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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5
[씨네21/유토디토] 스타리그 예찬 (11)
- 2008/01/18
정치학자 최장집은 최근의 촛불시위에 대해 ‘정당정치의 부재’가 만들어낸 사건이라 진단했다. 결국 정당정치 강화가 해답이라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진단을 “이제 그만 촛불을 꺼야 할 때”라는 주문으로 받아들였고, 분개했다. 왜 현 시점에서 ‘촛불시위 반대’로 오인받을 만한 주장을 개진하느냐는 것이다. 한마디로 지금 그런 얘기를 할 ‘맥락’이 아니라는 것인데, 내 생각은 다르다. 나는 최장집의 주장에 분명 ‘맥락’이 있다고 본다. 가령 오마이뉴스에서 시위군중의 모습을 비추는 대형 전광판을 동원할 때, 거리에 저 유명한 ‘전대협’의 깃발이 등장할 때, 나는 87년의 스펙터클을 재현하려는 어떤 욕망을 본다. 이 욕망은 우리에게 도움이 될까? 최장집의 말대로 87년은 정치제도의 변혁이라는 관점에서는 성공한 사례라고 보기 어려운데 말이다. 이번에도 ‘운동’과 따로 노는 정치를 만들 것인가?
87년의 사람들이 ‘민주주의=대통령 직선제’라고 믿었다면, ‘again 1987’의 감상에 젖은 어떤 이들은 ‘민주주의=국민소환제’라고 믿는 것 같다. 87년에 사람들이 민주주의가 대통령 직선제만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님을 이해했다면 세상은 더 나아졌을 것이다. 더군다나 87년과 달리 지금의 촛불시위는 한두 가지 제도의 변혁을 성취하기도 벅찬 처지다.
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직접민주주의가 이상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것이 어렵기 때문에 간접민주주의가 실시된다. 그러므로 직접민주주의의 요소를 담은 정책을 추구하는 것은, 무조건 정당한 흐름이다.” 그리 현명한 생각이라 보기 어렵다. 굳이 ‘민중의 자기 지배’라는 민주주의의 원리로부터 따진다면, 대의제뿐만이 아니라 다수결조차 문제가 된다. ‘만장일치적 직접민주주의’가 아니라면 자율성과 국가의 권위를 양립시키는 민주주의의 이념을 온전히 실현할 방법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상을 조금이라도 실현하려는 정책이 올바른 것이 될까. 오히려 오늘날의 많은 정치학자들은 만장일치를 유도하는 의사결정에 파시즘의 우려가 있다고 볼 것이다. 가령 정당정치는, 이견과 갈등을 드러내려는 장치로서 만장일치제에 모순된다. 그러므로 정당을 해산하는 것이 더 민주주의적인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이며, 천상의 제도가 아닌 세속적인 이해관계의 타협의 산물이다. 설령 어떤 직접민주주의적 요소를 지닌 정책이 도입된다 해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본질적인’ 민주주의로 이행할 수 있다는 착각을 버려야 한다. 나는 최장집이 우려한 낭만주의가 그러한 착각이라 생각한다. 결국에는 국민소환제 역시 이 제도가 어떤 효용을 지닐 수 있는가라는 측면에서 논의되어야 할 뿐이다.
다시 문제는 정치다. 촛불시위에 거는 희망의 총량을 감소시키는 것은, 떨어지는 한나라당의 지지율을 제 것으로 가져가지 못하는 타 정당들의 한심한 역량이다. 시위를 지도하려다가 욕먹은 민주노동당과 얌전히 시위를 따라다니면서 ‘아고라의 여당’이라 불리게 된 진보신당의 길을 넘어, 시민들의 욕망을 정치적 지향으로 전환하는 설득에 성공하는 그런 정당과 그런 정치인이 필요하다. 그게 최장집이 은퇴 강연에서 말한 ‘카리스마적 정치인’의 역할이 아닐까. 지금 정당이 촛불시위에 결합해야 한다면 그것은 아직 그런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고, 거리의 대중과 호흡하면서 그런 능력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욕망을 가진 이가 없다면 무슨 수로 우리가 정치에 희망을 걸 수 있겠는가.
| [씨네21/유토디토] 촛불시위, 그리고 정치 (7) | 2008/07/18 |
|---|---|
| [씨네21/유토디토] 한-미 FTA (5) | 2008/06/27 |
| [펌] 최장집 / 촛불집회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7) | 2008/06/18 |
| 이명박과 폭력시위, 그리고 주민소환제 (13) | 2008/06/08 |
| 촛불시위에 있는 것과 이끌어 내야 할 것 (12) | 2008/06/07 |
| [링크] 시국판단 + '축제'와 탈진을 넘어 (16) | 2008/06/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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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네21/유토디토] 촛불시위, 그리고 정치 (7) | 2008/07/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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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네21/유토디토] 한-미 FTA (5) | 2008/06/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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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이 너무 빨리 변하죠. 가두시위가 시작되고, 20대들이 시위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기 이전에 쓰여진 글입니다. 이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원고는 잡지가 나간지 2주 후에 인터넷판으로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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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시위에 나온 10대들을 상찬하다가 “그런데 20대는…”이라고 비판하는 게 요즘 유행인 모양이다. 386들의 술자리에서 무럭무럭 자란 풍문은 실체없는 허깨비마냥 떠돌더니 급기야 “십대는 촛불시위하는데 대학생들은 원더걸스에 열광해”류의 기사를 만들어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원더걸스에 열광한 대학생들 중에선 촛불시위에 나간 사람이 없었을까? 촛불시위에 나선 십대 중에선 연예인에 열광한 친구들이 없었을까? 이 정도 수준의 보편화(?)가 합당하다면 내 눈에 보이는 풍경은 이런 것이다. ‘아내와 아이들은 촛불시위에 나가고 있는데 자신은 술을 마시며 20대나 씹고 있는 어느 386 남성.’ 제발 이렇게 유치하게 놀지 말았으면 좋겠다.
10대들의 목소리는 광우병 정국을 넘어선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 밀착한 문제에서 정치성을 느꼈고, 그 모든 것을 지금 현장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지적했듯이 그들은 광우병 문제뿐만 아니라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에 대한 불만도 털어놓고 있다. 그런데 왜 하필 그들은 쇠고기 문제에서 폭발한 것이었을까? 이 문제가 ‘약한 고리’였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물론 지금도 장학사와 교사들이 그들을 잡으려고 거리를 헤매고 있지만, 교사와 학부모들은 오히려 교육정책에 대해 당사자인 십대가 발언권을 행사하겠다는 선언을 더 불편하게 받아들였을 거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고, 부모의 승인을 받을 수 있는 전략적 목표를 타격했다. 훌륭한 일이다. 하지만 소녀들이 대통령을 궁지로 몰아넣었다고 기성세대들이 희희낙락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정치적이라고 상찬받는 그 청소년들이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고, 그 부조리에 저항할 권리 역시 철저하게 억압받는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라. 나는 그들이 거리로 나올 권리를 지켜주고, 그들의 ‘말’을 주의깊게 듣는 것이 ‘어른들’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10대와 20대 모두를 타자화시키는 10대 예찬론은 그런 의무를 다하고 있는 걸까? 나는 그 예찬이 왠지 386세대의 정치적 무기력을 숨기기 위한 자조적인 행동으로 보인다. 설령 이명박이 탄핵되더라도 박근혜가 대통령이 될 그 현실을 견디기 위해서, 그들은 10대에게서 희망을 보아야 할 것이다. 10대가 실제로 무엇을 생각하든 말이다.
‘20대의 보수성’이란 말은 ‘20대의 원자화’라는 표현으로 고쳐져야 한다. 학부제 실시 이후 혼자서 대학을 다니는 대학생들은 청소년들만큼도 조직화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그들은 2002년과 2004년의 촛불시위에 거리로 나온 경험이 있다. 이번에 그들이 시큰둥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지에 대해서도 고민해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바람과 참여에 정치권이 얼마나 무관심한지를 느꼈고, 그리하여 급속하게 냉소주의로 돌아섰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정말이지 참여정부의 공로가 혁혁했다. 이런 ‘과거’를 상기한다면, 슬프게도 오늘 거리로 나온 10대들이 훗날 그런 20대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물론 나도 안 그랬으면 좋겠다). 그때 개혁세력을 지지하는 우리의 기성세대들은, 오늘의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다시 새로운 10대를 예찬하고 있지 않을까? 또 한번 20대들을 안주로 삼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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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주간 너무 뜨거웠던 사안인지라, 잡지에 실린지 2주나 지나 인터넷판에 올라온 내용을 올리려니 뭔가 굉장히 옛날 글 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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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의 쇠고기 협상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다. 이명박 정부에 억울한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그들의 말대로 이 협상은 참여정부에서 수립한 일정을 일관성있게 중단없이 진행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혁신도시는 계승 안 하겠다는 그들이 자신들의 판단에 대한 책임을 참여정부에 떠넘긴다면 그것도 우스운 일이다. 이 논변으론 누리꾼이 참여정부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했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는 있어도 현 정부의 책임을 덜 수는 없다.
광우병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조소하는 이들의 말처럼 협상 반대론자들이 유포하는 광우병에 대한 공포는 ‘과장되어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이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조건없는 수입의 정당성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피뢰침을 세워도 재수없는 사람은 벼락에 맞아 죽고, 피뢰침을 안 세워도 대부분의 사람은 벼락과 상관없는 일상을 살아가지만, 이 경우 확률을 계산하여 피뢰침 건립에 들어가는 비용을 아까워하는 것이 ‘과학적인’ 태도이겠는가. 물론 한국인들의 안전불감증은 일상화되어 있고 그들이 미국산 쇠고기에 평소보다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겠지만, 이 경우 해야 할 말은 ‘다른 사안에 대해서도 안전문제를 면밀하게 검토해보자’가 되어야지 ‘너희들은 원래 안전을 신경쓰지 않던 민족인데 광우병이 무슨 대수냐’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인체에 유해한 것인지 확실히 검증되지도 않았던 쓰레기 만두에 흥분하던 국민들이 이 사안에 이만큼도 반응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해괴한 일일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정책적인 접근은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하나는 광우병이라는 위험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동물성 사료 사용 금지가 전제되어야 하고, 쇠고기를 어떻게 검역할 것인지 그 방책이 논의되어야 한다. 이런 문제들에 대한 원칙은 한우에게나 수입산 쇠고기에게나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적어도 국민의 건강에 관한 문제는 무엇을 위해 무엇을 내준다는 식의 ‘정치논리’에 휘둘리지 말고 나름의 기준을 준수해야 한다는 합의가 필요하다. 이명박 대통령은 황망하게도 ‘다 내주었다’는 비판이 ‘정치논리’라고 반박했지만, 이 문제를 아예 정치적인 것으로 몰고 가는 것은 대통령 자신이다.
다른 하나는 이 문제를 정치적 문제로 간주했을 때, 얼마나 타당한 셈을 하고 있느냐는 물음이다. 쇠고기 협상이 가장 비난받는 이유는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뚜렷한 답이 없기 때문이다. 냉소주의자들의 말대로 정말 광우병에 대한 공포가 심대하게 과장되어 있다고 치자. 그런데 왜 그 심대한 과장의 베일을 우리가 애써 벗겨줘야 하는가. 그 과장된 공포의 내용을 미국쪽에 들이밀고, 쇠고기 수입 제한을 푸는 대가로 많은 것을 얻어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진정 ‘국익’을 추구하는 ‘실용주의’적인 자세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얻어낸 것이라고는 한-미 관계에 대한 추상적인 합의와 한-미 FTA 의회 비준에 대한 막연한 동의 정도밖에 없다. 그 동의가 얼마나 효력을 가질지도 미지수지만, 나처럼 한-미 FTA 자체가 ‘국익’에 어긋난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이 협상이 황당하다.
| 거리시위와 통합의 제의 (16) | 2008/05/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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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호한 글쓰기'로 진실을 호도하기 (22) | 2008/04/15 |
|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선거 결과 (0) | 2008/04/15 |
총선 기간 동안 진보신당의 임시 당직자가 되어야 했던 어느 분의 얘기다. “할머니와 통화를 하는데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절대로 그 당에 얽혀들지 마라. 그 당에는 희망이 없어요, 희망이. 할머니 말 허투루 듣지 말고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뭐라 대답할 말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분은 정규직 회사원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안정적인 소득을 올리고 있는 사람이다. 무급으로 일하는 동안 손해가 없진 않겠지만, 잠깐 선거운동에 참여했다고 미래에 일감이 줄어들 상황도 아니다. 그런데도 ‘희망이 없는 당’에 얽혀들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희망이 없는 당에 얽혀들면, 내 인생도 희망이 없어지나?
시절이 좋아져서 무슨 운동에 잘못 참여한다는 이유만으로 끌려갈 상황이 아닌데도, 사람들은 운동을 두려워한다. 하긴 자신의 정치적 지향과 상관없이 ‘될 사람’을 찍는 쪽이 마음에 편하다는 사람도 많은 나라이니 오죽할까. 다양성에 대한 정치적인 억압은 사라졌을지 몰라도 문화적인 억압은 여전하다. 문제는 실제로 정치적 탄압을 경험한 기성세대뿐 아니라, 젊은 세대에서도 이러한 억압의 기제가 강고하다는 데 있다. 언제나 우리가 희망의 근거를 무언가로부터 자유로운 ‘다음 세대’로부터 찾아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다.
물론 그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들도 그렇게 교육받았고, 그렇게 생각할 만한 환경에 처해 있으니까. 온 가족이 힘을 합쳐 아이를 지원해주는 무한경쟁의 청소년기를 거친 뒤, ‘좋은 시절’과는 거리가 먼 대학으로 들어온다. 학점에 토익에 기업의 인턴 경험까지 관리해도 취직이 안 되는 이들에게 대학 생활은 그저 고통스러웠던 고등학교 시절의 연장일 뿐이다. 남들 사는 것처럼 안 살면 곧바로 인생의 낙오자가 되는 것처럼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래서 <88만원 세대>에서 그랬던 것처럼 “토익책을 덮고 짱돌을 던져라”고 주문하기엔 무리가 있다. 영어가 필요없는 직장에서도 토익점수 900을 요구하는 한국사회에서 토익책을 덮으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한경쟁 속에서 연대성을 체험해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 짱돌을 들라고 말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들은 짱돌이 무엇인지는 알까. 혼자서 우두커니 골목길에서 짱돌을 던질 수도 없는데.
하지만 토익책을 덮지 않고도 정치적 행동은 할 수 있다. 아무리 인생이 팍팍해도 여가시간을 전혀 즐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만일 여가시간이 전혀 없는 사람이 있다면, 어찌 그에게 정치적 행동을 권유하겠는가). 드라마도 보고, 애니메이션도 보고, 만화책도 본다. 약간의 정치적 관심을 가지고, 어떤 활동의 지지자가 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일 리 없다.
당연히 비용이 조금은 든다. 나는 진보신당에 입당하면서 매달 당비 1만원과 비정규직 연대기금 1만원을 내기로 했고, 창당특별기금 10만원을 별도로 냈다. 창당특별기금은 선택 사항이라 하여 친구들에게 입당을 권유할 때는 내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국고보조금도 전혀 받지 못하는 이 신생정당이 자금이 풍족할 리가 없는지라 중앙당에서도 지역구 선본에서도 특별당비를 부탁하는 연락이 왔지만, 차마 그것까지 내지는 못했다. 시간과 체력이 허용하는 만큼의 미약한 자원봉사를 했고, 주소록에 저장되어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정당투표 지지 부탁 문자를 보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쓰지는 않았다. 그리고 사실은 이만큼 하지 않아도 가능한 것이 정당 참여다.
요즈음에 ‘먹히는’ 언어로 바꾸어보자면, 운동은 재테크처럼 생각해도 된다. 원금 보전을 하기 힘들 만큼 리스크가 크지만, 잘될 경우 많은 것을 바꾸어낼 수 있는 그런 재테크 말이다. 다른 투자가 그렇듯 운동에도 장기투자가 필요하다. 미국 주식의 역사를 보면 짧은 시간 동안 폭발적으로 주식이 오른다. 점쟁이가 아닌 이상 그 기간을 알 수 없으니, 확률적으로 볼 때 그 기간에 주식을 보유하여 이득을 챙긴 사람은 장기투자자들뿐이었다고 한다. 운동 역시 그렇다. 대개의 운동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한 운동에 힘을 빼고 환멸을 느끼며 그만둬버린다면, 단타매매에 올인했다가 손을 털고 사라지는 어리석은 개미투자자들과 비슷한 꼴이 되는 것이다.
운동이 망하면 참여자도 망해야 한다고 믿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순혈주의 운동권들이고, 다른 하나는 냉소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운동이 망했는데도 참여자들이 살아남아 다른 운동으로 갈아타는 꼴을 보기 싫어한다. 제 살 궁리 찾아가면서 적당히 운동에 힘을 보태는 것은 모순적인 행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이런 모순적인(?) 행위의 결집 속에서만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운동 망해도, 나 안 망한다. 그런데 뭐가 두렵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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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란 (11) | 2008/05/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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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회찬 3개 언론사 여론조사 모두 1위 (8) | 2008/03/24 |
<추격자>를 보았다. 일정 수준 이상이라는 세간의 평에 동의할 만했고, 무엇보다 외국의 영화광들이 보더라도 Made in South Korea임을 단박에 알아차릴 것 같은 작품이란 사실이 너무 신기했다. 하지만 죽지 않아도 될 것 같았던 캐릭터가 죽어버린 뒤엔 약간 심경이 복잡해졌다. <괴물>이 미국에서 개봉했을 때 미국 관객의 반응을 본 적이 있다. 어떤 이들은 매우 좋다고 했지만, 다른 어떤 이들은 불쾌감을 표시했는데, 그 이유가 흥미로웠다. 그토록 똑똑하게 처신한 어린 소녀를 기어이 죽여버리다니 대중영화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말이었다. 똑똑하게 처신했는데도 죽은 사람- 이 말에는 <추격자>의 그녀도 포함될 듯싶다. 세상엔 한국영화보다 사람을 잘 죽이는 영화도 많지만 확실히 할리우드의 대중영화들은 상황에 잘 대처한 주요 등장인물들을 굳이 죽이지는 않는 것 같다.
섣부른 얘기일 수도 있지만 우리의 현대사가 남긴 어떤 종류의 잔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한말의 ‘의병 학살극’인 일제의 남한 대토벌을 빼고 생각하더라도 해방 이후 한국인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꼴을 보았다. 어찌나 학살을 당했는지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는 학살에 무감각해질 정도였다. 전세계, 모든 역사를 통틀어 우리가 분개하는 학살은 단 두개, 일제의 난징대학살과 북한 인민군의 민간인 학살 정도인 것 같다. 죽고 사는 건 애초에 운수에 달린 것이지 똑똑함이나 상황에 잘 대처하는 능력만으로 극복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그때그때 최선의 행동을 한 이들이라도 재수가 없으면 죽었다. ‘그토록 똑똑하게 처신한 어린 소녀’가 죽는 것이, 한국인들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쩌면 잘 처신하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을 우리는 집요하게 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추격자>의 그녀는 당연히 살 수 있었던 상황에서 정말로 기막힌 우연 때문에 죽어야 했다.
그래도 영화의 경우 다른 나라의 작품과의 간극이 덜한 편이다. 어떤 미국 관객은 <괴물>에서 소녀의 죽음을 할리우드의 정석적인 문법을 파괴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상상력이 더욱 자유로운 대중소설로 오면 더욱 증상이 심해진다. 가령 신무협의 총아인 좌백의 소설을 생각해보자. 나는 그가 세계적으로 널리 인기를 누리는 홍콩 출신 무협소설가인 김용에 버금갈 만큼 훌륭한 작가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그는 더 유명해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소설을 읽을 때 나는 언제나 도대체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지 못해 안달인 것일까, 라고 생각했다. 중국 무협소설에서 무림인들은 설령 조직에 속해 있더라도 앞 열의 동료들이 모두 죽으면 바람에 흩날리는 들풀처럼 흩어진다. 그러나 좌백을 비롯한 한국 무협소설에서 조직인들은 눈앞의 고수가 그들 모두의 목숨을 앗아가더라도 마지막 한 사람이 죽는 그 순간까지 전진한다. 이것은 무협소설의 배경이 되는 전근대 사회의 인간의 행동일 수는 없고, 거대한 병영사회를 경험한 어떤 근대국가의 리얼리티를 드러낸다. 만약 내가 중화권에서 태어난 독자였다면, 그의 무협소설에서 특유한 형태의 육중한 리얼리즘을 느끼고 환호했을지도 모른다. “아, 그래, 이 나라는 20세기에 엄청난 규모의 전쟁이 일어났었어. 그리고 아직 모든 성인 남성이 군대를 가고 있고”라고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 대한민국의 성인 남성인 나로서는 대중소설을 읽을 때조차 저 기억하기 싫은 진실을 상기시키는 이러한 서술이 정서적으로 무척 버겁다.
내 생각에 한국인의 무의식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대중문화 텍스트는 좌백의 소설보다 훨씬 많이 팔렸을 ‘판협지’의 시조 <묵향>이다. 이 소설의 도입부에서 묵향은 이름도 없는 고아로 마교에 납치되어 와서, 동료들이 퍽퍽 죽어나가는 환경에서 수련에 매진한다. 묵향은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부모가 누구인지에 대해 한번도 묻지 않는다. 묵향은 동료들이 사라져갔다는 사실을 범상하게 기억하며 그들이 어떻게 되었을지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는 법도 없다. 한국전쟁과 군부독재를 거치면서 한국인들 역시 사라져가는 이들을 모르는 척하는 것이 생존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배웠을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심지어 사라지는 이들 덕분에 내가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한국인들의 지지는 그런 차원에서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 오랫동안 한국인들은 특정한 이들을 죽이는 정책이 다른 모든 이들에겐 조금씩 이득이 된다고 믿어왔다. FTA가 농업을 말아먹을 거라는 세간의 예측은 그러므로 그들을 낙담하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흥분시킨다. 우리의 합리성은 마치 러시안룰렛 게임의 합리성과 같다.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에 대해 말하지만 실은 살아남은 자들은 무감각해질 뿐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 우울해진다.
글 : 한윤형 (인터넷 논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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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몰입교육 논란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울 때, 빅뉴스의 변희재는 “<디 워> 매출 1억달러, 낡은 지식인에 파산 선고”라는 글을 썼다. 그는 지식인들이 <디 워> 팬카페만 드나들었어도 제대로 된 팩트를 알 수 있었을 거라고 말하지만, 그 팩트는 영화매체 종사자가 아니라 서핑이나 조금 즐기는 사람들도 반박할 수 있을 만큼 허술했다.
먼저 그는 <디 워>의 제작비를 3천만달러로 잡고, 총매출을 1억달러로 산정한 뒤 엄청난 이득을 얻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디 워>의 제작비가 얼마인지에 대해선 300억원설과 700억원설이 대립하고 있는데 일단 아무 설명없이 전자를 채택하고 있는 셈. 제작비와 총매출을 대비시키는 것도 어처구니없이 한심하다. 변희재는 극장과 쇼박스가 가져갔을 돈은 애써 머리에서 지우고 총매출이 영구아트무비의 순이익인 양 취급한다. 또한 <디 워>의 흥행이 엄청난 수의 스크린 독점을 통해 이루어진 만큼 그런 식의 흥행전략이 다른 영화들에 끼친 영향이 ‘기회비용’으로 고려되어야 했지만 그 점도 무시되었다. 그 모든 점을 고려해서 한국 영화산업에 미치는 <디 워>의 영향력을 추정하는 것이 바로 지적인 작업이겠지만, 신지식인은 그런 귀찮은 일은 하지 않는다.
영어몰입교육이 국가경쟁력에 도움이 된다고 일관되게 주장하는 당선인과 인수위원장의 산술체계도 신지식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디 워>에 비해 영어몰입교육은 명확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소극적으로 찬성하는 이들의 입장은 <디 워>에 비해 훨씬 뿌리깊다. 이미 사람들의 관심이 떠나버린 <디 워>를 옹호하는 것은 변희재 등 몇명뿐이지만, 몇년 뒤엔 꽤 많은 사람들과 어쩌면 보수 언론 매체들이 영어몰입교육의 성공을 선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세계시장을 겨냥했다는 <디 워>가 정작 한국의 관객에게서 매출의 절반 이상을 털어갔듯, 국가경쟁력을 위한다는 영어몰입교육 역시 영어를 잘하는 강남 사람이 그렇지 못한 다른 지역 사람들을 차별하기 위한 조건이다. 국제적으로 팔아먹기 위해 만들어진 <디 워>의 영어 대사가 한국 화자들의 대화를 직역한 것처럼 어색했듯이, 인수위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인수위원장의 영어 인사말도 영어가 아니다. <디 워>가 북미 와이드 릴리즈 개봉이라는 가시적인 성과(?)로 한국 관객을 다시금 유혹했던 것처럼 이명박 정권은 미국 대학에 입학한 한국인 수가 늘었다는 사실을 영어교육 성공의 증거로 제시하지는 않을까? 이 정책이 실시된다고 해서 기러기 아빠의 수가 줄어들 것 같지는 않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똑같이 엉터리 산술체계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디 워> 열풍을 만든 욕망과 영어몰입교육에 우호적인 이들을 만든 열망 사이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디 워>에 대한 욕망에는 그 적절함이야 어쨌든 애국적인 지향이 있다. 이 무국적의 영화에서 이무기와 아리랑은 순식간에 ‘한국적인 것’을 나타내는 표상이 된다. 마치 숭례문 전소 이후 숭례문이 대한민국의 상징으로 돌아왔듯이 말이다. <디 워> 열풍은 그릇된 영역에서 그릇된 방식으로 재현된 박정희 정권의 대기업 육성 정책이다. 바로 그것을 의도했기 때문에 <디 워>의 제작사와 제작자에겐 큰 책임이 있다. 하지만 영어몰입교육은, 비록 그 정책을 추진하는 이들의 크나큰 잘못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훨씬 더 대중친화적인 상상력을 드러낸다. 중산층은 영어교육이 국가경쟁력을 강화한다는 말을 사실은 진지하게 믿지 않으면서도 이 정책에 동조하거나, 욕하면서도 적응하려고 한다. 강남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유포시키는 이 환상이 그들을 강남 사람으로 만들어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심지어 모든 한국인들이 영어를 잘하는 세계에 대한 상상은 강남 사람들조차 무시할 만큼 전복적이다. 영어를 잘하는 한국 청년들은 삼성 같은 대기업에 착취당하지 않고 다른 나라로 도망갈 수 있다고 상상한다면 말이다. <디 워>가 자신들의 유치한 감수성이 세계수준이라고 착각하는 아이들의 꿈이라면, 영어몰입교육은 자신을 둘러싼 현실을 탈출하고 싶다는 노회한 어른들의 꿈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다른 욕망은 기이하게도 연속적이다. 살릴 놈만 살리는 게 국가경쟁력 강화라는 엉터리 주문을 계속해서 외운 결과, 한국인들은 모두 내가 살아서 도망가는 게 공익에 부합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은 이제 ‘모든 사람들이 남보다 먼저 도망가고 싶어하기 때문에, 아무도 도망가지 못해서 유지되는’ 이상한 나라가 되어버렸다. 농담이 아니라 언젠가는 그놈의 경쟁력이 강화된 결과 정말로 국가가 텅 비어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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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씨네21 홈피에 이 글이 올라와서 블로그에도 공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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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아 선수 때문에 피겨를 배우는 소녀들이 늘어났다고 하지만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는 사람은 한명뿐이고, 나머지 선수들에게 우리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박태환, 김연아 그리고 비보이들을 기성세대가 아무리 찬양해도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게다가 비보이들은 그다지 높은 소득을 올리지도 못한다는 사실이 보도되기도 했다. 최근 흥행하는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 사회는 한정된 자원을 투자하고는 선수들에게 ‘세계 최고’가 되라는 무리한 요구를 하지만, 그 요구를 충실히 따랐을 때라 하더라도 반드시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는 것은 아니다.
게임 방송을 보면서 스타크래프트 리그(이하 스타 리그)의 팬이 되었을 때, 내가 처음 느꼈던 것은 이 새로 생긴 취미가 주는 즐거움이 다른 것들과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 취미에는 ‘강대국 따라잡기’의 열망이 없다. 가장 대중적인 스포츠인 축구나 야구에서조차 우리의 욕망은 항상 우리 자신의 즐거움이 아닌 ‘따라잡기’의 욕망이다. 2002년 월드컵 3-4위전에서 붉은악마는 저 유명한 CU@K리그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그것은 좀더 강한 국가대표 축구팀을 만들기 위해선 우리가 평소에도 클럽 축구를 즐겨야 한다는, 물구나무선 당위 명제를 웅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스타 리그는 온게임넷 엄재경 해설위원의 말을 빌리자면 그 자체로 축제다.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을 즐기는 유저들의 맥락과 프로게이머들의 맥락, 그리고 그 맥락에 기대어 창작되는 수많은 팬들의 텍스트와 이미지를 즐기고 있노라면 우울함은 증발하고 하루는 짧다. 지금은 군복무 중인 ‘노동8호’라는 아이디를 쓰는 누리꾼의 짤방(‘짤림 방지용’의 준말로, 디시인사이드의 각종 갤러리에 올라가는 이미지를 가리킨다)들은 한동안 스타 리그를 안 보다가도 그의 예술작품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다시 보게 할 만큼 매력적이다. 이 작은 영역에선 바로 우리가 서 있는 곳이 메이저리그. 그러다 보니 이런 문화 전체를 같이 향유하려는 외국인들도 있다. 종종 영어권 스타 리그 팬들의 반응을 번역한 글들이 인터넷에 올라온다. 그러나 그런 번역글 밑에는 대개 “한류 사이트엔 퍼 나르지 말 것”이라는 단서 조항이 붙어 있다. 그걸 번역한 이들이 특별히 덜 국가주의적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스타 리그를 같이 즐기는 외국인들의 반응을 확인했을 때의 기쁨은 한류의 영향력을 확인하는 기쁨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나는 취미라는 것이 본래 어떤 기능을 가져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고, “관심이 없다면 약해지는 것을 감수해야겠지”라고 중얼거리게 된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감동적이지만, 나는 이 감동을 “그러므로 핸드볼 실업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따위의 결론에 귀속시키는 것에 찬동하지 않는다. 관심은 당위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우리가 국가에 더 많은 메달을 안기기 위해 관심도 없는 스포츠에서 세계적인 선수를 키우는 비극을 양산했다는 거다. 스타 리그는 자연스러운 관심이 어떻게 시장을 만드는지에 대한 적절한 예시를 제공한다.
산업적 시각에선 흔히 ‘e스포츠’란 이름으로 스타 리그에 접근한다. 그러나 그것은 스타 리그의 특수성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외국에도 프로게이머는 있지만 그들은 사라지고 생겨나는 여러 종류의 게임에 대한 프로게이머다. 외국의 유명 프로게이머는 몇몇 종류의 게임 대회에서 우승한 이들이다. 그런 식의 ‘e스포츠’와 스타 리그는 조금 다르다. 한국에서처럼 하나의 게임에 대한 리그에 관심이 집중되면, 게임 회사는 재미없다. 스타크래프트2를 발매하는 블리자드의 고민도 이에 있을 것 같고, 그 발매에 즈음해서 스타 리그의 장래를 불안해하는 일부 팬들의 시각도 그래서 일리 있다. 그런 의미에서 스타 리그는 보통의 e스포츠에 비해 좀더 게임 산업에 독립적인 어떤 상징성을 구현한다. 게임 산업과 관련한 경제적 분석을 넘어선 별도의 문화적인 비평을 요구하는 것이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스타 리그는 한국 사회에서 ‘소년 로망’을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이 소년들은 누군가의 우상이지만, 적어도 홀로 세계대회에 출전하는 고독한 천재가 아니라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고 도발하는 그런 귀여운 친구들이다. <H2>나 <슬램덩크> 등 일본 소년만화들이 제공하던 그 로망을 나는 이제 그들에게서 느낀다. 자본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건설된,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공평한 경쟁’의 로망을. 20대 중반이면 전성기가 끝나는 불안정한 직업인 프로게이머에게 10대 소년들이 몰리는 이유는, 다른 곳에서는 이 ‘공평한 경쟁’의 공간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 아닐까? 소년들이 승리하고 응원하던 부모님들이 눈물을 흘릴 때면, 나도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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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펌] 진보누리 대 아나클랜 / 이상한 모자 (13) | 2008/0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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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네21/유토디토] 스타리그 예찬 (11) | 2008/02/15 |
| [펌] 이중등록, 魂의 전쟁 - 魂의 시대를 추억하며 / Raight (9) | 2008/02/14 |
| 미연시 개론 (15) | 2008/01/25 |
| [펌] 김택용의 대 저그전 수비력 / FELIX (0) | 2008/01/06 |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벗어던져야 할 ‘개혁 로망스’
이명박을 찍은 유권자들을 비난하는 인터넷 여론을 보면 당혹스럽다. 한국사회에 ‘대중의 우매함’을 규탄하는 엘리트주의자들이 이렇게나 많았던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오히려 <디 워> 사태에서 보듯 ‘많은 사람들의 선택에는 뭔가 타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그 이유를 부인하는 사람들에게 ‘너는 대중이 우매하다고 생각하는 먹물엘리트주의자임이 틀림없어’라고 낙인찍는 것이 평균적인 한국인의 정서가 아니었던가.
나는 대중에 대해선 별스런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고, 다만 한 사람이 어떤 문제에 적절한 견해를 표현하려면 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공부도 좀 하고 관련된 사람들의 의견도 청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중에 대한 무조건적인 옹호가 이런 최소한의 ‘노력’없이도 그들이 쓸모있는 소리를 할 수 있다는 얘기라면 그 옹호는 그릇된 것이다. 그러나 그건 대중뿐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다. 사람들은 종종 지성의 부족함이 아니라 문제를 단순하게 환원하는 부적절한 용기 때문에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이명박 지지자의 문제점을 질타하는 이들이 그들이 비난하는 ‘대중’보다 더 수준 높은 정치적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이명박의 당선은 긍정적이진 않지만, 2007년 대선의 문제는 그 하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이명박 시대 이후 한국사회가 좋은 방향으로 바뀌지는 않겠지만, 그런 예상을 가능하게 하는 이유 역시 이명박과 한나라당의 행태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참여정부가 국민의 신뢰를 상실했다는 것은 하나의 사실이자 현실이며, 이런 일이 있었을 경우 정권교체의 순기능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런 복잡한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이명박과 그를 뽑은 유권자를 비난만 하는 것도 문제를 단순하게 보는 것이다.
가령 최근 인터넷을 달구었던 건강보험 당연지정제 폐지에 대한 담론을 생각해보자. 아직 집권도 하지 않은 이명박 정부는 대한의사협회의 정책질의에 대한 답변에서 이 문제에 다소 애매하게 언급했을 뿐인데, 누리꾼들은 이미 진료비가 수천만원씩 나오는 미래사회에 대한 공포소설을 써대고 있었다. 당연지정제 폐지문제는 참여정부 시절부터 간헐적으로 흘러나오던 얘기이며, 설령 정동영이 당선됐다 하더라도 추진될 가능성이 있는 정책이었다는 사실은 언급되지 않는다. 이러한 담론은 사회문제를 이성적으로 고찰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개혁 로망스’를 유지하고 존속하는 데 쓰일 뿐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정치적 무의식>에 따르면, 로망스는 현실적 모순에 대한 상상적 해결책으로, 어떻게 나의 적이 ‘악’으로 인식될 수 있을까 하는 강압적 질문에 대한 상징적 대답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한다. ‘개혁 로망스’의 세계에서 한국의 모든 사회문제는 수구세력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공세 속에서 탄생했다고 이해된다. 그들이 ‘대중의 우매함’을 말할 때 그 ‘우매함’은 별스런 지성의 결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저 단순한 도식을 받아들이지 않는 ‘우매함’을 의미한다. 지난해 5월에 있었던 기자실 폐지문제에 대해 누리꾼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생각해보라. 찬반 모두 일리있는 입장이었음에도 그들은 ‘개혁적 정부’와 ‘기득권을 지키려는 기자들’의 구도로 사태를 파악했다. 그것은 반기업 정서를 퍼뜨리는 좌파 정권만 종식시키면 한국 경제가 살아날 거라고 믿는 조중동의 믿음에 못지않게 단순했다.
그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수구세력’에 해당하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사회문제는 그것만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서울시장 시절 이명박이 버스 노선 개편을 추진했을 때 교통연대라는 단체는 퇴진 운동도 불사한다고 선언했고 수많은 노무현 지지자들이 그들을 지지했다. 정책 결정이 민주적이진 않았지만 버스 노선 개편 자체가 ‘악’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실 수많은 노무현 지지자들은 비슷한 방식으로 추진된 행정 수도 이전 문제는 모든 종류의 반대자들을 묶어 ‘수구 기득권 세력’으로 매도하지 않았던가. 이 코미디의 정점은 훗날 정책이 정착된 이후 노무현 대통령이 “개혁은 그런 식으로 해야 한다”고 이명박 서울시장을 칭찬했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특별히 버스 노선 개편을 이명박이 ‘악’이라는 논거로 사용하는 사람은 없다.
이명박 당선에 대한 책임을 국민이 지는 것이 원론적으로 올바르다면, 참여정부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개혁성향 유권자가 나누어지는 것도 원론적으로 올바르다. ‘개혁 로망스’를 벗어던지고 사안별로 한나라당과 다른 방식으로 섬세한 담론을 펼치는 연습을 하지 않는다면, 이른바 ‘개혁’세력은 2007년이 아니라 2012년에도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만 그들의 비극이 아니라 한국사회 전체의 비극이 될 것이다.
글 : 한윤형 (인터넷 논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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