/29
    진보신당 왜 생겨났나? (16)
  3. 2008/03/29
    북한 문제와 중국 문제 (9)
  4. 2008/03/27
    라캉 논쟁 정리글 (2)
  5. 2008/03/25
    성공하지 못한 라캉 토벌 작전 (22)
  6. 2008/03/25
    링크 : 라깡에 대하여. 현장에서 일하는 임상심리학자의 짧은 생각 (4)
  7. 2008/03/24
    노회찬 3개 언론사 여론조사 모두 1위 (8)
  8. 2008/03/24
    뉴라이트 역사교과서 출간, 나쁜 일이기만 할까? (41)
  9. 2008/03/22
    백색의 진중권 (7)
  10. 2008/03/21
    "과학에서 인증받지 못한 정신분석학이 철학적 이론을 구성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제기에 대한 답변 - 하늘빛마야 님께 (13)

즐감하세요. 저도 아직 못 봤음.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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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진보신당의 지지를 호소하는 글은 아니다. 나는 소심한 사람으로, 선거법을 위반하려는 의사가 전혀 없다. 다만 나는 진보신당의 존재 자체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진보신당이 왜 생겨났고 어떤 당인지에 대해 약간의 정보를 전달하려고 한다.


1. 왜 민주노동당에서 떨어져 나왔나?


2004년 소위 민주노동당에서 '자주파'가 당권을 잡은 후 많은 문제가 누적되었다. 자주파의 세계관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남한에서 국가보안법 철폐와 주한미군 철수를 실현시키는 '자주적 민주정권'이 탄생하면, 이 남한 정부와 북한 정권이 연방제 통일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우리 사회의 대부분의 문제가 해소된다고 그들은 믿는다. 자주파를 북한의 의중을 대변하는 완전한 '종북주의자'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연방제 통일 방안은 북한 정권이 체제 경쟁에 나름대로 자신있을 때 만들어낸 것으로, 지금의 북한 정권은 이런 방식의 통일을 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자주파는 대선 정국에서 김대중이나 노무현 등 개혁적이라 알려진 민주화 진영의 후보에 대해 소위 '비판적 지지'를 해왔다. 그들이 대통령이 되면 국보법 철폐와 주한미군 철수가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 기대가 좌절되자 그들은 대거 민주노동당에 입당하여, 민주노동당 집권을 통해 자신들의 꿈을 실현하려고 했다.


자주파가 아닌 사람들은 이들이 대중정당에서 운동을 하면 무언가 바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거기에서 멈춰 있었고,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진출하는 소득을 거둔 이후 적극적으로 민생정치를 펼치는데 큰 장애가 되었다. 가령 이들에겐 국가보안법 철폐가 그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당 예산의 대부분을 거기에 쏟아부으면서 다른 문제는 외면했다. 국가보조금까지 받는 정당이었던 민주노동당의 재정이 날로 악화되었다.


열린우리당이 소위 4대 개혁입법에만 신경을 쓰고 사회경제적 문제에선 한나라당과 다를 바 없는 태도를 취하여 지지를 잃어 가고 있던 그 상황에서 민주노동당 역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좀 더 과격하게 열린우리당의 노선을 표방하는 것으로 인지되었고, 의미있는 세력으로 국민에게 각인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일심회 사건'이라는 것이 터졌다. 민주노동당의 주요 간부에 대한 정보를 어느 자주파 활동가가 북한에 넘겼다는 사실이 밝혀진 사건이었다. 민주노동당의 친북성향에 대한 세간의 의구심이 증폭되었고, 자성과 혁신의 목소리가 일어났지만, 2007년 대선 후보 경선에서 자주파들은 '코리아 연방 공화국'을 내세운 권영길 후보를 대선 3수생으로 선출했다. 권영길 의원은 원래 자주파는 아니었지만, 이때엔 자주파의 지지를 얻어 당선되었다.


2007년 대선에서 2002년 대선만큼의 지지율도 얻지 못하는 '참패'를 기록하자, 당내에서 혁신을 말하는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자주파 노선에 대한 비판과, 일심회 사건에 연루된 당원에 대한 징계 요구가 이어지면서, 조승수 전 의원을 비롯한 일부 당원들이 탈당하기 시작했다. 심상정 의원은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선임되어 민주노동당을 개혁하려고 했지만, 일심회 사건 연루자 제명 등의 내용을 담은 최소한의 수준의 당대회 안건이 자주파에 의해 부결되자 신당 창당에 합류하게 되었다.


심상정, 노회찬 전 의원을 중심으로 추가적인 탈당자들이 나와서 기존의 탈당자들과 함께 '진보신당 연대회의'라는 것을 결성하게 되었다.



2. 왜 진보신당이란 당명을 채택했나?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현재 진보신당의 정식명칭은 '진보신당 연대회의'다. 민주노동당 분당 사태 이후 1만 5천명이 넘는 당원이 탈당했으되, 그중에서 8천명 가량의 당원이 진보신당에 입당했다. 진보신당은 아직 당 체제와 당 강령을 완전히 확정짓지 못한 상태다. 총선에 너무 임박한 상태에서 갈라져 나왔기 때문에, 창당 당원 사이에 충분한 토론의 기회를 가질 수 없었고, 바로 총선 정국에 뛰어들어야 했다. 심상정 전 의원 등 당 지도부는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총선 전 진보신당의 필요성을 느끼는 이들이 1차적으로 창당하고, 총선 후 민주적 논의를 통해 창당의 절차를 마무리 짓자는 2단계 창당론을 제시했다. 현재 진보신당 연대회의는 1단계 창당만 진행되어, 총선에 임하고 있는 상황이다.


서민 경제의 문제를 끌어안는 진보정당의 가치는 표명했으되, 구체적인 체제와 강령, 당명 등은 총선 후에 완전히 결정될 것이다.



3. 그들은 왜 진보신당이 필요하다 생각하나?


한나라당과 통합민주당의 경제적 이념이 동일하다고 보고 있고, 이 문제에 대해 기존의 민주노동당이 올바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경제는 누가 해도 똑같다."라고 말한 바 있고, 이명박 정권의 경제 브레인인 이한구 역시 "참여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버려서 (경제정책에서) 그다지 쓸 수 있는 카드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한나라당과 통합민주당이 대북정책과 일부 정치적인 문제에서 차이가 있고 반목할지라도, 경제 문제에서는 대동소이하다는 의미다. 그런 결과로 경제성장과는 상관없이 서민들의 생활은 점점 더 힘들어져만 가고 있다고 진보신당 사람들은 생각한다.


민주노동당이 이런 문제에 대해 적극 대응해야 했으나, 앞서 언급했듯 자주파들의 세계관을 따라 국보법 철폐 등의 문제에만 지나치게 강경대응함으로서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사람들은 이명박을 지지해서 대통령으로 만들었지만, 금세 지지율의 거품이 꺼지고 있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누구에게도 온전한 신뢰를 보내지 못한다. 민주주의적 의사결정이 서민들의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는 것이다. 이 믿음이 완전히 사라진다면 한국 사회는 정치적인 것에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 매우 낙후한 국가가 될 것이다. 진보신당은 민생 정치에 대한 요구를 정치권에 끌어들이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하려 한다. 비록 당장은 조직도 부족하고 역량도 부족할 수 있지만,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진보신당은 그외에도 민주노동당 시절 많이 챙기지 못했던 생태 문제와 여러 종류의 소수자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다. 평등 / 생태/ 평화 / 연대 라는 구호는 이런 맥락에서 배출되었다.




4. 어떤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나?


앞서 언급된 것처럼 2004년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당선된 후 우수한 의정활동을 벌인 노회찬, 심상정 전 의원이 주도적이다. 홍보대사로 <말죽거리 잔혹사>에 출연한 영화배우 김부선, 문화평론가 진중권, 영화감독 변영주, 박찬욱, 임순례, <불멸의 이순신>의 소설가 김탁환 등이 활동하고 있다. 영화계와 지식인들은 별도의 지지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서른 네명의 지역구 후보가 출마한 가운데 노원병에서 한나라당 홍정욱 후보에게 박빙 우세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노회찬 후보의 선거운동 현장에는 영화배우 박중훈과 가수 하리수가 도움을 주고 있고, 고양 덕양갑에서 한나라당 후보에 맞서 선전하고 있는 심상정 후보를 영화배우 문소리가 적극 지지하고 있다. 비례대표 후보는 11명인데 1번에 장애인 여성 운동가 박영희, 2번에 이랜드노조의 이남신이 선출되었다.  





진보신당연대회의 홈페이지 에서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성명/논평이나 정책 공약 해설 등의 자료를 통해 어떤 성격의 당인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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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분단론'은 답이 아니다



위 글을 쓴 노정태와 나의 문제인식은 공유가 되는 지점이 있다. 노정태는 첫째, 현재의 상황이 이어질 경우 북한 정권이 붕괴될 때 북한의 영토와 인구는 중국에 편입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 지적하고 있다. 둘째, 티벳 사태에서 보듯이 중국의 소수민족 지배는 그리 관대하지 않으므로, 민족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인권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이 가능성이 실현되는 것은 북한 주민에게 손해가 되는 일이다. 셋째, 노정태가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이 가능성이 실현될 경우 남한의 국가발전이나 장래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동북공정과 같은 중국의 작업들은, 한반도 북부에 대한 역사적 영유권을 주장하려는 그들의 정치적 의도와 맞물려 있다. 그러므로 이른바 ‘중국 문제’는 한국인들에게는 코 앞에 닥친 문제인데, 대다수의 시민들이 이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거나 알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 큰 문제다. 노정태는 진보진영이 이 문제에 대응하는 잘못된 방식으로 ‘영구분단론’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노정태가 말한 ‘영구분단론’이 나도 주장한 적 있는 “북한을 별도의 외국으로 인정하자.”는 논변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이 주장을 지칭하는 적당한 이름이라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북한을 별도의 외국으로 인정하자는 (나를 포함한) 사람들이 (노정태가 요약했듯) '아, 몰라 씨바, 그냥 지들끼리 알아서 하게 냅둬!'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좌파들이 중국 문제에 관한 한 대응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나 정치적 행위에 대한 로드맵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노정태의 지적은 옳다. 국가를 운영하는 일은 아직도 좌파들에게 너무 먼 문제이기 때문에, 수권정당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평화 애호라는 추상적인 접근에 만족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하여 진보신당은 남북한 상호 군축을 전망으로 내세우는 것 같고, “대북정책은 남한 자본의 북한 내부 식민지화를 의도하고 있다.”는 박권일의 분석이 햇볕정책에 대한 비판적인 접근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나마 이런 말도 많이 들리는 건 아니다. 우석훈 박사의 대안경제 시리즈 3권이 동북아 삼국의 제국주의 문제에 대해 어떤 식으로 접근하고 있을지 기대하고 있다.) 이런 접근이나 분석이 틀린 건 아니지만, 현실정치에서는 하나의 문제에 직면한다. 남한의 내부식민지가 될 것이냐, 중화제국의 소수민족이 될 것이냐라는 선택지가 주어져 있다면 어느 쪽이 북한 주민의 행복에 도움이 될 것이냐라는 문제가 남기 때문이다. 물론 이 문제를 걱정하는 나같은 이들은 당연히 전자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부식민지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좀 한가하게 들리기도 한다.


철없는 좌파를 철든 우파가 다독이면서 나아가는 게 성숙한 국가일진대,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자신들이 애국자라 주장하는 극우파들조차 이 문제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는 것 같다는 것이 문제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비전없음’을 ‘실용주의’라는 이름으로 치장하는 수준이고, 일관성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한국 극우파의 영혼이신 조갑제옹 마저도 이런 국가적 위기상황에 대한 이해가 있는 것 같진 않다. 추측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이 문제를 어렴풋하게라도 인정하고 나름의 방책을 강구해 나간 건 참여정부 뿐인 것 같다.


참여정부는 밀리터리 매니아들이 “희망의 군국주의자 노무현!”이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낼 만큼 군비확장에 힘을 써 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민주당 후보 경선 시절 주장한 공약 중에 “통일 후에도 군비확장”이라는, 다소 무시무시한 공약이 삽입되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이 아무 의도없이 그냥 생긴 일은 아닌 것 같다. 국방 문제에 대한 자료가 없는 나로선 추정에 불과하지만, 전시 작통권 인수마저도 한미 관계 재정립보다는 군비확장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 정도다. 굳이 끝까지 선의적 해석을 밀고 나가보자면, 내가 경제적으로는 그렇게 반대했던 한미 FTA 역시 중국에 복속되지 않기 위한 주체적인(?) 친미 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 실제로 어떤 일본언론들은 한미 FTA가 미국과의 친목을 통해 중국에 대항하는 원교근공의 정치전략이라는 나름의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참여정부의 대안은 승인될 수도 있고 부인될 수도 있는데, (나의 경우 일부는 승인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한미 FTA는 아니라는 쪽이고) 어쨌든 그들이 북한 문제를 넘어선 외교문제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하나의 관점(그 정확한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인정받아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참여정부의 모든 군비확장이 북한을 핑계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또 하나의 포인트다. 이것이 중국 문제에 관한 논의를 어렵게 만드는 점인데, 왜냐하면 한국인들이 그것을 인지하고 있다는 말을 꺼내는 순간 미국보다도 되바라진 어느 예약된 초강대국을 심각하게 자극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분명 이 문제를 알아야 하지만, 정부나 주요 언론 차원에서 심각하게 공론화해서는 안 된다는 하나의 딜레마가 존재한다. 이 딜레마를 깨닫는 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이렇기 때문에 논의가 없는 상황을 단순히 우리 모두의 멍청함 탓으로 돌리기도 어렵다.


나는 국방 문제 뿐 아니라 외교 문제에 대해서도 자료를 찾아보는 식의 공부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서부터는 추정에 입각해서 말할 터이니 혹시 잘못된 부분이 발견된다면 지적해 주길 바란다. 이 상황에서 문제의 핵심은 북한 정권이 내부요인에 의해 붕괴할 경우 중국군이 곧바로 압록강을 건너서 넘어올 수 있다는 데에 있는 것 같다. 아마 중국과 북한 사이엔 군사동맹이 존재할 것이고, 이 동맹은 정권 사이에 맺어진 것인 만큼, 미국과 남한의 침공이 아니라 내부요인에 의해 북한 정권이 위험해 지더라도 중국군은 북한 정권을 구원하기 위해 국경을 넘어올 수 있다는 유권해석을 스스로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만일 북한 지역을 중국에 송두리째 넘기고 싶지 않다면 이때에 대한민국 군대 역시 즉각적으로 휴전선을 넘어 가야 한다는 것, 그러면서도 중국과의 군사적 충돌은 절대로 피해야 한다는 것이 이 문제의 어려움이다. 그리고 대한민국 군대가 휴전선을 넘어갈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가 여기서 핵심이다.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한반도 전체가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규정한 헌법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규정 역시 국제적으로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UN 동시 가입 이후 국제사회는 남북한을 사실상 두 개의 국가로 취급해 왔기 때문이다. 헌법의 규정은 다만 대한민국 군대가 휴전선을 넘어가기 위한 핑계가 될 수 있을 뿐이며, 그러다가 대동강 정도에서 중국 군대와 마주쳤을 때, 중국과 남한은 지리한 외교적 공방을 계속하다 서로를 설득하지 못하고 자국 군대가 장악한 지역에 대해서만 실효적 지배를 시작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 라인이야말로 바로 통일신라의 강역이다. 고구려사를 한국사로부터 떼어 냈을 때 중국이 얻고자 하는 실리는 바로 이런 종류의 것이라 볼 수 있다. 북한에 대한 권리가 한국에 있음을 주장하는 논거가 좀 더 튼실하더라도, 중국의 국가적 힘이 한국을 훨씬 능가하는 만큼 외교만으로 중국 군대를 물릴 수는 없을 것이다. 중국의 입장에서 조선족과 몽고족은 중국의 바깥에서 독립국을 가지고 있는 유이한 종족이다. 이들에 대한 중국의 통치를 확고히 하는 것은 50여개 소수민족을 감싸야 하는 중국 공산당의 입장에선 필수적인 일이다. 그들에게 북한 문제는 외교 문제가 아니라 (티벳 문제와 마찬가지로) 내치의 문제일 수 있다. 쉽사리 물러서지 않을 거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미국의 경우 물론 친미국가인 대한민국이 북한 지역을 접수하는 것을 원하긴 하겠지만, 그 갈망이 어느 정도일지,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해 중국과 어느 정도 불화할 수 있다고 여길지를 추정하긴 어렵다. 섣부른 낙관은 금물이다.

노정태의 주장은, 언급되지 않은 부분까지 추려서 말하자면, 이런 경우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데 북한을 별도의 외국으로 인정하는 조처는 사실상 자해공갈이 아니겠느냐는 의미인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조처가 중국 문제와 북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는 질의인 듯하다. 통일이 아니라 분단체제 해체를 추구하는 (이러한 폭넓은 흐름 역시 요샌 ‘통일론’의 일환으로 생각한다는 프레시안 황준호 기자의 지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노정태가 제기한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문제를 ‘북한 외국 인정론자’들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한 동시에 그 조처 자체가 가지는 유익함이 크다고 생각한다.


중국이 북한에 개입할 수 있는 근거가 군사동맹 때문이라면, 대한민국 역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새로운 외교관계를 맺음에 있어 군사동맹을 체결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어떤 수준의 군사동맹 없이 그저 북한을 외국으로만 인정하는 외교관계는 나 역시 반대할 것이며, 사실 북한과 외교관계를 맺으려는 큰 목적 중 하나가 군사적 긴장관계 해소인 만큼 그런 것을 추구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 북한을 별도의 외국으로 인정하는 외교관계 확립으로 인해 남한이 얻게 될 이득은 무엇인가? 일단 앞서 상정한 중국군이 남진하고 한국군이 북진하는 상황은, 그 상황에 닥친다면 주저없이 내려야 할 판단이지만, 되도록 피해가려고 노력해야 하는 상황이란 사실이 지적되어야 한다. 추구되어야 할 것은 북한 정권을 인민의 복지에 좀 더 노력하게 만들고, 점진적으로 대한민국에 친화적인 방향으로 끌고 나가는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목적을 위한 노력 중 큰 부분이 북한과 남한 모두에게 내재화된 ‘통일’이라는 목표에 대한 강박을 넘어서는 일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지금의 북한 정권은 통일을 원할 수가 없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다시 자주파의 통일관으로 돌아가 보자. 그들은 남한 지역에 국가보안법 철폐와 주한미군 철수를 실현하는 ‘자주적 민주정부’가 들어서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함께 연방제 통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북한이 과거에, 남한과의 체제경쟁에 자신이 있었을 때 체계화한 주장이다. 지금의 북한은 자주파의 환상 속에 있는 ‘강성대국’이 아니다. 이 점은 북한 당국자들 자신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통일에 대한 강조는 체제 유지의 가능성에 대한 북한 권력자들의 신념을 약화시킨다. 남한에 북한을 붕괴시킬 의도가 없음을 다른 방식으로 각인시켜도 되지 않겠느냐는 반론이 가능하지만, 김정일 방북시 한국군은 체포 구금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을 심심찮게 하는 월간조선 등의 극우파가 일정 부분 있는 이상, 정치적인 설득만으로는 북한의 두려움을 없애기엔 역부족이란 게 내 생각이다. 당장 이명박 정부가 90년대의 비핵화 선언에만 의미를 부여하고 두 번의 정상회담의 합의문은 서서히 무시하려고 하는 것이 현실이다. 정부 차원의 외교관계 확립을 통해 실질적인 문서를 통한 보증이 필요하다. 


비슷한 보증을 다른 방식으로 할 수 있겠다고 말한다면 그런 입장도 수용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 방향이 어쩌면 수십 년에 이르는 장기과제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두 주권국 간의 외교관계보다 확실하고 깔끔한 방안이 있을 지는 의문이다.


물론 북한 문제와 중국 문제는 단지 이러한 접근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차세대 초강대국의 압력을 약간이라도 벗어날 수 있는 외교적 수단의 강구가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미일 동맹은 하나의 유효한 방책이지만, 극우파들이 선점하고 있다는 문제가 있고, 일본과는 역사 문제가 걸려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소파 개정의 필요성과는 별도로 주한미군 철수라는 정책 주장이 과연 한국의 자주성을 증진시키는 것인지에 대한 정당한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게다가 장기적으로 볼 때 쇠락하는 제국과의 동맹을 통해 떠오르는 제국에 대항하는 것이 그것만으로 유효한 보증책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가스배관망 등을 통해 러시아와 자원적으로 연결이 되고 유럽과도 육로로 교통할 수 있는 방안이 확립되면 한국이 다원적인 세계 질서에 편입되어 운신의 폭이 넓어질 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국측이 이 상황을 방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문제도 있다.


여러모로 이 문제는 어려운 문제이며 다음 세대에 한국이 이 문제를 잘 풀지 못할 가능성도 높지만, (이 경우엔 중국의 패권 아래에서 어느 정도의 독립성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가 새로운 문제로 대두될 것이다.) 북한을 별도의 외국으로 인정하면서 분단체제를 해소하는 외교 관계의 확립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안 중 하나 정도는 된다. 노정태가 언급한 영구분단론에 대한 비판이 이 방안에 대한 적절한 비판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앞에서도 지적했듯 나는 스스로의 게으름과 문제 자체의 어려움 때문에 외교와 국방의 구체적인 정황에 대한 데이터를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 논의의 후반부는 다소 소설처럼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침 노정태가 사람들의 관심사에서 벗어나 있는 이 문제에 대해 언급을 했으니 생각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이 게시물을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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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라캉 이론에서 무의식의 개념


하늘빛마야 님이 제기했던 질문에 대해 다시 답변하면서 시작해보자. 라캉 이론에서의 무의식도 경험적으로 검증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렇지가 않다. 무의식 개념 자체가 경험적으로 정의되지 않는 것이 라캉 이론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의식에 포착된 순간 더 이상 무의식일 수가 없다. 정신분석학의 옹호자들은 (적어도 책을 쓰는 인간들은) 애초에 “정신분석학은 과학이 아니다.”라고 단언하고 시작한다. 원래 무의식이 과학주의적으로 옹호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어떤 기구를 통해 각 주체 속에서 진행되는 생리적 과정을 포착해 낸다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의식에 포섭된 것으로 간주된다. 이런 언급에서는 개인의 인식의 차원과 인간 종족 일반의 인식의 차원의 구별을 대충 뭉개버렸다는 느낌도 들지만 하여간 그들의 설명이 그렇다. 말하자면 “주체가 관찰의 대상이 되면 주체를 매개로 주체를 관찰한다는 역설적인 상황에 빠지게 되고 만다.”는 것인데, 이는 훗설이 <시간 의식>에서 부딪혔던 ‘자기 의식의 난제’에 정확하게 상응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무의식의 개념은 마치 칸트의 사물 자체나 라캉 본인의 실재와 같은, 논의의 시작에서 가정된 사변적인 개념이 된다. 라캉 본인의 말을 들어보자.


“무의식은 불가능한 것으로 자신을 제시함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는 지식을 지칭하는 은유적 용어일 뿐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실재임이 밝혀진다.”


구성된 주체가 인간 전체를 대변하지 않다는 것, 그 단순한 진실에서 라캉은 무의식의 개념을 추출했다. 라캉은 “정신분석학이 다루는 주체는 과학적 주체이다.”라고 말한 적도 있다. 말하자면 그의 주체 이론은 과학적 담론이 성립하기 전의 조건들을 다루고 있는 건데, 그러므로 애초에 과학적인 검증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처음부터 정신분석학의 포지션이 이런데도 “그것은 과학이 아니다.”는 선언이 비장하게 흘러나오는 것은 철저한 무지의 산물이라 봐야 할 것이다.


나는 “당신들은 라캉의 무의식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논의를 전개하고 있어!”라고 아이추판다 님과 하늘빛마야 님에게 말한 적이 없다. 라캉의 무의식 개념이 상식인이 꼭 알아야 할 것도 아닐뿐더러, 이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인지도 의문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라캉이 이미 철학의 영토에 들어선 사람이니 이 구역을 크게 침범하지 않으려면 임상의 효과만으로 그의 이론을 부인할 수 있다는 주장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썼다. 하지만 노정태의 심각한 오해와 그로 인한 논의 전개를 보고 있자니, 내가 잘못된 방식을 택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실험 데이터로 반증도 불가능한 저 따위 포지션을 지니고 있다니! 아 쇳스러워. 근데 왜 저렇게 저딴걸 신뢰하는 사람들이 많은 거지?!”라고 어느 과학도가 외친다면, 나는 그냥 쓰윽 웃고 지나갈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그건 노정태가 훗설에 대해 설명하면서 말했듯이 관념론이란 게 원래 그렇다. 믿으면 계속 믿는 대로 보이고 안 믿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그러므로 과학도들은 라캉을 무시해도 된다. 내가 성질을 부리고 있는 부분은 단 하나, “정신분석학은 과학으로 반증될 수 있고, 그 경우 당연히 (정신분석학 이론의) 철학적인 부분 역시 무너진다.”는 그 신념이다.



2. 훗설도 똑같다.


그러므로 “라캉주의를 제외한 현대 대륙철학의 상당수는 과학적인 검증의 대상이 아니거나 되지 않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여왔다고 봐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라는 노정태의 말은 완벽한 오해이다. 나는 노정태가 라캉에 대해 이 정도의 사실도 모르는 줄은 몰랐다. 과학도들과 달리, 천 권의 책을 독파하고 최근 철학과 대학원에 들어간 노정태는 철학계에서 꽤나 유명한 철학자를 아주 초보적인 수준의 이해도 없이 신나게 조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변명할 입장에 처해 있지 않다. 반성하기 바란다.


“그렇다면 "당신들의 얘기가 일관성을 갖추려면 심리학의 발전이 데카르트에서 훗설까지의 철학자들의 논법을 격파했다고 주장해야 한다"는 말은 대체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노정태는 이렇게 물었다. 말 그대로의 의미다. 그냥 님하가 라캉을 몰라서 내 말을 다르게 알아들은 거다. 훗설이 과학적으로 반증될 수 없는 영혼으로부터 얘기를 시작했으니 심리학으로 반증될 수 없다면, 과학적으로 반증될 수 없는 무의식으로부터 주체 이론을 끌어내는 라캉도 당연히 과학적으로 반증될 수 없다. 물론 아이추판다 님은 지금 무의식도 우리가 탐사해서 밝혀낼 수 있다는 자료를 정리하기 위해 열심이시겠지만, 라캉 이론에서는 개념적 정의로 그런 접근을 거부한다. 그렇게 밝혀지면 무의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상학과 정신분석학 이 양자 사이에서 차이를 찾는다면 영혼은 하나의 비과학적인 실체인 반면 무의식은 실체가 되기도 거부한다는 것일 게다.


요약하자면, 우리의 노이디푸스는 자신이 실컷 옹호한 아이추판다 님의 견해를 털어버리기 위해 맹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며칠 전부터 이 결말 알고 있었다. (‘안다고 가정된 주체’질을 괜히 하는 게 아니다.) 그렇긴 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내가 현상학을 잘 모르기도 했기 때문에, 나는 그가 현상학의 구체적인 부분에서 심리학의 성과를 반영하면서 철학적 접근을 시도한 부분을 지적하면서 정신분석학과의 차이를 규명할 줄 알았다. 그래서 그게 지도교수와 협의할 일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저 정도의 얘기는, 그냥 술먹으면서 나한테 했다가 쫑코 먹어도 된다.


“대륙철학의 이론적 체계 중에서 현대의 심리학 데이터를 반영해야 하는 부분이 어디이고 데이터와 상관없는 부분이 어디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그 자체로 난해한 철학적 문제일 것 같다. 아마 그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가 시작된다 해도 철학자마다 견해가 다를 것이다.”


라는 나의 코멘트에 대해, 노정태는 바로 그 지점을 스스로 탐구하고 있지 않다고 나보고 철학도도 아니라고 말하는데, 사실 내가 헐겁게 공부하는 건 사실이니 철학도 아니라고 치자. 그런데 노정태도 말했듯이 그 문제는 철학자들이 알아서 방어 논리 잘 만들어 놓지 않았을까? 과학의 시대가 개막된 게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닌데. 내가 대륙철학 운운한 건 대륙철학이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그네들의 논변이 얼마나 허접한지를 까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천권의 책을 읽은 철학도가 이 조크를 듣고 철학의 미래를 걱정하다가 훗설의 ‘영혼!’ 한마디를 듣고 안도감에 잠이 들었다니 막 내가 죄책감이 느껴지려고 한다. 철학자들을 그보다 더 신뢰해도 된다. 담대함을, 보다 담대함을! 


가령 이런 얘기다. 훗설의 이론은 영혼에 관한 것이라고 하자 어떤 이는 그걸로 영혼의 병을 치유할 수 있냐고 묻는다. 데이터를 내놓으라고 떼를 쓴다. 인문대생인 나는 그런 데이터가 있는지 없는지 관심도 없는데 말이다. 그러다가 데이터가 없으니 과학이 아니라고 한다. 당연히 훗설은 과학이 아니지,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래도 나는 참을성을 가지고 영혼의 병을 치유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 이론의 경험적 정당성이 확립되겠지만, 치유가 안 된다 해서 그 이론이 오류라고는 볼 수 없다는 당연한 얘기를 한다. 그러자 누군가는 “그래요. 치유율이 전부는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다른 과학적 증거를 대셔야죠?”라고 말한다. 내적 성찰과 사변으로 만든 이론을 어떻게 경험적으로 반증하냐고 했더니 한 쪽에선 “어머 인문대생들은 사변만으로 이론을 만드셨어요?”라고 비웃고 다른 한 쪽에선 “성찰? 아, 내성 심리학? 내성을 믿지 마세요.”라고 말한다. “그거 다 돈 들이면 반증할 수 있어요. 그런데 돈 대줄 거에요? 양심이 있어야지.”란다. (노파심에서 말하는데, 정신분석학 이론의 ‘어떤’ 부분은 과학적 검증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종류의 것일 수도 있고, 그것이 반증된 사례가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까지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수준의 얘기가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반복된다. 지겨워 미치겠다. 그런데 노정태는 왜 이런 상황을 보고 내게 화를 내는 걸까?


아마 노정태는 이 비유에 동의 안 하겠지? 라캉 이론은 이미 철학이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라캉은 임상으로 출발했으니 우리가 털어버릴 수 있고 나머지 철학자는 알 바 아니라는 게 그들의 입장이다. 그리고 노정태도 이에 동조하는 듯 싶다. 정신분석학이 이미 프로이트로부터 단순히 신경증 환자를 치료하려는 임상학이 아니라 정상적인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정신학을 의도했다는 사실은 더 말하기도 귀찮다. 그런데 노정태는 그 사실은 알고 있나? 현상학과 정신분석학은 상호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학문이라는 사실을. 초기 훗설은 정신분석학을 현상학에 흡수하고자 했고, 후기 훗설은 현상학과 정신분석학을 결합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훗설은 프로이트에서 막대한 영향을 받았고, 라캉은 훗설에게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훗설의 이론에도 프로이트가 분석한 임상자료가 경험적으로 깔려 있는 셈이고, 라캉의 이론에도 훗설의 흔적이 남아 있는 셈이다. 아이추판다 님이 황우석급 사기극이라 비웃은 라캉의 거울 단계 이론에 거의 상응하는 구절이 훗설에게서도 보인다. 라캉은 털려도 되는데 훗설은 털리면 안 되는 이유를 서술한다면 그야말로 페이퍼 감이다. 나는 솔직히 노정태가 이 모든 사실을 알고, 그 정도는 쓰고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그건 너무 어려운 문제니 이런 블로그 논쟁에 끼지 말고 지도교수와 상담하라고 했던 거다.  


출발이 과학적으로 반증될 수 없는 영혼이라도, 무의식이라도, 구체적인 이론 전개에서는 심리학적 탐구를 수용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통약불가능한 언어를 핑계로 소통을 게을리 한다면 대륙철학의 생명력은 쇠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내 상식적인 의문인 것이고, 과문한 탓인지 그런 작업을 하고 있는 자료를 본 일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심리학과 면밀한 관련이 있는 미국 심리철학만을 쓸모 있는 철학이라 인정하는 것은 너무 극단적인 견해일 것이다. 더더구나 분석철학자들도 ‘논리적으로는’ 대륙철학을 털어버릴 수 없어 “에이 니들은 그냥 그렇게 살아...”하고 있는 형국에 과학도들이 과학의 방법론으로 라캉을 털어버릴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희극적인 일이다.


정리를 하자면 이렇다. 라캉 이론이 임상에서 별 쓸모가 없다는 얘기는 심리학 전공자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얘기다. 그야 데이터로 말하면 되는 거니까. 데이터가 라캉에게 유리하지 않으니까. 이 사실은 나 역시 애저녁에 인정했는데, 내 논적들은 이 사실에서 곧바로 “라캉 사살!”이라는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다고 우겨서 논쟁이 이 지경이 된 것 아닌가? 여하튼 그것과, 그 사실을 통해 철학으로서의 라캉마저 손쉽게 부인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전혀 다른 층위의 일이다. 스스로 깨닫기를 원해서 그간 단적으로 말하진 않았는데, 그냥 툭까놓고 말하면 ‘오류’다. 진짜로 라캉을 털어버리고 싶다면 결국 라캉을 읽어야 한다. “데이터에 기반하지 않은 이론은 사기다.”라는 명제를 적용하려면 그 이론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봐야할 게 아닌가. 이 부분은 우리 과학도로선 모르는 부분이니까 패스, 하지만 이 부분은 데이터와 연관지어 생각해 봐야 하는 부분인 것 같은데? 어 그리고 좀 아닌 것 같거든? 뭐 이런 차원에서 비평을 해야지. 이 논쟁을 정리하기 위해 칸트 훗설 하이데거를 뒤적였다는 노정태도 실천적으로는 그렇게 행동한 듯 싶은데, 그러면서도 왜 읽지도 않고 라캉을 털어버릴 수 있다고 믿었던 과학도들을 옹호하는 것일까? 왜 그의 실천과 글은 불일치하는 것일까?



3. 철학은 신비주의가 아니다.


노정태도 알고 있는 모 PD님이 그저께 술을 마시다가 나더러 이 논쟁 좀 그만하라고 만류했다. 철학도 입장에서 보면 과학주의가 우습기는 하겠지만, 과학주의자들이 한국 사회에 해악을 끼칠 만큼 많다고도 볼 수 없고 오히려 황우석 사태에서 보듯 더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형국이 아니냐는 말씀이었다. 옳은 말이다. 나도 이렇게 길게 논쟁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몰랐다.


그런데도 마지막으로 긴 글을 쓰는 이유는 과학도들의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서다. 철학은 신비주의가 아니다. 철학의 역사는 오히려 신비주의에 대항해온 역사다. 몇 명 예외를 발견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큰 흐름으론 그렇다. 황우석 옹호와 같은 종교적 광신은 철학과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멀리 있다. 철학과 과학은 똑같이 ‘이론적 사유’의 우위를 말하고 있고, 태초에는 하나의 학문이 철학이란 이름으로 있었으되 인간 지성의 발전에 따라 분과 학문으로 분화되었다. 예술이나 종교가 이론적 사유를 억압하려 할 때, 합리주의의 이름으로 이론적 사유를 수호해 왔던 것은 철학이었다.


노정태는 우리 패거리에게만 전설적인 네티즌인 ‘철학공부하는 사람’의 발언을 내세워 나더러 왜 세계 지성계를 믿지 못 하냐고 한다. 세계 지성계의 판단을 신뢰하니까 이 짓을 하고 있다. 경험적 자료가 빈약하다니 라캉 임상의 효과가 별로라는 사실에 흔쾌히 동의했고, 그럼에도 수많은 철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응대하고 있으니 그래도 철학적으로는 쓸모가 있다고 했다.


논쟁 중반에 내가 좀 뻘짓을 했다. 일부는 계산된 오바였지만, 무지에 의해 계산보다도 훨씬 더 오바했다. 그런데 내가 왜 그 짓을 했을까? 빡이 돌아서였다. 라캉을 어느 사기꾼 물리학자에, 프랑스 지성계를 그 사기꾼을 인터뷰한 신동아에 비유한 아이추판다 님의 행태 때문이었다. 노정태는 내가 한국 사회의 언론의 수준에 대해 평균적인 상식인들보다는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분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근대 학문의 기본적인 규칙을 알고 있는 노정태는 답해 보라. 프랑스 철학자들은 근대 학문의 레벨에 편입되지 못할 사기꾼들인가? 그렇게 치부해도 되는가? 아이추판다 님이야 그렇게 주장하는게 당연하다. 라캉이 병신인데 당연히 라캉이랑 싸운 들뢰즈 데리다도 병신이 되어야 마땅하지. 그런데 노정태 역시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내가 아무리 무식해도 이거 하나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는데 결국엔 과학을 옹호하는 것이 철학이다. 과학과 샤머니즘을 구별해 줄 수 있는 잣대도 철학에서 나온다. 데이터와 사변이 멀리 있는 것 같겠지만, 결국엔 데이터를 수집할 때조차도 이론의 틀이 개입한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결국 과학과 비과학을 똑같이 샤머니즘의 진흙탕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아이추판다 님의 진술을 보고 내가 왜 화가 났는지를 확인했다. 철학자들을 진흙탕에 몰아 넣어 버리고 과학은 제 몸 더럽히지 않고 독야청청할 수 있을 줄 알았나? 철학자들이 샤머니스트가 될 정도면 과학은 뭐가 어떻게 되는 건데? 내 실패한 공세는 그런 거친 감정에서 시작했던 것이다. 정말 단순한 사실 몇 개만 지적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내가 충분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 논쟁이 지나치게 길어진 감이 있다. 그 점에 대해서 나도 많이 반성하고 있다. 변명도 이만하면 되었다. 나도 이 논쟁은 이제 정말로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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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듣보잡?


“각 개인의 선택을 결정할 수 있는 기준들이 없는 상황에서는 이런 식으로 훈련받은 과학자들의 집단적인 판단을 신뢰하는 것이 좋다고 나는 주장하였다.”는 쿤의 말을 토벌대장 아이추판다 님은 인용했다. 무리가 없이 받아들여지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훈련받은 심리학자들의 집단적인 판단을 받아들여 그가 라캉 정신분석을 폄하하든 말든 나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주장을 확장시켜 ‘철학에서도 논의할 가치가 없다’고 말하거나, 그렇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 논변을 전개하게 되면 문제가 달라진다. 왜냐하면 그 문제에 대해 정교하게 탐구해 보지 않은 나로서는 ‘훈련받은 철학자들의 집단적인 판단을 신뢰’하는 것 외의 방법이 없고, 그들의 판단은 라캉의 이론이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철학에서 탐구해야할 가치가 있는 이론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학문의 훈련받은 학자들의 집단적인 판단을 신뢰하며 논의하는 쌍방이 타협을 거부하고 (이 논쟁이 그닥 생산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나는 몇 차례 타협의 신호를 보냈으나 토벌대장 님은 자신의 입장이 용가리 통뼈라고 생각하는지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다.) 자신들의 의견을 견주어 보고자 한다면, 더 이상 학자의 권위에 의존하지 말고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라캉 토벌대는 그러한 근거를 제시했는가? 심리학이 이렇게 심란한 학문은 아닐텐데, 그들의 주장은 시시각각 혼란스럽게 바뀌는지라 종잡을 수가 없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그들의 주장을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정리해야 했다.



2. 실증주의의 관점에서 비판했나?


“경제학과 심리학은 모두 자연과학의 강력한 영향력 속에서 성장한 학문이지만 서로 상반되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경제학은 자연과학의 이론중심적 태도를 따르는 반면에 심리학은 실험중심적 태도를 따른다. 경제학자들은 우아한 수식과 그래프로 이뤄진 근사한 이론들을 가지게 되었고, 심리학자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 인종, 언어, 문화, 지역에서 재현되는 확고부동한 실험결과들을 가지게 되었다. 어느 쪽이 더 과학적인가는 설령 '과학주의자'라고 해도 윤형님처럼 간단히 결론짓기 어렵다. 예를 들어 이론적 반실재론자인 실증주의자들은 심리학의 손을 들어주는 편을 선택할 것이다.”


토벌대장 님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니 일단 그의 라캉 비판이 심리학을 옹호하는데 적절하다는 ‘이론적 반실재론자인 실증주의’의 관점에서 이루어졌다고 간주해 보자. (노정태 님은 의심의 여지없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 경우 토벌대장 님의 논변은 대략 다음과 같은 구조를 지니게 된다.


1) 실증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임상에서 효과가 없는 이론은 쓸모가 없다고 볼 수 있다.
2) 정신분석적 접근은 임상에서 효과를 보이는데 실패했다.
3) 정신분석학은 쓸모가 없다. 철학적으로도 검토해 볼만한 가치가 없을 만큼.


이 논증엔 크나큰 난점이 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정신분석학’을 ‘정신분석 일반’으로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프로이트, 아들러, 융의 기법을 심리학에서도 일부 차용해서 쓰는 만큼 심리학은 쓸모없는 이론을 포용하는 학문이 되고 만다. 특히 토벌대장 님은 심리학을 명백한 과학으로, 정신분석학은 명백한 사이비 학문으로 규정하는 만큼, 명백한 과학인 심리학이 명백한 사이비 학문의 방법론을 일부 포함하고 있다는 모순이 발생한다.


이상한 모자 님의 증언에 따르면, 심리학과에서 프로이트나 아들러, 융의 기법을 가르치는 과목이 있는 이유는 그들의 이론을 유달리 신뢰해서가 아니라 ‘혹시나 환자치료에 도움이 될까봐’라는 마음에서라고 한다. 아마도 이것이 ‘이론적 반실재론자인 실증주의자’가 가져야 할 태도일 것이다. 그런데 토벌대장 님의 주장을 정신분석학 일반으로 확장시키면, 그의 단호한 언명은 실증주의자의 태도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쓸모가 있다, 쓸모가 없다, 는 명제는, 과학이다, 과학이 아니다, 라는 단언에 비해 훨씬 상대적이다. 효과가 제한적이라고 해서 그것 전체를 사이비로 재단할 수 있을까? 스스로 임상심리학자라고 말씀하시는 웰던지기 님이 “치료 기법이 400개가 넘어가는 요즈음에는 치료만 잘 되면 어떤 치료적 개념도 사용할 수 있다는 통합-절충주의의 시대”이며 “정신분석치료는 치료가 안 되고, 인지행동치료는 치료율이 높다고 주장하는 건 어리석은 주장”이라고 단언하는 상황을 고려해 보면, 토벌대장 님의 주장은 이 경우에 잘 들어맞지 않는다.


그러면 그가 말하는 ‘정신분석학’을 ‘라캉학파의 이론’으로 좁혀서 생각해 보면 어떨까? 즉 심리학과에서도 잠깐 맛은 본다는 프로이트, 아들러, 융의 이론은 사이비 정신분석이 아니라고 치고, 그의 논변이 라캉 학파만 씹은 거라고 생각해 보잔 말이다.


이 경우에도 그의 논변은 모순이 된다. 왜냐하면, 실증주의자인 그는 오직 임상효과에 의해서만 이론을 판단할 수밖에 없는데, 심리학에서 듣보잡 취급해서 다루지도 않는 라캉에 대한 임상자료는 ‘제한적’이라는 기타 정신분석학의 임상자료보다도 미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듣보잡이니까 문제가 끝났다고 말한다면 다시 논점은 1로 워프를 하고 그의 대담한 주장은 시궁창에 빠진다. 순수하게 실증주의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때에 그의 라캉 비판은 제대로 자료가 나오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성급한 판단에 불과하다. 노정태 님이 했던 것처럼 왜 자료를 남기지 않는가, 라고 그들을 비판하는 것은 물론 가능하지만, 이 비판은 엄밀히 말하면 실증주의를 넘어서 있다. 실증적 자료를 도출하는 틀 안에 들어오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것 자체로 하나의 이론적 기준을 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노정태 님의 기준은 스스로 말했다시피 일종의 '태도'의 문제에 기대고 있어서, 과학철학인지 지식인의 윤리의식에 대한 규정인지 분간이 안 간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종교적인 폐쇄성은 그들 수리철학의 철학적 타당성과 별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게다가 라캉 이론이 무슨 용가리 통뼈길래 다른 정신분석학과는 특별히 구별되어야 되는지에 대해서도 납득할 만한 설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또 우리가 안 받아들였으니 듣보잡! 이라고 반응할 수도 있을 텐데 그러면 우리의 논점은 다시금 1로 존트를 하고 그의 대담한 주장은 시궁창에 빠진다. (이 논쟁이 어느 순간부터 쳇바퀴를 돌고 있는 건 사실 토벌대장 님의 주장의 본질이 논점 1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내 추측이다.)


그리고 누차 지적했듯이 '마음에 관한 이론'의 타당성을 전적으로 치료의 효율로 따지는 것이 정당한 일인지에 대한 성찰도 필요하다. 심리학을 옹호하고 정신분석학을 사이비로 치부하려는 이들은, 너무 손쉽게 자신들의 의사들의 입장에 동일시한다. 하지만 의사들의 관점에서는 심리학을 전공한 임상 심리학자나 정신분석을 전공한 심리 치료사가 얼마나 다르게 느껴질까? "의사들이 손을 떼고 전적으로 심리학 전공자들에게 환자를 맡긴다면 어떨까요?"라고 제언한다면 의사들도 "어 그건 곤란하죠."라고 반응한다(고 한다). 그런다고 심리학의 효용이 사라지는 건 아닐진데, 왜 이와 동일한 구조의 야바위를 정신분석학을 욕하는데 사용하는 걸까? 치료의 효과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태도는 의학과 구별되는 심리학의 의미를 설명하는데 실패하는 것이 아닐까?  


토벌대원들조차도 오직 임상에 의해서만 얘기하지는 않는다. (만일 그랬다면 그들은 웰던지기 님의 글을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받아들였어야 할 것이다.) 가령 토벌대장 님은 "내성을 믿지 말라."는 자신의 주장도 실증주의적이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이 경우에 이 '실증'은 이미 임상을 벗어나 방법론에 대한 검증의 영역으로 나아가 버린다. 임상에 대한 집착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이론적인 접근이 필요한 차원으로 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토벌대는, 어떤 이론적 접근으로 라캉을 분쇄하고 있는가?



3. 그러면 이론적 관점을 제시했나? 


상술했듯이 ‘이론적 반실재론자인 실증주의자’의 입장에서 토벌대의 주장을 일관되게 해석하는 것은 굉장히 난해한 일이다. (노정태 님의 주장이 논쟁 지형을 넘어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렸다고 내가 판단하는 이유는 그래서다.) 사실 토벌대장 님은 라캉은 나쁜 놈이라는 주장 이외엔, 딱히 어떤 포지션을 취하고 있지 않다. 그가 ‘이론적 반실재론자인 실증주의자’를 들먹인 건 그게 “사실 심리학도 통합된 방법론이 없는 잡학이 아니냐?”라는 내 질문에 답변하기 편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2번에서 적어놓은 모순을 진작부터 어렴풋이는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설마하니 그가 '이론적 반실재론자' 운운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내가 라캉을 적어도 심리학과 대상을 공유하는 영역에서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한 이유는 그가 심리학에서 듣보잡이고, 그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경험적 근거가 없다는 것인데 이 정도의 주장을 '과학주의'라고 부를 과학철학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의학이나 라캉 등의 정신분석학은 임상 이론으로서 제한조건을 통과하지 못하는 이상 과학외적 요소를 들먹일만한 자격도 없다.”


토벌대장 님은 거듭해서 라캉 이론을 뒷받침할 만한 경험적 근거가 없다고 말하고 있고, 어느 덧글에선 그 사실을 과학자(심리학자?)들이 검증하기도 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구체적인 과정에 대해서는 서술하고 있지 않다. "내성을 믿지 마라"에서 그가 정의하는 '내성'은 너무 폭넓어서, 뭐라 코멘트하기도 어렵다. 그가 언급하는 사례는 언어학 교양강좌에서 흔히 인용되는 것이다. 누가 그런 걸 부인할까? 여하간 "내성을 믿지 마라"고 했으니 라캉 이론을 뒷받침할 만한 경험적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려면 그는 다른 종류의 과학적 실험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서술해 달라는 나나 GT 님의 요구에 논문을 찾아보겠다고 반응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역시 그 내용을 숙지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렇다면 그는 지금 정신분석학을 사이비로 매도하는데 충분한 과학적인 관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훈련받은 과학자들의 집단적인 판단을 신뢰”하는 것에 불과하다. 다시 논점이 1로 돌아가 버리며, 그가 제시했던 대담한 주장은 또 한번 시궁창에 빠진다.


경험적 근거가 없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를 해설하든지, 아니면 과학을 구성하는 요소가 무엇 무엇인데 심리학에는 이런 이유로 그것이 잘 적용되는 데에 비해 정신분석학은 이런 이유로 그것이 잘 적용되지 않는다고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 이상, 정신분석이 사이비라는 그의 주장을 내가 받아들여야 할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다. 심지어 토벌대장 님은 후자의 설명조차 성실하게 한 일이 없다.누구에 의하면 과학의 기준이 이거네 저거네, 언급은 했지만, 그 기준을 적용시켜 '비평'을 한 일이 없다. 그러고도 그가 라캉을 토벌하고 있다고 믿었다니 놀랍지 않은가? 내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고 안 되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건 뭐가 있어야 받아들이든지 말든지 하지. 그러고도 외려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을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그들 토벌대의 논변은 ‘아직 언급하지도 않은 과학적 자료에 벌써부터 경의를 표하라고 요구하는’ 뒤틀린 권위주의에 해당할 듯 싶다.



4. 논쟁에 임하는 토벌대의 잘못된 방식


그런 권위주의를 토대로 그들이 철학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으니 정말로 우스운 일이다. 내가 “그렇게 말하면 전통철학을 다 도려내야 하는데?”라고 반응한 것은 정말로 전통철학이 다 잘려 나갈까봐 걱정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들의 논변대로 하면 사태가 그렇게 된다는 것을 지적한 것에 불과하다.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는 알아야 할 게 아닌가. 노정태 님은 혼자서 철학의 미래를 걱정하더니 이제는 그 걱정에 대한 정답을 찾았다고 희희낙락하는데, 솔직히 말해서 뭐하자는 짓인지 모르겠다. “당신은 왜 그렇게 비열하게 최장집을 털었나요?”라는 질문에 대해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우리 어디 1950년대에 이승만 노선이 옳았는지 김구 노선이 옳았는지 토론해 봅시다.”라고 반응한 왕년의 이한우를 연상시킨다. 나는 노정태 님이 그 진지한 철학적 열정을 지도교수와의 토론을 통해 해소했으면 한다. 그건 나같은 일개 학부생과 해야할 논쟁도 아니고, 이 논쟁은 철학에 대한 그의 관점과 별 상관도 없다.


느닷없이 철학적 문제를 한정지어보자고 타협안을 제시(?)하신 토벌대장 님도 웃기기는 마찬가지다. 그가 하는 말은 미국 심리철학에서 사용하는 구별법인데, 문제는 그게 대륙철학에 적용할 수 없는 기준이라는 데에 있다. 러프하게 말하면 통약불가능한 것이다. 대륙철학의 이론적 체계 중에서 현대의 심리학 데이터를 반영해야 하는 부분이 어디이고 데이터와 상관없는 부분이 어디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그 자체로 난해한 철학적 문제일 것 같다. 아마 그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가 시작된다 해도 철학자마다 견해가 다를 것이다. 그런데 내가 왜 거기에 동의해야 하는데? 거듭해서 내가 지적하는 것은, 철학자들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잘 모르는 어려운 문제를 그들이 판정해 줄 수 있다고 착각하는 그 지독한 오만이다. 철학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고, 그 단순하지 않은 학문이 과학도 지탱하고 있는 거다. “뭐 저딴 게 있어?”라고 외면하는 것은 그런대로 괜찮은데, “이렇게 복잡한 문제일 리가 없어.”라며 그들의 잣대로 후벼파는 건 정말 무식한 일이다. 


위에서 점검한 바와 같이, 끊임없이 과학이라는 주문을 되뇌이는 토벌대의 논증 방식은 과학이고 나발이고 간에 일단 논리적이지도 않다. (그들의 논변 수준을 고려해 보건대 설령 쓸만한 데이터를 손에 쥐고 있다 한들 그 데이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다.) 그들은 라캉을 토벌해야 하는 합당한 이유를 제시했는가? 제시하기는 개뿔. 그들 자신도 제시하지 못하는 과학적 판단의 권위로 논의를 단정하거나, 몇몇 인문학도들(나를 포함해서)의 잘못된 인용을 지적하기에 바빴다. 특히 토벌대장 님의 논쟁행태는 상대방이 뭐라고 주장하면 논지에 반응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발언을 부인하고 자신의 논변을 옹호하는 듯한 어떤 학자의 주장을 긁어다 붙이는 식이었는데, 이런 식의 논쟁방식은, 마치 논쟁 내용과 상관없이 맑스의 언명을 적절하게 긁어다 붙이는 걸로 싸움의 승패를 가리던 구 운동권의 대자보 논쟁의 악습을 연상시킨다. 나는 그런 식의 논쟁에 피식하는 사람이라 굳이 따지지 않았는데, 사실 라캉이 상담한 환자의 수는 1000명이 아니라 400만 명이고, 그가 언젠가 자신의 글 말미에 갖다 붙인 이안 해킹 교수는 심리학은 하드한 과학이 아니라고 말했던 사람이다. 제발 훈고학질 그만 두고 논점이나 챙기기 바란다.


지금도 GT 님의 발언을 털어버리는 걸로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인하고 있는 모양이다. 한마디로 벌쳐로 프루브 잡는 컨트롤을 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던 셈인데, 그러다가 본진에 캐리어 한 부대 뜨면 어쩌시려는 건지 모르겠다. 아머리는 지었나? 골리앗 사업은 했나? 근데 내가 왜 이런 걸 걱정해 줘야 하는 거지? 아, 클로킹 레이스가 준비되어 있다고? 라캉 이론에 대한 과학적 반증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그의 서술을 기대한다. 적어도 그쯤은 되어야 3의 관점에서 그들 토벌대의 입장을 정리하는 일이 가능할 테니까 말이다.


토벌대의 궁극적인 목표는 1) 라캉 이론을 사이비 학문으로 단정하고, 2) 그러므로 철학적 입장에서도 다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일 텐데, 2)는 고사하고 1)이나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2)는 노정태 님의 심오한(?) 고민이 보여주다시피 그 자체로 심각한 철학적 문제이니 토벌대와 논의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문제의 핵심은 차라리 1)의 문제에 대해서도 토벌대가 정합적인 관점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그들 과학도(?)들끼리 희희낙락하는 희안한 행태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링크목록 :

  1. 라캉을 모르면 막장인가효?(아이추판다)
  2. 정신분석학은 심리학이 아닌가?(아이추판다)
  3. 정신분석학과 심리학(한윤형)
  4. 라캉 논쟁에 대한 심도 깊은 대화(노정태)
  5. 일관성(아이추판다)
  6. 정신분석학과 심리학 재론(한윤형)
  7. 논쟁의 효과, 그리고 인문학과 과학(한윤형)
  8. 프로이트, 융, 라캉(아이추판다)
  9. 라캉 위에 그어진 선(아이추판다)
  10. 라캉과 정신의학, 그리고 관념론(노정태)
  11. 라캉을 읽지 않겠다 - 한국라깡학회 저널을 보고(새로운 세상)
  12. 1000명(아이추판다)
  13. 라캉적 임상 진단 및 치료(노정태)
  14. 과학학은 반과학주의인가?(아이추판다)
  15. 메타 이론, 과학, 물리주의(한윤형)
  16. 과학인 것과 과학이 아닌 것(노정태)
  17. 쿤, 과학학, 김재권, 그리고 해킹(아이추판다)
  18. 라캉과 심리학의 화해 가능성(이상한 모자)
  19. 과학과 과학이 아닌 것? - 아이추판다 님과 노정태 님에게 답변(한윤형)
  20. 과학과 철학에 대한 논쟁을 넘어(노정태)
  21. 콰인 가라사대(아이추판다)
  22. 쪼가리 : 라캉 논쟁을 보며 (하늘빛마야)
  23. 라캉 논쟁에 대한 생각 정리(한윤형)
  24. "과학에서 인증받지 못한 정신분석학이 철학적 이론을 구성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제기에 대한 답변 - 하늘빛마야 님께(한윤형)
  25. 쪼가리 : 라캉의 학문이 철학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하늘빛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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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인 웰덴지기 님은 논쟁을 싫어하신다고 합니다. 이 글에 대한 반론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다만 저는 인문학도의 입장에서 라캉 논쟁을 하던 차에, 임상심리학을 하시는 분의 견해를 보고 논쟁을 관람하시던 분들이 참고하실 만한 자료라고 생각되어 링크를 걸었습니다.

http://walden3.kr/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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