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many cuts should I rep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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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윤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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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에 해당되는 글 11건

  1. 2008/05/22
    어떻게 한 사람을 지칭할 것인가. (6)
  2. 2008/01/17
    지역주의 뒤집어보기
  3. 2007/08/21
    문어체 소년의 인용구 노트 2 : 고통과 삶
  4. 2007/04/16
    그들이 개혁당을 잊지 못한 이유는 (4)
  5. 2007/03/14
    정치적 설득과 매혹의 문제 (2)
  6. 2007/02/17
    진보주의자들이 대통령 억울함까지 헤아릴수야 (1)
  7. 2007/02/16
    솔직함에 대해 (4)
  8. 2005/12/26
    전통
  9. 2004/08/26
    강준만의 노무현 비판을 보고
  10. 2004/06/10
    노빠론 (1)

출판이 될 수도 있는 원고를 한꼭지 맡아 쓰고 있다. 공식적인 글을 쓸 때면 언제나 나는 사람을 어떻게 지칭할 것인가, 에 대해 행복한 고민을 한다. 하긴, 출판은 되지 않았지만 출판할 요량으로 썼던 책 한권 분량의 원고에서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에 대해선 결론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지칭하는 말을 써넣을 때는 조금 흥분된다.


나는 되도록 사람을 직책으로 부르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다. 직책보다는 모종의 정체성을 가지고 지칭하는 것을 선호한다. 그러니까 글을 쓸 때 나는 누군가를 *** 교수라고 칭하기 보다는, 경제학자 ***, 철학자 @@@라고 칭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건 사석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별다른 고려사항이 없으면 강의하는 사람이 교수이든 교수가 아니든 무조건 '선생님'이라고 칭한다.


이게 내 나름의 방법으로 그 사람을 존중하는 방식인데, 한편으로는 그러면서 내가 그 사람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 것인지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가령 한 명의 학자를 '철학자'라고 부르는 것과, '** 연구가'(**엔 물론 철학자 이름이 나온다.)라고 부르는 것은 다르다. 이러한 두 가지 지칭 방법 중 한쪽을 일종의 경멸어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나는 매우 오만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일 터이다. 그러나 나는 둘 중의 어느 것도 경멸어로 이해하고 있지는 않다. 어떤 학자는 정말로 철학자라기보다는 누구누구 연구가라고 불려야 마땅할 작업을 하고 있는 것 같고, 내가 인용하는 맥락 역시 그 누구누구에 대한 그의 코멘트를 따오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누구 연구가라고 칭할 때엔 오히려 그의 작업의 권위를 빌려오는 것이다. 한편으로 어떤 이가 대단한 수준의 자기 자신에게 고유한 철학적 작업을 하고 있다면 누구누구 연구가보다 훌륭한 철학자인 것은 사실이겠지만, '철학자'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 모두가 그런 대단한 수준의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이 지칭 자체는 하나의 평가인 셈이지만, 우열관계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철학자'라는 지칭도 비꼬는 말로 사용될 수 있을 것 같다.)


대부분의 교수들은 이 정도 기준만 가지고 있으면 그럭저럭 지칭할 수 있다. 물론 좀 더 복잡한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지칭되는 이의 취향도 고려될 수 있을 것 같다. 가령 이택광은 판타스틱 기고문에서도 '경희대 영문학부 교수'라는 타이틀보다 '문화평론가'라는 타이틀을 앞에 써줄 것을 요구할 정도로, 본인이 문화평론가라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나 역시 그를 문화평론가 이외의 말로 지칭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그의 글을 인용하게 된다면 당연히 '문화평론가 이택광은...'이라고 말하면서 시작하게 된다. 물론 너무 많은 사람들이 '문화평론가'라고 불리고 있지만, 그거야 내 기준에서 제대로 지칭하면 되기 때문에 고려해야 할 문제는 아니다. 흔히 문화평론가로 불리는 이들을 나는 팝 칼럼니스트라든가, 기자라는 이름으로 부르면 되는 것이다. 진중권에 대해선 예전엔 "미학 에세이스트이면서 칼럼니스트인 진중권은..."이라고 적었던 것 같은데, (물론 앞서 말했듯 이렇게 적은게 공개된 적은 없다. 그때 쓴 건 출판이 안 되었으니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이 규정이 아주 좋지는 않은 듯 하고 그 본인은 '자유기고가'라는 명칭을 선호하니 원하는 대로 불러주어도 되겠다. 고종석에 대해서는, 물론 여러가지 정체성이 있지만 나는 대부분의 경우 '에세이스트'라고 부르게 될 것이다.
 


물론 직책으로 부르는 게 합당한 경우도 있다. 아까 잠깐 나왔던 '기자'라는 지칭도 그렇거니와, 가령 지금의 노정태를 지칭하려 한다면 "FP 한국어판 편집장"으로 부르는 것이 제일 적당할 것이다.


'그러는 당신은 뭐라고 지칭되는게 합당하다고 생각해요?'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언제나 답을 말해왔다. '키보드 워리어'라고. 현재로서는 그게 전부고, 장래희망은 '저술가'라고 말해야 겠지. 하지만 '저술가'를 생업으로 삼을 생각은 없고, 직업이 생기면 응당 거기에 맞는 윤리의식과 정체성이 생겨날 터이니, 정확히는 "저술가'도' 되고 싶다."라고 적는 것이 올바른 표기일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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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고는 프레시안에서 기획했던 "대선, 삐딱하게 읽기"에 보내기 위해 작성된 것인데, 이번 대선에선 도통 지역주의 문제가 이슈가 되지 않는 바람에 시의성을 찾지 못하고 묻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건대 총선에서도 지역주의가 이슈가 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현재 정치적 파벌들이 어떤 도형을 그리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른 글에서 말하게 되겠지만, 이 글은 그저 과거의 사건을 명확히 정리하고 평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똑같은 일이 일어나지는 않더라도, 과거의 사건을 세밀하게 평가하지 않은 사람들은 미래에도 비슷한 수법에 당하기 마련이지요.

2007년 12월쯤 작성된 글이니 시차를 감안하고 읽으셔야 겠습니다.


지역주의는 사라졌는가?


옛날 옛날에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이라는 정당이 있었다. 열린우리당의 지지자들은 민주당이 호남 지역주의 정당이라고 비난했고, 민주당 지지자들은 열린우리당이 영남 패권주의 정당이라고 비난했다. 그후 대선이 다가왔고 지지율이 지지부진하자 진절머리가 난 두 정당은 합당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합당은 쉽지 않았다. 민주당엔 열린우리당이 분당에 대해서 사과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었고, 열린우리당엔 민주당이 대통령 탄핵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 정당의 주요인물들이 두가지 사안에 대하여 애매하게 사과하는 가운데, 양당 국회의원들은 ‘제3지대’라는 것을 만들어 통합을 추구하기로 했다. 즉, 이 당도 깨고 저 당도 깨서 새로운 당에서 미팅을 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해서 대통합민주신당과 잔류 민주당이라는 당이 탄생했다. 분당과 창당의 마술적 힘 덕분에 이제 과거의 과오는 전혀 중요하게 언급되지 않았다. 대통합민주신당과 잔류 민주당은 최근 당대당 통합을 하기로 결정했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완전한 합방이 이루어진 것. 결국 이 와중에 ‘지역주의’ 이야기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지역주의에 관한 이야기가 대선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 지역주의가 사라진 걸까? 물론 그것이 ‘좋은’ 현상일리는 없으니, 사라졌다면 좋은 일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면 찝찝하다. 민주당 분당과 열린우리당의 창당, 그리고 대통령 탄핵, 게다가 그후의 논쟁들까지, 민주당과 열린우리당 사이의 갈등에는 국회의원들끼리의 권력다툼이라는 층위를 제외하면 언제나 지역주의가 ‘명분’으로 존재했다. 그것이 사라졌다면 얘기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단지 “그들은 지역주의를 핑계로 권력투쟁을 했다.”고만 하면 문제가 설명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양당의 지지자들조차 자기 당이 올바르다고 상대방을 비난했기 때문이다. 그 싸움들은 다 무용한 것이었을까?



지금 지역주의가 대선정국에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언뜻 생각해 볼 때 세 가지의 논리적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애초에 호남 지역주의의 문제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잘못한 세력은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이다. 둘은 원래 문제가 존재했지만, 그후의 사건들을 통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한다면 잘못한 세력은 민주당 지지자들이다. 나머지 하나는 두 세력의 이견은 여전하지만 대선 때문에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두 정당의 이합집산은 야합이 된다. 한나라당의 무엇에 대해 반대하는지도 모르면서 반한나라당을 외치는 촌극이 연출되고 있는 셈이다.



지역주의에 관한 문제는 담론적인 차원에선 전혀 정리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나라당 후보가 전국적으로 맹위를 떨치는 현재의 대선정국에서 정치세력화에 의미있는 담론은 아닐 것이다. 그것이 외면받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역주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당장 내년 총선이 다가오면 각 정파는 또 지역주의를 자기 입맛에 맞게 해석하여 자신의 정당성을 치장하는데 써먹을 것이다. 억압되었던 것이 귀환하면 더 무섭다. 그것은 이미 뒤틀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도 지역주의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이때, 다시 한번 저 논쟁을 발굴해서 정리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래야 다시 살아 돌아올 저 유령의 귀환에 맞설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지역주의에 관한 두 가지 시선


지역주의라는 담론에 대한 표준적인 이해는 다음과 같다. 일단 특정정당에 대한 영호남 각 지역의 몰표현상이 있다. 이 현상을 보고 사람들은 원인을 추리한다. 먼저 그것은 지역주민들이 자기 지역의 이익을 보장하는 정당에 투표하려는 경향을 의미한다. 가령 한 정당을 지지하면 그 정당이 어떤 개발사업을 특정 지역에 유치해 준다는 식으로. 만일 이런 이유로 한 지역의 유권자들이 한 정당에 몰표를 준다면, 그것은 ‘지역이기주의’로 불릴만한 것인데, 언제나 나쁘다고는 볼 수 없다. 민주주의 사회에선 누구나 이기적인 투표를 하도록 기대되고 있고 문제는 이기적인 투표의 총합이 어떤 결과를 낳느냐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매 선거마다 일어날 수는 없고, 새만금 사업이나 정선 카지노 사업 등의 경우가 증명하듯, 저 ‘개발사업’이 반드시 그 지역 사람들에게 두루 혜택을 주는 사업이라는 보장도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더 증명하기 쉽다.) 그래서 몰표현상에 대한 두 번째 원인 추리가 탄생한다. 지역몰표는 자기 지역 출신의 사람들을 공직에 많이 진출시켜 지역인맥을 형성하는 것을 의도한다는 것이다. 이때에 지역주의는 소수 지역 엘리트의 영달을 위해 전 지역민이 동원되는 허구적인 이데올로기로 파악된다.


만일 문제가 이렇다면 지역민들의 투표는 부도덕하거나 무능한 것이다. 그래서 문제를 이렇게 보는 언론들은 그간 민주주의를 좀먹는 망국적 지역주의에 대한 개탄을 문제의 해법(?)으로 알았다. 이 시선에 대항하는 사람들은 지역주의라는 용어가 적절하지 않으며 실제적인 문제는 호남차별이라는 인식을 보여주었다. 구체적으로는 강준만을 위시한 민주당을 지지하는 자유주의 평론가들로부터 그런 입장이 나왔다. 지역의 표 동원은 역사적으로 1971년 김대중을 떨어뜨리기 위해 박정희의 공화당이 조직한 것이다. 그후 광주민주화 항쟁과 3당합당을 통해 호남을 고립시키는 정치적 책동은 계속되어 왔다. 정치적인 탄압과 문화적인 호남차별 속에서 태생한 호남의 지역몰표는 저항적 지역주의로, 영남의 그것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것이라는 게 그들의 해석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도식에서 영남의 지역몰표는 부도덕하거나 무능한 것이지만, 호남의 지역몰표는 극우 정당에 대한 실체적인 저항이다.


편의상 전자의 시선을 A라고, 후자의 시선을 B라고 부르기로 하자. 지난 5년간 B의 입장에 선 사람들은 ‘노빠’와 ‘좌파’들이, 그러니까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의 지지자들이 수구세력과 동일한 A라는 시선에서 지역주의를 바라본다고 개탄해왔다. 그런 시각은 인터넷에 차고 넘치지만, 굳이 저서를 통해 확인하고 싶다면 김욱의 <영남민국 잔혹사>를 참조할 수 있다. 지역주의 문제에 관해선 노빠와 좌파들이 연합전선을 취해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가령 진중권은 열린우리당을 한번도 지지한 적이 없지만 열린우리당의 창당 자체는 올바른 일이라고 논평했다. 그런데 문제는 노빠나 좌파들도 2002년 이전에는 대개 B에 찬동하는 이들이었다는 점이다. 나는 여기서 하나의 가설을 세우고자 한다. 즉, 문제의 진실은 A와 B를 넘어서는 차원에 있다. 하지만 ‘노빠’나 ‘좌파’들은 B 시선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보이면 그것에 분개하고 A로 회귀해 버리는 일을 반복해 왔다. 대개 그들은 B가 고발하는 문제점들이 김대중 집권 이후로 그럭저럭 해소되었고 따라서 A 시선에서 잡힐 수 있는 문제만이 남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하여 양자 사이엔 소통이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분석적으로 바라본 지역주의


여기까지만 논해도 현명한 독자들은 지역주의라는 낱말 안에 너무 많은 현상이 녹아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투박하게 나눠보아도 그것은 지역몰표의 문제, 지역불균형의 문제, 그리고 호남지역에 대한 문화적 차별 혹은 경멸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물론 이 ‘지역주의 현상’의 세가지 측면은 각기 서로의 부분적인 원인이 되기도 하는 등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지만 이것들이 모두 하나의 원인을 가지는 현상인 것인지, 그러니까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세 가지에 해당하는 것인지에 대해선 확신할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은 오캄Ockam식으로 말할 때 ‘복잡한 진술들을 간편하게 생략하는 어휘’에 해당할 뿐이다. 이 현상들을 모조리 지역주의라는 이름 밑에 넣어두고 그것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그 자체로 ‘지역주의 현상’을 보전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저 두루뭉술하게 이해된 ‘지역주의’에 대한 비판은 “전국정당 건설이 지역주의 해체다.”라는 열린우리당식의 해법으로 귀결되기 쉽기 때문이다. (물론 저 명제는 한나라당을 통해 지역주의를 해체한 열린우리당의 위대한 업적을 상기시키고 있다.)


군사정권 시기에 분리통치를 위해 호남차별을 통해 지역몰표를 유도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하여 문화적 차별 혹은 경멸의 문제가 남아있다면 언제까지나 시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역몰표가 아직까지도 저 호남차별 의식을 통해 기능하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지금은 문국현 후보 캠프에 있는 김헌태 전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소장은 이제는 지역주의가 이념적인 문제로 고착화되었다는 견해를 피력한바 있다. 즉, 만일 영남인들이 햇볕정책에 찬성하는데도 한나라당을 지지한다면 뭔가 다른 이유를 따져봐야겠으나, 애초에 햇볕정책에 반대하는 영남인들이 한나라당을 지지하는데 다른 이유를 찾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고착화된 지역몰표는 실제로 지역민의 의식을 변화시켜 왔다. 그러므로 이제는 순진하게 ‘지역민들의 현명하지 못한 선택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식으로 접근해선 효력을 얻을 수 없다.


한편 지역불균형의 문제는 단순히 영남과 호남 사이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첫째로는 서울 대 지방의 문제요, 둘째로는 서울의 하위 파트너로서의 영남과 기타 지역의 문제다. 지역불균형의 문제를 호남의 문제로 치환시키는 데에서 어떤 노빠나 좌파들은 반감을 가졌던 것이 아닌가 싶다. 게다가 영남정권이 영남에 공단을 많이 지었다는 식의 이해는 경제학적으로 지지받기 어려운 감성적인 논변이다. 중화학 공업정책은 수심이 깊은 동해를 중심으로 추진될 수밖에 없었고, 국가의 책임은 그것이 추진되지 않은 지역을 고려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지 중화학 공업정책 자체에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한국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파워엘리트들을 인터뷰해보면 대개 경상도 사투리를 쓰더라는 문화인류학적(?)인 증언이 있다. 이 문제는 정치적으로 해결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서울대 신입생이야 지역안배를 하면 되고 중산층 역시 경제정책으로 육성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특정 지역 부르주아를 국가가 나서서 키우거나 탄압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출신성분이 비슷한 그들이 고만고만한 결정을 내리지 않도록 나머지 시민사회가 감시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리하여 김욱은 영남패권에 대해 말하기 연습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나는 그가 영남패권이라 부르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하는지 모르겠고, 그 무엇이 있다 해도 그게 말하기 연습이나 반영남 지역 몰표를 통해 극복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분석적으로 바라본 지역주의는 우리가 각각의 문제에 대해 각각의 해법을 추구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노무현과 열린우리당 역시 ‘영패’집단이라는 증오의 선동(?)을 통해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이다. 


열린우리당의 오류를 반성해야


한편 지역주의에 대해 철저하게 분석하는 것은, 지역주의 타파를 거의 존재의의에 해당하는 최대의 강령으로 내세웠던 열린우리당의 실패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다. 그들은 영남개혁세력과 호남개혁세력의 통합을 추구한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볼 때 우향우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차이의 차별점은 햇볕정책밖에 없다. 그렇다면 햇볕정책에 반대하는 영남인들이 열린우리당에 찬동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자 열린우리당은 크게 세 가지 공세를 펼쳐서 영남지역을 공략하려고 했다. 하나는 호남유권자에 대한 거리두기다. 물론 이것은 윤리적으로 볼 때 글러먹은 정치행위였다. 둘은 한나라당이 영남경제를 살리지는 못한다고 홍보한 것이었다. 앞서 우리가 분석한 지역몰표의 매커니즘을 따른다면 이 역시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다. 그것은 지역주의에 대한 지성적인 오류요, 전략의 실패이기도 하다. 이 두가지 공세는 주로 유시민을 통해 유포되었다. 이것들이 효력을 못 거두자 급기야 그들은 여당을 찍으면 지역에 도움이 될 거라고 주장하기까지 이르렀다. 주로 김혁규를 통해 경남지방에 유포되었던 이 주장은 주민들로 하여금 표준적인 지역이기주의 모델에 따라 투표하기를 권유하고 있다. 지역주의를 극복하겠다는 이들이 펼친 지역주의 공세. 그리하여 열린우리당은 지역주의에 관한 한 윤리의 파탄, 지성의 오류, 전략의 실패라는 위대한 삼위일체를 달성하였다.


지역주의가 문제가 된다면 그것이 다른 종류의 합리적인 정치행위를 가로막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당을 지지할 수 있는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그것을 통해 지역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만일 누군가가 “여러분, 지역을 보고 투표하지 말고 정당 마크의 디자인의 우수성을 보고 투표하십시오!”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를 미친 사람 취급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데 왜 “열린우리당이 영남에서 의석을 얻는 것이 지역주의 타파다.”라는 헛소리에는 많은 사람이 동의하는 것인가? 영남의 보수성을 해체하려면 각 정당이 햇볕정책 이외의 많은 사안에서도 정책적 변별점을 가지고, 그 정책들이 지역사회의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어필하는지를 충실히 설명해야 한다. 그쯤 되어야 유권자의 투표행태의 무능함을 설득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정론으로 돌아가 생각해보면 정당끼리의 변별점이 없기 때문에 지역주의라는 담론이 성립하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닐 것이다.


지난 5년을 돌이켜보면 비록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싸움이 희극에 가까웠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진지하게 동원되었다. 앞으로 같은 상황이 발생했을 때 우리는 비웃을 줄 알아야 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지역주의 논쟁을 찬찬히 돌이킬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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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사관학교로부터 - 나를 죽게 하지 않은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죽죽 읽다보면 정신이 사납지만 문장 하나 하나는 ‘간지대마왕’인 프리드리히 니체. 그의 대표적인 저서라고 볼 수 있는 <우상의 황혼>의 “잠언과 화살”에 나오는 말이다. <경성스캔들> 3회의 회상씬에서 수현(류진)이 송주(한고은)에게 “죽지 마. 절대루 살아. 너를 죽이지 못한 고통은, 너를 강하게 만들 뿐이란 사실을 보여줘, 세상한테.”라고 말할 때 불현듯 이 말이 떠올랐다. 철학적 이론에 앞서 그저 삶 자체를 강하게 옹호하는 것은 생철학자들의 일반적인 특성인데, 이것은 한국인들의 심성에 잘 맞는 것 같다. 수현이 내뱉은 말은 굳이 누구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많은 한국인들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솔직히 나는 저런 식으로 삶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는 것이 마음에 차지 않는다. 종교를 믿지 않고, 인간의 존재나 삶에 목적이 있다는 시각을 거부한다면, 살려는 의지가 죽으려는 의지보다 맹목적으로 선하다는 판단을 내리기는 힘들다. 맹목적인 삶의 의지는 그저 유전자가 자신을 퍼트리기 위해 개체인 당신에게 부과한 명령일 뿐. 하지만 사람은 생물학적인 본능을 수많은 문화적인 기제로 비틀고 꺾는 존재다. 본능을 거부하는 것 자체를 나쁜 것으로 본다면 인간들의 법률의 정당성은 성립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자살도 하나의 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군대에는 선임이 후임을 보고 “나같으면 자살했다.”고 말하는 어법이 있다. 필자도 상병쯤 달았을 때, 아직도 남아 있는 고통이 많음을 깨닫고 말 그대로 저런 심경에 빠져든 적이 있다. 이 모든 걸 알았더라면, 그냥 이 모든 것을 겪기 전에 이등병 때 콱 죽어버렸을 텐데. 상병쯤 달면 이른바 ‘박은 돈(sunk cost)’이 아까워져 죽기도 서럽다. 에세이스트 고종석은 어디선가 자신이 자살할 수 있다는 생각, 이 고통스런 삶으로부터 이탈할 수 있다는 생각이 현재의 자신에게 오히려 힘을 준다고 썼다. 마치 이 직장을 언제든지 때려칠 수 있다는 생각이 오히려 직장인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듯이 말이다. 회의주의자들에게도 열심히 살기 위한 방법은 있기 마련. 어찌 보면, 고통의 효용에 대해서만 논할 뿐 “절대로 살아.”라고 명령하지 않는 니체의 격언은 수현보다는 고종석의 맥락에 더 닿아 있는 것 같지 않은가?


-한윤형 (드라마틱 25호,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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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내가 넘긴 제목은 "묻혀버린 개혁당 돌이켜보는 계기 될 수 있길"이었다.
PD저널에 실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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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개혁당을 잊지 못한 이유는

[기고] KBS 스폐셜 ‘참여정치의 추억’ 제작기


내가 ‘화자’로 출연한 3월 18일 KBS 스페셜에서 방송된 <참여정치의 추억>은 지금은 아무도 거론하지 않는 개혁당의 기억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다큐멘터리다. 프로그램을 준비하면서 만난 과거 개혁당 참여자들 중에서는 아픈 기억을 떠올리기 싫어하는 이들도 있었다. 어떤 이는 그저 개혁당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기다리는 것이 자신들이 할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 시대의 참여자들이 기다려야 할 추상적인 ‘역사적 평가’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 모든 시대의 사람들은 후세를 위해 자신들의 행적을 충실히 기록해야만 한다. 개인은 자신의 기억을 돌이켜보는 것만으로 성찰을 할 수 있지만, 사회는 윗세대의 기록이 없이는 성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기록은 그 자체가 역사적 평가가 될 수도 있고, 후세의 역사적 평가를 위한 자료가 될 수도 있다. 특히 집권 여당이 된 열린우리당과는 달리 개혁당은 언론의 주목을 받은 적이 별로 없기 때문에 참여자들의 기록이 더욱 절실하다.


열린우리당 당원들은 개혁당을 열린우리당의 ‘전신’으로만 바라본다. 가령 고구려 사람들에게 “졸본부여는 고구려와 구별된다.”고 말하면 이해할 수가 없을 게다. “백년 가는 정당” 만든다 해놓고 일년만에 당을 해체했다는 개혁당 사수파들의 비판도 그들에겐 먹히지 않는다. 그들에겐 ‘개혁당=열린우리당’이므로, 열린우리당이 99년 동안 존속하면 약속을 어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은 개혁당 시절 만들어낸 백년정당, 고래를 삼킨 새우, 생활정치 등의 레토릭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 따라서 열린우리당 당원들에게 개혁당의 정신은 열린우리당 안에 존속하는 것이다. 한편 사수파들은 개혁당 해산의 절차적 오류를 지적하고, 열린우리당으로 간 이들이 굳이 개혁당을 해산할 필요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 두 평행선 사이에 좀더 조심스러운 사람들이 있다. ‘참여정치의 추억’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다큐멘터리는 과거 개혁당 참여자들의 기억을 따라가면서 그들의 소회를 드러내는데 주목한다. 특정한 정치적 입장에 포커스를 맞추지 않다 보니 시각이 선명하지 않은 점은 있지만 그들 모두의 기억을 공평하게 담으려고 노력했다. 문제는 이러한 기록이 여기서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적인 소회를 떠올리는 것을 넘어서는 철저한 기록과 그에 기반한 평가가 있어야 한다.


“내가 실험용 쥐새끼였나.”라고 외친 한 참정연 회원의 말이 진실하다면, 우리는 열린우리당이라는 정당의 당원들이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고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말하자면 참여정치의 지지자들이 ‘실험용 쥐새끼’ 취급을 당했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지, 원래부터 그런 처지였는지, 아니면 개혁당에서 열린우리당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그런 일이 발생한 것인지 등을 물어보고 평가해야 한다. 다큐멘터리에는 나오지 못했지만 정대화 교수는 인터뷰에서 개혁당에서 열린우리당으로 너무 쉽게 건너간 것이 오류라고 판정했고 안병진 교수는 원래 개혁당의 구성원들이 그런 식의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강준만이나 고종석과 같은, 참여정부를 지지했다가 지지를 철회한 정치평론가들의 경우는 열린우리당 창당을 민주당 분당이라는 관점에서만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개미들의 정치참여를 좀 더 평가하는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열린우리당은 민주당과 개혁당 두 개의 정당을 깨뜨리면서 출발한 정당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참여자들이 기록을 남겨서 정치학자와 정치평론가들이 이런 식의 평가를 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평가 속에서 우리는 참여정부의 공과와 향후 시민들의 정치참여 방식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러한 평가의 시발점이 될 수 있는 기록물을 만드는데 내가 관여했다는 사실에 대단히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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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section-021128000/2007/03/021128000200703080650002.html


강준만의 고종석론은 재미있고, 적절하다. 나는 저 비평가와 비평된 사람을 모두 높이 평가하고 인간적으로 좋아하기까지 하니 더 할 말이 없어야 할 게다. 그러나 나는 이 글의 전제가 미심쩍다. 


자신을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들께 질문을 하나 드리겠다. 민주노동당(민노당)이 창당 기념일 행사로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여론 형성에서 민노당의 발전과 성장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지식인에게 감사장을 수여한다면, 1순위로 누구를 꼽겠는가?


그것은 정확하게 시장논리의 유비추리다. 정치인과 지식인이 생산자의 위치에 있고, 시민 혹은 대중이 소비자의 위치에 있다. 그러므로 정치인과 지식인에게 필요한 실천적 훈계는 모든 기업인이 체득하고 있는 바, “손님은 왕이다.”는 명제에 굴복하라는 것이다. 물론 내가 보기에도 최소한 정치인에겐 “손님은 왕이다.”는 명제에 굴복하라는 윤리적인 요구가 가능할 듯 싶다. 그것은 한국의 정치인에게 부족한 덕목이며, 정치인들이 그 덕목을 체득한 사회는 한국 사회보다는 훨씬 살기 좋을 것이다.


그러나 기업인에게 “손님은 왕이다.”는 윤리적인 덕목이라기보다는 거부할 수 없는 물리학적 법칙에 가깝다. 이윤추구를 위해 소비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업인이 정치인보다 특별히 더 윤리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강제되지 않은 그들 기업의 노동자에 대한 정당한 대우에 매우 무심하다는 사실만으로도 간단히 증명된다.


반면 정치인, 몇몇 정치학자들의 표현을 빌자면 ‘여의도 정치계급’은 기업과 달라서 지지율의 극대화를 추구하지 않는다. 다만 상대정파보다 지지율이 높기를 바랄 뿐이다. 무슨 얘기냐 하면 전국민의 50%가 정치에 극도로 실망하여 기권을 하더라도, 그것은 ‘여의도 정치계급’에 문제가 되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투표하는 50% 국민들 중에서 다수 정파가 되기만 하면 된다. 기권이 늘어나는 걸 걱정하는 이들은 여의도 정치계급이 아니라 한국정치나 민주주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다. 반면 정치자금의 문제로 가면 그들 역시 기업처럼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한다고 볼 수 있는데, 모두 알다시피 이 부분에서 그들은 손님을 왕처럼 대우하는데 남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다. 시종일관 돈을 낼 수 있는 이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윤리적 명제가 아니라 정치인의 행동을 강제할 수 있는 어떤 체제다. 그리고 그런 체제를 고안하고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정치적으로 각성된 시민 이외엔 없다. 하지만 자신을 소비자의 위치로 상정하고, 정치인에게 “나를 왕처럼 대우해 주세요. 그게 당신의 의무에요.”라고 요구하는 사람은 ‘여의도 정치계급’에게 결코 소비자로 대우받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대의받지 못하는 대중’으로 전락하게 된다.


하물며 한 사람의 시민이 한 사람의 지식인에게 “정중하게 나를 설득해 보세요.”라고 요구하는 것은 더욱 적절하지 않은 일로 보인다. 여기서 그는 ‘설득’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가 요구하는 건 차라리 ‘매혹’에 가까운 것 같다. 왜냐하면 그가 원하는 것은 논증이 아니라 (어찌됐건 대개의 지식인은 ‘논증’을 하고 있으니까) 어떤 정서적 공명일 것이기 때문이다. ‘설득’ 앞에 반드시 ‘정중하게’가 위치하는 용법도 무척이나 우습다. 가령 나의 경우는, 나 자신이 결코 정중하지 않은 언사에도 설득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 사실이 이성적 존재자로써의 나의 품격을 높이는 일이라 생각하며, 덧붙여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를 자랑스러워하는 모종의 허위의식이 있다. 그런 허위의식은 자신을 정치영역의 ‘소비자’로 위치시키는 ‘시민’들에게선 결코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김선일씨 피랍 소식이 처음 전해진 지난달 21일 잘 알려진 논평가가 한 웹사이트에 올린 파병 반대 주장이 대통령에게 무례한 언사를 써서 논란을 빚은 바 있다. 이 글을 격렬히 비난한 사람들은 노 대통령 개인에게 (설득된 것이 아니라) 매혹된 세칭 ‘노빠’들로 보였다. 그러나 비난자들은 그 글의 ‘발칙함’을 물고 늘어졌을 뿐, 파병 문제에서 노 대통령과 유시민 의원이 <월간조선>의 조갑제 사장이나 한나라당 송영선 의원을 비롯한 대미종속적 우익세력과 다를 바 없다는 내용적 핵심을 반박하지 못했다. 당연하다. 그들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고종석, “환멸을 견디는 법”에서)


설득과 매혹의 용법은 위에 인용된 글에서 따왔다. 문제는 노빠만의 것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매혹과 설득을 구별할 수 있는 정신머리를 가진 이가 얼마나 되느냐는 것이 진짜 문제다. 개인적으로는 있을 수 있겠지만, 특정한 집단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것이 우리의 민주주의에 있어 중요한 문제다. “왜 고종석과 같은 자세를 갖춘 진보주의자가 없을까?”라는 강준만의 물음은 이에 비하면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민노당 당원이거나 당원은 아니더라도 민노당 색깔을 가진 진보적 지식인들은 평소 글쓰기 활동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민노당 당원들도 잘 알아듣기 어려운 용어로 논문식 글을 쓰는 지식인들이 다수다. 대중적인 글을 쓰는 지식인들도 있지만, 이들은 보수(자유주의 포함) 정당 비판에만 몰두한다. 보수 정당 비판이 곧 민노당 지지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건 이미 충분히 입증된 것 같은데도, 이들은 왜 민노당을 지지해야 하는지 겸손하고 간곡한 자세로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보수 정당 지지자들에 대한 호통, 야유, 조롱이 주요 메뉴다. 비극은 많은 민노당 당원들이 그걸 말리면서 “손님 쫓아내지 말라”고 고언을 하는 게 아니라, “아이고 속 시원해라” 하면서 즐긴다는 사실이다.


호통, 야유, 조롱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니다. 차분하고 정중한 설득보다는 그게 더 필요할 때도 있고 효과를 낼 때도 있다. 문제는 시종일관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이 하나의 양식으로 굳어져 본말이 전도되는 사태다. 나를 위한 진보인가, 민중을 위한 진보인가?


이 문제는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 봐야 한다. 왜 좌파지식인들은 민주노동당 지지를 부탁하지 않고 “보수정당 지지자들에 대한 호통, 야유, 조롱”으로 일관하는가? 한마디로 말하자면, 민주노동당 지지 부탁하기가 쪽팔리기 때문이다. 한국 보수정치가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대안이 민주노동당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민주노동당 역시 이러저러한 면에서 많은 문제점을 노출했고, 민주노동당의 발전이 한국 정치 발전을 이끌 수 있을 것인지를 궁금해 하는 많은 이들에게 긍정적인 대답을 주는데 실패했다. (이것은 ‘겸손하고 간곡한 자세’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이런 상황에서 좌파지식인들은 ‘쉬운 길’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민주노동당이 지금보다 괜찮은 정당이었더라도 많은 좌파지식인들은 그 길을 택했을 것이다. 특정정당을 지지했다간 그 정당이 쪽을 팔 때 자신도 같이 쪽을 팔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기 때문이다.


좌파지식인이라면 1) 대안정당으로써 민주노동당을 선택하거나, 2) 민주노동당이 대안정당에 못 미치는 경우 그 이유를 제시하고 민주노동당을 강하게 비판하는 것이 올바른 현실참여의 방법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문제는 그들이 겸손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거리두기’ 비평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진중권은 그런 거리두기 비평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민주노동당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거나, 민주노동당의 잘못된 면을 과감하게 비판하거나 했다. 다른 모든 좌파지식인의 "보수정당 지지자들에 대한 호통, 야유, 조롱"을 직렬접속해도 그 방면에 있어 과거 진중권의 성취를 넘어섰다고 보기는 어렵다. 강준만의 논법대로라면 진중권이야말로 민주노동당을 망치는 사람이며, 사실 강준만 본인은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믿고 있을 게다. 하지만 내 판단에는 그건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진중권은 과거 민주노동당 홍보에 기여한 바가 컸고, 이제 그가 흥미를 잃어버린 민주노동당에 그를 따라 흥미를 잃어버린 젊은이들도 무척 많다. 전선을 민주노동당과 열린우리당으로 그어놓고, "누가 더 매혹적인가?"의 문제를 따진다면 진중권의 가치를 놓치게 된다. 진중권이 그어놓은 전선이야말로 바로 '매혹의 문제'에 관한 전선이다. 문제는 겸손함이 아니라 거리두기 비평인 것이다.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은 책임 윤리가 박약한 편이다. 책임 윤리란 어떤 일을 할 때 나타난 결과뿐만 아니라 예상 가능한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는 윤리의식을 말한다. 옳은 일이니까 결과에 개의치 않고 무조건 밀어붙인다는 진보주의는 책임 윤리가 없는 모험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에선 곧잘 모험주의가 진보주의로 통용되기도 한다. 독재정권 시절에 형성된 습속이 민주화가 된 이후에도 지속된 탓이다.


이와 같은 강준만의 언급은 그래서 반 정도는 수용할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책임 윤리’를 내가 말하는 ‘거리두기 비평'에 대한 반대로 이해하면 된다. 하지만 “옳은 일이니까 결과에 개의치 않고 무조건 밀어붙인다는 진보주의는 책임 윤리가 없는 모험주의”라는 말은 목에 가시처럼 걸린다. 옳은 일이니까 무조건 밀어붙이는 사람이 책임 윤리가 없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밀어붙어놓고 그 결과에 대해 책임지지 않을 때 책임 윤리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문장으로 강준만이 의도한 것이 무슨 사태인지는 모르겠으나, 가령 이라크 파병 문제라면 그의 인식은 잘못 되었다. 말하자면 이라크 파병 안 해서 미국이 북한 폭격하면 어쩌냐고 묻는 건데, 도대체 이게 정책적으로 인과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사안인가.  그런 인과관계를 실행시켜 줄 수 있는 존재는 파우스트에 나오는 메피스토펠레스 정도다. “내가 지옥 갈 테니까 사랑하는 여자를 살려주세요.” 이건 메피스토펠레스한테 할 때만 말이 되는 말이다.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은 이라크 파병하는 대신 부시와 무슨 밀약인가를 맺었다고 하는데, 지켜진 건 하나도 없다. 그런 식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는 건, “수틀리면 무조건 니 탓이야!”라는 땡깡에 지나지 않는다. 참 한국 ‘현실주의자’들 성질머리 더럽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고종석의 민주노동당 홍보는 좌파 정당에 대한 자유주의 버전의 지지 논거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글은 애초에 자유주의자밖에 쓸 수가 없다. 그러므로 고종석이 쓰는 글을 고종석밖에 쓸 수 없는 것은 한국에 제대로 된 자유주의자가 그 하나이기 때문이다. 자칭 자유주의자들이 쪽팔려 해야 할 일인 것이다. 물론 좌파들이 그런 논리를 결코 개발할 수 없는 것은 아니나, 지금의 좌파들에게 화두는 “어떻게 자유주의자들에게 민주노동당 지지를 설득할 것인가?”가 아니라 “도대체 좌파가 민주노동당을 지지해야 하는가?”인 것으로 보인다. 서글픈 일이지만, 지금 한국 사회에서 자신이 지지하는 정파를 자랑스럽게 홍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아직도 정신 못 차린 몇몇 노빠를 제외하고.


이처럼 고종석이 한국 사회에서 특이하고 소중한 글쟁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나, 그렇게 된 데엔 모종의 이유가 있다. 단순히 그 덕목을 ‘겸손하고 간곡한 자세'로 파악하고, 거기에 윤리적 가치를 부여하며, 덧붙여 그것을 다른 지식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며 실천적 효과도 없다. 매혹적인 정치인을 경계해야 할 만큼 이성적이지 못한 사회라면, 지식인들에겐 결코 매혹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개혁당 해산 과정을 돌이켜본 어떤 이는 이런 식으로 사태를 정리했다. “개혁당을 사수하자는 사람들도 논리는 충분했어요. 하지만 열린우리당으로 간 사람들이 개혁당을 사수하자는 사람들보다 훨씬 수준이 더 높았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그들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지요. 싫어하는 사람들이 수준이 높다는 건 정말 안타까운 얘기에요.” 유시민의 매력과 사수파의 찌질함이 논의를 종결지었던 사회에서, ‘대중성’이나 ‘겸손’과 같은 단어는 얼마나 조심스럽게 사용되어야 하는가?


매혹의 문제를 우리가 명확하게 짚어내지 못하고, 전선을 긋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한때) 매혹적이지만 내용이 없는 정치인"에게 속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지식인에게도 매혹을 요구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하게 될까. 사실 큰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지식인이란 건 본래가 그다지 매력이 없는 것들이니까. 이들이 대중에게 매력을 획득하는 길은 매혹적인 정치인에게 투항하는 길 뿐이다. 오늘날 우리는 참여정부에서 그러한 지식인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노빠들에겐 매혹적인 지식인들의 순위가 확고하게 있을 게다. 그 등수놀이의 심연의 밑바닥엔 최장집 교수가 있을 것이고. 내가 강준만이 벌인 '민주노동당 판 지식인 등수놀이'에 헛웃음이 나는 건 그 때문이다.

우리는 (비록 그것이 힘든 일일지라도)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논리’와 ‘대중이 좋아하는 논리’를 구별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민주노동당처럼 평소엔 소신대로 하다가 꼭 ‘대중’을 고려한다고 말할 땐 노빠들의 프레임을 수용하는 희극을 연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매혹의 문제만큼 매혹적이지 않은 자태로 한국 민주주의의 앞날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도 없다.





P.S 강준만 역시 책임윤리를 가져야 한다. 단지 그가 열린우리당을 지지하지 않고 민주당을 지지했다고 해서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지금 참여정부의 지지자들이 내뱉는 말은 강준만이 만들어준 논리 안에 있다. 비록 강준만이 그 말을 할 때의 현실정합성과 노무현 대통령과 그 일당이 그 말을 할 때의 현실정합성 사이엔 하늘과 땅 차이가 있긴 하지만, 본인이 만들어낸 논리구조를 흉악하게 활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그 역시 피할 수는 없다. 이건 단지 내가 그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상 그의 논리를 따라 나라를 말아먹은 집단이 등장했으므로, 앞으로 그는 같은 식으로는 정치평론을 할 수가 없을 거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논변을 폐기하거나, 적어도 참여정부의 지지자들의 말과는 구별이 가도록 그 논변을 더욱 심화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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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대통령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는 정조는 '억울함'인 듯하다. 한 개인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일은 물론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 '억울함'에 공적인 가치가 크게 없다면, 게다가 그 '억울함'의 주체가 사회빈곤층이 아니라 꽤 살만한 사람이라면 그 중요성은 점점 줄어든다.

가령 김영삼 전 대통령을 생각해 보자. 평균적인 한국인들이 김영삼 전 대통령을 평가하는 방식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그는 '평가절하'되어 있다. 문민정부에 대한 학자들의 평가도 그리 좋지는 않지만, 몇 가지 업적은 지적하고 넘어간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김영삼 전 대통령은 분명 '억울'하다. 그러나 지금 한국 사회에서 김영삼의 억울함을 해소해 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일까?

현임 대통령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문제는 사실 그만큼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억울함이 아니라, 그가 남은 임기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나는 그가 자꾸 약자인 척 하는 것이 민망하다. 대통령 당선되기 전에는 오히려 그러지 않았다. '학벌없는 사회'인가 하는 모임에서 초청한 토론회에서, 당시 노무현 후보는 분명히 이렇게 말했다. 자신이 상고출신이라 해서 학벌문제에서 깨끗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자신은 사법고시 합격자이고, 그런 면에서는 분명 기득권층이라고.

물론 그는 정치인으로서는 비주류 중의 비주류였다. 하지만 대통령 당선되고 나서는 어떠한가. 대통령제 국가에서 대통령이 스스로를 약자로 칭하는 이 상황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대통령은 조선일보 사주보다 분명 힘이 세다. 김대중 대통령조차도 그랬다. 수만명의 열성적이고 자발적인 노빠들이 여전히 옆을 지키고 있는 현임 대통령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여소야대 문제는 탄핵 신풍으로 2004년에 해결됐다. 지금에 와서는 집단탈당으로 다시 제2당이 되었지만, 임기말년에 레임덕 현상이 생기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일이다. 막을 수 없는 일을 막기 위해 자꾸 여러가지 이슈를 제기하는 것도 부질없는 짓이다.

구체적으로 언론들을 살펴보자. 조선일보는 노빠들보다 약하다. 그리고 중앙일보의 세계관은 노빠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양자가 결합해서 중산층을 빈곤층으로 만드는 게 대충 내 눈에 그려지는 근미래상이다. 그리고 동아일보는 아무런 생각이 없다. 대통령은 억울해 할 이유가 없다. 세상은 그가 바라는 대로 흘러가고 있다.

대통령이 쓴 글을 찬찬히 뜯어보면, 그도 그점을 알고는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 상황을 '진전'이라 보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내가 예전에 안티조선 운동에 동의했을 때, 그 동의는 조선일보라는 하나의 주체를 향한 것이 아니라, 그 주체의 특수한 성격에 대한 것이었다. 노빠들이 조선일보를 해체(?)하는 방식은 반지성적이고, 심각하게 편향적이다. 세상은 하나도 좋아지지 않았다. 사우론이 끼던 반지를 사루만이 이어받았을 뿐이다. 최근 시사저널 사태를 보라. 세상은 더 나빠졌다. 월간조선이 최장집 교수를 탄압했을 때는 분개하는 시민들이 있었다. 하지만 시사저널 사태에는 오직 지식인들만 발언하고 있다. (나도 남말할 처지는 아니다. 그네들의 시위 현장에 한번도 가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년 동안 언론운동의 질은 전혀 성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퇴보했다.

이라크 파병과 한미 FTA에 대한 반대가 진보주의자들의 교조성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참여정부가 이라크 파병을 강행하는 여러가지 가능한 방식들이 있었다. 물론 진보주의자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파병을 반대했으리라. 하지만 그중 참여정부가 택한 것은 가장 최악의 방식이었다. '반대'는 같았겠지만, '반대'하는 사람들의 '감정'은 점점 더 심해졌다. 나는 머릿속에서 대한민국보다 훨씬 더 미국에 의존적인 어떤 나라를 가상해볼 수 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서 가상된 어떤 나라도, 제 나라 국민을 인질로 잡은 테러범들이 24시간을 주며 철군을 요구하는데 6시간만에 서둘러 '파병방침 불변'이란 브리핑을 발표해야 할만큼 철두철미한 '부-자유' 상태에 놓여있지는 않다. 그런 '부-자유'를 상상하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럽다. 하지만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그 가능성을 실현했다. 차일피일 시간을 끄는 미련함을 버리고, 화끈하게 부시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그로써 대한민국을 공화국이라 믿고 살던 몇 안되는 공화주의자들의 얼굴에 침을 뱉었고, 몇 안되는 그들의 공화주의적인 '애국심'을 영구히 앗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시 대통령이 파병한 국가들에게 감사를 표할 때는, 그 명단에서 누락되는 영광을 누렸다. 다행이다. 후세의 역사가들은 한국군이 이라크에 있었는지를 확신하지 못할 테니. 이렇게 철저하게 '명분'을 위배한 참여정부는 '실리'를 챙기지도 못했던 것이다.

한미 FTA를 반대하는 경제학자들이 '종속이론'이나 '신식민지 국가독점 자본주의론이니, 식민지 반봉건 사회론'을 가지고 반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최근 유행하는 무슨 진보주의 이론을 가지고 반대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그저 경제학의 원리대로, 주판알을 튕겨보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진보진영은 개방을 할 때마다 "개방으로 나라가 무너질 것"이라고 걱정했으나 우리경제는 모든 개방을 성공으로 기록하면서 발전을 계속했습니다. 이제는 2만불 시대에 들어섰습니다.라고 말할 일이 아니다. 미국과 FTA를 체결해서 이득을 볼 수 있는 나라를 상상하려면, 나는 다시 머릿속에서 지구를 떠나 가능세계로 진입해야 한다. 고종석의 말대로 우리는 2002년에 너무 지적인 대통령을 뽑았다. 정책 하나를 비판할 때마다 내 머릿속에서 지구를 떠나야 하는 이런 대통령을 나는 상상하기 힘들다. 그런 대통령을 상상하려면 나는 다시 가능세계로 달려가야 한다. 그런데 그는 지금 대한민국에 대통령으로 현존한다. 환장할 일이다.

그는 참여정부의 지지율이 낮아지면서 민주화 세력 무능론이 대두하고 '다시는 진보세력이 정권을 잡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생기는 것을 우려한다. 그리고 그런 모든 우려가 부당하다고 말한다. 나도 그게 부당하다는 걸 안다. 하지만 한줌도 안 되는 좌파들이 '노무현 정부는 진보와 관계가 없어요- 진보는 그런게 아니에요-'라고 아무리 외쳐도 사람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대통령은 비주류, 소수자, 진보의 표상으로 그 자리에 올랐다. 그의 실패는 그 표상에 담겨 있는 문화적 가치들의 실패다. 그러므로 그는 그 모든 것에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데, 그걸 논리적으로 논박하고 있다는 건 결국 책임은 지기 싫단 얘기다. 정말로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노빠들도 몇 만명이나 주변에 있고.

그 역시 그런 표상을 활용하지 않았던가. 기타 치고 이매진 부르면서 무슨 생각을 했단 말인가. 그리고 지금의 열린우리당도 그런 표상을 활용하고 있지 않은가.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에 나는 열린우리당 전당대회의 현장에 있었다. 전당대회장 바깥에서 일군의 시민(?)들이 정동영 캠프에 결합하여 개헌 찬성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온갖 운동권 노래 틀어놓고 '마임'을 추면서. 사람들이 그걸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열린우리당은 결국 혼자 망하기는 싫고해서 운동권과 같이 망하기로 작정한 정당이다. 나도 운동권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리고 운동권도 우리 못지 않게 무능하다는 참여정부의 볼멘소리가 이해갈 때도 있지만, 그들에게도 스스로 깽판치다가 망할 권리는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내가 보기에 운동권은 그런 권리를 결국 가지지 못할 것 같다. 나는 참여정부와 같은 물귀신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2002년 국민경선 토론에서 노무현 후보를 '극좌'라고 칭했던 정동영 씨, 그는 개혁당의 열기를 보고 감화받아 노사모 일부세력에게 끝없는 러브콜을 보냈고, 결국 그 중 일부와 함께 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가 노무현에게서, 아니 노사모에게서 배운 건 이념은 아니고 (사실 배울 이념도 없으니까) '노빠식 참여'였다. 이 노빠식 참여가 민주세력의 대단합을 외치며 이루어지고 있는 동안, 전당대회는 표결도 없이 '박수'를 통해 의결되는 '파행'을 연출했다. 박수소리가 불쾌하게 귀청을 때리면 저 앞에서 진행자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습니다.'고 멘트를 때린다. 나는 보았다. 기간당원제 폐지를 선언하는 안건에서, 최소한 두 명의 대의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반대합니다!' 혹은 '이의있습니다!'라고 외친 것을.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박수소리에 묻혀 들리지도 않았고 안건은 그대로 통과되었다. 진행자가 그들을 무시한 것도 아닐 것이다. 육천명이 노란막대기를 들고 박수를 치는데 두 세명의 목소리가 들릴 리가 있나. 이게 그들이 발전시킨 참여와 민주주의의 종착역이었다. 정동영 씨가 배운 것, 그것은 결국 새로운 의미의 동원정치다. 참여정부는 동원정부였다.

나는 정동영 씨 같은 위인들이 어떤 종류의 정치공학을 통해 울렁울렁 반 대 반 게임으로 한나라당 후보와 싸우다가 엉겁결에 대통령이 되어도, 이명박 대통령이나 박근혜 대통령보다 더 좋은 대통령이 될 거라는 생각이 전혀 안 든다. 그런데 왕년의 노사모 왕초 명계남 씨는 "정동영이 노무현이다. 나는 한나라당 후보를 이기는 사람은 무조건 노무현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고 말한 모양이다. 어떡하나. 이제 나는 범여권 후보로 예수가 출마한다고 해도 그의 당선을 바라기는 어렵게 되었다. 명계남 씨 말이 맞다면, '예수는 노무현'일 테니까.

고종석은 지방선거 직전에 적은 어느 칼럼에서, 열린우리당은 자기가 맞아야 할 매를 맞고 있지만, 민주노동당은 남의 매를 나눠 맞는 격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 점을 안다면 여권도 조금은 위로가 될 거라나 뭐라나. 그 말이 맞다면 아무래도 억울해야 할 건 대통령이 아니라 한줌도 안 되는 진보주의자들일 게다. 대통령 말씀대로, 대한민국엔 진보주의자만 사는 게 아니다. 그래서 대통령이 맞아야 할 매를 약간만 나눠 맞아도 그들은 그렇게 힘든 것이다. 그 어려움에 대한 푸념 조금 들었다고 대통령이 저리 반론을 해야 한다면, 아마 진보주의자들은 대통령의 귀를 독점하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얼마 전에 만난 이순녀씨, 보험노조위원장으로 민주노총을 떠나 개혁당으로 투신했던 그녀는, 아직까지도 대통령 개인에 대한 미련은 버리지 못했지만 참여정부의 정책에 너무 실망한 나머지, 대통령이 퇴임하면 그와 함께 비정규직 세미나를 같이 하고 싶다고 했다. 집권동안 들어주지 않았던 말을 해야 한다나 뭐라나. 그녀는 요새 내가 만난 수많은 노빠들에 비하면 '순혈 노빠'도 안 되지만, 나는 화내야 할 대상에게 화내지 못하는 그녀의 심성에 생래적인 거부감을 느낀다. 그러나 대통령은 그래서는 안 될 것이다. 그가 한미 FTA나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는, 혹은 참여정부를 평가절하는 '지식인'들을 같잖게 보는 것은 자유이지만, 적어도 그는 과거 자신을 지지했던 이들을 같잖게 봐서는 안 될 것이다. 사실 억울한 건 대통령이 아니다. 자신이 만든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 성글다고 나같은 사람에게 '노빠'라는 욕을 먹어야 하는 그 지지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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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자연에 넋을 잃거나 아름다운 건축물 앞에서 감탄사를 연발하는 데는 아무런 윤리적 자의식이 따르지 않는다. 그러나 아름다운 여성 앞에서 호들갑을 떠는 것은, 미스코리아 대회를 둘러싼 논란에서 보듯, 더러 윤리적 비난의 대상이 된다. 거기에는 사람의 외모에 공개적으로 미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그 사람의 인격을 훼손한다는 판단이 깔려 있을 것이다. 말할 나위 없이, 외모(만으)로 사람의 값어치를 판단하는 것은 부당하다.

이 글은 가장 최근에 나온 고종석의 시평집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에 수록된 수필의 일부다. 이 부분을 읽는 순간 나는 이 글의 작성일자를 확인했다. 2002년도에 쓰여진 글이었다.

고종석 본인도, 2000년에 태동했고 2001년에 지적으로 융성했으며 2002년에 대중적으로 크게 확산된 안티조선 운동에 대해 "옛날옛적에 '안티조선운동'이라는 게 있었다."라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안티미스코리아 대회를 포함해서, (그 대회가 지금도 열리는지 나는 확인해 보지도 않았지만) 미스코리아에 대한 논란이 있었던 시절, '아름다운 여성 앞에서 호들갑을 떠는 것'이 '더러 윤리적 비난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 인지되던 시절도 '옛날옛적'이라 칭할 수 있을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