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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윤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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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언론'에 해당되는 글 29건

  1. 2008/09/12
    이 시점에서 ‘안티조선’ 담론의 실천적 효용성에 대해 (3)
  2. 2008/08/02
    [책소개] MBC를 부탁해 (2)
  3. 2008/06/05
    경향신문과 프레시안의 경우 (17)
  4. 2008/02/27
    중앙일보 논설위원, 본인부터 거짓말 하는 능력을 키우셔야 (6)
  5. 2008/02/26
    블로고스피어는 언론의 대안이 아니다. (9)
  6. 2007/10/31
    [대학내일] 신정아 사건으로 본 언론윤리
  7. 2007/10/24
    김순덕 칼럼과 장하준 (30)
  8. 2007/05/25
    기자실 통폐합 문제를 둘러싼 논의의 혼선 정리 (9)
  9. 2007/05/25
    기자실 통폐합 문제 : 언론 보도와 블로그 여론, 그리고 언론개혁 (3)
  10. 2007/04/04
    조중동과 철학자 대통령 (5)

진보신당 당원게시판 쟁점과 토론 게시판에 올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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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주대환 논쟁”과 관련해서 매체의 문제가 중요한 논점인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김수민이 주대환과 최병천을 비판하면서 ‘안티조선’이라는 잣대를 들이밀었다. 이전에도 얘기했듯이 나야 언론문제에 있어서는 주대환 최병천보다야 김수민과 생각이 가깝다. 언론학자 강준만으로부터 시작된 안티조선 운동은 1) 언론권력이 정치권력의 종속변수가 아니라 독립변수가 되었다는 사실 2) 게다가 한국의 언론, 특히 조선일보는 대단히 정략적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고 그 결과 ‘조선일보를 구독하는 행위는 한나라당에 투표하는 행위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타당한 결론을 도출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당연한 소리이지만 당시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언론은 도구일 뿐이라는 관점이 우세해서 좌파지식인들도 조선일보에 기고하는 일이 빈번했고 민주당 지지자나 민주노동당 지지자도 조선일보를 구독하기도 했다. 이제는 이런 일을 하면 나이브하다고 욕을 쳐먹는다. 언론문제를 독립적인 성격의 문제로, 분석의 대상으로 격상시킨 것이 (초기) 안티조선 운동의 지대한 공로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언론문제를 분석하는 관점에서, 혹은 언론운동을 실천하는 관점에서, 여전히 안티조선이라는 프레임은 유의미한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답이 간단하지는 않은 것 같다. 나는 김수민의 주대환-최병천 비판이 이 단순하지 않은 문제에 대해 너무 단순한 대답을 도출해낸 상황에서 이루어진게 아닌가 생각한다.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기 위해 안티조선 운동의 정당성이 확립이 되던 시기인 2001년으로 돌아가보자. 그 시기로 돌아가서 이번 논쟁의 주인공인 주대환과 관련이 있었던 사건을 추려내보자. 사실 주대환과 안티조선 운동의 악연(?)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야기의 발단은 이렇다. 어느날 민주노동당의 운동가 박용진은 감옥에서 심심하게 지내다가 강준만의 <노무현과 국민사기극>을 읽었다. 그리고 읽고 졸라 빡이 돌아서 민주노동당의 월간지 <이론과 실천>에 피토하는 심정의 규탄문을 썼다. “비판적 지지론자 이 개객기야!!!!” 그러자 이 세상의 모든 잡지를 구독하는 강준만이 그 외침을 듣고 다음달에 반론을...아니 달래는 글을 썼다. “제 책은 민주당 지지자들 보라고 쓴 겁니당. 민노당 분들 열받지 마세요.” 근데 달래기만 했으면 괜찮았을 텐데 천하의 강준만이다보니 대충 이런 말이 나왔다. “근데 님의 글에 6개의 오류가 숨어 있네요. 첫째는 어쩌구 둘째는 어쩌구...” 그냥 좌파 내부의 비지론자들 단속하려고 고함친 죄밖에 없는 박용진이 머쓱해질 타이밍에 이론과 실천 편집부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주대환이 출동하면 어떨까?” 그리하여 주대환-강준만 논쟁이 시작되었다.



링 위에 올라온 주대환은 매우 인상적인 플레이를 펼쳤다. 그는 김대중 정부가 실패했는데 무슨 또 비지론이냐고 흥분한 박용진을 달래기 위해 “김대중 정부 실패했다고 말하지 마라. 우리에게 실패인 것이 그들에게는 성공이다.”라고 말했다. “양극화는 개혁이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개혁이 성공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라고 말하는 장하준 정승일이 들으면 좋아할만한 얘기였고,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은 아예 갈 길이 다르다는 선언이었다. “노무현은 미국으로 가자는 거고, 권영길은 유럽으로 가자는 거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극우 헤게모니? 그거 이미 깨졌는데 뭘 그래.”라고 주장해서 여러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이에 대해 강준만은 “극우 헤게모니가 깨지긴 왜 깨졌어요. 저기 눈앞에 보이는구만. 그리고 아무튼 노무현은 좀 짱인 것 같다능.”이란 식으로 대답했고 둘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던지라 논쟁은 그쯤에서 끝났다.



매체에서 벌어진 이 논쟁은 인터넷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키보드워리어’라는 말은 생기지 않았지만 키보드워리어 1세대쯤에 해당하는 인물들이 안티조선 우리모두라는 사이트에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말하자면 프로토스의 고향은 아이우, 키워의 고향은 우리모두... 이건 좀 아니고, 여하간 2001년이라면 PC통신의 ‘논객’들이 안티조선 우리모두로 흘러들어와 서로 잘난척을 하고 있던 시점이었고, 대략 2002년부터 이들이 다른 곳으로 떠나면서 오늘날 우리가 이름을 알고 있거나 들어도 잘 모르는 여러 종류의 키보드워리어의 서식지들을 만들게 된다. 



주대환-강준만 논쟁이 인터넷판으로도 전해지자 김동렬 등을 위시로한 친민주당 or 노무현 성향 키워들이 아예 민주노동당 노선을 밟아버리려고 규탄을 하면서... “민주노동당의 강준만 죽이기”를 막고 있다고 외쳤다. ‘극우 헤게모니’가 없다고 해버렸으니 안티조선 운동 하는 입장에서는 얼마나 현실 모르는 소리로 비쳤겠는가. 이에 맞서 좌파 쪽에는 주대환을 옹호하기도 하고 아니면 주대환이 좀 성근 소리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민주노동당은 짱이라능이라고 답변하기도 하는 식이었는데 가만히 싸움 구경을 하던 나는 불현 듯 이렇게 외쳤다. “그, 그러니까...전선이 두 개라능! 왜 두 개냐믄...이렇게 피터지게 싸우는거 보니 하나는 아닌 거 같고....그냥 두 개면 되잖냐능!!” 그 글을 쓴 심정은 대충 이랬지만 실은 졸라 길고 재미없는 글이었다. 훗날 최병천은 2002년 대선국면에서 이걸 들고 가 당시까진 아직 노빠였지만 나중에 ‘반-진중권 좌파연대’의 수장이 되는 전설적인 키워 수군작에게 “이게 아흐리만이란 아해가 쓴 ‘두 개의 전선론’이라는 건데요~”라고 말했지만, 수본좌께서는 “그건 뇌의 착각이며, 비겁한 변명에 불과해. 좌빨은 두 개 세 개 이런 거 모린다...좌빨은 모노닷!!”이라고 반응하여 (비록 본질은 겉은 빨갛고 속은 노란 사과에 불과했지만) 그의 포스를 증명하시기도 했다.



여하간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극우 헤게모니’라는 단어다. 이 단어는 안티조선 운동이나 소위 민주당 개혁파 노선의 유의미성을 강조하던 이들이 그때부터 수 년동안이나 심심할 때마다 읆조리던 단어다. 이 말은 강준만이 주대환과의 논쟁에서 사용했지만, 강준만이 만든 말은 아니다. 척봐도 강준만이 만들 어휘로 생기지는 않았다. 이 말을 21세기 한국사회의 어떤 모습을 지시하는 정치평론의 용어로 끌어온 건 홍세화, 파리의 택시운전사를 때려치고 한국사회의 ‘전사’로 거듭나기 위해 귀국한 그는 귀국 일성으로 강준만이 만들던 월간 인물과 사상에 장문의 글을 기고한다. 그 글의 제목이 바로 (워딩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 극우 헤게모니와 조선일보의 진지전과 기동전”이었다. 이 좌파의 언어가 안티조선 운동 진영으로 흘러들어와 강준만이 그간 경험적으로 추적해 왔던 “조선일보만의 특수성”이란 테제를 이론적 언어로 지시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고, 그 결과 강준만은 주대환과의 논쟁에서 자연스럽게 ‘극우 헤게모니’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왜 ‘극우 헤게모니’와 ‘진지전’과 ‘기동전’이란 단어가 필요했던가? 그것은 안티조선 운동을, 조선일보가 지지하는 한나라당을 정치적 경쟁자로 삼는 민주당 세력이 아닌, 좌파들에게도 의미있는 운동으로 만들기 위해 필요했다. 만일 어떤 이가 극우라면, 대충 이런 얘기들이 가능해진다. “유럽에서는 좌와 우가 힘을 합쳐 양극단을 몰아내더라... 좌파들이 자기 정치세력화를 위해 운동하는 건 또 따로 할 일이지만, 이들을 왕따시키는 데 힘을 보태는 것도 좌파가 마땅히 해야할 한 역할이 아니겠니?” 이게 이 논변에 대한 ‘약한 해석’이었고, (내가 만들었다는 ‘두개의 전선론’은 명백하게 이 ‘약한 해석’을 지지하는 입장이다.) “십라 극우 헤게모니가 살아있는데 사치스럽게 좌파는 무슨 좌파! 얼른 노무현 짱 밑에 와서 깃발을 바치라능!!”이라고 좌파들을 욕하는 게 ‘강한 해석’이었다. 몇몇 사람을 제외하면 약한 해석은 2002년 대선 국면이 닥치기 전에 폭넓게 수용이 되었다. 한편 강한 해석은 꾸준하게 지지하는 이들이 있었고... 이들이 좌파들한테 뭐라고 하면 좌파들은 또 “비판적 지지론자 개객기야!!”라고 반응을 하기도 하고... 약한 해석을 말하는 것처럼 여겨졌던 노빠 키워가 대선 때 상황이 급해지니까 갑자기 강한 해석으로 돌아서고.... 등등등의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이처럼 이 개념은 안티조선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긴 했는데, 2001년 말부터 거세게 전개된 ‘노사모 운동’ (...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하리라.)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지나칠 수 없는 개념이다. 비록 노사모의 외연 확장을 위해 노력한 노무현 지지자들이 직접적으로 이 단어를 언급하지는 않았더라도 말이다.



자 이제 이 담론이 구체적으로 조선일보에 어떻게 적용되었는지를 살펴보자. 말인즉슨 조선일보는 한국 사회의 ‘극우 헤게모니’를 유지시키기 위해 전략전술적 책동을 하는 그런 사악한 집단이다... 라는 얘기가 되겠다. 그런데 이 극우라는 개념은 한국사회에서는 반공주의나 사상의 자유에 대한 탄압이란 소재와 연결될 수밖에 없어서, 주로 장기수들에 대한 사상전향서(김대중 정부에서 ‘준법서약서’로 바뀐 후 나중에 사라짐)의 문제나 국가보안법의 문제, 그리고 문민정부 이후로 언론들이 주도했던 공직자에 대한 ‘사상검증’ 등이 어떤 이가 ‘극우’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 특히 조선일보 문제에 대해 가장 중요한 판단의 잣대로 작용한 것은 맨 마지막 것이었다.



김영삼이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로 들어가’ 문민정부를 탄생시킨 이후, 언론권력이 정부의 성향을 ‘통제’하는 기제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사상검증이었다. 말하자면 김영삼이 뭔가 진보적이라고 알려져 있던 학자를 장관으로 만든다.... 그러면 월간조선이 “그 개객기 빨갱이야!!”라고 소리친다... 조선일보가 “빨갱이를 공직자로 임명하다니...” 그러면 다른 신문들이 그 말을 그대로 따라하기도 하고 “빨갱이라고 소문난 이를 공직자로 임명하다니 엄훠 그런 경솔한...”이라고 하기도 해서 종국엔 인사에서 낙마하는... 그런 식이었다. 한모 장관, 김모 장관, 이모 장관 (이인제는 아니다.)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런데 김대중 정부 들어와서 조선일보가 저 유명한 “최장집 사건”을 일으켰을 때... 세월이 좀 바뀌었는지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월간조선이 선빵을 날리고 조선일보가 심혈을 기울여 지랄을 했는데도 다른 언론사들이 꿈쩍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당시 중앙일보 권영빈 논설위원은 “뭐냐 이 메카시즘....졸 지겹거든?!”이라고 칼럼에 쓰기도 했다. 말하자면 조선일보가 고립된 것이다.



이걸 보고 강준만이 “오케바리!!!! 딱이군!!!!!! 드디어 걸려들었어!!!!!!!!”이라며 조선일보를 신나게 맹비난해대다가...말지 정지환 기자와 함께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에게 명예훼손 고소를 당하고... 그걸 보고 분노한 홍세화가 한겨레에 “나도 고소하라능!”이라고 칼럼을 쓰고 어이를 상실한 진중권이 “낄낄. 이한우 학동 맛동산 사먹고 싶은가봐. 벌금은 네티즌들이 성금으로 모아서 주자고!”라며 인터넷에서 모금운동을 시작한 것이 소위 안티조선 운동이란 것의 우발적인(?) 시초다. 뭐 이런 식으로 잠깐의 시기 동안 좌파와 우파가 같이 모인 지식인운동이 하나 시작되었고 이것을 대중운동으로 확산시키려고 노력을 했던 것인데... 여기서 우리의 전설적인 홍세화짱의 정리는 이렇다.



“자자, 보라구!! ‘조선일보나 중앙 동아나 별 차이가 없다’고 말했지? 여기서 실천적으로 그게 아니라는게 드러나잖아? 뭐라고? 그건 그때 한번이고 지금은 별 차이없다고? 문화면에 좌파들 얘기도 잘 받아준다고? 에헤... 이 사람들 답답하네. 그러니까 설라무네 그때 저번이 ‘기동전’이었다면, 지금은 ‘진지전’을 하고 있는 거라능! 이렇게 진지전을 해서 평소에 부드러운 이미지로 지식인과 독자들을 속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그 영향력을 가지고 다시 기동전, 그러니까 빨갱이 사냥을 할거라능!!! 이제 정리되지? got it??"



......그렇게 조선일보는 나쁜놈이 되었던 것이다.    



홍세화의 논변은 당시의 구체적인 운동 정국에 대한 탁월한 분석이었다. 그렇게 기민하고 정확했던 분석의 사례를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에 와서 그의 ‘진지전’과 ‘기동전’론을 “조선일보만의 특수성”을 위해 적용하는데는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조선일보는 그후에 홍세화가 말했던 의미의 ‘기동전’을 펼친 적이 없다......OTL



물론 조선일보는 노무현도 괴롭혔고... 요번에 촛불도 괴롭혔다... 그런데 그 논변...혹은 논변 수준에도 못 미치는 땡깡들이 다른 신문들과 비교해 ‘극우’라고 규정지을만한 어떤 특수성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노무현 시대를 거치면서 이런 상황은 더욱 명백해져갔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두 가지 정도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조선일보의 ‘최장집 사건 학습효과’... 결국 최장집은 공직에서 낙마했고 월간조선에 걸었던 명예훼손 소송도 취하하긴 했지만... 조선일보로서도 두 번 다시 그런 식으로 왕따당하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둘은...중앙과 동아가 그후 더욱 꼴통이 되었다는 것... 그 계기는 2001년에 있었던 김대중 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였다. 솔직히 안티조선 초기에 중앙과 동아는 이 운동을 자신들의 영향력을 증대시키는데 이용해 먹고픈 유혹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한놈만 패! 그러면 효과는 나와!!”라는 전략전술적 거시기로 시작한 안티조선 운동의 참여자들이 바랬던 것이었다. 동아는 “신동아 보라능?! 우리 가끔 진보적이라능!!”이라고 말했고... 중앙일보는 “우리는 저렇게 허접한 반공주의자는 아니고 시장의 합리성을 믿는 보수거등여?!”라고 주장하고 싶어했다. 그런데 언론사 세무조사가 언론들을 강타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안티조선 운동은 대중운동의 영역에서 크게 확산되기는 했지만 ‘조중동’은 서로 결합해 버렸다. “아...안되겠다능?!! 우린 같은 편이라능!!!” 특히 90년대 말까진 ‘자유주의자’ 유시민이 칼럼을 쓸 수 있을 정도의 독립된 정체성을 지니고 있던 동아일보가 사주의 그릇된 판단으로 ‘조선보다 더한’ 길로 나아가기 시작하면서 ‘조선일보’의 특수성에 대한 논의는 점점 더 빛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최근의 정국을 통해 생각해보자. 사노련 관계자들 체포 때 조중동은 어떻게 반응했던가? 조선일보는 “옛날엔 사회주의자라고 말하는 문건만으로 법원이 영장 청구해줬는데 투덜투덜... 하여간 조사 좀 더 잘해보라능!”이라고 말했고 중앙일보는 “조사 좀 잘해서 넘기지 왜 바꾸를 맞고 지랄이냐능?”이라고 반응했다. 동아일보는 사설에선 반응이 없었다. 약간의 차이가 감지되기는 하지만, 이거 가지고 뭐라고 하기는 우습다. (예전처럼 조선일보가 ‘기동전’을 한번 더 뛰어준다면 “이...이건 진지전이라 비슷한 거라능!”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말이다.) 게다가 이명박에 대해선 동아일보가 가장 격렬한(?) 옹호자라는 사실이 알려져 있고, 시장권력에 대한 맹동적인 추종에서 중앙일보는 조선일보를 찜쪄먹는다. 이런 사정을 생각해 보면 더더욱 세 신문을 구별하기가 그렇다. 참여정부 말기에 언론운동 단체 관계자라는 사람들이 ‘조중동’이 아니라 ‘조동’이라고 해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참 한심했던 적이 있다. 중앙일보의 폐해도 만만치 않은데 단지 중앙일보과 노무현과 잠깐 밀월관계를 형성했다는 이유만으로 빼려고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히려 촛불시위 지지자들의 조중동 반대운동이야말로 안티조선 운동이 지니고 있던 실천적 효용성이 끝났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판단된다. 물론 조중동에 이번에 문제의식을 지니게 된 시민들은 과거 안티조선 운동의 참여자들이 만들어낸 많은 이론이나 서사를 통해 그들의 문제의식을 환기시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과거에는 ‘조선일보’로 특징지을 수 있었던 것이 이제는 ‘조중동’으로 묶어서 비판할 수밖에 없는 상황적 변화가 있었기에 그들이 ‘안티조선’이 아닌 ‘안티 조중동’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도 명백한 것으로 보인다. 21세기 초의 안티조선 운동과 촛불정국의 안티조중동 운동은 시민사회의 언론운동의 연장선상에 있고, 문제의식도 동일하다. 그러나 전략의 부분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조선일보의 특수성을 말하기 위해, 많은 이들은 친일, 친독재, 수구세력 옹호...의 레퍼토리로 대변되는 조선일보 88년의 역사를 모두 읊는다. 그것은 이른바 ‘극우 헤게모니’론을 통해 조선일보의 특수성이 이론적으로 분명히 정립된 상황에서는, 가능하고 필요한 서사였다. 하지만 그것이 무너져버린 지금 상황에서, 그 역사를 읊는 것만으로 조선일보와 다른 신문의 차이를 말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가령 친일을 생각해보자. 1930년대 조선일보의 맹목적인 친일은, 현재의 조선일보 문제와 연관을 지니는가? 큰 맥락에서 그들이 줄곧 권력추종적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고 말해볼 수도 있다. 하지만 친일로 따지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동아일보도 했다. 물론 프랑스에서 그랬듯 그런 신문들은 해방이 되자마자 폐간시켰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건 정당하다. 그런데 그 친일을 한 동아일보가 1970년대까지 ‘일등신문’이었고, 그것도 조선일보식의 ‘일등신문’이 아니라 권력에 대한 가장 매서운 비판자로서의 일등신문이다는 사실은 기억해야 한다. 박정희 정권의 광고탄압 사건 이전까지의 동아일보를 부인할 수 없다면, 친일을 했기 때문에 바로 너는 오늘도 ㅅㅂㄹㅁ다라는 식의 접근은 무리가 있다. 친일파야 개인의 정체성을 지니지만, 오늘의 언론사를 구성하는 이들은 그때의 구성원들과 전혀 다른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 조선일보 방우영 회장은, 물론 친독재였고 박정희한테 ‘밤의 대통령’이란 별명을 하사받기도 했다. 그런데 이 별명은, 훗날 그의 팔순잔치 때 조선일보 임직원들이 주장했듯 그가 정치적으로 힘이 세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 아니라 밤에 박정희랑 안가에서 술먹고 놀 때 기생이랑 잘 논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고 전해진다. 친일, 친독재 운운하지만 박정희 정권 때까지 조선일보는 굳이 안티를 해야 할 대상도 아니었다. 전두환 집권 당시 노골적으로 용비어천가를 부르고, 그후 파시스트 정권의 물심양면의 지원을 받으며 동아일보를 제끼고 일등신문이 된 이후의 조선일보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일보의 모태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조선일보가 80년전에 친일을 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한 일이 아니라, 역사의 흐름 속에서 우연성과 힘의 관계들이 조응하여 벌어진 일이다. 1990년대 후반의 동아일보가 나름의 품격은 지키고 있다가 급격하게 ‘수구’세력에 합류한 사건도 그렇고, 21세기 이후 소위 ‘조중동’이 예전에 비해서도 점점 더 친화성을 키워가고 있는 현실도 그렇다. 안티조선 운동의 분석틀은 여전히 유효하겠지만, ‘안티조선’이라 일컬어지는 전략의 부분에서는 분명 현실의 힘의 관계들을 토대로 다시 구성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제 애초의 질문으로 돌아오자. “안티조선이라는 프레임은 여전히 유효한가? 즉, 진보신당의 언론 정책에서, ‘조선일보’만을 특별히 배제해야 할 어떠한 실천적인 타당성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고 느낀다. 아예 안티조중동을 실천하는 것은 논변적으로는 깔끔하지만 현실에서는 지나친 손해를 보게 되고, 안티조선을 얘기하는 것은 굉장히 상징적인 의미에서 체면치레를 하는 수준에 그친다. 굳이 나더러 택한다면 후자를 택하는게 좋겠다고 주장하고는 싶지만, 이 정도 수준의 타당성이라면 이 모든 것을 반대하는 이들의 입장에도 일리가 없다고는 볼 수 없다. “김수민의 (안티조선 논변에 입각한) 주대환-최병천 비판이 이 단순하지 않은 문제에 대해 너무 단순한 대답을 도출해낸 상황에서 이루어진게 아닌가 생각”한다는 첫 번째 문단에서의 나의 말에 대한 의미가 이제는 드러났기를 바란다. 물론 맨처음에 언급했듯이, 이는 “주대환 논쟁”의 핵심적인 논점과는 관계없이 별도의 논점을 구성하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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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줄 안 되는 제 원고도 책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음주에 서점에 깔리고 보도자료가 나올 거라고 합니다.




MBC_언론사 보도자료.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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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영방송, 우리의 눈과 귀가 되어줘!

촛불의 거리에 나선 집단지성들의 공영방송 지키기 프로젝트


2008년 4월 29일, <PD수첩>이 「미국산 쇠고기, 과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 편을 방송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5월 2일, 청계천 소라광장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첫 촛불집회가 열렸다. 6월 10일에는 최대 인파를 동원하며 촛불집회가 정점을 이뤘고, 6월 13일에는 시위대가 마포대교를 건너 KBS 본사 정문 앞까지 가서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PD수첩>에 대한 검찰수사와 촛불집회 참가자에 대한 사법처리 등 본격적인 역풍이 일고 있는 지금까지 촛불집회는 계속되고 있다. 광장에서 피어 오른 촛불은 오랫동안 회자될 너무도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광장은 고립되어 있던 개인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어떠한 구심점도 없이 다양한 주장을 제기하는 역동적인 공간이 되었고, 시민들은 촛불집회를 직접 생중계하며 자신들의 의견을 스스로 전달하는 낯선 풍경을 연출했다. 이번 촛불집회를 87년 6월항쟁과 비교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2002년의 촛불집회와 비교하는 사람도 있고, 지금까지의 상상력을 전환시키는 새로운 민주주의에 대한 실험이었다는 해석도 나왔다. 촛불집회가 과연 현실적인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회의적인 분석도 있었다. 그리고 대중은 언제나 옳은가에 관한 아주 비판적인 질문도 흘러 나왔다.


촛불집회에서 또 하나의 낯선 모습은 시민들이 보여준 MBC에 대한 지지였다. MBC에 쏟아지는 유무형의 탄압에서 MBC를 지켜주겠다고 시민들이 직접 나선 것이다. 촛불집회의 도화선이 되었던 ‘미국산 쇠고기 방송’을 제작한 <PD수첩>에 대해 무한한 애정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이명박 정부의 방송 장악 시도와 공공방송 민영화 정책에 맞서 MBC가 저널리즘의 기본 정신에 충실히 복무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촛불을 드는 이들도 있었다. 광장의 시민들은 새로운 의사소통 방식을 실험함과 동시에 주류 미디어인 공공방송의 역할에 대해 되새겨볼 수 있었다. 이 책은 이번 촛불집회에 직접 카메라를 들고 나섰던 미디어 활동가로부터 블로거, 대학생, 대학교수, 신문 및 인터넷 언론 기자, 그리고 <PD수첩> ‘쇠고기 방송’을 만들었던 PD까지 스물네 명의 필자들이 모여 촛불집회의 의미와 미디어 공공성의 위기 문제,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장악하고 있는 세계에서 공영방송이 어떤 길을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다양한 형식으로 차이나는 시선들을 담고 있다. “대중들을 공영방송의 외부자가 아닌 핵심 당사자로서 인정하고, 미디어공공성 의제를 능동적으로 논의하고 직접 행동할 주체로 설정”하고 있다. MBC에 관한 특수한 논의로부터 시작하지만, 관심의 폭을 궁극적으로는 공영방송과 미디어공공성 전체로 확산시키고 있다.



촛불집회의 도화선, <PD수첩 방송>

이번 촛불집회의 도화선이 되었던 쇠고기 관련 방송을 내보낸 <PD수첩>에 대해 많은 이들이 지지를 표했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적인 지지라기보다는 공영방송의 민주주의적 미디어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와 요구를 담은 조건부적 지지에 가까웠다. 우석훈 교수는 이번 <PD수첩>의 쇠고기 관련 방송이 문제에 대해 상식적인 수준으로 접근했을 뿐 지금까지 여러 사람들이 제기해온 민감한 사안들에 대해서는 깊숙이 다루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놀라운 것은 “광우병에 대한 이 정도의 스케치만으로도 한국이 발칵 뒤집혔고, 이 프로그램을 만든 방송국 자체를 민영화시키겠다거나 아니면 사장을 바꿔버리겠다는 논의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인터넷 논객 한윤형은 <PD수첩>의 ‘쇠고기 방송’ 이후 광우병에 대한 공포가 합리적인 수준 이상으로 고조된 것은 사실이지만, <PD수첩>이 후속 보도를 통해 쇠고기 협상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하는 동안 조․중․동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묻는다. <PD수첩> 방송이 ‘비과학적이다’ ‘광우병 괴담을 몰고 왔다’ ‘촛불집회의 배후세력을 찾아야 한다’는 공격만 계속할 뿐 쇠고기 협상 문제를 객관적인 틀로 분석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제대 언론정치학부 김창룡 교수는 <PD수첩>에 대한 검찰 수사 및 ‘쇠고기 방송’의 위법성과 관련된 주요 쟁점들을 분석하며, 이번 수사가 공영방송을 민영화하고 언론을 장악하려는 이명박 정부의 포석으로 기능하는 표적수사가 아니냐고 되묻는다. <PD수첩>의 김보슬 PD는 민영화된 MBC에 대한 가상 시나리오를 제시하며, 만약 MBC가 민영방송국이었다면 이번 ‘미국산 쇠고기 방송’과 같은, 정부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자본의 심기를 건드리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공영방송이라는 울타리”가 없다면, 힘의 논리에 의해 구속받지 않고 정치적․경제적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방송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새로운 민주주의 가능성을 보여준 촛불시위, 그리고 MBC에 대한 시민들의 지지

불가능할 것만 같던 새로운 연대의 공간이 탄생한 것처럼 보였다.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학술적 서술어에서 벗어나 육체성을 가진 목소리로 살아났다. 다양한 구호를 외치며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들었다. 에세이스트 김현진의 표현처럼 “어떤 이는 쇠고기 문제만 해결되면 안심하고 거리를 떠날 것이고, 어떤 이는 대운하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거리를 떠날 수 없을 것이며, 또 어떤 이는 주요 공기업 민영화 문제를 끊임없이 근심하며 거리에 나올 수도 있겠고, 다른 어떤 이는 반미나 반제국주의 문제가 풀리기 전에는 거리에서 발을 떼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을 수도 있다.” 사람들은 역동성이 살아 있는 광장에 모여 이질적인 견해들을 쏟아냈고, 기존 미디어의 배포망 한계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말을 퍼트렸다. 무형의 대상으로 존재하던 대중이 직접 발화를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와중에 약간은 기이한 장면이 목격되었다. 시민들이 MBC에 대해 쏟아지는 유무형의 탄압에서 MBC를 지켜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솔직하게 말해 조금 어이없기는 하다. 아니, 세상이 어이없게 변했다고 해야 할까. 사람들은 지배 언론을 믿지 못해서 직접 카메라를 들고 집회장에 나왔다. 지배 언론들이 촛불집회를 1~2분 정도만 보도하고 한두 문장짜리 단신으로 처리하는 것에 화가 나서 열댓 시간 동안 촛불집회를 실시간으로 중계하고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다녔다. 경찰의 채증에 맞서 시민들도 채증을 했다. 그랬던 우리가 이제는 《오마이뉴스》도 아니고 《프레시안》도 아니고 《한겨레》도 아니고 《경향신문》도 아니고 아고라도 아닌 KBS와 MBC를 지키겠다고 촛불을 들다니, 세상이 뭔가 이상해도 단단히 이상하게 돌아간다.”


“그것은 실로 독특한 광경이었다. 거리에서 함께 걷던 다양한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MBC를 연호할 때, MBC는 그들에게로 와서 ‘마봉춘’이 되었다. 그때 그들이 부르는 MBC는 방송사의 이름 같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어떤 친구의 이름처럼 들렸다. 인터넷상에서도 ‘승리의 MBC’ 하는 식으로 MBC는 신뢰를 받았지만 거리에 나온 MBC 카메라는 그 이상의, 애정의 대상이 된 것을 목격했다.”


시민들은 타자와의 직간접적인 상호작용 속에서 의견을 구축해나가는 대안적인 네크워크의 가능성에 기대를 걸면서도, 현실적인 힘을 가진 강력한 여론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기존 미디어에 일정 정도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PD수첩>의 ‘쇠고기 방송’이 시민들을 광장으로 이끌어내는 모습을 보면서 시민들은 주류 미디어가 얼마나 엄청난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지 느꼈던 것이다. 블로거 자그니의 지적처럼 “네트워크형 언론과 주류 미디어는 공존”을 해야 하는 것이지, 네트워크형 미디어가 기존 언론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다. 또한 촛불의 힘이 소진되고 나면 보수 정부의 대대적인 역풍이 불 것이고, 시민들은 다시 관객의 자리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 촛불집회가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대안적 네트워크의 역능성에만 기댈 수는 없는 것이다. 시민들은 ‘쇠고기 방송’을 했던 <PD수첩>에게 힘을 주고, 앞으로 MBC와 KBS가 저널리즘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공영방송으로서의 견고한 제자리를 찾아주려고 했다.


“청계광장과 광화문, 시청 앞 광장을 거점으로 타오르던 촛불들은 이미 여의도의 KBS, MBC, 한나라당 당사 앞으로도 옮겨 붙었다. 먹고사는 문제뿐만 아니라 보고 듣고 말하고 소통하는 문제 또한 인간다운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촛불의 산실이 된 다음의 아고라도, 촛불의 재생산 장소가 되고 있는 광장과 거리도, 언제든 점화될 수 있는 불씨, 즉 ‘화두’를 던져줄 수 있는 공영방송도 국민들에게 지속적인 공론의 장이 되어야 한다.”



MBC에 대한 전언

MBC에 대한 지지에는 언론으로서의 역할을 보다 충실히 수행하라는 요구가 담겨 있었다. ‘전쟁없는세상’ 활동가인 이용석은 ‘다함께’에 대한 집단적 비난, 예비군복을 입고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등장, 그리고 국가의 상상력을 넘어서지 못하고 ‘애국주의’에 너무 많은 것을 호소하는 이번 촛불집회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하면서 언론이 잘 드러나지 않는 사실이나 소수자의 목소리까지 다루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프레시안》의 채은하 기자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이 타결되던 4월 18일부터 <PD수첩> ‘쇠고기 방송’이 나간 4월 29일 사이에는 MBC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의 문제점을 거의 보도하지 않았고, 다른 거대 신문사와 마찬가지로 ‘한미FTA 체결을 위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 개방은 피할 수 없다’는 전제에서 보도를 해왔던 점을 지적하면서 MBC도 시장지상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광우병은 문제지만 한미FTA는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광우병 쇠고기와 한미FTA 문제를 분리된 것처럼 사고하는 한, 쇠고기 논란의 핵심인 ‘초국적 자본’의 문제에는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촛불이 꺼지고 나면 이명박 정부는 보복 및 재발 방지에 나설 것이고, MBC는 지금의 <PD수첩>이 그렇듯 소수 시민들의 지지 외에 기댈 곳이 없어질 수 있다. 그럴 때 어떻게 할 것인가? 특히 본질적으로는 미국산 쇠고기 문제와 같은 문제이면서도 ‘양태’는 다른 여러 한미FTA 분야들, 더 나아가 ‘MB씨’의 시장지상주의,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정책들을 어떻게 보도할 것인가?”



MBC, 공영방송의 길을 말하다

이명박 정부는 촛불집회를 통해 드러난 국민의 마음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고 하면서도, 집회 참가자들을 잡아들이고 네티즌 수사를 지시했다. 입건된 시위 참가자들에게 과중한 벌금을 물리기로 하고, 집회 과정에서 나온 쓰레기 처리비는 집회 참가자들이 부담하도록 하겠다며 갑자기 모든 것을 법적, 경제적 문제로 치환시켜버리는 기이한 정책까지 나타났다. 그리고 <PD수첩> 에 대한 검찰수사를 시작하면서, 이명박 정부는 자신들의 무책임한 정책 수행에서 비롯된 문제들을 모두 <PD수첩> 때문에 벌어진 일인 것처럼 몰아가고 있다. 본질은 은폐한 채 책임 뒤집어씌우기에 나선 것이다. 어쩌면 <PD수첩> 을 수사하고 있는 검찰의 발표대로 <PD수첩> 이 어느 정도 공정하지 못한 보도를 한 것으로 밝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방송의 진실성에 대한 공방이 아니라 이 모든 공격 뒤에는 공영방송에 대한 민영화 담론과 이명박 정부의 언론 장악 의도가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부실경영으로 적자를 냈다며 KBS 정연주 사장을 공격하는 것이나 괴벨스를 연상시키는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의 언론 정책도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가 언론을 ‘적극적 관리와 통제’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언론에도 ‘자율과 경쟁의 시장원리’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촛불의 열기가 사그라지면 이명박 정부의 역공이 시작될 것이라는 우려는 너무나 노골적으로 현실화되고 있다. 대중들이 촛불을 들고 MBC에게 지지를 보낸 것은, 어쩌면 바로 이러한 신자유주의 정부의 언론 탄압 속에서 MBC가 공영방송으로서의 제역할을 다하라는 바람에서였을 것이다. ‘경제 위기론’은 많은 경우 효과적으로 기능해왔다. 경영 합리화를 내새워 공영방송을 민영화하자는 이명박 정부의 주장도 언제 여론의 힘을 얻게 될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공영방송 MBC는 어떠한 길을 가야 할 것인가.

김정섭 《경향신문》 기자는 신자유주의가 실제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경영 합리화 요구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고 본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의 민영화 요구를 잠재울 수 있도록 매출을 늘릴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외주제작에 너무 의존하지 말고 자체제작 역량을 늘리고, 프로그램을 다양화하는 등 내부개혁을 실시해야 한다. 문화관찰자 완군은 방송사가 시청률 표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면 공영방송으로서 역할을 다하는 일은 요원할 것이라고 본다. 시청률와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 공공성의 원칙을 가장 우선순위에 둘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권용협 부산시청자주권협의회 사무국장은 이번 촛불집회에서 그 가능성을 확인된 것처럼, 대안 미디어와 주류 미디어의 연대실험도 가능할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퍼블릭액세스와 관련한 부산MBC의 성공적인 사례를 제시하며 주류 미디어가 일반 시민들에게도 발언할 기회를 열어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여는 글

공영방송 MBC와 함께하는 민주사회를 꿈꾸다 _전규찬


1 _ 이면을 꿰뚫어보는 거울, <PD수첩>

나의 지지를 보낸다, <PD수첩> _우석훈

우리, 그냥 방송하게 해주세요~ 네? _김보슬

<PD수첩>에 대한 검찰 수사, 어떻게 볼 것인가 _김창룡

<PD수첩>은 계속 ‘영혼이 있는 PD’들이 만들어야 한다 _고재열

동시대 민주주의의 보루를 위하여 _한윤형


2 _ 흔들리는 촛불의 열기 속으로

우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MBC는 ‘마봉춘’이 되었다 _김현진

촛불을 대변하는 카메라를 기다리며 _박솔잎

꺼지지 않는 불씨, 화두를 던지는 MBC _최영화

촛불집회, 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도하라 _이용석

MBC, MB씨를 믿지 마세요 _채은하


포토몽타주

공영방송의 일상 풍경 _김아란



3 _ MBC, 공영방송의 길을 모색하다

MBC, 창의성으로 작동하는 매트릭스 _홍성일

공영방송의 민영화 담론, 무엇이 문제인가 _김동준

‘괴벨스의 주둥이’, 그리고 신재민 _최성진

‘거리의 민중성’이 민주주의와 충돌한다면 _민임동기

MBC여, 진로를 돌려라 _김형진

<MBC 뉴스데스크>에서 희망 찾기 _도형래


4 _ MBC에게 건네는 전언

방송, 그 사회적 뇌 회로를 누가 장악할 것인가 _김민웅

후생 사회의 양호한 미디어가 될 수 없다면, MBC 너는 내 라이벌! _완군

10년 전 알바생이 MBC에게 _자그니

최시중 방통위원장에게 보내는 커닝 페이퍼 _허경

MBC 내부개혁, 이렇게 하자 _김정섭

지역 MBC에게 바란다 _권용협


닫는 글

알뜰한 괴물로 산다는 것은 _김현철








편저자|집단지성

‘집단지성’이란 다수의 개인들이 서로 협력 혹은 경쟁을 통해 구현해낸 집단적 지적 능력을 말한다. 2008년 미국 쇠고기 수입 협상 반대 촛불집회를 계기로 이러한 집단지성을 환하게 꽃피운 이들은, 이미 조직화된 거대 권력에 비해 그 힘이 미약할지 모르나 자유로운 소통과 토론을 통해 이상적 민주주의를 실현해낸, 동시대의 작지만 강한 히어로들이다.



고재열 파업 기자의 퀴즈왕 신화를 이뤄냈던 《시사IN》 기자  권용협 지역 미디어 공공성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지역 영상활동가  김동준 언론 정책을 연구한 지 6년째, 그리고 박사 수료 3년째인 공공미디어연구소 연구실장  김민웅 《프레시안》에서 촛불집회를 생중계하며 젊은 기자들과 함께 현장을 누비는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성공회대학교 NGO 대학원 교수  김보슬 MBC 보도국 비정규직에서 출발하여 운 좋게 PD 시험에 합격, 진실을 향한 멈출 수 없는 날갯짓을 하고 있는 <PD수첩>의 PD  김정섭 미디어를 전문적으로 고민하고 있는 《경향신문》 기자  김창룡  AP통신 서울 특파원 출신의 인제대학교 언론정치학부 교수  김현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졸업한 후 《시사IN》 《매거진t》 등에 고정 칼럼을 쓰고 있는 에세이스트  김현철 MBC 입사 10년차 PD로 전국언론노동조합 MBC지부 홍보국장  김형진 착하지도, 선하지도, 친절하지도 않게, 그렇게 까칠하게 무작정 들이대는 심정으로 7년째 작업 중인 미디어 활동가  도형래 미디어·언론운동을 더 잘하기 위해 대학원에 다니고 있는 공공미디어연구소 연구원  민임동기 미디어비평 전문지 《미디어스》에서 재밌게 ‘놀고’ ‘일하고’ 있는 기자  박솔잎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미선이․효순이 추모 촛불과 함께 불태웠던, 이제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학생  완군 미디어의 ‘공공’성을 빙자하여 ‘공익’적으로 놀고 있는 문화 관찰자  우석훈 스스로 C급이라 평하지만 언제나 A급을 압도하는 명랑한 에너자이저 경제학자  이용석 평화의 결과로 병역거부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병역거부를 하면서 평화를 알아가게 된 병역거부자  자그니 춤과 노래, 글쓰기와 여행이 좋아서 취직을 미루고 있는 백수 블로거  전규찬 자본권력과 국가권력, 매체권력, 지식권력을 상대로 결정적인 왼손 펀치 한 방을 날리는 선수로 남고 싶다는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채은하 미디어라는 복잡하고 난해한 영역을 ‘습득’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프레시안》의 미디어 담당 기자  최성진 정치 제도와 정치 인물에 특히 관심이 많은 《한겨레21》 정치팀 기자  최영화 이런저런 세대 담론의 ‘주변인’으로 문화 연구를 하고 있는 대학원생  한윤형 자칭 ‘키보드 워리어’, 타칭 ‘인터넷 논객’이라 불리는 예비 백수 후보  허경 정체불명, 스타일 유지, 무대는 전국구를 지향하는 미디어 활동가  홍성일 지배당하지 않기, 휘둘리지 않기를 꿈꾸는 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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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두시위의 영향이 어떤 식으로 나타날지 아직 섣부른 예측이 힘든 상황이지만 보수언론, 이른바 '조중동'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가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2001년 언론사 세무조사 정국 이후 언론들이 가장 비판을 받는 시점인 것인데, 그 시절을 돌이켜봐도 이번이 훨씬 더 강도가 센 것 같다. 촛불시위의 지지자들은 조중동 광고주 불매운동이라는 초유의 방법으로 조중동을 압박했고,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 실은 비슷한 사례라는 생각이 들고 있다.- 한밤의 TV연예인가 하는 오락프로에 대한 서태지 팬들의 광고주 불매운동이 기억난다. 역시 '쪽수'가 많으면, 좋다.) 줄기차게 미국 쇠고기 비판을 괴담으로 몰아부치던 조중동의 논조를 어느 정도 변화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조중동 광고주 불매운동이 당장 조중동의 논조를 시민의 입장에서 '길들이는' 데에는 효력이 있을지라도, 장기적으로 언론환경을 개선하는 효과가 크다고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지적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경향신문의 약진은 의미가 있다. 시사in의 보도에 따르면, 경향신문은 5월 한달 동안 5천명의 정기구독자를 확보했다고 하며  이 숫자는 이 신문이 1년에 확보하는 정기구독자 수에 맞먹는다고 한다. 이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경향신문이나 한겨레 같은 언론이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튼튼한 기반을 가지게 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우리의 민주주의를 탄탄하게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경향신문의 사정이 더 좋아질지에 대해선, 여전히 속단할 수 없다. 구독자수의 증가가 신문 만드는 '기업'의 수익률을 높이는데 기여한다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구독자수가 증가한다면 장기적으로는 그런 효과가 있겠지만, 이 정도 증가로는 아직 효과를 말하기가 어렵다. 시민들의 의견광고로 현재 경향신문의 1면 광고료는 매우 올라가 있는 상황이고 (시사in 보도에 의하면, 현재 경향신문 1면 광고료는 조중동의 그것에 필적한다고 한다.) 이것은 그 자체로 경향신문의 재정에 도움이 되겠지만, 의견광고가 상시적으로 나올리도 없는 만큼 안정적으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구조는 아니다.


언론의 경우 구독료가 수익의 2할이면 광고가 수익의 8할이라고 한다. 그리고 광고료는 발행부수나 구독자수에 의해 책정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시장 자체가 투명하지 않다 보니 기존 언론에 유리한 점이 많고, 무가지나 경품 등을 통해 '돈 놓고 돈 먹기' 게임이 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런 점들을 보완하기 위해 신문고시가 생겼지만, 이명박 정부는 신문고시를 완화시킬 생각을 가지고 있다.


경향신문이나 한겨레신문이 겪게 되는 어려움의 원인은 그것만이 아니다. 만일 두 개의 신문이 비슷한 구독자수를 확보하고 있다면, 기업은 어떤 신문에 광고를 싣고 싶어할까? 아무래도 기업에 유리한 기사를 실어주는 신문에 싣고 싶어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기업 생태계는, 기업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고, 대기업 중심적이며, 수많은 중소기업들도 주로 대기업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대기업의 이익을 거스른다면 광고를 따내기가 매우 어렵다. 꽤 많은 구독자수를 확보하고 있는 시사in이 광고 분야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사정도 이에 기인한다. 시사in의 탄생 자체가 삼성과의 불화를 통한 것이기는 했지만, 삼성과 불화했다고 해서 다른 기업의 광고도 들어오지 않는다니 이건 좀 심하다. '단결'은 프롤레타리아의 무기인데 기업주들이 더 잘 단결을 하는 것이다. 이건 농담이고, 아마도 대기업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있는 독립적인 중소기업이 적은 한국의 현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이유들 때문에 경향신문은 지금보다 구독자수가 훨씬 늘더라도 여전히 조중동만큼의 수익을 올리기가 어렵다. 신문사업이 사양산업이 되고 있고 조중동조차 방송 진출에 뜻을 품고 있다는 풍문이 도는 지금 상황에서, 미래를 장담하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답은? 뾰족한 수는 없다. 그래도 일단은 구독자수를 늘려야 한다.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구독자수가 지금보단 늘어야 한다는 대전제 아래 쓸 수 있는 방법들일 것이다.


프레시안의 경우는 사정이 더 어렵다. 쇠고기 정국 이후 프레시안의 접속자수는 세배 가량으로 증가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접속자수의 증가는 프레시안의 재정상황을 '전혀' 개선시키지 못할 것이다. 적어도 한국에서 사람들은 아직 인터넷에서 접속자수를 통해 이윤을 창출해내는 성공적인 방식을 계발해내지 못했다. 해외에서 수입(?)된, 프레시안도 사용하고 있고 (이 블로그에도 장착되어 있는) 구글 에드센스 정도가 하나의 방법인데, 이것의 수익은 신통한 수준이 못 된다. 프레시안은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는 유일한 '정론지'라 볼 수 있다. 나는 네이버나 다음에서 뉴스 찾기가 성가실 때는 아예 프레시안에 접속해서 메인에 올라온 글을 다 읽어본다. 그만큼 그것의 가치는 소중하지만, 내가 아무리 클릭을 해줘도 프레시안은 돈을 벌지 못한다.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최근 '프레시앙'이란 이름의, 일종의 유료 구독자 모임을 출범시켰지만 돈을 낸 이들에게 차등적인 서비스가 제공되는 것도 아닌 만큼 유인효과가 적다. 당장 이렇게 말하는 나도 학생 신분을 핑계로 프레시앙에 가입하지 않고 찜찜하게 무료로 읽고 있으니 말이다.
 

조중동이 밉다고 해서, 욕이나 실컷 하고 끝낼 일이 아니다. 블로고스피어도 좋고 다음 아고라도 좋지만 효율적으로 양질의 정보를 얻기 위해선 경향신문이나 프레시안 같은 정론지 형태의 언론의 존재가 소중하다. 시민들이 이런 언론들을 키우기 위해선 조중동을 지지하는 것보다 더한 관심과 배려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번 기회에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점에서 '경향신문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생겼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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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분수대, 거짓말하는 능력

부동산 투기 의혹을 받고 있는 이명박 정부의 국무위원 후보자들이 너무 ‘정직’해서 사태를 악화시키는 듯하다. ‘유방암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은 기념’으로 남편이 오피스텔을 선물로 사주고, ‘자연을 사랑해서’ 절대농지를 구입했다는 해명이 그렇다. “감기가 아니라는 판정을 받은 기념으로 새 차를 사주지는 않았나” “자연을 사랑하면 오지의 숲을 구입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비난이 들끓고 있다. 불리한 결과를 뻔히 예측할 수 있는 데 굳이 그런 해명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게 ‘사실’이어서 그대로 밝혔다는 해석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공직자는 정직해야 하지만 때론 거짓말을 하는 능력도 필요하다. 정직이 불필요한 상처를 국민에게 주는 경우에는.


칼럼 내용 한줄 요약 : "국무위원 후보자들은 대통령 각하께 거짓말하는 방법을 배웠어야 했다."


......정말 잘 하는 짓이다. 아니 어떻게 이런 식의 옹호를 할 수 있지? 이런 거는 봐도 반론을 할 의욕이 안 생긴다. 벌써 '성지'가 되어 '네티즌'들에게 조낸 까이고 있구나. 이게 무슨 정직과 부정직의 문제인가? 얼마나 할 변명이 없었으면 저런 얘기를 하겠느냐는 생각을 해야지. 물론 그들이 정치의 생리를 몰랐던, 완곡화법에 능숙하지 못했던 사람들이라는 점은 맞는 말이지만.


네티즌에게 뇌가 없다는 욕을 먹고 있는 중앙일보 논설위원은 너무 '정직'해서 사태를 악화시키는 듯하다. 자신이 핥아주는 정권의 국무위원 후보들이 정치인들이 흔히 하는 교묘한 거짓말을 못 해서 옹호하기가 더욱 어렵게 되었다는 진심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으니 말이다. 불리한 결과를 뻔히 예측할 수 있는데 굳이 그런 글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심정이 '사실'이어서 그대로 밝혔다는 해석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언론인은 정직해야 하지만 때론 거짓말을 하는 능력도 필요하다. 그의 내심이 너무 시커멓게 썪어 있어서 불필요한 역취를 국민에게 풍기는 경우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