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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윤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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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분석'에 해당되는 글 59건

  1. 2008/09/26
    [씨네21/유토디토] 오르는 것과 내리는 것 (4)
  2. 2008/09/10
    주대환 논쟁 다듬어 보기 (1)
  3. 2008/09/06
    [대학내일] 사회주의자와 국가보안법
  4. 2008/08/10
    [씨네21/유토디토] 라면에도 ‘정치’는 있다 (1)
  5. 2008/07/18
    [씨네21/유토디토] 촛불시위, 그리고 정치 (8)
  6. 2008/06/27
    [씨네21/유토디토] 한-미 FTA (5)
  7. 2008/06/18
    [펌] 최장집 / 촛불집회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7)
  8. 2008/06/08
    이명박과 폭력시위, 그리고 주민소환제 (13)
  9. 2008/06/07
    촛불시위에 있는 것과 이끌어 내야 할 것 (11)
  10. 2008/06/03
    [링크] 시국판단 + '축제'와 탈진을 넘어 (16)

오르는 것: 환율(2008년 2월 937원에서 지금은 1100원 돌파), 소비자 물가(전년동월비 상승률 2월 3.6%에서 8월 5.6%로. 그나마 요즘 조금 내린 거라지?), 금리(9월부터 내부 기준금리를 높이는 은행이 많다고 한다. 국고채 금리도 상승 중이다.), 올림픽 메달 수(금메달 수 8개, 9개, 총메달 수 30개 이하로 빌빌대던 ‘잃어버린 10년’ 동안의 올림픽 성적과는 달리 금메달 13개, 총메달 수 31개의 우월한 성적), 롯데 자이언츠(부산 출신 대통령 임기 동안 한번도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지 못했던 롯데 자이언츠는 현재 시즌 3위로 ‘가을에도 야구할’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한화 팬이라는), KTX-새마을호 해고 노동자들(8월27일부터 서울역 45m 조명탑에 올라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내리는 것: 지지율(쇠고기 파동 때 17%까지 하락, 역대 대통령 최저 지지율 신기록 경신. 그 뒤 반등하여 지금은 30%에 육박한다고 자랑함), 주식(2월 1700가량 하던 코스피지수가 지금은 1400대 초반까지 하락), 펀드수익률(특히 중국 펀드 수익률, 거의 반 토막이란다. 베이징올림픽 전까진 끄덕 없다더니?), 세금(5년 동안 26조원의 감면효과가 있다는데, 내가 내는 세금은 하나도 없다), 부동산 경기(이건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금리가 높아지면 대출내서 집 산 사람들의 부담이 커질 텐데, 그들이 집을 팔려고 내놓으면?), 기륭 해고 노동자들의 몸무게(끝없이 단식해도 문제가 풀릴 기미가 없다).


조소야 한도 끝도 없이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이건 너무 드라마틱하다. 뉴스에서 경제상황이 안 좋다는 얘기가 거론되면 인터넷에선 이명박을 욕한다. 하지만 2007년 12월이라면, 다른 후보의 선거캠프에서도 이런 상황을 예측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서브프라임 사태의 여파가 한국 경제에 영향을 미치고 유가가 상승하는 시기가 정권 초와 겹치다니 그들 입장에선 지지리도 운이 없다고 생각할 만도 하다. 물론 오락가락하는 환율정책을 보건대 위기에 대처하는 대통령과 기획재정부 장관의 책임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게 다 이명박 때문이다”라고 반응하는 건 사태해결에 도움이 안 된다. 상대방에게 변명할 여지를 너무 많이 남겨주기 때문이다. ‘MB 노믹스’는 이제부터 시작일 뿐일 텐데.


참여정부 말기를 돌이켜보자. 내수경기는 침체되고 양극화는 심화되고 있었지만, 주식과 펀드수익률 그리고 부동산만 ‘신나게’ 뛰고 있었다.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것은 이런 거다. 주식도 펀드도 부동산도 없었던 서민들은 먹고살기가 힘들어졌단 이유로 이명박을 찍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식이나 펀드나 부동산을 가지고 있던 이들은 누구를 찍었을까? 참여정부가 돈 벌게 해줬으니까 정동영? 그렇지 않을 것 같다. 그들은 지금껏 재미를 본 돈놀이가 이어지기 위해선 ‘이명박 대통령’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소유한 부동산이 강남 집값만큼 오르지 않아 뿔도 났을 것이고. 그리하여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진귀한 일이 2007년에 일어났던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우리 사회의 ‘상식적인’ 구성원들이 추구하는 욕망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속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를 때 ‘먹고’ 내리기 전에 ‘튀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글로벌 투기꾼의 시각으로 국가를 운용한다는 것이 어찌 가능할까. 아무리 그래도 여긴 ‘우리나라’인데 말이다. 이명박은 그 불가능한 짓을 끝까지 밀어붙여달라는 요구를 받고 등장한 해결사였다. 그런 의미에서 도저히 해결이 안 될 듯한 그의 ‘불운’은 우리의 ‘불운’인 셈이다. 그러므로, 투기꾼 지못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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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신당 당원게시판 쟁점과 토론 게시판에 올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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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진보정당 건설을 위해 노력했으며 민주노동당의 이론가 중 한 명이기도 했던 주대환 전 정책위의장이 <시대정신>에 기고한 "민주노동당의 분당 사태와 좌파의 진로"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조선일보의 류근일 주필이 그의 커밍아웃(?)을 칭찬하는 칼럼을 썼고,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지만 여러 사람들이 그 글에 대해 반대의견을 쓰더니 급기야 최병천이 레디앙 지면을 통해 주대환을 옹호하고 나섰다. 이 논쟁은 논점을 제기한 이들의 선의를 인정한다면 좌파정당의 진로 및 전략에 관한 진지한 성찰을 불러일으켜야 할 테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지겹게 반복되어온 얘기들이 재탕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책임은 근본적으로는 논점을 제기한 주대환에게 있다고 본다. 그의 논변 자체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외면하고 ‘생산적인’ 논점만 따로 떼어내어 토론하자는 최병천의 시도는 지지받기 어렵다. 따라서 나는 이 기회에 주대환이 그리고 있는 ‘전략’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명백하게 밝히고자 한다. 그의 오류가 무엇인지가 드러나면 이른바 ‘생산적인’ 논점들을 따로 떼어 내어 토론할 기회도 생길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의 제목은 “주대환 논쟁 다듬어 보기”다.


이번 글에서, 그리고 과거 딴지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추론할 수 있는 이론가 주대환의 현실인식은 다음과 같다.


1) 한국인들은 이념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매우 현실적인 사람들이다.

2) 그러므로 한국 사회에서 가능한 좌파정당의 모델은 이념적 결사체로서 출범한 독일 사민당 모델은 아니다. 노동조합을 통해 탄생한 영국 노동당의 모델이다.

3) 따라서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를 받아 결성된 민주노동당은 한국 좌파들이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모델이다. 다른 가능성은 없다.

4) 다른 가능성은 없기 때문에, ‘사민주의’ 정당을 원하고자 한다면 민주노동당 내에서 NL 운동권들과 투쟁을 해서 승리했어야 했다.

5) 명백하게 진실인 4)의 충고를 외면하고 민주노동당은 분당되었기 때문에, 이제 한국 사회에서 더 이상 사민주의 정당의 가능성은 없다.

6) 그러므로 다음으로 가능한 것은 미국 민주당의 모델이다. 한국의 좌파들은 미국 민주당과 같은 무지개 스펙트럼의 정당을 기획해야 하고, 그 정당의 한 분파로 참여해야 한다.


그가 그리고 있는 전략은 이처럼 모종의 연역추론에 기반한다. 나는 위에 서술된 명제 하나 하나가 그럭저럭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저것들이 2008년 대한민국의 어느 영역에서나 통용되는 보편적인 명제인 것은 아니다. 이것은 저것들뿐만이 아니라, 사회의 흐름을 서술하는 모든 명제들에게 해당하는 ‘유일하게 보편적인 진실’이다. 그런데 주대환의 모든 추론과 정치적 판단은 위에 서술된 자신의 명제가 절대적으로 옳다는 신념에 기초해 있다. 그런 신념에 기초해서야 주대환이 아무리 똑똑하더라도 현실과 유리된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보통의 사람들은 ‘목표’나 ‘지향’을 설정하면 거기에 맞춰서 하위의 명제들을 수정한다. 가령 전방 200미터에 중국집이 있고 나는 똑바로 직진해서 그곳에 이르겠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치자. 도중에 계산이 잘못되어 내가 오른쪽으로 2도 정도 삐끗하더라도 내가 중국집에 이르지 못할 일은 없다. 왼쪽으로 2도 수정해서 나아가면 되는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컴퓨터처럼 치밀하고 냉철한 주대환은 1) 중국집에 간다. 2) 그것은 전방에 있다. 3) 그러므로 똑바로 나아간다. 라는 판단을 내린다면, 모종의 사건이 생겨 자신이 왼쪽으로 2도 정도 삐끗하더라도 결코 3)의 명제를 수정할 생각을 하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간다. 그리하여 200미터를 나아갔을 때는 중국집이 아니라 문방구점에 이르러 밥을 굶고 만다.


이런 식으로 주대환이 밥을 굶은 사건이 작년부터 시작해서 두 번쯤 있었다. 그중 하나는 그가 2007년 대선후보 경선에서 권영길을 지지한 것이었다. 누구나 알다시피 당시 NL 운동권들은 권영길을 밀었고 NL에 반대한 이들은 노회찬이나 심상정을 밀었다. 결선투표제가 있었기 때문에 2위 후보인 심상정이 권영길과 결선에서 맞붙었고 한번 해볼만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때 주대환은 당시 다수파였던 NL의 전횡을 매우 잘 알고 있었고, 그 어떤 PD 정파의 사람들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주사파’를 비판했던 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심상정이 아니라 권영길을 지지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본인의 설명에 의하면 “민주노총이 선택한 후보였기 때문”이란다. “노조에 기반한 정당이어야 한다.”는 자신의 하위명제에 충실하느라 좌파정당 하나를 말아먹을 판단을 내린 셈이다. 대선후보가 된 권영길은 주대환이 좋아하는 사민주의 노선과 가장 거리가 먼 선거운동, 민생공약은 내팽개치고 코리아 연방공화국의 깃발을 펄럭이는 코미디같은 선거운동을 펼쳤다. 이런 꼬라지를 봤으면 자신의 판단의 오류를 자인하거나 반성하거나 적어도 회의는 해야 할 터인데 이후 그가 공적인 글에서 저 지랄맞은 사건에 대한 소회 한마디 쓰는 걸 본 적이 없다. 하위명제에 충실했던 자신이 여전히 옳다고 믿고 있는 걸까?
  

다른 한번은 모두 알다시피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정국에서 그가 보여준 태도였다. 알다시피 당시 일심회의 범죄자를 옹호하는 NL들에게 질린 사람들은 혁신파 vs 분당파로 나뉘어 팽팽히 맞섰다. 그렇지만 분당파가 이탈하기 시작한 이상 혁신파가 다수가 되어 NL을 압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가능했던 것은 단 하나, 숙주를 죽이길 원하지 않는 NL 정파들의 자정작용이 일어나 혁신안을 수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우직한 NL들의 다행스러운 고집으로 불발되었고 모두 알다시피 진보신당 연대회의가 창설되었다. 주대환은 이 국면 내내 1) 민주노동당이 망하면 사민주의 정당의 가능성은 끝난다. 2) 우리는 죽어도 이 링안에서 싸우다 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 이상 저 정당의 테두리 내에서 NL을 이길 가망이 없어진 상황에서도 말이다. 물론 이 역시 위에 정리한 주대환 컴퓨터의 논리회로에 정확히 부합하는 주장이었다. 2월 3일 임시 당대회의 파국 이후 이제 당내에 같이 싸워줄 사람이 없음이 명백해지자 그는 NL 지도부들을 비난하며 자신을 제명하라고 외쳤다. 어제까지 분당에 반대했던 처지로 제발로 걸어나가기는 뻘쭘했던 것일까? 그러다가 NL이 코방귀도 안 뀌자 그는 슬그머니 민주노동당에서 나와, 진보신당에 입당하지도 않은 채 무소속으로 총선에 출마한다. 단 한마디, “미안하다. 잘못 생각했다.”라고 하면 끝날 일을 가지고 그는 이렇게 어렵고 힘든 길을 걸어간다. 안쓰럽다. 그냥 2도 왼쪽으로 수정해서 중국집, 아니 진보신당에 와서 밥을 드시면 된다니까요. 왜 문방구에서 먹지도 못하는 지우개를 들고 우두커니 서 계세요.


안쓰럽기는 하지만 그 혼자 밥을 굶는다면 문제가 심각해지지는 않는다. 문제는 그가 저토록 논리정연한 글로 여러 사람들을 굶기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거다. 기륭전자 앞에서 밥을 굶는다면 칭찬해줄 일이겠으나, 밥을 먹겠다고 우르르 몰려가서 밥을 굶는 것은 매우 볼썽사납다. 주대환은 2007년 대선 경선에서 민주노동당 내의 사민주의자 다수가 권영길을 지지하도록 하는데 성공했고,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국면에서 “NL도 PD도 한심한 건 똑같아. 진보신당? 흥! 웃기고 자빠졌네-”라는 반응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냉소주의자들에게 친절한 떡밥을 던졌다. 그는 자신의 원칙에 지나치게 충실하면서 우리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었고, 본인이 생각하는 목표 및 지향에서도 자꾸 멀어져만 갔다. 도대체 왜 이래야만 하는 것일까?


이제 진보신당의 현실로 돌아와, “선생님. 계속 고집피우신다면 내일도 밥을 굶으실 것 같아요. 왜냐하면...”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근거들을 몇 가지 들고자 한다.


첫째, 나는 민주노동당 분당에 PD 운동권의 책임도 있다고 하는 주대환의 주장을 긍정한다. 가령 PD들이 주장하고 관철시킨 ‘당직 공직 겸직 금지’ 제도나 ‘지구당 폐지 반대’ 당론에 대한 그의 비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특정한 시점, 그러니까 2008년 2월의 시점에서 생각한다면, 진보신당 창당 이외의 답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주대환의 말은 옳을 수도 있다. 말하자면 이제 한국에서 사민당의 가능성은 끝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 안에서도 아무런 가능성이 없었다면, 우리는 다소라도 가능성이 있는 쪽으로 이행했어야 했다. ‘좌파정치’ 자체를 포기할 게 아니었다면 말이다.


둘째, 나는 진보신당이 대중적 사민주의 정당이 아니라 PD 운동권의 당이었기 때문에 총선에서 실패했다는 주대환의 평가에 동의할 수 없다. 주대환은 자신의 노선에 따라 당을 만들면 지지자가 금방 생길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정치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대중적 사민주의’ 강령을 선포한다 하더라도 (사실 진보신당은 당강령도 없이 몇 개의 민생정책만으로 총선에 임했다. 주대환이 생각하는 대중적 사민주의 정당의 총선홍보와 뭐가 그리 달랐을지 의문이다.) 사람들이 곧바로 신뢰를 주리라는 기대를 가지는 것은 부당하다. 진보신당은 만든지 너무 얼마되지 않아서 신뢰를 줄 수 없었고, 노회찬 심상정 등은 의정활동을 하면서 신뢰를 쌓았기 때문에 그나마 선전할 수 있었다. 진보신당은 총선에서 고전했지만, 그 고전은 분당하는 순간 예견된 것이었다. 만일 분당이 필연적인 사건이었다고 생각한다면, 이 고난은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진보신당은 고난을 당한 이후에야 대중에게 어느 정도의 ‘신뢰’를 주게 되었고, 그 결과 총선 이후 민주노동당원 출신이 아닌 입당자가 증가했다. 진보신당은 이런 식으로 ‘대중’과 만나게 되었던 것인데, 주대환은 이런 현실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고 비평을 하고 있다.


셋째, 나는 그가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는 ‘PD 운동권’이라는 말이 어느 정도로 정확한 용어인지 의심스럽다. 물론 나도 편의상 ‘PD 운동권’이란 말을 사용하기는 한다. 하지만 ‘북한’이라는 명백한 정치적 실체를 추종하는 NL 운동권과는 달리, 소위 PD들은 소련 붕괴 이후에 다양한 이론적 모색을 겪게 되었고 그 결과 자기들끼리도 높은 수준의 이념적 동질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어린 내가 알고 있는 ‘상식’이다. 주대환은 이런 상식을 뒤집고 과거 민주노동당의 PD 운동권들을 단일한 실체처럼 호명하고 마치 그들이 모두 “사회주의로의 민주적 도정”이란 원칙에 반대하는 이들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데, 나로서는 믿기 어렵다. 게다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제 진보신당에는 민주노동당을 경유하지 않은 당원들이 즐비하다. 누군가의 통계로는 6 대 4 정도로 오히려 비-민주노동당 출신이 많다고 한다. 이질적인 문화의 이 두 집단이 어떤 식으로 의사소통할 것인가, 진보신당의 지도부는 이들을 ‘운동권 정파의 조직원’ 대하듯이 하는 방식 말고 다른 방식으로 대우할 수 있을 것인가, 등의 문제가 내가 지금 생각하는 진보신당의 구성원과 관련된 문제다. “PD 운동권 문화 축출”이라는 그의 구호(?)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다. 진보신당은 지금 주대환의 현실인식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에 봉착해 있다. 비록 그것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주대환의 비평이 진보신당에 무용한 까닭도 그것이다.


넷째, NLPDR을 비판하는 주대환의 논법은 NLPDR과 마찬가지로 ‘단계론적 사유’에 기초해 있다. 즉 우리 사회의 단계는 이 정도이므로, 우리에게 있는 문제나 과제는 이것이고, 이전 단계의 문제나 이후 단계의 문제를 고민하거나 해결할 수는 없다는 식이다. “먼저 수구세력을 척결하고 그 다음에 좌우대립구도를 만들자.”고 좌파들을 압박한 ‘비판적 지지론’ 역시 단계론적 사유의 전형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좌파”를 평가절하할 때 주대환은 강고한 ‘단계론적 사유’를 보여준다. 반면 나는 하나의 사회, 특히 한국처럼 압축성장한 사회에선 서구 사회의 다양한 시대에서 발생했던 문제들이 중첩되어 발생할 수 있다고 보고, 이런 문제들 모두를 대면하는 것이 진보정당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주대환식의 ‘단계론적 사유’는 극복해야할 ‘과거 운동권의 악습’ 중 하나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주대환의 비평이 올바른 것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일단 인정하고 그 다음을 말해보자. 진보신당은 어떤 정당을 지향해야 할까? 1) 양당제의 한축이 되기를 욕망할 수 있다. 2) 녹색당과 같이 문제제기를 하는 소수정당이 되기를 희망할 수 있다. 3) 중앙정치에서 성공하지 못할 경우 일본 공산당과 같이 중앙정치에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지방자치 레벨에서 진보적인 실천을 하는 정당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이 논의가 가능할 것인데, 주대환은 이에 덧붙여 4) 미국 민주당 모델 정당의 한 분파로서의 좌파 정치세력화를 주장한다. 


먼저 이 문제가 몇 명의 전략가들이 방향을 제시하고 이론적인 논쟁을 해서 결론을 내야 하는 성격의 문제인지가 의문이다. 처음부터 녹색당이나 일본 공산당을 욕망하는 사람이 있을까? 현실적인 조건들에 부딪히고 좌절하면 차선, 차선을 택하다가 그런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1)은 아예 가능성이 없으니 애초에 2)나 3)을 추구하는 맞춤형 전략을 짜자는 주장도 가능하기는 한데 내가 보기엔 좀 에러다. 왜냐하면 현재의 상황은 양당제의 한축인 민주당이 전적으로 신뢰를 잃고 이탈한 이명박 지지층도 ‘줏어먹기’ 하지 못하는 ‘난세’이기 때문이다. 조만간 양당제의 한축을 차지하기 위한 정치세력간의 이합집산과 투쟁이 있을 텐데, 이 정국에 무언가를 노려보지 않는다는건 정치를 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또한 그러한 논의가 가능하다 하더라도, 진보신당이 당원 중심의 정당인 이상 당원들의 논의의 차원에서 결론을 내는 것이 마땅하다는 사실도 지적되어야 한다. 가령 나는 4) 미국 민주당 모델 정당의 한 분파로서의 좌파 정치세력화라는 주장이 때려죽어야 할 주장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런 정치적 선택이 이루어지려면 전체 당원들의 의결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덧붙여 나는 정당 레벨에서 한나라당 이외의 보수정당들과 사안별 연대를 하거나 연정 등을 꿈꾸는 것도 유효한 전략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최병천이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런 ‘전략’을 꿈꾸려고 해도 일단은 진보신당이 모종의 지분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적어도 의석이 있는 정당이라야 상대편에서 연대니 연정이니를 논의할 건덕지가 생길 것이다. 의석이라는 점에서 보면 진보신당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당인데, 탄생을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할 시기에 나중에 커서 외교관이 되니 판사가 되니 왈가왈부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 아닐까. 진보신당이 독자생존할 수 있는 세력이 되야 연대니 연정이니도 가능할 것이다.


한편 주대환을 향한 비판 중에는 필요이상으로 과잉된 것도 있는 것 같다. 변절의 테크트리를 타고 있다는 비판도 그렇고, “위대한 대한민국”이라는 수사에 대한 반감도 그렇다. ‘위대한’이란 수사가 찜찜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주대환이 말한 것은 1) 대한민국이 NLPDR의 단계를 넘어서 있다는 것, 2) 공화주의를 인정하는 차원에서 좌파질을 하자는 것이라고 본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정통성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있긴 하지만, 나는 주대환이 대한민국의 나쁜 면도 모두 긍정하자는 의미에서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그는 정통성이라는 단어를 우파들이 쓰듯이 정태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대한민국사가 진전되면서 쌓여온 것이라는 식으로 동태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적절한 언급방식인 것 같다. 그의 역사관에 동의안 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의 언급 자체가 부적절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 모든 것을 요약해서 그를 ‘사민주의 우파’라고 비판하는 것도 물론 가능하다. 이에 대해선 Lollapalooza 님의 “주대환의 사민주의? 1900년산 영국제 시계를 버려라”라는 탁월한 텍스트가 있으니 내가 더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주대환과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사민주의 우파’라고 생각하는 나 자신의 입장에 대한 것이다. 나는 이 시대엔 사민주의 우파라도 진보신당에 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럽의 사례를 보면 우파 정당들도 복지정책을 확대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물론 좌파정당의 성장이 없었다면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진보신당이 직접 ‘사민주의 우파’의 정책을 입안하고 실현시키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진보신당이 성장하지 않는다면 기타 보수정당들이 ‘사민주의 우파’의 정책을 추구하는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 나는 PD 운동권들의 ‘한계’를 질타하는 주대환이 진보신당에 와서 자신이 싫어하는 PD 운동권들도 제어하고 비-민주노동당원 출신의 새로운 당원들과도 소통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펼쳐나가기를 바란다. 이것은 2004년 정책위의장 선거에서 그를 위해 운동했던, 그것도 단지 ‘반 NL 후보’로서 지지한게 아니라 (비록 종종 동의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의 논리적이고 유려한 글을 좋아했던 한 명의 지지자, 아니 왕년의 팬이 그에 대해 가지는 바람이다.  




P.S Lollapalooza 님의 두 번째 글, “조선일보에 놀아나는 다원주의는 없다”에 대해서도 할말이 좀 있다. 물론 나는 주대환-최병천의 언론관이 아니라 Lollapalooza 님의 언론관에 동의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안티조선 운동의 현황에 대해 비판적 점검없이 그 논변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지는 데에 문제의식을 느낀다는 것이다. 즉 나는 그와는 달리 ‘안티조선’이라는 구호가 지니는 타당성이 즉각적으로 납득될 정도로 충분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 문제는 이 글의 논점에서 다소 벗어나는 것이므로 가까운 시일 안에 다른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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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6일,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 등 사회주의노동자연합(사노련)의 운영위원 7명이 국가보안법 위반을 이유로 긴급 체포 되었다가 같은 달 28일 오후 법원의 구속 영장 기각으로 풀려났다. 오세철 교수가 체포되었을 때 사람들의 놀라움은 굉장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오세철 교수는 원래부터 사회주의자임을 커밍아웃했던 사람이고, 북한체제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비판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군사정권도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그를 잡아 가두지는 않았다.


오세철 교수의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는 어느 20대의 얘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당시 수강생들이 만일 이명박이 당선되면 교수님 같은 사회주의자는 더 어려워지는 게 아니냐고 말했을 때, 오세철 교수는 박근혜든 이명박이든 그 누가 되더라도 이젠 시대가 바뀐 만큼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사건은 오세철 교수의 생각이 틀렸고, 우리 사회가 지난 세월 이룬 것들은 정말 너무나 얄팍해서 최소한의 상식이든 도덕이든 기본적 권리든 다들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빼앗기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하는 것이 그가 이 사건에 대한 놀라움을 표하는 방식이었다.


그렇지만 법원은 이틀만에 경찰의 판단에 제동을 걸었다. 법원은 “사노련의 활동이 국가 존립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실질적 해악을 끼칠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대한 소명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물론 검경은 이 사실에 대해 승복하지 않았고, 영장 기각 사유를 면밀히 검토ㆍ보완해서 영장을 재청구할 방침이라고 한다.


이쯤에서 국가보안법이 어째서 악법인지 간단히 짚어볼 필요가 있겠다. 모든 생명체가 자기보존본능이 있는 것처럼, 모든 체제도 자기 자신을 방어하고자 한다. 그것은 정당한 일이다. 자유민주주의는 모든 것에 대한 자유를 허용하는 것 같지만, 자유민주주의 체제 자체를 전복하려는 자유는 예외로 둔다. 그러므로 가령 다수결을 통해 민주주의 체제를 부인하는 행위는 허용되지 아니한다. 또한 국가를 폭력적으로 전복하려고 시도 또는 모의하는 일도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뒤짚는 일이므로 허용될 수 없다. 이들 중 전자는 헌법에 의해, 후자는 형법의 내란죄나 내란음모죄 등을 통해 금지되고 처벌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법은 이미 국가를 보존할 방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오랜 세월 동안 이런 방책들 위에 서 있는, 정권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인사를 처벌하거나 정치적으로 적절한 시기에 간첩사건을 일으킬 수 있는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다. 해외동포이던 시절 북한을 방문한 적이 있거나, 그저 조총련 단체와 접선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사람을 ‘조직적인 간첩단’의 일원으로 만들 수 있던 마법의 장난감이었다. 이 장난감을 사람에게 적용하는 이들에게 우리는 두 가지 물음을 던질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그들은 진정으로 체제를 전복하려는 세력인가? 둘째, 설령 그들이 체제전복의 의사를 표시했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국가에 위해가 되는 세력인가? 친북이냐 아니냐의 문제로 사노련 사건을 평가하려는 시각도 있지만 그건 ‘친북세력’을 주로 잡아가뒀던 국보법의 현실태를 용인하는 소극적인 시각에 불과하다. 차라리 “친북(親北)이든 아니든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활동은 모두 처벌대상이다.”라고 말하는 조선일보 사설의 시각이 국보법 옹호론자의 일관성을 담지한다. 우리가 반박해야 할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인 것이다.   


사노련의 문건에서는 혁명을 일으켜 국가를 뒤엎겠다는 얘기는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검찰은 그들이 입법 사법 행정 등 대한민국의 모든 체제를 부정하고 있다고 말한다. 조선일보 사설은 사노련 문건이 주장하는 사회를 건설하려면 폭력혁명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한다.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더라도 사노련은 현실적으로 국가에 위해가 되는 세력인가? 유럽에서는 선거철이 되면 붉은 깃발을 들고 혁명을 하겠다고 거리로 뛰어나오는 청년들이 있다고 한다. 이런 친구들도 다 잡아가두어야 한다는 얘기일까? 친북세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인공기나 몇 번 흔들고 김정일 사진 보면서 눈물 흘리는 이들이 얼마나 국가에 위협이 된다고 잡아가두어야 하는 것일까? 조선일보 사설은 “법원은 과거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하는 문건을 배포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구속영장을 발부했고 재판에서는 유죄로 판결해왔다.”고 투덜댄다. 이게 그들이 생각하는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활동”에 대한 처벌이란 말인가? 그들은 진정 대한민국이 문건 몇 개에 허물어질 허약한 나라라고 생각하는 걸까? 쪽팔리게 설마 그런 나라에서 ‘보수’를 자칭하고 있는 걸까? 


영장기각으로 풀려난 오세철 교수는 이 사건을 이명박 정부만의 문제로 보는 것에 반대하며 국보법을 철폐하지 못한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과연 한나라당 당선을 두려워하지 않던 사회주의자답다. 여기서 굳이 따지자면, 국민의 정부는 원내에서 소수정당이었고, 참여정부는 ‘탄핵 역풍’으로 원내 다수당이 되었는데도 국보법 철폐에 실패했다. 열린우리당 의원들 중에서도 국보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가보안법의 문제는 오세철 교수의 지적처럼 한나라당의 문제를 넘어선다. 민주주의라는 체제의 탁월함은 통제될 수 있는 수준의 관용성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모르는 모든 보수주의자들의 문제다. 그들은 구제불능의 겁쟁이거나, 손안에 있는 장난감을 넘기기 싫어하는 편의주의자다. 경찰이 사회주의자를 두려워해준다면 그건 나름대로 고마운 일이겠으나, 실은 그들은 촛불시위에 빨간 물을 들이기 위해 사노련을 체포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정말이지 편의주의의 극치라고 평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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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농심의 외주 캠페인 컨설턴트가 어느 기자의 블로그를 통해 농심을 옹호하는 글을 올렸다. 농심이 조·중·동 광고기업 불매운동의 ‘주적’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생긴 일이다. 컨설턴트의 주장은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이를테면 농심은 MSG도 GMO도 미국산 쇠고기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홍보하는 방법을 모르는 그런 회사란 설명이었다. 그런 그들이 ‘바보’일지라도 실제로 그렇게 나쁜 회사는 아니지 않겠느냐는 항변이었다.


농심에 억울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비록 농심이 홍보를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런 부분들을 저널이 추적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왜 농심의 반론은 들어주지 않느냐 (…) 괜히 농심 편 들어주다가 촛불민심 거스를까봐 그런 것 아닌가”라는 지적은 촛불시위에 우호적인 언론에서 새겨들어야 할 것인 듯하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라면이 ‘보수라면’과 ‘진보라면’으로 나뉠 수 있나? 라면맛에 보수맛과 진보맛이 따
로 있나?”라는 주장에 깔려 있는 세계관에 동의하지 않는다. 거칠게 말하면 이들은 라면에는 ‘정치’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과연 그러한가? 물론 라면맛에 진보니 보수니 하는 것들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라면을 생산하는 방식, 판매하는 방식, 홍보하는 방식에는 정치적인 평가가 따를 수 있다. 나는 농심의 옹호자들이 “라면에는 정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GMO와 미국산 쇠고기를 사용하지 않는 농심은 삼양에 비해 정치적으로 못할 것이 없다”고 말하기를 희망한다.


우리가 따라잡기를 염원하는 선진국에서는 ‘정치적 소비’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가격경쟁력이나 품질경쟁력이 아닌 다른 정치적 요인에 의해 소비할 상품을 결정하는 소비자들의 행태를 의미한다. 가령 노동자들은 노동자에 대한 처우가 좋은 기업의 제품을 소비함으로써 연대의식을 과시하고 장기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복리후생을 도모할 수 있다. 또 많은 시민들은 친환경적인 기업의 제품을 소비함으로써 생태주의에 대한 지지의사를 드러낸다.


전경련 같은 단체나 한국의 시장주의자들은 이런 얘기를 들으면 기업에 ‘이윤 추구’ 이외의 다른 의무가 부과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할 것 같다. 하지만 “기업은 이윤을 추구한다”는 명제는 사실명제다. 그렇기 때문에 소비자들이 ‘정치적 소비’를 하면 그들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소비자들의 요구에 정치적으로 반응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저들은 이 명제를 마치 당위명제로 취급하여 기업은 가격경쟁력이나 품질경쟁력 이외의 것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이는 소비자들의 정치적 각성을 억누르는 어떤 형태의 근본주의에 불과하다. 농심을 위한 변명에 좀 찝찔한 구석이 있다면, 오직 품질에만 신경 쓴다는 그 ‘장인정신’이 바로 이런 형태의 근본주의를 소비자에게 강요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조·중·동 광고기업 불매운동의 구체적인 실현과정에 비판받을 부분도 있겠지만, 나는 이러한 조류에서 정치적 소비의 의미를 키워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돈을 냄으로써 투표를 합니다. 세상을 해치는 인간들을 더 부유해지지 않도록 하는 거죠.” <죽음의 밥상>에 나오는 어느 소비자의 인터뷰다. 이 ‘마트에서의 투표’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보완하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글 : 한윤형 (인터넷 논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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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는 동면상태지만 이건 원래 쓰는 거라거...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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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자 최장집은 최근의 촛불시위에 대해 ‘정당정치의 부재’가 만들어낸 사건이라 진단했다. 결국 정당정치 강화가 해답이라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진단을 “이제 그만 촛불을 꺼야 할 때”라는 주문으로 받아들였고, 분개했다. 왜 현 시점에서 ‘촛불시위 반대’로 오인받을 만한 주장을 개진하느냐는 것이다. 한마디로 지금 그런 얘기를 할 ‘맥락’이 아니라는 것인데, 내 생각은 다르다. 나는 최장집의 주장에 분명 ‘맥락’이 있다고 본다. 가령 오마이뉴스에서 시위군중의 모습을 비추는 대형 전광판을 동원할 때, 거리에 저 유명한 ‘전대협’의 깃발이 등장할 때, 나는 87년의 스펙터클을 재현하려는 어떤 욕망을 본다. 이 욕망은 우리에게 도움이 될까? 최장집의 말대로 87년은 정치제도의 변혁이라는 관점에서는 성공한 사례라고 보기 어려운데 말이다. 이번에도 ‘운동’과 따로 노는 정치를 만들 것인가?


87년의 사람들이 ‘민주주의=대통령 직선제’라고 믿었다면, ‘again 1987’의 감상에 젖은 어떤 이들은 ‘민주주의=국민소환제’라고 믿는 것 같다. 87년에 사람들이 민주주의가 대통령 직선제만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님을 이해했다면 세상은 더 나아졌을 것이다. 더군다나 87년과 달리 지금의 촛불시위는 한두 가지 제도의 변혁을 성취하기도 벅찬 처지다.


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직접민주주의가 이상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것이 어렵기 때문에 간접민주주의가 실시된다. 그러므로 직접민주주의의 요소를 담은 정책을 추구하는 것은, 무조건 정당한 흐름이다.” 그리 현명한 생각이라 보기 어렵다. 굳이 ‘민중의 자기 지배’라는 민주주의의 원리로부터 따진다면, 대의제뿐만이 아니라 다수결조차 문제가 된다. ‘만장일치적 직접민주주의’가 아니라면 자율성과 국가의 권위를 양립시키는 민주주의의 이념을 온전히 실현할 방법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상을 조금이라도 실현하려는 정책이 올바른 것이 될까. 오히려 오늘날의 많은 정치학자들은 만장일치를 유도하는 의사결정에 파시즘의 우려가 있다고 볼 것이다. 가령 정당정치는, 이견과 갈등을 드러내려는 장치로서 만장일치제에 모순된다. 그러므로 정당을 해산하는 것이 더 민주주의적인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이며, 천상의 제도가 아닌 세속적인 이해관계의 타협의 산물이다. 설령 어떤 직접민주주의적 요소를 지닌 정책이 도입된다 해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본질적인’ 민주주의로 이행할 수 있다는 착각을 버려야 한다. 나는 최장집이 우려한 낭만주의가 그러한 착각이라 생각한다. 결국에는 국민소환제 역시 이 제도가 어떤 효용을 지닐 수 있는가라는 측면에서 논의되어야 할 뿐이다.


다시 문제는 정치다. 촛불시위에 거는 희망의 총량을 감소시키는 것은, 떨어지는 한나라당의 지지율을 제 것으로 가져가지 못하는 타 정당들의 한심한 역량이다. 시위를 지도하려다가 욕먹은 민주노동당과 얌전히 시위를 따라다니면서 ‘아고라의 여당’이라 불리게 된 진보신당의 길을 넘어, 시민들의 욕망을 정치적 지향으로 전환하는 설득에 성공하는 그런 정당과 그런 정치인이 필요하다. 그게 최장집이 은퇴 강연에서 말한 ‘카리스마적 정치인’의 역할이 아닐까. 지금 정당이 촛불시위에 결합해야 한다면 그것은 아직 그런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고, 거리의 대중과 호흡하면서 그런 능력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욕망을 가진 이가 없다면 무슨 수로 우리가 정치에 희망을 걸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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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 전에 실린 원고인데 인터넷판에 올라왔음으로 블로그에도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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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미국산 쇠고기 재협상은 없을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대통령의 캐릭터를 분석할 테지만, 좀더 근본적인 문제를 봐야 한다. 물론 한-미 FTA다. 그런데 중요한 건 “한-미 FTA는 과연 우리에게 이득이 되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다. 그런 질문에 대해선 입장과 수준을 망라한 수많은 답변들이 이미 나올 만큼 나왔다. 하지만 “왜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한-미 FTA를 포기할 수가 없는가?”라고 질문해본 적이 있는가? 내 생각엔 이 질문에 우리가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할 진짜 심각한 문제가 담겨 있는 것 같다.


이명박 정부가 한-미 FTA를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이유엔 상징적인 부분도 있다. 이 정부의 핵심인사들은 지난 5년간 노무현 정부가 한-미 동맹을 훼손해왔다고 주장해왔다. 한-미 동맹을 훼손한 정부가 추진한 것이 한-미 FTA이니, 그 동맹을 복원하려는 정부가 그것조차 비준시키지 못한다면 말이 안 된다. 지지층을 속여가며 혹은 다소 과장된 선동을 일삼으며 결집해왔던 그들이 이렇게 중요한 문제에서 하루아침에 말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성장률에 있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그들이 공약한 성장률 7%를 달성할 처지가 아니다. 세계경기도 안 좋을뿐더러 애초에 목표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수준이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체면치레’라도 하려면 한-미 FTA나 대운하 사업처럼 조금이라도 성장률을 높일 수 있는 정책은 절대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대답들은 모두 이명박 정부의 정치적 입장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더 제기해야 할 의문은 왜 이 정책이 참여정부가 추진하고, 민주당 의원과 한나라당 의원 대다수가 찬성할 수밖에 없는 정책이냐는 것이다. 간단히 대답하자면 한-미 FTA는 현재 대한민국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성장’ 대안이기 때문에 그렇다. 한-미 FTA는 사실 수출을 주로 하는 대기업들에만 유리한 협정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 경제의 문제는 수출의 둔화가 아니다. 내수를 담당하고 고용을 창출하는 중소기업이 허약하기 때문에 대기업들이 아무리 돈을 벌어도 체감경기가 좋아지지 않고 고용도 늘지 않는다는 것이 한국 경제의 고질적 문제다. 이런 문제에 어떻게든 해법을 제시해야 하는데, 한-미 FTA는 바로 그 체질의 불균형을 극대화해 이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대안이다. 그외에는 답이 없다는 것이다.


‘성장 vs 분배’는 애초에 전자가 승리할 수밖에 없는 잘못된 논쟁 구도다. 아직 선진국에 진입하지 못한 한국 경제는 자신의 고질적 불균형을 개선할 수 있는 다른 종류의 성장 방안을 필요로 한다. 지난 대선 문국현의 ‘중소기업론’은 어쩌면 그것을 의도했다. 하지만 충분한 고민없이 대선 결과를 위해 쉽게 활용하려는 유혹에 빠져 ‘8% 성장’이란 불가능한 구호로 압축시켜 그 이미지를 소비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을 진정으로 이명박의 대항마인 코미디언으로 전락시켜버렸다.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한-미 FTA는 이번에 저지되더라도 다시 돌아올 것이며, 다른 나라들과의 FTA 역시 줄줄이 이어질 것이다. 당위만으로 재단하지 않는, 한국 실정에 어울리면서도 현재의 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알찬 대안에 대한 고민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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뺄 것도 더할 것도 없는 분석. 전적으로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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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주최 “촛불집회와 한국민주주의”
긴급 시국대토론회 개회사 (2008. 6.16)



촛불집회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최장집 (고려대 교수)

1.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시민들의 대규모 촛불집회는 한국민주주의발전에 있어 21년 전 6월 민주항쟁에 비견될 만한 또 하나의 이정표적 사건이라 하겠다. 먼저 오늘의 대규모시위를 보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보다 한국의 시민들의 의식은 광범하고도 깊숙이 민주적 가치와 규범을 수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점에 있어 민주화는 시민의식에 있어서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동시에 체제의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대통령과 보수정부는 국가권력의 운영방식과 정책결정방식에 있어 과거 권위주의적 행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우리는 민주화이후 깊숙이 변화된 사회를 한편으로 하고, 보수적 리더십이 갖는 민주주의에 대한 협애한 이해와 구시대적 통치방식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양자 사이에는 위태로울 만치 커다란 간극을 보게 된다. 


이명박 정부는 대통령 선거에서의 승리를 국민을 통치할 전권을 위임받은 것으로 이해한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민주주의의 원리와 제도적 실천과는 크게 다르다. 대통령은 좁게는 자신을 통치자로 만들어준 지지자들을 넓게는 국민전체를 대표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들에 대해 책임 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통치자의 선택이 아니라 의무이다. 대의제민주주의의 핵심 원리 가운데, 대표의 선출과 통치의 위임을 내용으로 하는 “대표”의 원리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수준은 높지만, 많은 사람들 특히 현 대통령과 집권세력은 대표의 역할이 책임을 수반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 이해의 정도가 얕다. 책임의 원리는 그가 통치자가 된 선거와 다음 선거사이, 즉 평상시에도 항상적으로 이행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평상시 통치의 방법과 정책결정에 대한 민주적과정의 실천,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정책내용에 대해서도 상시적으로 국민의 여론과 의사에 반응해야 함을 의미한다. 만약 책임을 수반하지 않는 통치행위, 권력행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군주나 독재자를 선출하는 것 이상이 되지 못한다.


누구로부터 견제 받지 않는 무책임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대통령의 통치스타일은 오늘의 촛불정국의 직접적 원인이라 하겠다. 또 그것은 라틴아메리카의 정치학자들이 그들의 민주주의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위임민주주의” (delegative democracy)와 유사한 상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통령이 의회를 우회하고, 민주주의의 제도적 과정을 뛰어넘으며, 투표자들의 의사와 요구를 무시하면서 일방적으로 정책을 결정하고, 대통령 명령에 의존해 통치하는 방식을 일컫는 말이다. 촛불집회 정국에서 보게 되는 것은 한국에서의 대통령은 집권과 더불어 국익이 무엇인가를 정의하고, 스스로의 결정을 실제의 정책으로 만들고, 강력한 국가기구와 강력한 여론매체를 동원하여 이를 홍보하고 집행하는, 상명하달식의 일방주의적, 권위주의적 결정방식을 당연시 해왔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정부와 집권여당은 민주화된 사회에서 이러한 방식의 정책결정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본 강연자는 오늘의 촛불집회는 한마디로 민주화이후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의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것의 결과이고, 그러한 현상을 표징하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민주주의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한 원인으로, 강력한 국가와 제도적으로 강력한 대통령이 허약한 입법부-허약한 정당 (역시 권력에 대해 자율성이 약한 허약한 사법부는 언급하지 않는다 하더라도)에 대해 압도적 우위를 갖는 어떤 구조적 특성을 지적할 수 있다. 그것은 정당-의회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한 집행부에 아무런 견제력을 갖지 못하고, 정책결정의 이니셔티브를 포함하여 의미 있는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 즉 국가기구 내지는 정부구조 내에서 이른바 삼권분립의 원리가 작동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정부 밖에 존재하며 사회경제적 균열과 갈등으로부터 발생하는 시민들의 다양한 사회경제적 이익과 가치, 요구와 의사들을 조직하고 대표하는, 이익집단을 포함하는 자율적 결사체들의 발전수준 역시 매우 허약하다는 사실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다. 이들 자율적 결사체 가운데서도 시민사회의 의사를 조직하여 정치적으로 대표하는 정당의 역할은 민주주의 정치과정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러한 조건이 정부 밖 시민사회가 강력한 국가를 관장하는 대통령에 의해 만들어지는 시민다수의 의사 및 이익에 반하는 권위주의적 정책결정들에 대해 견제력을 행사하고, 대안적 정책을 제시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정부 내에서 그리고 시민사회에서 견제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정책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되지 못하는 조건은 사실상의 권위주의를 의미한다.


오늘의 촛불집회는 그 어떤 것보다도 선출된 통치자가 스스로의 공적행위에 대해 시민에 대해 책임지도록 강제 내지는 압박하는 반대와 견제력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촛불집회가 한국민주주의 발전에 확실하게 기여한 부분은 제도권정치와 정당이 무력화 되었을 때 시민사회의 의사를 결집하고 항의를 조직함으로써, 권위주의적 권력행사와 정책결정에 결정적 제약을 가했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과 대부분의 언론들은 대통령이 촛불집회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대통령의 의사가 바뀌고 있는지 아닌지, 혹은 대통령의 심기가 어떤지에 대해 커다란 관심을 가지곤 한다. 그러나 대통령의 마음의 향방이나 심기를 살피는 것은 민주주의의 작동의 문제를 구시대적이며, 권위주의적 문법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대통령을 민주주의 제도의 틀 속에 위치시켜, 독단적, 권위주의적인 정책결정과 권력행사를 제약하고 견제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촛불집회는 민주주의의 제도들이 무기력하고, 작동하지 않고, 그 중심적 메커니즘으로서의 정당이 제 기능을 못할 정도로 허약할 때 그 자리를 대신한 일종의 구원투수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이점에서 촛불집회는 한국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그러나 본 강연자가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역할에도 불구하고 운동만으로는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발전시키는 일은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성격으로부터 나온다. 무엇보다도 현대민주주의는 대의제민주주의라는 점이 다시 강조될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스스로 직접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를 통해 대표를 선출하여 그에게 통치를 위임함으로써, 대표로 하여금 통치토록 하는 체제이다. 그러나 그 통치가 주권자로서의 시민의 의사와 요구에 봉사하도록 하기위해서는 시민들의 정치참여는 최대한 광범해야 하고, 이들의 삶의 조건을 반영하는 이익과 요구는 정당을 중심으로 한 자율적결사체들을 통해 최대한 광범하게 정책과정에 투입되어야한다. 민주주의는 제도 내에서 사회적 갈등이 처리되고, 문제가 타협되고 결정에 이를 수 있는 제도를 허용한다. 따라서 이러한 제도들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운동에 대한 필요는 그 만큼 적어진다 하겠다.


한국의 조건에서 운동이 민주주의에 기여할 수 있는 역할과 그 한계에 대해 지적하는 것이 필요하다.


① 운동은 광범한 대중들의 의사의 분출과 강렬한 에너지를 동원을 통해서, 강력한 권위주의적 권력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하고, 그들이 추구하는 정책에 대해 강력한 반대의 조직을 가능하게 한다. 반면은 그것은 찬반의 범위를 넘어서는 문제해결에 필요한 구체적인 대안들을 형성하거나,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여러 대안들을 조정하여 결정을 이끌어내는 데는 지난한 것이며, 따라서 조야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② 운동은 강력한 에너지의 동원을 통해 단일의 목표와 이슈를 다루고 성취하는 데는 유효한 반면에, 여러 이슈들이 다투는 과정에서 각 이슈들 간의 중요성의 우선순위를 위계적으로 배열하고, 이에 기초해 정책의 추구를 일상화 하는 것이 어렵다.


③ 하나의 정책이슈를 운동의 방법으로 해결하려 할 때, 쇠고기수입협상문제가 끝나면, 민영화, 교육 등, 이슈가 출현할 때마다 시민들은 거리에 나설 수밖에 없고, 이명박 정부 임기 내내 한국의 민주주의는 국가와 운동 간의 충돌로 일관하게 된다.


④ 운동은 강렬한 열정이 장기간 유지되기 어렵고, 그 참여가 많은 열정과 비용을 수반하기 때문에 참여자들의 계층적 범위를 한정하는 경향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장기적으로 지속되기 어렵다. ⑤ 운동은 시민사회를 활성화하고 강화하는 동안, 하나의 시민사회가 다른 시민사회의 동원을 불러들이는, “시민사회 對 시민사회”의 상황을 만들 가능성이 크다. 특히 운동이 헤게모니를 불러들이게 될 때, 그것은 위험스러운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바이마르 공화국을 연구한 미국의 정치학자 세리 베르만이 지적하듯이, 운동이 자율적결사체를 통해 사민사회를 활성화하는데 몰두하는 반면, 제도정치 내에서 정당을 강화하는데 무관심했던 결과, 반대편에서의 파시즘을 불러드리는 우를 범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 발전과 관련하여 관심을 가져야할 부분은 촛불집회가 시위 또는 운동을 통해 정치체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하나의 정치관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운동이 낭만주의적 정치관의 확산을 통해 반정치주의적 정치관 내지 정조를 강화할 수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운동과 더불어 유발될 수 있는 정치관은 민주주의가 대의제민주주의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민주주의” 또는 “대통령소환제”의 요구와 같은 현실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어떤 것으로 이해하고 이를 실현코자하는 논리나 정조를 만들어낸다. 문제는 이런 방법이 민주주의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19세기말 서구에서 보통선거권이 확대되고 대중정당이 발전할 때, 정치이론가들은 투표권을 “종이돌” (paper stone)에 비유했다. 지난날에 혁명과 무력사용을 통해 사회적 갈등과 문제를 해결했던 방법이, 종이로 된 투표권의 행사로 대체되면서 평화적이고 제도적인 방법으로 사회적 갈등을 처리하게 된 것을 압축한 표현이다. 오늘의 촛불집회는 민주화이후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갈등과 불만을 해소하는 평화적 제도로서의 종이돌이 제대로 작용하지 않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사태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촛불집회로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민주주의제도를 넘어서는 어떤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그 제도를 더욱 강화하고 발전시키는 방법을 통해서이다.

3.

결국 문제의 핵심은 촛불집회에서 발현된 긍정적 힘과 요소들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동력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인가이다. 다시 말해 어떻게 그 힘이 정당, 자율적 결사체를 중심으로 한 정치적 대표체계를 강화, 발전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는가이다. 앞에서 본 강연자는 촛불집회를 민주주의제도의 허약한 발전 내지는 실패의 결과로 보았다. 그것은 핵심은 사회적 이해관계가 폭넓게 대표되지 못하고, 참여기반이 협애한 정치적 대표의 체제 즉 정당체제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촛불집회는 촛불이 꺼지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치참여의 기반을 확대하는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정치적 참여의 폭과 성격은 곧 한 사회 내 존재하는 사회경제적 이익갈등의 해결의 내용과 직결된다. 이는 한국사회의 최상층의 의사와 이익을 대변하는 현 이명박 정부의 인적구성이 한국사회에서 폭넓은 사회경제적요구와 공익성을 대표할 수 없는가를 아울러 설명한다.


이번 촛불집회의 중요한 의미 중 하나는 시민들이 민주화라는 큰 얘기가 아니라, 그들의 실생활과 직결된 구체적인 사회경제적 정책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중요한 전환이다. 민주화이후 한국의 정당들은 그것이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그 이념적 호칭과는 별개로, 시민들의 실생활문제와 직결되고 그에 기초한 대안적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을 갖지 못했다. 참여의 기반을 확대한다는 것은 그동안 참여로부터 소외된 사회세력의 대표성을 넓히고 강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여의 폭의 변화는 정책의 내용과 결과를 바꾸는 변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정치참여의 폭을 넓히고 이를 통해 제도의 변화를 가져왔어야 했다는 측면에서 볼 때, 앞선 6월항쟁이 남긴 유산은 그렇게 성공적인 것이라 평가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는 오늘의 촛불집회가 참고해야할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오늘의 촛불집회가 참여의 폭을 확대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한다면, 그것은 21년전 6월항쟁이 남긴 긍정적 유산의 목록에 더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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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의 정치생명이 끝났다는 몇몇 사람들의 섣부른 예측을 보고 '아직 이명박은 패배하지 않았다.'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대통령의 생각 혹은 깡다구가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불교계 인사들과의 만남에서 그는 "소나기는 언제나 피해가야 한다."고 말했다고 하고 또 어디선가 촛불시위의 배후를 친북세력이라 말했다고도 하는데, 물론 청와대는 이런 보도들을 부인하고 있지만 이걸로 대통령의 생각을 유추해 봐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간단히 말하면 대통령은 시위하는 시민들을 '잃어버린 10년' 동안 좌파정권에 오염당한 이들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고, 자율규제를 통한 협상 보완과 측근들 몇 명의 사표 수리로 여론수렴의 생색만 낸 후 자신의 프로그램 대로 계속 통치를 진행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답이 없다. 여론이라는 게 수렴을 하려고 하면 무섭지만, 아예 수렴을 포기하면 아무것도 아닌 측면이 있다. 대선도 총선도 끝났고 국민소환제도 없는 마당에 어떤 방법으로도 정부를 통제할 방법이 없다. 지금의 시위는 물론이거니와, 청와대에 진격해봐도 별 무소용일 것이다. 마침 노무현 전 대통령은 "청와대에 가서 시위해도 별 소용없다. 겁은 안 나고, 기분만 나쁘다."며 시위대에게 쓴소리(?)를 한 참이다.


그런 상황에서 폭력시위의 탄생은 거의 논리적 필연이다. 물론 지금의 시위대의 구성에서 폭력시위가 '전술적으로' 합당한 방법이 아님은 분명하다. 폭력시위야말로 이명박이 바라던 것이고, 그는 폭력을 행사하는 '배후세력'을 구속시키고 촛불시위를 강경진압할 명분을 찾을 것이다.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이 이 조치에 단일한 목소리로 저항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바야흐로 '느슨한 시위'의 장점이 단점으로 바뀌는 상황이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화물연대의 파업 이전까지는 이 시위대가 '불법 비폭력 시위'의 틀은 유지해 주길 바랬는데, 결국 일은 이렇게 된 셈이다.


그렇다고 폭력시위를 시작한 몇 사람을 윤리적으로 비난하고 싶지도 않다. 앞서 말한대로 이 정도 정국에서 정부가 성의있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행동이 점차 격화되는 것도 당연하다. 제발 폭력시위 좀 해달라고 그렇게까지 꼬드기고 있었는데, 결국 폭력시위자가 나타나는 건 인지상정이다. (나는 사람에게 별스런 기대를 하지 않는 축이다.) 이건 이처럼 '느슨한 시위'가 아니라 강력한 지도부가 있어 "폭력 쓰면 안돼!!!"라고 외치고 있어도 우발적으로 폭력이 터질 상황이다. 게다가 한국인들이 폭력시위를 안 해본 사람도 아니지 않은가. 지인들은 아닌, 생활환경에서 만난 사람 중 많은 이들이 '이러다 화염병에 쇠파이프 나온다'고 예측하고 있었다. 그렇게 말한 사람들은 거의 다 30대 초반이었는데, 이 90년대 초반 학번들은 물론 '폭력 가투'를 가장 열심히 한 세대다.


아주 거칠고 단순하게 말한다면 이렇게 얘기해 볼 수 있다. 모두가 이명박에게 체념하고 있을 때 십대들이 그들 또래 특유의 교우관계를 통해 결집하고 정부를 규탄했다. 이때 다른 세대들이 안 나온 건 아니지만, 모두가 그들의 방식을 공유했다. 그러자 정부는 장학사와 교사를 보내 십대들을 제압했다. 이에 열받은 이십대가 그들이 해본 유일한 집단적인 짓거리, 즉 월드컵 거리응원의 방식으로 거리에 뛰쳐나왔다. 한동안 다른 모든 세대가 이 방식을 공유하며 잘 놀았다. 하지만 정부는 닭장차로 청와대 쪽 길만 막아놓고 귀를 막았다. 이런 상황에선 이십대의 방식이 또한 무용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삼십대가...... 폭력가투의 방식으로? 무슨 시간을 역류하는 SF 소설 같기도 하고 차례차례로 적들과 이에 대한 대응이 등장하는 판타지 소설 같지도 하지만 현실이 대충 그렇다.


그렇다고 현실이 아예 판타지 소설일 수는 없으니까 90년대 초반 학번들이 우르르 열을 지어 쇠파이프를 드는 꼴을 볼 수는 없을 거다. 지금 상황에서 그런 짓 했다간 바로 구속이고, 그들은 이미 다 생활인이다. 여하간 이런 식의 '이행'은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정부가 점점 더 사람들을 열받게 하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챙기고 있었다는 것도 분명하다. 새벽의 폭력시위는 우발적이었(던 것 같)다. 시위를 통제하려 드는 대책위의 행동이 마음에는 안들지만 그들이 사주한 것 같지도 않았고, 등장한 쇠파이프나 각목은 미리 준비한 것이 아니라 인근 공사판에서 주워온 것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이제는 다시는 거리응원의 방식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 한번 거리로 뛰쳐나온 후에는 다시는 광장의 촛불시위 방식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정부에게 이 시위대를 분쇄할 확고할 명분이 생겼다. 앞으로의 시위는 훨씬 더 힘든 싸움이 될 것이다.  


조선일보나 중앙일보도 대통령이 저 정도로 반응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들은 인기가 떨어진 대통령을 적당히 길들이면서 보수세력의 결집과 반격을 시도하려 했다. 그렇기 때문에 정두언 인터뷰를 확대 재생산하면서 대통령의 측근들을 흔들고 있다고 생각된다. 여기에 대해 대통령이 어떻게 반응할 지는 모르겠다. 만일 그가 조선 중앙의 조언조차 생까는 대인배라면 상황은 무척 재미있어진다.


한마디로 말하면 조선과 중앙은 대통령의 기를 적당히 꺾어서 무난하게 국정을 운영하도록 하거나, 대통령이 이에 불응할 경우 한나라당으로 하여금 대통령을 통제하게 만드는 방법을 생각해 보았을 것 같다. 그들이 킹메이커라고 착각하고 있으니까 당연한 반응이다. 하지만 이명박이 만일 그들의 말조차 듣기를 거부하면 그들로서도 방법이 없다. 한국에서 대통령과 언론 중 누가 더 강한지를 이명박이 한번 보여줄 필요까지도 없다. 이명박이 시위대를 분열시킬 수만 있어도 조선 중앙은 다시 열렬한 나팔수로 돌아설 것이다. 쪽은 팔리고, 차라리 노무현 때가 좋았다 싶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이 똑똑하다면 눈 딱감고 다시 '야당지'로 복귀하여 한나라당과 이명박을 분리하려는 시도를 할 것이다. 이건 이명박의 전횡이고, 한나라당이 통채로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뭐 이런 식의 여론몰이를 하는 것이다. 정두언 인터뷰는 바로 그런 작업의 시작 쯤에 위치했던 것 같다. 이명박을 간신들의 늪에 빠진 군왕으로 만들어 간신들 몇만 숙청하고 정권을 '정상으로' 되돌리거나, 정 이명박이 하는 짓이 마음에 안 들면 대통령까지 통제하려 했던 게 그들의 노림수였던 것 같다. 하지만 이명박이 이렇게까지나 레임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