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후 블로그 벳지

덧글로 쓰려고 했는데 한정없이 길어져서 본문으로 씁니다. 하늘빛마야 님께 양해를 구하며, 트랙백을 보냅니다. 하늘빛마야 님의 질문은 라캉 논쟁에 대한 생각 정리 에 달린 덧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글 내용의 어떤 부분은 본문에서도 언급된 홍준기 선생님의 <라캉과 현대 철학>을 뒤적이면서 따왔습니다. 따옴표 있으면 통으로 인용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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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님의 의문은 상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하면 정신분석학을 분과학문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신분석학의 자기규정에도, 실질적인 내용에도 합치하지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프로이트의 경우 (당대엔 심리학이 이만큼 발달하지도 못했으니) 정신분석학을 자연과학이면서 메타심리학이라 생각했지만, 그 메타심리학의 내용은 애초부터 철학적 맥락에 포섭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무의식 개념은 데카르트적 주체에 대항한 하만, 쇼펜하우어, 니체의 전통 속에 있다고 해석됩니다. (별로 관심없으시겠지만 프로이트가 니체를 직접 읽은 건 아니고, 니체를 읽은 누구를 읽은 누구의...뭐 이런 식으로 서술을 합니다.)


라캉은 이른 시기부터 프로이트에게 주석을 달면서 프로이트의 과학주의가 일정한 역할은 했지만 분명한 문제가 있다고 얘기했고, 정신분석학을 경험주의적 모델이 아니라 논리적 모델로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즉 라캉의 이론은 그 자신이 프로이트파의 의사가 아니었다면 시작되지는 않았겠지만, 기본적으로 실험주의에 입각한 모델임을 스스로도 부인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데카르트에서 훗설에 이르는 주체 철학에 '정신분석학의' 코멘트를 달기 시작하죠.


그래서 굳이 따지자면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출발부터 경험과학이 아니라 하나의 사변적 논리에 가깝습니다. 물론 그 논리를 구성하는데 '임상'에서 도움을 얻었다는 말을 하곤 있지요. 하지만 그보다는 프로이트의 기존 이론에 구조주의 언어학을 도입해서 논리적으로 재구성한 부분이 크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이 이론에서 경험과학을 배제한다 해도 새로 재구성을 해야 할 부분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임상 과정을 통해 경험주의적으로 입증하려고 한 반면, 라캉은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접근을 시도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임상의 부분을 배제한대도 이론에 대대적인 '수정'이 필요하진 않을, 그런 이론입니다. 세상에 이런 종류의 과학은 없습니다. 제가 애초에 "라캉 정신분석학은 과학이 아니다"라고 단언하고 시작하는 이유는 그래서이죠.


저희같은 인문대생의 입장에선 애초에 라캉의 임상에 대해서는 배울 일이 없고, 그가 주체에 대해 어쩌구 저쩌구 한 부분에 대해서만 읽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충분한 철학적 함의를 가지고 있지요. 그가 의사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면, 그저 근대철학에 대한 어떤 주석가라고만 이해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라캉은 프로이트를 '데카르트주의자'라고 규정했고, 정신분석학은 실존적 공허 혹은 존재의 결핍에 시달리고 있는 주체, 분열적 주체가 타인들과 세계 속에서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이 '이상적'인지를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규정은 명백하게 철학적이거나, 윤리학적이죠. 그래서 <라캉과 현대철학>의 저자 홍준기 선생은 정신분석학을 일종의 윤리학이라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라캉은 임상에서 효력이 없으므로 철학적 논의의 유효함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다,는 말을 들으면 꽤나 여러가지 생각이 듭니다. 가장 방어적인 입장에서 말하더라도 "임상의 유효성에 상관없이 그의 이론은 이미 철학에 편입되었다. 이런 수준의 철학적 논의가 과연 반드시 경험과학에 대한 메타 이론으로 나와야 하는지는 의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캉의 철학을 색출해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 경우엔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라캉에게 영향을 받은 철학자들은 어찌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 가령 동시대의 철학자인 데리다도 라캉과의 논쟁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임상의 유효성 문제 때문에 라캉을 도려내면서 데리다의 일부 논리에 반박한다면, 데리다가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요? 반대로 임상의학자도 아닌 데리다가 어떤 부분에서 라캉과 비슷한 통찰에 도달했다면, 라캉의 통찰 역시 임상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닐까요? 이것들은 이미 경험과학에서 대단히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임상이론이 구체적인 정신질환을 고치는데 무능하다고 해서 이런 맥락이 모두 사라질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습니다.


여기까지 내용을 요약하자면, 1) 라캉 이론의 출발은 과학과 거리가 멀었고, 2) '대상 이론'이 따로 있고 '메타 이론'이 따로 있는게 아니라 애초부터 철학적 이론에 가까웠으며, 3) 여러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쳐왔기 때문에 도려내자고 얘기할 경우 도대체 어디까지 도려내야 할지 알 수 없다. 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생각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관한 철학적 이론들은, 마음에 관한 과학적 학문인 심리학의 데이터를 배경으로 형성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강력한 반론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장하게 될 경우에는, 라캉과 라캉에게 영향받은 철학자들의 논의 정도가 아니라 전통철학의 대부분을 도려내야 할 것 같다는 문제가 생깁니다.


가령 훗설의 현상학을 보면 '데카르트의 전통에 따라' "선험적 주체가 객관적인 인식을 보장한다는 것을 밝히고자" 합니다. 라캉의 이론이 어찌됐든 인간의 마음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심리학의 데이터 위에 서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렇게 얘기한 훗설에게도 같은 기준이 적용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까 라캉이 정신분석학의 정의를 내리신 부분을 보셨지요? 얘기하는 레벨이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관한 철학적 이론들은, 마음에 관한 과학적 학문인 심리학의 데이터를 배경으로 형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현존하는 심리철학의 논의를 넘어 대륙철학에까지 적용한다면, 우리는 굉장히 많은 철학사조를 도려내거나, “심리학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 했을 때 생긴 역사적 유물”로 치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생각은 직관적으로 볼 때 꽤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지닐 수 있을 것 같고, 또한 꽤 많은 사람들의 격렬한 반발을 낳을 것 같습니다. 과학적 연구와 철학적 연구의 결합이 활발한 분석철학의 전통 안에 있는 학자들 중에서는 은연중에 이런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심리학에서 출발한 것은 아닙니다만 비슷한 일을 하려고 했던) 논리실증주의가 퇴색한 이후 굳이 이런 견해를 시끄럽게 표명하려고 하지 않을 뿐인지도 모르죠. 하지만 대륙철학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은 설령 데카르트식으로 영혼이 육체와 별도의 실체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더라도, 인간 의식에 대한 물리적인 규명과 그에 수반되는 이론들과 구별되는, 전통적인 의식철학이 규명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대륙철학의 옹호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개인의 선택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넓은 맥락에서도) 마음에 관한 철학적 이론들은, 마음에 관한 과학적 학문인 심리학의 데이터를 배경으로 형성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면, 그리하여 대륙철학의 역할에 대해 의문을 표시한다면, 그건 대단히 일관성 있는 입장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다만 그 경우엔 도려내야 할 입장들이 굉장히 많다는 사실은 의식해야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대륙철학에 대한 우려가 합당한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편이라서, 일관성 있는 입장을 취한다면 저도 그에 대해 별로 코멘트를 달 생각은 없습니다. 저 역시 철학의 발달은 과학적 지식의 흡수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지금의 대륙철학은 좀 러프하게 표현하면 과거 대가들의 주석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독일철학에 가장 적절한 평일 것이고, 데리다나 들뢰즈 등의 프랑스 철학자들은 그래도 새로운 시각으로 철학사를 다시 쓰는 작업을 하는 축에 속합니다. 과학적 지식도... 에에 조금 활용하다가 소칼에게 욕을 먹었죠. “노력은 하는” 프랑스 철학자들이 (라캉의 수학 인용은 제가 봐도 좀 막장입니다만) 독일 철학자들보다 더 욕을 먹는 현실은 좀 안쓰럽기도 하죠. 어쨌든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전통적인 논의와 최신의 논의 사이에 좀 교류가 있으면 좋겠는데, 이미 언어가 너무 달라져 버려서 쉽지가 않습니다. 대륙철학자들이 과학의 조류를 따라가는 것만 어려운 게 아니구요, 분석철학자가 대륙철학의 무언가에 대해 코멘트하려고 해도 대단히 어렵습니다. 가령 리처드 로티라는 분석철학계의 이단아이면서 미국의 국민 철학자인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대륙 철학자 인용하는 걸 보면 이것도 거의 막장 수준입니다. 다행히 그는 라캉과는 달리 그 사실을 지각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작업을 ‘창조적 오독’이란 거창한 이름으로 옹호했죠. (로티의 철학은 그 자체로는 유의미합니다. 그래서 저는 인용을 잘못 했다고 해서 그 철학 전체가 무너진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과학과 직접적으로 맞닿은 부분이 아닌, 가령 윤리학같은 분야의 경우 분석철학의 논의들이 흥미롭긴 하지만 또 어떤 의미에선 의미있는 많은 부분을 도려낸 채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륙철학에도 장점이 있다고 생각하구요. 두 가지 철학이 당장 교섭하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한동안 서로 공존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철학 얘기가 너무 길어졌는데 이런 맥락을 설명드리지 않으면 철학사적 입장에서 라캉을 옹호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드러나지 않을 것 같아 조금 무례를 범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상의 논의의 결과로서, 라캉 논쟁과 대체의학 논쟁과의 차이에 대해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대체의학과 의학의 논쟁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잘 고치냐, 라는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쨌든 의학의 목표는 치료이니까요. 그리고 대체의학에서 사람을 고쳤다고 주장할 때 의학측에서 “그건 스테로이드 효과야.” 혹은 “플라시보 효과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며, 그런 양측의 주장을 따질 잣대는 비교적 객관적으로 갖추어져 있다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앞서의 모든 논의를 고려해볼 때 라캉학파의 임상 효용으로 그들을 재단하는 문제는 좀 다른 층위에 있습니다. (라캉주의자들은 라캉의 임상이 효용이 있다고 주장할지도 모르지만 저는 그냥 이 문제는 뺄게요. 설령 어떤 특정한 국면에서 라캉주의자가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임상효용이 있느냐 없느냐는 물론 경험적인 문제가 되겠습니다.) 라캉의 이론을 보면 최종적인 목표가 ‘환상의 횡단’입니다. 이를테면 님이나 저와 같은 일반인들을 ‘신경증’이라 보고 그 ‘신경증 너머’의 인간이 ‘환상을 횡단하는 인간’이라는 건데요. 이런 걸 임상의 효용으로 평가한다는 건 우습지 않겠습니까? 하이데거의 책을 읽으면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의 구조를 통찰하게 된다...? 안 된다? 이런 걸 따지는 것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의 이론이 애초부터 과학이 아니었으며 어떤 맥락을 타고 있는지 지금껏 설명드렸으니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캉에게 비판적일 수도 있고, 그의 철학에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요. 그가 요새 유명하다고 해서 꼭 높이 평가받아야 하는 건 아닙니다. 철학의 긴 역사에서 그는 아직 찰나의 사람이고, 후대에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누구도 모릅니다. 다만 상황이 이렇다면 라캉을 비판한다 해도 과학의 잣대로 비판하는 것은 (앞서 언급했듯 전통철학 전체를 도려내는 터프한 입장이 아니라면)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모두 읽어 주셨다면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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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한윤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