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many cuts should I rep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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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윤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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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에 해당되는 글 40건

  1. 2008/04/12
    두 개의 대체역사소설 (8)
  2. 2008/04/08
    진보신당은 대안이 아니다? 누구 마음대로? (9)
  3. 2008/01/17
    지역주의 뒤집어보기
  4. 2007/10/24
    김순덕 칼럼과 장하준 (30)
  5. 2007/09/19
    명박사신기 (3)
  6. 2007/09/17
    대선 정국에 관한 잡담 (14)
  7. 2007/08/31
    <디 워>의 흥행과 정치적 소비의 문제 (94)
  8. 2007/08/20
    <대한민국 개조론> 비판 : 2. 한미 FTA (26)
  9. 2007/08/20
    <대한민국 개조론> 비판 : 1. 구성 (3)
  10. 2007/07/12
    유시민의 장점 (23)

사실 1997년과 2002년 대선에서 김대중과 노무현의 '승리'는 엄청나게 많은 변수들이 조합된 기막힌 우연의 산물이었다. 그런 면에서 생각해보면 한국 사회는 '운이 좋았다.'라고도 말할 수 있겠는데, 최근에는 별로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당장 지금보다 더 좋은 세상이 되었을 것만 같은 두 개의 대체역사 시나리오가 떠오른다. 하나는 큰 사건에 대한 가정이고, 다른 하나는 그보단 좀 더 작은 사건에 대한 가정이다.


첫번째 가정은 아이러니하게도 아주 운좋은 일이라 여겨졌던 2002년 노무현의 당선.


2002년 당시로 돌아간다면 다시 노무현을 찍을 수밖에 없겠다는 사람들의 말에는, 동의한다. 그 당시 주어진 자료가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왕 한나라당 정권 5년을 견뎌내야 한다면 이명박보다는 이회창 쪽이 훨씬 나아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2002년의 이회창은 지금의 이회창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었다. 성향과 삶의 궤적이 전혀 다른 두 대선후보의 불꽃튀는 대결이 된 대선정국에서, 이회창은 진보 쪽 표를 흡수하려고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집권 초에 오히려 상대편을 안배하는 정책이 나왔으리라고 생각해도 어색하지는 않은 시점이었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무슨 짓을 할 수 있었던 간에, 한미 FTA가 그리 갑작스럽게 추진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야당이 결사반대했을 테니까. 그런 와중에 한나라당 경제정책이 전혀 서민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염증으로 그동안 야당정치를 통해 좀더 성숙한 민주당의 노무현이 2007년에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면, 이건 지금보다 나쁘기는커녕 훨씬 좋은 시나리오다.


이 역사소설의 아이러니는 노무현과 개혁당의 능력치를 높게 잡을수록 우리가 2002년 노무현의 당선이 그리 좋은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동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회창이 집권하자마자 구민주당계는 노무현과 개혁당을 탄압하려 했을 게다. 그런 상황에서 노무현-유시민-개혁당계는 가령 이라크 파병 같은 여당의 정책에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개혁적 유권자들을 결집해 나갔을 것이고... 이들이 이 결집을 통해 민주당을 서서히 바꾸어 나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면, 이 시나리오의 미래는 아주 좋다. 그 과정에서 지금은 통합민주당과 접점이 사라져버린 개혁적 지식인 그룹의 의견 역시 청취되었을 것이라고 본다면 말이다.


반면 노무현 그룹이 버티지 못하고 쓸려나갔을 거라든가, 버티긴 했으되 어차피 지금처럼 한나라당과 비슷한 경제정책으로 이행해 나갔을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정치공학을 생각해 볼 때 이건 좀 극단적인 가정일 것 같은데) 이 시나리오 역시 지금과 큰 차이가 없다. 재수가 없으면 이 시나리오에서도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는 일이 (민주당이 깨지지 않았으므로 박빙 승리였겠지만) 일어날 수 있다.


그러면 이 세계에서 민주노동당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일단 집권 초기에 분노에 찬 노빠들에게 조낸 밟혀서 사이트가 만신창이가 되었겠지. 이라크 파병할 때 "봐! 이게 다 너희들 때문이야!"라는 소리도 들었겠지. 우리 세계를 아는 사람 눈으로 보면 좀 우스운 상황이겠지만, 덕분에 민주노동당은 성장이 억압되어서 자주파에게 점거를 당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자주파들도, 민주당 비판적 지지론자와 민주노동당 접수론자로 양분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그렇기는 하지만 이런 군소정당의 운명은 작은 변수에도 요동치기 때문에 소설가가 그리기 나름이다.


두번째 가정은... 2004년 총선에서 지역구 의원으로 당선된 조승수가 같잖은 이유로 선거법의 제재를 받고 의원직을 상실하지 않았을 가능성이다.


9석의 정당과 10석의 정당이 의정활동에서 크나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는다. 문제는 자주파가 역시 민주노동당을 말아먹었다고 치고, 분당 정국에 들어섰을 때다.


조승수는 우리의 세계에서 선도탈당파였다. 그리고 저쪽 세계에서도 조승수는 선도탈당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지역구 의원은 탈당을 해도 의원직을 상실하지 않으니까. 노회찬 심상정이 나올 때까지 진보신당이 별다른 액션을 취하지 못했던 상황을 생각해 보라. 의원직을 유지한 조승수의 선도탈당은 지금과는 조금 다른 구조의 진보신당을 만들었을 것이고, 도전할 만한 지역구를 두 개에서 세 개로 늘렸을 것이며, 1명에 불과하지만 의원을 보유한 정당으로서의 진보신당은 우리 세계의 그것보다 훨씬 여론의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진보신당은 지금보다 아주 약간 더 좋은 성과, 즉 국회의원을 배출하는 성과를 냈을 확률이 아주 높다. 이건 득표수로 치면 아주 약간 더 좋은 성과이지만...... 그것이 미치는 결과로 치면 결코 작은 차이가 아니다. 이 생각을 하면 약간 속이 쓰린다.


부질없는 짓 같지만, 이런 상황을 상정해 보는 것은, 지금 우리가 처한 위치를 파악하는데 조금은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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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신당은 대안이 아니다 (이녁 님)


이글루스 유저가 아닌지라 누군가의 제보에 의해 글을 좀 늦게 보았다. 사실은 아직도 이런 논변이 있을 줄은 몰랐다. 이제는 과거처럼 '비판적 지지'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한 정국이다.


이녁 님은 대한민국은 우파국가이기 때문에 우파를 키워야 한다고 말한다. 재미있는 논변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체지방 과다라면, 그는 오늘 저녁 식단도 햄버거를 선택해야 하는 가보다. 지금 <슈퍼 사이즈 미> 찍으시나? 과도한 우파국가라면 좌파도 좀 있어야 겠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더 상식적이다. 이 상식을 뒤틀기 위해 이녁 님은 묘한 곡예를 시작한다. 그 곡예가 얼마나 타당하지 않은지는 이녁 님이 지적한 '시궁창 현실'을 같이 탐구하면서 말해보자.


진보신당은 노회찬 심상정 두 지역구가 당선되거나, 재수없으면 한 곳도 당선이 안 될 것이다. 맞다. 시궁창이다. 진보신당의 정당투표율은 3%를 넘지 못해 비례대표 의원을 당선시키지 못할 가능성이 많다. 3% 턱걸이 한다고 해도 1-2석 확보가 고작일 것이다. 맞다. 시궁창이다. 그런데 문제는 진보신당의 예상의석수가 낮다는 '사실'에서 어떻게 지지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오냐는 거다.


반한나라당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서? 말이 안 된다. 이녁 님의 글을 읽고 감명받은 누군가가 노회찬 심상정 두 지역구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를 찍는다고 치자. 그러면 그는 한나라당 후보의 당선을 도와주게 된다. 이녁 님의 글을 읽고 감명받은 누군가가 정당 투표도 통합민주당에 던진다고 치자. 그런다고 반한나라당 세가 커지는가? 그렇지 않다. 정당투표는 지지율에 따라 의석수를 배분하기 때문에 진보신당의 의석이 생긴다고 해서 한나라당의 의석이 늘어나지 않는다. 반한나라당 세력의 의석수는 (상황에 따라 한석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동일하게 유지된다. 그런데 뭐가 문제라는 걸까?


아니면 이런 얘기일까? 한나라당과 통합민주당이 대립각을 세우는 부분, 즉 가령 대운하, 영어몰입교육, 건강보험 당연지정제 같은 문제에서, 진보신당이 한나라당 편을 들지도 모른다는 얘기일까? 만일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반한나라당 세가 흐트러진다는 주장이 실천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이녁 님이라도 그렇게 생각하진 않으실 거다.


남은 것은 딱 하나, 진보신당과 그 지지자들(지식인을 포함해서)이 통합민주당 비판하는 것이 기분나쁘다는 것이다. 그게 냉소주의를 조장한다는 것이다. 나는 오히려 이 지점에서 이녁 님을 포함한 민주당 지지자들이 시궁창같은 현실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한나라당 과반의석 저지는 애저녁에 물건너 갔는데도 진보신당 압박하는 게 무슨 의미 있느냐는 소리까진 안 하겠다.)


민주당 지지자들은 참여정부가 실패했다는 평가가 늘어나고 냉소주의가 팽배한 이유를 조중동 등 수구언론의 공세와 좌파들의 비판에서(만)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2002년 참여정부는 분명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개혁을 바라는 이들의 지지를 받아 당선되었다. 2004년에는 탄핵 열풍으로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이 동반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그후 열린우리당은 정체성을 잃고 흔들거렸다.


이명박 이전에 '실용주의' 운운했던 정동영 등만 집어서 말하는 게 아니다. 열린우리당 내에서 가장 지지자들에게 어필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 유시민 장관 역시 마찬가지다. 지지자들도 인정하듯이, 그리고 널리 선전하듯이,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다른 무엇보다도 정치개혁이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 같다. 정치개혁을 첫번째 이슈로 생각한 나머지, 경제정책은 한나라당과 똑같아졌다. 임종인 의원은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이 이회창 후보의 공약대로 움직였음을 지적한바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스스로가 임기 말에 이렇게 말했다. "경제는 누가 해도 똑같다."고. 지금 이한구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은 이렇게 말한다. "참여정부가 쓸 수 있는 카드를 다 써버려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고. 이미 법인세 같은 걸 다 내려버려서 이명박 정부가 재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도 별로 없다는 얘기다. 그러니 억지로 성장률 높이려고 대운하나 파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도 말로는 진보, 그것도 좌파들을 비난하면서 유연한 진보를 자처했다. 국가전체의 경제성장률은 나쁘지 않았지만, 서민경제는 어려워졌다. 서민경제 어렵게 만들면서 스스로를 진보라 자처하니 당연히 서민들은 진보가 나라말아먹은 줄 안다. 민주노동당이라도 다른 이슈를 만들었어야 했는데 자주파가 잡고 있다 보니 열린우리당 따라 국가보안법 폐지 같은 이슈에나 전 당력을 집중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누가 해도 똑같은 그 경제'의 기조를 벗어나는 다른 것을 체험해 본 적이 없다. 그러니 이놈이 안 되니 저놈에게 기대를 걸어보는 것이고, 거기서 좌절하면 또 급속히 실망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해봤자, 정치권력 바꿔봤자 나아지는 게 없더라는 것이다. 이런 느낌이야말로 냉소주의를 불러온 것이다. 이게 참여정부 씹은 좌파지식인들 책임인가?


민주당 지지자들이 심히 싫어할 최장집 같은 사람이 (이 사람은 좌파가 아니다. 그냥 민주주의의 신봉자일 뿐이다.) 노회찬이나 심상정의 생환을 위해 유세장에까지 나오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적어도 진보신당은 국가 권력이 서민들의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해야 한다고 말한다. 좌파고 우파고를 떠나서 이것이 핵심이다. 대운하 파서 경제 살리겠다는 야바위를 믿을 게 아니라면, 빈곤층을 어떤 방식으로 지원해야 할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 서구 사회의 좌우파는 주로 이런 문제를 가지고 싸운다. 어떻게 돕느냐를 가지고 싸우는 거지, 빈곤층은 죽게 냅두라는 그런 법은 없다.


노무현 대통령과 유시민 장관이 한미 FTA 추진해놓고 비전 2030으로 복지정책도 늘리고 있다고 말한 것은 잘 알고 있다. 나는 비전 2030이 그대로 진행될 수도 없었을 거라고 보지만, 이미 이명박 정권이 그 계획을 폐기했고 민주당이 그에 대해 별다른 반발도 안 하는 상황이다. 손학규 대표는 대운하 반대 회동을 하자고 해도 종종 파토를 놓는다. 이게 무슨 '반한나라당'을 하자는 태도인가?


진보신당이 냉소주의를 유포하고 있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오히려 진보신당이야말로 냉소주의를 주적으로 삼아 싸우고 있다. 내가 좌파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진보신당의 지지를 호소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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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고는 프레시안에서 기획했던 "대선, 삐딱하게 읽기"에 보내기 위해 작성된 것인데, 이번 대선에선 도통 지역주의 문제가 이슈가 되지 않는 바람에 시의성을 찾지 못하고 묻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건대 총선에서도 지역주의가 이슈가 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현재 정치적 파벌들이 어떤 도형을 그리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른 글에서 말하게 되겠지만, 이 글은 그저 과거의 사건을 명확히 정리하고 평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똑같은 일이 일어나지는 않더라도, 과거의 사건을 세밀하게 평가하지 않은 사람들은 미래에도 비슷한 수법에 당하기 마련이지요.

2007년 12월쯤 작성된 글이니 시차를 감안하고 읽으셔야 겠습니다.


지역주의는 사라졌는가?


옛날 옛날에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이라는 정당이 있었다. 열린우리당의 지지자들은 민주당이 호남 지역주의 정당이라고 비난했고, 민주당 지지자들은 열린우리당이 영남 패권주의 정당이라고 비난했다. 그후 대선이 다가왔고 지지율이 지지부진하자 진절머리가 난 두 정당은 합당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합당은 쉽지 않았다. 민주당엔 열린우리당이 분당에 대해서 사과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었고, 열린우리당엔 민주당이 대통령 탄핵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 정당의 주요인물들이 두가지 사안에 대하여 애매하게 사과하는 가운데, 양당 국회의원들은 ‘제3지대’라는 것을 만들어 통합을 추구하기로 했다. 즉, 이 당도 깨고 저 당도 깨서 새로운 당에서 미팅을 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해서 대통합민주신당과 잔류 민주당이라는 당이 탄생했다. 분당과 창당의 마술적 힘 덕분에 이제 과거의 과오는 전혀 중요하게 언급되지 않았다. 대통합민주신당과 잔류 민주당은 최근 당대당 통합을 하기로 결정했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완전한 합방이 이루어진 것. 결국 이 와중에 ‘지역주의’ 이야기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지역주의에 관한 이야기가 대선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 지역주의가 사라진 걸까? 물론 그것이 ‘좋은’ 현상일리는 없으니, 사라졌다면 좋은 일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면 찝찝하다. 민주당 분당과 열린우리당의 창당, 그리고 대통령 탄핵, 게다가 그후의 논쟁들까지, 민주당과 열린우리당 사이의 갈등에는 국회의원들끼리의 권력다툼이라는 층위를 제외하면 언제나 지역주의가 ‘명분’으로 존재했다. 그것이 사라졌다면 얘기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단지 “그들은 지역주의를 핑계로 권력투쟁을 했다.”고만 하면 문제가 설명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양당의 지지자들조차 자기 당이 올바르다고 상대방을 비난했기 때문이다. 그 싸움들은 다 무용한 것이었을까?



지금 지역주의가 대선정국에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언뜻 생각해 볼 때 세 가지의 논리적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애초에 호남 지역주의의 문제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잘못한 세력은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이다. 둘은 원래 문제가 존재했지만, 그후의 사건들을 통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한다면 잘못한 세력은 민주당 지지자들이다. 나머지 하나는 두 세력의 이견은 여전하지만 대선 때문에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두 정당의 이합집산은 야합이 된다. 한나라당의 무엇에 대해 반대하는지도 모르면서 반한나라당을 외치는 촌극이 연출되고 있는 셈이다.



지역주의에 관한 문제는 담론적인 차원에선 전혀 정리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나라당 후보가 전국적으로 맹위를 떨치는 현재의 대선정국에서 정치세력화에 의미있는 담론은 아닐 것이다. 그것이 외면받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역주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당장 내년 총선이 다가오면 각 정파는 또 지역주의를 자기 입맛에 맞게 해석하여 자신의 정당성을 치장하는데 써먹을 것이다. 억압되었던 것이 귀환하면 더 무섭다. 그것은 이미 뒤틀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도 지역주의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이때, 다시 한번 저 논쟁을 발굴해서 정리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래야 다시 살아 돌아올 저 유령의 귀환에 맞설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지역주의에 관한 두 가지 시선


지역주의라는 담론에 대한 표준적인 이해는 다음과 같다. 일단 특정정당에 대한 영호남 각 지역의 몰표현상이 있다. 이 현상을 보고 사람들은 원인을 추리한다. 먼저 그것은 지역주민들이 자기 지역의 이익을 보장하는 정당에 투표하려는 경향을 의미한다. 가령 한 정당을 지지하면 그 정당이 어떤 개발사업을 특정 지역에 유치해 준다는 식으로. 만일 이런 이유로 한 지역의 유권자들이 한 정당에 몰표를 준다면, 그것은 ‘지역이기주의’로 불릴만한 것인데, 언제나 나쁘다고는 볼 수 없다. 민주주의 사회에선 누구나 이기적인 투표를 하도록 기대되고 있고 문제는 이기적인 투표의 총합이 어떤 결과를 낳느냐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매 선거마다 일어날 수는 없고, 새만금 사업이나 정선 카지노 사업 등의 경우가 증명하듯, 저 ‘개발사업’이 반드시 그 지역 사람들에게 두루 혜택을 주는 사업이라는 보장도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더 증명하기 쉽다.) 그래서 몰표현상에 대한 두 번째 원인 추리가 탄생한다. 지역몰표는 자기 지역 출신의 사람들을 공직에 많이 진출시켜 지역인맥을 형성하는 것을 의도한다는 것이다. 이때에 지역주의는 소수 지역 엘리트의 영달을 위해 전 지역민이 동원되는 허구적인 이데올로기로 파악된다.


만일 문제가 이렇다면 지역민들의 투표는 부도덕하거나 무능한 것이다. 그래서 문제를 이렇게 보는 언론들은 그간 민주주의를 좀먹는 망국적 지역주의에 대한 개탄을 문제의 해법(?)으로 알았다. 이 시선에 대항하는 사람들은 지역주의라는 용어가 적절하지 않으며 실제적인 문제는 호남차별이라는 인식을 보여주었다. 구체적으로는 강준만을 위시한 민주당을 지지하는 자유주의 평론가들로부터 그런 입장이 나왔다. 지역의 표 동원은 역사적으로 1971년 김대중을 떨어뜨리기 위해 박정희의 공화당이 조직한 것이다. 그후 광주민주화 항쟁과 3당합당을 통해 호남을 고립시키는 정치적 책동은 계속되어 왔다. 정치적인 탄압과 문화적인 호남차별 속에서 태생한 호남의 지역몰표는 저항적 지역주의로, 영남의 그것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것이라는 게 그들의 해석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도식에서 영남의 지역몰표는 부도덕하거나 무능한 것이지만, 호남의 지역몰표는 극우 정당에 대한 실체적인 저항이다.


편의상 전자의 시선을 A라고, 후자의 시선을 B라고 부르기로 하자. 지난 5년간 B의 입장에 선 사람들은 ‘노빠’와 ‘좌파’들이, 그러니까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의 지지자들이 수구세력과 동일한 A라는 시선에서 지역주의를 바라본다고 개탄해왔다. 그런 시각은 인터넷에 차고 넘치지만, 굳이 저서를 통해 확인하고 싶다면 김욱의 <영남민국 잔혹사>를 참조할 수 있다. 지역주의 문제에 관해선 노빠와 좌파들이 연합전선을 취해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가령 진중권은 열린우리당을 한번도 지지한 적이 없지만 열린우리당의 창당 자체는 올바른 일이라고 논평했다. 그런데 문제는 노빠나 좌파들도 2002년 이전에는 대개 B에 찬동하는 이들이었다는 점이다. 나는 여기서 하나의 가설을 세우고자 한다. 즉, 문제의 진실은 A와 B를 넘어서는 차원에 있다. 하지만 ‘노빠’나 ‘좌파’들은 B 시선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보이면 그것에 분개하고 A로 회귀해 버리는 일을 반복해 왔다. 대개 그들은 B가 고발하는 문제점들이 김대중 집권 이후로 그럭저럭 해소되었고 따라서 A 시선에서 잡힐 수 있는 문제만이 남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하여 양자 사이엔 소통이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분석적으로 바라본 지역주의


여기까지만 논해도 현명한 독자들은 지역주의라는 낱말 안에 너무 많은 현상이 녹아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투박하게 나눠보아도 그것은 지역몰표의 문제, 지역불균형의 문제, 그리고 호남지역에 대한 문화적 차별 혹은 경멸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물론 이 ‘지역주의 현상’의 세가지 측면은 각기 서로의 부분적인 원인이 되기도 하는 등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지만 이것들이 모두 하나의 원인을 가지는 현상인 것인지, 그러니까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세 가지에 해당하는 것인지에 대해선 확신할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은 오캄Ockam식으로 말할 때 ‘복잡한 진술들을 간편하게 생략하는 어휘’에 해당할 뿐이다. 이 현상들을 모조리 지역주의라는 이름 밑에 넣어두고 그것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그 자체로 ‘지역주의 현상’을 보전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저 두루뭉술하게 이해된 ‘지역주의’에 대한 비판은 “전국정당 건설이 지역주의 해체다.”라는 열린우리당식의 해법으로 귀결되기 쉽기 때문이다. (물론 저 명제는 한나라당을 통해 지역주의를 해체한 열린우리당의 위대한 업적을 상기시키고 있다.)


군사정권 시기에 분리통치를 위해 호남차별을 통해 지역몰표를 유도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하여 문화적 차별 혹은 경멸의 문제가 남아있다면 언제까지나 시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역몰표가 아직까지도 저 호남차별 의식을 통해 기능하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지금은 문국현 후보 캠프에 있는 김헌태 전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소장은 이제는 지역주의가 이념적인 문제로 고착화되었다는 견해를 피력한바 있다. 즉, 만일 영남인들이 햇볕정책에 찬성하는데도 한나라당을 지지한다면 뭔가 다른 이유를 따져봐야겠으나, 애초에 햇볕정책에 반대하는 영남인들이 한나라당을 지지하는데 다른 이유를 찾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고착화된 지역몰표는 실제로 지역민의 의식을 변화시켜 왔다. 그러므로 이제는 순진하게 ‘지역민들의 현명하지 못한 선택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식으로 접근해선 효력을 얻을 수 없다.


한편 지역불균형의 문제는 단순히 영남과 호남 사이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첫째로는 서울 대 지방의 문제요, 둘째로는 서울의 하위 파트너로서의 영남과 기타 지역의 문제다. 지역불균형의 문제를 호남의 문제로 치환시키는 데에서 어떤 노빠나 좌파들은 반감을 가졌던 것이 아닌가 싶다. 게다가 영남정권이 영남에 공단을 많이 지었다는 식의 이해는 경제학적으로 지지받기 어려운 감성적인 논변이다. 중화학 공업정책은 수심이 깊은 동해를 중심으로 추진될 수밖에 없었고, 국가의 책임은 그것이 추진되지 않은 지역을 고려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지 중화학 공업정책 자체에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한국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파워엘리트들을 인터뷰해보면 대개 경상도 사투리를 쓰더라는 문화인류학적(?)인 증언이 있다. 이 문제는 정치적으로 해결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서울대 신입생이야 지역안배를 하면 되고 중산층 역시 경제정책으로 육성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특정 지역 부르주아를 국가가 나서서 키우거나 탄압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출신성분이 비슷한 그들이 고만고만한 결정을 내리지 않도록 나머지 시민사회가 감시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리하여 김욱은 영남패권에 대해 말하기 연습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나는 그가 영남패권이라 부르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하는지 모르겠고, 그 무엇이 있다 해도 그게 말하기 연습이나 반영남 지역 몰표를 통해 극복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분석적으로 바라본 지역주의는 우리가 각각의 문제에 대해 각각의 해법을 추구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노무현과 열린우리당 역시 ‘영패’집단이라는 증오의 선동(?)을 통해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이다. 


열린우리당의 오류를 반성해야


한편 지역주의에 대해 철저하게 분석하는 것은, 지역주의 타파를 거의 존재의의에 해당하는 최대의 강령으로 내세웠던 열린우리당의 실패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다. 그들은 영남개혁세력과 호남개혁세력의 통합을 추구한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볼 때 우향우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차이의 차별점은 햇볕정책밖에 없다. 그렇다면 햇볕정책에 반대하는 영남인들이 열린우리당에 찬동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자 열린우리당은 크게 세 가지 공세를 펼쳐서 영남지역을 공략하려고 했다. 하나는 호남유권자에 대한 거리두기다. 물론 이것은 윤리적으로 볼 때 글러먹은 정치행위였다. 둘은 한나라당이 영남경제를 살리지는 못한다고 홍보한 것이었다. 앞서 우리가 분석한 지역몰표의 매커니즘을 따른다면 이 역시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다. 그것은 지역주의에 대한 지성적인 오류요, 전략의 실패이기도 하다. 이 두가지 공세는 주로 유시민을 통해 유포되었다. 이것들이 효력을 못 거두자 급기야 그들은 여당을 찍으면 지역에 도움이 될 거라고 주장하기까지 이르렀다. 주로 김혁규를 통해 경남지방에 유포되었던 이 주장은 주민들로 하여금 표준적인 지역이기주의 모델에 따라 투표하기를 권유하고 있다. 지역주의를 극복하겠다는 이들이 펼친 지역주의 공세. 그리하여 열린우리당은 지역주의에 관한 한 윤리의 파탄, 지성의 오류, 전략의 실패라는 위대한 삼위일체를 달성하였다.


지역주의가 문제가 된다면 그것이 다른 종류의 합리적인 정치행위를 가로막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당을 지지할 수 있는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그것을 통해 지역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만일 누군가가 “여러분, 지역을 보고 투표하지 말고 정당 마크의 디자인의 우수성을 보고 투표하십시오!”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를 미친 사람 취급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데 왜 “열린우리당이 영남에서 의석을 얻는 것이 지역주의 타파다.”라는 헛소리에는 많은 사람이 동의하는 것인가? 영남의 보수성을 해체하려면 각 정당이 햇볕정책 이외의 많은 사안에서도 정책적 변별점을 가지고, 그 정책들이 지역사회의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어필하는지를 충실히 설명해야 한다. 그쯤 되어야 유권자의 투표행태의 무능함을 설득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정론으로 돌아가 생각해보면 정당끼리의 변별점이 없기 때문에 지역주의라는 담론이 성립하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닐 것이다.


지난 5년을 돌이켜보면 비록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싸움이 희극에 가까웠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진지하게 동원되었다. 앞으로 같은 상황이 발생했을 때 우리는 비웃을 줄 알아야 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지역주의 논쟁을 찬찬히 돌이킬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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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 칼럼]장하준과 ‘착한 경제학자들’


드디어 우리도 세계적인 경제학자를 갖게 되는 모양이다. 영국에서 먼저 출간된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의 책 ‘나쁜 사마리아인들’에 대해 외국 언론에 잇따라 평이 나오고, 아직 책도 안 나온 미국에서 관심을 보일 정도다. 우리나라에선 지난주 번역돼 벌써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참여정부가 극찬한 이단 경제학

그런데 반응이 호의적이지만은 않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와 파이낸셜타임스는 “역사적 기록이 불확실하다” “역사적 교훈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과거 보호주의로 성공했으면서도 개발도상국에는 자유무역 자유시장을 강요하는 선진국을 ‘나쁜 사마리아인’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참여정부 식으로 해석하자면 ‘주류’ 보수언론의 악의적 보도가 아닐 수 없다. 2년 전 비슷한 논지의 장 교수 책 ‘쾌도난마 한국경제’를 읽었다며 국정에 응용했던 대통령이 안다면 내심 난처할 것 같다. ‘대못질’을 지시할 수도 없고.

시장과 세계화를 중시하는 주류 경제학계의 시각에서 장 교수가 비주류인 건 사실이다. 빈부격차 등 세계화의 부작용에 대해서도 주류는 교육과 직업훈련 일자리를 통한 해결을 찾는 반면, 비주류는 세계화나 신자유주의 반대를 주장한다. 글로벌 시장을 주도하는 미국에선 시장보다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학자가 많아야 15%여서 ‘이단(heterodox)’으로 불린다. 장 교수의 프로그램 역시 이들이 정보를 나누는 이단 경제학(heterodox economics) 뉴스레터에서 찾아볼 수 있다.

3년 전 대통령이 성장과 함께 가는 분배를 강조하며 거론했던 조지프 스티글리츠도 남미 포퓰리즘 부활에 한몫한 인물로 평가된다. 참여정부 경제를 설계한 이정우 전 대통령정책실장의 정신적 스승 헨리 조지 역시 주류와는 거리가 멀다.

물론 학자에게는 학문의 자유가 있고 학문적 소신은 존중돼야 한다. 그러나 하필 우리나라 경제정책이 학계에서 인정받고 세계적으로 입증된 주류이론 아닌 비주류의 논리에 좌우됐다는 건 비극이다. 그 결과가 ‘잃어버린 5년’이고 외환위기 이후 11년 만에 닥칠 경상수지 적자다.

포퓰리즘의 큰 특징은 정권이 선거에 의해 뽑혔다는 이유만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는 데 있다. 경제에선 시장은 물론 재정적자를 무시한 분배정책으로 나타나고, 정치에선 헌법과 사법제도 등 ‘선출되지 않은 권력’을 무시한 비자유적 민주주의로 군림한다. 민주주의가 자유의 제도화를 뜻한다면 그 제도를 박살내고 정권의 자유만 추구하는 게 포퓰리즘이다.

시장이 경제발전을 촉진할 가능성은 거의 없고, 재정건전성 정책 또한 나쁜 사마리아인의 요구이니 ‘세입을 초과한 지출’도 해야 한다는 장 교수의 주장은 지난날 남미를 말아먹은 포퓰리즘과 다르지 않다. 더욱이 그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의 손에서 중요한 결정을 빼앗아 선출되지 않은 기술 관료들의 손에 넘기는 건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일’이라고 했다. 참여정부가 숱하게 외쳐 온 주장과 기막히게 일치한다.

나쁜 정책에 죄 없는 국민만 피해

영국에 살고 있는 장 교수는 쉽고도 당연하게 연구 결과를 밝혔을 것이다. 하지만 국책연구기관조차 재정지출 억제를 권고한 이 땅에 사는 우리는 내 아이가 짊어질 나랏빚이 무섭다. 정당과 국회는 물론 헌법도 우습게 아는 정권을 만난 탓에 대통령선거가 코앞인데도 범여권 후보조차 감감한 우리는 올해가 무사히 지나갈지 두렵기 짝이 없다.

정부 개입을 강조한 비주류 경제학자들은 죄가 없다. 그러나 무능한 정부를 모신 죄 없는 국민은 피해가 막심하다. 만일 미국의 새 대통령으로 힐러리 로댐 클린턴 상원의원이 당선돼 장 교수 주장대로 보호주의를 채택한다면 당장 우리나라가 피해를 볼 판이다. 착한 경제학자는 있을지 몰라도 착한 경제학은 없다. 되는 경제학(주류)과 안 되는 경제학(비주류), 그리고 이를 이용하는 정치꾼이 있을 뿐이다.

김순덕 편집국 부국장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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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 글써서 밥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은 몇명 되지 않는다. 그런 이들 중에 이렇게 무식한 사람도 섞여 있다는 걸 알면 화가 나는 것도 당연하다. 더욱 화가 나는 건 '집단지성'을 자랑하며 평론가와 지식인들을 우습게 여기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네티즌들께서도 이런 무식한 소리를 그냥 지나치신다는 사실.

장하준 가지고 검색하다가 발견한 글인데, 나온지는 벌써 2주나 지났다. 하지만 잠깐 검색해본 바로는 이 글을 비판한 블로거는 없는 것 같다. 이건 관점의 문제가 아니라 팩트의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나쁜 사마리아인> 아직 안 읽었다. 하지만 장하준은, 경제정책에 관한 한 박정희가 옳고 김대중-노무현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경제학자다. <쾌도난마 한국경제>에 나오는 그의 주장을 정리하면 박정희는 반민주주의-반자유주의자고, 노무현은 민주주의-자유주의자다. 박정희는 전자는 틀렸지만 후자 때문에 경제를 발전시켰고, 노무현은 전자는 옳지만 후자 때문에 경제를 말아먹고 있다, <쾌도난마 한국경제>에 나온 장하준과 정승일의 대담을 도식적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영어로 쓰여진 <나쁜 사마리아인>에서도 역시 서문에 자신의 모국인 한국 경제가 발전한 이유를 서술하면서, 개발도상국에게 자유무역을 하면 경제가 발전할 거라고 우기는 선진국들의 위선을 폭로하고 있다고 들었다.

이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을 수는 있다. 김순덕이 언급한 영국 언론들이 그랬듯이. 하지만 장하준=참여정부 경제학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쾌도난마 한국경제>는 첫페이지부터 마지막까지 참여정부 경제정책을 까고 있는데, 그게 "참여정부가 극찬한 이단 경제학"이라고? 이정우 등과 같이 엮은 건 웃기지도 않다. 장하준은 이정우 등과 토론회에서 언제나 싸워왔고, 심지어는 그들보다 오히려 중앙일보 (고)정운영을 편들었을 정도인데.

도대체 이런 거짓말을 늘어놓을 수 있는 강단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간단하다. 꼰대들은 동아일보는 읽지만 책을 안 읽고, 애새끼들은 인터넷은 하지만 책은 안 읽으니까. 그리고 책을 읽는 1만명 가량의 사람들 중에 인터넷에서 활동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설령 활동해봤자 무시당하기 일쑤니까. 기껏 이 칼럼을 비난한 네티즌 의견은 '참여정부 잘했다' 운운이다. 네티즌이 '무지'한 언론을 교정하고 싶다면, 적어도 그보다는 더 '유지'해야지. 이건 뭐 우리 다 같이 무지하니 니가 그 회사에서 돈받는거 인정할 수 없다는 '하향평준화' 논리도 아니고. (하긴 그런 논리도 성립하긴 한다.)

유시민의 <대한민국 개조론> 등식 박정희=노무현=한미 FTA
김순덕의 '착한 경제학자들' 등식 박정희=신자유주의↔노무현?  

정말 대한민국을 양분하는 정치적 세력의 경제인식이 이 모양이니. 나라꼴 좋다.

두줄요약:  남 욕하는 건 안 말리겠는데, 제발 남의 총알 뺏어들고
              자기 거라고 우기지는 말지 말입니다.

 


P.S
"만일 미국의 새 대통령으로 힐러리 로댐 클린턴 상원의원이 당선돼 장 교수 주장대로 보호주의를 채택한다면 당장 우리나라가 피해를 볼 판이다."
-> 힐러리가 FTA 비준 거부해준다면 나는 덩실덩실~

P.P.S
"되는 경제학(주류)과 안 되는 경제학(비주류)"
-> 설마하니 알고도 거짓말한 거라고 좋게 이해해 주려고 했는데, 이런 구절을 보니 일부러 거짓말 했다 해도 김순덕은 무식하고 천박한 사람이다. 경제학자 개인의 입장에서, 주류경제학이 되는 경제학이고 비주류 경제학이 안 되는 경제학일 수는 있다. 아무래도 주류 쪽이 교수자리가 더 많을 테니까. 하지만 주류가 한 나라 경제를 되게 하고 비주류가 한나라 경제를 말아먹는다는 견해는 성립하지 않는다. 학문적인 관점에서 주류와 비주류를 저렇게 나누는 건 중심화가 지나치게 심한 한국 땅의 관점에 뇌수를 푹 절여서 살다보니 기본개념이 마비되어서이다. ('15%'를 우습게 아는 것도 지극히 한국적이다.) 가령 의학에서 어떤 병에 대한 주류 견해와 비주류 견해가 있다고 쳐보자. 그 비율이 85% 대 15% 쯤 된다고 치고. 그럼 그때 주류 견해는 '사람 치료하는 견해'이고 비주류 견해는 '사람 더 아프게 하는 견해'인가? 지금 장난하나? (그렇게 썼다간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할 게다.)

P.P.P.S
......덕분에 저는 아주 가끔 이런 식으로 스트레스나 푸는 용도로 블로그를 유지하기로 하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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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박사신기.

싱크로율이 꽤 좋다. 내용상 '까'가 아니라 '빠'가 만들었을 것같긴 하지만 너무 웃긴다. '까'가 비웃으려고 만들었을 법한 콘텐츠지만, 실은 '빠'가 만든 것이라니. 뭔가 웃음을 날로 먹는 느낌이다. 이건 <태왕사신기>와 이명박을 동시에 농락하고 있지 않은가.

한국인들은 이번 <디 워> 사태에서도 드러났듯이 풍자에 대한 관용이 별로 없어서 풍자가 발달을 못 했고, 게다가 무언가를 지지하는 방식이 촌스럽기 짝이 없기 때문에, 종종 '까'가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한 콘텐츠가 '빠'가 만든 것인 경우가 있다. 가령 탄핵정국 때 로마병사 갑옷 위에 노무현 얼굴을 그려놓고 "왕을 구하러 가자-"고 선동하던 짤방. 노빠들을 비웃으려고 만든 짤방이 아니라 실제로 노빠가 만든 것이었다. <왕의 귀환> 포스터에 노무현 얼굴을 합성한 짤방도 있었는데 헌법재판소 판결 이후 대통령이 복귀하던 날 유시민은 그것을 크게 출력해서 액자로 만들어 대통령에게 선물했다. 우린 이런 나라에서 살고 있다.

그런 문화적 토양 위에서 <디 워>를 조소한 뉴욕타임즈 기사를 <디 워>를 칭찬한 기사로 착각하고 퍼다나르는 디빠들의 행위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나마 '고도의 까'라든가 '고도의 빠'라는 말을 종종 사용하는 디시 친구들이 풍자문화에 익숙한 것 같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너무 웃기다. 이런 거라도 보고 웃지 않으면 대선정국을 바라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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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국현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해요?”라는 질문을 두 서너번 받은 적 있다. 언제나 농담처럼 “유시민 지지하는 사람들보단 훨씬 낫지 뭐.”라고 말하며 지나갔다. 문국현과 유시민은 2002년에 노무현을 지지했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두 개의 선택지로 보인다. 물론 그 시절 노무현을 지지했던 사람들 중의 다수가 이명박을 지지하거나, 정치냉소주의자로 돌아섰겠지만, 일단 그 사람들은 논외로 치자.


참여정부 노선이 올바르고, 잘 해왔고, 앞으로도 잘 통할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 유시민을 지지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유시민은 대선출마를 포기하고 이해찬 캠프로 들어가 버렸지만, 이해찬보다는 유시민이 더 ‘친노노선’을 본질적으로 표현한다. 이해찬은 유시민보다는 좀 더 대중적으로 가겠다는 것에 불과하다. 이런 사람들은 정치적인 문제에 있어선 나의 ‘적’에 해당한다. 언제나 그들은 한나라당이나 조중동을 핑계로 볼멘소리를 하고 있는데, 적어도 지금 현재 나라를 말아먹고 있는 것은 조중동이나 한나라당이 아니라 참여정부다.


반면 문국현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참여정부 노선이 올바르지 않거나, 설령 올바르더라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지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 사람들 역시 반성적 성찰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다. 문국현을 띄우는 방식은, 예전에 그들이 노무현을 띄웠던 방식과 매우 흡사하다. 다만 이번엔 잘 되지 않고 있고, 성공할 확률이 극히 드믈다는 것이 다를 뿐. 이를테면 그들은 노무현이 실패하긴 했지만 그를 선택한 그들의 판단은 옳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다.


나 역시 2002년으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노무현 대통령’이 재앙이 될 거라는 사실은 예측하지 못할 것이다. 그때는 이런 식으로 생각했다. ‘사실 이렇게 검증이 안 되어 있고 장관 잠깐 해본 정도의 커리어를 지닌 사람을 대통령으로 민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긴 하다. 보수적으로 판단한다면 이회창 쪽이 훨씬 낫다. 하지만 그래도 노무현이라는 인물은 괜찮은 것 같고, 잘 할 것이다.’ 그 판단은 틀렸다. 그렇다면 저 판단의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


사람보는 눈이 크게 바뀐 건 아니기 때문에, 문국현 역시 꽤 괜찮은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잘 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일단 문국현 주위에 몰려오는 사람들은 문국현만큼 신뢰가 가지 않는다. 그리고 문국현 역시 세력을 쌓기 위해 참여정부에 긍정적인 평가를 하려는 의도가 보이는데, 그렇다면 그를 지지해야 할 이유가 없다. 참여정부가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해찬을 지지하면 된다. 그 바깥을 두리번두리번하는 사람들은 참여정부가 점유하고 있는 ‘개혁’이라는 단어를 뺏어서 올바른 맥락으로 되돌리고 싶은 사람들이다. 문국현이 그 일을 하지 않겠다면, 굳이 대통합민주신당 바깥에 있을 필요도 없다. 너무 기준이 엄격하다고? 하지만 후보 때도 지지자말을 안 듣는 정치인이 대통령이 된 후에 지지자말을 들을 리는 없다. 더 힘센 친구들과 손을 잡기 마련이지.


문국현에 대한 내 관심은 대략 두 가지 정도다. 김헌태 전 한국여론연구소장은 거기서 무슨 역할을 할 것인가. (아시는 분들이 별로 없겠지만 나는 몇 년 전부터 이 사람을 주목해왔다.) 그리고 열린우리당 탈당 1호 임종인 의원은 문국현 캠프로 갈 것인가, 안 갈 것인가. (열린우리당이 지지층인 서민을 배신했으므로 지지층을 대변할 새로운 정치세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임종인 의원은, 실제로 만나본 바로는, 비록 매우 지적이거나 분석적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뭔가 강준만처럼 강단 있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 모두 나는 딱 한번씩밖에 못 봤지만.)


문국현을 지지하는 걸 잘 하는 짓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데, 설상가상으로 이제는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것을 크게 칭찬할 수도 없다. 민주노동당의 대선후보로 권영길이 선출되었다. 권영길이 민주노동당을 지금까지 이끌고 온 공로는 인정하지만, 그가 연겨푸 세 번이나 대선에 출마할 만큼 대단한 정치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현재의 권영길은 ‘노욕’을 부리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가 ‘아름다운 퇴진’을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가끔은 개인의 선택이 정국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도 그렇다. 권영길의 선택은 한국 정치에 하나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어느 정도 효과냐 하면... 한미 FTA나 민주당 분당 등 굵직굵직한 그림자를 드리우신 노무현 대통령에 비하면 약소하지만, 2002년도에 강준만이 진중권과의 연대를 파토내 버리는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의 효과 정도는 된다.


현재의 민주노동당이 훌륭한 진보정당이라고는 볼 수 없다. 민주노동당은 적어도 1) 낡은 NL세력의 ‘북한 정권 온정주의’에서 탈피해야 하고, 2)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에서 거리두기를 하면서 비정규직을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정당이 되어야 한다. 노회찬이나 심상정이 후보가 될 경우 적어도 이 숙제를 해결하려는 척은 했을 것이다. 하지만 NL의 지지를 받으며 당선된 권영길은 그렇지 않다.


민주노동당은 언제나 당이 잘못된 길을 갈 때마다 위기의식을 느낀 평당원들이 세력을 모아 목소리를 내려고 시도했던 자그마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지금도 그러한 움직임은 일부 보인다. 나한테도 어느 분이 좀 도와달라고 연락이 왔는데, 솔직히 어느 정도 도와줘야 할지는 모르겠다.


연초에 나는 올해 대선정국에선 할 일이 없다고 불만을 토로했는데, (386에 대한 냉소, 냉소 바깥) 지금 상황도 딱 그 불만에 맞게 돌아가고 있다. 이럴 때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정말로 이번 학기에는 그 누가 잡아끌어도 이렇게 생산성이 없는 대선에 신경쓰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당이나 정치인 위주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지금 정치권에 요구해야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점검해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렇게 요구를 점검해 보면 이 요구를 들어줄 수 있는 새로운 정치세력을 고민하게 되거나, 적어도 이 요구사항이 논쟁거리가 될 수 있는 정치지형도를 만들기 위해 통밥을 굴리게 된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정치에 요구를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88만원 세대>를 보면 대충 답이 나온다. 해결하라고 요구해야 하는 문제는 ‘양극화’이긴 한데, 이 양극화가 어찌하여 발생했는지가 내가 이해한 이 책의 주제다. 양극화가 문제라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고 이명박도 이해찬도 권영길도 자신이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양극화가 어떻게 발생했는지 알고 있을까? 이 책의 내용에 따르면 한국 경제는 진화론적 다양성을 말살하고 소수 그룹을 공룡처럼 대형화시키면서 근근이 버티고 있는 왜곡된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러다간 쥬라기 말년에 공룡들 멸종하듯 한큐에 사라질 수 있다는 게 이 책이 전하는 위기의식이고. 그리고 이 공룡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이 참여정부이기 때문에, 이 책을 이해하면 한나라당 집권 막아달라고 호소하는 노빠들의 호소에 귀를 막을 수 있게 된다. 문국현은 그래도 좀 구별되지만, 그가 과연 노빠들로부터 완전히 거리를 둘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품고 쳐다보게 되고.


<88만원 세대>와 <샌드위치위기론은 허구다>는 같이 엮어서 이해해야 할 책이라고 볼 수 있는데, 굳이 편의적으로 구별하자면 <88만원 세대>는 문제제기 쪽에 치중해 있고, <샌드위치위기론은 허구다>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과학’을 동원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하지만 <88만원 세대>에도 문제해결을 위한 제언이 나오고, 물론 <샌드위치위기론은 허구다>에서도 문제제기는 나온다. <88만원 세대>는 20대의 암울함을 키워드로 내세워서 여론의 주목을 받았지만, 이 책을 단순히 세대론으로 읽는 것은 잘못 읽는 것이다. 책을 읽어도 그렇게 읽으면 인생에도 정치에도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20대가 맞이할 암울한 미래는 하나의 흐름이 만들어낸 예측가능한 결과일 뿐이다. 한국에서 20대의 암울함은 ‘재벌 이외 기업’의 암울함이나 지방의 암울함 등등과 같은 선상에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되 ‘과학적’으로 해보자는 게 이 두 권의 책이 이야기하는 바라고 볼 수 있다. 한미 FTA로 문 열어젖혀놓고 “그렇게 자신감이 없습니까?”라고 말하는 노무현이나 “헐리우드와 맞짱뜨겠습니다. 안 된다는 건 패배주의입니다.” 따위의 헛소리나 늘어놓는 심형래는 과학이 아니다. 그들의 ‘의지력 논증(?)’은 전형적인 속류 심리학에 기초해 있다. 한국 기업이 기술이 좋은 이유는 젓가락을 써서 그렇다는 식으로 말하는 이어령의 그림자에 불과한 속류 문화인류학도 과학이 아닌 건 마찬가지다. 이런 잣대로는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이 이야기들은 책에 나오는 건 아니고 내가 갖다붙인 거다.) 문제는 한국의 40-50대 남성들은 그런 것 이외에는 무슨 학문이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는 거다. ‘반지성주의’라고 이름을 붙이는게 좀 민망한 구석이 있는 것이, 그들은 “한국인은 젓가락 쓰느라 손재주가 좋아서 기술력이 좋다.”라는 수준의 명제를 ‘지성’적인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 외에 뭐가 또 있는지를 모른다. 그러니까 노무현이 나오고 황우석이 나오고 심형래가 나온다. <디 워>나 <트랜스포머>나 별 차이가 없다고 진지하게 믿는 디빠들이 생긴다. 그리고 물론 40-50대 남성의 자식들도 아버지의 지성을 뛰어넘지 못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들보다는 더 공부를 해야하고, 생각을 더 많이 해야 한다. 이 두 권의 책들에서 그런 교훈을 얻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의 독서는 성공이다.


이를테면 지금의 상황은 정치적인 관심을 정치적인 지지로 표출하기는 민망한 상황이다. 한명 한명이 더 똑똑해져야 한다는 원론적인 말을 할 수 있고, <88만원 세대>같은 책을 권하거나, 권한 후에도 그들이 그 책을 ‘잘못’ 읽지 않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조금 더 구체적인 일이 있다면, 정치권의 이슈에 한미 FTA나 양극화 문제 등이 포함되도록 노력하고, 그 이슈에 관련된 토론에 좀 더 지성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오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실제로 단순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이 사실 자체는, 우리에게 남겨진 희망의 약소함을 보여준다. 당장 지금 할 일은 없다. 기본기를 쌓으면서, 정신차리고 시대 돌아가는 꼴을 쳐다보면서, 조금이나마 할 일이 생기는 걸 기다리는 것이 할 일이라면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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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든 영화든 소설이든, 어떤 대중문화 텍스트가 흥행을 하면, 그것의 수준을 논하기 전에 그것이 어떤 부분에서 대중의 욕망을 꿰뚫고 있는지를 분석하는 것이 문화비평의 기본이다. 그런데 <디 워>의 경우 흥행 이전에 ‘디 워 현상’이 존재했기 때문에 (개봉 이전에 영화 잡지 사이트와 기자들에 대한 조직적인 덧글 공세가 있었다.) 이것을 논하기가 힘들어진다. 단순히 그 텍스트 안에 대중의 욕망을 꿰뚫은 것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진중권은 <디 워>의 흥행요인을 민족주의, 애국주의, 인간극장, 시장이라는 네 개의 코드로 분석했지만, <디 워>의 팬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물론 진중권의 말대로 <디 워>의 팬들은 사실상 진중권이 분석한 틀 안에서 발언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영구 없다’를 반복하는 이유가 있다면, 진중권이 그 코드를 텍스트 안에 위치한 것이라고 판단한 반면, <디 워>의 팬들은 그것이 ‘코드’가 아니라 텍스트 바깥에 위치한 현실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디 워>의 흥행은 ‘정치적 소비’의 결과라고 봐야 한다. 유럽에서 ‘정치적 소비’라는 것은 가격경쟁력이나 품질경쟁력이 아닌 다른 정치적 요인에 의해 소비할 상품을 결정하는 소비자들의 행태를 의미한다. 가령 유럽의 노동자들은 노동자에 대한 처우가 좋은 기업의 제품을 소비함으로써 연대의식을 과시하고 장기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복리후생을 도모한다. 또 많은 유럽의 시민들은 친환경적인 기업의 제품을 소비함으로써 생태주의에 대한 지지의사를 드러낸다.


한편 한국에서는 유럽과는 다른 종류의 비경제적 소비 행태가 존재했다. 바로 박정희의 산업정책에 부응하는 소비였다. “국산품을 애용하자.”로 대변되는 이러한 소비형태를 ‘정책적 소비’라고 부를 수 있을 텐데, 크게 보아 ‘정치적 소비’로 봐도 될 것 같다. 유럽과 한국의 차이가 있다면 유럽에서는 비경제적 소비의 판단의 준거가 개인의 정치성이었지만, 한국에서는 독재자의 산업정책이었고 이에 대한 시민들의 자발적/비자발적 호응이었다는 것일 테다.


<디 워>의 애국주의에 대한 평론가들의 비판이 시민들의 냉소에 부딪힌 이유를 분석해 보자. 그들은 평론가들에게 그러는 너희들은 왜 한미 FTA를 반대했으며 스크린 쿼터에 찬성하느냐고 묻고 있다. 이런 의문은 ‘논리적으로는’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가령 변희재가 진중권을 까면서 한미 FTA 운운했을 때 나는 여기에 대해선 대꾸할 가치조차 없다고 보았다. 그의 머릿속의 정신병까지 내가 해석해 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논변이 많은 사람들에게 먹힌다면 대꾸할 가치가 있는 문제가 된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분석이 필요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들은 <디 워> 관람을 한미 FTA 찬반이나 스크린 쿼터 찬반과 동등한 ‘정책적 선택’의 문제로 파악하고 있다.


물론 모든 <디 워> 비판자들도 이 사실을 어렴풋이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디 워>의 텍스트의 문제와 컨텍스트의 문제를 구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진중권을 포함해서 그 누구도 이 문제를 말끔하게 개념화하진 못한 것 같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디 워>는 텍스트의 면에선 다른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혹은 괴수영화와 비교되어야 한다. 한편 <디 워>에 묻어난 심형래의 “한국 영화 산업 키우기”라는 정책은 다른 종류의 정책들과 비교되어야 한다. 양자는 범주가 다른 문제다. 전자의 범주로 <디 워>를 아무리 비판해봤자 <디 워>의 많은 지지자들이 동의하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인 것 같다.


박정희 시대 그의 산업정책에 부응한 시민들의 정치적 소비는 한국 경제의 성장을 가능하게 했다. 즉, 그것은 성공을 거두었다. 유시민의 말처럼 박정희를 ‘성공한 독재자’로 보지 못할 사람들이라도, 그의 산업정책이 그 시대에 성공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이 시민들의 정책적 판단에 의한 선택은 아니었다는 점인데, 물론 박정희 당시에는 결과가 좋으니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이제 와선 시민들이 정책적 판단을 내리는데 장애가 되고 있다.


<디 워> 네티즌과의 맞장토론에서 진중권이 황우석 사태와의 유사성을 언급하자, ‘아나키스트9’이라는 아이디를 쓰는 네티즌은 꽤 흥미로운 말을 했다. “황우석 사태를 통해서도 대중들이 학습효과가 없다고 말씀하시는데.... 결과론적인 얘기인 것 같습니다. 황우석이 옳았다면 그런 소리 못하실 겁니다.” 물론 이 말은 엉터리다. 진중권은 결과론적인 얘기를 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발언에 대해 신뢰를 하는 과정이 너무 단순하다는 과정의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정책적 판단을 내리는 습관이 들지 않은 사람들로서는, 그 과정의 문제가 번거로울 수밖에 없고, 하나의 정책을 화끈하게 제시하는 사람들에 대한 옹호로 정치적 소비가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황우석의 경우는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