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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과 폭력시위, 그리고 주민소환제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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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과 프레시안의 경우 (17)
정치학자 최장집은 최근의 촛불시위에 대해 ‘정당정치의 부재’가 만들어낸 사건이라 진단했다. 결국 정당정치 강화가 해답이라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진단을 “이제 그만 촛불을 꺼야 할 때”라는 주문으로 받아들였고, 분개했다. 왜 현 시점에서 ‘촛불시위 반대’로 오인받을 만한 주장을 개진하느냐는 것이다. 한마디로 지금 그런 얘기를 할 ‘맥락’이 아니라는 것인데, 내 생각은 다르다. 나는 최장집의 주장에 분명 ‘맥락’이 있다고 본다. 가령 오마이뉴스에서 시위군중의 모습을 비추는 대형 전광판을 동원할 때, 거리에 저 유명한 ‘전대협’의 깃발이 등장할 때, 나는 87년의 스펙터클을 재현하려는 어떤 욕망을 본다. 이 욕망은 우리에게 도움이 될까? 최장집의 말대로 87년은 정치제도의 변혁이라는 관점에서는 성공한 사례라고 보기 어려운데 말이다. 이번에도 ‘운동’과 따로 노는 정치를 만들 것인가?
87년의 사람들이 ‘민주주의=대통령 직선제’라고 믿었다면, ‘again 1987’의 감상에 젖은 어떤 이들은 ‘민주주의=국민소환제’라고 믿는 것 같다. 87년에 사람들이 민주주의가 대통령 직선제만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님을 이해했다면 세상은 더 나아졌을 것이다. 더군다나 87년과 달리 지금의 촛불시위는 한두 가지 제도의 변혁을 성취하기도 벅찬 처지다.
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직접민주주의가 이상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것이 어렵기 때문에 간접민주주의가 실시된다. 그러므로 직접민주주의의 요소를 담은 정책을 추구하는 것은, 무조건 정당한 흐름이다.” 그리 현명한 생각이라 보기 어렵다. 굳이 ‘민중의 자기 지배’라는 민주주의의 원리로부터 따진다면, 대의제뿐만이 아니라 다수결조차 문제가 된다. ‘만장일치적 직접민주주의’가 아니라면 자율성과 국가의 권위를 양립시키는 민주주의의 이념을 온전히 실현할 방법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상을 조금이라도 실현하려는 정책이 올바른 것이 될까. 오히려 오늘날의 많은 정치학자들은 만장일치를 유도하는 의사결정에 파시즘의 우려가 있다고 볼 것이다. 가령 정당정치는, 이견과 갈등을 드러내려는 장치로서 만장일치제에 모순된다. 그러므로 정당을 해산하는 것이 더 민주주의적인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이며, 천상의 제도가 아닌 세속적인 이해관계의 타협의 산물이다. 설령 어떤 직접민주주의적 요소를 지닌 정책이 도입된다 해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본질적인’ 민주주의로 이행할 수 있다는 착각을 버려야 한다. 나는 최장집이 우려한 낭만주의가 그러한 착각이라 생각한다. 결국에는 국민소환제 역시 이 제도가 어떤 효용을 지닐 수 있는가라는 측면에서 논의되어야 할 뿐이다.
다시 문제는 정치다. 촛불시위에 거는 희망의 총량을 감소시키는 것은, 떨어지는 한나라당의 지지율을 제 것으로 가져가지 못하는 타 정당들의 한심한 역량이다. 시위를 지도하려다가 욕먹은 민주노동당과 얌전히 시위를 따라다니면서 ‘아고라의 여당’이라 불리게 된 진보신당의 길을 넘어, 시민들의 욕망을 정치적 지향으로 전환하는 설득에 성공하는 그런 정당과 그런 정치인이 필요하다. 그게 최장집이 은퇴 강연에서 말한 ‘카리스마적 정치인’의 역할이 아닐까. 지금 정당이 촛불시위에 결합해야 한다면 그것은 아직 그런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고, 거리의 대중과 호흡하면서 그런 능력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욕망을 가진 이가 없다면 무슨 수로 우리가 정치에 희망을 걸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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뺄 것도 더할 것도 없는 분석. 전적으로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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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주최 “촛불집회와 한국민주주의”
긴급 시국대토론회 개회사 (2008. 6.16)
촛불집회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최장집 (고려대 교수)
1.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시민들의 대규모 촛불집회는 한국민주주의발전에 있어 21년 전 6월 민주항쟁에 비견될 만한 또 하나의 이정표적 사건이라 하겠다. 먼저 오늘의 대규모시위를 보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보다 한국의 시민들의 의식은 광범하고도 깊숙이 민주적 가치와 규범을 수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점에 있어 민주화는 시민의식에 있어서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동시에 체제의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대통령과 보수정부는 국가권력의 운영방식과 정책결정방식에 있어 과거 권위주의적 행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우리는 민주화이후 깊숙이 변화된 사회를 한편으로 하고, 보수적 리더십이 갖는 민주주의에 대한 협애한 이해와 구시대적 통치방식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양자 사이에는 위태로울 만치 커다란 간극을 보게 된다.
이명박 정부는 대통령 선거에서의 승리를 국민을 통치할 전권을 위임받은 것으로 이해한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민주주의의 원리와 제도적 실천과는 크게 다르다. 대통령은 좁게는 자신을 통치자로 만들어준 지지자들을 넓게는 국민전체를 대표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들에 대해 책임 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통치자의 선택이 아니라 의무이다. 대의제민주주의의 핵심 원리 가운데, 대표의 선출과 통치의 위임을 내용으로 하는 “대표”의 원리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수준은 높지만, 많은 사람들 특히 현 대통령과 집권세력은 대표의 역할이 책임을 수반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 이해의 정도가 얕다. 책임의 원리는 그가 통치자가 된 선거와 다음 선거사이, 즉 평상시에도 항상적으로 이행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평상시 통치의 방법과 정책결정에 대한 민주적과정의 실천,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정책내용에 대해서도 상시적으로 국민의 여론과 의사에 반응해야 함을 의미한다. 만약 책임을 수반하지 않는 통치행위, 권력행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군주나 독재자를 선출하는 것 이상이 되지 못한다.
누구로부터 견제 받지 않는 무책임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대통령의 통치스타일은 오늘의 촛불정국의 직접적 원인이라 하겠다. 또 그것은 라틴아메리카의 정치학자들이 그들의 민주주의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위임민주주의” (delegative democracy)와 유사한 상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통령이 의회를 우회하고, 민주주의의 제도적 과정을 뛰어넘으며, 투표자들의 의사와 요구를 무시하면서 일방적으로 정책을 결정하고, 대통령 명령에 의존해 통치하는 방식을 일컫는 말이다. 촛불집회 정국에서 보게 되는 것은 한국에서의 대통령은 집권과 더불어 국익이 무엇인가를 정의하고, 스스로의 결정을 실제의 정책으로 만들고, 강력한 국가기구와 강력한 여론매체를 동원하여 이를 홍보하고 집행하는, 상명하달식의 일방주의적, 권위주의적 결정방식을 당연시 해왔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정부와 집권여당은 민주화된 사회에서 이러한 방식의 정책결정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본 강연자는 오늘의 촛불집회는 한마디로 민주화이후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의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것의 결과이고, 그러한 현상을 표징하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민주주의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한 원인으로, 강력한 국가와 제도적으로 강력한 대통령이 허약한 입법부-허약한 정당 (역시 권력에 대해 자율성이 약한 허약한 사법부는 언급하지 않는다 하더라도)에 대해 압도적 우위를 갖는 어떤 구조적 특성을 지적할 수 있다. 그것은 정당-의회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한 집행부에 아무런 견제력을 갖지 못하고, 정책결정의 이니셔티브를 포함하여 의미 있는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 즉 국가기구 내지는 정부구조 내에서 이른바 삼권분립의 원리가 작동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정부 밖에 존재하며 사회경제적 균열과 갈등으로부터 발생하는 시민들의 다양한 사회경제적 이익과 가치, 요구와 의사들을 조직하고 대표하는, 이익집단을 포함하는 자율적 결사체들의 발전수준 역시 매우 허약하다는 사실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다. 이들 자율적 결사체 가운데서도 시민사회의 의사를 조직하여 정치적으로 대표하는 정당의 역할은 민주주의 정치과정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러한 조건이 정부 밖 시민사회가 강력한 국가를 관장하는 대통령에 의해 만들어지는 시민다수의 의사 및 이익에 반하는 권위주의적 정책결정들에 대해 견제력을 행사하고, 대안적 정책을 제시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정부 내에서 그리고 시민사회에서 견제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정책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되지 못하는 조건은 사실상의 권위주의를 의미한다.
오늘의 촛불집회는 그 어떤 것보다도 선출된 통치자가 스스로의 공적행위에 대해 시민에 대해 책임지도록 강제 내지는 압박하는 반대와 견제력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촛불집회가 한국민주주의 발전에 확실하게 기여한 부분은 제도권정치와 정당이 무력화 되었을 때 시민사회의 의사를 결집하고 항의를 조직함으로써, 권위주의적 권력행사와 정책결정에 결정적 제약을 가했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과 대부분의 언론들은 대통령이 촛불집회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대통령의 의사가 바뀌고 있는지 아닌지, 혹은 대통령의 심기가 어떤지에 대해 커다란 관심을 가지곤 한다. 그러나 대통령의 마음의 향방이나 심기를 살피는 것은 민주주의의 작동의 문제를 구시대적이며, 권위주의적 문법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대통령을 민주주의 제도의 틀 속에 위치시켜, 독단적, 권위주의적인 정책결정과 권력행사를 제약하고 견제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촛불집회는 민주주의의 제도들이 무기력하고, 작동하지 않고, 그 중심적 메커니즘으로서의 정당이 제 기능을 못할 정도로 허약할 때 그 자리를 대신한 일종의 구원투수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이점에서 촛불집회는 한국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그러나 본 강연자가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역할에도 불구하고 운동만으로는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발전시키는 일은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성격으로부터 나온다. 무엇보다도 현대민주주의는 대의제민주주의라는 점이 다시 강조될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스스로 직접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를 통해 대표를 선출하여 그에게 통치를 위임함으로써, 대표로 하여금 통치토록 하는 체제이다. 그러나 그 통치가 주권자로서의 시민의 의사와 요구에 봉사하도록 하기위해서는 시민들의 정치참여는 최대한 광범해야 하고, 이들의 삶의 조건을 반영하는 이익과 요구는 정당을 중심으로 한 자율적결사체들을 통해 최대한 광범하게 정책과정에 투입되어야한다. 민주주의는 제도 내에서 사회적 갈등이 처리되고, 문제가 타협되고 결정에 이를 수 있는 제도를 허용한다. 따라서 이러한 제도들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운동에 대한 필요는 그 만큼 적어진다 하겠다.
한국의 조건에서 운동이 민주주의에 기여할 수 있는 역할과 그 한계에 대해 지적하는 것이 필요하다.
① 운동은 광범한 대중들의 의사의 분출과 강렬한 에너지를 동원을 통해서, 강력한 권위주의적 권력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하고, 그들이 추구하는 정책에 대해 강력한 반대의 조직을 가능하게 한다. 반면은 그것은 찬반의 범위를 넘어서는 문제해결에 필요한 구체적인 대안들을 형성하거나,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여러 대안들을 조정하여 결정을 이끌어내는 데는 지난한 것이며, 따라서 조야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② 운동은 강력한 에너지의 동원을 통해 단일의 목표와 이슈를 다루고 성취하는 데는 유효한 반면에, 여러 이슈들이 다투는 과정에서 각 이슈들 간의 중요성의 우선순위를 위계적으로 배열하고, 이에 기초해 정책의 추구를 일상화 하는 것이 어렵다.
③ 하나의 정책이슈를 운동의 방법으로 해결하려 할 때, 쇠고기수입협상문제가 끝나면, 민영화, 교육 등, 이슈가 출현할 때마다 시민들은 거리에 나설 수밖에 없고, 이명박 정부 임기 내내 한국의 민주주의는 국가와 운동 간의 충돌로 일관하게 된다.
④ 운동은 강렬한 열정이 장기간 유지되기 어렵고, 그 참여가 많은 열정과 비용을 수반하기 때문에 참여자들의 계층적 범위를 한정하는 경향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장기적으로 지속되기 어렵다. ⑤ 운동은 시민사회를 활성화하고 강화하는 동안, 하나의 시민사회가 다른 시민사회의 동원을 불러들이는, “시민사회 對 시민사회”의 상황을 만들 가능성이 크다. 특히 운동이 헤게모니를 불러들이게 될 때, 그것은 위험스러운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바이마르 공화국을 연구한 미국의 정치학자 세리 베르만이 지적하듯이, 운동이 자율적결사체를 통해 사민사회를 활성화하는데 몰두하는 반면, 제도정치 내에서 정당을 강화하는데 무관심했던 결과, 반대편에서의 파시즘을 불러드리는 우를 범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 발전과 관련하여 관심을 가져야할 부분은 촛불집회가 시위 또는 운동을 통해 정치체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하나의 정치관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운동이 낭만주의적 정치관의 확산을 통해 반정치주의적 정치관 내지 정조를 강화할 수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운동과 더불어 유발될 수 있는 정치관은 민주주의가 대의제민주주의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민주주의” 또는 “대통령소환제”의 요구와 같은 현실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어떤 것으로 이해하고 이를 실현코자하는 논리나 정조를 만들어낸다. 문제는 이런 방법이 민주주의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19세기말 서구에서 보통선거권이 확대되고 대중정당이 발전할 때, 정치이론가들은 투표권을 “종이돌” (paper stone)에 비유했다. 지난날에 혁명과 무력사용을 통해 사회적 갈등과 문제를 해결했던 방법이, 종이로 된 투표권의 행사로 대체되면서 평화적이고 제도적인 방법으로 사회적 갈등을 처리하게 된 것을 압축한 표현이다. 오늘의 촛불집회는 민주화이후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갈등과 불만을 해소하는 평화적 제도로서의 종이돌이 제대로 작용하지 않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사태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촛불집회로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민주주의제도를 넘어서는 어떤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그 제도를 더욱 강화하고 발전시키는 방법을 통해서이다.
3.
결국 문제의 핵심은 촛불집회에서 발현된 긍정적 힘과 요소들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동력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인가이다. 다시 말해 어떻게 그 힘이 정당, 자율적 결사체를 중심으로 한 정치적 대표체계를 강화, 발전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는가이다. 앞에서 본 강연자는 촛불집회를 민주주의제도의 허약한 발전 내지는 실패의 결과로 보았다. 그것은 핵심은 사회적 이해관계가 폭넓게 대표되지 못하고, 참여기반이 협애한 정치적 대표의 체제 즉 정당체제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촛불집회는 촛불이 꺼지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치참여의 기반을 확대하는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정치적 참여의 폭과 성격은 곧 한 사회 내 존재하는 사회경제적 이익갈등의 해결의 내용과 직결된다. 이는 한국사회의 최상층의 의사와 이익을 대변하는 현 이명박 정부의 인적구성이 한국사회에서 폭넓은 사회경제적요구와 공익성을 대표할 수 없는가를 아울러 설명한다.
이번 촛불집회의 중요한 의미 중 하나는 시민들이 민주화라는 큰 얘기가 아니라, 그들의 실생활과 직결된 구체적인 사회경제적 정책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중요한 전환이다. 민주화이후 한국의 정당들은 그것이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그 이념적 호칭과는 별개로, 시민들의 실생활문제와 직결되고 그에 기초한 대안적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을 갖지 못했다. 참여의 기반을 확대한다는 것은 그동안 참여로부터 소외된 사회세력의 대표성을 넓히고 강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여의 폭의 변화는 정책의 내용과 결과를 바꾸는 변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정치참여의 폭을 넓히고 이를 통해 제도의 변화를 가져왔어야 했다는 측면에서 볼 때, 앞선 6월항쟁이 남긴 유산은 그렇게 성공적인 것이라 평가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는 오늘의 촛불집회가 참고해야할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오늘의 촛불집회가 참여의 폭을 확대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한다면, 그것은 21년전 6월항쟁이 남긴 긍정적 유산의 목록에 더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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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 상황 브리핑
최초의 촛불시위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정을 계기로 터진, MB식 사회정책과 (아마도, 특히) 교육정책에 대한 (주로, 여성으로 구성된) 학부모와 청소년들의 참여를 통해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이 불씨를 지피는 데엔 MBC PD 수첩의 저널리즘이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정부와 조중동이 이에 대해 ‘잘못된 방송의 선동’, ‘비과학적인 괴담’, ‘배후세력론’으로 대응하면서 점차 ‘사람들이 뿔났다’. 다이나믹하고 감정적인 한국 사람들은 머슴을 자처하던 대통령의 흰소리를 참지 못했다. 갑자기 사람들의 정서는 “너는 대체 뭔 용가리 통뼈길래 우리 말을 이렇게 안 쳐듣는 건가효?”로 바뀌기 시작했다. 즉, ‘국민 여론을 수렴하지 않는 정부에 대한 항의’ 쪽으로 가닥이 잡히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동의하지 못할 정치세력은 거의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이 ‘민주주의’론은 촛불시위의 대세가 되었다. 박근혜와 이회창마저도 재협상론을 주장하고 나서고 있다.
성난 시민들의 ‘조중동 광고 기업 불매운동’은 조중동의 논조를 길들여 드디어 조중동조차 이명박 정부의 협상은 졸속적이었고, 이유야 어찌됐든 정부가 여론과 소통하는데 실패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한나라당과 조중동은 청와대가 제발 독자적으로 사고치지 말고 자신들의 ‘보수적(!)’ 태도에 귀기울이길 원한다. 거리에서 십만 명이 자신들을 욕하는 꼴을 감당하기 힘들었던 청와대 사람들도 사표를 던지고 있다. 하지만 대통령은 아직까지는 한나라당과 조중동에 항복할 의사가 없는 것 같다.
(2) 시위의 성격
앞서 얘기했듯이 이 시위는 참여자들이 느끼기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에 이르렀는데, 여러 사람들이 지적했다시피 국제적으로는 ‘반-세계화 시위’의 범주에 포함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구호를 반-세계화의 문맥에서 파악하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무지(?)’를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이 시위가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명박이 독재정권이라서가 아니라, 1)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국가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2) 그 결과 국가가 국민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민주주의의 위기가 오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달라고 외치는 게 아니라, ‘민주주의’를 계속해서 외칠 수 있도록 국가의 권한을 시장에 양도하지 말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 사람들이 국가와 시장을 하나의 대상을 포섭하는 두 개의 다른 권력으로 생각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하여 국가가 삼성에 권력을 양도할 때 느끼는 위기감보다는, 국가의 바깥에 존재하는 외국기업에게 양도할 때 느끼는 위기감이 월등한 것이다. FTA에 대해서도 그것이 우리 국가를 허문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이 (말타고 벌판 달리는 참여정부의 공익광고의 이미지에서 드러나듯이) 우리의 국가를 더 강하게 만든다고 생각한 듯 싶다. 그것이 이 시위의 성격을 ‘친 참여정부’적인 것으로 만든다. 노빠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참여정부를 한번이라도 지지했거나 잠깐이라도 호감을 가졌던 이들이 모두 그러하다.
여기서 참여정부의 성격을 간략하게 규명하면, 시위대의 성격을 규정하는 ‘민주주의’나 ‘국가’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가 어떠한 것인지를 대략적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참여정부는 간단하게 말하면 ‘관료들의 나라’였다. 정치경제적으로는 관료들이 대기업 편의적인 경제정책과 그 편의적 정책의 한 방편으로서의 자유무역을 추구하는 것을 장려하는 체제였다. 참여정부가 2002년 이회창 후보의 경제정책을 그대로 따라했다는 임종인 전 의원의 지적이나, 참여정부가 써버릴 수 있는 정책을 다 써버려서 (이명박 정부가)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이한구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의 지적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양극화의 심화는 참여정부의 정책이 실패해서 생긴 일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이 의도한 바대로 성공을 거두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참여정부는 관료조직의 외곽에 있는 ‘위원회’를 통해 문화적인 면에서는 민족-국가담론을 유포하는데 힘썼다. 민족주의자들의 용어를 활용하면 민족정기를 바로잡으려 한 것이다. 조중동이 비아냥거린 ‘위원회 공화국’이라는 명칭이 거기서 나왔다. 과거사 진상규명, 친일파 청산, 문화재 복원 등을 실시했던 이 위원회들을 한나라당과 뉴라이트는 이념적인 이유로, 그리고 이명박은 반실용주의적이라는 이유로 부인했다. 사람들이 느끼는 참여정부의 개혁성이라는 것은 바로 이 위원회에 있고, 이것을 통해 참여정부의 경제시책마저 국가를 강화시키는 것으로 정의된다. ‘희망의 군국주의자 노무현’이라 일컬어진 참여정부의 군비 확장 정책을 보자면, 참여정부의 담당자들조차도 지지자의 판타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즉, 그들은 실제적으로는 국가를 약화시키고 있었으면서도, 스스로는 국가를 강화시키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쇠고기 수입 정책은 이처럼 다소 혼란스러운 ‘국가’나 ‘민주주의’의 개념으로 봐도 ‘민주적으로 통제되는 국가’의 이념을 훼손시키는 것이 명명백백한 정책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참여정부의 ‘우파적 관료주의’를 더 오른쪽에서 혁명적으로 돌파하려다 삽질을 거듭하고 있다. 그래서 시위대와 그 지지자들은 그들이 이명박이 노무현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경험’했다고 믿는다. (이 믿음은 정당하다.) 따라서 참여정부의 문제를 갈파하는 이들이 아무리 분석한다 해도, 이 경험은 넘어설 수 없고, 참여정부에 대한 향수도 막을 수 없다. 할 수 있는 일은 이 시위대의 구호가 자기 진화하여 그 향수에 모순되는 행위에 나서도록 시위대와 ‘함께 하는’ 일이다.
반면 시위의 성격을 그 자체로 뜯어 고치려는 행위는 아예 가능하지 않고, 따라서 적절한 반응도 아니다. 차라리 그보다 일관성있는 비평은 아예 시위 자체를 비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위가 해야 할 일들이 좀 있기 때문에, 이 역시 적절한 반응은 아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른 파트에서 논의한다.
(3) 이명박이 할 수 있는 일
카드가 별로 없다. 크게 보아 1) 계속 이대로 간다! 와 2) 한나라당(박근혜와 홍준표?)에 항복한다. 는 선택지만 있을 뿐이다. 재협상 수준에 근접하는 자율규제라는 카드를 내밀었지만 씨도 안 먹히는 소리다. 그것은 비관세 무역장벽이며, WTO 위반에 해당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재협상보다도 미국 행정부를 더 당황하게 만들 일이다.
이명박은 재협상을 실시하여 시위대를 만족 혹은 분열시키고 한나라당에 대한 청와대의 우위를 지속시킬 수도 있다. 현재로서는 이게 임기 초반 레임덕을 막을 유일한 카드다. 왜냐하면 계속 이대로 밀어붙여봤자 길게 보아 2년 후 지방선거 참패 이후에는 한나라당에 항복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명박은 그게 도저히 내릴 수 없는 결단이라 여기고 있을 것이다. 그는 결코 한미 FTA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바마는 멍청하다. 만일 그가 정말로 스스로 말한대로, “한미 FTA 협정은 한국에 유리하다.”고 믿고 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협상을 파기할 생각이라면 말이다. 어느 정도 멍청하냐하면, 한미 FTA가 한국 경제의 살 길이라고 믿는 노무현과 비슷한 수준이다. 이 두 멍청한 정치인들은 의도되지 않은 합작 플레이로 그 둘보다 멍청하다고 단언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위인인 이명박을 외통수로 몰아넣고 있다. 이명박이 처한 곤경을 ‘노무현의 덫’, 혹은 ‘거짓말쟁이의 늪’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명박과 한나라당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들이 정권을 ‘잃어버린 10년’ 동안 되뇌어 왔던 거짓말을 진실로 믿고 있다는 것이다.
1) 참여정부는 한미 동맹 관계를 훼손해 왔거등요~
2) 어머, 근데 참여정부가 한미 FTA를 체결했어!
3) 그러므로, 우리는 기본값으로 한미 FTA만은 비준해야돼!!
뭐 이런 논법이다. (덧붙여, 지금 한국의 모든 정치세력들이 성장의 방법으로 한미 FTA 이외의 대안을 못 찾고 있다는 점이 있고 이게 더 큰 이유일 수도 있지만, 이건 다른 파트에서 설명한다.) 그래서 부시 있을 때 협정처리하려고 다 퍼주며 매달렸는데, 촛불시위대에 부딪혀 어떻게 하지도 못하게 생겼고, 조금 있으면 또다른 멍청이 오바마가 나타나 친히 밥그릇을 차줄 운명이다. 이명박, 두 멍청이들의 뚝심에 아주 바보되게 생겼다.
자 그렇다면 이것은 이명박과 박근혜의 대립인가? 박근혜라는 건 영남 보수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기호에 불과하고, 크게 보아 이 싸움은 한나라당 내부에서 ‘제가 한 거짓말을 진실로 믿고 있는 멍청이들’ vs ‘제가 한 거짓말이 거짓말이란 사실은 알고 있는 악랄한 놈들’의 싸움이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멍청이들보다는 악랄한 놈들이 이기는 쪽이 대한민국에는 좋다. 이명박은 멍청이들의 수장이고, 계속 전진하다가 악랄한 놈들에게 패배하거나, 바로 지금 항복하는 길밖에 없다.
(4) 시위대가 할 수 있는 일
이런 틀에서 볼 때 시위대가 할 수 있는 일, 또는 해야 할 일도 생기게 된다. 죽쒀서 개주는 꼴이지만 일단 한나라당과 조중동, 혹은 구체적인 인물로서 박근혜가 승리하는 것만으로도 시위대는 승리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 국면에서 좀더 완벽한 승리는 앞서 말했던 ‘악랄한 놈들’을 확실히 승리시키는 것이다.
이것을 ‘사회경제적인 면에서의 참여정부로의 회귀’라고 부를 수 있겠다. 재협상이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속단할 수 없지만, 대운하와 민영화를 저지하고, 다시 관료들의 느긋한 흐름에 나라를 맡길 수 있게 된다면 이 정부는 ‘위원회 없는 참여정부’가 된다. 박근혜와 홍준표를 지속적으로 압박하면 이 정도까지는 갈 수 있다. (아무리 그래도 정당의 지지기반이라는 것이 있어서 대북정책은 되돌리기 힘들 것 같기도 한데, 적어도 관료들에게 맡긴다 치면 지금의 꼴통 외교는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압박이 시위대가 할 일이다.
나는 2008년 6월에 이명박 정부에 우리가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낙관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명박이 입조심 좀 한다고 우리가 승리를 거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거리에서 시위할 수 있는 권리를 되찾았다고 우리가 승리를 거두고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이명박이 갑자기 미쳐서 한번 더 폭력진압을 하고 말 그대로 6. 10 항쟁이 일어나 정권이 붕괴할 가능성도 있기는 있다. 하지만 폭력진압이 오히려 사람들을 흥분시킨 학습효과를 바탕으로, 이명박 정부는 청와대 쪽 문만 굳게 걸어 잠그고 "너희들은 떠들어라. 하지만 국가는 내가 운용한다."라는 식으로 반응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대통령은 '인터넷 여론 담당자'를 두겠다고 밝혔지만 지금까지 그의 여론에 대한 태도를 고려해 보건대, 이 담당자는 '수렴'보다 '통제'를 위해 활동할 것이다. 정부는 네이버나 다음에 대해 어떤 식의 통제가 가능할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것이며, (이미 금칙어 설정 등의 사례가 보고되어 있다.) 올블로그에 대한 누군가의 해킹 시도도 석연치 않다. 만일 이명박의 속내가 그러하다면, 정말로 이제 변수는 화물연대의 파업이 된다. 유가폭등으로 인해 파업을 선언한 화물연대는 또한 미국산 쇠고기 거부 투쟁 역시 선언한 상태인데, 촛불시위와 ‘불법파업’을 분리시켜 대응하려는 정부에 대해 시위대가 어떤 식으로 반응할 것인지에 따라 이명박 정부의 레임덕의 시기가 달라질 수 있다. 화물연대 파업을 시위대가 지지하고 강경진압에 반대하는 거리행진을 시작한다면 이명박은 정말로 궁지에 몰린다.
그렇더라도 한국의 행정부는 힘이 세다. 지방선거가 참패한 이후라면 이명박은 박근혜에게 궁극적으로 패배하게 되겠지만, 그전까지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이명박 시대에 우리는 안타깝게도 ‘거리의 정치’를 지속적으로 보게 될 것이고, 거기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또한 박근혜가 승리한 이후라도 한나라당 정부의 남은 임기를 ‘위원회 없는 참여정부’의 수준은 되도록 압박하는 것이 시민의 역할이 된다. 여기까지만 하더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다고 나라가 확연히 좋아지는 건 아닌데도 그렇다.
천운이 도와 시위대가 이명박을 수월하게 패배시킨 경우에도 ‘민주주의’라는 시위의 구호에서 도출될 수 있는 정치적인 행위가 남아 있다. 이명박의 독선은 선거가 없는 기간에 대통령의 폭주를 막기 힘든 ‘87년 체제’의 허점을 드러낸다. 이 점에 대해서는 보수세력들도 불만이 있다. 조중동의 일각에선 ‘(노무현의 원포인트) 개헌안을 받을 걸 그랬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대통령이 단임제라서 여당이나 ‘여당 나팔수’말도 안 쳐듣는다는 것이다. 이명박이 하야하고 박근혜 스스로 대통령이 되는 사태가 오지 않는 이상, 박근혜와 홍준표의 한나라당은 내각제 개헌을 시도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정치 행위는 시위대가 원했던 ‘민주주의’와는 관련이 없거나, 오히려 배치되는 행위다. 행정부의 임기와 입법부의 임기를 일치시키는 노무현식 개헌안은 선거가 없는 기간 동안 국민들이 무력한 ‘위임 민주주의’를 오히려 조장한다. 내각제 역시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대통령제보다도 시위를 통해 압박하기 힘든 정치체제다. 이런 제안에 반대하여 국민소환제나 국민발의제 등을 고민하고 의미있는 의제로 주창해낼 수 있다면, 그리고 심지어 성취해낸다면, 시위대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아니 200% 이상 달성한 것이다.
(5) 참여정부도 싫어하는 이들이 해야 할 일
참여정부에 향수를 느끼는 시민들의 시위대가 해야 할 일도 이렇게나 많기 때문에, 나는 이들에게 이 이상을 요구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보고 있다. (아마도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물론 이런 저런 비일상적인 변수가 오묘하게 개입하여 정말로 우리의 시위가 더 이상을 이룩해버릴 가능성도 없지는 없겠으나, 그런 가능성에 기대고 상황을 분석해야 하는가, 라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부정적이다. 참여정부의 그것과 구별되는 사회경제정책으로 민주화를 심층화시키려는 이들은 시위대를 통해서가 아니라 진보정당을 통해서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해야 한다. 말하자면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다른 종류의 실현성 있는 사회경제정책을 총괄적으로 수립해 나가고, 또한 홍보해야 한다. ‘거리의 정치’가 오랫동안 지속된다면 그러한 홍보의 장도 더 크게 열릴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시위대 자체의 성격을 바꿀 수는 없다. 이는 다른 문제다.
진보정당의 정치인들과 지지자들이 고민해야 할 지점이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관료주의의 문제다. 정책을 실현하는 것은 관료다. 지금껏 한 가지 방향으로 정책을 운용해온 우리의 관료들은 우리의 지향에 도움을 줄 수 없는데, 그렇다고 그들을 경험적인 면에서 이기기란 매우 어렵다. 구호를 통해 권력만 잡는다고 그들을 통제하여 올바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관료들을 닦달한 이명박 정부의 무능은 좌파 정치인의 무능으로 답습될 수도 있다. 과거 민주노동당의 정책보좌관 출신들이 대거 합류한 진보신당의 경우 이 문제에 신경쓰고 있다고 생각되지만, 관료들의 경험을 습득할 수 없는 진보정당의 입장에서 심화된 정책연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두 번째는 성장 동력의 문제다. 성장-분배 논쟁이란 건 이름부터가 성장주의자들의 승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이 (그 실현과 성과가 매우 의심스러운) 한미 FTA 이외에 한국 경제의 성장동력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가장 어필할 수 있었던 것은 문국현의 ‘중소기업론’이었겠지만, 그는 이 대안이 고통스러운 개혁을 수반한다는 사실을 언급하지도 않았고, 그것을 심화된 정책연구로 제시하지도 않았다. 다만 CEO 시절의 업적과 불가능한 구호(몇백만 일자리, 8% 성장)로 그 이미지를 압축시키면서 자신을 진정으로 이명박의 대항마인 코미디언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진보신당도 가령 심상정의 3박자 경제론 등을 보완 발전시켜 분배 문제뿐 아니라 우파 정당과 구별되는 성장 동력을 제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아마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좌파정당 있는 민주주의 정당체제’를 한국에서 보기란 어려울 것이고, 진보신당은 일본 공산당식으로 기초의원의 구역으로 내려가 지역 사회의 복리를 증진시키는 데에 힘쓰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 [펌] 최장집 / 촛불집회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7) | 2008/06/18 |
|---|---|
| 이명박과 폭력시위, 그리고 주민소환제 (13) | 2008/06/08 |
| 촛불시위에 있는 것과 이끌어 내야 할 것 (12) | 2008/06/07 |
| [링크] 시국판단 + '축제'와 탈진을 넘어 (16) | 2008/06/03 |
| 거리시위와 통합의 제의 (16) | 2008/05/31 |
| [펌/프레시안] 미국 쇠고기, 한우, 호주 쇠고기의 안전성 비교 (16) | 2008/05/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