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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윤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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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초'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08/01/20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 작품별 별점평 (3)
  2. 2007/12/29
    신들의 사회 : 혁명에 관한 멋진 은유 (10)
  3. 2007/07/11
    사회복무제 도입과 군가산점제의 문제 (15)
  4. 2007/04/18
    마초의 위기 (12)
  5. 2002/03/10
    [고찰] 마초이즘의 문화적 표류와 계통 발생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 8점
로저 젤라즈니 지음, 김상훈 옮김/열린책들




로저 젤라즈니. 1995년 암으로 사망. 1998년에 출간된 그의 추모 엔솔러지의 제목이 (로버트 실버버그와 닐 게이먼 등이 참여한) <Lord of the Fantastique>이었다는 점에서 SF/판타지계에 미친 그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원래 술 좋아하는 남자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소설을 쓰는 작가는 장수할 수가 없다. 1937년생인 그가 죽은 지는 벌써 10년이 넘었지만 1929년생인 어슐러 르 귄 여사는 아직도 활동하고 계시고, 무림맹주 김용은 아직도 말년을 즐기고 있지만 고룡은 (진산님이 자신의 블로그 어딘가에 쓴 표현을 빌리자면) 그의 소설 주인공들처럼 열심히 술을 먹다가 1980년대에 이미 사망. 이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는 역시나 한국의 로저 젤라즈니 전문 번역자이신 김상훈씨가 번역했고 주로 초기의 중단편들이 모여 있는데, 총평보다는 작품별로 얘기하는 것이 더 나을듯. 인용문이 있을 경우 되도록 작품의 분위기를 살리면서도 핵심적인 반전과는 상관없는 부분에서 택했으니 안심하기 바람.


12월의 열쇠 ★★★★

내가 완산정에서 모주를 마시며 이 소설의 스토리를 주욱 설명했을 때 ssy가 말했다. "야, 정말 스펙터클하다. 근데 몇 페이지야?" "30페이지." "뭐라고?! 몇페이지라고???" "30페이지-." 첫문장부터 상황을 설명하는 간결함이 돋보인다. 종종 젤라즈니가 그렇게 하듯이 시작과 끝이 똑같다. 좀 더 개인적인(?) 이유로 활동하는 <신들의 사회>의 주인공을 보는 느낌이랄까. 젤라즈니는 '마초적 사적 윤리'의 제왕이다. 마지막 장면은 꽤 감동적이다. 아주 마음에 드는 작품.

"1년만 더 기다려 줘."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1년 후에는 당신에게 세계를 하나 사줄께! 빨리 기계의 가격과 운임을 알려 줘......"

누가 젤라즈니 아니랄까봐!


그 얼굴의 문, 그 입의 등잔 ★★★★

이 소설이 잡지에 실렸을 때 훗날 젤라즈니와 함께 뉴웨이브를 대표하게 되는 딜레이니의 여자친구가 그 잡지를 들고 뛰어들어와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이봐, 칩(딜레이니의 애칭), 이거 읽어 봤어? 도대체 이 작가가 누구지? 이 사람에 관해 뭔가 아는 거 없어? 지금까지 무슨 작품들을 썼지?" 그렇게 말할 만한, 매력적인, 젤라즈니 다운 작품이다. 묘사의 패턴은 젤라즈니스럽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의 작품들 중에서 특히나 알프레드 베스터에 가깝다는 느낌이 든다. 아마도 여주인공의 위상이 비슷하기 때문인 것 같다. 베스터의 소설에서 여자는 불가해하면서도 모종의 역할을 부여받지만, 젤라즈니의 많은 소설에선 여자는 불가해하기 때문에 초월적인 역할을 부여받거나 아예 역할을 부여받지 못한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선 그나마 여주인공의 역할이 전자에 가깝다. 주인공은 전형적인 젤라즈니적 마초이지만, 쇠락해 있는 처지가 더 현실적이고 매력적이다. 역시 아주 마음에 드는 작품.

"한잔 사주겠다는 거야?"

"응, 커피"

"커핀 싫어."

"넌 병자야. 그리고 여기서 마셔도 되는 건 커피뿐이야."

"커피란 위벽을 타게 만드는 갈색의 액체야. 제일 아래 서랍에 숨겨 둔 게 있지 않나."

며칠 전 사당역 커피빈에서 위 대사를 한번 시험해 보았다.


악마차 ★★★☆

제대로 된 서부극 SF. 주인공이 멋있는 사내가 아니고 그의 적이 그런 놈이다. 일단 이게 하나의 뒤집는 포인트. 다음으로 웃긴 건, 서부극에서라면 남자가 싸우고 여자는 가만히 있어야 하는데, 여기서 여자의 역할을 맡는 건 그의 무기인 지성을 가진 자동차-. (그러니까 SF가 되는 거지만) 그러니까 여기선 남자의 설득을 받은 여자가 싸우고 있고, 우리 남성 동지께서는 아무 일도 안 하고 계신다. 이런 저런 묘한 패러디로 유쾌하면서도 슬픈 작품.

"그가 다른 차들과 사람들에게 많은 피해를 입힌 것은 사실이고, 그건 정말 끔찍한 일이에요. 하지만 그는 뭔가를 가지고 있어요. 뭔가 - 고귀한 것을. 자신의 자유를 얻기 위해, 전 세계를 상대로 싸워 온 생활 방식 같은 걸 말이에요, 샘. 저 흉포한 차의 무리를 통솔하고, 자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 주인 없이 - 살아가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고, 부서지거나 패배할 때까지 투쟁하겠다는 결의. 샘, 아까 거기 있었을 때 나는 한순간 그의 무리와 합류해서, 그와 함께 <도로평원>을 질주하고, 그를 위해 주유 요새의 문을 향해 나의 로켓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어요......"

그러시든지.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

<12월의 열쇠>와 이 소설을 합치면 <신들의 사회>가 탄생할 거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종교적(혹은 예술적) 카타르시스에 대한 이 소설의 묘사가 <신들의 사회>를 압도한다. 남성의 내면세계와 형이상학, 그리고 연애가 절묘하게 맞물린 훌륭한 중편 소설.

......그러나 저러나 천재적인 언어능력을 갖춘 시인이 자기보다 훨씬 큰 사내를 유도로 때려눕히다니. 이 아저씨 너무 하는거 아냐? ;; (젤라즈니는 실제로 유도와 펜싱을 좋아했다.)

몇 년 전 나는 인도에서 거리의 무희 데바다시들의 춤을 본 적이 있다. 다채로운 오색 거미줄을 치며, 수컷 곤충을 유인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브락사는 그 이상이었다. 그녀는 라마자니, 비슈누의 화신이자 인간에게 춤을 내려 준 라마를 열렬히 숭배하는 그 성스러운 무희의 한 사람이었다.

째깍거리는 소리는 이제 단조롭고 일정한 박자를 따르고 있었다. 현이 내는 흐느끼는 소리는 바람에 의해 열을 빼앗긴 따가운 햇살을 생각나게 했다. 그 푸른 모습은 사라스바티였고, 마리아였고, 로라라는 이름의 소녀였다. 어딘가에서 시타르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눈앞의 조상이 살아나는 것을 보았으며, 성스러운 영감을 들이마셨다.

또다시 나는 해시시에 탐닉하는 랭보였고, 아편에 취한 보들레르였고, 포, 드 퀸시, 와일드, 말라르메, 알레이스터 크롤리였다. 그리고, 한순간이긴 했지만 거무스름한 설교단에 선 새까만 양복 차림의 아버지였다. 찬송가가 들렸고, 파이프 오르간 소리는 반짝이는 바람으로 변했다.

그녀는 빙빙 도는 바람개비였고, 공중에 뜬 깃털 달린 그리스도 수난상이었으며, 선명한 색상의 옷 한 벌을 건 채 수평으로 처진 빨랫줄이었다. 그녀의 어깨에서는 이제 속살이 드러나 있었고, 오른쪽 가슴은 밤하늘의 달처럼 상하로 움직였다. 붉은 젖꼭지가 옷주름 위로 언뜻 보였다가 다시 사라졌다. 음악은 신에 대한 욥의 항변처럼 양식적이었다. 그녀의 율동은 신의 대답이었다.

이런 춤은 봐서는 안 됩니다.


괴물과 처녀 ★★★

마지막 대사의 여운이 그럭저럭 와닿는 엽편소설.


이 죽음의 산에서 ★★★★

사실 마지막 반전이 썩 마음에 들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불가지는 불가지인 상태로 놓아두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긴 젤라즈니에게 불가지란 여자의 다른 이름일 따름이니까. 그래도 마초의 본질을 꿰뚫는 먹어주는 장면들이 다수 등장하기 때문에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산이여." 나는 말했다. "산이여, 너는 내게 오지 말라고 했지."

천둥이 우르렁거렸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나는 이 분야 최고의 전문가들을 데리고 갈 거야." 나는 말했다. "너의 사면을 타고 올라가서, 너의 가장 높은 봉우리들 위에서 별을 올려다보기 위해서 말이야. 내가 이런 일을 꼭 해야 하는 건 네가 거기 있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어. 개인적인 이유는 전혀 없어......"

잠시 후,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사실이 아냐."

"난 남자야." 나는 말했다. "그리고 설령 내가 죽더라도, 내가 죽지 않는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산들을 정복할 필요가 있어. 난 지금 내가 원하는 것보다 작아, 시스터. 그리고 넌 나를 더 크게 만들어 줄 수 있어. 그래서 아마 이건 개인적인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그건 내가 할 줄 아는 유일한 일이고, 너는 내게 남겨진 마지막 산이야 - 내가 전 생애에 걸쳐 습득한 기술을 시험해 볼 마지막 도전이지. 아마 죽을 운명에 있는 자는 자기 자신에 대한 도전을 받아들였을 때 불사의 존재에 가장 가까워지는 것인지도 모르겠군. 위험을 극복할 때 말야. 승리의 순간은 바로 구제의 순간이기도 해. 내겐 그런 순간들이 많이 필요하고, 마지막 순간은 그중에서도 가장 긴 것이어야 해. 남은 인생을 그것 하나로 버텨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넌 거기 있어, 시스터. 난 여기 서서 죽어야 할 운명을 곱씹어 보고 있고, 그런 내게 너는 오지 말라고 했어. 난 그럴 수 없어. 난 너한테 갈 거야. 설령 네가 나를 향해 죽음을 내던지더라도, 난 그것과 정면으로 맞설 거야. 그것밖에는 대안이 없어."

나는 술병에 남아 있던 술을 전부 들이켰다.

이렇게 그리스 서사시적인 대사를 취해서 주사를 부리듯 내뱉다니!


수집열 ★★★☆

얄미운 녀석에게 복수하는 결말이 마음에 든다는.


완만한 대왕들 ★★★☆

지성을 가진 유인원들에 대한 적절한 야유. 적당히 웃을 수 있다.
 

폭풍의 이순간 ★★★★

구성이나 설정 자체가 엄청났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연애소설로서는 꽤 아련한 부분이 있다. 젤라즈니의 남자 주인공들은 불사나 그에 준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렇지만 평균적인 젤라즈니 소설의 남자보다 훨씬 정서적인 주인공이다. 어딘지 모르게 사랑의 상처를 입고 영원히 떠도는 시미즈 레이코 만화의 로봇들이 떠오른다.

혹시 언제, 어딘가에 나를 위한 황금 시대가, 르네상스가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어딘가에 존재하는 나의 시대가, 단 한 장의 티켓, 단 하나의 비자, 단 한 장의 일기장 너머 어딘가에 있다고. 언제, 어디가 될 지는 모른다. 누가 그런 것을 알 수 있겠는가? 어제 내렸던 비는 모두 어디에 있는 것일까?

보이지 않는 도시 속에?

나의 내부에?

우주 공간은 차갑고 조용하며, 지평선은 무한에 가깝다. 이동감각은 전혀 없다.

달은 보이지 않고, 별들은 눈부시게 불타오른다. 부스러진 다이아몬드이다. 모두가
.


특별 전시품 ★★★

특별히 어려운 얘기가 있는 건 아니지만, 왠지 이걸 보고 실컷 웃으려면 뭔가 교양이 있는 사람이어야 할 것 같다.


성스러운 광기 ★★☆

처음엔 기대가 되지만 실은 단순한 이야기다.


코리다 ★★★

변호사는 당해도 싸-.


사랑은 허수 ★★★☆

프로메테우스를 <앰버연대기>의 세계에 던져놓으면 이런 이야기가 나오겠다. <토탈 리콜>이 여기서 영향을 받았을까? 그렇지만 여주인공이 경험적 대상이 아니라고 여겨질 만큼 지나치게 헌신적이다. 하긴 뭐, 프로메테우스가 신화적 인물이니까, 그 옆에 신화적 인물이 있는다 하더라도 무리는 아니지.


화이올리를 사랑한 남자 ★★★★☆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와 <프로스트와 베타>와 함께 내가 이 작품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 SF적 상상력과 심리학과 사랑 이야기의 화학적인 결합. 번역자는 이 소설이 젤라즈니의 여성관을 보여준다고 논평했지만, 글쎄. 내가 보기엔 이 소설은 남성의 여성에 대한 모순된 욕망에 관한 이야기다. 물론 화이올리가 팜므 파탈의 비유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봤자 그것은 상투적인 비유, '죽은 비유'일 뿐. 존 오든은 "나는 살아 있는가, 죽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전형적인 강박증적 주체이면서, 그 질문의 무용함에서 도망치려고 하고, 그러다가도 다시 포박당하는 그런 인물이다. 마지막 장면은 <나무꾼과 선녀>의 성별 역할을 뒤집어 놓은 듯한 느낌이 든다. 역시 이것도 여자 이야기가 아닌 남자 이야기.


루시퍼 ★★★

불쌍한 친구. 설정과 발상으로 별 세개를 먹고 들어간다.


프로스트와 베타 ★★★★☆

너무 아름다운 작품이지만, 이렇게 되면 처음에는 물리주의가 아닌 척 하다가도 결국에는 물리주의가 되는 것인가? 인간이 다 사라진 세상에서 기계들이 인간의 속성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추리하는 것이 무척이나 흥미롭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짓의 정반대인 것? 게다가 그럴 것 같지 않았는데 마지막 순간에 작품을 연애소설로 바꾸어 버리는 그 센스란.

"당신은 또 계측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경험의 질에 관해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계는 뒤집혀진 인간입니다. 왜냐하면 기계는 프로세스의 모든 세부를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계는 인간처럼 프로세스 자체를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캐멀롯의 마지막 수호자 ★★☆

아서왕 전설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큰 재미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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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사회 - 10점
로저 젤라즈니 지음, 김상훈 옮김/행복한책읽기



...모든 것에 만족하고 있는 자들에게 반항하라고 부추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냐. 그들의 마음 속에는 악이 들어갈 여지가 없어. - 끊임없이 그것에 고통받고 있으면서도 말이야. 괴로운 처지에 빠져 있는 노예가, 자신이 환생할 것을 - 기꺼이 괴로움을 참고 견딘다면, 아마 살찐 성인으로 - 알고 있다면, 그의 태도가 단 한 번의 삶만 주어진 자의 그것과 같을 수는 없네. 지금 겪는 고통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그만큼 미래에 쾌락이 보장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는 거의 어떠한 일도 견뎌 낼 수가 있는 거야. 만약 그런 자가 선이나 악을 믿지 않는다고 하면, 미추(美醜)의 구분이 그것을 대신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결국 바뀐 건 이름뿐이네... (p67-8)


아마도 로저 젤라즈니는 마초의 존재가치를 형이상학의 레벨에서 논증하는 것을 사명으로 부여받은 재담가일 것이다. 그는 모든 작품에서 멋진 남자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데, 이 <신들의 사회>(원제는 Lord of Light, ‘빛의 왕’이다.)의 경우에는 부당한 사회를 변혁하려는 한 남자의 책략과 성공을 흥미진진하게 묘사하고 있다.



지구를 떠나 새로운 행성에서 살게 된 인류는 자신의 영혼을 새로운 육체로 전송시킬 수 있는 과학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처음 우주선을 타고 이 행성으로 왔던 ‘제1세대’의 승무원들은 여러 육체를 옮겨 다니면서 수많은 자녀를 낳았는데, 신경쓰지 못하는 사이에 이 자손들의 숫자가 점점 불어났고 그들은 ‘하늘’이라 이름붙은 도시에 거주하는 1세대들과는 달리 미개한 문명의 레벨에서 비참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1세대들은 이들이 아직 과학문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을 힌두교의 신에 대입하는 엄격한 카스트 제도를 확립한다. 모든 이들은 죽을 때가 오면 카르마의 심판관들 앞에 나아가 일생의 기억을 기계로 낱낱이 파악당하고 새로운 육체를 부여받는다. 신들이 만든 사회질서에 우호적인 생각을 하고, 자동 기도 기계에 많은 돈을 기탁한 이들이 ‘선한 이’로 취급받는 것은 물론이다. 사회체제 그 자체인 종교, 역사상 가장 실증적인 종교가 수립된 것이다.



이들 ‘신권주의자’들에 반대하는 이들이 주인공 샘을 포함한 ‘촉진주의자’들인데, 제1세대가 과학기술을 독점하지 말고 그들 자손들의 문명을 촉진시킨다면 많은 이들이 문명의 혜택을 누릴 수 있을 거라고 주장하는 이들이다. 하지만 카르마의 심판관들과 결탁한 신권주의자들은 촉진주의자들에게 새로운 육체를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멸종시켰다. 유일하게 살아남는 샘이 차츰차츰 동지들을 모아 ‘신들의 사회’에 대항하는 과정이 소설의 큰 부분을 이룬다.



1장에서는 신들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멀리 떠나갔던 (자세히 설명하려면 너무 복잡하니 이렇게만 적어둔다.) 샘을 동료들이 다시 불러내는 과정이 나오고, 2장부터 6장까지는 샘이 어떻게 신들의 미움을 사게 되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7장은 돌아온 샘이 새로운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두는 결미이다. 시간 순서로 치면 2장에서 6장 -> 1장 -> 7장인 셈인데 이런 식의 구성이 더욱 소설에 대한 흥미를 높이고 있다.



...그건 거짓말이었네. 내 자신 그걸 믿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지는 않아. 다른 길도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었네. 이를테면, 니리티의 종교라도 상관없었어. - 다만 십자가에 못 박히는 건 아프니까 말이야. 그 대신 이슬람이라고 부르는 종교를 택할 수도 있었네. 단지 그것이 힌두교와 얼마나 사이가 나쁜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만둔 것뿐이야. 내가 불교를 택한 것은 계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었어. 나는 속인에 불과하네... (p408)



샘이 추진하는 혁명이 멋진 이유는 혁명의 동인을 체제의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끌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신들에게 대항하려는 의지를 품은 샘은 어떤 지방으로 떠나 ‘정각자’, ‘여래’를 자처하며 불법을 설파하기 시작한다. 그의 설법은 인기를 끌게 되었지만, 신들은 경악한다. 왜 그들의 체제를 무너뜨리려고 마음먹은 이 사상 최대의 협잡꾼은 하필 인류 역사상 가장 비폭력적인 종교를 고른 것이었을까?  이 이유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샘의 동료인 '죽음의 신' 야마의 경우에도 샘의 선택을 "교묘하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영감에서 비롯된 것"(p393)이었다고 평하고 있다.



만약 신들의 사회가 유태교적인 율법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다면, 나는 샘이 예수의 말을 빌렸을 거라고 생각한다. 유태교에서 크리스트교로, 그리고 힌두교의 맥락에서 불교의 탄생은 한 종교의 맥락에서 그 내부적인 모순을 해소하려는 노력에서 나왔다. 알이 있다면 바깥에서 충격을 줘서 알을 깨드린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알을 깨고 새로운 체제를 재탄생시킨 것이다. “모든 것에 만족하고 있는 자들에게 반항하라고 부추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일을 하려면 그 문화의 맥락 안에서 급진성을 추구해야 한다. 불교에 대한 로저 젤라즈니의 이해는 대부분의 서구 지식인들의 그것보다 차라리 탁월한 데가 있다. 대부분의 서양인들이 불교를 기독교와의 차이 속에서 신비한 동양의 종교로 인지하는 반면, 젤라즈니는 힌두교 안에서 탄생한 불교의 문화사적 의의를 명백하게 간파하고 있는 것이다.



왜 비폭력적인 종교라도 괜찮은 것일까? 왜 비폭력적인 교리가 나중에는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 무언가가 되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예수나 붓다의 가르침이 유태교의 율법이나 힌두교의 우주적 윤회질서에 포섭되지 않는 어떤 내면의 자율성을 강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비폭력성이 강조되는 이유는 이 자율성이 폭력에 의해 획득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만을 원한다면, 우리는 굳이 싸울 필요도 없다. 그리하여 드디어 그 자율성의 영역을 명확히 인지하게 되면,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주체적인 인간이 된다. 그리고 주체적인 인간이 되었을 때, 그는 타인의 지배를 단호하게 거부할 수 있는 결단을 내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가장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 자율성의 확립이, 폭력조차 불사하는 강력한 주체를 낳게 된다는 이 아이러니.



이 점을 샘과 다른 방식으로 신들의 체제를 전복시키려고 하는 니리티의 경우를 바라보면서 확인할 수 있다. 니리티는 힌두신화에서는 암흑과 부패의 신인데, 이 소설에서는 한때 랜프류라는 이름의 목사였던, 기독교 광신도로 등장한다. 그는 ‘하늘’에서 니리티 신의 역할을 부여받았지만 기독교가 구현되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결심하고 ‘하늘’에서 이탈한다. 좀비를 제조하고 해상에서 대포를 쏘아대는 그의 세력은 마치 무협소설의 마교를 연상케 한다. 힌두교의 바깥에서, 기독교라는 ‘진리’를 숭앙하는 광신적인 지도자는 동원할 수 있는 온갖 힘을 끌어들여 체제를 파괴하고자 한다. 그의 진리는 피지배계층의 복리라는 구체적인 삶의 문제와는 전혀 관계없는 영역에 있다. 결국 이 세계에서 그는 실패하게 되는데, 설령 성공했다 하더라도 별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가짜 붓다인 샘의 설법을 듣고 제자 한명이 실제로 붓다의 깨달음을 얻는 에피소드는 뭔가 종교적인 숭고를 보여주는 데가 있지만, 지금 내 리뷰의 포인트는 정치적 문제에 쏠려 있으니 그냥 지나치자. 내부로부터의 혁명에 대한 그의 탁월한 통찰은 견고하다고 싶었던 체제가 어느 순간 스스로 붕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1장을 보면 샘 일당은 이길 가망이 별로 없는 황당한 싸움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2장에서 6장까지의 회상을 거친 후 7장으로 넘어 가면 전세는 달라져 있다. 샘이 뿌려 놓은 씨앗이 열매를 맺어 간다. 천상도시의 신들은 샘에 의해 다시 생겨난 촉진주의자들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며 스스로의 힘을 줄인다. 촉진주의자에 우호적이었던 신들은 숙청당하거나, 샘의 반군에 합류한다. 인간들은 차츰 여기저기서 새로운 발명품을 만들어내고 있고, 신들과의 능력의 격차를 꾸준히 줄여간다. 니리티의 군대가 인간들의 도시를 공격하기 시작했을 때, ‘하늘’의 신들이 주저해서 방치하자 인간들은 금세 신들의 전능함에 의문을 품게 된다. 신들이 자신들에게 부여했던 지나친 위엄이 오히려 족쇄가 되어 그들의 권력을 붕괴시켜가는 것이다.   



...인간은 <하늘>과 공존할 수 있었지만, 니리티와는 그럴 수 없소. 야마와 쿠베라는 도시에 무기를 반입했소. 우리는 도시를 요새화하고 충분히 방어할 수 있소. 만약 <하늘>이 우리와 힘을 합친다면, 니리티는 카이푸르 앞에서 몰락할 거요. 만약 <하늘>이 촉진주의를 승인하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카르마의 심판관>들에 의한 지배를 종결시킨다면, 우리는 제안을 실행에 옮기겠소. (...) 처음 두 가지는 이미 현실로서 존재하고, 또 그럴 권리가 있는 것들에 관해 동의하는 데 불과하오. 세 번째는 당신이 그걸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어차피 일어날 일이기 때문에, 나는 당신에게 체면을 살릴 기회를 주고 있을 뿐이오... (p418-9)



이제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화된 신들을 소탕할 수 있는 시점에 왔을 때, 샘이 오히려 신들과 협상을 하고 니리티와 최후의 일전을 취한다는 것도 매력적이다. 물론 샘은 니리티와도 동맹을 맺으려고 시도했고, 실패한 이후 브라흐만 신과 협상을 한 것이므로, 이런 선택 자체는 우연적이다. 그러나 샘은 그 자신이 하려는 바가 자신의 정치적 적대자인 신들을 모조리 단두대에 올리는 것이 아님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가 하려는 일은 결국 촉진주의의 이상을 구현하는 것이므로, 이와 같은 유연한 태도가 가능한 것이다.



...무엇인가가 나를, 막 벼락을 맞으려고 하는 나무로 언제나 이끌곤 했던 거야. (...) 우발적인 사회적 양심과 일련의 올바른 실수의 결과라고나 해야 하지 않을까... (p430)



샘처럼 행동한다고 해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실패할 확률이 훨씬 높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방식이 그나마 확률이 높은 방식이고, 또한 자신이 원했던 것처럼 미학적으로 탁월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정치적 열망이 증발해 버린 시대에, 오래 전에 읽은 이 책을 다시 읽으니 기분이 묘했다. 이 혁명에 대한 멋지고 명쾌한 우화를 보고 다시 우리 사회를 생각한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 자신이나 그의 자녀들이 계층이동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무슨 방법으로 반항을 부추길 수 있을까? 다수자의 욕망, 타인의 욕망을 규범으로 삼아 우리 자신의 욕망을 찍어 누르는 이 시대에 내면의 자율성의 가치를 깨닫게 해줄 수 있는 논리는 무엇일까? 이 체제의 견고함이 오히려 그것을 제약하는 족쇄가 되는 그 순간을 볼 수 있을까? 우발적인 사회적 양심은 어떻게든 올바른 실수를 이끌어 내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러나 이성적 판단의 바깥 속에서, 낭만은 이렇게 속삭인다. 왜 지금 우리에겐 이 싸움을 이끌어줄 멋진 사내가 하나도 없는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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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른 어떤 부서보다도 국방부가 더 일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당면한 문제가 단순해서인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국방부는 장기적인 목표를 세워놓고, 그것을 현실태에 맞춰 추진하고 있다.


국방부의 지상과제는 현재의 징병제 군대를 되도록 모병제 군대와 비슷하게 바꿔나가는 것이다. 전쟁 쪽수로 하는 시대는 지났고, 징병제 병사들이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예비역이라면 누구나 병기본훈련은 받지 못하고 삽질, 곡괭이질, 낫질을 해야 했던 자신의 군생활을 기억할 것이다. 구타, 가혹행위, 언어폭력 등등을 금지하는 병영생활행동강령이 법으로 규정된 걸 두고 군기가 있어야 전투력이 생긴다고 코멘트했던 몇몇 예비역들을 보면 솔직히 웃음이 나온다. 자신의 군생활을 약간만 솔직하게 돌이켜봐도 그딴 식의 ‘똥군기’와 전투력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90년대 후반의 한국군은 지금에 비하면 말할 수 없을 만큼 구타가 일상적이었지만, 동해 잠수함 침투 사건 때 침투한 북한 특공부대원들 앞에서 어쩔 줄 몰랐다. 그들 대부분은 겁이 나서 소대장(소위다. 육군 병장들이 짬으로도 안 보는 그 소위들...) 뒤에 일렬로 서서 수색에 참여했다. 내가 속한 부대는 철책선을 바라보는 부대는 아니었는데, 그 당시 트랜드가 ‘직할대’를 검열로 조지는 거라서 교육훈련 검열을 특히 많이 나왔다. 덕분에 나는 화생방 상황시 ‘임무형 보호태세’를 주어진 시간 내에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분교대에 가보니 임무형 보호태세는커녕 방독면을 규정된 시간 내에 쓸 수 있는 병장들은 거의 없다시피했다. (참고로 나는 '메이커 부대‘에서 군생활했다. 지금 어느 후방의 듣보잡 부대를 얘기하는 게 아니다.) 이런 건 ‘군기’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훈련량의 문제다. 나는 솔직히 말하면 몸으로 하는 일은 정말 못하는 편이다. 그래도 하다보니까 되더라. 다른 부대 사람들은 당연히 평소에 안했으니까 안 되는 거고.


그렇다고 바로 모병제를 시행할 수는 없다. 일단 방만한 사단조직이 정리되어야 하고 - 사단 통폐합 작업은 현재 진행 중이다.- 모병제 하 사병들의 급여 문제도 한번에 해결될 수는 없다. 언젠가 양심적 병역거부자 문제를 두고 아는 형들이랑 토론했는데, 양병거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어느 형은 “문제는 양병거가 아니라 징병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거야!”라고 열을 올려 나를 웃겼다. 아니 그게 한번에 폐지되는 건가? 국가 정책이 무슨 혁명하자는 건가? 사실 국방부는 지향도 있거니와 현실태도 알고 있다. 국방부의 ‘개혁’ 정책이 지향하는 바를 단순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1) 간부 숫자를 늘린다. 2) 유급지원병을 늘린다. 3) 사병월급을 올린다. 4) 무급(월급이 올랐지만 무급이라 봐도 무방하다.) 사병의 숫자를 줄인다. 이 네가지 과제를 점진적으로 추진하는 국방개혁 2020을 나는 나무람없이 지지한다.


사회복무제 역시 지지한다. 단, 사회복무제를 통해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집총하지 않고 사회에 대한 의무를 다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준다면 말이다. 솔직히 말해 군대 가서 총쏘는 일보다 조직 자체를 건사하는 막노동이 많은 현실에서, 총 한번 안 쏴보고 일만 하다가 전역하는 평화주의자들이 있다 한들 그게 무슨 해가 된다는 건가? “너는 나와 다른 도덕률을 가질 수 없어. 왜냐하면, 내가 당연히 받아들이는 걸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나를 불쾌하게 하거든.”이라는 식의 소심한 논법을 벗어난다면, (아, 이 얼마나 마초적이지 못한 논법인지!) 사회복무제 혹은 대체복무제의 경제적 타당성을 부인할 논리는 딱히 없다. 논변적 타당성이 아니라 감성적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고백하자면 나는 절대적 평화주의자가 아니다. 심지어 나는 군생활 내내 내가 가진 K2 소총을 사랑했다. 좀 무서워하긴 했지만. (총 안 무서워하는 것들은 정말로 무섭다. 꼭 이런 애들이 사고친다.) 그렇다 해도 자신보다 도덕적인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는 건 인간적인 품위를 지키는 길이다. 나는 육식을 죄책감없이 행하지만, 그렇다고 채식주의자를 ‘꼴통’이라 부를 이유는 없잖은가? 양병거를 향한 악다구니들이 지겨운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러나 사회복무제에 여성이 포함되기로 했다는 논의는 여러 가지 고민거리를 낳는다. 나는 그 조치가 잘못된 것이라고 얘기하지는 않는다. 이 조치는 나름대로 고육지책이다. 당연히 이 조치는 군가산점제의 부활에 대한 예고편에 해당한다. 군가산점제의 문제는 무엇인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같은 사람은 단적으로 그 정책의 문제점을 ‘기회비용을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즉, 여성(+장애인들)이 군가산점을 포기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보자, 라는 문제에서, 우리는 아무런 대답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여남 개병제? 일단 이건 말이 안 된다. 첫째, 앞서 내가 언급했던 국방부의 군발전방향에 어긋난다. 여자를 우르르 군대에 몰아넣는다 해서 전투력이 높아지지는 않는다. 둘째, 설령 전투력에 도움이 된다 하더라도, 여성들을 몰아넣을 수 있는 막사를 짓기 위해서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소모된다. 그보다는 모병제로 전환하는게 차라리 비용이 덜 들 것이다. 셋째, 과연 남자들이 원하는 것이 여자들을 군대에 몰아넣는 일일까? 그것이 파생하는 효과를 안다면?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나는 보급병이었는데, 후임들이 여자들도 군대와야 한다 얘기할 때마다 다음과 같은 말같잖은 논리로 찍어눌렀다. “너 지금 나보고 생리대도 배달하라고?” (참고로 군대에선 모든 위생구들이 보급품이다.) 솔직히 말하면 여성 일반이 군대에 간다는 상상은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부분이 있다. 이건 좀 다르게 표현하면 너무 전복적인 상상력이다. 한국 여성들은 무의식적으로나마 세상에서 가장 심각하게 남성들에게 어필하려고 노력하는 집단일 텐데, 군역은 이 노력을 아예 무화시켜 버린다. 남자들이여-. 군대에서 만난 여군들을 기억하고 있겠지? 물론 그때는 하악하악했을 지도 모르지만. 한국 남자들이 20대 초반 여성들의 성적 매력을 대충 2년 동안 그렇게 철저하게 까부수는 걸 원할까? 나는 그들이 그 결과를 알고 있는 다음에야,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들이 실제로 원하는 건 (뭘 말하고 있건 간에) 여자들이 군대에 가는 게 아니라 군대 갔다 온 자신을 떠받들어 주는 거다. 자신의 주장의 결과를 모르고 늘어놓는 인간을 보면 우습다. 그런 이들의 맹점을 파고드는 악마들의 전설을 우리는 너무도 많이 보아왔다. “내가 원하던 것은 이게 아니야-” 제 말이 초래하는 결과를 예측하지 못했던, 악마에게 당하는 인간들의 고전적인 외침이다. 


그래서 여자더러 ‘너도 군대 가’라는 얘기는 전혀 말이 안 된다. 설령 내가 ‘여자가 왜 군대 가?’라고 중얼거리는 마초가 아닐지라도. (나는 마초라서, 이스라엘 남자들을 좀 우습게 본다.) 하지만 사회복무제에 여성이 포함될 수 있다는 얘기는 이제 다른 차원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군가산점제를 산출할 수 있는 기회비용으로 계산하고 있지 않은가? 이 제도가 시행되면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려는 여성은 두 개의 선택지를 지니게 된다. 22개월의 사회복무를 이행하고 가산점을 받든가, 아니면 22개월의 노력이 군가산점을 충분히 넘어설 수 있다고 판단하든가. 정말 군가산점을 옹호하기 위한 탁월한 제도다.


여기서 나는 딜레마에 빠진다. 먼저 두 가지의 팩트를 지적하자. 첫째, ‘국방의 의무’라는 측면에서 (물론 이것이 바로 ‘군복무의 의무’와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 남성들은 한국 여성들에 비해 과도한 의무수행을 해 왔다. 그러므로 사회복무제가 되었든 돈으로 내는 국방세가 되었든 이 부분을 교정하자면 여성들이 지금까지보다 추가적인 희생을 약속해야 마땅하다. 둘째, 그렇지만 전체적인 삶의 맥락에서 볼 때, 여전히 한국 여성들이 한국 남성들에 비해 누리는 삶의 질은 열악하다. 공부할 수 있는 권리, 직장에서 받는 처우, 출산과 육아의 의무가 온전히 그들에게만 떨어지고 그 피해가 직장생활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 점 등이 모두 그러하다. 그들에게 특정한 문제에서 더한 희생을 요구하려면, 적어도 다른 부문에서의 혁신적인 진보(...도 아니고 공평한 처우)를 약속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총괄적인 시각이고, 어쨌든 그 문제와 논리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어찌 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국방부의 정책이 국방부로서는 최선의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는 그러한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한 명의 남성으로서는 그들의 정책에 찬성할 수 없다고 여긴다. 사회복무제에 여성을 포함시켜 군가산점제를 옹호하자는 야바위는, 적어도 현재의 한국의 여남관계 수준에서는 ‘치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판단을 온전히 옳은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점에 내 고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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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어녀' 소동을 보면, 한국 남자들이, 혹은 전체 한국인들이 여자를 대하는 방식이 얼마나 못돼먹었는지 알 수 있다. 어떤 시민의 억울한 옥살이 사연에 대한 네티즌의 분노가, 그를 억울하게 기소한 사람, 그를 그릇되게 수사한 사람, 그를 그릇되게 판결한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여자 경찰 하나만을 빼내어 '불어녀'라고 칭하는 '폭력'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할까.

논점은 그 경찰이 잘못이 있느냐, 없느냐는 것이 아니다. 복잡한 구조에서, 혹은 과오가 있는 이들의 집합에서 여자 한명을 끄집어 내어 마녀사냥하는 그 정신머리를 지적하는 것이다. 그동안 온갖 '...녀'들을 만들다보니 그들은 그 짓에 재미가 들렸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다만 고약한 취미의 관성적인 현존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정도는 가령 '군삼녀' 사건 보다도 훨씬 더 심하다. 나는 군삼녀 사건 때 남자들의 반응을 보고 피식 웃었지만, 적어도 그것은 그 사람 한 명의 발언에 대한 문제였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집단의 과오에서도 쉽사리 '...녀'를 호출하고야 만다. 아예 머리 속에 '세상을 어지러뜨리는 여자'의 관념을 쳐박아두고 사는 모양이다.

이런 악취미가 성립하기 위해선, 일단 '그들에게 만만한 것은 여자!'라는 등식이 필요하다. 물론 그들은 입으로는 대한민국은 외려 남자가 차별받는 사회이며, 여성가족부와 페미니스트만큼 악랄한 족속은 세상에 없다며 징징댈게 뻔하지만 말이다. 또한 한 시민의 억울함을 둘러싼 사건의 모든 국면 중에서, 그들이 진정 견디기 힘들었던 건 그의 억울함이 아니라, 그 남자에게 소리친 한 명의 여자의 존재였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한국 남자들이 한국 여자들을 비난할 때는 픽하면 군대를 걸고 넘어지므로 여기서 거기에 대해 한마디 안 할 수는 없겠다. 도대체 '군인'이라는 정체성은 '자부심'인가, '컴플렉스'인가? 만일 자부심이라면, 그들이 군대생활이 의미가 있었으며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군대에 가지 않은 이들에 대해 "자식들, 그것도 못 해봤다니."라며 가볍게 경멸할 수는 있을지언정 악다구니처럼 악을 쓸 이유는 없다. 오히려 자부심의 소유자들은 자신의 자부심의 원천을 많은 이와 공유하지 않으려는 경향마저 있다.

만일 그 정체성이 그저 '컴플렉스'이기만 해도 문제는 더욱 단순하다. 우리는 누군가의 컴플렉스에 어느 정도 사회적인 이유가 있을 경우 그를 동정하지만, 그래도 컴플렉스를 극복한 이를 그렇지 못한 이보다 훌륭한 이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인종, 학력, 성정체성, 지역 등 모든 문제에서 그렇다. 비록 모든 이에게 컴플렉스를 극복할 것을 주문하는 것은 폭력이라 하더라도, 컴플렉스를 극복한 이를 훨씬 더 존중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군인'의 정체성을 가진 이들 사이에선 외려 컴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한 이들이 더 설치며, 심지어 그것이 컴플렉스가 아니라고 강변한다.

왜일까.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그 정체성이 '컴플렉스를 숨기기 위해 필사적으로 끌어들인 자부심'이기 때문이다. 그 자부심에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다. 물론, 군인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징병제를 무조건 모병제로 바꾸는 것이 '선'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군대는 매우 방만하고, 인력을 쓸모없이 소모하는 일들이 많이 벌어진다. 그리고 노동의 효율성과 상관없이 그들은 노동에 대한 적당한 댓가도 지불받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국가에 의해 차압당한 세월을 아까워 하지만, 그 분노를 국가에 터트리지 못한다. 오히려 자신은 쓸모있는 일을 했다는 국가의 세뇌를 어느 정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입각하여 군대에 안 간 이들에게 분노를 뿜어낸다.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본질적으로는'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하는 격"이다.

신체 건장하면서 군대에 안 간 이들에게 그 분노가 뿜어지는 경우에야, 그것은 형평성의 차원에서 정당할 수 있다. 하지만 '여자들도 군대가라'는 땡깡은 너무나도 생뚱맞다. 말을 내뱉을 때, 자신의 말이 실현되는 가능세계를 상상해 보는 버릇이 안 든 탓이다. 지금 한국군은 여자를 수용할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다. 그에 적합한 시설을 만들려면, 엄청난 자금이 들어갈 것이고, 그 돈으로 차라리 모병제 전환을 하는 게 더 낫겠다. 이스라엘군이 그렇게 좋으면 이스라엘로 이민가라. 대체복무제 얘기할 때는 해외사례에 코방귀도 안 뀌던 인간들이, 꼭 이럴 때만 이스라엘 들먹인다.  

인터넷에서 이런 저런 얘기하는 이들을 대개 마초라고 칭한다. '사이버 마초'라든가, 혹은 '예비역 마초'라든가. 요샌 그런 표현에 점점 더 회의가 든다.

마초라는 말은 나도 많이 쓴다. 사석에서, 나는 나 자신을 마초라고 칭한다. 좀 거들먹 거릴려고 그렇게 말할 때도 있고, 일종의 자아성찰적인 의미에서 그렇게 말할 때도 있다. 또한 사석에서 가끔 나는 누군가를 마초라고 칭한다. 그건 칭찬일 때도 있고, 비난일 때도 있다. 나는 마초를 '저급하지만 하나의 완결된 윤리의식을 지닌 사람'으로 파악하기도 하고, '여성을 인격체로 대우하지 않고 대상화시키는 위인'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이렇게 마초라는 말엔 의미의 격차가 많지만, 그래도 본질적인 의미규정은 있다.

어찌됐든 마초는 남성성을 과시하는 자이다. 남성성을 과시하는 자가 패거리 속에서 여자만 빼내어 다구리 친다는 것이 될 말일까? 남성성을 과시하는 자가, 여자들더러 군대에 오라는 게 말이나 될 소릴까? 아무리 한국군이 남성성을 발현하는 곳이 아니라 남자가 자신의 찌질함을 체험하는 곳이라도 그렇지. 공자님의 정명(正名) 사상을 존중하여 우리는 그들을 올바르게 호칭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이들을 부를 땐 마땅히 '마초도 못 되는 것들'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P.S 그렇구나. 난 마감 때만 남자들에게 신경질을 부리는 거야. 어서 마감하자, 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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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조선 우리모두 시절에도, 나는 가끔 '아흐리만' 이외의 아이디를 사용하곤 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하시시'와 '이가엘'이었는데, 이 글은 '하시시'란 이름으로 작성한 것이다. 처음엔 안티조선 우리모두의 커뮤니티에 올렸고, 그 다음 언젠가 서태지 팬덤 사이트 하나에 다른 글 몇개와 함께 이 글을 올렸다. 이 글은 폭발적인 반응을 받은 정도는 아니었지만,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여기저기서 끈덕지게 생존했다. 나보다는 '아흐리만'이 훨씬 더 유명한 놈이지만, 어쩌면 이 글은 '아흐리만'보다 훨씬 더 끈질긴 놈인지도 모른다.

저자가 누구인지와는 상관없이 읽어볼만한 글이다. 쓰는 데 이틀 걸렸던 기억이 난다. 내가 대개 인터넷에 올리는 글을 쓰는데 걸리는 시간이 '30분-2시간' 정도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굉장히 공들인 글이었다.

2000년 군필자 가산점제 폐지 논쟁 이후에 남자들과 논쟁을 할 일이 많았는데, 이 글엔 그 경험들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실제로 여기 제시된 많은 마초 타입은, 당시 내가 사귀고(?) 있던 남자들의 반영이다.

참고로 이 글을 쓴 본인은 '지독한 마초'고, 여성들의 언어보다는 남자들의 세계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런 건 '자랑'이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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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찰] 마초이즘의 문화적 표류와 계통 발생 (상) (하시시)


마초이즘은 현재 한국 남성(+일정 나이 이상의 여성)의 정신구조에서 끈질긴 고착성과 감염율을 보이는 문화(文化) 유전인자(遺傳因子)이다. 이 인자(因子)는 이것에 반대하는 세력이 점유하지 못한 모든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이 인자의 영향력 바깥의 사유를 구경하지 못하고 산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대학시절의 일부 기간 동안 페미니즘이라는 반마초적인 문화 유전인자의 세례를 받는다. 이것의 고착성과 감염율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더 흘러야 논의할 수 있겠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지금까지 이 안티-마초 유전인자는 마초 인자의 세례로부터 사람들을 막아낼 만큼 많은 시간동안 사람들을 점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문자(文字) 유전인자로의 페미니즘은 마초이즘 보다 수만 배의 성공적인 증식(增殖)을 이루고 있으나, 문화 유전인자로서의 페미니즘은 아직 마초이즘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여하튼 중요한 건 일반적인 사람들은 마초이즘이 뇌수 하나하나를 다 끄집어내서 축축하게 담글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을 그것의 영향력 안에서 보내게 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초이즘이라는 인자가 항구적인 존재를 위해 얼마나 많은 다른 문화 유전인자에 편승할지 충분히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마초이즘의 강력한 고착성과 감염율 덕에 이것은 너무나도 성공적으로 변종(變種)을 만들고 있기에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우리는 지금부터 이것을 "마초이즘의 문화적 표류"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리고 이것이 만들어내는 마초이즘의 다양한 양상들을 "계통 발생"이라고 부르자. 아래의 예시는 필자의 경험에서 나온 실례이다. 이 글을 보는 여러분들께서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다른 표류물들을 덧붙여 주면 감사하겠다.


* 해악도는 무한소를 0, 무한대를 100으로 지정, 상대성을 숫자화했다.
* 계산은 일반적인 평균치를 기본으로 했으며, 편차가 너무 클 경우 계산을 포기했다.
*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편의상 계통이 아닌 개체로 표류물들을 분류했다.
* 이 고찰은 문화적 표류물들에 초점을 맞춰 그 숙주(=마초)들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지 않다.
* 이 자료를 바탕으로 자신의 증상을 알고 싶은 분은 타인에게 부탁해 주시길 바란다. 자기진단은 짜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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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부류
온순한 마초 (비교적 독성이 적은 마초이즘의 표류)
해악도 0-20


1. 마초 메저키스트(피학성 변태) 자기억압형

"나는 마초가 아니양....."

해악도 5.

자신의 마초이즘을 부정하면서 발병을 억누르고 있다. 가끔 자신의 마초성이 드러날 경우 "술취해서" "흥분해서" "화나서" 그랬다고 깨끗이 사과한다. 이 말을 대충 믿어주는 것이 인간관계를 위해 편리하다. 본인 스스로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지만 다른 이들에게 나쁘지는 않다. 다만 너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경우 "마초 메저키스트 정신분열형"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2. 마초 커밍아웃 자기억압형

"저 마초 맞습니다...."

해악도 10.

내면의 마초이즘을 인정한 후 치유 혹은 확산금지를 위해 노력하는 주의. 가장 건전하고 발전가능성 있다. 그러나 이들의 대다수는 현 상태에 체념을 하는 동시에, 다른 마초들에게 묘한 우월감을 느끼고 있기에 발전이 정체된다. 낙제점 조금 넘는 점수로 학급 1등이라고 기뻐하던 그들은, 자신들이 너무 소심하다고 판단되면 "마초 커밍아웃 자기발산형"으로 진전할 가능성이 있다.


3. 마초 의무주의자

"내가 널 지켜줄게. 조건 없이."

해악도 15.

순수 마초 부류 중에서 해악도가 가장 낮다. 마초의 덕목 중에서 권리에 큰 신경을 쓰지 않고 의무에만 "싸나이"의 근성을 걸고 정진하는 부류다. 일상적으로 "보이지 않는 죄"로 스트레스를 주긴 하지만, 그 이상의 혜택이 있다.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으나, 아쉽게도 숫자가 많지 않다.


4. 마초 커밍아웃 자기발산형

"나 마초 맞다. 그래서? 죄만 안 짓고 살면 되지."

해악도 20.

1번 2번 3번 유형에 비해 좀더 많은 숙주를 보유하고 있는 인자이다. '죄만 안 지으면 되지'라고 말은 하는데 무의식적으로 나쁜 짓 하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그래도 여기에 다른 인자만 덧대어 가지고 있지만 않으면 그럭저럭 말도 통하고 잘 지낼 수 있다.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가장 좋은 사람이다.) 만약 친구가 대단히 섬세하다면, "무의식적인 나쁜 짓"을 지적해서 이 부류에게 정신적 혼동을 줄 수 있다. (그러나 2번에서 발전해온 부류는 이제 그런 공격에 끄떡하지 않는다.) 자기 나름대로의 윤리적 기준이 있어서 이 이상 수준으로 발전 안 하는 장점이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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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부류
: 짜증나는 마초 (어느 순간 대화의 단절을 경험하기 시작하는 마초이즘의 표류)
해악도 21-50


5. 마초 나르시스트 자기표현형

"글쎄, 그냥 편견없이 생각해도 여자애들이 별로 안 잘났더라구."

해악도 25.

사회적 요건 쏙 빼놓고 판단한다는 문제점이 있다. 자기들이 맞는 말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쉽사리 무시할 수 없는 부류다. "지금 현실"의 상황을 분석하며, 가능한 상황을 상정해 보지 않는다. (가령 문화적 편견 없이, 똑같이 교육시키면 그래도 "여자애"들이 별로 안 잘났을까라는 문제.) 실제로 얼마나 잘난 놈이냐에 따라서 내공 수위가 결정된다. 별로 안 잘난 놈은 잘난 여자에게 초전박살나고 "마초 나르시스트 자기방어형"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더 품위 있는 축은 잘난 여자를 발견하면 이 유형에서 깨어난다. (명탐정 셜록 홈즈를 생각해 보길.)


6. 마초 나르시스트 자기방어형

"너와 내가 불평등한 건 성(性) 문제가 아니고, 개체의 능력 문제야."

해악도 30.

4번 유형이었다가 잘난 여자에게 박살난 후 원한을 품고 온 부류와, 성결정론을 옹호하기를 포기하고 개인적으로 체화한 부류의 연합이다. 대개의 경우 이들은 객관적으로 "잘남"을 평가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자신의 "잘남"을 확인하려 들며,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여성들의 발언권과 자기 표현기회를 교묘하게 억압한다. 자기 말 다 외치고 마이크를 끄는 건 이들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앞에서 폼잡고 뒤에 가서 사정하는 경우도 있다. (드라마 "아줌마"의 오일권을 상기할 것.) 자기표현형은 가끔 하는 짓이 귀여워 보이는 경우도 있지만, 이 부류로 넘어가면 주위 사람들의 불쾌지수가 상승한다.


7. 마초 로맨티스트

"아, 수컷의 섹시함이여, 영원하라!"

해악도 35.

상당히 자생적인 부류이다. 이들은 주로 문화예술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난 남자다"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거나, 영화 "친구"를 보며 의리를 다짐한다든지. 일부는 락 매니아Rock Mania와도 결합되어 있다. 개인주의적인 마초 로맨티스트의 경우 주위 사람들에게 그닥 나쁜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그러나 같이 사는 사람이라면, 깊숙한 대화를 나누다가 어긋나는 부분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8. 마초 논리주의자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다 해결되지 않겠어?"

해악도 40.

합리적으로 판단하려는 의지는 있는데, 그 능력이 수반되지 않는 부류의 증상이다. 이들은 동태 상황과 정태 상황을 구별 못하며 (이 점에선 나르시스트들과 같다. 그런데 나르시스트들이 개인적인 면에서 이 분석을 중지하는데 비해, 이들은 그것을 사회수준에까지 끌어들인다. 가끔 일부 나르시스트들이 이 부류로 "진화"한다.) 가능하는 논리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논리를 구별하지 못한다. "마초 다위니스트"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9. 마초 순수주의자

"내가 널 지켜줄게, 대신 넌 요리해."

해악도 45.

마초의 권리와 의무에 대해 제대로 숙지하고 있는 모범적인(?) 마초 부류이다. 그래도 능력있는 녀석들의 경우 바깥일은 신경 안 써도 확실하고 화끈하게 처리해준다. 단순반복노동에 취미를 가지고 있는 여성이라면 큰 해악을 입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많은 여성들이 피해를 보기 때문에 (이들은 설득이 힘들다. 그러나 딸을 낳은 후 딸이 이뻐서 부엌에 들어가는 경우는 있다. 딸이 조금 잘났을 경우 극적으로 변화할 수도 있다.) 평균값쳐서 해악도를 45로 계산했다.


10. 마초 중심주의자

"나는 마초도 싫지만, 극렬 페미니스트들도 싫어."

해악도 50.

이들의 중심을 잡으려는 의지를 고려하여, 딱 중심에 위치하는 해악도를 선정하는 것이 타당한 일일 것이다. 이들은 보통 자신들이 대립하는 두 사물이 있을 때 딱 중간에 위치한다고 야무지게 착각한다. 실제로도 이들이 대립하는 두 사물의 중간에 있기는 하다. 그러나 보통 만유인력의 법칙을 받아들여 질량이 큰 쪽에 가까이 있다. (간단한 수학계산을 해보면 이들의 입장이 어디쯤 위치해 있을 지 알 수 있다.)


[좀더 해악도 높은 마초를 다룬 하편도 곧 나옵니다...]



[고찰] 마초이즘의 문화적 표류와 계통 발생 (하) (하시시)

상편을 서술한 후 비교적 짧은 시간에 몇몇 독자 분들로부터 제보를 받을 수 있었다. 성원에 감사드린다. 또 몇몇 분들은 상편을 보고 상심했다고 하는데, 상편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던 분들은 대단히 건전한 분들이기 때문에 안심해도 되겠다. 이제 해악도 높은 마초들을 다룰 차례다. 이들에 비하면 상편의 마초들은 "마초도 아니"다. 슬슬 시작해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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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부류
위험한 마초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마초이즘의 표류)
해악도 51-80


11. 마초 근본주의자

"남자애처럼 하고 다니는 여자애랑, 여자애처럼 하고 다니는 남자애들 재수없더라. 그게 뭐람?"

해악도 55.

남성성과 여성성을 분리하고, 생물학적 성이 반드시 문화적 성과 일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심리다. 문화적 성에 자신을 끼워 맞추지(!) 못한 남성 혹은 여성, 그리고 성적 소수자들에게 보이지 않는 폭력을 휘두른다. 완곡하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축과,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편견을 드러내는 축이 있다. 그래도 제대로 지적해 주는 친구만 있다면 독성을 상당히 뺄 수 있는 부류이기도 하다. 독성이 빠질 경우, 자신의 의견이 편견임을 알면서도 머리의 인식("저래도 돼.")과 가슴의 감정("재수없다.")의 괴리에 괴로워하는 사람이 된다. 최근 하리수의 등장으로 많은 이들이 역 괴리(머리="재수없다." 가슴="꼴린다;;;") 현상을 보이며 이 증상에서 구출되었다는 설도 있다.


12. 마초 비교우위론자

"내가 집안일을 하지 않으려는 건 아니야. 하지만 니가 훨씬 더 잘하잖아? 사람이 잘하는 일을 해야지."

해악도 60.

이들은 자신이 가사노동에 소질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남성들이 잘하는 일, 망치질이나 가구 운반을 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 일은 일상적인 일이 아니다. 이 중 일부는 단순반복노동의 품위없음에 대해 공개적으로 발설하지만, 대다수는 조용히 이렇게 외친다. "시범을 보여줘." 그리고 대단히 나쁜 학생이 된다. 이들의 나쁜 성적이 소질없음에서 연유하는지 의도적인 태만에서 연유하는지에 대해 우리는 함부로 의도추정을 해선 안되겠다. 한가지 확실한 건 이들이 집안일을 지지리도 안한다는 것이다.


13. 마초 도덕주의자

"여자도 담배 필 수 있게 해달라구? 세상에, 허파 시커매지는 것도 평등이니?"

해악도 65.

엄격한 도덕률을 적용한다. 그런데 웬일인지 남성은 그 엄격한 도덕률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문제는 폐암 발병률에 대한 의학적 소견이 아니라, 똑같은 짓을 해도 왜 누구는 묵인받는데 왜 다른 누구는 비난받느냐다. 이들은 이 문제를 회피하고, "이제부터" 그 엄격한 도덕률을 남성들에게 적용할 거라고 주장한다. 혹은, 남성들이 어기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여성들이 같이 어겨야 한다는 근거는 될 수 없다고 반박한다. (대충 맞는 말이긴 한데, 역시 위에서 말한 문제의 본질을 비껴간 것이다.) 그 근저에는 "욕망"을 여성성에 결부시키고, 그것에 "절제"라는 금제를 뒤집어씨우는 오래된 문화적 관념이 숨어있다. 이 점을 파헤쳐줄 경우 극히 일부가 교정의 가능성이 있다.


14. 마초 다위니스트(자연선택론자)

"인류의 역사를 통해 언제나 남성이 우월한 성의 위치를 차지했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남성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해악도 70.

힘의 논리 이외의 도덕윤리를 체화하고 있지 않는 사람들에게 많이 들러붙는 표류물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우월이 단지 "힘의 우월"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한다. 정태성만 보고 동태성을 보지 못하던 마초 나르시스트, 마초 합리주의자 들이 진화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이다. 이들은 힘의 논리 이외의 도덕윤리를 체화하고 있지 않기에 윤리적으로 설득하기가 무척 힘들다. 여성성이 더 우위에 있는 일부 문화인류학적 자료를 인용한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승리는..."이라는 말이 튀어나오기 때문에 별 효과가 없다. 오히려 조금 치사하지만 침팬지와 보노보 등 유인원의 사례를 들이미는게 훨씬 효력이 있다. 즉, '침팬지는 암컷이 따로따로 노니까 막 두들겨 패던데, 보노보는 암컷이 연대하니까 함부로 못 패더라, 그러니 여권운동 필요하다'라는 식으로. 약자 두들겨 패는 게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걸 보여줘야 겨우 납득을 하는 부류다. (그래도 이건 세계관의 문제라 잘 치유가 안된다.) 이들이 인류역사에 "끝까지 살아남아서" 자신들의 우월성을 인정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오래살며 두고 볼 일이다.


15. 마초 부도덕주의자

"너는 왜 그렇게 고루하니? 좀 만지면 어때서."

해악도 75.

마초 도덕주의자는 이들에 비하면 천사다. 성윤리 해방운동을 남성의 이득으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룩한 위대한 문화인자이다. 이 부류의 극한은 인습과 도덕을 우습게 여기는 "문화혁명가"이며, 이 위대한 과업에 기꺼이, 그리고 즐겁게 동참할 것을 "여성 동지"들에게 요구한다. 이 부류의 일반은 여자친구들의 고루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짜증을 부린다. 그러나 "당신의 여자친구, 당신의 딸, 당신의 아내가 그런 일을 당한다면?"이란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논리의 일관성을 지키는 연습을 끊임없이 시키면 구제의 가능성이 있는 부류이다.


16. 마초 소피스트(상대주의자)

"마초라는 말은, 여성이 자신이 싫어하는 남성을 지칭하는 말이다."

해악도 80.

한국 땅에서 남녀차별이라는 현상이 없고, 이미 여남 평등의 과업이 완성되었다고 주장하는 부류가 될 것이다. 혹은, 그러한 "현상"이 어째서 잘못되었는지, 그러한 일이 어째서 "과업"인지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부류일 것이다. 첫째, 이 부류는 구제의 여지가 없다. 둘째, 이 부류와는 여성에 대한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셋째, 이 부류는 "마초 메저키스트 정신분열형"과 결부할 가능성이 크다. 넷째, 이 부류는 서술할수록 서술자가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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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부류
사악한 마초 (주변 사람들을 심각하게 다치게 하는 마초이즘의 표류)
해악도 80-100


17. 마초 권리주의자

"난 남자고, 남자는 하늘이고....."

해악도 85.

"마초 의무주의자"의 반대. "마초 의무주의자"(해악도 15)와 이 "마초 권리주의자"(해악도 85)를 섞은 것이 바로 "마초 순수주의자"(해악도 45)인데, 그 평균이 그래도 "의무" 쪽에 치우쳐진다는 점에서 "마초"의 따뜻함(?)을 찾아야 할까? 여하튼, 이 부류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마초",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능력없는 가부장이며, 실속없는 폭군 남편이며, 여성들을 억압하는 직접적인 기제를 만들어내는 바로 그 사람들이다. 그러나 최소한 이들은 여성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떠받들여 주기를 바라지, 그들을 괴롭히면서 쾌감은 얻지 않는다는 데에 지고의 악, "마초 사디스트"와의 차이점이 있다.


18. 마초 사디스트

"........."

해악도 95.

이들은 "말"이 없다. "폭력"은 동원될 수도 동원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건 크게 중요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건, 이들은 "농담"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감히 더 이상 서술하지 않는다.


19. 마초 메저키스트 정신분열형

"나는 마초가 아니다. 나는 진정한 페미니스트이다."

해악도 100.

지고의 악, "마초 사디스트"의 해악도를 능가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존재가 있다. 이들은 마초 메저키스트 정신분열형이다. 자생적인 부류와, 가장 해악도가 낮은 마초인 마초 메저키스트 자기억압형에서 발전한 부류가 있다. 이들은 그리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아마도 이들은 쿨한 남자친구, 그럭저럭 괜찮은 남편, 자상한 아버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어떤 경우 이들은 개인적으로 너무나도 좋은 사람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사회적인 파급력으로 무한대의 해악도를 발휘한다. 마초이즘의 땅, 대한민국에서, 마초이즘은 자신의 유일한 적인 "페미니즘"인자에 기생하는 방법을 터득해냈다. 이것은 마초이즘의 표류의 역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도약일 것이다. 그리고 이 인자의 전염력은 대단히 높다.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하면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렇게 말하기 시작한다. 온갖 마초 짓을 다 하면서도 마초성을 인정하지 않고 페미니스트를 가르치려고 들거나, 페미니스트에 합류한 마초이즘, 마초 생존술의 극한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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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부류
상대적 마초 (해악도 측정이 힘든 마초이즘의 표류)


20. 마초 귀차니스트

"내가 너 무시해서 일 안하냐....귀차나서 안하지....."

해악도 측정 불가.

귀찮아서 안 움직이는 마초이즘의 표류. 여자친구가 얼마나 부지런하냐에 따라 해악도가 천차만별이다. 만약, 여성 역시 귀차니스트라면 가사 분업은 완벽하게 이룩될 것이다. 그러나 여성이 결벽증이라도 있다면 마초 귀차니스트는 가장 효율적이고 무자비하게 여성을 착취할 것이다.


21. 마초 니힐리스트

"남녀 평등? 난 원리는 안 믿어. 그것을 어떻게 증명하지?"

해악도 측정 불가.

어떠한 도덕윤리도 믿지 않는 마초이즘이다. 그러나 "마초 다위니스트"와는 달리, "힘의 윤리"에도 감염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역시 해악도가 천차만별이다. 여성분들께서는 이 부류의 남성을 만날 경우 "마초 다위니스트"로 빠지지 않게 주의하면서 상대해야 겠다. "그래, 남녀평등하라는 법 없지. 근데 남녀차별하라는 법도 없잖우?" "어, 그건 그러네." "그러니까 원칙을 일단 제껴두고 생각한다면, 우리 둘이서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을 만들면 되겠지?" "어, 그것도 그러네." "그럼 그런 방법을 찾아보자." "어, 그래." 이 부류의 해악도를 줄일 수 있는 필승해법이다. 이들을 위해 잠시 "유물론자" + "쾌락주의자"가 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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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여성분들께는, 이 현상을 희화화시킴으로써 문제를 가볍게 본다는 느낌을 드린 것에 대해 사죄드린다. 이것은 농담의 대상이 될 만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여성분들은 뒤의 사과를 보고 필자의 의도를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뒤의 사과는 이런 것이다. 내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남성 마초분들께는, 이견이 있다고 해도 반박할 수 없는 "유머"라는 형식으로 이렇게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기준으로 여러분을 비난(!)한데 대해 깊은 사과를 드린다. 필자의 의도를 알았다면 반박하지 마시길. 사실 많은 남성들이 이글을 보며 마음 한구석이 언짢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언짢음이 어디서 연유하는지를 찾아보지도 않고 화낸다는 건 정치적으로 올바른 일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이땅에 사는 마초로써, 나와 같은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우리가 사는 세상의 진리의 일단을 상기하게 하는 곤란을 겪게 한 점에 대해 다시 한번 사과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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