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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윤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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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에 해당되는 글 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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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박을 찍은 이들이 잘못이라고 하기엔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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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
  3. 2004/01/29
    이문열씨, 노무현은 히틀러라구요?
  4. 2002/12/08
    진중권 : 조우커의 임무

이명박을 찍은 이들이 잘못이라고 하기엔 정동영 캠프가 한 일이 너무도 없다. 이명박을 지지한 이들은 투표한 이들의 절반이 채 안 되니 국민의 30%에 해당할 따름이다. 나머지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없었던 것은 전적으로 참여정부와 정동영 캠프의 잘못이다.


이문열의
지적처럼 이명박의 도덕성은 이미 자녀의 위장취업 문제에서 그 바닥을 드러냈다. '좌파 정권 종식'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소설가마저 곤혹스러워했던 이 사건을 국민들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여기서 범여권은 더 이상 도덕성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어야 했다.


정말로 이명박의 집권이 끔찍했을 어떤 유권자의 소망을 범여권이 충족시켜 주려는 의사가 있었다면, 문국현이 그렇게 주장했듯이 정동영의 사퇴가 길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그들이 그토록이나 좋아하는 '감동의 드라마'에 군불이나마 붙이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것을 상책이라고 해보자. 하지만 이건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다. 정동영이 대통령이 되기 위해 얼마나 자신의 조직을 확장하고 관리해 왔는데, 그가 패를 던진다고 결심해 봤자 밑에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권영길도 민주노동당 경선 후보 사퇴를 못 하는데 말이다. 그러니 이런 걸 못 했다고 정동영을 비난할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명박의 득세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파악했다면 선거대책은 달랐어야 했다. 문국현이 말했던 것처럼 '부패가 무능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 국민들의 의식이었다. 그리고 그 국민들은 자신들이 그런 의식을 가지게 된 책임을 참여정부에게 돌리고 있었다. 따라서 참여정부의 계승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두 가지, 그 의식에 동조하거나 부인하는 일뿐이었다.


만일 그들이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의 어느 어느 부분이 잘못되었다고 스스로 인정하고, 그 부분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면서, 이명박 후보의 대안이 이 문제를 여전히 해결할 수 없음을 말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당장 대선에서는 이기기 힘들었다 하더라도, 향후 총선에서 시민들은 한나라당과 명확하게 구별되는 어떤 선택지를 소유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을 중책이라고 해보자. 물론 이것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왜냐하면 참여정부에 참여했던 자들이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하는 이라도 당장의 소란을 피하기 위해 "반성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이러이러한 부분을 잘못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기술하는 사실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 기술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를 명확히 알고, 하지만 시정하려는 의지는 없이, 거짓 반성을 명확하게 하는 일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을 하기엔 참여정부는 자기 확신이 강한 집단이었다.


그러므로 이번 대선에서 소위 범여권 진영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공익에 부합하는 활동은 "도대체 참여정부가 무엇을 잘못했냐?"고 솔직하게 사람들에게 싸움을 거는 것이었다. 하지만 국정홍보처가 5년 내내 조중동에 대항해서 했던 그 짓거리를, 그들은 대선에서는 피해갔다. 그 짓을 대신 해줬던 네티즌 몇몇이 이제와서 "대중은 우매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되도록 논쟁을 피하고 BBK를 물고 넘어져 정권을 날로 먹으려고 했던 것은 바로 정동영 캠프가 아닌가?


참여정부에 대한 세가지 시선이 존재한다. 하나는 얼치기 좌파 운동권 386들이 정권을 장악하여 좌파 정책을 추진하고 반기업정서를 확산시켜 5년 평균 4.6%밖에 국가를 성장시키지 못하는 경제난국을 만들었다는 조중동과 이에 동의하는 이들의 시선이다. 둘은 참여정부는 한나라당이 만들어낸 IMF와 김대중 정부가 물려준 경기 부양 정책의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경기부양 정책 없이 4.6%의 견실한 성장을 일구어냈다는 국정홍보처와 이에 동의하는 이들의 시선이다. 마지막으로 참여정부는 수사적으로는 수구세력과 결연한 전쟁을 치뤘으나 실은 강화된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청년실업을 방치하는 등 양극화를 심화시켰고 대선 공약으로 내세운 높은 경제성장률을 만들기 위해 부동산 규제에 미적거리다가 한국 경제의 체질도 나쁘게 만들었다는 시선이 있다. 이중에서 세번째 시선은 평균적인 사람들에게는 듣기 힘든 소수자의 말에 해당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이 두 가지밖에 없다고 했을 때, 실제로 체감경기의 악화를 느끼고 있고 가계생활이 답답한 사람들이 어느 쪽을 선택하겠느냐고 물으면, 당신은 뭐라고 답변하겠는가? 조중동은 비록 막강하지만, 마술지팡이는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종 그 사실을 망각한다.


대선 정국에서 참여정부 정책을 옹호하는 것은 사람들이 정권교체라는 선택을 내리게 된 바로 그 지점에서 논쟁이 일어나게 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비록 앞서 지적한 두 개의 선택지에 비하면 하책이었겠지만, 이것이 아마도 정동영 캠프에서 추진할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이었다. 그리고 이 전략이 수행되는 와중에서 그나마 여러가지 말이 섞이면서 사람들에게 사태를 더 분명하게 바라보게 할 수 있는 어떤 정보가 주어졌을 것이다. 비록 이 과정에서 권영길의 민주노동당이 별 역할도 못하고 빌빌거렸을 거라는 것을 상상하면 기분은 좀 나쁘지만, 여하간 이런 상황은 그 자체론 공익적이다.


하지만 참여정부의 노선을 비판적으로 변경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옹호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대선을 치른 정동영은 자신의 모든 말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었다.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문제에 대해 답을 안 해주는데, 그가 무슨 정책에 대해 말한들 그게 어떻게 '참말'로 들린단 말인가? 허경영이 이번 대선에서 유일하게 사람들에게 웃음을 줬던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를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집권여당이 마치 집권해본 적이 없다는 듯이 '과거'는 얘기하지 않고 '공약'을 남발한다면, 설령 그 공약이 좌파적이라도 좌파들에게 감흥을 줄리 없고 친시장적이라도 시장주의자들에게 찬동을 얻을리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보기에 그 공약은 훨씬 더 진지하고 약간 더 말이 되게 다듬어진 '허경영 공약'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지지를 얻을 수도 없거니와, 심지어 우습지도 않다.


BBK에 대한 범여권의 집착은 그들의 상식은 물론이거니와 후각조차 의심스럽게 만든다. 5년 내내 친노 네티즌의 글만 눈팅하다가 그들은 모든 종류의 감각을 상실해버린 것일까? 아마도 우리는 이명박이 BBK를 설립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는 (추가적으로) 발견할 수 있을지 몰라도, 주가조작을 했다는 사실은 발견해낼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실제로 김경준에게 사기를 당했건, 아니면 그 부분만은 매우 솜씨좋게 덮었건 간에. 그런데도 이명박이 BBK 설립자임을 부인한 것은 그가 자신의 이미지에서 도덕성보다는 '성공한 CEO'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았음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한번 더 거짓말쟁이가 되는 게 낫지, 사기꾼에게 속은 멍청한 경영자임을 제 입으로 고백하고 싶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검찰에 대한 탄핵으로 BBK 정국을 연장시키려고 한 것은 범여권의 최대의 패착 중의 패착이었다. 검찰 수사가 미심쩍어 특검을 제의했다면, 특검 결과를 보고 탄핵을 하든 말든 해야지, 어떻게 자기가 원하는 결과가 안 나왔다고 탄핵을 운위할 수 있단 말인가? 복잡한 정치문제를 동네 어린이를 취조하는 문제로 전환시킨 "진실이 거짓을 이깁니다."는 선거 구호는 그들의 우스꽝스러움을 증명하는 최고의 수사였다. 이제 패배했으니 그들은 자신들이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 걸까?


이러한 철지난 조소가 지금 이 순간에도 유효한 이유는, 대선이 끝난 이후에도 대통합민주신당의 행보가 저따위 정신상태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검법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니다. 몇몇 386 의원들이 정동영과 친노그룹의 퇴진을 주장한 것을 보고 말하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인즉 최대한 참여정부에 참여하지 않았던 이들을 중심으로 당을 재편하자는 것이다. 대충 사람만 바꿔 채우고 입씻은 후 이명박 네거티브 전략으로 총선을 치르겠다는 얘기다. 유권자더러 금붕어가 되라는 주문을 '정치'라고 부르면서, 그들은 더럽게 더럽게 질긴 목숨을 연명하려고 작정하고 있다. 이들이 살아남을지 못 살아남을지는 내가 점쟁이가 아니라서 알 수 없지만, 이들이 살아남는 것이 한국 정치의 희망이 못 된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아마 이들의 생사는 앞으로 우리에게 닥쳐올 비극과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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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만은 군인이었고, 일말이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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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 한동안 유행했던 이 표어는 한국 사회에서 '전통'이라는 것이 어떤 식으로 출현했는지를 보여준다. 즉, 그것은 외부로부터, 외부자의 시선으로부터 찾아왔다. 왜 예쁜 한옥을 부수고 콘크리트 건물을 짓는지 모르겠다는 외국인들의 투덜거림이 수십 년의 격차를 두고 한국인들의 귀에 들린 것이다. 아니,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인들은 적어도 명절날에 기모노를 입고 돌아다니기는 한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말하는 '전통 계승'이라는 것은, 자신들의 삶의 형식에 결합해 있는 무언가를 유지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선조들이 남긴 유물 중에서 외부자의 시선에 어필할 수 있는 것을 취사선택해온 역사에 가깝다. 불고기가 한국의 대표음식이 되어온 과정이 그 사실을 단적으로 증거할 것이다. 물론 김치의 경우는 다른 패턴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말이다.


과연 그러한 것들을 '전통'이라고 부르는 것이 온당한 어법인지에 대한 의심이 들만도 하다. 그러므로, 사실 서구문화가 우리의 전통이라는 복거일의 주장을 - 고종석이 긍정한 - 나는 받아들일 수 있다. 백종현도 "서양근대철학"의 서문에서 비슷한 얘기를 한 바 있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구체적인 사례에서 서술해 보자면 이렇다. 우리의 헌법에 역사적으로 선행하는 것은 경국대전이다. 그러나 우리의 헌법에 구조적으로 선행하는 것은 로크의 "통치론"이다. 경국대전과 헌법은 만나지 않는 평행선이다. 헌법에 영향을 주고, 헌법을 규정지은 것,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것은 실제로는 로크의 "통치론"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전통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이것이 복거일과 백종현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구조적으로 선행적인 것이 끼치는 영향은 역사적으로 선행적인 것이 끼치는 영향을 능가한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사회계약론을 생각해보라. 실제로 사회계약론에 의거해 세워진 민주주의 국가는 얼마나 될까. 딱 잘라서 말하면 미국 하나다. 나머지 나라의 헌법은 그저 미국의 역사적 경험을 구조적인 선행성으로 받아들이면서 구축된 것일 뿐이다. 그러나 미치는 효과는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플라톤의 생각처럼 '진짜'가 '짜가'를 언제나 이길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짜가'가 '진짜'를 능가하기도 한다.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영화 "볼링 포 콜럼바인"을 보면 이 미국인이 캐나다의 민주주의를 얼마나 부러워하는지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로크와 사회계약론을 우리의 전통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도 않다는게 한국 현실의 희극성이다. 왜냐하면 한국인들의 관념은 그 구조적인 선행성이 마땅히 우리에게 미쳐야 할 영향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의 관념은 라캉의 말대로 일종의 물질성을 띤다. 경국대전에서 서울이 우리의 수도라는 '관습헌법'의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고 느꼈던 헌법재판소 재판관들, 그리고 그러한 판결을 지지하기까지 한 몇몇 헌법학자들을 보라. 한국에서는 직능인이 자신의 직업에 마땅히 요구되는 세계관을 갖추지 못한 경우가 흔하다. 행정수도이전 위헌 판결은 헌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판관들의 사적 세계관에 의한 것이다.


"통치론"도 아닌 곳, 그렇다고 "경국대전"도 아닌 곳에서 한국인들은 방황한다. 그것도 행복해 하면서. 이 사례가 이른바 '수구세력'에 국한된 것이라고 항변할 이가 있을지 모르겠는데, 내가 보기엔 그렇지가 않다. 소위 개혁세력이 친일파 처벌 문제에 대해 가지는 감정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흔히 예시되는 프랑스의 나치 청산은 프랑스가 나치에게 정복당하기 전에 이미 공화정 체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프랑스의 나치 청산은 공화제를 뒤엎은 파시즘에 대한 단죄요, 헌법을 가진 국가에 대한 테러에 대한 처벌이다. 그들이 말하는 '민족반역죄'에서 '민족'은 우리의 어감으로는 오히려 '국가'에 가깝다. (프랑스인들이 말하는 '민족'이 우리가 '민족정기' 운운 할 때의 민족과 동의어라고 믿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그러나 이문열의 조소처럼 친일파들의 시기에 대한민국은 있지도 않았고, 우리의 헌법은 조선왕조를 계승하지 않는다. 그것은 할 수도 있었던 것을 하지 않았다는 우연적 현실이 아니라 '해서는 안 된다'는 필연적 현실이다. 공화국이 왕조를 계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대한민국은 법적으로 - 도덕적, 역사적 단죄가 아닌, 헌법에서 연역되어야 마땅한 법적인 단죄를 말하는 것이다 - 친일파를 처단할 수 있을까, 라고 언젠가 내가 물었을 때, 노무현 지지자였지만 나에 대해 기본적으로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어느 네티즌은 갑자기 씩씩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공화국 좀 늦게 만들었다고 친일파도 처벌할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냐고 되묻는다. 내가 하려던 말은 그런 말이 아니었지만, 설령 그렇다 한들 뭐가 문제겠는가. 근거와 상관없이 미리 결론이 내려져 있는 상황, 이 역시 사적 세계관이 공적 판단을 압도한 결과다. 그들의 견해를 합리적으로 표현하려 노력해 봤자 '관습헌법' 이상의 도식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이문열의 조소나 이영훈의 회의를 피해가면서 친일파 청산을 할 수 있는 방법도 있다. 우리 헌법에 씌여져 있는 대로, 1919년 3.1운동을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민중의 선택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민중혁명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 경우 친일파의 행위는 한민족이 아닌 일본민족에 빌붙었기 때문이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국체(國體)를 부정한, 헌법정신을 훼손한 반역행위로 처벌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문에 법적 논리로 처벌할 수 있는 한계는 1919년 이후의 친일행각이 될 것인데, 나는 친절한 사람인지라 이 경우에도 당신들이 처벌하고자 하는 그 사람들 대부분을 처벌할 수 있다고 말해주곤 한다. 사실 내게 그렇게 말해야 할 의무는 없지만.


'그게 그거' 아니냐고 말할 사람이 있겠지만 일단 근거가 섰다는 것과 서지 않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고, 이상의 논의의 효과는 실제적인 친일파 변별과정에서도 영향을 미친다. 민족 범주보다는 인권 범주가 누군가를 단죄하는 데에 더 유효하지 않겠느냐는 이영훈의 타당한 지적은 여기서 상당부분 의의를 상실한다.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부정은 인권 문제와 긴밀히 연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과거청산 사례를 처음으로 대중들에게 유포시킨 홍세화를 포함해서, 친일파 척결을 주장한 그 누구도 이러한 주장을 개진한 바가 없다. 다만 박노자가 아주 예전에 친일파가 그릇된 이유는 반민족행위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파시스트 체제의 부역자이기 때문이다라는 합리적인 의견을 제시했는데, 이 역시 대한민국 헌법을 근거로 친일파를 처벌할 수 있다는 법리적인 얘기는 아니었고 역사적인 단죄에 관한 얘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상의 전통에 대한 논의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가 '전통'이라고 흔히 칭하는 것, 그것들은 우리의 삶의 형식에서 이미 잘려나간 것들이다. 잘려나간 뿌리는 더 이상 그 식물의 구성물이 아니다. 둘째, 마땅히 우리의 '전통'에 포함되어야 할, 구조적으로 선행적인 이념들이 있다. 우리 사회는 아직 그것들을 심층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바, 이에 대한 개선이 요청된다. 셋째, 우리의 현실에 대한 인식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통'에 대한 강박에 대해 비판적인 거리를 형성하도록 도와준다. 아버지들이 우리의 뿌리를 잘라버린 건 어리석은 일이었지만, 우리가 그 잘려나간 뿌리를 손으로 쳐들고 운다해서 다시 접합되지는 않는다. 어쩌면 우리가 뿌리 없는 자식이라는 것, 반만년의 후예가 아니라 반백년의 후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진정으로 우리의 삶의 형식에 결합한, 그러므로 외부자에게도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제시할 수 있는 '전통문화'가 탄생할 지도 모른다. 탁 까놓고 말하면, 내게는 불고기와 태권도보다는 차라리 삼겹살에 소주, 노래방, 폭탄주와 스타리그 등이 더 '전통'이란 단어의 의미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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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진보누리에도 올리고 블로그에도 올린 글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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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세기 초반 독일 남부도시 뮌헨에서 히틀러라는 끈 떨어진 하사관이 나치당을 조직했을 때 독일의 모든 지식인들이 비웃기만 하고 아무일도 하지 않았다. 그 결과가 어땠나. 나는 그런 독일 지식인들의 우를 다시 범하고 싶지 않았고 역사의 대세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 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으로 들어간 이문열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맥락빼놓고 텍스트만 두고 보면, 사회참여에 투철한 훌륭한 지식인의 발언이다. 게다가 공천심사위원들이 은근히 전국구를 바라는 행위를 질타했다고 하니 진정성도 엿보인다.


그런데 결국 위 말은 '노무현=히틀러'라는 소리 아닌가. 나는 순간 당대의 베스트셀러 소설가 이문열씨가 진보누리까지 찾아와서 아흐리만의 "왕당파와 파시스트"(누리베스트에 가서 검색하면 찾을 수 있다.)를 읽은 줄 알았다. 노무현과 그 지지자들이 파시즘 코드를 가지고 있다는 얘기는 이미 내가 이전에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노무현이 히틀러라는 결론이 나오겠는가. 노무현이 히틀러와 닮은 점이 없기는 하겠냐마는, 그런 식으로 따지면 이문열에게도 히틀러와 닮은 점이 있고, 두 사람 모두 역사상의 수많은 위인들과 '얼마간은' 닮은 점이 있을 것이다.


이문열의 그간 발언들을 종합해보면,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대중선동 정치"다. 이문열이 히틀러가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가 전체주의자 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권력이 "대중선동"을 통해 창출된다는 데에 있다. 나는 그의 주장엔 원론적인 관점에서 '반만' 동의한다. 나는 선동은 좋아하지 않지만, 대중은 좋아한다.


이문열은 대중선동을 배격하고 무엇을 추구하는 것일까? 물론 자신같은 '대인'들이  사회의 여론과 문화를 주도하는 일종의 엘리트 교양국가를 꿈꿀 것이다. 나는 엘리티즘 자체를 나쁘게 보지는 않는다. 인류의 계승할만한 문화적 가치들을 체득한 사람들이 사회의 본보기가 되는 것은 나쁘지 않다. 문제는 '지식인 이문열'이 가진 것들이 그런 '계승할만한 문화적 가치'인가다.


전혀 그렇지 않다. 이문열이 소설가로는 뛰어날지 몰라도, 그의 사회에 대한 관점은 진중권의 조소대로 16세기에 머물러 있다. 그가 원하는 세상은 충신들이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인들이 '가문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고, 영남 남인 출신의 양반 남정네들이 존경받는 세상이다. 이런 것들은 '전통'이라고 부르지 않고 '인습'이라고 부르는 법. 이문열과 일부 유림들과 함께 지구를 떠나야 마땅할 그런 가치들이다.


그런 형편이니 이문열의 엘리티즘은 얼마나 엽기적인가. 노무현이 비록 가방끈이 짧고 대중들을 감성적으로 조직할 지라도, 그 대중들은, 아니 노빠들은, 최소한 이문열의 그것보다는 훨씬 건전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만일 노무현이 히틀러가 맞다면, 이문열은 히틀러보다 더 나쁜 무엇이리라. (잘 떠오르지 않는다. =.=)


히틀러에겐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그가 일종의 사회의 낙오자로서, 대중의 감성적 지지를 업고 집권하여, 독일의 융커계급을 쓸어버린 파괴적인 측면이다. 그가 서민들의 지지를 받은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으며, 덕분에 독일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지주들의 방해없이 민주주의를 꽃피울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물론 그가 바이마르 민주헌정을 파괴한 반동혁명가이며 전체주의자라는 사실이다.


이문열이 두려워하는건 노무현이 가진 이미지가 히틀라의 첫번째 측면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결코 두번째 때문이 아니다. 두번째가 문제라면, 박정희와 전두환과 그 잔당인 한나라당이 문제다. 노무현이 문제는 아니다.


그래서 나는 비록 노무현과 그 지지자들이 파시즘 코드를 가지고 있다고 보지만, 이문열이 노무현을 히틀러라고 칭하고 게다가 그것을 '욕'으로 사용하는 데엔 반대한다. 이문열씨에게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권고하고 싶다. 하나는 우리 사회의 존경받는 엘리트가 되기 위해 사회사상 쪽 교양을 업데이트하는 일. 다른 하나는 엘리티즘을 이론적으로 '주장'만하고, 본인이 엘리트라고 우기지는 않는 일. 그러지 못한다면 앞으로 시사쪽엔 신경을 끄시고 되도록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삼아 계속 소설이나 쓰시길 부탁드리고 싶다. 그의 후기작들은 비록 문학적 가치는 떨어지나, '옛날엔 이런 주장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문헌학적 가치는 충분한 것 같다. 건필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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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대 교지에 실렸던 글이다. 1) 진중권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2) 진중권-강준만 논쟁에서 진중권의 입장에 대한 옹호로 이루어진 글이다. 교지의 기획은 내가 진중권에 대한 꼭지를 맡고, 강준만의 지지자 한명이 강준만에 대해서 같은 식의 형식으로 소개 및 옹호론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매체에 실은 글인 만큼 처음 읽는 사람에게도 그럭저럭 편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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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 조우커의 임무

한윤형


…즉 '총선연대는 앞으로 홍위병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조심하라.' 말이야 맞는 말이다. 그의 말대로 총선연대는 '홍위병'이 될 수도 있고, 심지어 조직폭력배가 될 수도 있다. 여기서 총선연대는 아직 홍위병이 되어 보지도 못한 채 벌써부터 그 섬뜩한 이미지를 뒤집어쓰게 된다.…


2000년 2월 10일, 중앙일보 시론 란에 [이문열과 '젖소부인'의 관계?]라는 파격적인 제목의 글이 실렸다. 이틀 전 소설가 이문열 씨가 쓴 시론 [홍위병을 돌아보며]에 대해 직격탄과도 같은 반론이 나온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유기고가 진중권"이라는 필자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중앙일보 기자들은 찬반이 갈렸고, 신문사엔 항의전화가 빗발쳤다.      


그러나 그를 아는 소수의 사람들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이름은 몇 해를 넘기며 사랑받는 대중교양서 [미학 오디세이]를 쓴 사람의 것이었고, 극우 지식인들을 융단폭격한 "세기말의 명저"(유시민의 표현을 빌린다면)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를 쓴 사람의 것이었으며, 또한 수많은 인터넷 사이트에서 싸움을 벌이는 어느 논객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미학 전공자이며, "전투적 글쓰기"로 사회참여 활동을 하게 된 진중권을 파악하는 일은 쉽지 않다. 뚜렷한 근거지도 없이 여러 매체와 사이트에 예고없이 출몰하는 그는 마치 강호(江湖)의 협객(俠客)과도 같다. 그러므로 결국 그를 알려면 그를 따라 같이 날아(?)다녀야 하는데, 시인 노혜경의 말처럼 "그의 글과 말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새 스토커가 되어 있는 행복한 경험"이 기다리고 있기에, 비판적이든 우호적이든 간에 그의 스토커 숫자는 급기야 일개 사단에 이른다. 비판적인 사람은 그를 "일개 게시판 낭인에 걸맞지 않은 영향력을 가진 사람"(모 네티즌)으로 보겠지만, 우호적인 사람은 존경심을 담뿍 담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네티즌들은 둘로 분류할 수 있지요. 진중권과 토론해본 네티즌과… 그렇지 않은 네티즌… 근데 첫 부류가 좀더 많나?"(모 네티즌)


유력한 매체에 기고할 능력을 가진 사람 중에 지속적으로 인터넷 논쟁에 참여하는 사람은 진중권밖에 없다시피하다. 그는 왜 그러는 걸까? 그의 협객행(俠客行)이 능력을 썩히는 시간낭비라고 보았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그러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진중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의 생각에, 학술적 담론(談論)을 생산하는 한국사회의 지식인은 아무 힘이 없다. 언론에서 지식인이 "지역감정이 나쁘다"고 떠들어봤자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대중들의 세론(細論)에 빌붙어 선동질하는 언론의 존재 때문이다. 고로 지식인은 언론에 종속되며, 언론의 입맛에 맞게 요리된다. 그래서 어쩌면 일반인들의 뱃속이 온전히 드러나는 인터넷에 뛰어들어 뒹구는 것이 신문에 기고하는 것보다 훨씬 실천적이고 중요한 일일 수 있다. 그래서 진중권은 조선일보 독자마당에서 호남차별주의를 조소하고, 웹진 월장에 대한 예비역들의 부당한 공격을 막기 위해 부산대 게시판에 뛰어들며, 서울대 국문과 김윤식 교수의 표절을 밝혀 문제가 된 문화평론가 이명원 씨를 옹호하기 위해 서울대 국문학과 게시판에 뛰어든다. [폭력과 상스러움]의 후기에서 진중권은 말한다. "모든 것이 너무 '고상하고 정신적'이어서 역겨운 시대에 철학은 광대가 되어 지저분한 장바닥에서 질펀하게 쌈박질을 하며 노는 게 낫다." 조우커의 철학. 진중권이 장바닥에서 논다고 해서 관객을 중시한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그가 생각하는 광대는 "군중이건 대중이건 그 머리 꼭대기 올라앉아서 노는" 존재, "수틀리면 군중이라는 넘들의 뒤통수를 갈"기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게 "광대의 임무"란다. (인터넷에서 모음) 그리고 이 "임무"수행이 쓸데없는 시간낭비는 아니다. 대중의 사고에 직접 맞닥뜨리는 과정에서 그가 얻은 깨달음이 그의 글쓰기의 지반이 되기도 함을 [폭력과 상스러움]의 몇 단락은 보여준다.


"전투적 글쓰기"에 있어서 그의 선배라고 분류되는 강준만은 "실명비판"과 "출판의 언론화"라는 전술을 통해 지식인계의 화두로 떠올랐다. 김영민 교수의 비유를 빌린다면, 강준만은 "깊은 연못에 던져진 짱돌" 그 자체였다. 지식인 사회의 위선이 이 짱돌 덕분에 수면으로 급부상했다. 진중권 역시 강준만을 "그저 최소한의 상식, 최소한의 필력, 필요한 최소한의 도덕만을 가지고도, 우리 사회의 사이비들과 성공적으로 싸운다."고 평했다. "최소한의 상식"을 주된 무기로 한다는 점에서 강준만과 진중권은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상식이 두 사람의 무기의 전부는 아니다. 강준만은 상식으로 사이비를 격파하는 투사이기 이전에, 어떤 방식으로 어떤 지점을 타격해야 전체 싸움을 유리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인지를 고민하는 전략가이다. 그의 전략적 판단이 사회학적(社會學的) 자질에서 나옴은 물론이다. 소위 "조선일보 문제"는 "강준만이라는 한 자유주의자가 발견한 문제"(김규항)이며, 진중권 역시 이를 공유하게 되었다.    


반면 진중권의 사회비판 방식은 다분히 인문학적(人文學的)이다. "상식"이라는 공통분모를 벗어나면 진중권의 글쓰기는 강준만과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그의 글은 가벼울 때는 상식을 바탕에 깔고 몰상식에 대해 다채로운 풍자를 보여주지만, 무거울 경우엔 담론과 세론을 연결하고자 하는 인문학적 시도를 행한다. 모든 글의 바탕에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의 한 패러그래프를 깔았다는 [폭력과 상스러움]은 현재까지 나온 그의 사회비판 글쓰기의 가장 세련된 결정물이다.


최근 강준만은 진중권이 윤리적인 글쓰기를 한다고 비난했지만 사실 윤리적인 글쓰기는 강준만의 것이다. 대중에게 울림을 주는 강준만의 감성은 책상을 뒤엎는 분노다. "이건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이야!" 그의 거친 외침이 우리의 고막을 때린다. 그러나 진중권의 글쓰기는 윤리적이라기보다는 미적(美的)이다. 그는 미적 촌스러움을 견뎌내지 못하며, 공격한다. "이건 뭐야??" 이 강한 물음표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두 사람의 방식은 다르지만, 다르기에 다른 방향으로 우리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선비" 강준만과 "무당" 진중권이 동시대에 있으므로, 우리 다음 세대는 권위를 돌려야 마땅한 올바른 지식인 상이 둘 중 무엇인가에 대해 투쟁하게 될 지도 모른다. (결국엔 "선비"가 이기겠지만, 가끔 답답할 땐 "무당"의 필요성을 느끼겠지.)  


그런 두 사람이 최근 정면으로 맞붙었다. 아쉽게도 선비와 무당의 투쟁은 아니다. 이 싸움은 두 사람의 공통분모라할 "상식"의 부딪힘이었다. 강준만의 상식이 가끔 굴절되는 것 같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던 진중권이, 강준만의 저서 [노무현과 국민사기극]의 논의를 민주노동당 서울시장 후보 이문옥에게 적용시켜 "이문옥과 국민사기극"을 주장했던 것이다.


두 사람의 논쟁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으므로, 두 사람 모두 성인군자는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두 사람의 인격이 아니라 주장이므로 위와 같은 양비론은 불필요하다. 나는 논쟁의 측면에서 객관적으로 볼 때, 진중권에 비해 강준만의 논리가 매우 부실했다고 본다.


먼저 강준만은 진중권이 좌파이면서 "시민적 상식"의 외투를 쓴다고 비판했다. 이는 그 자신과 진중권이 공통분모로 갖추어야 할 상식의 지반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이다. 두 사람이 만들어야 할 시민적 상식은 정치적 입장의 차이를 넘어서야 하지 않던가? 혹자는 진중권을 비판하길 "그렇다면 대선땐 '시민적 상식'에 의거해 노무현을 찍어야 한단 말이냐?"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진중권은 (당시) 대선에선 노무현과 권영길이 시민적 상식 안에 포함되지만, 서울시장 선거에선 김민석이 아닌 이문옥만이 시민적 상식 안에 포괄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 주장에 반론하려면 김민석과 이문옥을 "상식"의 잣대로 재었을 때 발생하는 "거리"의 길이에 대해 논쟁해야 할텐데, 강준만은 결국 이 점에 대해서는 진중권과 진지하게 맞붙으려고 하지 않았다.  


또 강준만은 진중권이 말한 "시민적 상식"이 "정당정치의 원칙"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원칙"이라는 말에 쫄지 말자. 정당정치의 원칙은 내 사상과 취향에 맞는 후보를 찍기 위해 활용되는 수단적 원칙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이 수단적 원칙이 활용되는 경우는 두 경우이다. 첫째, 후보 개인에 대해 잘 모를 때 우리는 정당을 통해 판단할 것이다. 둘째, 후보 개인에 대해 잘 알고 다른 당 후보가 더 취향에 맞다 하더라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내 사상과 취향을 맞추기 위해 정당을 통해 판단할 것이다. 진중권이 제기한 논쟁은 이문옥이 시민적 상식에 부합함을 말하고 있으니 일단 첫째 경우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리고 둘째 경우의 가능성을 고려해 진중권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지방선거와 대선 사이에 연관관계가 있는가?" 이 질문은 둘째 경우가 말하는 "장기적인 관점"의 전략적 고려가 과연 필요한가를 묻는 질문이다. 따라서 강준만이 "정당정치의 원칙"을 말하려면 "연관관계 있다"고 답변한 뒤 논의를 진행시켜야 한다. 그러나 강준만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고 했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 많으면 있다"고 하기도 했다. 이런 부실한 토대 위에서 "정당정치의 원칙"을 말할 수 있을지 과연 의심스럽다.  


이 경우 진중권도 완벽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노무현을 지지하는 유권자에게 "서울시장 이문옥"이 최상의 모범답안이 될 수 있는가를 묻는 문제이다. 진중권은 이문옥의 성향을 말하고 민주노동당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지말고 민주노동당의 정책은 민주당과는 차이가 많지만, 지방자치단체장의 권한은 그리 크지 않기 때문에, 이문옥이 민주당 개혁세력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바라는 바에 어긋나는 행동을 현실적으로 할 수 없음을 말해야 했다. 그리고 결국 남게 되는 것은 이문옥과 노무현이 가지는 공통적인 개혁성과 상식임을 말해야 했다. 그러나 진중권은 이런 설명을 소홀히 함으로써 강준만의 "의혹"을 증폭시킨 책임이 있다.


마지막으로 강준만은 인터넷과 매체를 통해 이루어진 진중권의 논쟁방식이 부적절하기 때문에 그의 질문에 화답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진중권의 논쟁방식의 부적절성은 논외로 치더라도 이는 진중권 자신이 인터넷에서 적절히 지적했듯이 "대인논증의 오류"가 된다. 나는 강준만이 이전에 말했던 "선의적 해석, 생산적 논쟁"이라는 구호를 대단히 좋아한다. 강준만은 이번에 그것을 실천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저 구호의 옳음이 사라지겠는가? 진중권의 행동에 대한 비판과는 별도로 강준만은 진중권의 논점에 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나는 의무를 소홀히 한 강준만을 비판한다.


물론 논쟁의 문제와는 별개로 두 사람은 충분히 경의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다. 일부 네티즌들이 두 사람에 대해 과도한 비난을 퍼붓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특히 강준만의 진중권 비판의 논지를 그대로 받아들여 "진중권의 진실성 결여, 일관성 결여"를 외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것은 쉽게 말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 진중권은 "풍자" 혹은 "미적 촌스러움에 대한 경멸"이라고 특징지을 수 있는 그의 스타일 때문에 끊임없이 적을 만들고, 정보가 부족하거나 어떤 편견에 의해 올바르지 못한 판단을 내릴 가능성은 있지만, 결코 진실성 없는 행동을 하거나 일관성을 무시할 사람은 아니다. 그의 사소한 실수는 강준만이 논쟁과정에서 저지른 잘못과 함께 판단해야 공정할 것이다.


당연하겠지만 진중권에게도 부족한 면이 있을 수 있다. 진중권은 "공통분모인 상식"을 중시하고, 이 영역을 넓히려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민주당 지지자나 NL의 편협함뿐만 아니라 관념좌파들의 경직성에 대해서도 "상식" 수준에서 신랄한 비판을 할 수 있을지 앞으로 지켜봐야 한다. 또 그가 주로 "상식"을 말하기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고 모호하게 숨겨진 그의 "좌파적 정체성"에 대해서도 검증이 필요할 수 있다. 현재까지 진중권은 분명 한국 사회에 도움을 주는 논객이다. 그의 미래 행보를 같이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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