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many cuts should I rep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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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윤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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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록물'에 해당되는 글 91건

  1. 2008/05/18
    어스시의 마법사 : 그림자와의 조우 (2)
  2. 2008/04/20
    홍정욱 인터뷰와 무릎팍 도사 (8)
  3. 2008/03/27
    라캉 논쟁 정리글 (2)
  4. 2008/03/25
    성공하지 못한 라캉 토벌 작전 (22)
  5. 2008/03/21
    "과학에서 인증받지 못한 정신분석학이 철학적 이론을 구성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제기에 대한 답변 - 하늘빛마야 님께 (13)
  6. 2008/03/20
    라캉 논쟁에 대한 생각 정리 (6)
  7. 2008/03/17
    보노보 혁명: 사회적 기업이 생존할 수 있는 생태계?
  8. 2008/02/21
    문어체 소년의 인용구 노트 - 8 언젠가는? (1)
  9. 2008/02/11
    [시사in] 내 인생의 책 :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36)
  10. 2008/01/23
    판타스틱 새해맞이 이벤트
어스시의 마법사 (어스시전집1) 상세보기
어슐러 르 귄 지음 | 황금가지 펴냄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와 더불어 세계 3대 판타지 문학으로 손꼽히는 [어스시]전집 제1권 "어스시의 마법사"편. 환상 세계의 짜릿한 모험 이야기인 동시에 '자아 발견'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성장 소설인 이번 전집은 일본 애니메이션 '게드 전기-어스시의 전설'의 원작 소설이다. 마법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산골 소년 '새매'는 다른 섬의 침략자들을 물리침으로써 위대한 마법사 오지언의 제자가 되지만,


<어스시의 마법사>는 어스시전집의 주인공이라 볼 수 있는 게드가 대마법사의 명성을 얻기 전의 이야기다. 마법사의 재능을 보이게 된 게드는 '침묵의 오지언'을 스승으로 삼지만, 힘을 얻으려는 그의 호기심은 어둠을 소환할 뻔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오지언은 게드와 의논 끝에 로크의 마법사 학교에 그를 입학시키기로 결정하고, 추천서를 써준다. '바람이 옳게 불어 준다면 곤트의 마법사들 중 가장 훌륭하게 될 사람'이라 쓰여진 추천서를 들고 게드는 로크 섬에서 마법 수련을 시작한다. 그는 또래 중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이지만, 손위의 동료인 보옥과 갈등을 겪는다. 게드는 끝내 시기심과 미움에 사로잡혀 보옥 앞에서 자신의 재능을 과시하기 위해 고대의 영혼을 소환한다. 그 사건은 게드가 보옥보다 훨씬 뛰어난 마법사의 자질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지만, 그때 게드의 영혼을 좀먹는 그림자가 저쪽 세계에서 같이 소환된다. 로크를 나온 게드는 그 그림자로부터 도망다니다가, '사냥꾼을 사냥하는 사냥꾼이 되라.'는 스승 오지언의 충고를 받아들여 그림자를 사냥하러 다니기 시작하고, 마침내 그림자를 극복해 내는데 성공한다.


르 귄의 소설을 비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녀의 소설은 뭔가 어떤 종류의 인문학적 이론에 척척 들어맞을 듯한 냄새를 풍기고 있기 때문에, 섣불리 얘기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적절하게 찬사할 만한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냥 이 스토리에 맞춰 개인적인 얘기나 해보려고 한다.


나도 그림자에 시달린 적이 있었다. 2003년쯤의 이야기였는데, 그때도 나는 그것을 '그림자'라고 불렀다. 특별히 무슨 이론을 알아서는 아니었고, 먼저 그렇게 부른 후 적당히 융의 '그림자'에 끼워 맞춰보기도 했지만, 큰 수확은 없었다. 차라리 이 소설의 '그림자'에 대한 서술을 보았다면 더 쉽게 공명했을 것이다. 나는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고 살다가 갑자기 그것을 인지했기 때문에, 정말이지 깜짝 놀란 상태였다. 어떤 커다랗고 검은 여인이 문을 열고 들어오려고 하는, 그리고 그 문을 내가 필사적으로 막고 있는 꿈을 꾸었다. 그 문이 열리면 절대로 안 된다는 공포가 그 꿈 안에 있었다. 왠지 그게 꿈의 영역에만 걸쳐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아, 벌벌 떨었다. 가장 심하게 시달릴 때는 낮에도 눈만 감으면 그 환영이 보였다.


......악이야. 그것은 자네를 통해 악을 행하려고 해. 그것을 불러낸 자네의 힘이 그것에게 자네를 지배할 힘을 준 것일세. 자네는 이제 그것과 연결되어 있어. 그것은 자네 오만의 그림자이고, 자네 무지의 그림자이며, 자네가 던진 그림자일세...... (p111)


게드는 그것에 쫓기면서, 그리고 심지어 그것을 쫓으면서까지 그림자를 자신과 다른 어떤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판타지 세계에 살고 있지는 않으니까 그것에 가장 심하게 시달릴 때도 물론 그것을 내 자신의 일부로 취급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래봤자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그냥 잠이 들기가 두려워 끊임없이 술을 마셨는데, 물론 그 술값으로 병원이나 갔다면 좋았을 지도 모르지만, 그때의 나는 내 돈으로 술을 먹고 있지도 않았다.


어떤 친구는 안 그래도 자살 충동이 심한 내가 자살해 버릴까봐 걱정했다. 그건 사실과 달랐다. 남자는 싸움을 하는 도중엔 자살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상황은 내 인격을 둘러싼 그것과 나의 권력투쟁의 상황이었다. 자살은 개뿔, 나는 오기가 치솟아 방방 뛰었지만 그것은 쉽게 진압되지 않았다.


급기야 내가 가장 신뢰하던 어느 현자(판타지스럽지만 그 사람에 대해서는 이렇게 부를 수밖에 없다.)에게 조언을 하러 갔는데, '그것과 대화를 하려고 노력하라.'고 말했다. 시도해 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결정적인 성과는 없었다. 그래도 한참 고민을 해보니 그것에 나의 어떤 욕망이 베어 있는지는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다시 연애를 하게 되고, 친구들을 자주 불러모으고, 언제나 그랬듯이 술독에 빠지면서 나는 그림자를 그대로 내 안 어딘가에 존속시킨 채로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지나치게 술에 빠졌을 때쯤, 예정했던 대로 군대에 갔고 국가는 나를 건강하게 만들어 줬다. 전역 이후에는 다시 운동과 술을 병행하면서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지만, 가끔 몸과 마음이 약해질 때면, 여전히 녀석이 두렵기도 하다.


......그리고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게드는 이긴 것도 진 것도 아니며, 다만 자신의 죽음의 그림자를 자기 이름으로 이름 지음으로써 자신을 완전하게 한 것이다. 그로써 그는 한 인간이 되었다. 진정한 자아 전체를 깨달은 인간이며 자신 아닌 그 어떤 힘에 이용당하거나 지배받지 않을 사람, 살기 위하여 살며 결코 파괴나 고통이나 증오나 어둠을 섬겨 살지 않는 인간이 된 것이다......(p293-4)


게드는 나처럼 어정쩡한 타협에 머물지 않고 그림자를 사냥하여, 그것을 흡수했다. 안 겪어본 사람은 있는지도 알 수 없는 경지이며, 있다 하더라도 정말이지 범인의 레벨에선 성취할 수가 없는 경지다. 하지만 자신이 잘났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이 소년이 저런 식으로 책임감을 지닌 대마법사로 성장하는 광경을 보는 것은 매우 유쾌했다.  



한줄 요약 : 르 귄 킹왕짱. 지금 일이 조낸 쌓여 있는데도 현실도피 심리로 집에 굴러다니던 르 귄의 SF 3권을 다 읽었음. 이제 일해야지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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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홍정욱 인터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18/2008041800888.html


jiva 님이 활자로 된 조선일보 홍정욱 인터뷰를 읽더니 "뭐야 이거, 무릎팍 도사아냐?"라고 말하며 웃었다. 당연히 노회찬을 지지했던 패잔병인 나는 네이버 메인에 올라왔던 그 인터뷰를 차마 정독하지 못했지만, 그의 말에 호기심이 생겨 한번 들여다 보았다. 과연, 그랬다.


jiva 님이 지적하고 내가 동의한 부분은 이 부분.


문 : 누군들 좋아할까마는, 지는 거 너무나 싫어하지요?

답 : 이렇게 말하면 제대로 '안티'가 생길 텐데…. 사실은 져본 적이 없어요."

문 : 벤처 하다 망해 먹었고, 중국 유학 갔다가 중도 포기 한 건 진 게 아닌가요?


여기까지 들으면, 화면이 멈추고, 홍정욱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며, 킬빌의 배경음악이 흐르는 것이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action! 이라는 소리가 들리면,


답 : 그건 스스로 잘 합리화했어요.


강호동과 주변 인간들 폭소. 뭐 이런 식.


홍정욱은 약점이 많은 인간이다. 예전에 가끔 본 조선일보 인터뷰는 억지로 없는 약점도 만들어서 공격하는 경우가 많아 보기가 불편했는데, 상대가 홍정욱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약점이 그냥 사실 자체로 주어져 있으니 찌르는 것 자체가 흥미진진하다. 문제는 이 정확하게 약점을 타격하는 질문들이 결국엔 홍정욱에 대한 인간적인 매력을 증폭시키는데 쓰인다는 거다. 언젠가 진중권이 다른 텍스트를 비평하면서 썼던 말을 활용한다면, 이 인터뷰는 풍자의 대상이 되어야 할 홍정욱을 해학의 대상으로 만든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는 그를 보호한다.


홍정욱의 답변은, 굳이 따지자면 그의 '성공'이 '그의 성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의 '실패'는 그 실패에도 불구하고 다음 도전을 준비할 수 있는 그 자신의 계층적 환경의 문맥에서 '성공을 위한 준비'로 탈바꿈 되니까. 그런 합리화는 억지로 돈 끌어다 자녀를 유학보낸 중산층 기러기아빠의 자녀들이 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유학은커녕 등록금 대기에도 허리가 휘는 서민층의 자녀들에겐 말할 나위도 없고. 인터뷰 기사는 홍정욱의 아버지가 아들의 유학자금을 대기 위해 밤무대를 전전했다는 '사실'을 애틋하게 보도하고 있지만, 이 역시 마찬가지. 기러기아빠들도 그만한 출혈은 감수하고, 기러기아빠가 되지 못하는 서민층 부모들도 자식새끼 때문에 허리가 휘는 건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과 실패는 나뉜다. 이건 심지어 입지전적이지도 않건만, 존경의 대상이 된다.


인터뷰 자체가, 쇼프로그램이 되어 버렸다. 명사들의 약점을 찌르고, 거기에 대한 '인간적인' 변명을 들으며 친근감을 증폭하는 방식이 언제부터 널리 유행하게 되었는지를 나는 잘 알 수 없다. 쇼프로그램을 즐기지 않으니까. 다만 이 익숙해진 코드가 홍정욱과 같은 위인을 방어하는데 유용하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 같다. 조선일보의 인터뷰는 그 의도에 부합한다는 면에서 볼 때는, 매우 탁월하다. 이것은 정치신인 홍정욱이 아니라 가령 박근혜와 같은 중량급 정치인을 위해서도 사용될 수 있는 방법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용비어천가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미지를 소비하는 대중들 앞에서 정치인을 보호하는 어떤 방식이 탄생한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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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라캉 이론에서 무의식의 개념


하늘빛마야 님이 제기했던 질문에 대해 다시 답변하면서 시작해보자. 라캉 이론에서의 무의식도 경험적으로 검증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렇지가 않다. 무의식 개념 자체가 경험적으로 정의되지 않는 것이 라캉 이론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의식에 포착된 순간 더 이상 무의식일 수가 없다. 정신분석학의 옹호자들은 (적어도 책을 쓰는 인간들은) 애초에 “정신분석학은 과학이 아니다.”라고 단언하고 시작한다. 원래 무의식이 과학주의적으로 옹호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어떤 기구를 통해 각 주체 속에서 진행되는 생리적 과정을 포착해 낸다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의식에 포섭된 것으로 간주된다. 이런 언급에서는 개인의 인식의 차원과 인간 종족 일반의 인식의 차원의 구별을 대충 뭉개버렸다는 느낌도 들지만 하여간 그들의 설명이 그렇다. 말하자면 “주체가 관찰의 대상이 되면 주체를 매개로 주체를 관찰한다는 역설적인 상황에 빠지게 되고 만다.”는 것인데, 이는 훗설이 <시간 의식>에서 부딪혔던 ‘자기 의식의 난제’에 정확하게 상응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무의식의 개념은 마치 칸트의 사물 자체나 라캉 본인의 실재와 같은, 논의의 시작에서 가정된 사변적인 개념이 된다. 라캉 본인의 말을 들어보자.


“무의식은 불가능한 것으로 자신을 제시함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는 지식을 지칭하는 은유적 용어일 뿐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실재임이 밝혀진다.”


구성된 주체가 인간 전체를 대변하지 않다는 것, 그 단순한 진실에서 라캉은 무의식의 개념을 추출했다. 라캉은 “정신분석학이 다루는 주체는 과학적 주체이다.”라고 말한 적도 있다. 말하자면 그의 주체 이론은 과학적 담론이 성립하기 전의 조건들을 다루고 있는 건데, 그러므로 애초에 과학적인 검증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처음부터 정신분석학의 포지션이 이런데도 “그것은 과학이 아니다.”는 선언이 비장하게 흘러나오는 것은 철저한 무지의 산물이라 봐야 할 것이다.


나는 “당신들은 라캉의 무의식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논의를 전개하고 있어!”라고 아이추판다 님과 하늘빛마야 님에게 말한 적이 없다. 라캉의 무의식 개념이 상식인이 꼭 알아야 할 것도 아닐뿐더러, 이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인지도 의문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라캉이 이미 철학의 영토에 들어선 사람이니 이 구역을 크게 침범하지 않으려면 임상의 효과만으로 그의 이론을 부인할 수 있다는 주장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썼다. 하지만 노정태의 심각한 오해와 그로 인한 논의 전개를 보고 있자니, 내가 잘못된 방식을 택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실험 데이터로 반증도 불가능한 저 따위 포지션을 지니고 있다니! 아 쇳스러워. 근데 왜 저렇게 저딴걸 신뢰하는 사람들이 많은 거지?!”라고 어느 과학도가 외친다면, 나는 그냥 쓰윽 웃고 지나갈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그건 노정태가 훗설에 대해 설명하면서 말했듯이 관념론이란 게 원래 그렇다. 믿으면 계속 믿는 대로 보이고 안 믿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그러므로 과학도들은 라캉을 무시해도 된다. 내가 성질을 부리고 있는 부분은 단 하나, “정신분석학은 과학으로 반증될 수 있고, 그 경우 당연히 (정신분석학 이론의) 철학적인 부분 역시 무너진다.”는 그 신념이다.



2. 훗설도 똑같다.


그러므로 “라캉주의를 제외한 현대 대륙철학의 상당수는 과학적인 검증의 대상이 아니거나 되지 않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여왔다고 봐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라는 노정태의 말은 완벽한 오해이다. 나는 노정태가 라캉에 대해 이 정도의 사실도 모르는 줄은 몰랐다. 과학도들과 달리, 천 권의 책을 독파하고 최근 철학과 대학원에 들어간 노정태는 철학계에서 꽤나 유명한 철학자를 아주 초보적인 수준의 이해도 없이 신나게 조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변명할 입장에 처해 있지 않다. 반성하기 바란다.


“그렇다면 "당신들의 얘기가 일관성을 갖추려면 심리학의 발전이 데카르트에서 훗설까지의 철학자들의 논법을 격파했다고 주장해야 한다"는 말은 대체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노정태는 이렇게 물었다. 말 그대로의 의미다. 그냥 님하가 라캉을 몰라서 내 말을 다르게 알아들은 거다. 훗설이 과학적으로 반증될 수 없는 영혼으로부터 얘기를 시작했으니 심리학으로 반증될 수 없다면, 과학적으로 반증될 수 없는 무의식으로부터 주체 이론을 끌어내는 라캉도 당연히 과학적으로 반증될 수 없다. 물론 아이추판다 님은 지금 무의식도 우리가 탐사해서 밝혀낼 수 있다는 자료를 정리하기 위해 열심이시겠지만, 라캉 이론에서는 개념적 정의로 그런 접근을 거부한다. 그렇게 밝혀지면 무의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상학과 정신분석학 이 양자 사이에서 차이를 찾는다면 영혼은 하나의 비과학적인 실체인 반면 무의식은 실체가 되기도 거부한다는 것일 게다.


요약하자면, 우리의 노이디푸스는 자신이 실컷 옹호한 아이추판다 님의 견해를 털어버리기 위해 맹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며칠 전부터 이 결말 알고 있었다. (‘안다고 가정된 주체’질을 괜히 하는 게 아니다.) 그렇긴 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내가 현상학을 잘 모르기도 했기 때문에, 나는 그가 현상학의 구체적인 부분에서 심리학의 성과를 반영하면서 철학적 접근을 시도한 부분을 지적하면서 정신분석학과의 차이를 규명할 줄 알았다. 그래서 그게 지도교수와 협의할 일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저 정도의 얘기는, 그냥 술먹으면서 나한테 했다가 쫑코 먹어도 된다.


“대륙철학의 이론적 체계 중에서 현대의 심리학 데이터를 반영해야 하는 부분이 어디이고 데이터와 상관없는 부분이 어디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그 자체로 난해한 철학적 문제일 것 같다. 아마 그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가 시작된다 해도 철학자마다 견해가 다를 것이다.”


라는 나의 코멘트에 대해, 노정태는 바로 그 지점을 스스로 탐구하고 있지 않다고 나보고 철학도도 아니라고 말하는데, 사실 내가 헐겁게 공부하는 건 사실이니 철학도 아니라고 치자. 그런데 노정태도 말했듯이 그 문제는 철학자들이 알아서 방어 논리 잘 만들어 놓지 않았을까? 과학의 시대가 개막된 게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닌데. 내가 대륙철학 운운한 건 대륙철학이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그네들의 논변이 얼마나 허접한지를 까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천권의 책을 읽은 철학도가 이 조크를 듣고 철학의 미래를 걱정하다가 훗설의 ‘영혼!’ 한마디를 듣고 안도감에 잠이 들었다니 막 내가 죄책감이 느껴지려고 한다. 철학자들을 그보다 더 신뢰해도 된다. 담대함을, 보다 담대함을! 


가령 이런 얘기다. 훗설의 이론은 영혼에 관한 것이라고 하자 어떤 이는 그걸로 영혼의 병을 치유할 수 있냐고 묻는다. 데이터를 내놓으라고 떼를 쓴다. 인문대생인 나는 그런 데이터가 있는지 없는지 관심도 없는데 말이다. 그러다가 데이터가 없으니 과학이 아니라고 한다. 당연히 훗설은 과학이 아니지,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래도 나는 참을성을 가지고 영혼의 병을 치유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 이론의 경험적 정당성이 확립되겠지만, 치유가 안 된다 해서 그 이론이 오류라고는 볼 수 없다는 당연한 얘기를 한다. 그러자 누군가는 “그래요. 치유율이 전부는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다른 과학적 증거를 대셔야죠?”라고 말한다. 내적 성찰과 사변으로 만든 이론을 어떻게 경험적으로 반증하냐고 했더니 한 쪽에선 “어머 인문대생들은 사변만으로 이론을 만드셨어요?”라고 비웃고 다른 한 쪽에선 “성찰? 아, 내성 심리학? 내성을 믿지 마세요.”라고 말한다. “그거 다 돈 들이면 반증할 수 있어요. 그런데 돈 대줄 거에요? 양심이 있어야지.”란다. (노파심에서 말하는데, 정신분석학 이론의 ‘어떤’ 부분은 과학적 검증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종류의 것일 수도 있고, 그것이 반증된 사례가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까지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수준의 얘기가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반복된다. 지겨워 미치겠다. 그런데 노정태는 왜 이런 상황을 보고 내게 화를 내는 걸까?


아마 노정태는 이 비유에 동의 안 하겠지? 라캉 이론은 이미 철학이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라캉은 임상으로 출발했으니 우리가 털어버릴 수 있고 나머지 철학자는 알 바 아니라는 게 그들의 입장이다. 그리고 노정태도 이에 동조하는 듯 싶다. 정신분석학이 이미 프로이트로부터 단순히 신경증 환자를 치료하려는 임상학이 아니라 정상적인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정신학을 의도했다는 사실은 더 말하기도 귀찮다. 그런데 노정태는 그 사실은 알고 있나? 현상학과 정신분석학은 상호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학문이라는 사실을. 초기 훗설은 정신분석학을 현상학에 흡수하고자 했고, 후기 훗설은 현상학과 정신분석학을 결합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훗설은 프로이트에서 막대한 영향을 받았고, 라캉은 훗설에게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훗설의 이론에도 프로이트가 분석한 임상자료가 경험적으로 깔려 있는 셈이고, 라캉의 이론에도 훗설의 흔적이 남아 있는 셈이다. 아이추판다 님이 황우석급 사기극이라 비웃은 라캉의 거울 단계 이론에 거의 상응하는 구절이 훗설에게서도 보인다. 라캉은 털려도 되는데 훗설은 털리면 안 되는 이유를 서술한다면 그야말로 페이퍼 감이다. 나는 솔직히 노정태가 이 모든 사실을 알고, 그 정도는 쓰고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그건 너무 어려운 문제니 이런 블로그 논쟁에 끼지 말고 지도교수와 상담하라고 했던 거다.  


출발이 과학적으로 반증될 수 없는 영혼이라도, 무의식이라도, 구체적인 이론 전개에서는 심리학적 탐구를 수용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통약불가능한 언어를 핑계로 소통을 게을리 한다면 대륙철학의 생명력은 쇠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내 상식적인 의문인 것이고, 과문한 탓인지 그런 작업을 하고 있는 자료를 본 일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심리학과 면밀한 관련이 있는 미국 심리철학만을 쓸모 있는 철학이라 인정하는 것은 너무 극단적인 견해일 것이다. 더더구나 분석철학자들도 ‘논리적으로는’ 대륙철학을 털어버릴 수 없어 “에이 니들은 그냥 그렇게 살아...”하고 있는 형국에 과학도들이 과학의 방법론으로 라캉을 털어버릴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희극적인 일이다.


정리를 하자면 이렇다. 라캉 이론이 임상에서 별 쓸모가 없다는 얘기는 심리학 전공자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얘기다. 그야 데이터로 말하면 되는 거니까. 데이터가 라캉에게 유리하지 않으니까. 이 사실은 나 역시 애저녁에 인정했는데, 내 논적들은 이 사실에서 곧바로 “라캉 사살!”이라는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다고 우겨서 논쟁이 이 지경이 된 것 아닌가? 여하튼 그것과, 그 사실을 통해 철학으로서의 라캉마저 손쉽게 부인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전혀 다른 층위의 일이다. 스스로 깨닫기를 원해서 그간 단적으로 말하진 않았는데, 그냥 툭까놓고 말하면 ‘오류’다. 진짜로 라캉을 털어버리고 싶다면 결국 라캉을 읽어야 한다. “데이터에 기반하지 않은 이론은 사기다.”라는 명제를 적용하려면 그 이론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봐야할 게 아닌가. 이 부분은 우리 과학도로선 모르는 부분이니까 패스, 하지만 이 부분은 데이터와 연관지어 생각해 봐야 하는 부분인 것 같은데? 어 그리고 좀 아닌 것 같거든? 뭐 이런 차원에서 비평을 해야지. 이 논쟁을 정리하기 위해 칸트 훗설 하이데거를 뒤적였다는 노정태도 실천적으로는 그렇게 행동한 듯 싶은데, 그러면서도 왜 읽지도 않고 라캉을 털어버릴 수 있다고 믿었던 과학도들을 옹호하는 것일까? 왜 그의 실천과 글은 불일치하는 것일까?



3. 철학은 신비주의가 아니다.


노정태도 알고 있는 모 PD님이 그저께 술을 마시다가 나더러 이 논쟁 좀 그만하라고 만류했다. 철학도 입장에서 보면 과학주의가 우습기는 하겠지만, 과학주의자들이 한국 사회에 해악을 끼칠 만큼 많다고도 볼 수 없고 오히려 황우석 사태에서 보듯 더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형국이 아니냐는 말씀이었다. 옳은 말이다. 나도 이렇게 길게 논쟁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몰랐다.


그런데도 마지막으로 긴 글을 쓰는 이유는 과학도들의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서다. 철학은 신비주의가 아니다. 철학의 역사는 오히려 신비주의에 대항해온 역사다. 몇 명 예외를 발견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큰 흐름으론 그렇다. 황우석 옹호와 같은 종교적 광신은 철학과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멀리 있다. 철학과 과학은 똑같이 ‘이론적 사유’의 우위를 말하고 있고, 태초에는 하나의 학문이 철학이란 이름으로 있었으되 인간 지성의 발전에 따라 분과 학문으로 분화되었다. 예술이나 종교가 이론적 사유를 억압하려 할 때, 합리주의의 이름으로 이론적 사유를 수호해 왔던 것은 철학이었다.


노정태는 우리 패거리에게만 전설적인 네티즌인 ‘철학공부하는 사람’의 발언을 내세워 나더러 왜 세계 지성계를 믿지 못 하냐고 한다. 세계 지성계의 판단을 신뢰하니까 이 짓을 하고 있다. 경험적 자료가 빈약하다니 라캉 임상의 효과가 별로라는 사실에 흔쾌히 동의했고, 그럼에도 수많은 철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응대하고 있으니 그래도 철학적으로는 쓸모가 있다고 했다.


논쟁 중반에 내가 좀 뻘짓을 했다. 일부는 계산된 오바였지만, 무지에 의해 계산보다도 훨씬 더 오바했다. 그런데 내가 왜 그 짓을 했을까? 빡이 돌아서였다. 라캉을 어느 사기꾼 물리학자에, 프랑스 지성계를 그 사기꾼을 인터뷰한 신동아에 비유한 아이추판다 님의 행태 때문이었다. 노정태는 내가 한국 사회의 언론의 수준에 대해 평균적인 상식인들보다는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분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근대 학문의 기본적인 규칙을 알고 있는 노정태는 답해 보라. 프랑스 철학자들은 근대 학문의 레벨에 편입되지 못할 사기꾼들인가? 그렇게 치부해도 되는가? 아이추판다 님이야 그렇게 주장하는게 당연하다. 라캉이 병신인데 당연히 라캉이랑 싸운 들뢰즈 데리다도 병신이 되어야 마땅하지. 그런데 노정태 역시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내가 아무리 무식해도 이거 하나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는데 결국엔 과학을 옹호하는 것이 철학이다. 과학과 샤머니즘을 구별해 줄 수 있는 잣대도 철학에서 나온다. 데이터와 사변이 멀리 있는 것 같겠지만, 결국엔 데이터를 수집할 때조차도 이론의 틀이 개입한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결국 과학과 비과학을 똑같이 샤머니즘의 진흙탕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아이추판다 님의 진술을 보고 내가 왜 화가 났는지를 확인했다. 철학자들을 진흙탕에 몰아 넣어 버리고 과학은 제 몸 더럽히지 않고 독야청청할 수 있을 줄 알았나? 철학자들이 샤머니스트가 될 정도면 과학은 뭐가 어떻게 되는 건데? 내 실패한 공세는 그런 거친 감정에서 시작했던 것이다. 정말 단순한 사실 몇 개만 지적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내가 충분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 논쟁이 지나치게 길어진 감이 있다. 그 점에 대해서 나도 많이 반성하고 있다. 변명도 이만하면 되었다. 나도 이 논쟁은 이제 정말로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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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듣보잡?


“각 개인의 선택을 결정할 수 있는 기준들이 없는 상황에서는 이런 식으로 훈련받은 과학자들의 집단적인 판단을 신뢰하는 것이 좋다고 나는 주장하였다.”는 쿤의 말을 토벌대장 아이추판다 님은 인용했다. 무리가 없이 받아들여지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훈련받은 심리학자들의 집단적인 판단을 받아들여 그가 라캉 정신분석을 폄하하든 말든 나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주장을 확장시켜 ‘철학에서도 논의할 가치가 없다’고 말하거나, 그렇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 논변을 전개하게 되면 문제가 달라진다. 왜냐하면 그 문제에 대해 정교하게 탐구해 보지 않은 나로서는 ‘훈련받은 철학자들의 집단적인 판단을 신뢰’하는 것 외의 방법이 없고, 그들의 판단은 라캉의 이론이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철학에서 탐구해야할 가치가 있는 이론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학문의 훈련받은 학자들의 집단적인 판단을 신뢰하며 논의하는 쌍방이 타협을 거부하고 (이 논쟁이 그닥 생산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나는 몇 차례 타협의 신호를 보냈으나 토벌대장 님은 자신의 입장이 용가리 통뼈라고 생각하는지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다.) 자신들의 의견을 견주어 보고자 한다면, 더 이상 학자의 권위에 의존하지 말고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라캉 토벌대는 그러한 근거를 제시했는가? 심리학이 이렇게 심란한 학문은 아닐텐데, 그들의 주장은 시시각각 혼란스럽게 바뀌는지라 종잡을 수가 없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그들의 주장을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정리해야 했다.



2. 실증주의의 관점에서 비판했나?


“경제학과 심리학은 모두 자연과학의 강력한 영향력 속에서 성장한 학문이지만 서로 상반되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경제학은 자연과학의 이론중심적 태도를 따르는 반면에 심리학은 실험중심적 태도를 따른다. 경제학자들은 우아한 수식과 그래프로 이뤄진 근사한 이론들을 가지게 되었고, 심리학자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 인종, 언어, 문화, 지역에서 재현되는 확고부동한 실험결과들을 가지게 되었다. 어느 쪽이 더 과학적인가는 설령 '과학주의자'라고 해도 윤형님처럼 간단히 결론짓기 어렵다. 예를 들어 이론적 반실재론자인 실증주의자들은 심리학의 손을 들어주는 편을 선택할 것이다.”


토벌대장 님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니 일단 그의 라캉 비판이 심리학을 옹호하는데 적절하다는 ‘이론적 반실재론자인 실증주의’의 관점에서 이루어졌다고 간주해 보자. (노정태 님은 의심의 여지없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 경우 토벌대장 님의 논변은 대략 다음과 같은 구조를 지니게 된다.


1) 실증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임상에서 효과가 없는 이론은 쓸모가 없다고 볼 수 있다.
2) 정신분석적 접근은 임상에서 효과를 보이는데 실패했다.
3) 정신분석학은 쓸모가 없다. 철학적으로도 검토해 볼만한 가치가 없을 만큼.


이 논증엔 크나큰 난점이 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정신분석학’을 ‘정신분석 일반’으로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프로이트, 아들러, 융의 기법을 심리학에서도 일부 차용해서 쓰는 만큼 심리학은 쓸모없는 이론을 포용하는 학문이 되고 만다. 특히 토벌대장 님은 심리학을 명백한 과학으로, 정신분석학은 명백한 사이비 학문으로 규정하는 만큼, 명백한 과학인 심리학이 명백한 사이비 학문의 방법론을 일부 포함하고 있다는 모순이 발생한다.


이상한 모자 님의 증언에 따르면, 심리학과에서 프로이트나 아들러, 융의 기법을 가르치는 과목이 있는 이유는 그들의 이론을 유달리 신뢰해서가 아니라 ‘혹시나 환자치료에 도움이 될까봐’라는 마음에서라고 한다. 아마도 이것이 ‘이론적 반실재론자인 실증주의자’가 가져야 할 태도일 것이다. 그런데 토벌대장 님의 주장을 정신분석학 일반으로 확장시키면, 그의 단호한 언명은 실증주의자의 태도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쓸모가 있다, 쓸모가 없다, 는 명제는, 과학이다, 과학이 아니다, 라는 단언에 비해 훨씬 상대적이다. 효과가 제한적이라고 해서 그것 전체를 사이비로 재단할 수 있을까? 스스로 임상심리학자라고 말씀하시는 웰던지기 님이 “치료 기법이 400개가 넘어가는 요즈음에는 치료만 잘 되면 어떤 치료적 개념도 사용할 수 있다는 통합-절충주의의 시대”이며 “정신분석치료는 치료가 안 되고, 인지행동치료는 치료율이 높다고 주장하는 건 어리석은 주장”이라고 단언하는 상황을 고려해 보면, 토벌대장 님의 주장은 이 경우에 잘 들어맞지 않는다.


그러면 그가 말하는 ‘정신분석학’을 ‘라캉학파의 이론’으로 좁혀서 생각해 보면 어떨까? 즉 심리학과에서도 잠깐 맛은 본다는 프로이트, 아들러, 융의 이론은 사이비 정신분석이 아니라고 치고, 그의 논변이 라캉 학파만 씹은 거라고 생각해 보잔 말이다.


이 경우에도 그의 논변은 모순이 된다. 왜냐하면, 실증주의자인 그는 오직 임상효과에 의해서만 이론을 판단할 수밖에 없는데, 심리학에서 듣보잡 취급해서 다루지도 않는 라캉에 대한 임상자료는 ‘제한적’이라는 기타 정신분석학의 임상자료보다도 미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듣보잡이니까 문제가 끝났다고 말한다면 다시 논점은 1로 워프를 하고 그의 대담한 주장은 시궁창에 빠진다. 순수하게 실증주의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때에 그의 라캉 비판은 제대로 자료가 나오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성급한 판단에 불과하다. 노정태 님이 했던 것처럼 왜 자료를 남기지 않는가, 라고 그들을 비판하는 것은 물론 가능하지만, 이 비판은 엄밀히 말하면 실증주의를 넘어서 있다. 실증적 자료를 도출하는 틀 안에 들어오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것 자체로 하나의 이론적 기준을 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노정태 님의 기준은 스스로 말했다시피 일종의 '태도'의 문제에 기대고 있어서, 과학철학인지 지식인의 윤리의식에 대한 규정인지 분간이 안 간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종교적인 폐쇄성은 그들 수리철학의 철학적 타당성과 별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게다가 라캉 이론이 무슨 용가리 통뼈길래 다른 정신분석학과는 특별히 구별되어야 되는지에 대해서도 납득할 만한 설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또 우리가 안 받아들였으니 듣보잡! 이라고 반응할 수도 있을 텐데 그러면 우리의 논점은 다시금 1로 존트를 하고 그의 대담한 주장은 시궁창에 빠진다. (이 논쟁이 어느 순간부터 쳇바퀴를 돌고 있는 건 사실 토벌대장 님의 주장의 본질이 논점 1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내 추측이다.)


그리고 누차 지적했듯이 '마음에 관한 이론'의 타당성을 전적으로 치료의 효율로 따지는 것이 정당한 일인지에 대한 성찰도 필요하다. 심리학을 옹호하고 정신분석학을 사이비로 치부하려는 이들은, 너무 손쉽게 자신들의 의사들의 입장에 동일시한다. 하지만 의사들의 관점에서는 심리학을 전공한 임상 심리학자나 정신분석을 전공한 심리 치료사가 얼마나 다르게 느껴질까? "의사들이 손을 떼고 전적으로 심리학 전공자들에게 환자를 맡긴다면 어떨까요?"라고 제언한다면 의사들도 "어 그건 곤란하죠."라고 반응한다(고 한다). 그런다고 심리학의 효용이 사라지는 건 아닐진데, 왜 이와 동일한 구조의 야바위를 정신분석학을 욕하는데 사용하는 걸까? 치료의 효과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태도는 의학과 구별되는 심리학의 의미를 설명하는데 실패하는 것이 아닐까?  


토벌대원들조차도 오직 임상에 의해서만 얘기하지는 않는다. (만일 그랬다면 그들은 웰던지기 님의 글을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받아들였어야 할 것이다.) 가령 토벌대장 님은 "내성을 믿지 말라."는 자신의 주장도 실증주의적이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이 경우에 이 '실증'은 이미 임상을 벗어나 방법론에 대한 검증의 영역으로 나아가 버린다. 임상에 대한 집착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이론적인 접근이 필요한 차원으로 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토벌대는, 어떤 이론적 접근으로 라캉을 분쇄하고 있는가?



3. 그러면 이론적 관점을 제시했나? 


상술했듯이 ‘이론적 반실재론자인 실증주의자’의 입장에서 토벌대의 주장을 일관되게 해석하는 것은 굉장히 난해한 일이다. (노정태 님의 주장이 논쟁 지형을 넘어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렸다고 내가 판단하는 이유는 그래서다.) 사실 토벌대장 님은 라캉은 나쁜 놈이라는 주장 이외엔, 딱히 어떤 포지션을 취하고 있지 않다. 그가 ‘이론적 반실재론자인 실증주의자’를 들먹인 건 그게 “사실 심리학도 통합된 방법론이 없는 잡학이 아니냐?”라는 내 질문에 답변하기 편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2번에서 적어놓은 모순을 진작부터 어렴풋이는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설마하니 그가 '이론적 반실재론자' 운운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내가 라캉을 적어도 심리학과 대상을 공유하는 영역에서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한 이유는 그가 심리학에서 듣보잡이고, 그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경험적 근거가 없다는 것인데 이 정도의 주장을 '과학주의'라고 부를 과학철학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의학이나 라캉 등의 정신분석학은 임상 이론으로서 제한조건을 통과하지 못하는 이상 과학외적 요소를 들먹일만한 자격도 없다.”


토벌대장 님은 거듭해서 라캉 이론을 뒷받침할 만한 경험적 근거가 없다고 말하고 있고, 어느 덧글에선 그 사실을 과학자(심리학자?)들이 검증하기도 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구체적인 과정에 대해서는 서술하고 있지 않다. "내성을 믿지 마라"에서 그가 정의하는 '내성'은 너무 폭넓어서, 뭐라 코멘트하기도 어렵다. 그가 언급하는 사례는 언어학 교양강좌에서 흔히 인용되는 것이다. 누가 그런 걸 부인할까? 여하간 "내성을 믿지 마라"고 했으니 라캉 이론을 뒷받침할 만한 경험적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려면 그는 다른 종류의 과학적 실험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서술해 달라는 나나 GT 님의 요구에 논문을 찾아보겠다고 반응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역시 그 내용을 숙지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렇다면 그는 지금 정신분석학을 사이비로 매도하는데 충분한 과학적인 관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훈련받은 과학자들의 집단적인 판단을 신뢰”하는 것에 불과하다. 다시 논점이 1로 돌아가 버리며, 그가 제시했던 대담한 주장은 또 한번 시궁창에 빠진다.


경험적 근거가 없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를 해설하든지, 아니면 과학을 구성하는 요소가 무엇 무엇인데 심리학에는 이런 이유로 그것이 잘 적용되는 데에 비해 정신분석학은 이런 이유로 그것이 잘 적용되지 않는다고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 이상, 정신분석이 사이비라는 그의 주장을 내가 받아들여야 할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다. 심지어 토벌대장 님은 후자의 설명조차 성실하게 한 일이 없다.누구에 의하면 과학의 기준이 이거네 저거네, 언급은 했지만, 그 기준을 적용시켜 '비평'을 한 일이 없다. 그러고도 그가 라캉을 토벌하고 있다고 믿었다니 놀랍지 않은가? 내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고 안 되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건 뭐가 있어야 받아들이든지 말든지 하지. 그러고도 외려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을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그들 토벌대의 논변은 ‘아직 언급하지도 않은 과학적 자료에 벌써부터 경의를 표하라고 요구하는’ 뒤틀린 권위주의에 해당할 듯 싶다.



4. 논쟁에 임하는 토벌대의 잘못된 방식


그런 권위주의를 토대로 그들이 철학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으니 정말로 우스운 일이다. 내가 “그렇게 말하면 전통철학을 다 도려내야 하는데?”라고 반응한 것은 정말로 전통철학이 다 잘려 나갈까봐 걱정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들의 논변대로 하면 사태가 그렇게 된다는 것을 지적한 것에 불과하다.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는 알아야 할 게 아닌가. 노정태 님은 혼자서 철학의 미래를 걱정하더니 이제는 그 걱정에 대한 정답을 찾았다고 희희낙락하는데, 솔직히 말해서 뭐하자는 짓인지 모르겠다. “당신은 왜 그렇게 비열하게 최장집을 털었나요?”라는 질문에 대해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우리 어디 1950년대에 이승만 노선이 옳았는지 김구 노선이 옳았는지 토론해 봅시다.”라고 반응한 왕년의 이한우를 연상시킨다. 나는 노정태 님이 그 진지한 철학적 열정을 지도교수와의 토론을 통해 해소했으면 한다. 그건 나같은 일개 학부생과 해야할 논쟁도 아니고, 이 논쟁은 철학에 대한 그의 관점과 별 상관도 없다.


느닷없이 철학적 문제를 한정지어보자고 타협안을 제시(?)하신 토벌대장 님도 웃기기는 마찬가지다. 그가 하는 말은 미국 심리철학에서 사용하는 구별법인데, 문제는 그게 대륙철학에 적용할 수 없는 기준이라는 데에 있다. 러프하게 말하면 통약불가능한 것이다. 대륙철학의 이론적 체계 중에서 현대의 심리학 데이터를 반영해야 하는 부분이 어디이고 데이터와 상관없는 부분이 어디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그 자체로 난해한 철학적 문제일 것 같다. 아마 그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가 시작된다 해도 철학자마다 견해가 다를 것이다. 그런데 내가 왜 거기에 동의해야 하는데? 거듭해서 내가 지적하는 것은, 철학자들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잘 모르는 어려운 문제를 그들이 판정해 줄 수 있다고 착각하는 그 지독한 오만이다. 철학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고, 그 단순하지 않은 학문이 과학도 지탱하고 있는 거다. “뭐 저딴 게 있어?”라고 외면하는 것은 그런대로 괜찮은데, “이렇게 복잡한 문제일 리가 없어.”라며 그들의 잣대로 후벼파는 건 정말 무식한 일이다. 


위에서 점검한 바와 같이, 끊임없이 과학이라는 주문을 되뇌이는 토벌대의 논증 방식은 과학이고 나발이고 간에 일단 논리적이지도 않다. (그들의 논변 수준을 고려해 보건대 설령 쓸만한 데이터를 손에 쥐고 있다 한들 그 데이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다.) 그들은 라캉을 토벌해야 하는 합당한 이유를 제시했는가? 제시하기는 개뿔. 그들 자신도 제시하지 못하는 과학적 판단의 권위로 논의를 단정하거나, 몇몇 인문학도들(나를 포함해서)의 잘못된 인용을 지적하기에 바빴다. 특히 토벌대장 님의 논쟁행태는 상대방이 뭐라고 주장하면 논지에 반응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발언을 부인하고 자신의 논변을 옹호하는 듯한 어떤 학자의 주장을 긁어다 붙이는 식이었는데, 이런 식의 논쟁방식은, 마치 논쟁 내용과 상관없이 맑스의 언명을 적절하게 긁어다 붙이는 걸로 싸움의 승패를 가리던 구 운동권의 대자보 논쟁의 악습을 연상시킨다. 나는 그런 식의 논쟁에 피식하는 사람이라 굳이 따지지 않았는데, 사실 라캉이 상담한 환자의 수는 1000명이 아니라 400만 명이고, 그가 언젠가 자신의 글 말미에 갖다 붙인 이안 해킹 교수는 심리학은 하드한 과학이 아니라고 말했던 사람이다. 제발 훈고학질 그만 두고 논점이나 챙기기 바란다.


지금도 GT 님의 발언을 털어버리는 걸로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인하고 있는 모양이다. 한마디로 벌쳐로 프루브 잡는 컨트롤을 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던 셈인데, 그러다가 본진에 캐리어 한 부대 뜨면 어쩌시려는 건지 모르겠다. 아머리는 지었나? 골리앗 사업은 했나? 근데 내가 왜 이런 걸 걱정해 줘야 하는 거지? 아, 클로킹 레이스가 준비되어 있다고? 라캉 이론에 대한 과학적 반증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그의 서술을 기대한다. 적어도 그쯤은 되어야 3의 관점에서 그들 토벌대의 입장을 정리하는 일이 가능할 테니까 말이다.


토벌대의 궁극적인 목표는 1) 라캉 이론을 사이비 학문으로 단정하고, 2) 그러므로 철학적 입장에서도 다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일 텐데, 2)는 고사하고 1)이나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2)는 노정태 님의 심오한(?) 고민이 보여주다시피 그 자체로 심각한 철학적 문제이니 토벌대와 논의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문제의 핵심은 차라리 1)의 문제에 대해서도 토벌대가 정합적인 관점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그들 과학도(?)들끼리 희희낙락하는 희안한 행태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링크목록 :

  1. 라캉을 모르면 막장인가효?(아이추판다)
  2. 정신분석학은 심리학이 아닌가?(아이추판다)
  3. 정신분석학과 심리학(한윤형)
  4. 라캉 논쟁에 대한 심도 깊은 대화(노정태)
  5. 일관성(아이추판다)
  6. 정신분석학과 심리학 재론(한윤형)
  7. 논쟁의 효과, 그리고 인문학과 과학(한윤형)
  8. 프로이트, 융, 라캉(아이추판다)
  9. 라캉 위에 그어진 선(아이추판다)
  10. 라캉과 정신의학, 그리고 관념론(노정태)
  11. 라캉을 읽지 않겠다 - 한국라깡학회 저널을 보고(새로운 세상)
  12. 1000명(아이추판다)
  13. 라캉적 임상 진단 및 치료(노정태)
  14. 과학학은 반과학주의인가?(아이추판다)
  15. 메타 이론, 과학, 물리주의(한윤형)
  16. 과학인 것과 과학이 아닌 것(노정태)
  17. 쿤, 과학학, 김재권, 그리고 해킹(아이추판다)
  18. 라캉과 심리학의 화해 가능성(이상한 모자)
  19. 과학과 과학이 아닌 것? - 아이추판다 님과 노정태 님에게 답변(한윤형)
  20. 과학과 철학에 대한 논쟁을 넘어(노정태)
  21. 콰인 가라사대(아이추판다)
  22. 쪼가리 : 라캉 논쟁을 보며 (하늘빛마야)
  23. 라캉 논쟁에 대한 생각 정리(한윤형)
  24. "과학에서 인증받지 못한 정신분석학이 철학적 이론을 구성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제기에 대한 답변 - 하늘빛마야 님께(한윤형)
  25. 쪼가리 : 라캉의 학문이 철학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하늘빛마야)
  26. 쪼가리 : 딱히 끼어들 생각은 없었거늘(하늘빛마야)
  27. 내성을 믿지 말라(아이추판다)
  28. 아리스토텔레스와 귀머거리 곤충(노정태)
  29. 쪼가리 : 라캉 논쟁을 보며 II (1)(하늘빛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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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로 쓰려고 했는데 한정없이 길어져서 본문으로 씁니다. 하늘빛마야 님께 양해를 구하며, 트랙백을 보냅니다. 하늘빛마야 님의 질문은 라캉 논쟁에 대한 생각 정리 에 달린 덧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글 내용의 어떤 부분은 본문에서도 언급된 홍준기 선생님의 <라캉과 현대 철학>을 뒤적이면서 따왔습니다. 따옴표 있으면 통으로 인용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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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님의 의문은 상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하면 정신분석학을 분과학문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신분석학의 자기규정에도, 실질적인 내용에도 합치하지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프로이트의 경우 (당대엔 심리학이 이만큼 발달하지도 못했으니) 정신분석학을 자연과학이면서 메타심리학이라 생각했지만, 그 메타심리학의 내용은 애초부터 철학적 맥락에 포섭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무의식 개념은 데카르트적 주체에 대항한 하만, 쇼펜하우어, 니체의 전통 속에 있다고 해석됩니다. (별로 관심없으시겠지만 프로이트가 니체를 직접 읽은 건 아니고, 니체를 읽은 누구를 읽은 누구의...뭐 이런 식으로 서술을 합니다.)


라캉은 이른 시기부터 프로이트에게 주석을 달면서 프로이트의 과학주의가 일정한 역할은 했지만 분명한 문제가 있다고 얘기했고, 정신분석학을 경험주의적 모델이 아니라 논리적 모델로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즉 라캉의 이론은 그 자신이 프로이트파의 의사가 아니었다면 시작되지는 않았겠지만, 기본적으로 실험주의에 입각한 모델임을 스스로도 부인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데카르트에서 훗설에 이르는 주체 철학에 '정신분석학의' 코멘트를 달기 시작하죠.


그래서 굳이 따지자면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출발부터 경험과학이 아니라 하나의 사변적 논리에 가깝습니다. 물론 그 논리를 구성하는데 '임상'에서 도움을 얻었다는 말을 하곤 있지요. 하지만 그보다는 프로이트의 기존 이론에 구조주의 언어학을 도입해서 논리적으로 재구성한 부분이 크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이 이론에서 경험과학을 배제한다 해도 새로 재구성을 해야 할 부분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임상 과정을 통해 경험주의적으로 입증하려고 한 반면, 라캉은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접근을 시도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임상의 부분을 배제한대도 이론에 대대적인 '수정'이 필요하진 않을, 그런 이론입니다. 세상에 이런 종류의 과학은 없습니다. 제가 애초에 "라캉 정신분석학은 과학이 아니다"라고 단언하고 시작하는 이유는 그래서이죠.


저희같은 인문대생의 입장에선 애초에 라캉의 임상에 대해서는 배울 일이 없고, 그가 주체에 대해 어쩌구 저쩌구 한 부분에 대해서만 읽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충분한 철학적 함의를 가지고 있지요. 그가 의사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면, 그저 근대철학에 대한 어떤 주석가라고만 이해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라캉은 프로이트를 '데카르트주의자'라고 규정했고, 정신분석학은 실존적 공허 혹은 존재의 결핍에 시달리고 있는 주체, 분열적 주체가 타인들과 세계 속에서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이 '이상적'인지를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규정은 명백하게 철학적이거나, 윤리학적이죠. 그래서 <라캉과 현대철학>의 저자 홍준기 선생은 정신분석학을 일종의 윤리학이라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라캉은 임상에서 효력이 없으므로 철학적 논의의 유효함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다,는 말을 들으면 꽤나 여러가지 생각이 듭니다. 가장 방어적인 입장에서 말하더라도 "임상의 유효성에 상관없이 그의 이론은 이미 철학에 편입되었다. 이런 수준의 철학적 논의가 과연 반드시 경험과학에 대한 메타 이론으로 나와야 하는지는 의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캉의 철학을 색출해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 경우엔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라캉에게 영향을 받은 철학자들은 어찌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 가령 동시대의 철학자인 데리다도 라캉과의 논쟁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임상의 유효성 문제 때문에 라캉을 도려내면서 데리다의 일부 논리에 반박한다면, 데리다가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요? 반대로 임상의학자도 아닌 데리다가 어떤 부분에서 라캉과 비슷한 통찰에 도달했다면, 라캉의 통찰 역시 임상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닐까요? 이것들은 이미 경험과학에서 대단히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임상이론이 구체적인 정신질환을 고치는데 무능하다고 해서 이런 맥락이 모두 사라질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습니다.


여기까지 내용을 요약하자면, 1) 라캉 이론의 출발은 과학과 거리가 멀었고, 2) '대상 이론'이 따로 있고 '메타 이론'이 따로 있는게 아니라 애초부터 철학적 이론에 가까웠으며, 3) 여러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쳐왔기 때문에 도려내자고 얘기할 경우 도대체 어디까지 도려내야 할지 알 수 없다. 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생각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관한 철학적 이론들은, 마음에 관한 과학적 학문인 심리학의 데이터를 배경으로 형성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강력한 반론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장하게 될 경우에는, 라캉과 라캉에게 영향받은 철학자들의 논의 정도가 아니라 전통철학의 대부분을 도려내야 할 것 같다는 문제가 생깁니다.


가령 훗설의 현상학을 보면 '데카르트의 전통에 따라' "선험적 주체가 객관적인 인식을 보장한다는 것을 밝히고자" 합니다. 라캉의 이론이 어찌됐든 인간의 마음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심리학의 데이터 위에 서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렇게 얘기한 훗설에게도 같은 기준이 적용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까 라캉이 정신분석학의 정의를 내리신 부분을 보셨지요? 얘기하는 레벨이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관한 철학적 이론들은, 마음에 관한 과학적 학문인 심리학의 데이터를 배경으로 형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현존하는 심리철학의 논의를 넘어 대륙철학에까지 적용한다면, 우리는 굉장히 많은 철학사조를 도려내거나, “심리학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 했을 때 생긴 역사적 유물”로 치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생각은 직관적으로 볼 때 꽤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지닐 수 있을 것 같고, 또한 꽤 많은 사람들의 격렬한 반발을 낳을 것 같습니다. 과학적 연구와 철학적 연구의 결합이 활발한 분석철학의 전통 안에 있는 학자들 중에서는 은연중에 이런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심리학에서 출발한 것은 아닙니다만 비슷한 일을 하려고 했던) 논리실증주의가 퇴색한 이후 굳이 이런 견해를 시끄럽게 표명하려고 하지 않을 뿐인지도 모르죠. 하지만 대륙철학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은 설령 데카르트식으로 영혼이 육체와 별도의 실체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더라도, 인간 의식에 대한 물리적인 규명과 그에 수반되는 이론들과 구별되는, 전통적인 의식철학이 규명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대륙철학의 옹호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개인의 선택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넓은 맥락에서도) 마음에 관한 철학적 이론들은, 마음에 관한 과학적 학문인 심리학의 데이터를 배경으로 형성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면, 그리하여 대륙철학의 역할에 대해 의문을 표시한다면, 그건 대단히 일관성 있는 입장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다만 그 경우엔 도려내야 할 입장들이 굉장히 많다는 사실은 의식해야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대륙철학에 대한 우려가 합당한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편이라서, 일관성 있는 입장을 취한다면 저도 그에 대해 별로 코멘트를 달 생각은 없습니다. 저 역시 철학의 발달은 과학적 지식의 흡수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지금의 대륙철학은 좀 러프하게 표현하면 과거 대가들의 주석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독일철학에 가장 적절한 평일 것이고, 데리다나 들뢰즈 등의 프랑스 철학자들은 그래도 새로운 시각으로 철학사를 다시 쓰는 작업을 하는 축에 속합니다. 과학적 지식도... 에에 조금 활용하다가 소칼에게 욕을 먹었죠. “노력은 하는” 프랑스 철학자들이 (라캉의 수학 인용은 제가 봐도 좀 막장입니다만) 독일 철학자들보다 더 욕을 먹는 현실은 좀 안쓰럽기도 하죠. 어쨌든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전통적인 논의와 최신의 논의 사이에 좀 교류가 있으면 좋겠는데, 이미 언어가 너무 달라져 버려서 쉽지가 않습니다. 대륙철학자들이 과학의 조류를 따라가는 것만 어려운 게 아니구요, 분석철학자가 대륙철학의 무언가에 대해 코멘트하려고 해도 대단히 어렵습니다. 가령 리처드 로티라는 분석철학계의 이단아이면서 미국의 국민 철학자인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대륙 철학자 인용하는 걸 보면 이것도 거의 막장 수준입니다. 다행히 그는 라캉과는 달리 그 사실을 지각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작업을 ‘창조적 오독’이란 거창한 이름으로 옹호했죠. (로티의 철학은 그 자체로는 유의미합니다. 그래서 저는 인용을 잘못 했다고 해서 그 철학 전체가 무너진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과학과 직접적으로 맞닿은 부분이 아닌, 가령 윤리학같은 분야의 경우 분석철학의 논의들이 흥미롭긴 하지만 또 어떤 의미에선 의미있는 많은 부분을 도려낸 채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륙철학에도 장점이 있다고 생각하구요. 두 가지 철학이 당장 교섭하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한동안 서로 공존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철학 얘기가 너무 길어졌는데 이런 맥락을 설명드리지 않으면 철학사적 입장에서 라캉을 옹호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드러나지 않을 것 같아 조금 무례를 범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상의 논의의 결과로서, 라캉 논쟁과 대체의학 논쟁과의 차이에 대해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대체의학과 의학의 논쟁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잘 고치냐, 라는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쨌든 의학의 목표는 치료이니까요. 그리고 대체의학에서 사람을 고쳤다고 주장할 때 의학측에서 “그건 스테로이드 효과야.” 혹은 “플라시보 효과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며, 그런 양측의 주장을 따질 잣대는 비교적 객관적으로 갖추어져 있다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앞서의 모든 논의를 고려해볼 때 라캉학파의 임상 효용으로 그들을 재단하는 문제는 좀 다른 층위에 있습니다. (라캉주의자들은 라캉의 임상이 효용이 있다고 주장할지도 모르지만 저는 그냥 이 문제는 뺄게요. 설령 어떤 특정한 국면에서 라캉주의자가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임상효용이 있느냐 없느냐는 물론 경험적인 문제가 되겠습니다.) 라캉의 이론을 보면 최종적인 목표가 ‘환상의 횡단’입니다. 이를테면 님이나 저와 같은 일반인들을 ‘신경증’이라 보고 그 ‘신경증 너머’의 인간이 ‘환상을 횡단하는 인간’이라는 건데요. 이런 걸 임상의 효용으로 평가한다는 건 우습지 않겠습니까? 하이데거의 책을 읽으면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의 구조를 통찰하게 된다...? 안 된다? 이런 걸 따지는 것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의 이론이 애초부터 과학이 아니었으며 어떤 맥락을 타고 있는지 지금껏 설명드렸으니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캉에게 비판적일 수도 있고, 그의 철학에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요. 그가 요새 유명하다고 해서 꼭 높이 평가받아야 하는 건 아닙니다. 철학의 긴 역사에서 그는 아직 찰나의 사람이고, 후대에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누구도 모릅니다. 다만 상황이 이렇다면 라캉을 비판한다 해도 과학의 잣대로 비판하는 것은 (앞서 언급했듯 전통철학 전체를 도려내는 터프한 입장이 아니라면)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모두 읽어 주셨다면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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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논의가 길게 이어지다 보니 보는 사람으로선 내 입장이 무엇인지 파악하기가 힘들 것 같다. 어쩌다 흘러들어간 어느 블로그에 이 논쟁에 대한 소회가 있어 그 밑에 이런 댓글을 달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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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논의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 중에 하나인데요. 님의 글을 읽어보고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구나 싶어서 제 견해를 약간 보강해 보려고 몇자 끄적입니다.


첫째, 좀 우스운 얘기지만 "기반이 된 과학 이론이 비과학적이도 메타이론이 유의미할 수"가 있습니다. 철학이 분과학문의 메타이론으로서 출현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이며 당위이긴 한데, 과학은 과학대로 발달하고 철학은 철학대로 발달하면서 갭이 멀어지기도 했고, 도대체 어떤 것이 올바른 메타이론이냐는 것이 논리적으로 설명되기 어렵기 때문에 실제로 이런 일이 생깁니다.


가령 이런 예시를 들어볼게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은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서 매우 종합적이고 일관성 있는 방법론을 가지고 있어요. 물리학에 접근하는 방식과 철학에 접근하는 방식이 같다는 뜻이죠.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은 과학 혁명 이후 뉴튼 물리학에게 자리를 내줬고 그의 주장은 지금 잣대로 보면 말도 안 되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그렇지만 그의 물리학에 대한 메타 이론이었던 철학은 여전히 의미있게 논의되고 있습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반대하는 학자도 많지요. 하지만 그들이 그 근거로 "물리학이 틀렸으니 그 메타 이론인 철학도 즐-"이라고 하고 있느냐? 그건 또 아닙니다.


칸트 철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칸트는 당대의 과학자인 뉴튼 등이 시공간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개념을 자신이 정리해야 겠다고 결심했고, <순수이성비판>의 인식론에서 시공간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나름대로 정의했습니다. 오늘날 그 시공간 개념이 물리학에서 의미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아요.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이유로 그의 인식론까지 오류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다른 근거로 칸트의 인식론을 비판하는 것은 가능하죠.)


마찬가지로 라캉 역시 그 방법론이 분과학문에서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철학 영역에서 의미가 없다고 말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건 지나치게 앞서 나간 주장이에요. 과학적인 사람들에겐 좀 답답하긴 하겠지만 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그 이론이 생명력을 가지고 계속해서 논의되느냐에 따라 인문학에서의 의미가 결정될 것으로 보입니다.


둘째, 라캉 이론이 인간 정신의 일부를 설명할 수 없다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잘 설명한다고 생각해요. 제 마음도 분석되고, 남의 마음도 분석되고, 그걸로 드라마 비평도 하고 영화 비평도 하고 그러는 걸요. 다만 문제는, 임상의 영역에서 (라캉을 포함한) 정신분석학적 접근이 마음의 병을 고치는데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아마도 어떤 이론이 마음의 구조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려면 실험적으로 가장 좋은 방법은 병을 고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을 거라는 사실에 저 역시 동의합니다. 동의하지 못할 이유가 없어요. 그러나 비록 병을 고친다는 것이 가장 강력한 잣대일지라도, 그 잣대가 그 자체로 전부는 아닌 만큼, 그것만으로 "라캉 이론은 마음에 대해 전혀 설명하고 있는 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과하지 않겠냐는 생각입니다.


셋째, 심리학이 말끔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정신분석학이 엉터리 방법으로 부여잡고 있다면 모를까 (그런 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임상에 대해 크게 아는 바가 없습니다.) 양쪽 다 뚜렷한 해결지점을 찾지 못한 문제라면, 정신분석학을 비 과학적이라고 규탄하는 것만큼이나 과연 그 영역이 과학적 방법론이 통하는 영역인지를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과학적인 방법이 통하는데 괜히 정신분석학이 비과학적 방법을 붙들고 있는 건지, 아니면 과학적 방법론으로 해결하기가 힘들거나 과학적 방법론이 통하지 않는 지점이라서 정신분석학과 같은 시도도 나오는 것인지를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죠. 둘중 어느 쪽이냐에 따라 정신분석학의 비과학성이란 것에 대한 평가도 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