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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윤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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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에 해당되는 글 12건

  1. 2008/05/31
    거리시위와 통합의 제의 (16)
  2. 2008/04/30
    혁명적 우익의 나라 (8)
  3. 2008/03/24
    뉴라이트 역사교과서 출간, 나쁜 일이기만 할까? (43)
  4. 2008/02/11
    [시사in] 내 인생의 책 :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36)
  5. 2008/01/17
    지역주의 뒤집어보기
  6. 2007/12/04
    문국현, 혹은 '새로움'의 소란스러움 (12)
  7. 2007/10/24
    김순덕 칼럼과 장하준 (30)
  8. 2007/08/31
    <디 워>의 흥행과 정치적 소비의 문제 (94)
  9. 2007/08/20
    <대한민국 개조론> 비판 : 2. 한미 FTA (26)
  10. 2007/04/05
    FTA 체결과 민주적 리더십의 문제 (6)

촛불문화제에서 촉발된 거리시위가 굉장히 흥미로운 정치현상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또한 그것이 (그것이 가진 모든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 정치 문화를 곧바로 담보하지는 못한다는 사실 역시 명백한데, 그 이유는 이 시위가 '통합의 제의'이기 때문이다.


거리에는 무당파와 좌파와 민주당 지지자가 모두 나와 있다. 심지어 박근혜 지지자도 나와 있다. 이들은 아주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 존재하지 않았던 '정치적인 통합성'을 경험하는 중이다. 이 경험에 준하는 사례를 끌어올려면, 결국에는 정치적인 행사가 아니라 다른 종류의 축제를 언급해야 한다. 즉, 월드컵 당시의 거리응원 말이다.


2002년 당시 월드컵 거리응원이 파시즘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했던 박노자의 진단에 대해 나는 반만 동의했다. 그것이 파시즘으로 전환될 요소가 있다고 말한다면 거기에는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체로 파시즘의 발현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전근대적이었다. 박노자는 그 거리응원의 동력을 박정희 전두환의 독재정치로부터 끌어왔다. 반면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는 그 연원을 동맹, 영고 등의 고대국가에서 통합의 기능을 담당했던 제천 행사와 비교했다. 당시 나는 차라리 후자가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대한민국'이라는 외침은 온 천하를 뒤덮었고 거기에 나는 조금 충격을 받았는데, 왜냐하면 내가 읽는 모든 책들에서 '한국'은 온전한 조국이 아니라 '둘로 갈라진 조국의 반쪽'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붉은 악마'는 그 사실을 부정했고, 이 하나의 국가에서 우리가 온전하게 통합성을 느낄 수 있음을 주장하고 또한 증명했다.  (관련글:
붉은악마와 민족주의 )


우리가 바로 전세대를 계승하지 않고 저 먼 고대를 계승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당시의 내 생각은 이런 식으로 수정해야겠다. 우리의 독재자들도 그런 식의 통합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는 가설을 세워보는 것이다. 가령 윤해동은 박정희에 대해, 박정희가 대부분의 국민들을 설득하려고 노력한 후, 결코 설득이 되지 않는 소수자들에게만 폭력을 행사하는 식의 리더십을 발휘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바로 이것을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시대를 잘 모르지만, 여전히 이견의 존재를 용인하기 힘들어 하는 현대 한국 사회의 문화를 생각해 볼 때, 이 의견은 굉장히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가령 한국적 폭력의 축소판이며 한편의 희극이기도한 <디 워> 사태에 대해 생각해 보자. 아주 선량한 어느 디빠는, 최선을 다해 상대방을 설득하려고 노력할 것이며, 그런 노력이 전혀 무용하다고 생각되는 상대에게만 사이버 테러를 가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폭력을 가한 건 자신이 아니라 '통합'을 거부하고 이죽거린 상대방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의 마음 속에서 그것은 완벽한 진실이다. 이 얼마나 한국적인 현상인가?


민주주의 정치 문화는 근본적으로 이견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위에서 타협을 추구하는 기술이 되어야 한다. 투표를 해서 패배한다 해도 나는 생각을 바꿀 필요가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전근대 사회와, 근대화 시기의 한국 사회에선 그런 문화가 수용되지 않았음이 틀림없다. 박정희식 통합의 리더십은 되도록 우리가 같은 생각을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의 아버지 박정희는 그것을 위해 최대한 노력한 후, 다수에 합류하기를 한사코 거부했던 소수자들에겐 폭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독재국가에서도 대다수의 시민들은 폭력을 당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빨갱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견해는 '막걸리 반공법' 같은 것을 생각해면 굉장히 러프한 면이 있는데, 우리의 문화적 감수성을 설명하는 하나의 가설로 이해해 주면 되겠다. 실제의 박정희가 이렇지는 않았더라도, 대부분의 국민들은 박정희에게 이런 식의 판타지를 투영한 후에야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고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관련글 :
혼네의 민주주의 )


민주화가 이루어진 후 도래한 김대중-노무현 시대는 정치적인 면에서 이러한 (한국인들이 어머니의 요람처럼 마음 편하게 받아들이는) 통합의 정치가 사라진 시대였다. 조중동은 자신들이 대통령을 우습게 여길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미칠듯이 저주했다. 정신분석적으로 바라보면 아버지가 자신을 때려주길 바라면서 히스테리를 부리는 아이같은 증세였다. 이 시기에 우리가 갈등을 그대로 드러내고 그것을 조율하는 민주주의적 정치의 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모두 알다시피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대신 김대중-노무현 시대의 정책을 있는 정책 그대로 보고 비판하려는 사람들과 그래서는 안 된다고 본 민주당 지지자-노빠들의 싸움이 있었다. 물론 큰 틀에선 한나라당-조중동 동맹과 기타 세력의 싸움이 있었지만, '통합성'이란 측면에서는 오히려 전자가 더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지도 모른다.


다음 아고라를 잠깐이라도 살펴보면, 이명박이야말로 골수 한나라당 지지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반대할 수 있는 강력한 유인을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그러다가 누군가 민주당의 무능함을 질타하면, 찬성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금세 반대하는 이들이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요즘 시위의 '대중성'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다. 만일 노무현이 이런 짓을 했다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 명이 이탈한다는 것은 단순하게 -1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 한명은 또 남들이 노무현을 씹는 것을 참을 수가 없기 때문에, 씹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싸움을 걸고 있다. 한명이 이탈할 때마다 -2 혹은 -3의 효과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 시대에 그런 것을 걱정할 이유는 없다. 이제 한때 청소년들 사이에 퍼졌다는 "이명박이 독도를 포기했다."라는 괴담에 대해 생각해 보자. "청소년들은 자신들에게 피부로 와닿는 교육정책과 급식문제에 관련된 쇠고기 정책에 일어났다."는 표준적인 설명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다. 괴담이 있었어야 했다면 왜 "이명박이 사립학교 1천개를 지으려 한다."가 아니라 "독도를 포기하려 한다."는 것이어야 했던 것인가? 왜냐하면 그들은 이명박을 외국인으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10대들은 물론 윗세대와 구별되지만, 한국 사회의 문화적 맥락에서 전적으로 독립적이지는 않다. 그들이 말하는 바는 명백하다. "이명박은 '대한민국'이 아니다. 이명박은 '우리'가 아니다."


노빠와 창빠와 박빠와 문빠와 주사파와 좌파가 다툴 필요가 없는 시위다. 앞열에 선 예비역과 그 뒤에선 페미니스트들이 굳이 으르렁댈 필요가 없는 그런 시위다. '좋은' 것인가? 지금으로선 그렇다. '잃어버린 십년'이란 말도 안 되는 레토릭에 사람들이 동의했던 것은 그동안 이런 식의 통합성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이명박을 '이방인 통치자'로 만드는 판타지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고유한) 정체성을 회복했다. 그래서,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거기에 대한 '답'은 아직 없다. 그게 우리의 거리시위가 아직 온전한 민주주의를 담고 있지는 못한 이유다. 하지만 '진화'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다시 이 출발점으로 돌아와야 했을 것이다. 거리의 인파들은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매우 긍정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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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크루그먼은 그의 저서 <대폭로>에서 부시 행정부를 ‘혁명적 우익’으로 규정한 바 있다. 재무설계사가 되기 전 인터넷 논객의 하나였던 김대영은 이 규정을 고스란히 노무현에게 적용하여 노빠들의 원성을 샀다. 이 규정의 내용을 재인용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겉으로 천명된 목표를 보고 정책 제안이 그 이치에 닿는다고 추정하지 말라.
2. 약간의 숙제를 해서 진짜 목표를 찾아내라.
3. 유용한 정치 규칙이 실제 적용된다고 지레 짐작하지 말라.
4. 혁명적 세력은 공격으로써 비판에 대응한다는 것을 예상하라.
5. 혁명적 세력의 목표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이렇게 적어보니 이것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겉으로 천명된 목표, 즉 물류 비용 감소나 사교육비 절감과 같은 수사를 보고 대운하나 영어몰입교육이 이치에 닿는다고 추정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약간의 숙제를 해서, 이 정책들의 실제 목표, 즉 땅값상승을 통한 경기부양이나 영어만 잘 하는 강남 중산층 자녀들의 비정규직 영어교사 채용이라는 그들의 목적을 간취할 필요가 있다. 유용한 정치규칙이 실제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도 마찬가지. 비리가 드러난다고 해서 장관이 경질될 거라는 기대는 버려야 한다. 이재오가 설친다고 대통령의 형님이 일선에서 물러날 거라는 기대도 버려야 한다. 총선 당시 공약에서 삭제되었던 정책이 다시 추진된다는 사실에 놀라서도 안 된다. 그들의 목표에 한계가 없다는 점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하고 있다. 그야말로 혁명적 우익 만세다.


하지만 한국의 실정에서 생각해 볼 때, 혁명적 우익이라는 개념에 대한 접근은 노무현이나 이명박에 대한 인물 분석을 뛰어넘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돌연변이와도 같은 부시 행정부의 행동을 마음껏 조소할 수 있었던 폴 크루그먼과 달리, 우리의 경우 과연 ‘혁명적 우익’이 특수한 현상이었는가라는 물음을 던질 수 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한국의 우익들은 언제나 혁명적 우익이었다. 지켜야 할 전통적 가치가 무엇인지 규명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의 우익이 ‘보수주의자’가 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한국의 우익 정치인들은 언제나 이전의 정권을 부인하면서, 혁신적인 수사를 내세우며 자신의 정당성을 강변해 왔다. 언제나 혁신을 얘기했지만 그런 행동만큼은 모두 비슷비슷했다.   


반면 리영희나 장준하의 사례에서 보듯 오히려 정통적인 보수주의자의 성향을 지닌 이들이 비판적 지성의 전통을 이어왔다. 좌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인지 모른다. 진보신당이 자신의 테두리를 어디까지 확장할지는 모르지만, 2차세계대전 이전의 사민주의를 옹호하는 노회찬의 모습은 어느 우파 정치인들보다도 더 ‘보수적’이다. 좌파들이야말로 한국 사회에서는 (세계사적 맥락에서 볼 때) 전통적인 가치지향을 계승하려는 ‘보수주의자’인 경우가 많다.


혁신이라는 말은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요즈음엔 주로 경영학의 내용 안에 포섭되어 사용되고 있다. 부단한 자기 혁신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기업에게 필수적인 덕목이다. “처자식만 빼고 다 바꾸어라.”고 말했기 때문에 자신의 기업에 대한 처자식의 지분만은 필사적으로 고수하려고 하는 이건희 회장의 사례를 생각해 보건대, 과연 한국의 기업인들이 그토록 혁신에 철저한 사람들일까 하는 의문은 들지만, ‘혁명적 우익’을 요구했던 한국 우익의 전통(?)의 맥락에선 기업가가 새로운 정치 리더가 되는 것이 거의 필연적인 일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뭐가 문제가 된단 말이냐. 혁신은 필요한 것이며, ‘좋은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 될 수 있겠다. 혁신을 사랑하는 행동주의자들은 언제나 박정희의 경부고속도로 개발을 이야기하며, ‘반대를 위한 반대’론자들이 어떤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를 논증(?)한다. 하지만 나로서는 왜 그들이 혁신적으로 나라를 말아먹은 사례들, 가령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정책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지 의문이다. 보수주의자들을 조롱하는 매우 전통적인 우화로 ‘끓는 물에 삶아지는 개구리’의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를 이렇게 바꾸어 보면 어떨까. “개구리는 언제나 폴짝 뛰어 다른 냄비에 튀어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앞뒤 가리지 않고 언제나 다른 냄비로 뛰어드는 쪽을 선택하게 되었지요. 그러다가 그는 마침내, 펄펄 끓는 냄비에 제 발로 뛰어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참여정부가 혁명적(!)으로 추진한 한미 FTA나 이명박 정부의 대운하 정책을 보면, 정말이지 이 개구리가 어느 끓는 물에 뛰어들지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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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되지는 않는다. (이 점도 논의의 여지는 있지만 일단 그들을 극우파라 가정한다면) 극우파의 역사교과서가 출간되었다는 것보다 더욱 쪽팔린 것은 국사 교과서가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당연하게 여기고 살고 있지만 세상에 그런 나라는 대한민국 외에 거의 없는 것으로 안다. 우리는 일본인들의 교과서가 왜곡되었다고 무시하지만, 사실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의 역사인식 수준을 비웃을 때 곧잘 하는 말이 국사 교과서가 하나밖에 없는 나라라는 말이다. 국가에서 가르쳐준 것 외에 무엇을 더 아냐는 것이다.


물론 한국에서도 여러 가지 시각의 다양한 역사책이 출간되기 때문에 이러한 비판은 억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가장 널리 읽히는 역사책이 국사책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러한 조소를 전적으로 부정하기는 어렵다. 국사 교과서가 하나밖에 없는 현실은 국사 교과서를 둘러싼 지나친 힘겨루기를 낳기도 한다. 가령 ‘환빠’를 탄생시킨 재야사학자들은 1980년대에 소위 강단사학자들과 논쟁을 벌이기보다는 신군부에 로비를 하는 쪽을 택했는데, 국사 교과서에만 서술이 포함되면 사실상의 정사(正史)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속셈 때문이었다. 


청소년들이 악영향을 받을 거라는 얘기도 나오지만, 단지 역사 교과서 한 권만으로 그들의 역사의식이 결정될 거라는 식의 우려는 지나친 감이 있다. 만일 그런 식의 우려가 정당하다면, ‘국사 교과서 한 권밖에 없는 나라’에 대한 일본인들의 조소 역시 전적으로 정당한 것일 테다. 교과서가 출간되는 것과 그 교과서가 몇 개의 학교에서 채택되느냐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다. 교과서에 실려 있는 관점이나 해석에 비판적이라면 비판을 하면 될 일이지 출간 자체가 개탄할 일이라는 식의 접근은 인정받기 어렵다.


오히려 다양한 관점의 역사교육이 실시 될 때, 상이한 역사적 해석에 대한 이해를 평가하기 어려운 현행의 학력 평가 방식을 어떻게 개선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더 실천적인 일이겠다. 그리고 현행 국사 교과서가 ‘좌파’적이라는 뉴라이트의 주장에 동의하지 못 한다면, 또 다른 관점의 국사교과서를 만드는 일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상의 논의는 그저 원론적인 수준인데, 언론에 소개된 교과서의 대략의 내용을 보니 이 사건을 평가해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대한민국엔 박정희에 심정적으로 동의하는 사람들이 꽤 많고, 그 심정적 동의를 이용해 먹는 거대한 정치세력도 있다. 이러한 나라에서 박정희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역사교과서가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많은 시민단체들이 격렬하게 반대했다고 해서 나는 또 “5.16=혁명 / 4.19=반란”이라 주장하기라도 한 줄 알았다. 그런 것도 아니다. 적어도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의 문제는 구별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의 가치판단에 반대할 수 있는 다른 사료나 다른 도덕률을 제시하면 될 일이다.


서로의 논쟁을 위해서도 뉴라이트의 주장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는 쪽이 좋다. 막연한 정서는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없지만, 하나의 역사관이 정립된다면 문제는 다르다. 매우 타당하게도 독재정권의 긍정적 역할을 강조하는 그들은 일제 식민지 시기나 이승만 정권의 역할에 대해서도 재평가하고 있다. 일제엔 이를 벅벅 갈고 이승만은 무능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박정희만 영웅이라고 생각하는, 어느 소시민의 시각보다는 훨씬 정합적이고, 역사적이다. 이 정도는 되어야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물론 논리적으로 식민지 근대화론을 비판하고 박정희 독재정권을 옹호하는데 성공하는 어떤 역사관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일단 여기서는 고려하지 않는다.) 


만일 박정희를 좋아하면서도 식민지 근대화론은 정서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뉴라이트 역사교과서를 비난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리고 시민단체들이 그런 이들의 힘까지 빌려 반대파의 숫자를 불려서 그들을 비난한다면, 나는 오히려 그렇게 운동하는 이들의 사고방식이 더 우려스럽다. 대중의 정서가 우리 편일 경우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활용하는 자세는, 당장엔 이득이 될지 몰라도 결국 정치 행위 전체를 수렁으로 빠뜨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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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진보신당은 민주노동당 '분당' 사태 이후 노회찬 의원과 심상정 의원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좌파정당입니다.) 의 이 사건에 대한 논평자료. 양쪽 다 비판적이나 진보신당 쪽의 논평에 조금 더 내가 말한 문제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민주노동당 보도자료] 최순영 의원 “뉴라이트 왜곡 교과서, 용납안돼”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뉴라이트 황당 왜곡 역사교과서
최순영 의원, “일제침략, 군사독재 미화 용납해선 안돼”


이명박 정부 들어 난데없는 유령이 하나 둘 출몰하고 있다. 그 유령은 이명박 후보의 당선 결과를 두고 국민들이 무분별한 온갖 역주행을 지지했다고 오해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새정부 인수위의 영어몰입교육과 온 국민의 분노를 일으켰던 한나라당 서울시의원들의 학원영업시간 자율화가 그랬다. 또 하나 나타난 역주행 사례가 이른바 뉴라이트 지식인들의 황당한 역사교과서이다.

뉴라이트 계열 지식인들이 3년여의 준비 끝에 기존 역사서술이나 해석과는 사뭇 다른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대안교과서'를 출간했다. 대안교과서는 이미 그 준비과정에서 역사상식을 뛰어넘는 해석으로 4.19 혁명 관련 단체들과 충돌하는 등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관점이 개항과 국제무역 확대 등의 시각으로 표현되고 논란이 뜨거운 식민지시대 한국사회의 성격에 대해서는 ‘일제의 한국지배는 한국인의 정치적 권리를 부정한 폭력적 억압 체제였다’라고 규정하면서도 이 시기에 완전한 의미의 근대적 신분해방과 사유재산제도가 이뤄지고, ‘모던보이’와 같은 근대의 인간군상이 탄생한 시기라는 측면을 강조했다.

또한, 군사정권과 유신체제를 미화하는 등 근현대사에 대한 역사인식에서 한국사회의 민주주의 발전과 역사발전의 과정에 대한 심각한 왜곡된 진술이 포함되어있다.

역사용어 선택 또한 파격을 시도해 ‘명성황후’는 ‘민왕후’로 격하시키는 등 잘못된 역사인식을 그대로 기술하고 있다. 심각한 상황은 ‘교과서 포럼’에서 23일 내놓은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의 집필진 12명 중에는 역사학 전공자는 없다는 사실이다.

청소년들이 역사를 배우는 교과서에 암울했던 일제침략시대와 군사독재시대를 미화하고 긍정적인 면을 내세워 강조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있다. 숭고한 항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모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잘못된 역사의식을 심어주는 것은 신체를 망가뜨리는 마약을 투입하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는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근현대사에 대한 올바른 역사인식을 갖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잘못된 역사책이 학교에 진입하지 못하도록 함께 불매운동을 벌이고 준엄한 꾸짖음에 적극 나서 줄 것을 제안한다. 올바른 역사의식은 가치판단의 잣대이고 우리의 미래를 밝히는 횃불이기 때문이다.

2008년 3월 24일
국회의원 최순영(부천 원미을 국회의원 후보)


[진보신당 논평]
뉴라이트 ‘교과서’와 대통령의 역사인식
역사를 실용주의적으로 보라고 청소년에게 가르칠 수 있나



이영훈 서울대 교수를 주축으로 하는 뉴라이트 계열 지식인들이 현행 고등학교용 역사 교과서를 ‘좌파적 역사 인식’이라고 비판하며 ‘대안 교과서’를 내놓았다. 소위 ‘대안 교과서’에는 기존 역사 서술과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역사 인식이 담겨 있다고 한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대한민국에서 이런 내용의 책이 나오지 못하게 금지할 수는 없다. 또, 이명박 대통령의 3.1절 기념사에서 단적으로 드러난 실용주의적 역사 인식이 학술적으로 정리되었다는 것은 오히려 환영할 만한 일이다. 이제 학계에서 실용주의적, 우파적 역사 인식과 정면으로 대결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책이 ‘교과서’용으로 제작되었다는 것은 위기감을 느끼게 한다. 역사학 학술서로 나왔다면 이 정도로 파문을 일으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국 근현대사를 다룬 교과서의 역사인식은 청소년의 역사관과 국가관, 가치관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또한, 현행 교과서가 ‘좌파적 역사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검정을 거친 현행 교과서는 역사학계에서 검증된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인데, 그러면 한국 역사학계에는 좌파들이 포진하고 있다는 것인가.


우리가 느끼는 위기감은 이단적인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한 책이 출간되었다는 것 때문이 아니다. 역사를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서 일정 이상의 세력을 갖고 있고, 청소년을 상대로 포문을 열었다는 것 때문이다. 하기야 대통령부터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 열린 민족주의’를 주문했으니, ‘교과서 포럼’만의 문제는 아니겠다. 대통령의 역사 인식을 묻고 싶은 시점이다.


2008년 3월 24일

진보신당 대변인 송 경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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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고삐리, 진중권을 접하다
[21호] 2008년 01월 30일 (수) 17:43:19 한윤형 (인터넷 필명 아흐리만)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진중권 지음
개마고원 펴냄

이른바 ‘<디 워> 사태’ 때문에 이제는 우리 부모님도 진중권이 누군지 알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1998년 어느 날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를 구입했을 즈음에는 나도 저자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책에 빠져 들어, 채 일 년이 지나기 전에 열 번 정도 읽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내 지식  수준에서 단박에 이해되는 책은 아니었던 것이다. 쉽게 읽히지만, 논변이 단순하지는 않아서 열 번이나 반복해서 읽어야 하는 책은 도대체 어떤 책일까?

사실 이 책은 내가 사회참여 글쓰기에 관심을 가지는 시발점이 되었지만, 정치 포지션의 관점에서 명쾌한 답을 주는 책은 아니다. 이제 나는 진중권의 자유주의 비평의 칼날을 피해 갈 수 있는 어느 똑똑한 극우파를 상상해볼 수 있다. 지난해 출간된 <호모 코레아니쿠스>의 어느 부분에서 진중권은 스스로 그런 반박을 가정한다. “일본 우익은 자기들이 조선의 근대화를 도왔다고 말하고, 한국 우익이 박정희를 ‘근대화 혁명가’로 치켜세운다. 방식이야 어떻든 산업화 자체를 절대적 가치로 보는 이들에게는 당연한 발상이다. 이들에게 폭력적 근대화의 그림자에 대해 얘기해봤자 소용이 없다. 그들은 푸코를 들어 서구에서도 근대화는 어차피 감시와 처벌, 군대식 훈육의 결과였다고 할 테니까. 여기서 ‘근대화’ 자체를 비판하는 푸코의 논지는 한국적 근대화의 폭력성을 옹호하는 논리로 둔갑한다.”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 그가 겨냥한 필자는 모조리 다 논파당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의 글쓰기는 인문학 텍스트의 그릇된 인용이나 아귀가 맞지 않는 소리에 대한 강력한 혐오감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것들을 정면으로 논파하는 그의 전략은 매력적이고, 정치 포지션에 관계없이, 논리 사유가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그리하여,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열 번씩 읽는 동안 이 책은 나의 논리학 교과서가 되었다.

   
   
 
아직도 실현된 것 같지는 않지만, 그런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지난 내 10년을 규정했다. 특히 좋아하는 문장 : “피임을 가능케 하는 콘돔은 합목적적이다. 그런데 콘돔의 반투과성이 어떻게 독재의 정당성의 근거가 되는 걸까?” 박정희의 독재를 옹호하기 위해 수단의 정당성과 목적의 정당성이 깔끔하게 구별될 수 없음을 증명하려는 이인화에 대한 진중권의 일갈이다. “콘돔의 반투과성이 어떻게 피임의 정당성의 근거가 되는 걸까? 마찬가지로, ‘잘살아보세’ 철학의 합목적성이 어떻게 독재의 정당성의 근거가 되는 걸까?”라고 써줬다면 더 친절했겠지만, 그래서는 이해하는 순간 데굴데굴 구르게 되지는 않았을 것.

이처럼 논리적이면서도 섹시한 비유라니, 지금 봐도 여전히 놀랍다. 진중권의 책 중에서 정치 에세이로는 <폭력과 상스러움>을, 미학 관련 책으로는 <앙겔루스 노부스>를 지지하는 나이지만, 처음 발견한 이 책은 책을 넘어선 하나의 물건이었다. 부디 다음 세대에도 읽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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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해서는 이런 식의 얘기를 이전에도 했던 것 같은데......

하지만 그렇더라도 "내 인생의 책"을 묻는데 거짓말을 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죠.

그나저나 노정태군은 사진을 보고 "뭐야? 몸무게가 한 80은 넘어 보인다! ㅋㅋㅋ"라고 반응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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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고는 프레시안에서 기획했던 "대선, 삐딱하게 읽기"에 보내기 위해 작성된 것인데, 이번 대선에선 도통 지역주의 문제가 이슈가 되지 않는 바람에 시의성을 찾지 못하고 묻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건대 총선에서도 지역주의가 이슈가 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현재 정치적 파벌들이 어떤 도형을 그리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른 글에서 말하게 되겠지만, 이 글은 그저 과거의 사건을 명확히 정리하고 평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똑같은 일이 일어나지는 않더라도, 과거의 사건을 세밀하게 평가하지 않은 사람들은 미래에도 비슷한 수법에 당하기 마련이지요.

2007년 12월쯤 작성된 글이니 시차를 감안하고 읽으셔야 겠습니다.


지역주의는 사라졌는가?


옛날 옛날에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이라는 정당이 있었다. 열린우리당의 지지자들은 민주당이 호남 지역주의 정당이라고 비난했고, 민주당 지지자들은 열린우리당이 영남 패권주의 정당이라고 비난했다. 그후 대선이 다가왔고 지지율이 지지부진하자 진절머리가 난 두 정당은 합당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합당은 쉽지 않았다. 민주당엔 열린우리당이 분당에 대해서 사과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었고, 열린우리당엔 민주당이 대통령 탄핵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 정당의 주요인물들이 두가지 사안에 대하여 애매하게 사과하는 가운데, 양당 국회의원들은 ‘제3지대’라는 것을 만들어 통합을 추구하기로 했다. 즉, 이 당도 깨고 저 당도 깨서 새로운 당에서 미팅을 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해서 대통합민주신당과 잔류 민주당이라는 당이 탄생했다. 분당과 창당의 마술적 힘 덕분에 이제 과거의 과오는 전혀 중요하게 언급되지 않았다. 대통합민주신당과 잔류 민주당은 최근 당대당 통합을 하기로 결정했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완전한 합방이 이루어진 것. 결국 이 와중에 ‘지역주의’ 이야기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지역주의에 관한 이야기가 대선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 지역주의가 사라진 걸까? 물론 그것이 ‘좋은’ 현상일리는 없으니, 사라졌다면 좋은 일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면 찝찝하다. 민주당 분당과 열린우리당의 창당, 그리고 대통령 탄핵, 게다가 그후의 논쟁들까지, 민주당과 열린우리당 사이의 갈등에는 국회의원들끼리의 권력다툼이라는 층위를 제외하면 언제나 지역주의가 ‘명분’으로 존재했다. 그것이 사라졌다면 얘기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단지 “그들은 지역주의를 핑계로 권력투쟁을 했다.”고만 하면 문제가 설명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양당의 지지자들조차 자기 당이 올바르다고 상대방을 비난했기 때문이다. 그 싸움들은 다 무용한 것이었을까?



지금 지역주의가 대선정국에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언뜻 생각해 볼 때 세 가지의 논리적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애초에 호남 지역주의의 문제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잘못한 세력은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이다. 둘은 원래 문제가 존재했지만, 그후의 사건들을 통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한다면 잘못한 세력은 민주당 지지자들이다. 나머지 하나는 두 세력의 이견은 여전하지만 대선 때문에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두 정당의 이합집산은 야합이 된다. 한나라당의 무엇에 대해 반대하는지도 모르면서 반한나라당을 외치는 촌극이 연출되고 있는 셈이다.



지역주의에 관한 문제는 담론적인 차원에선 전혀 정리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나라당 후보가 전국적으로 맹위를 떨치는 현재의 대선정국에서 정치세력화에 의미있는 담론은 아닐 것이다. 그것이 외면받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역주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당장 내년 총선이 다가오면 각 정파는 또 지역주의를 자기 입맛에 맞게 해석하여 자신의 정당성을 치장하는데 써먹을 것이다. 억압되었던 것이 귀환하면 더 무섭다. 그것은 이미 뒤틀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도 지역주의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이때, 다시 한번 저 논쟁을 발굴해서 정리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래야 다시 살아 돌아올 저 유령의 귀환에 맞설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지역주의에 관한 두 가지 시선


지역주의라는 담론에 대한 표준적인 이해는 다음과 같다. 일단 특정정당에 대한 영호남 각 지역의 몰표현상이 있다. 이 현상을 보고 사람들은 원인을 추리한다. 먼저 그것은 지역주민들이 자기 지역의 이익을 보장하는 정당에 투표하려는 경향을 의미한다. 가령 한 정당을 지지하면 그 정당이 어떤 개발사업을 특정 지역에 유치해 준다는 식으로. 만일 이런 이유로 한 지역의 유권자들이 한 정당에 몰표를 준다면, 그것은 ‘지역이기주의’로 불릴만한 것인데, 언제나 나쁘다고는 볼 수 없다. 민주주의 사회에선 누구나 이기적인 투표를 하도록 기대되고 있고 문제는 이기적인 투표의 총합이 어떤 결과를 낳느냐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매 선거마다 일어날 수는 없고, 새만금 사업이나 정선 카지노 사업 등의 경우가 증명하듯, 저 ‘개발사업’이 반드시 그 지역 사람들에게 두루 혜택을 주는 사업이라는 보장도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더 증명하기 쉽다.) 그래서 몰표현상에 대한 두 번째 원인 추리가 탄생한다. 지역몰표는 자기 지역 출신의 사람들을 공직에 많이 진출시켜 지역인맥을 형성하는 것을 의도한다는 것이다. 이때에 지역주의는 소수 지역 엘리트의 영달을 위해 전 지역민이 동원되는 허구적인 이데올로기로 파악된다.


만일 문제가 이렇다면 지역민들의 투표는 부도덕하거나 무능한 것이다. 그래서 문제를 이렇게 보는 언론들은 그간 민주주의를 좀먹는 망국적 지역주의에 대한 개탄을 문제의 해법(?)으로 알았다. 이 시선에 대항하는 사람들은 지역주의라는 용어가 적절하지 않으며 실제적인 문제는 호남차별이라는 인식을 보여주었다. 구체적으로는 강준만을 위시한 민주당을 지지하는 자유주의 평론가들로부터 그런 입장이 나왔다. 지역의 표 동원은 역사적으로 1971년 김대중을 떨어뜨리기 위해 박정희의 공화당이 조직한 것이다. 그후 광주민주화 항쟁과 3당합당을 통해 호남을 고립시키는 정치적 책동은 계속되어 왔다. 정치적인 탄압과 문화적인 호남차별 속에서 태생한 호남의 지역몰표는 저항적 지역주의로, 영남의 그것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것이라는 게 그들의 해석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도식에서 영남의 지역몰표는 부도덕하거나 무능한 것이지만, 호남의 지역몰표는 극우 정당에 대한 실체적인 저항이다.


편의상 전자의 시선을 A라고, 후자의 시선을 B라고 부르기로 하자. 지난 5년간 B의 입장에 선 사람들은 ‘노빠’와 ‘좌파’들이, 그러니까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의 지지자들이 수구세력과 동일한 A라는 시선에서 지역주의를 바라본다고 개탄해왔다. 그런 시각은 인터넷에 차고 넘치지만, 굳이 저서를 통해 확인하고 싶다면 김욱의 <영남민국 잔혹사>를 참조할 수 있다. 지역주의 문제에 관해선 노빠와 좌파들이 연합전선을 취해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가령 진중권은 열린우리당을 한번도 지지한 적이 없지만 열린우리당의 창당 자체는 올바른 일이라고 논평했다. 그런데 문제는 노빠나 좌파들도 2002년 이전에는 대개 B에 찬동하는 이들이었다는 점이다. 나는 여기서 하나의 가설을 세우고자 한다. 즉, 문제의 진실은 A와 B를 넘어서는 차원에 있다. 하지만 ‘노빠’나 ‘좌파’들은 B 시선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보이면 그것에 분개하고 A로 회귀해 버리는 일을 반복해 왔다. 대개 그들은 B가 고발하는 문제점들이 김대중 집권 이후로 그럭저럭 해소되었고 따라서 A 시선에서 잡힐 수 있는 문제만이 남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하여 양자 사이엔 소통이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분석적으로 바라본 지역주의


여기까지만 논해도 현명한 독자들은 지역주의라는 낱말 안에 너무 많은 현상이 녹아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투박하게 나눠보아도 그것은 지역몰표의 문제, 지역불균형의 문제, 그리고 호남지역에 대한 문화적 차별 혹은 경멸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물론 이 ‘지역주의 현상’의 세가지 측면은 각기 서로의 부분적인 원인이 되기도 하는 등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지만 이것들이 모두 하나의 원인을 가지는 현상인 것인지, 그러니까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세 가지에 해당하는 것인지에 대해선 확신할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은 오캄Ockam식으로 말할 때 ‘복잡한 진술들을 간편하게 생략하는 어휘’에 해당할 뿐이다. 이 현상들을 모조리 지역주의라는 이름 밑에 넣어두고 그것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그 자체로 ‘지역주의 현상’을 보전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저 두루뭉술하게 이해된 ‘지역주의’에 대한 비판은 “전국정당 건설이 지역주의 해체다.”라는 열린우리당식의 해법으로 귀결되기 쉽기 때문이다. (물론 저 명제는 한나라당을 통해 지역주의를 해체한 열린우리당의 위대한 업적을 상기시키고 있다.)


군사정권 시기에 분리통치를 위해 호남차별을 통해 지역몰표를 유도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하여 문화적 차별 혹은 경멸의 문제가 남아있다면 언제까지나 시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역몰표가 아직까지도 저 호남차별 의식을 통해 기능하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지금은 문국현 후보 캠프에 있는 김헌태 전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소장은 이제는 지역주의가 이념적인 문제로 고착화되었다는 견해를 피력한바 있다. 즉, 만일 영남인들이 햇볕정책에 찬성하는데도 한나라당을 지지한다면 뭔가 다른 이유를 따져봐야겠으나, 애초에 햇볕정책에 반대하는 영남인들이 한나라당을 지지하는데 다른 이유를 찾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고착화된 지역몰표는 실제로 지역민의 의식을 변화시켜 왔다. 그러므로 이제는 순진하게 ‘지역민들의 현명하지 못한 선택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식으로 접근해선 효력을 얻을 수 없다.


한편 지역불균형의 문제는 단순히 영남과 호남 사이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첫째로는 서울 대 지방의 문제요, 둘째로는 서울의 하위 파트너로서의 영남과 기타 지역의 문제다. 지역불균형의 문제를 호남의 문제로 치환시키는 데에서 어떤 노빠나 좌파들은 반감을 가졌던 것이 아닌가 싶다. 게다가 영남정권이 영남에 공단을 많이 지었다는 식의 이해는 경제학적으로 지지받기 어려운 감성적인 논변이다. 중화학 공업정책은 수심이 깊은 동해를 중심으로 추진될 수밖에 없었고, 국가의 책임은 그것이 추진되지 않은 지역을 고려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지 중화학 공업정책 자체에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한국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파워엘리트들을 인터뷰해보면 대개 경상도 사투리를 쓰더라는 문화인류학적(?)인 증언이 있다. 이 문제는 정치적으로 해결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서울대 신입생이야 지역안배를 하면 되고 중산층 역시 경제정책으로 육성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특정 지역 부르주아를 국가가 나서서 키우거나 탄압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출신성분이 비슷한 그들이 고만고만한 결정을 내리지 않도록 나머지 시민사회가 감시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리하여 김욱은 영남패권에 대해 말하기 연습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나는 그가 영남패권이라 부르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하는지 모르겠고, 그 무엇이 있다 해도 그게 말하기 연습이나 반영남 지역 몰표를 통해 극복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분석적으로 바라본 지역주의는 우리가 각각의 문제에 대해 각각의 해법을 추구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노무현과 열린우리당 역시 ‘영패’집단이라는 증오의 선동(?)을 통해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이다. 


열린우리당의 오류를 반성해야


한편 지역주의에 대해 철저하게 분석하는 것은, 지역주의 타파를 거의 존재의의에 해당하는 최대의 강령으로 내세웠던 열린우리당의 실패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다. 그들은 영남개혁세력과 호남개혁세력의 통합을 추구한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볼 때 우향우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차이의 차별점은 햇볕정책밖에 없다. 그렇다면 햇볕정책에 반대하는 영남인들이 열린우리당에 찬동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자 열린우리당은 크게 세 가지 공세를 펼쳐서 영남지역을 공략하려고 했다. 하나는 호남유권자에 대한 거리두기다. 물론 이것은 윤리적으로 볼 때 글러먹은 정치행위였다. 둘은 한나라당이 영남경제를 살리지는 못한다고 홍보한 것이었다. 앞서 우리가 분석한 지역몰표의 매커니즘을 따른다면 이 역시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다. 그것은 지역주의에 대한 지성적인 오류요, 전략의 실패이기도 하다. 이 두가지 공세는 주로 유시민을 통해 유포되었다. 이것들이 효력을 못 거두자 급기야 그들은 여당을 찍으면 지역에 도움이 될 거라고 주장하기까지 이르렀다. 주로 김혁규를 통해 경남지방에 유포되었던 이 주장은 주민들로 하여금 표준적인 지역이기주의 모델에 따라 투표하기를 권유하고 있다. 지역주의를 극복하겠다는 이들이 펼친 지역주의 공세. 그리하여 열린우리당은 지역주의에 관한 한 윤리의 파탄, 지성의 오류, 전략의 실패라는 위대한 삼위일체를 달성하였다.


지역주의가 문제가 된다면 그것이 다른 종류의 합리적인 정치행위를 가로막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당을 지지할 수 있는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그것을 통해 지역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만일 누군가가 “여러분, 지역을 보고 투표하지 말고 정당 마크의 디자인의 우수성을 보고 투표하십시오!”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를 미친 사람 취급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데 왜 “열린우리당이 영남에서 의석을 얻는 것이 지역주의 타파다.”라는 헛소리에는 많은 사람이 동의하는 것인가? 영남의 보수성을 해체하려면 각 정당이 햇볕정책 이외의 많은 사안에서도 정책적 변별점을 가지고, 그 정책들이 지역사회의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어필하는지를 충실히 설명해야 한다. 그쯤 되어야 유권자의 투표행태의 무능함을 설득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정론으로 돌아가 생각해보면 정당끼리의 변별점이 없기 때문에 지역주의라는 담론이 성립하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닐 것이다.


지난 5년을 돌이켜보면 비록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싸움이 희극에 가까웠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진지하게 동원되었다. 앞으로 같은 상황이 발생했을 때 우리는 비웃을 줄 알아야 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지역주의 논쟁을 찬찬히 돌이킬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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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문국현에게 아무런 기대가 없지만, '단일화 제안' 뉴스를 보고 분개할 뻔 했다. 그것이 한국 정치의 시스템 부재 현상을 더욱 심화시킬, 말 그대로 '바람'의 향방에 정치를 맡기는 러시안 룰렛형 정치행위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안 내용을 읽어보니, 그 정도는 아니고 정동영에 대한 일종의 정치적 압박이더라. 그러니까 문국현도 완벽한 뻘짓을 할 정도의 그릇은 아니라는 거다.


2.
문제는 정동영측. 원래 단일화 제안은 정동영의 몫이다. 단일화를 위한 통큰 양보 따위의 드라마없이는 결코 지지율을 높일 수 없는 것이 범여권이기 때문이다. 문국현의 제안서를 보면 상황은 간단하다. 이명박이 부패했다는 사실엔 정동영도 문국현도 동의한다. 그리고 참여정부가 무능하다는 사실엔 이명박도 문국현도 동의한다. 문국현의 참여정부 비판의 핵심은 참여정부가 그 실정을 통감하고 전향적인 자세를 취할 때 과거세력의 집권을 막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의 단일화 제안조차도 범여권의 전략을 변경시키기 위한 (물론 그의 입장에서 최선의 전략 변경은 '문국현으로의 단일화'일테지만) 일종의 정치적 기동이다. 적어도 단일화 제안서의 문장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여권은 참여정부의 무능이나 실정이라는 말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들은 현재의 지지율을 조중동과 한나라당의 여론조작, 그리고 국민의 '노망'으로 치부하고 있을 것이다. 이 '아마도' 뒤의 문장은 조심스러운데, 하여간 그 앞의 문장에 논리필연적으로 연결된다. 그게 아니면 뭔가 다른 심오한 원인을 생각하고 있다는 건데, 그런 얘기는 못 들었다.  여하간 그렇기 때문에 정동영측은 문국현측보다 조직력은 월등히, 지지율은 좀더 높은데도 불구하고 '수세적인' 입장이다. 담론적으로 수세적이면 그걸 인정하고 모든 걸 다 던지는 통 큰 단일화 시도로 바람을 불러 일으켜야할 텐데, 수세적인 주제에 "나 잘못한 거 없소."라고 주장하려니 이 정국에서 할 일이 하나도 없다. 그러니 문국현에게서 제안서가 나오는 것일 테고. 아무 것도 안 하는 그들의 행동을 '삽질'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가혹하겠지만, 이 상황을 살펴보면 그런 표현을 안 쓸 수가 없다.


3.
그렇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명박의 부패와 참여정부의 무능을 말하는 문국현의 포지션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부패는 그저 '부패했다'는 말 한마디로 끝나는 것이지만, 무능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떻게 무능했단 말인가, 유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라는 문제가 자동적으로 따라나온다. 문국현은 중소기업 중심 경제를 말하지만 그것은 "지금 현재 중소기업에 활력이 없다."는 현황적인 문제제시에 불과하고 그것 자체가 비전은 아니다. 도대체 무엇을 통해 중소기업 중심 경제를 만들 것인지가 하나의 비전이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문국현은, 한나라당과 똑같이 참여정부를 (구)이념 중심세력으로 몰아붙이고 있는 것 같다. '새로운'이란 수사가 그의 발언 곳곳에 넘쳐난다. 이라크 파병 때 민주당에서 탈당한 자칭 사민주의자 정범구 역시 참여정부와 자신들의 대립을 구세력 대 미래세력으로 잡고 있는 것 같다. 우려되는 것은 이 '새로움'의 수사는 기본적으로 탈이념적인 데다가 결코 새롭지도 않다는 것이다.


4.
세상엔 이념이 한나라당 것과 참여정부 것밖에 없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념이란 단어에 반드시 '교조적',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이란 개념이 포함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이념을 몰아붙이는 사람들은 결국 내가 뭘 할지 설명하기는 귀찮으니 그냥 내가 하자는 대로 하자는 얘긴데, 이렇게 가다가 잘 되는 경우도 간혹 있기는 있지만 침몰하는 경우가 더 많다. 단적으로 참여정부 역시 그렇다. 노무현 대통령 역시 '새로움'의 수사를 엄청나게 좋아한 사람이었다. 2002년의 노무현 후보의 표어가 '새로운 대한민국' 이었다. 노무현은 자신의 이미지에서 민주당의 색채를 완전히 지우려고 했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물론 민주당과는 전혀 다른, 하지만 민주당 이상으로 한심한 어떤 정당이다.


5.
새로움이란 것은 과거의 것과의 부단한 대결에서 나온다. 가령 지금은 없는 사조를 제시한다 해도 이렇다. "A라는 사조와 B라는 사조의 중간쯤에 있는 노선을 추구하려 합니다." 이러면 듣는 사람도 이해가 되고, 뭐가 새롭고 뭐가 안 새로운지 구별할 수 있다. 하지만 무턱다고 새롭다는 얘기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정범구의 미래세력이라는 레토릭이 문국현의 무-정책을 메꾸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닐까하는 정당한 의구심을 품는다. 한미 FTA와 미국 쇠고기 수입에 '찬성'하는 '사민주의자'라니, 본인이 생각해도 참 말빨 안 먹히는 조합이 아니겠느냔 말이다.

거두절미 없는 새로움은 망각에서 기인한다. 그러니까, 과거의 기억을 지워버려야 내가 새롭다고 우길 수 있다는 거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어느 역사적인 명언처럼,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은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형벌을 받게 된다." 남는 것이 없고, 이 새롭지 않은 소란스러움을 우리는 어떤 새로운 것이라고 인식하게 된다. 이명박은 새롭지 않고, 문국현도 새롭지 않다. 다만 그들이 구현하는 것은 2002년에 존재했던, 노무현을 보고 유권자들이 느꼈을 '새로움'의 이미지다. 이름하여 '새로운 것의 영원회귀'다. 이런 식의 정치흐름은 분명하게 파시즘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6.
물론 대한민국의 역사는 새로운 것에 대한 강박을 이해하게 만든다. 일제는 조선의 전통을 다 도려내버렸고, 해방 이후의 복잡한 정치정국은 그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문화적 축적물까지 다 부정해버렸다. 그야 그 시기의 것들은 다 일본어로 이루어져 있었을테니 이승만으로서는 계승할 수가 없었을 게다. 그래서 한국사에는 '고아'가 넘친다. 이승만은 조선 왕조의 핏줄과 미국 유학 경력을 자랑스러워 했지만 조선은 망했고 미국과도 불화했으니 전형적인 독불장군으로써 정치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에 충성을 바쳤지만 그후 '조국'을 바꿔야 했던 불행한(?) 군인 박정희 역시 심리적 고아다. (이것은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의 핵심적인 주제이기도 하다.) 신군부는 박정희를 계승한 주제에 박정희를 싸그리 부인하여 올곧은(?) 극우파들의 원성을 샀다. 그후 한국의 모든 정치집단은 이전의 모든 것들에 대한 부인을 강박적으로 반복해 왔다. '역사 바로세우기'도 좋지만, 그것이 이런 식의 고아의식을 정당화하는데 사용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이명박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욕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명박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나마 그들이 정치에 대해 기대하는 역할을 해주겠다는 사람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에도 이전의 모든 것이 부정되는, '고아의 정치공학'이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생각하면 우려가 든다. 실제로는 새로운 것은 하나도 만들지 못하면서 이름만 바꿔놓고 새롭다고 우기는 이 세태.

이것을 이겨내려면 과거에 대한 분석적이고 엄정한 평가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 되었든 과거에서 약간이나마 전거를 찾아내려는 버릇도 필요할 것이다. 물론 역사에는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으며, 우리는 그것들을 마땅히 평가해야 하지만, 어쨌든 역사는 연속적이고 우리의 삶에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잘못된 것을 '잘못' 부인한다면, 결코 그것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력을 인지할 수도 없고 청산할 수도 없다. 참여정부는 5년전만 해도 새로운 정부였다. 만일 문국현이 집권한다 해도, 그는 '새로움'이란 레토릭만 내걸고 참여정부가 했던 일을 답습하지 않을까? 집권하지도 못할 그에게 이런 얘기해서 미안하지만, 나는 그가 지금껏 보여준 모습만으론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7.
"나는 조봉암의 진보당을 계승하려는 거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야 한다. (꼭 이것만 있다는 건 아니다.) 진정한 새로움은 과거를 대하는 진지한 태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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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 칼럼]장하준과 ‘착한 경제학자들’


드디어 우리도 세계적인 경제학자를 갖게 되는 모양이다. 영국에서 먼저 출간된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의 책 ‘나쁜 사마리아인들’에 대해 외국 언론에 잇따라 평이 나오고, 아직 책도 안 나온 미국에서 관심을 보일 정도다. 우리나라에선 지난주 번역돼 벌써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참여정부가 극찬한 이단 경제학

그런데 반응이 호의적이지만은 않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와 파이낸셜타임스는 “역사적 기록이 불확실하다” “역사적 교훈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과거 보호주의로 성공했으면서도 개발도상국에는 자유무역 자유시장을 강요하는 선진국을 ‘나쁜 사마리아인’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참여정부 식으로 해석하자면 ‘주류’ 보수언론의 악의적 보도가 아닐 수 없다. 2년 전 비슷한 논지의 장 교수 책 ‘쾌도난마 한국경제’를 읽었다며 국정에 응용했던 대통령이 안다면 내심 난처할 것 같다. ‘대못질’을 지시할 수도 없고.

시장과 세계화를 중시하는 주류 경제학계의 시각에서 장 교수가 비주류인 건 사실이다. 빈부격차 등 세계화의 부작용에 대해서도 주류는 교육과 직업훈련 일자리를 통한 해결을 찾는 반면, 비주류는 세계화나 신자유주의 반대를 주장한다. 글로벌 시장을 주도하는 미국에선 시장보다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학자가 많아야 15%여서 ‘이단(heterodox)’으로 불린다. 장 교수의 프로그램 역시 이들이 정보를 나누는 이단 경제학(heterodox economics) 뉴스레터에서 찾아볼 수 있다.

3년 전 대통령이 성장과 함께 가는 분배를 강조하며 거론했던 조지프 스티글리츠도 남미 포퓰리즘 부활에 한몫한 인물로 평가된다. 참여정부 경제를 설계한 이정우 전 대통령정책실장의 정신적 스승 헨리 조지 역시 주류와는 거리가 멀다.

물론 학자에게는 학문의 자유가 있고 학문적 소신은 존중돼야 한다. 그러나 하필 우리나라 경제정책이 학계에서 인정받고 세계적으로 입증된 주류이론 아닌 비주류의 논리에 좌우됐다는 건 비극이다. 그 결과가 ‘잃어버린 5년’이고 외환위기 이후 11년 만에 닥칠 경상수지 적자다.

포퓰리즘의 큰 특징은 정권이 선거에 의해 뽑혔다는 이유만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는 데 있다. 경제에선 시장은 물론 재정적자를 무시한 분배정책으로 나타나고, 정치에선 헌법과 사법제도 등 ‘선출되지 않은 권력’을 무시한 비자유적 민주주의로 군림한다. 민주주의가 자유의 제도화를 뜻한다면 그 제도를 박살내고 정권의 자유만 추구하는 게 포퓰리즘이다.

시장이 경제발전을 촉진할 가능성은 거의 없고, 재정건전성 정책 또한 나쁜 사마리아인의 요구이니 ‘세입을 초과한 지출’도 해야 한다는 장 교수의 주장은 지난날 남미를 말아먹은 포퓰리즘과 다르지 않다. 더욱이 그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의 손에서 중요한 결정을 빼앗아 선출되지 않은 기술 관료들의 손에 넘기는 건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일’이라고 했다. 참여정부가 숱하게 외쳐 온 주장과 기막히게 일치한다.

나쁜 정책에 죄 없는 국민만 피해

영국에 살고 있는 장 교수는 쉽고도 당연하게 연구 결과를 밝혔을 것이다. 하지만 국책연구기관조차 재정지출 억제를 권고한 이 땅에 사는 우리는 내 아이가 짊어질 나랏빚이 무섭다. 정당과 국회는 물론 헌법도 우습게 아는 정권을 만난 탓에 대통령선거가 코앞인데도 범여권 후보조차 감감한 우리는 올해가 무사히 지나갈지 두렵기 짝이 없다.

정부 개입을 강조한 비주류 경제학자들은 죄가 없다. 그러나 무능한 정부를 모신 죄 없는 국민은 피해가 막심하다. 만일 미국의 새 대통령으로 힐러리 로댐 클린턴 상원의원이 당선돼 장 교수 주장대로 보호주의를 채택한다면 당장 우리나라가 피해를 볼 판이다. 착한 경제학자는 있을지 몰라도 착한 경제학은 없다. 되는 경제학(주류)과 안 되는 경제학(비주류), 그리고 이를 이용하는 정치꾼이 있을 뿐이다.

김순덕 편집국 부국장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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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 글써서 밥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은 몇명 되지 않는다. 그런 이들 중에 이렇게 무식한 사람도 섞여 있다는 걸 알면 화가 나는 것도 당연하다. 더욱 화가 나는 건 '집단지성'을 자랑하며 평론가와 지식인들을 우습게 여기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네티즌들께서도 이런 무식한 소리를 그냥 지나치신다는 사실.

장하준 가지고 검색하다가 발견한 글인데, 나온지는 벌써 2주나 지났다. 하지만 잠깐 검색해본 바로는 이 글을 비판한 블로거는 없는 것 같다. 이건 관점의 문제가 아니라 팩트의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나쁜 사마리아인> 아직 안 읽었다. 하지만 장하준은, 경제정책에 관한 한 박정희가 옳고 김대중-노무현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경제학자다. <쾌도난마 한국경제>에 나오는 그의 주장을 정리하면 박정희는 반민주주의-반자유주의자고, 노무현은 민주주의-자유주의자다. 박정희는 전자는 틀렸지만 후자 때문에 경제를 발전시켰고, 노무현은 전자는 옳지만 후자 때문에 경제를 말아먹고 있다, <쾌도난마 한국경제>에 나온 장하준과 정승일의 대담을 도식적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영어로 쓰여진 <나쁜 사마리아인>에서도 역시 서문에 자신의 모국인 한국 경제가 발전한 이유를 서술하면서, 개발도상국에게 자유무역을 하면 경제가 발전할 거라고 우기는 선진국들의 위선을 폭로하고 있다고 들었다.

이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을 수는 있다. 김순덕이 언급한 영국 언론들이 그랬듯이. 하지만 장하준=참여정부 경제학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쾌도난마 한국경제>는 첫페이지부터 마지막까지 참여정부 경제정책을 까고 있는데,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