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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틱 원고 소급적 업데이트 완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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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서울대 경제학부 이준구 교수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대운하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올려 언론과 세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준구 교수는 학계에서 권위있는 미시경제학자로, 고시생과 경제학도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몇몇 저서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는 이전에도 자신의 홈페이지에 종부세 찬성론이나 한미 FTA 찬성론 등 민감한 이슈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였던 이력이 있다.


대선 기간 내내 이명박 당선자의 심복 노릇을 했던 한나라당 이재오 의원은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이교수의 주장이 이해부족에서 나온 것이라고 평했다고 한다. 일개 국회의원이 새만금 사업과 경부고속철 사업 타당성 평가에 참여했던 학계의 중견 경제학자에게 ‘이해부족’을 운운할 수 있다니 세상이 참 재밌기는 하다. 하지만 지식인들의 발언이 짓뭉개지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고, 그의 단언의 배경에 있는 자신감의 근원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준구 교수는 자신의 글에서 “일반의 예상과 달리, 여론조사에서 사업에 대한 지지율이 비교적 높게 나타나고 있는 이유가 바로 개발에 대한 기대심리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적절하다. “기회만 있으면 행정도시, 혁신도시 등을 건설한다는 명분으로 전국의 지가를 올린 참여정부를 비난”해 왔던 당선자 측 사람들이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단기적 경기부양책을 준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 기대심리를 이용하는데 있을 것이다.


사실 강남 사람들이 대운하에 굳이 찬성해야 할 이유는 없다. 전국적으로 집값이 상승해 봤자 그들에게 이득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압도적으로 이명박을 지지했지만, 그만큼이나 대운하 공약을 지지하진 않았을 것이다. 총선 이후 특별법 제정이라는 강행돌파를 가능하게 하는 건, 그들을 제외한 대운하 사업에 대한 심정적 지지층, 강남 이외의 지역의 중산층들이다.


강남 사람들과 조중동 등 보수언론은 참여정부의 반기업 정서가 경제를 말아먹었다는 자신들의 선전이 먹혀들어서 정권이 교체되었다고 생각할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중산층들은 강남의 집값을 폭등시키고 자신들도 투기에 뛰어들 때쯤 종부세를 신설한 참여정부의 ‘불공평한 투기 진작’ 정책에 뿔이 났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 닫혀버린 문을 다시 여는 것, 저 욕망의 문 안에 자신도 들어서는 것이다. 문화평론가 진중권은 언젠가 <월간중앙>에서 강남이 한국 사회에서 “욕망의 폭주기관차”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썼다. 적절한 비유다. 그 폭주기관차는 근 20년 동안 속도를 계속 높여왔는데, 그러다보니 기관차가 멈춘 이후에도 뒤따르는 차량들은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탐욕스럽게 돌진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중산층들은 “아직도 배가 고프다.” 그리하여, “철마는 계속해서 달리고 싶다.” 


지각있는 부자들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렇게 황당한 정책으로 환경까지 망가뜨려 가며 집값을 올리고 싶냐.”고. 그러면 평균적인 중산층들은 이렇게 답할 것이다. “그러는 당신들은 그렇게 윤리적인 방법으로 돈을 벌었느냐.”고. 이명박의 당선은 국가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부자들의 욕망과 중산층의 분노가 만들어낸 합작품이었는데, 여기서는 그 결합이 흔들리고 있다. 정권의 속성상 앞으로의 5년이 약속할 세상은 보수주의자들이 원했던 그 안온한 세상은 아니다. 부자들은 그들이 그토록 진저리나게 싫어했던 ‘개혁 포퓰리스트’들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중산층들에게 당신들을 부자로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하는 이상한 포퓰리스트들을 불러들였다. 지켜질 수 없는 약속을 지키는 시늉을 하기 위해 그들은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 조중동은 이제는 그 사실을 깨닫고 있을까? 향후 대운하 논쟁에 있어 그들이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다. 잘못하면 이명박 정권 하에서도 보수주의자들은 발언권을 박탈당할 것이다. 지금은 이회창 정도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모든 사람들이 부자가 될 수는 없다. 계층문제를 사회적 연대나 합의에 의해 해결하기를 거부하는 정서적 충동은 파시즘 그 자체는 아니더라도 파시즘의 조건 중에 하나는 된다. 정권교체를 이룬 민주주의 제도는 작동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나, 정치문화의 후퇴가 우려스러운 것은 그래서다. 중산층의 욕망을 무엇으로 제어할 수 있을까? 이준구 교수의 소신발언 이후 경제학자들과 전문가들의 집단이 노력할 수도 있겠으나, 결국엔 부자들이 나서야 한다. 기관차가 지도의 기능을 망각하고 제 밥그릇을 불리는 데에만 급급한다면, 더 탐욕스러운 후발주자들이 기관차를 짓밟고서라도 지나갈 것이다.  -한윤형 (드라마틱 31호,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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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이 별도의 취미로 자리잡았다는 사실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오늘날 우리의 조국에서 술은 요리의 맥락과 벗어나는 별도의 문화로 드러난다. 한국인들이 술을 많이 마신다고는 할 수 있겠지만, 즐긴다고 말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래서이다. 식사를 하면서 한잔씩 걸치는 음주 특유의 낭만은 폭음의 당위 앞에서 매도당한다. 그런 면에서 볼 때는, 오직 막걸리만이 우리 음식에 어울리는 음주 문화를 부활시키기 위한 하나의 대안이다. 물론 이런 당위를 가지고 술을 마시는 사람이 많지는 않다.

 
음주이력이 십년이 다 되어 가는 만큼 물론 수많은 막걸리를 거쳐 왔다. 하지만 단연 내 인생 최고의 막걸리를 꼽으라면 하나를 꼽겠다. 나는 정서적인 인간이 아니므로, 등산을 하고 난 직후에 마셨던 막걸리나 군대에서 유격복귀 행군 후 환송회에서 마셨던 막걸리 등을 제시하진 않을 것이다. 그것들이 첫 목넘김에선 아무리 주관적으로 기가 막혔을 지라도, 첫 트림이 올라올 무렵엔 그 수준이 객관적으로 판가름나기 때문이다. 내 인생 최고의 막걸리는 전라남도 남원에 있었다. 어느 모임에서 남원의 어느 폐교로 가서 엠티를 할 기회가 있었다. 황토방에서 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동아리의 운영방침에 대한 회의를 하다가 점심 때부터 막걸리를 먹게 되었다. 근처 슈퍼에서 사온 막걸리 중엔 **이란 상표가 붙은 것이 있었고 아무런 상표가 붙지 않은 채 큰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것이 있었다. 말 안 해도 알겠지만, 후자가 기가 막혔다.


문제는 이 ‘집에서 담근 술’의 맛을 알아본 사람이 적었다는 것이다. 어떤 선배가 자기는 포천 출신이라서 막걸리를 잘 아는데 이 상표가 붙은 것이 훨씬 맛있다고 우겼다. 그건 나름대로 괜찮은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의 말에 동의했고, 나는 마음껏 내 생애 최고의 막걸리를 즐길 수 있었으니까. 원래 친구는 단 한 사람만 있으면 된다. 어느 40대가 이 술이야말로 진국이라는 나의 말에 동의했다. 세대를 넘어 우리 두 사람은 가장 맛있는 술을 술잔에 기울였고, 그 술이 떨어지자 남아 있는 ** 막걸리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의 돈으로 더 많은 ‘진짜’ 술을 구입했다. (원래 연장자랑 놀면 이런 것이 즐겁다.)


아, 진짜 술을 알아보는 사람은 적었지만, 나에게 그 술을 사줄 사람은 있었다! 그보다 더 행복한 순간이 더 있으랴!! 나는 행복을 마음껏 누렸다. 그 덕에 지금은 인스턴트 막걸리 중에서 방부제 맛이 적게 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뿐히 가릴 수 있다. -한윤형 (드라마틱 31호,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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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시대를 앞서가는 그 누구이건, 시대는 그를 언젠가는 따라잡는다.”


20세기의 대표적인 천재철학자라고 칭할 수 있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문화와 가치>에 이렇게 적었다. 이 ‘낙관적인’(?) 문장의 성립의 비밀은 저 ‘언젠가는’이란 부사의 기약 없음에 있을 것이다. 혹은 ‘앞서가는’이란 부사의 애매함에 있을 것이다. 결코 따라잡히지 않더라, 고 말하면, “넌 앞서 있기는커녕 뒤쳐져 있어”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니. <드라마틱>은 어느 쪽이었을까?


<드라마틱>을 일종의 비평지로 정의한다면, 이 휴간호에 부쳐 한국 사회에서 비평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장황하게 썰을 풀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은 자아도취와 자기연민 사이를 오락가락하기가 십상이니, 패스. 한 사람의 수용자가 몰입의 쾌감을 느낌과 동시에 거리두기에서도 쾌감을 느낄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느냐는 항변도 어떤 이들에겐 기각될 것이기에, 생략. 나는 단지 이런 말을 건네고 싶다. 한때는 글쓰기가 무언가를 변화시켜줄 것이라고 믿었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내가 했던 짓은 ‘친구 찾기’에 불과했다고. 그리고 한편 다시 생각해보면, 그것은 ‘불과’하다고 폄하할 일은 아니었다는 것. 사람은 아마도 자신과 같이 느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에야, 비생산적인 우울함에서 탈출할 수 있으리라는 것. 그리하여 이 잡지의 휴간을 아쉬워할 이들에게만 말한다면, (다른 이들에게 얘기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것이 아쉬운 이유는 더 이상의 친구 찾기의 가능성이 봉쇄되었기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아마 나는 “기쁜 날은 길지 않더라”로 글을 시작할 수도 있었겠지만, 적어도 끝은 ‘희망’으로 맺고 싶었다는 것.


-한윤형 (드라마틱 31호,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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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아이는 아버지의 집을 떠나지 않고 아버지가 세운 터전 위에 자신이 미래를 세워나가는 법을 배운다. 아이는 일상적인 전투 속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나지만, 그 패배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고 자신의 욕망을 우회적으로 충족시키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그러나 홍길동과 나는 아버지를 제대로 살해하지도 못하고, 어느날 갑자기 아버지에게 하직인사를 하거나, 아무도 모르게 슬쩍 제사상의 조상반열에 올려놓음으로써 부자의 갈등을 해결하려고 했다. 홍길동이 아버지를 거부하고 떠났던 것은 일견 남자답고 씩씩한 행동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버지와 일상적 전투를 회피하는 비겁한 행동일 수도 있다.

그 비겁함은 내가 ‘새로운 율도국’을 건설해봤자 나의 위치가 아버지로 변했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결국 나는 아버지와 똑같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비겁함이었다.


작고한 정치학자 전인권의 <남자의 탄생>에서 가장 감명깊게 읽은 구절. 자기 자신이 왜 이렇게 무력한지에 대해 반성하면서, 한 아이의 가족 로망스를 통해 한국 남성의 의식을 추적했다는 이 에세이는 너무나도 사적이면서 또한 너무나도 정치적이다. 나 자신을 비롯한 모든 한국 남성들이 한번쯤은 읽어야할 책으로 감히 추천할 수 있다. 특히 이 구절은 한국남성들이 전통을 부인하는 고아의식에 빠져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재산은 상속하고 결국 그의 아버지처럼 권위적으로 굴게 되는 메커니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김수영은 아무리 남루하더라도 전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좋은 것이라면 모르겠거니와, 왜 남루한 것이라도 필요한 걸까? 설령 도려내야 할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어김없이 기억하고 반성할 때 근절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망각의 저편으로 떠내 보낸 나쁜 관습은 필히 우리 곁으로 돌아온다. 어느 역사가가 그러지 않았던가. 역사를 망각한 민족은 똑같은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형벌을 받게 된다고.


대저 우리의 정치사에도 고아가 많았다. 그렇지만 이번 대선만큼 심한 경우도 없었던 것 같다. 우리들은 모두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처럼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닐까? 정치인만 욕하면서 해소할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를 깨달았을 때, 문어체 소년의 우울은 깊어간다.
 

-한윤형 (드라마틱 30호,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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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깨나 있는 미혼 남성이 멋진 여자를 아내로 맞고 싶어할 거라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 만약 이런 남자가 이웃으로 이사를 온다면, 당사자의 기분이나 생각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위 사람들은 이런 진리를 신념처럼 확고하게 여겨 자신들의 딸 가운데 누군가가 그 남성을 차지하게 되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은 이렇게 첫구절부터 사람을 웃겨놓고 시작한다. 인터넷을 뒤져보면 오스틴의 이 문장이 당대의 물질주의를 풍자하고 있다는 식의 서술이 많은데, 개인적으로는 ‘글쎄요.’라는 생각이다. 풍자는 풍자이지만, 그렇게 근엄한 어조로 서술할 만큼 단죄적인 의미의 풍자는 아니다. 그저 평범한 인간들의 모습이 생각이 나 웃음이 나올 뿐이다. 심지어 작품 말미에서 여주인공 엘리자베스의 아버지 베넷씨는 다아시경의 숙모의 편에 서서 엘리자베스를 비난하는 목사에게 “나라면 조카편을 들겠소. 그쪽이 더 많이 가지고 있어요.”라고 대꾸한다. 베넷의 이 재치있는 대꾸마저도 물질주의에 대한 비난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


그런데 재산있는 남성과 미모의 여성이 맺어지는 것은 동서고금을 망라한 경향성이라 볼 수 있겠지만, 오늘날은 그 양태가 조금 다른 듯도 싶다. 입방아 찍는 세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예전에는 재산이 더 인지하기 쉬웠겠지만, 연예인을 TV에서 보고 민간인이라도 싸이에서 사진을 확인할 수 있는 오늘날에는 오히려 미모가 더 인지가 더 쉬운 것 같다. 그러면 서술이 이렇게 바뀌어야 하는 걸까?


“미모의 독신 여성이 재산깨나 있는 남편을 꿰차고 싶어할 거라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 만일 그런 여성에 관해 알게 된다면, 당사자의 기분이나 생각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위 사람들은 이런 진리를 신념처럼 확고하게 여겨 어떤 부자가 그 여자를 차지하게 될지에 대해 미리부터 분통을 터트리는 것이 보통이다.”


된장녀 (말의 의미가 명확하지 않아 쓰기가 조심스럽지만) 논란과 같은 것들을 지켜보면서 가끔 드는 의문도 이런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당연한 일들에 대해서도 화를 내야 하는 걸까? 내가 보기에 그들은 우리 인생과 별 관련도 없는데. 노현정 결혼생활에 신경끄자는 얘기다.
 

-한윤형 (드라마틱 29호,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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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동은 소화를 욕망할 뿐 아니라, 소화를 경유해서 임금까지 욕망한다. 그래서 거세의 순간 그의 환상은 삼각관계를 만든다.


김용의 <소오강호>로부터 시작하자. 무공비급 <규화보전>은 “신공을 연마하는 것은 칼을 자궁으로 인도하는 것과 같다.”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절대고수가 되려면 먼저 남근을 잘라내라는 것. 동방불패는 잘라낸다. 다른 야심가들도 잘라낸다. 남근은 권력욕의 상징이다. 비급은 신체적인 남근을 잘라내면 상징적인 남근을 가져다주겠다고 제안한다. 고수가 된 그들은 세상의 비웃음을 피하기 위해 가짜수염을 붙여가며 고자라는 사실을 숨긴다.


대부분의 내시들의 사정은 그들보다도 좋지 않다. 그들이 남근을 잘라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소오강호>의 몇몇 고수들은 페니스(신체적 남근)를 잘라가며 팔루스(상징적 남근)를 추구하지만, 그들은 페니스를 잘라내는 순간 팔루스마저 상실했다. 조치겸(전광렬)은 단종을 복위시키자는 친구의 청을 거절한다. 단종을 복권시켜봤자 조치겸은 충신들의 그늘에서 부각되지 못한다. 그보다는 차라리 세조 시해 계획을 좌절시키고 그에게 신임을 얻는 편이 낫다. 내시는 비웃음의 대상이니까, 눈에 보이는 것들, 물질적인 풍요나 권력을 추구하는게 낫다. 정한수(안재모)의 삶의 방향은 노내시(신구)나 과거 조치겸의 삶의 방향과 같다. 이것이 거세를 하는 하나의 방식, 일반적인 방식이다.


역사적인 인물인 김처선은 여러 왕을 섬기며 충직한 인물로 기록된 예외적인 내시다. 그 점은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그리고 권력과 부귀영화를 손에 쥔 조치겸은 자신의 가문에 예외적인 내시를 들이고자 한다. 내시들에게 막혀버린 길을 택하는 삼릉삼무의 내시를 들이고자 한다. 그렇다면 초반부 드라마의 설득력은 그가 다른 내시와 다른 방식의 거세를 택하는 과정이 얼마나 그럴 듯하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왕과 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성공하고 있다. 천둥이(오만석)는 12화에서 스스로 양물을 자르게 되는데, 그가 택한 삶의 방식은 분명 정한수와 대비된다.


‘윤소화(구혜선)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고 너무 단순하게 정리해서는 안 된다. 사랑에도 여러 가지 방식이 있으니까. 그가 택한 사랑은 정신분석학에서 히스테리자의 방식에 해당한다. 프로이트와 라캉의 체계에서, 대부분의 정상인들은 신경증자에 해당한다. 신경증자는 크게 강박증자와 히스테리자로 구별되는데, 대개는 남자들이 강박증자이고 여자들이 히스테리자다. 이들은 타자와 욕망을 대하는 방식에서 차이가 난다. 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물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처음에 아이는 자신의 몸과 엄마의 몸을 구별하지 못한다. 문제는 아이가 자신을 어머니와 분리하기 시작할 때다. 강박증자는 여기서 어머니라는 타자의 존재를 지워버리고 젖가슴을 나의 욕망의 대상으로 치환시켜버리는 사람을 말한다. 그는 타자를 자신의 욕망의 대상으로 만든다. 반면 히스테리자는 주체의 존재를 지워버리고 나 자신을 어머니에게 욕망의 대상으로 제공한다. 그녀는 자신을 타자에게 욕망의 대상으로 제공한다.


그렇다고 해서 강박증자가 이기적이고 히스테리자가 이타적인 것이 아니다. 신경증자는 모두 타인에게 자신을 맞추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강박증자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자신의 모습을 상실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반면 히스테리자는, 타인이 욕망에 대해 완전히 만족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타자가 완전히 만족한다면 그는 더 이상 대상으로 기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히스테리자는 타인의 불만족한 욕망을 욕망하는 자이다.


정신분석학은 근대의 학문이므로, 신분의 차이에 따른 금지명령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그런 차이를 감안하고 다소간의 단순화를 용인한다면, 천둥이는 소화를 히스테리적으로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는 소화에게 성종(고주원)을 추구할 것을 권유하고, 자신은 그 욕망을 위한 조력의 대상으로 남는다. 히스테리자는 타자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처럼 추구한다. 프로이트의 사례에서 정육점 여인은 꿈속에서 남편이 좋아한다고 생각되는 자신의 친구를 욕망한다. 천둥이는 소화를 욕망할 뿐 아니라, 소화를 경유해서 임금님까지 욕망하는 것. 그래서 거세의 순간 그의 환상은 삼각관계를 만든다. 이 삼각관계는 남성 히스테리자의 삼각관계다. 그는 물질적인 욕망이 아니라 어떤 다른 욕망으로 거세를 하게 되는데, 이 색다른 욕망의 공간에선 분명 정한수와 다른 캐릭터가 튀어나올 수 있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우리가 정신적 가치라 믿는 것들도 특정한 방식으로 세팅된 욕망의 움직임이다. 역사적인 처선은 그저 충직하고 입바른 사람이었을 뿐이었을 게다. 하지만 설명을 하려고 든다면 <왕과 나>의 방식이 더 매력적이다. 남성 히스테리자는, 분명 ‘충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윤형 (드라마틱 28호,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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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명작소설을 연애물로 대하는 것은 사춘기에 그것들을 몇 권이라도 읽기 위한 좋은 방법이다. 나 역시 <좁은 문>을 삼각관계물로, <첫사랑>을 팜므 파탈 원톱물로 읽으며 사춘기를 보냈다.

요즈음의 세상에는 소설 말고도 재미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혹여 소설을 읽게 되더라도 재미있는 대중소설이 많아 소위 ‘문학’이라는 것들에 접근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안 든다. 1990년대 초반에 <퇴마록>이 나왔을 때 나는 교실에서 한두 명의 친구들과 함께 그것을 열심히 읽고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친구들에게 ‘책을 좋아하는 아이’라는 평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때 내가 읽던 책들은 주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쓰여진 3천원 안팎의 아동소설이었고, 종종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나 그 이후 범람한 ‘북한붕괴물’들을 보며 ‘어른들 소설’을 읽었다고 뿌듯해 하는 처지였다. 중학생 때의 내 독서이력은 <일본은 없다> 이후 범람한 ‘일본물’들과 김용 무협소설, 그리고 <은하영웅전설> 정도에서 멈췄다. 아동용 축약본 소설이 아니라 진짜 명작소설들에게 관심을 가질 기회는 요원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나는 문학작품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이 소설들을 어떤 방식으로 읽으면 꽤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최초의 깨달음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부터 왔다. 어떤 허영심에 의해 책을 펼쳐들었던 나는, 30여 페이지를 넘어가는 베르테르의 주변 자연경관에 대한 찬미에 GG를 치기 직전이었다. 바로 그 때, 로테가 등장했다. 그러자 갑자기 이 소설은 잿빛 이론에서 푸른빛 생명의 나무로 변신했다. 로테와 베르테르가 만나자마자 춤을 추면서 친해지고, 약혼자이면서 나중엔 남편이 되는 알베르토가 엮이면서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사춘기 청소년은, 문학작품에서 묘사되는 연애는 어떤 매체에서 묘사되는 그것보다도 가슴을 후벼판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성공에 힘입어 나는 다른 소설에 도전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유행하던 <고교독서평설>에서 <좁은 문>의 대략적인 스토리를 읽은 나는 이것 역시 연애물이라는 짙은 확신 속에 소설을 펼쳐들었는데, 역시 소설은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물론 이 소설의 주제는 종교적 구원과 현세적 행복 사이의 갈등이다. 그러나 이미 연애물로 이 소설을 읽기로 작정한 내 눈에는 제롬과 알리사, 줄리에트의 삼각관계물이었다. 이 관계는 <신세기 에번게리온>에 나오는 신지, 레이, 아스카의 관계와 흡사했다. 사실 당시의 내 눈으로는 알리사는 아야나미 레이와 비슷한 캐릭터였고, 줄리에트는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와 비슷한 캐릭터였다. 나는 전자를 ‘얼음공주’라고 부르고 후자를 ‘다른 타입’이라 칭하면서 애니메이션과 세계명작의 경계를 넘나드는 연애물의 공식을 내 멋대로 확립했다.

<좁은 문>은 정말로 슬픈 소설이었는데, 나는 한번도 알리사에게 감정이입을 한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자신의 공식에서 볼 때 언제나 ‘얼음공주’가 아닌 ‘다른 타입’의 지지자였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흘러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시집갔던 줄리에트가 몇 명의 자식을 낳은 애엄마가 된 후, “제롬, 이제 세월이 오래 지났으니 나도 당신을 보면 아무렇지도 않으리라고 믿어요.”라고 편지에 쓰면서 제롬을 초대하는 마지막 장면을 나는 오래도록 기억했다. 여전히 알리사를 잊지 못해 “나는 사랑하지 않거나, 누군가를 사랑하는 척하며 살 수밖에 없겠지.”라는 제롬 앞에서 눈물을 감추는 줄리에트의 모습.

이런 연애물(?)을 여주인공이 두 명이라는 점에서 ‘투톱물’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세상에는 ‘원톱물’이라는 것도 존재했다. 내가 가장 사랑했던 원톱물은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이었다. 몰락한 백작가문의 영애 지나이다는 ‘팜므 파탈’이라는 단어의 의미도 모르는 내 마음속에 각인된 팜므 파탈이었다. 소년 블라디미르는 다섯 살 연상의 지나이다를 연모하고, 그녀의 주변에는 언제나 숭배자 남성들이 들끓는다. 지나이다는 다른 숭배자들에 대해 ‘어장관리’를 충실히 하면서도 블라디미르에게 호감을 품은 듯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진실은 저 너머에. 블라디미르의 진정한 연적은 그의 아버지였음이 드러난다. 유부남과의 스캔들에 휘말린 지나이다는 마을을 떠나게 될 때,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작별인사차 그녀의 방을 찾은 블라디미르에게 울면서 키스를 퍼붓는다. “나는 그 키스가 정말로 누구를 갈망하는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첫사랑’을 떠나보내는 ‘소년’의 말이다.

그다지 문학에 대한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 세계명작소설을 연애물로 대하는 것은 사춘기에 그것들을 몇 권이라도 읽기 위한 좋은 방법이다. 다만 이 방법에 너무 경도되면 <죄와 벌>을 ‘여자가 남자를 무조건적으로 구원해주는 정말로 나이브한 이야기’로 취급하게 되고,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의 코제트에 대한 진심을 변태적인 것으로 오해하게 된다는 부작용이 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한윤형 (드라마틱 28호,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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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들은 어느 날 헤시오도스가 신성한 헬리콘 산 기숡에서 양떼를 치고 있을 때 그에게 아름다운 노래를 가르쳐주셨다. 여신들은, 아이기스를 가지신 제우스의 따님들이신 올림포스의 무사(뮤즈) 여신들은 내게 맨 먼저 이렇게 말씀하셨다. “들에서 야영하는 목자들이여, 불명예스런 자들이여, 먹을 것밖에 모르는 자들이여, 우리는 진실처럼 들리는 거짓말을 많이 할 줄 안다. 그러나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진실도 노래할 줄 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위대하신 제우스의 따님들은 싹이 트는 월계수의 보기 좋은 가지 하나를 내게 주시며 그것을 지팡이로 꺾게 하셨고, 내게 신적(神的)인 목소리를 불어넣어 내게 미래사와 과거사를 찬양할 수 있도록 하셨다.


헤시오도스 <신통기>의 서시는 아득한 옛날에 저자가 탄생한 사정을 엿보게 해준다. 그 이전의 시인들은 자신을 저자로 여기지 않았다.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이란 구절로 시작하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보라. 여기서 말하는 건 ‘여신’이지 호메로스가 아니다. 사실 호메로스라는 이름은 ‘눈이 먼 자’라는 뜻으로, 특정한 개인이 아닐 것이라는 학설도 있다. 반면 <신통기>에서는 여신들이 ‘헤시오도스’라는 사람에게 노래 부르도록 했음을 명백히 밝힌다. 게다가 “우리는 진실처럼 들리는 거짓말을 많이 할 줄 안다. 그러나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진실도 노래할 줄 안다.”라는 구절을 보라. 다른 시인들이 부르는 노래는 거짓말이고 자기 노래는 참말이란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저자들끼리의 경쟁이 시작되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저자의 죽음’이라는 철학적 담론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인터넷이 널리 보급된 이후 ‘글쓴이’의 영역이 위축되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펌] 표시를 게을리하는 펌족들은 이 글이 누구의 글인지 알 수 없게 만들고, 남이 쓴 글을 마치 자신이 쓴 것인 양 버젓이 링크를 다는 모습도 눈에 띈다. 게시판과 블로그의 숫자는 수도 없이 많지만, 정작 자신이 글을 쓰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비윤리적인 펌족들을 보자면, 모든 글 앞에 헤시오도스가 그랬던 것처럼 이름을 적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다. “그분들은 어느 날 한윤형씨가 사당동 모 치킨집에서 맥주를 먹고 있을 때 그에게......”


  -한윤형 (드라마틱 28호,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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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적으로 말해, <태왕사신기>의 인물과 배경은 전혀 한국적이지 않다. <태왕사신기>의 무국적성은 ‘천손민족’을 텅 빈 기호로 만든다. 공들여 찍었을지언정, 초반부 ‘신화’는 ‘판타지’도 살리지 못하고 ‘민족’도 묘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라이트노벨의 한 획을 그었고 애니매이션으로 제작되어 많은 이의 사랑을 받은 <슬레이어즈>. 이 <슬레이어즈>의 세계는 혼돈의 바다 위에 네 개의 지팡이가 떠 있고 그 지팡이 위에 세계가 얹혀 있는 판타지 세계다. 이 네 개의 세계를 주관하는 마왕은 각각 루비 아이(붉은 눈의 마왕), 다크 스타(어둠을 뿌리는 자), 카오틱 블루(창궁의 왕), 데스 포그(백무)다. 이들의 색깔은 물론 붉은색, 검은색, 푸른색, 흰색인데 세계의 지도를 보면 얼추 중국의 오행의 방위와 색깔에 대응하도록 만들어 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사실이지만, 판타지물이라면 설령 독자가 찾아보지 않을지라도 이렇게 세계관이 내적으로는 일관성을 지녀야 한다.


<슬레이어즈>에 스며든 오행의 원리는 저 유명한 고구려의 사신도(四神圖)에 나오는 사방신을 규정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청룡은 하늘의 동방을 지키는 신이며 동방은 오행에서 목(木)의 위치다. 현무는 하늘의 북방을 지키는 신이며 수(水)를 의미한다. 백호는 서방이며 금(金)이 되고, 주작은 남방이며 화(火)를 뜻한다. 이 네 마리 상서로운 동물의 색깔은 각 방위의 색깔과 정확히 일치한다. 


<태왕사신기>에서 주작이 불의 힘을 주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드라마 제작진도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태왕사신기>는 단군신화에 나오는 풍백, 우사, 운사를 나머지 삼방의 신에 대입하고 있다. 바람, 비, 구름의 담당자와 수(水), 목(木), 금(金)의 담당자를 포개놓다니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바람, 비, 구름이라고 해봤자 모두 수(水) 안에 포함되는 것일 텐데. 오행설은 중국에서 발생한 매우 견고한 형이상학이다. 고구려 벽화 사신도엔 그 견고한 형이상학이 반영되어 있다. 반면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풍백, 우사, 운사는 초기 농경민족의 소박한 종교적 믿음을 드러낸다. 양자는 전혀 다른 상징체계인데, 그럼에도 드라마는 그것들을 융합(?)한다. 세계관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두는 사람이라면 놀라서 뒤로 자빠질 일이다. 이렇듯 <태왕사신기>는 판타지이면서도 “이 세계의 세계관을 조사해서는 안 돼!”라고 미리 시청자들에게 금지명령을 내리는 드라마다. 역사를 소재로 삼고 있으니 오히려 <슬레이어즈>보다도 더 철저하게 고증해야 할 입장일 텐데도.


도대체 왜 이런 무리한 일을 저질렀을까. 2천년을 격한 두 개의 나라의 신화가 왜 하나로 이어진다고 주장해야만 하는 걸까. ‘고조선=고구려’라는 등식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등식은 하나의 가치체계를 공유하는 천손민족(天孫民族)의 역사가 바로 우리 역사라는 환상을 표현한다. 그것 자체에 딴지를 걸고 싶진 않다. 정신분석학적 견지에서 바라보더라도, 주체는 환상을 통해 자신을 정립하며 건강한 주체일 경우 나중에 그 환상의 허구를 인식한다. 그러나 어쨌든 주체는 환상을 통해 구성되기는 하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아직 ‘민족’을 실감하지 못해 고대사를 헤맨다면, 이런 식의 ‘민족판타지’의 구축이 어느 정도는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처럼 상징체계의 일관성마저 파괴하며 획득한 ‘고조선=고구려’라는 기호 뒤에 어떤 ‘민족’이 있는지를 살펴보면 대단히 우울해진다. 단적으로 말해 <태왕사신기>의 인물과 배경은 전혀 한국적이지 않다. 일본식 표창을 던지는 화천회의의 살수들에게서 어떤 ‘민족’을 느낄 수 있을까? <태왕사신기>의 무국적성은 ‘천손민족’을 텅빈 기호로 만든다. 이 텅빈 기호 안에는 말갈과 거란을 쥬신의 후예로 칭하며 그 내용의 부재를 팽창적 민족주의로 채우려는 욕망만이 그득하다. 그 욕망은 현재의 시점으로 돌아와 이 드라마를 일본에 팔아먹으려는 욕망과도 포개질 것이다. 이처럼 <태왕사신기>의 초반부 ‘신화’는 ‘판타지’도 살리지 못하고 ‘민족’도 묘사하지 못하고 있다. 공들여 찍은 고구려의 모습을 보건대, 드라마의 재미를 위해서나 품위를 위해서나 신화적 세계관의 묘사는 절제되는 쪽이 더 나았을 것이다. -한윤형 (드라마틱 27호,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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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작을 드라마로 만들면 어떨까? <드라마틱>의 ‘원작 발굴 탐사대’가 발굴한 첫 번째 작품은 가와구치 미도카의 만화 <죽음과 그녀와 나>(서울문화사)

근래에 여러 종류의 장르 드라마에 대한 실험이 폭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해외드라마에 비하면 한국의 장르물들은 여전히 멜로의 감수성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런 한국 드라마의 강점을 살릴 수 있는 독특한 장르물이 하나 있다. 가와구치 미도카의 만화 <죽음과 그녀와 나>가 그것이다.

이 만화는 2000년에 10권까지 출간된 후 일본에서 잡지사의 사정에 의해 연재 자체가 중단되었는데, 2005년부터 <죽음과 그녀와 나 유카리>라는 제목으로 2부가 출간되고 있다. 어느 시점에서 작가는 만화를 마무리 지으려고 했으나 그러지 못했고 연재 중단 후 2부로 넘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유카리는 어렸을 때 병을 앓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후 혼령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된다. 다른 사람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보이는 귀신을 어찌할 수도 없는 그녀는 삶에 대한 의욕을 잃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한편 유우사쿠는 동식물과 유령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다. 그 역시 어린 시절 자신의 고막을 찢어버리는 등 자신의 능력을 버거워 하지만 어느날 멀리서 우연히 들려온 유카리의 비명을 전해 듣고 자신과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는 그녀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두 사람이 같은 고등학교에서 만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두 사람은 서로의 능력을 합쳐서 혼령들과 대화를 시도하고 서로를 위로한다.
 

이 이야기의 매력은 두 사람이 만나는 혼령들의 기이한 현실감이다. 어린 시절 자신을 괴롭혀왔던 귀신들의 목소리를 언급하며 유우사쿠는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정말로 두려운 것은 그들이다. 그들은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떠돌아다녀야 하는 것일까.” 혼령들이 유우사쿠나 유카리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명백하다. 의미없이 떠도는 그들에게, 그들을 알아봐주는 인간의 모습은 물 속에서 붙잡은 지푸라기와 같다. 어떤 귀신은 유우사쿠의 관심을 끌기 위해 상습적인 거짓말을 한다.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너에게 어떤 힘을 줄 수 있다, 너는 언제 죽을 것이다, 등등. 무력한 건 인간이나 귀신이나 마찬가지. 이런 혼령들은 압도적인 공포감보다는 일종의 으스스한 느낌을 선사한다.

두 사람에겐 ‘퇴마’의 능력 따위는 없다. 그들은 종종 혼령들의 성숙을 도와주지만, 그건 마치 비뚤어진 사람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비슷하다.  그들 역시 둘이 아니라면 혼령들만큼이나 외로운 존재다. 이런 설정도 단순히 끝없이 귀신을 만나고 쫓는 얘기에 비해 드라마적이다. 옴니버스로 구성된 이야기들 중에서 몇 개를 차용하고 재구성한다면 그럴듯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서로의 결핍을 채워가며 자연스럽게 사랑이 싹튼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는 전형적인 로맨스물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결핍은 전혀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두 사람 이외의 다른 조합을 상상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의 사랑이 너무 일찍 성사되어 그 부분의 긴장감은 조금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옴니버스 형식의 이야기가 쉽게 완결되지 못한 것도 두 사람의 관계가 이미 이루어져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위기와 결말을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지점은 시나리오상의 안배가 필요하다. 선천적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여자가 대학생인 유우사쿠의 주변에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그녀의 능력을 강화해서 여주2 정도로 써먹으면 어떨까. 도식적인 삼각관계보다는, 혼령을 대하는 태도가 다른 두 명의 여자 사이에서 유우사쿠가 겪는 심리적 갈등을 표현해 주면서 결말의 선택으로 치닫는다면 충분히 이야기를 완결지을 수 있다.

만화 자체는 그림이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크게 인기를 끌진 못했지만, 드라마화를 시도할 매력은 넘치는 작품이다. 시각효과 역시 십년 전 유행했던 <다큐멘터리 이야기 속으로>보다 좀 더 나은 정도면 충분할 것이니, 큰 부담은 되지 않을 것이다. -한윤형 (드라마틱 27호,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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