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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사회 - ![]() 로저 젤라즈니 지음, 김상훈 옮김/행복한책읽기 |
...모든 것에 만족하고 있는 자들에게 반항하라고 부추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냐. 그들의 마음 속에는 악이 들어갈 여지가 없어. - 끊임없이 그것에 고통받고 있으면서도 말이야. 괴로운 처지에 빠져 있는 노예가, 자신이 환생할 것을 - 기꺼이 괴로움을 참고 견딘다면, 아마 살찐 성인으로 - 알고 있다면, 그의 태도가 단 한 번의 삶만 주어진 자의 그것과 같을 수는 없네. 지금 겪는 고통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그만큼 미래에 쾌락이 보장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는 거의 어떠한 일도 견뎌 낼 수가 있는 거야. 만약 그런 자가 선이나 악을 믿지 않는다고 하면, 미추(美醜)의 구분이 그것을 대신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결국 바뀐 건 이름뿐이네... (p67-8)
아마도 로저 젤라즈니는 마초의 존재가치를 형이상학의 레벨에서 논증하는 것을 사명으로 부여받은 재담가일 것이다. 그는 모든 작품에서 멋진 남자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데, 이 <신들의 사회>(원제는 Lord of Light, ‘빛의 왕’이다.)의 경우에는 부당한 사회를 변혁하려는 한 남자의 책략과 성공을 흥미진진하게 묘사하고 있다.
지구를 떠나 새로운 행성에서 살게 된 인류는 자신의 영혼을 새로운 육체로 전송시킬 수 있는 과학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처음 우주선을 타고 이 행성으로 왔던 ‘제1세대’의 승무원들은 여러 육체를 옮겨 다니면서 수많은 자녀를 낳았는데, 신경쓰지 못하는 사이에 이 자손들의 숫자가 점점 불어났고 그들은 ‘하늘’이라 이름붙은 도시에 거주하는 1세대들과는 달리 미개한 문명의 레벨에서 비참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1세대들은 이들이 아직 과학문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을 힌두교의 신에 대입하는 엄격한 카스트 제도를 확립한다. 모든 이들은 죽을 때가 오면 카르마의 심판관들 앞에 나아가 일생의 기억을 기계로 낱낱이 파악당하고 새로운 육체를 부여받는다. 신들이 만든 사회질서에 우호적인 생각을 하고, 자동 기도 기계에 많은 돈을 기탁한 이들이 ‘선한 이’로 취급받는 것은 물론이다. 사회체제 그 자체인 종교, 역사상 가장 실증적인 종교가 수립된 것이다.
이들 ‘신권주의자’들에 반대하는 이들이 주인공 샘을 포함한 ‘촉진주의자’들인데, 제1세대가 과학기술을 독점하지 말고 그들 자손들의 문명을 촉진시킨다면 많은 이들이 문명의 혜택을 누릴 수 있을 거라고 주장하는 이들이다. 하지만 카르마의 심판관들과 결탁한 신권주의자들은 촉진주의자들에게 새로운 육체를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멸종시켰다. 유일하게 살아남는 샘이 차츰차츰 동지들을 모아 ‘신들의 사회’에 대항하는 과정이 소설의 큰 부분을 이룬다.
1장에서는 신들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멀리 떠나갔던 (자세히 설명하려면 너무 복잡하니 이렇게만 적어둔다.) 샘을 동료들이 다시 불러내는 과정이 나오고, 2장부터 6장까지는 샘이 어떻게 신들의 미움을 사게 되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7장은 돌아온 샘이 새로운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두는 결미이다. 시간 순서로 치면 2장에서 6장 -> 1장 -> 7장인 셈인데 이런 식의 구성이 더욱 소설에 대한 흥미를 높이고 있다.
...그건 거짓말이었네. 내 자신 그걸 믿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지는 않아. 다른 길도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었네. 이를테면, 니리티의 종교라도 상관없었어. - 다만 십자가에 못 박히는 건 아프니까 말이야. 그 대신 이슬람이라고 부르는 종교를 택할 수도 있었네. 단지 그것이 힌두교와 얼마나 사이가 나쁜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만둔 것뿐이야. 내가 불교를 택한 것은 계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었어. 나는 속인에 불과하네... (p408)
샘이 추진하는 혁명이 멋진 이유는 혁명의 동인을 체제의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끌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신들에게 대항하려는 의지를 품은 샘은 어떤 지방으로 떠나 ‘정각자’, ‘여래’를 자처하며 불법을 설파하기 시작한다. 그의 설법은 인기를 끌게 되었지만, 신들은 경악한다. 왜 그들의 체제를 무너뜨리려고 마음먹은 이 사상 최대의 협잡꾼은 하필 인류 역사상 가장 비폭력적인 종교를 고른 것이었을까? 이 이유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샘의 동료인 '죽음의 신' 야마의 경우에도 샘의 선택을 "교묘하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영감에서 비롯된 것"(p393)이었다고 평하고 있다.
만약 신들의 사회가 유태교적인 율법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다면, 나는 샘이 예수의 말을 빌렸을 거라고 생각한다. 유태교에서 크리스트교로, 그리고 힌두교의 맥락에서 불교의 탄생은 한 종교의 맥락에서 그 내부적인 모순을 해소하려는 노력에서 나왔다. 알이 있다면 바깥에서 충격을 줘서 알을 깨드린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알을 깨고 새로운 체제를 재탄생시킨 것이다. “모든 것에 만족하고 있는 자들에게 반항하라고 부추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일을 하려면 그 문화의 맥락 안에서 급진성을 추구해야 한다. 불교에 대한 로저 젤라즈니의 이해는 대부분의 서구 지식인들의 그것보다 차라리 탁월한 데가 있다. 대부분의 서양인들이 불교를 기독교와의 차이 속에서 신비한 동양의 종교로 인지하는 반면, 젤라즈니는 힌두교 안에서 탄생한 불교의 문화사적 의의를 명백하게 간파하고 있는 것이다.
왜 비폭력적인 종교라도 괜찮은 것일까? 왜 비폭력적인 교리가 나중에는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 무언가가 되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예수나 붓다의 가르침이 유태교의 율법이나 힌두교의 우주적 윤회질서에 포섭되지 않는 어떤 내면의 자율성을 강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비폭력성이 강조되는 이유는 이 자율성이 폭력에 의해 획득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만을 원한다면, 우리는 굳이 싸울 필요도 없다. 그리하여 드디어 그 자율성의 영역을 명확히 인지하게 되면,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주체적인 인간이 된다. 그리고 주체적인 인간이 되었을 때, 그는 타인의 지배를 단호하게 거부할 수 있는 결단을 내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가장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 자율성의 확립이, 폭력조차 불사하는 강력한 주체를 낳게 된다는 이 아이러니.
이 점을 샘과 다른 방식으로 신들의 체제를 전복시키려고 하는 니리티의 경우를 바라보면서 확인할 수 있다. 니리티는 힌두신화에서는 암흑과 부패의 신인데, 이 소설에서는 한때 랜프류라는 이름의 목사였던, 기독교 광신도로 등장한다. 그는 ‘하늘’에서 니리티 신의 역할을 부여받았지만 기독교가 구현되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결심하고 ‘하늘’에서 이탈한다. 좀비를 제조하고 해상에서 대포를 쏘아대는 그의 세력은 마치 무협소설의 마교를 연상케 한다. 힌두교의 바깥에서, 기독교라는 ‘진리’를 숭앙하는 광신적인 지도자는 동원할 수 있는 온갖 힘을 끌어들여 체제를 파괴하고자 한다. 그의 진리는 피지배계층의 복리라는 구체적인 삶의 문제와는 전혀 관계없는 영역에 있다. 결국 이 세계에서 그는 실패하게 되는데, 설령 성공했다 하더라도 별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가짜 붓다인 샘의 설법을 듣고 제자 한명이 실제로 붓다의 깨달음을 얻는 에피소드는 뭔가 종교적인 숭고를 보여주는 데가 있지만, 지금 내 리뷰의 포인트는 정치적 문제에 쏠려 있으니 그냥 지나치자. 내부로부터의 혁명에 대한 그의 탁월한 통찰은 견고하다고 싶었던 체제가 어느 순간 스스로 붕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1장을 보면 샘 일당은 이길 가망이 별로 없는 황당한 싸움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2장에서 6장까지의 회상을 거친 후 7장으로 넘어 가면 전세는 달라져 있다. 샘이 뿌려 놓은 씨앗이 열매를 맺어 간다. 천상도시의 신들은 샘에 의해 다시 생겨난 촉진주의자들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며 스스로의 힘을 줄인다. 촉진주의자에 우호적이었던 신들은 숙청당하거나, 샘의 반군에 합류한다. 인간들은 차츰 여기저기서 새로운 발명품을 만들어내고 있고, 신들과의 능력의 격차를 꾸준히 줄여간다. 니리티의 군대가 인간들의 도시를 공격하기 시작했을 때, ‘하늘’의 신들이 주저해서 방치하자 인간들은 금세 신들의 전능함에 의문을 품게 된다. 신들이 자신들에게 부여했던 지나친 위엄이 오히려 족쇄가 되어 그들의 권력을 붕괴시켜가는 것이다.
...인간은 <하늘>과 공존할 수 있었지만, 니리티와는 그럴 수 없소. 야마와 쿠베라는 도시에 무기를 반입했소. 우리는 도시를 요새화하고 충분히 방어할 수 있소. 만약 <하늘>이 우리와 힘을 합친다면, 니리티는 카이푸르 앞에서 몰락할 거요. 만약 <하늘>이 촉진주의를 승인하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카르마의 심판관>들에 의한 지배를 종결시킨다면, 우리는 제안을 실행에 옮기겠소. (...) 처음 두 가지는 이미 현실로서 존재하고, 또 그럴 권리가 있는 것들에 관해 동의하는 데 불과하오. 세 번째는 당신이 그걸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어차피 일어날 일이기 때문에, 나는 당신에게 체면을 살릴 기회를 주고 있을 뿐이오... (p418-9)
이제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화된 신들을 소탕할 수 있는 시점에 왔을 때, 샘이 오히려 신들과 협상을 하고 니리티와 최후의 일전을 취한다는 것도 매력적이다. 물론 샘은 니리티와도 동맹을 맺으려고 시도했고, 실패한 이후 브라흐만 신과 협상을 한 것이므로, 이런 선택 자체는 우연적이다. 그러나 샘은 그 자신이 하려는 바가 자신의 정치적 적대자인 신들을 모조리 단두대에 올리는 것이 아님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가 하려는 일은 결국 촉진주의의 이상을 구현하는 것이므로, 이와 같은 유연한 태도가 가능한 것이다.
...무엇인가가 나를, 막 벼락을 맞으려고 하는 나무로 언제나 이끌곤 했던 거야. (...) 우발적인 사회적 양심과 일련의 올바른 실수의 결과라고나 해야 하지 않을까... (p430)
샘처럼 행동한다고 해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실패할 확률이 훨씬 높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방식이 그나마 확률이 높은 방식이고, 또한 자신이 원했던 것처럼 미학적으로 탁월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정치적 열망이 증발해 버린 시대에, 오래 전에 읽은 이 책을 다시 읽으니 기분이 묘했다. 이 혁명에 대한 멋지고 명쾌한 우화를 보고 다시 우리 사회를 생각한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 자신이나 그의 자녀들이 계층이동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무슨 방법으로 반항을 부추길 수 있을까? 다수자의 욕망, 타인의 욕망을 규범으로 삼아 우리 자신의 욕망을 찍어 누르는 이 시대에 내면의 자율성의 가치를 깨닫게 해줄 수 있는 논리는 무엇일까? 이 체제의 견고함이 오히려 그것을 제약하는 족쇄가 되는 그 순간을 볼 수 있을까? 우발적인 사회적 양심은 어떻게든 올바른 실수를 이끌어 내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러나 이성적 판단의 바깥 속에서, 낭만은 이렇게 속삭인다. 왜 지금 우리에겐 이 싸움을 이끌어줄 멋진 사내가 하나도 없는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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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른 어떤 부서보다도 국방부가 더 일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당면한 문제가 단순해서인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국방부는 장기적인 목표를 세워놓고, 그것을 현실태에 맞춰 추진하고 있다.
국방부의 지상과제는 현재의 징병제 군대를 되도록 모병제 군대와 비슷하게 바꿔나가는 것이다. 전쟁 쪽수로 하는 시대는 지났고, 징병제 병사들이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예비역이라면 누구나 병기본훈련은 받지 못하고 삽질, 곡괭이질, 낫질을 해야 했던 자신의 군생활을 기억할 것이다. 구타, 가혹행위, 언어폭력 등등을 금지하는 병영생활행동강령이 법으로 규정된 걸 두고 군기가 있어야 전투력이 생긴다고 코멘트했던 몇몇 예비역들을 보면 솔직히 웃음이 나온다. 자신의 군생활을 약간만 솔직하게 돌이켜봐도 그딴 식의 ‘똥군기’와 전투력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90년대 후반의 한국군은 지금에 비하면 말할 수 없을 만큼 구타가 일상적이었지만, 동해 잠수함 침투 사건 때 침투한 북한 특공부대원들 앞에서 어쩔 줄 몰랐다. 그들 대부분은 겁이 나서 소대장(소위다. 육군 병장들이 짬으로도 안 보는 그 소위들...) 뒤에 일렬로 서서 수색에 참여했다. 내가 속한 부대는 철책선을 바라보는 부대는 아니었는데, 그 당시 트랜드가 ‘직할대’를 검열로 조지는 거라서 교육훈련 검열을 특히 많이 나왔다. 덕분에 나는 화생방 상황시 ‘임무형 보호태세’를 주어진 시간 내에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분교대에 가보니 임무형 보호태세는커녕 방독면을 규정된 시간 내에 쓸 수 있는 병장들은 거의 없다시피했다. (참고로 나는 '메이커 부대‘에서 군생활했다. 지금 어느 후방의 듣보잡 부대를 얘기하는 게 아니다.) 이런 건 ‘군기’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훈련량의 문제다. 나는 솔직히 말하면 몸으로 하는 일은 정말 못하는 편이다. 그래도 하다보니까 되더라. 다른 부대 사람들은 당연히 평소에 안했으니까 안 되는 거고.
그렇다고 바로 모병제를 시행할 수는 없다. 일단 방만한 사단조직이 정리되어야 하고 - 사단 통폐합 작업은 현재 진행 중이다.- 모병제 하 사병들의 급여 문제도 한번에 해결될 수는 없다. 언젠가 양심적 병역거부자 문제를 두고 아는 형들이랑 토론했는데, 양병거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어느 형은 “문제는 양병거가 아니라 징병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거야!”라고 열을 올려 나를 웃겼다. 아니 그게 한번에 폐지되는 건가? 국가 정책이 무슨 혁명하자는 건가? 사실 국방부는 지향도 있거니와 현실태도 알고 있다. 국방부의 ‘개혁’ 정책이 지향하는 바를 단순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1) 간부 숫자를 늘린다. 2) 유급지원병을 늘린다. 3) 사병월급을 올린다. 4) 무급(월급이 올랐지만 무급이라 봐도 무방하다.) 사병의 숫자를 줄인다. 이 네가지 과제를 점진적으로 추진하는 국방개혁 2020을 나는 나무람없이 지지한다.
사회복무제 역시 지지한다. 단, 사회복무제를 통해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집총하지 않고 사회에 대한 의무를 다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준다면 말이다. 솔직히 말해 군대 가서 총쏘는 일보다 조직 자체를 건사하는 막노동이 많은 현실에서, 총 한번 안 쏴보고 일만 하다가 전역하는 평화주의자들이 있다 한들 그게 무슨 해가 된다는 건가? “너는 나와 다른 도덕률을 가질 수 없어. 왜냐하면, 내가 당연히 받아들이는 걸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나를 불쾌하게 하거든.”이라는 식의 소심한 논법을 벗어난다면, (아, 이 얼마나 마초적이지 못한 논법인지!) 사회복무제 혹은 대체복무제의 경제적 타당성을 부인할 논리는 딱히 없다. 논변적 타당성이 아니라 감성적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고백하자면 나는 절대적 평화주의자가 아니다. 심지어 나는 군생활 내내 내가 가진 K2 소총을 사랑했다. 좀 무서워하긴 했지만. (총 안 무서워하는 것들은 정말로 무섭다. 꼭 이런 애들이 사고친다.) 그렇다 해도 자신보다 도덕적인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는 건 인간적인 품위를 지키는 길이다. 나는 육식을 죄책감없이 행하지만, 그렇다고 채식주의자를 ‘꼴통’이라 부를 이유는 없잖은가? 양병거를 향한 악다구니들이 지겨운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러나 사회복무제에 여성이 포함되기로 했다는 논의는 여러 가지 고민거리를 낳는다. 나는 그 조치가 잘못된 것이라고 얘기하지는 않는다. 이 조치는 나름대로 고육지책이다. 당연히 이 조치는 군가산점제의 부활에 대한 예고편에 해당한다. 군가산점제의 문제는 무엇인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같은 사람은 단적으로 그 정책의 문제점을 ‘기회비용을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즉, 여성(+장애인들)이 군가산점을 포기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보자, 라는 문제에서, 우리는 아무런 대답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여남 개병제? 일단 이건 말이 안 된다. 첫째, 앞서 내가 언급했던 국방부의 군발전방향에 어긋난다. 여자를 우르르 군대에 몰아넣는다 해서 전투력이 높아지지는 않는다. 둘째, 설령 전투력에 도움이 된다 하더라도, 여성들을 몰아넣을 수 있는 막사를 짓기 위해서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소모된다. 그보다는 모병제로 전환하는게 차라리 비용이 덜 들 것이다. 셋째, 과연 남자들이 원하는 것이 여자들을 군대에 몰아넣는 일일까? 그것이 파생하는 효과를 안다면?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나는 보급병이었는데, 후임들이 여자들도 군대와야 한다 얘기할 때마다 다음과 같은 말같잖은 논리로 찍어눌렀다. “너 지금 나보고 생리대도 배달하라고?” (참고로 군대에선 모든 위생구들이 보급품이다.) 솔직히 말하면 여성 일반이 군대에 간다는 상상은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부분이 있다. 이건 좀 다르게 표현하면 너무 전복적인 상상력이다. 한국 여성들은 무의식적으로나마 세상에서 가장 심각하게 남성들에게 어필하려고 노력하는 집단일 텐데, 군역은 이 노력을 아예 무화시켜 버린다. 남자들이여-. 군대에서 만난 여군들을 기억하고 있겠지? 물론 그때는 하악하악했을 지도 모르지만. 한국 남자들이 20대 초반 여성들의 성적 매력을 대충 2년 동안 그렇게 철저하게 까부수는 걸 원할까? 나는 그들이 그 결과를 알고 있는 다음에야,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들이 실제로 원하는 건 (뭘 말하고 있건 간에) 여자들이 군대에 가는 게 아니라 군대 갔다 온 자신을 떠받들어 주는 거다. 자신의 주장의 결과를 모르고 늘어놓는 인간을 보면 우습다. 그런 이들의 맹점을 파고드는 악마들의 전설을 우리는 너무도 많이 보아왔다. “내가 원하던 것은 이게 아니야-” 제 말이 초래하는 결과를 예측하지 못했던, 악마에게 당하는 인간들의 고전적인 외침이다.
그래서 여자더러 ‘너도 군대 가’라는 얘기는 전혀 말이 안 된다. 설령 내가 ‘여자가 왜 군대 가?’라고 중얼거리는 마초가 아닐지라도. (나는 마초라서, 이스라엘 남자들을 좀 우습게 본다.) 하지만 사회복무제에 여성이 포함될 수 있다는 얘기는 이제 다른 차원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군가산점제를 산출할 수 있는 기회비용으로 계산하고 있지 않은가? 이 제도가 시행되면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려는 여성은 두 개의 선택지를 지니게 된다. 22개월의 사회복무를 이행하고 가산점을 받든가, 아니면 22개월의 노력이 군가산점을 충분히 넘어설 수 있다고 판단하든가. 정말 군가산점을 옹호하기 위한 탁월한 제도다.
여기서 나는 딜레마에 빠진다. 먼저 두 가지의 팩트를 지적하자. 첫째, ‘국방의 의무’라는 측면에서 (물론 이것이 바로 ‘군복무의 의무’와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 남성들은 한국 여성들에 비해 과도한 의무수행을 해 왔다. 그러므로 사회복무제가 되었든 돈으로 내는 국방세가 되었든 이 부분을 교정하자면 여성들이 지금까지보다 추가적인 희생을 약속해야 마땅하다. 둘째, 그렇지만 전체적인 삶의 맥락에서 볼 때, 여전히 한국 여성들이 한국 남성들에 비해 누리는 삶의 질은 열악하다. 공부할 수 있는 권리, 직장에서 받는 처우, 출산과 육아의 의무가 온전히 그들에게만 떨어지고 그 피해가 직장생활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 점 등이 모두 그러하다. 그들에게 특정한 문제에서 더한 희생을 요구하려면, 적어도 다른 부문에서의 혁신적인 진보(...도 아니고 공평한 처우)를 약속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총괄적인 시각이고, 어쨌든 그 문제와 논리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어찌 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국방부의 정책이 국방부로서는 최선의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는 그러한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한 명의 남성으로서는 그들의 정책에 찬성할 수 없다고 여긴다. 사회복무제에 여성을 포함시켜 군가산점제를 옹호하자는 야바위는, 적어도 현재의 한국의 여남관계 수준에서는 ‘치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판단을 온전히 옳은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점에 내 고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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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어녀' 소동을 보면, 한국 남자들이, 혹은 전체 한국인들이 여자를 대하는 방식이 얼마나 못돼먹었는지 알 수 있다. 어떤 시민의 억울한 옥살이 사연에 대한 네티즌의 분노가, 그를 억울하게 기소한 사람, 그를 그릇되게 수사한 사람, 그를 그릇되게 판결한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여자 경찰 하나만을 빼내어 '불어녀'라고 칭하는 '폭력'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할까.
논점은 그 경찰이 잘못이 있느냐, 없느냐는 것이 아니다. 복잡한 구조에서, 혹은 과오가 있는 이들의 집합에서 여자 한명을 끄집어 내어 마녀사냥하는 그 정신머리를 지적하는 것이다. 그동안 온갖 '...녀'들을 만들다보니 그들은 그 짓에 재미가 들렸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다만 고약한 취미의 관성적인 현존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정도는 가령 '군삼녀' 사건 보다도 훨씬 더 심하다. 나는 군삼녀 사건 때 남자들의 반응을 보고 피식 웃었지만, 적어도 그것은 그 사람 한 명의 발언에 대한 문제였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집단의 과오에서도 쉽사리 '...녀'를 호출하고야 만다. 아예 머리 속에 '세상을 어지러뜨리는 여자'의 관념을 쳐박아두고 사는 모양이다.
이런 악취미가 성립하기 위해선, 일단 '그들에게 만만한 것은 여자!'라는 등식이 필요하다. 물론 그들은 입으로는 대한민국은 외려 남자가 차별받는 사회이며, 여성가족부와 페미니스트만큼 악랄한 족속은 세상에 없다며 징징댈게 뻔하지만 말이다. 또한 한 시민의 억울함을 둘러싼 사건의 모든 국면 중에서, 그들이 진정 견디기 힘들었던 건 그의 억울함이 아니라, 그 남자에게 소리친 한 명의 여자의 존재였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한국 남자들이 한국 여자들을 비난할 때는 픽하면 군대를 걸고 넘어지므로 여기서 거기에 대해 한마디 안 할 수는 없겠다. 도대체 '군인'이라는 정체성은 '자부심'인가, '컴플렉스'인가? 만일 자부심이라면, 그들이 군대생활이 의미가 있었으며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군대에 가지 않은 이들에 대해 "자식들, 그것도 못 해봤다니."라며 가볍게 경멸할 수는 있을지언정 악다구니처럼 악을 쓸 이유는 없다. 오히려 자부심의 소유자들은 자신의 자부심의 원천을 많은 이와 공유하지 않으려는 경향마저 있다.
만일 그 정체성이 그저 '컴플렉스'이기만 해도 문제는 더욱 단순하다. 우리는 누군가의 컴플렉스에 어느 정도 사회적인 이유가 있을 경우 그를 동정하지만, 그래도 컴플렉스를 극복한 이를 그렇지 못한 이보다 훌륭한 이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인종, 학력, 성정체성, 지역 등 모든 문제에서 그렇다. 비록 모든 이에게 컴플렉스를 극복할 것을 주문하는 것은 폭력이라 하더라도, 컴플렉스를 극복한 이를 훨씬 더 존중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군인'의 정체성을 가진 이들 사이에선 외려 컴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한 이들이 더 설치며, 심지어 그것이 컴플렉스가 아니라고 강변한다.
왜일까.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그 정체성이 '컴플렉스를 숨기기 위해 필사적으로 끌어들인 자부심'이기 때문이다. 그 자부심에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다. 물론, 군인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징병제를 무조건 모병제로 바꾸는 것이 '선'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군대는 매우 방만하고, 인력을 쓸모없이 소모하는 일들이 많이 벌어진다. 그리고 노동의 효율성과 상관없이 그들은 노동에 대한 적당한 댓가도 지불받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국가에 의해 차압당한 세월을 아까워 하지만, 그 분노를 국가에 터트리지 못한다. 오히려 자신은 쓸모있는 일을 했다는 국가의 세뇌를 어느 정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입각하여 군대에 안 간 이들에게 분노를 뿜어낸다.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본질적으로는'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하는 격"이다.
신체 건장하면서 군대에 안 간 이들에게 그 분노가 뿜어지는 경우에야, 그것은 형평성의 차원에서 정당할 수 있다. 하지만 '여자들도 군대가라'는 땡깡은 너무나도 생뚱맞다. 말을 내뱉을 때, 자신의 말이 실현되는 가능세계를 상상해 보는 버릇이 안 든 탓이다. 지금 한국군은 여자를 수용할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다. 그에 적합한 시설을 만들려면, 엄청난 자금이 들어갈 것이고, 그 돈으로 차라리 모병제 전환을 하는 게 더 낫겠다. 이스라엘군이 그렇게 좋으면 이스라엘로 이민가라. 대체복무제 얘기할 때는 해외사례에 코방귀도 안 뀌던 인간들이, 꼭 이럴 때만 이스라엘 들먹인다.
인터넷에서 이런 저런 얘기하는 이들을 대개 마초라고 칭한다. '사이버 마초'라든가, 혹은 '예비역 마초'라든가. 요샌 그런 표현에 점점 더 회의가 든다.
마초라는 말은 나도 많이 쓴다. 사석에서, 나는 나 자신을 마초라고 칭한다. 좀 거들먹 거릴려고 그렇게 말할 때도 있고, 일종의 자아성찰적인 의미에서 그렇게 말할 때도 있다. 또한 사석에서 가끔 나는 누군가를 마초라고 칭한다. 그건 칭찬일 때도 있고, 비난일 때도 있다. 나는 마초를 '저급하지만 하나의 완결된 윤리의식을 지닌 사람'으로 파악하기도 하고, '여성을 인격체로 대우하지 않고 대상화시키는 위인'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이렇게 마초라는 말엔 의미의 격차가 많지만, 그래도 본질적인 의미규정은 있다.
어찌됐든 마초는 남성성을 과시하는 자이다. 남성성을 과시하는 자가 패거리 속에서 여자만 빼내어 다구리 친다는 것이 될 말일까? 남성성을 과시하는 자가, 여자들더러 군대에 오라는 게 말이나 될 소릴까? 아무리 한국군이 남성성을 발현하는 곳이 아니라 남자가 자신의 찌질함을 체험하는 곳이라도 그렇지. 공자님의 정명(正名) 사상을 존중하여 우리는 그들을 올바르게 호칭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이들을 부를 땐 마땅히 '마초도 못 되는 것들'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P.S 그렇구나. 난 마감 때만 남자들에게 신경질을 부리는 거야. 어서 마감하자, 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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