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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윤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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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젤라즈니'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8/01/20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 작품별 별점평 (3)
  2. 2007/12/29
    신들의 사회 : 혁명에 관한 멋진 은유 (10)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 8점
로저 젤라즈니 지음, 김상훈 옮김/열린책들




로저 젤라즈니. 1995년 암으로 사망. 1998년에 출간된 그의 추모 엔솔러지의 제목이 (로버트 실버버그와 닐 게이먼 등이 참여한) <Lord of the Fantastique>이었다는 점에서 SF/판타지계에 미친 그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원래 술 좋아하는 남자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소설을 쓰는 작가는 장수할 수가 없다. 1937년생인 그가 죽은 지는 벌써 10년이 넘었지만 1929년생인 어슐러 르 귄 여사는 아직도 활동하고 계시고, 무림맹주 김용은 아직도 말년을 즐기고 있지만 고룡은 (진산님이 자신의 블로그 어딘가에 쓴 표현을 빌리자면) 그의 소설 주인공들처럼 열심히 술을 먹다가 1980년대에 이미 사망. 이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는 역시나 한국의 로저 젤라즈니 전문 번역자이신 김상훈씨가 번역했고 주로 초기의 중단편들이 모여 있는데, 총평보다는 작품별로 얘기하는 것이 더 나을듯. 인용문이 있을 경우 되도록 작품의 분위기를 살리면서도 핵심적인 반전과는 상관없는 부분에서 택했으니 안심하기 바람.


12월의 열쇠 ★★★★

내가 완산정에서 모주를 마시며 이 소설의 스토리를 주욱 설명했을 때 ssy가 말했다. "야, 정말 스펙터클하다. 근데 몇 페이지야?" "30페이지." "뭐라고?! 몇페이지라고???" "30페이지-." 첫문장부터 상황을 설명하는 간결함이 돋보인다. 종종 젤라즈니가 그렇게 하듯이 시작과 끝이 똑같다. 좀 더 개인적인(?) 이유로 활동하는 <신들의 사회>의 주인공을 보는 느낌이랄까. 젤라즈니는 '마초적 사적 윤리'의 제왕이다. 마지막 장면은 꽤 감동적이다. 아주 마음에 드는 작품.

"1년만 더 기다려 줘."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1년 후에는 당신에게 세계를 하나 사줄께! 빨리 기계의 가격과 운임을 알려 줘......"

누가 젤라즈니 아니랄까봐!


그 얼굴의 문, 그 입의 등잔 ★★★★

이 소설이 잡지에 실렸을 때 훗날 젤라즈니와 함께 뉴웨이브를 대표하게 되는 딜레이니의 여자친구가 그 잡지를 들고 뛰어들어와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이봐, 칩(딜레이니의 애칭), 이거 읽어 봤어? 도대체 이 작가가 누구지? 이 사람에 관해 뭔가 아는 거 없어? 지금까지 무슨 작품들을 썼지?" 그렇게 말할 만한, 매력적인, 젤라즈니 다운 작품이다. 묘사의 패턴은 젤라즈니스럽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의 작품들 중에서 특히나 알프레드 베스터에 가깝다는 느낌이 든다. 아마도 여주인공의 위상이 비슷하기 때문인 것 같다. 베스터의 소설에서 여자는 불가해하면서도 모종의 역할을 부여받지만, 젤라즈니의 많은 소설에선 여자는 불가해하기 때문에 초월적인 역할을 부여받거나 아예 역할을 부여받지 못한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선 그나마 여주인공의 역할이 전자에 가깝다. 주인공은 전형적인 젤라즈니적 마초이지만, 쇠락해 있는 처지가 더 현실적이고 매력적이다. 역시 아주 마음에 드는 작품.

"한잔 사주겠다는 거야?"

"응, 커피"

"커핀 싫어."

"넌 병자야. 그리고 여기서 마셔도 되는 건 커피뿐이야."

"커피란 위벽을 타게 만드는 갈색의 액체야. 제일 아래 서랍에 숨겨 둔 게 있지 않나."

며칠 전 사당역 커피빈에서 위 대사를 한번 시험해 보았다.


악마차 ★★★☆

제대로 된 서부극 SF. 주인공이 멋있는 사내가 아니고 그의 적이 그런 놈이다. 일단 이게 하나의 뒤집는 포인트. 다음으로 웃긴 건, 서부극에서라면 남자가 싸우고 여자는 가만히 있어야 하는데, 여기서 여자의 역할을 맡는 건 그의 무기인 지성을 가진 자동차-. (그러니까 SF가 되는 거지만) 그러니까 여기선 남자의 설득을 받은 여자가 싸우고 있고, 우리 남성 동지께서는 아무 일도 안 하고 계신다. 이런 저런 묘한 패러디로 유쾌하면서도 슬픈 작품.

"그가 다른 차들과 사람들에게 많은 피해를 입힌 것은 사실이고, 그건 정말 끔찍한 일이에요. 하지만 그는 뭔가를 가지고 있어요. 뭔가 - 고귀한 것을. 자신의 자유를 얻기 위해, 전 세계를 상대로 싸워 온 생활 방식 같은 걸 말이에요, 샘. 저 흉포한 차의 무리를 통솔하고, 자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 주인 없이 - 살아가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고, 부서지거나 패배할 때까지 투쟁하겠다는 결의. 샘, 아까 거기 있었을 때 나는 한순간 그의 무리와 합류해서, 그와 함께 <도로평원>을 질주하고, 그를 위해 주유 요새의 문을 향해 나의 로켓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어요......"

그러시든지.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

<12월의 열쇠>와 이 소설을 합치면 <신들의 사회>가 탄생할 거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종교적(혹은 예술적) 카타르시스에 대한 이 소설의 묘사가 <신들의 사회>를 압도한다. 남성의 내면세계와 형이상학, 그리고 연애가 절묘하게 맞물린 훌륭한 중편 소설.

......그러나 저러나 천재적인 언어능력을 갖춘 시인이 자기보다 훨씬 큰 사내를 유도로 때려눕히다니. 이 아저씨 너무 하는거 아냐? ;; (젤라즈니는 실제로 유도와 펜싱을 좋아했다.)

몇 년 전 나는 인도에서 거리의 무희 데바다시들의 춤을 본 적이 있다. 다채로운 오색 거미줄을 치며, 수컷 곤충을 유인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브락사는 그 이상이었다. 그녀는 라마자니, 비슈누의 화신이자 인간에게 춤을 내려 준 라마를 열렬히 숭배하는 그 성스러운 무희의 한 사람이었다.

째깍거리는 소리는 이제 단조롭고 일정한 박자를 따르고 있었다. 현이 내는 흐느끼는 소리는 바람에 의해 열을 빼앗긴 따가운 햇살을 생각나게 했다. 그 푸른 모습은 사라스바티였고, 마리아였고, 로라라는 이름의 소녀였다. 어딘가에서 시타르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눈앞의 조상이 살아나는 것을 보았으며, 성스러운 영감을 들이마셨다.

또다시 나는 해시시에 탐닉하는 랭보였고, 아편에 취한 보들레르였고, 포, 드 퀸시, 와일드, 말라르메, 알레이스터 크롤리였다. 그리고, 한순간이긴 했지만 거무스름한 설교단에 선 새까만 양복 차림의 아버지였다. 찬송가가 들렸고, 파이프 오르간 소리는 반짝이는 바람으로 변했다.

그녀는 빙빙 도는 바람개비였고, 공중에 뜬 깃털 달린 그리스도 수난상이었으며, 선명한 색상의 옷 한 벌을 건 채 수평으로 처진 빨랫줄이었다. 그녀의 어깨에서는 이제 속살이 드러나 있었고, 오른쪽 가슴은 밤하늘의 달처럼 상하로 움직였다. 붉은 젖꼭지가 옷주름 위로 언뜻 보였다가 다시 사라졌다. 음악은 신에 대한 욥의 항변처럼 양식적이었다. 그녀의 율동은 신의 대답이었다.

이런 춤은 봐서는 안 됩니다.


괴물과 처녀 ★★★

마지막 대사의 여운이 그럭저럭 와닿는 엽편소설.


이 죽음의 산에서 ★★★★

사실 마지막 반전이 썩 마음에 들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불가지는 불가지인 상태로 놓아두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긴 젤라즈니에게 불가지란 여자의 다른 이름일 따름이니까. 그래도 마초의 본질을 꿰뚫는 먹어주는 장면들이 다수 등장하기 때문에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산이여." 나는 말했다. "산이여, 너는 내게 오지 말라고 했지."

천둥이 우르렁거렸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나는 이 분야 최고의 전문가들을 데리고 갈 거야." 나는 말했다. "너의 사면을 타고 올라가서, 너의 가장 높은 봉우리들 위에서 별을 올려다보기 위해서 말이야. 내가 이런 일을 꼭 해야 하는 건 네가 거기 있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어. 개인적인 이유는 전혀 없어......"

잠시 후,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사실이 아냐."

"난 남자야." 나는 말했다. "그리고 설령 내가 죽더라도, 내가 죽지 않는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산들을 정복할 필요가 있어. 난 지금 내가 원하는 것보다 작아, 시스터. 그리고 넌 나를 더 크게 만들어 줄 수 있어. 그래서 아마 이건 개인적인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그건 내가 할 줄 아는 유일한 일이고, 너는 내게 남겨진 마지막 산이야 - 내가 전 생애에 걸쳐 습득한 기술을 시험해 볼 마지막 도전이지. 아마 죽을 운명에 있는 자는 자기 자신에 대한 도전을 받아들였을 때 불사의 존재에 가장 가까워지는 것인지도 모르겠군. 위험을 극복할 때 말야. 승리의 순간은 바로 구제의 순간이기도 해. 내겐 그런 순간들이 많이 필요하고, 마지막 순간은 그중에서도 가장 긴 것이어야 해. 남은 인생을 그것 하나로 버텨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넌 거기 있어, 시스터. 난 여기 서서 죽어야 할 운명을 곱씹어 보고 있고, 그런 내게 너는 오지 말라고 했어. 난 그럴 수 없어. 난 너한테 갈 거야. 설령 네가 나를 향해 죽음을 내던지더라도, 난 그것과 정면으로 맞설 거야. 그것밖에는 대안이 없어."

나는 술병에 남아 있던 술을 전부 들이켰다.

이렇게 그리스 서사시적인 대사를 취해서 주사를 부리듯 내뱉다니!


수집열 ★★★☆

얄미운 녀석에게 복수하는 결말이 마음에 든다는.


완만한 대왕들 ★★★☆

지성을 가진 유인원들에 대한 적절한 야유. 적당히 웃을 수 있다.
 

폭풍의 이순간 ★★★★

구성이나 설정 자체가 엄청났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연애소설로서는 꽤 아련한 부분이 있다. 젤라즈니의 남자 주인공들은 불사나 그에 준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렇지만 평균적인 젤라즈니 소설의 남자보다 훨씬 정서적인 주인공이다. 어딘지 모르게 사랑의 상처를 입고 영원히 떠도는 시미즈 레이코 만화의 로봇들이 떠오른다.

혹시 언제, 어딘가에 나를 위한 황금 시대가, 르네상스가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어딘가에 존재하는 나의 시대가, 단 한 장의 티켓, 단 하나의 비자, 단 한 장의 일기장 너머 어딘가에 있다고. 언제, 어디가 될 지는 모른다. 누가 그런 것을 알 수 있겠는가? 어제 내렸던 비는 모두 어디에 있는 것일까?

보이지 않는 도시 속에?

나의 내부에?

우주 공간은 차갑고 조용하며, 지평선은 무한에 가깝다. 이동감각은 전혀 없다.

달은 보이지 않고, 별들은 눈부시게 불타오른다. 부스러진 다이아몬드이다. 모두가
.


특별 전시품 ★★★

특별히 어려운 얘기가 있는 건 아니지만, 왠지 이걸 보고 실컷 웃으려면 뭔가 교양이 있는 사람이어야 할 것 같다.


성스러운 광기 ★★☆

처음엔 기대가 되지만 실은 단순한 이야기다.


코리다 ★★★

변호사는 당해도 싸-.


사랑은 허수 ★★★☆

프로메테우스를 <앰버연대기>의 세계에 던져놓으면 이런 이야기가 나오겠다. <토탈 리콜>이 여기서 영향을 받았을까? 그렇지만 여주인공이 경험적 대상이 아니라고 여겨질 만큼 지나치게 헌신적이다. 하긴 뭐, 프로메테우스가 신화적 인물이니까, 그 옆에 신화적 인물이 있는다 하더라도 무리는 아니지.


화이올리를 사랑한 남자 ★★★★☆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와 <프로스트와 베타>와 함께 내가 이 작품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 SF적 상상력과 심리학과 사랑 이야기의 화학적인 결합. 번역자는 이 소설이 젤라즈니의 여성관을 보여준다고 논평했지만, 글쎄. 내가 보기엔 이 소설은 남성의 여성에 대한 모순된 욕망에 관한 이야기다. 물론 화이올리가 팜므 파탈의 비유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봤자 그것은 상투적인 비유, '죽은 비유'일 뿐. 존 오든은 "나는 살아 있는가, 죽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전형적인 강박증적 주체이면서, 그 질문의 무용함에서 도망치려고 하고, 그러다가도 다시 포박당하는 그런 인물이다. 마지막 장면은 <나무꾼과 선녀>의 성별 역할을 뒤집어 놓은 듯한 느낌이 든다. 역시 이것도 여자 이야기가 아닌 남자 이야기.


루시퍼 ★★★

불쌍한 친구. 설정과 발상으로 별 세개를 먹고 들어간다.


프로스트와 베타 ★★★★☆

너무 아름다운 작품이지만, 이렇게 되면 처음에는 물리주의가 아닌 척 하다가도 결국에는 물리주의가 되는 것인가? 인간이 다 사라진 세상에서 기계들이 인간의 속성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추리하는 것이 무척이나 흥미롭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짓의 정반대인 것? 게다가 그럴 것 같지 않았는데 마지막 순간에 작품을 연애소설로 바꾸어 버리는 그 센스란.

"당신은 또 계측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경험의 질에 관해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계는 뒤집혀진 인간입니다. 왜냐하면 기계는 프로세스의 모든 세부를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계는 인간처럼 프로세스 자체를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캐멀롯의 마지막 수호자 ★★☆

아서왕 전설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큰 재미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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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사회 - 10점
로저 젤라즈니 지음, 김상훈 옮김/행복한책읽기



...모든 것에 만족하고 있는 자들에게 반항하라고 부추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냐. 그들의 마음 속에는 악이 들어갈 여지가 없어. - 끊임없이 그것에 고통받고 있으면서도 말이야. 괴로운 처지에 빠져 있는 노예가, 자신이 환생할 것을 - 기꺼이 괴로움을 참고 견딘다면, 아마 살찐 성인으로 - 알고 있다면, 그의 태도가 단 한 번의 삶만 주어진 자의 그것과 같을 수는 없네. 지금 겪는 고통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그만큼 미래에 쾌락이 보장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는 거의 어떠한 일도 견뎌 낼 수가 있는 거야. 만약 그런 자가 선이나 악을 믿지 않는다고 하면, 미추(美醜)의 구분이 그것을 대신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결국 바뀐 건 이름뿐이네... (p67-8)


아마도 로저 젤라즈니는 마초의 존재가치를 형이상학의 레벨에서 논증하는 것을 사명으로 부여받은 재담가일 것이다. 그는 모든 작품에서 멋진 남자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데, 이 <신들의 사회>(원제는 Lord of Light, ‘빛의 왕’이다.)의 경우에는 부당한 사회를 변혁하려는 한 남자의 책략과 성공을 흥미진진하게 묘사하고 있다.



지구를 떠나 새로운 행성에서 살게 된 인류는 자신의 영혼을 새로운 육체로 전송시킬 수 있는 과학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처음 우주선을 타고 이 행성으로 왔던 ‘제1세대’의 승무원들은 여러 육체를 옮겨 다니면서 수많은 자녀를 낳았는데, 신경쓰지 못하는 사이에 이 자손들의 숫자가 점점 불어났고 그들은 ‘하늘’이라 이름붙은 도시에 거주하는 1세대들과는 달리 미개한 문명의 레벨에서 비참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1세대들은 이들이 아직 과학문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을 힌두교의 신에 대입하는 엄격한 카스트 제도를 확립한다. 모든 이들은 죽을 때가 오면 카르마의 심판관들 앞에 나아가 일생의 기억을 기계로 낱낱이 파악당하고 새로운 육체를 부여받는다. 신들이 만든 사회질서에 우호적인 생각을 하고, 자동 기도 기계에 많은 돈을 기탁한 이들이 ‘선한 이’로 취급받는 것은 물론이다. 사회체제 그 자체인 종교, 역사상 가장 실증적인 종교가 수립된 것이다.



이들 ‘신권주의자’들에 반대하는 이들이 주인공 샘을 포함한 ‘촉진주의자’들인데, 제1세대가 과학기술을 독점하지 말고 그들 자손들의 문명을 촉진시킨다면 많은 이들이 문명의 혜택을 누릴 수 있을 거라고 주장하는 이들이다. 하지만 카르마의 심판관들과 결탁한 신권주의자들은 촉진주의자들에게 새로운 육체를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멸종시켰다. 유일하게 살아남는 샘이 차츰차츰 동지들을 모아 ‘신들의 사회’에 대항하는 과정이 소설의 큰 부분을 이룬다.



1장에서는 신들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멀리 떠나갔던 (자세히 설명하려면 너무 복잡하니 이렇게만 적어둔다.) 샘을 동료들이 다시 불러내는 과정이 나오고, 2장부터 6장까지는 샘이 어떻게 신들의 미움을 사게 되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7장은 돌아온 샘이 새로운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두는 결미이다. 시간 순서로 치면 2장에서 6장 -> 1장 -> 7장인 셈인데 이런 식의 구성이 더욱 소설에 대한 흥미를 높이고 있다.



...그건 거짓말이었네. 내 자신 그걸 믿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지는 않아. 다른 길도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었네. 이를테면, 니리티의 종교라도 상관없었어. - 다만 십자가에 못 박히는 건 아프니까 말이야. 그 대신 이슬람이라고 부르는 종교를 택할 수도 있었네. 단지 그것이 힌두교와 얼마나 사이가 나쁜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만둔 것뿐이야. 내가 불교를 택한 것은 계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었어. 나는 속인에 불과하네... (p408)



샘이 추진하는 혁명이 멋진 이유는 혁명의 동인을 체제의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끌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신들에게 대항하려는 의지를 품은 샘은 어떤 지방으로 떠나 ‘정각자’, ‘여래’를 자처하며 불법을 설파하기 시작한다. 그의 설법은 인기를 끌게 되었지만, 신들은 경악한다. 왜 그들의 체제를 무너뜨리려고 마음먹은 이 사상 최대의 협잡꾼은 하필 인류 역사상 가장 비폭력적인 종교를 고른 것이었을까?  이 이유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샘의 동료인 '죽음의 신' 야마의 경우에도 샘의 선택을 "교묘하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영감에서 비롯된 것"(p393)이었다고 평하고 있다.



만약 신들의 사회가 유태교적인 율법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다면, 나는 샘이 예수의 말을 빌렸을 거라고 생각한다. 유태교에서 크리스트교로, 그리고 힌두교의 맥락에서 불교의 탄생은 한 종교의 맥락에서 그 내부적인 모순을 해소하려는 노력에서 나왔다. 알이 있다면 바깥에서 충격을 줘서 알을 깨드린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알을 깨고 새로운 체제를 재탄생시킨 것이다. “모든 것에 만족하고 있는 자들에게 반항하라고 부추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일을 하려면 그 문화의 맥락 안에서 급진성을 추구해야 한다. 불교에 대한 로저 젤라즈니의 이해는 대부분의 서구 지식인들의 그것보다 차라리 탁월한 데가 있다. 대부분의 서양인들이 불교를 기독교와의 차이 속에서 신비한 동양의 종교로 인지하는 반면, 젤라즈니는 힌두교 안에서 탄생한 불교의 문화사적 의의를 명백하게 간파하고 있는 것이다.



왜 비폭력적인 종교라도 괜찮은 것일까? 왜 비폭력적인 교리가 나중에는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 무언가가 되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예수나 붓다의 가르침이 유태교의 율법이나 힌두교의 우주적 윤회질서에 포섭되지 않는 어떤 내면의 자율성을 강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비폭력성이 강조되는 이유는 이 자율성이 폭력에 의해 획득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만을 원한다면, 우리는 굳이 싸울 필요도 없다. 그리하여 드디어 그 자율성의 영역을 명확히 인지하게 되면,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주체적인 인간이 된다. 그리고 주체적인 인간이 되었을 때, 그는 타인의 지배를 단호하게 거부할 수 있는 결단을 내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가장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 자율성의 확립이, 폭력조차 불사하는 강력한 주체를 낳게 된다는 이 아이러니.



이 점을 샘과 다른 방식으로 신들의 체제를 전복시키려고 하는 니리티의 경우를 바라보면서 확인할 수 있다. 니리티는 힌두신화에서는 암흑과 부패의 신인데, 이 소설에서는 한때 랜프류라는 이름의 목사였던, 기독교 광신도로 등장한다. 그는 ‘하늘’에서 니리티 신의 역할을 부여받았지만 기독교가 구현되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결심하고 ‘하늘’에서 이탈한다. 좀비를 제조하고 해상에서 대포를 쏘아대는 그의 세력은 마치 무협소설의 마교를 연상케 한다. 힌두교의 바깥에서, 기독교라는 ‘진리’를 숭앙하는 광신적인 지도자는 동원할 수 있는 온갖 힘을 끌어들여 체제를 파괴하고자 한다. 그의 진리는 피지배계층의 복리라는 구체적인 삶의 문제와는 전혀 관계없는 영역에 있다. 결국 이 세계에서 그는 실패하게 되는데, 설령 성공했다 하더라도 별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가짜 붓다인 샘의 설법을 듣고 제자 한명이 실제로 붓다의 깨달음을 얻는 에피소드는 뭔가 종교적인 숭고를 보여주는 데가 있지만, 지금 내 리뷰의 포인트는 정치적 문제에 쏠려 있으니 그냥 지나치자. 내부로부터의 혁명에 대한 그의 탁월한 통찰은 견고하다고 싶었던 체제가 어느 순간 스스로 붕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1장을 보면 샘 일당은 이길 가망이 별로 없는 황당한 싸움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2장에서 6장까지의 회상을 거친 후 7장으로 넘어 가면 전세는 달라져 있다. 샘이 뿌려 놓은 씨앗이 열매를 맺어 간다. 천상도시의 신들은 샘에 의해 다시 생겨난 촉진주의자들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며 스스로의 힘을 줄인다. 촉진주의자에 우호적이었던 신들은 숙청당하거나, 샘의 반군에 합류한다. 인간들은 차츰 여기저기서 새로운 발명품을 만들어내고 있고, 신들과의 능력의 격차를 꾸준히 줄여간다. 니리티의 군대가 인간들의 도시를 공격하기 시작했을 때, ‘하늘’의 신들이 주저해서 방치하자 인간들은 금세 신들의 전능함에 의문을 품게 된다. 신들이 자신들에게 부여했던 지나친 위엄이 오히려 족쇄가 되어 그들의 권력을 붕괴시켜가는 것이다.   



...인간은 <하늘>과 공존할 수 있었지만, 니리티와는 그럴 수 없소. 야마와 쿠베라는 도시에 무기를 반입했소. 우리는 도시를 요새화하고 충분히 방어할 수 있소. 만약 <하늘>이 우리와 힘을 합친다면, 니리티는 카이푸르 앞에서 몰락할 거요. 만약 <하늘>이 촉진주의를 승인하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카르마의 심판관>들에 의한 지배를 종결시킨다면, 우리는 제안을 실행에 옮기겠소. (...) 처음 두 가지는 이미 현실로서 존재하고, 또 그럴 권리가 있는 것들에 관해 동의하는 데 불과하오. 세 번째는 당신이 그걸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어차피 일어날 일이기 때문에, 나는 당신에게 체면을 살릴 기회를 주고 있을 뿐이오... (p418-9)



이제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화된 신들을 소탕할 수 있는 시점에 왔을 때, 샘이 오히려 신들과 협상을 하고 니리티와 최후의 일전을 취한다는 것도 매력적이다. 물론 샘은 니리티와도 동맹을 맺으려고 시도했고, 실패한 이후 브라흐만 신과 협상을 한 것이므로, 이런 선택 자체는 우연적이다. 그러나 샘은 그 자신이 하려는 바가 자신의 정치적 적대자인 신들을 모조리 단두대에 올리는 것이 아님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가 하려는 일은 결국 촉진주의의 이상을 구현하는 것이므로, 이와 같은 유연한 태도가 가능한 것이다.



...무엇인가가 나를, 막 벼락을 맞으려고 하는 나무로 언제나 이끌곤 했던 거야. (...) 우발적인 사회적 양심과 일련의 올바른 실수의 결과라고나 해야 하지 않을까... (p430)



샘처럼 행동한다고 해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실패할 확률이 훨씬 높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방식이 그나마 확률이 높은 방식이고, 또한 자신이 원했던 것처럼 미학적으로 탁월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정치적 열망이 증발해 버린 시대에, 오래 전에 읽은 이 책을 다시 읽으니 기분이 묘했다. 이 혁명에 대한 멋지고 명쾌한 우화를 보고 다시 우리 사회를 생각한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 자신이나 그의 자녀들이 계층이동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무슨 방법으로 반항을 부추길 수 있을까? 다수자의 욕망, 타인의 욕망을 규범으로 삼아 우리 자신의 욕망을 찍어 누르는 이 시대에 내면의 자율성의 가치를 깨닫게 해줄 수 있는 논리는 무엇일까? 이 체제의 견고함이 오히려 그것을 제약하는 족쇄가 되는 그 순간을 볼 수 있을까? 우발적인 사회적 양심은 어떻게든 올바른 실수를 이끌어 내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러나 이성적 판단의 바깥 속에서, 낭만은 이렇게 속삭인다. 왜 지금 우리에겐 이 싸움을 이끌어줄 멋진 사내가 하나도 없는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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