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논의가 길게 이어지다 보니 보는 사람으로선 내 입장이 무엇인지 파악하기가 힘들 것 같다. 어쩌다 흘러들어간 어느 블로그에 이 논쟁에 대한 소회가 있어 그 밑에 이런 댓글을 달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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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논의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 중에 하나인데요. 님의 글을 읽어보고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구나 싶어서 제 견해를 약간 보강해 보려고 몇자 끄적입니다.
첫째, 좀 우스운 얘기지만 "기반이 된 과학 이론이 비과학적이도 메타이론이 유의미할 수"가 있습니다. 철학이 분과학문의 메타이론으로서 출현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이며 당위이긴 한데, 과학은 과학대로 발달하고 철학은 철학대로 발달하면서 갭이 멀어지기도 했고, 도대체 어떤 것이 올바른 메타이론이냐는 것이 논리적으로 설명되기 어렵기 때문에 실제로 이런 일이 생깁니다.
가령 이런 예시를 들어볼게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은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서 매우 종합적이고 일관성 있는 방법론을 가지고 있어요. 물리학에 접근하는 방식과 철학에 접근하는 방식이 같다는 뜻이죠.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은 과학 혁명 이후 뉴튼 물리학에게 자리를 내줬고 그의 주장은 지금 잣대로 보면 말도 안 되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그렇지만 그의 물리학에 대한 메타 이론이었던 철학은 여전히 의미있게 논의되고 있습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반대하는 학자도 많지요. 하지만 그들이 그 근거로 "물리학이 틀렸으니 그 메타 이론인 철학도 즐-"이라고 하고 있느냐? 그건 또 아닙니다.
칸트 철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칸트는 당대의 과학자인 뉴튼 등이 시공간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개념을 자신이 정리해야 겠다고 결심했고, <순수이성비판>의 인식론에서 시공간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나름대로 정의했습니다. 오늘날 그 시공간 개념이 물리학에서 의미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아요.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이유로 그의 인식론까지 오류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다른 근거로 칸트의 인식론을 비판하는 것은 가능하죠.)
마찬가지로 라캉 역시 그 방법론이 분과학문에서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철학 영역에서 의미가 없다고 말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건 지나치게 앞서 나간 주장이에요. 과학적인 사람들에겐 좀 답답하긴 하겠지만 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그 이론이 생명력을 가지고 계속해서 논의되느냐에 따라 인문학에서의 의미가 결정될 것으로 보입니다.
둘째, 라캉 이론이 인간 정신의 일부를 설명할 수 없다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잘 설명한다고 생각해요. 제 마음도 분석되고, 남의 마음도 분석되고, 그걸로 드라마 비평도 하고 영화 비평도 하고 그러는 걸요. 다만 문제는, 임상의 영역에서 (라캉을 포함한) 정신분석학적 접근이 마음의 병을 고치는데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아마도 어떤 이론이 마음의 구조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려면 실험적으로 가장 좋은 방법은 병을 고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을 거라는 사실에 저 역시 동의합니다. 동의하지 못할 이유가 없어요. 그러나 비록 병을 고친다는 것이 가장 강력한 잣대일지라도, 그 잣대가 그 자체로 전부는 아닌 만큼, 그것만으로 "라캉 이론은 마음에 대해 전혀 설명하고 있는 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과하지 않겠냐는 생각입니다.
셋째, 심리학이 말끔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정신분석학이 엉터리 방법으로 부여잡고 있다면 모를까 (그런 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임상에 대해 크게 아는 바가 없습니다.) 양쪽 다 뚜렷한 해결지점을 찾지 못한 문제라면, 정신분석학을 비 과학적이라고 규탄하는 것만큼이나 과연 그 영역이 과학적 방법론이 통하는 영역인지를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과학적인 방법이 통하는데 괜히 정신분석학이 비과학적 방법을 붙들고 있는 건지, 아니면 과학적 방법론으로 해결하기가 힘들거나 과학적 방법론이 통하지 않는 지점이라서 정신분석학과 같은 시도도 나오는 것인지를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죠. 둘중 어느 쪽이냐에 따라 정신분석학의 비과학성이란 것에 대한 평가도 달라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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