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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04
문국현, 혹은 '새로움'의 소란스러움 (12)
- 2006/11/25
프로이트의 아이는 아버지의 집을 떠나지 않고 아버지가 세운 터전 위에 자신이 미래를 세워나가는 법을 배운다. 아이는 일상적인 전투 속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나지만, 그 패배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고 자신의 욕망을 우회적으로 충족시키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그러나 홍길동과 나는 아버지를 제대로 살해하지도 못하고, 어느날 갑자기 아버지에게 하직인사를 하거나, 아무도 모르게 슬쩍 제사상의 조상반열에 올려놓음으로써 부자의 갈등을 해결하려고 했다. 홍길동이 아버지를 거부하고 떠났던 것은 일견 남자답고 씩씩한 행동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버지와 일상적 전투를 회피하는 비겁한 행동일 수도 있다.
그 비겁함은 내가 ‘새로운 율도국’을 건설해봤자 나의 위치가 아버지로 변했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결국 나는 아버지와 똑같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비겁함이었다.
작고한 정치학자 전인권의 <남자의 탄생>에서 가장 감명깊게 읽은 구절. 자기 자신이 왜 이렇게 무력한지에 대해 반성하면서, 한 아이의 가족 로망스를 통해 한국 남성의 의식을 추적했다는 이 에세이는 너무나도 사적이면서 또한 너무나도 정치적이다. 나 자신을 비롯한 모든 한국 남성들이 한번쯤은 읽어야할 책으로 감히 추천할 수 있다. 특히 이 구절은 한국남성들이 전통을 부인하는 고아의식에 빠져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재산은 상속하고 결국 그의 아버지처럼 권위적으로 굴게 되는 메커니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김수영은 아무리 남루하더라도 전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좋은 것이라면 모르겠거니와, 왜 남루한 것이라도 필요한 걸까? 설령 도려내야 할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어김없이 기억하고 반성할 때 근절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망각의 저편으로 떠내 보낸 나쁜 관습은 필히 우리 곁으로 돌아온다. 어느 역사가가 그러지 않았던가. 역사를 망각한 민족은 똑같은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형벌을 받게 된다고.
대저 우리의 정치사에도 고아가 많았다. 그렇지만 이번 대선만큼 심한 경우도 없었던 것 같다. 우리들은 모두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처럼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닐까? 정치인만 욕하면서 해소할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를 깨달았을 때, 문어체 소년의 우울은 깊어간다.
-한윤형 (드라마틱 30호,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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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좋은 글은 아니지만, 말년병장의 정체성이 한가득 묻어나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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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내가 다시 사회로 나가면 드라마라는 걸 보는 일이 있을까? 적어도 향후 몇 년간은 없을 것 같다. 내가 직장 퇴근하면 딱히 다른 취미생활이 없는 '아저씨'가 되기까지 몇 년이나 걸릴지 모르겠다. 일찍 그렇게 되는 것이 행복한 일인지 불행한 일인지도 잘 판단이 서지 않는다.
하지만 군인인 나는 드라마를 본다. 그것도 재미있게, 때로는 가슴 끓이면서 본다. <연애시대> 이후로 고구려 사극들을 가끔 찔끔찔끔 보는 것 이외엔 드라마계를 잠시 떠났던 내가 요새 파고 있는 드라마는 <환상의 커플>이다. 바깥 기준으로 보면 주말 저녁에 하는 드라마는 <소문난 칠공주>와 같은 아줌마 취향의 드라마가 아니면 승산이 없을 지도 모르겠지만, 내무반에선 차라리 이 시간대가 황금시청률을 보장한다. 얼마 전에 <환상의 커플>이 끝났을 때 나는 내무반 시청률이 90%를 넘어감을 보고 경악한 적이 있다. <내 이름은 김삼순> 때도 이런 시청률은 안 나왔었다. 하긴 그때는 병장 이하로는 드라마보면 무조건 탄압받던 시절이라서 그랬기도 했다. (당시 일병 초짜였던 나는 고개를 오묘하게 돌리고 실눈 떠가면서 보았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요새 <환상의 커플>을 매우 재미있게 보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나 자신에 대해 자신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내 요새 상태는, 야간 행군을 하고 돌아오니 설익은 컵라면도 맛있더라는 훈련병의 상태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지도 모른다. TV를 켜고 코미디 프로를 보자. 도대체 어떤 코너가 나를 웃기지 못하는지 알 수 없다. 몇 번의 소중한 예외를 제외하면, 나는 언제나 웃고 있다. 차라리 독서 분야에서는 이런 증상이 덜했다. 말랑말랑한 것들이 좀 더 잘 읽히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댄 브라운 소설이 읽히는 일은 없었으니까.
나는 내 취향을 평가함에 있어 나 자신의 쾌락을 유일한 평가의 척도로 삼아야만 한다. 그게 '취향'이라는 말의 정의에 부합하는 말일 테니까. 그런데 나는 지금 나 자신의 쾌락을 믿을 수 없다. 따라서 저 문장에는 새로운 어구가 첨가된다. '나 자신이 정상적인 상태에 있다는 전제 하에.' 갑자기 인식론의 영역으로 넘어온 것 같아 불안하다. 하지만 '정상적인'이라는 지극히 모호한 단어에 퍼부을 수 있는 모든 딴지는 생략해 버리자. 나는 지금 철학보다는 더 단순한 걸 말하고 있는 거니까. 여하간 나는 아직 '정상'이라는 준거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이 안이 고난의 공간이고, 저 바깥이 정상이다. 무지 단순하지? 그래서 지금의 내 쾌락을 '가짜'라고 단정짓는다. 그래서 내 취향은 내 쾌락과 어긋나는 곳에 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환상의 커플>이 말하고자 하는 바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백만장자 안나는 전혀 새로운 공간에서 나상실이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유일하게 기억이 나는 위인인 장철수라는 남자와 살게 된다. 하지만 그는 사실 그녀와 아무 관련이 없고, 단지 최근에 그녀와 얽혀 다툼이 있었던 원한으로 기억상실증이 걸린 안나에게 '너는 나를 좋아했었다. 너는 나상실이다.'라는 두 가지만을 알려주고 오갈 곳 없는 그녀를 떠맡은 상태다. 안나, 아니 나상실은 그런 상황에서 '입에 안 맞는 것은 안 먹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짜장면을 좋아하게 되고, 막걸리를 벌컥벌컥 들이킨다. 적어도 안나가 그런 것과 전혀 연관이 없는 부유층이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는 장철수가 "이런 상황에 놓여 그런 것이지 너는 원래 이런 것들을 안 좋아했을 거다."라고 말해주지만 나상실은 그 사실을 부정한다. "아냐. 지금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아마 이전에도 좋아했을 거야." 만일 나도 '바깥'에 대한 기억을 잊었다면 그렇게 말했을 지도 모른다. 나의 자기동일성은 고작 나 자신의 기억이 미치는 한계 안에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 필사적인 시도는 더욱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
이 드라마가 내무반을 평정하는 이유도 단지 케릭터의 매력 때문만은 아닌지 모른다. 물론 안나라는 케릭터는 매력적이다. 원래 미국에서 태어난 한예슬은 문어체 한국어를 구어 속에서 말투로 실현한다. 한국어의 구어와 문어 사이의 거리가 한예슬의 '공주 연기'를 실감나게 해준다. 공주는 성유리가 연기한 부여주처럼 다짜고짜 하대를 한다고 완성되는 게 아닌 것이다. 그러나 케릭터의 매력은 더 큰 맥락 속에서 완성되고 있다. 내무반의 병사들은 보기 드물게 여자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하는 경험을 하고 있다. 엄마 품안에서는 대충 공주처럼 살았던 이 남자어린이들이 부엌데기 신세를 한탄하며 이런 드라마를 본다 해도 크게 놀랄 일은 아니지 않겠는가? 내가 여기까지 썼을 때, 마침 다음 회에서 장철수는 자신이 안나를 속였음을 털어놓은 후 (장철수는 안나의 본명도 모른다.) "상실아, 너 그냥 군대 왔다고 생각해라!"고 립서비스를 하는데, 듣는 순간 내 심정은 '으아, 제대로 낚였다!!!!'라는 것이었다.
<환상의 커플>이라는 제목은 '허구적인, 상상된 커플'이란 의미와 '이상적인, 바람직한 커플'이란 의미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데, 물론 드라마 내용 역시 이 두가지 해석을 모두 염두에 두고 있다. 단순하게 말하면 이 드라마는 전자가 후자로 발전되는 이야기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안나에게 '너는 나를 좋아했다.'라고 장철수가 알려주면서 상상된 커플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랑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기억이 찔금찔금 돌아오는 과정을 살펴보면 안나의 기억상실증은 육체적인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인 문제다. 그리고 기억상실증이라는 설정은 안나가 백만장자이지만 알고보면 천애고아라는 설정과 함께 결부된다. 내 생각엔 이 부분이 한국인의 환상을 관통하고 있는 것 같다. 고아라는 것과, 기억상실증이라는 것은, 동일한 의미다. 그것은 개인의 역사가 승계되지 못하고 단락으로써만 존재한다는 뜻이다. 한국 드라마에 고아가 유난히 많이 나온다는 것과, 기억상실증이라는 증상이 유난히 많이 나온다는 것은 알려져 왔지만, 두 가지가 동일한 맥락에서 조명된 일은 없었던 것 같다.
고아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는 것은, 기억상실증이 난무한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우리 한국인들이 실제로는 고아도 아니요 기억상실증에 걸리지 않았음에도 마치 그런 것처럼 믿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역사를 거부하고 망각을 장려하는 이 의식에는 자신을 비극적인 존재로 인식하고자 하는, 그리고 그것을 위해 타자의 존재를 지워버리고자 하는 주체의 집요한 욕망이 담겨 있다. 역사가 없는 곳에서, '나'는 언제나 몰락하는 윤리의 마지막 담지자요, 악다구니 세상의 첫번째 투사가 될 수 있다. 모든 군인들은 자신이 '빡샌' 군인의 마지막 세대요, 자기 후임들은 '존나 빠진' 군인의 첫 세대라고 생각한다. 열린우리당이 최초의 국민참여형 정당이라는, 열린우리당이 창당될 때에 울려퍼졌던 노무현 대통령의 성급한 선언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상황인식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모두 고아의식이다.
전인권은 <남자의 탄생>에서 한국의 아들들이 아버지를 정당하게 살해하지 못하게 비겁하게 승계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아들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상속하면서, 아버지의 존재 없는 자신의 왕국을 상상함으로써 아버지를 관념적으로만 살해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는 재산을 상속하면서도 '고아의식'에 빠진다. 김상봉은 <그리스 비극에 관한 편지>에 '우리'는 모든 것을 상실했기 때문에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고아이지만, 그렇기에 또한 모든 것을 가질 수도 있는 사람들이라고 썼다. 나 또한 '전통'이란 글에서 우리의 뿌리는 잘려나갔으며, 우리의 삶에서부터 전통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쓰지 않았던가? 그러나 김상봉이나 내 희망이 실현되려면 고아의식이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 과거는 일단 잘려나갔다 치더라도, 현재는 치열하게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현재가 모여서 우리의 역사를 구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모든 것을 가지기 위한 조건, 우리의 삶이 전통이 되기 위한 조건이다. 하지만 고아의식은 모든 세대, 모든 순간을 그저 분절하기만 할 뿐이다. 이들의 비극적 인식이 계속되는 한, 역사는 없다.
<환상의 커플>의 안나 역시 평소에는 자기중심적으로 살다가도 '헤어지자'는 남편의 말에 충격을 받아 기억상실증의 세계로 넘어온 것으로 보이는데, 왠지 전형적인 그림이다. 그녀는 선량하다고 설정되어 있다. 하긴 무언가를 뺏으려고 노력한 적이 없는 백만장자 아가씨가 선량하지 않을 리가 만무하다. 그런 그녀를 구원해 줄 사람은, 아마도 그녀의 과거를 모르는 쪽(장철수)일 것이다. 이 드라마는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연민을 마치 자신들 얘기가 아닌 것처럼 비현실적인 설정에, (그렇다고 개연성이 없는 설정은 아니다.) 코미디의 형상을 쓰고 풀어놓는다. 이 절묘함 때문에, 우리는 금지된 쾌락을 금지되지 않은 영역에서 마음껏 향유하게 된다. 그것이 이 드라마의 성공요인이다. 그리고 나도 그래서 이 드라마를 좋아한다.
하지만 고아의식에서 시작했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 다음부터는 내 기억을 첩첩히 쌓아가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그것이 후손은 물론이거니와 나 자신을 배려하는 일일 것. 만일 그런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매번 새로운 장철수를 찾아서 떠나야 할 것이다. 기실 박찬종, 이인제, 노무현, 강금실, 고건 등을 띄우고 가라앉히는 유권자들의 심리는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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