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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윤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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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8/09/12
    이 시점에서 ‘안티조선’ 담론의 실천적 효용성에 대해 (3)
  2. 2008/05/31
    거리시위와 통합의 제의 (16)

진보신당 당원게시판 쟁점과 토론 게시판에 올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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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주대환 논쟁”과 관련해서 매체의 문제가 중요한 논점인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김수민이 주대환과 최병천을 비판하면서 ‘안티조선’이라는 잣대를 들이밀었다. 이전에도 얘기했듯이 나야 언론문제에 있어서는 주대환 최병천보다야 김수민과 생각이 가깝다. 언론학자 강준만으로부터 시작된 안티조선 운동은 1) 언론권력이 정치권력의 종속변수가 아니라 독립변수가 되었다는 사실 2) 게다가 한국의 언론, 특히 조선일보는 대단히 정략적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고 그 결과 ‘조선일보를 구독하는 행위는 한나라당에 투표하는 행위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타당한 결론을 도출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당연한 소리이지만 당시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언론은 도구일 뿐이라는 관점이 우세해서 좌파지식인들도 조선일보에 기고하는 일이 빈번했고 민주당 지지자나 민주노동당 지지자도 조선일보를 구독하기도 했다. 이제는 이런 일을 하면 나이브하다고 욕을 쳐먹는다. 언론문제를 독립적인 성격의 문제로, 분석의 대상으로 격상시킨 것이 (초기) 안티조선 운동의 지대한 공로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언론문제를 분석하는 관점에서, 혹은 언론운동을 실천하는 관점에서, 여전히 안티조선이라는 프레임은 유의미한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답이 간단하지는 않은 것 같다. 나는 김수민의 주대환-최병천 비판이 이 단순하지 않은 문제에 대해 너무 단순한 대답을 도출해낸 상황에서 이루어진게 아닌가 생각한다.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기 위해 안티조선 운동의 정당성이 확립이 되던 시기인 2001년으로 돌아가보자. 그 시기로 돌아가서 이번 논쟁의 주인공인 주대환과 관련이 있었던 사건을 추려내보자. 사실 주대환과 안티조선 운동의 악연(?)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야기의 발단은 이렇다. 어느날 민주노동당의 운동가 박용진은 감옥에서 심심하게 지내다가 강준만의 <노무현과 국민사기극>을 읽었다. 그리고 읽고 졸라 빡이 돌아서 민주노동당의 월간지 <이론과 실천>에 피토하는 심정의 규탄문을 썼다. “비판적 지지론자 이 개객기야!!!!” 그러자 이 세상의 모든 잡지를 구독하는 강준만이 그 외침을 듣고 다음달에 반론을...아니 달래는 글을 썼다. “제 책은 민주당 지지자들 보라고 쓴 겁니당. 민노당 분들 열받지 마세요.” 근데 달래기만 했으면 괜찮았을 텐데 천하의 강준만이다보니 대충 이런 말이 나왔다. “근데 님의 글에 6개의 오류가 숨어 있네요. 첫째는 어쩌구 둘째는 어쩌구...” 그냥 좌파 내부의 비지론자들 단속하려고 고함친 죄밖에 없는 박용진이 머쓱해질 타이밍에 이론과 실천 편집부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주대환이 출동하면 어떨까?” 그리하여 주대환-강준만 논쟁이 시작되었다.



링 위에 올라온 주대환은 매우 인상적인 플레이를 펼쳤다. 그는 김대중 정부가 실패했는데 무슨 또 비지론이냐고 흥분한 박용진을 달래기 위해 “김대중 정부 실패했다고 말하지 마라. 우리에게 실패인 것이 그들에게는 성공이다.”라고 말했다. “양극화는 개혁이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개혁이 성공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라고 말하는 장하준 정승일이 들으면 좋아할만한 얘기였고,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은 아예 갈 길이 다르다는 선언이었다. “노무현은 미국으로 가자는 거고, 권영길은 유럽으로 가자는 거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극우 헤게모니? 그거 이미 깨졌는데 뭘 그래.”라고 주장해서 여러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이에 대해 강준만은 “극우 헤게모니가 깨지긴 왜 깨졌어요. 저기 눈앞에 보이는구만. 그리고 아무튼 노무현은 좀 짱인 것 같다능.”이란 식으로 대답했고 둘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던지라 논쟁은 그쯤에서 끝났다.



매체에서 벌어진 이 논쟁은 인터넷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키보드워리어’라는 말은 생기지 않았지만 키보드워리어 1세대쯤에 해당하는 인물들이 안티조선 우리모두라는 사이트에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말하자면 프로토스의 고향은 아이우, 키워의 고향은 우리모두... 이건 좀 아니고, 여하간 2001년이라면 PC통신의 ‘논객’들이 안티조선 우리모두로 흘러들어와 서로 잘난척을 하고 있던 시점이었고, 대략 2002년부터 이들이 다른 곳으로 떠나면서 오늘날 우리가 이름을 알고 있거나 들어도 잘 모르는 여러 종류의 키보드워리어의 서식지들을 만들게 된다. 



주대환-강준만 논쟁이 인터넷판으로도 전해지자 김동렬 등을 위시로한 친민주당 or 노무현 성향 키워들이 아예 민주노동당 노선을 밟아버리려고 규탄을 하면서... “민주노동당의 강준만 죽이기”를 막고 있다고 외쳤다. ‘극우 헤게모니’가 없다고 해버렸으니 안티조선 운동 하는 입장에서는 얼마나 현실 모르는 소리로 비쳤겠는가. 이에 맞서 좌파 쪽에는 주대환을 옹호하기도 하고 아니면 주대환이 좀 성근 소리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민주노동당은 짱이라능이라고 답변하기도 하는 식이었는데 가만히 싸움 구경을 하던 나는 불현 듯 이렇게 외쳤다. “그, 그러니까...전선이 두 개라능! 왜 두 개냐믄...이렇게 피터지게 싸우는거 보니 하나는 아닌 거 같고....그냥 두 개면 되잖냐능!!” 그 글을 쓴 심정은 대충 이랬지만 실은 졸라 길고 재미없는 글이었다. 훗날 최병천은 2002년 대선국면에서 이걸 들고 가 당시까진 아직 노빠였지만 나중에 ‘반-진중권 좌파연대’의 수장이 되는 전설적인 키워 수군작에게 “이게 아흐리만이란 아해가 쓴 ‘두 개의 전선론’이라는 건데요~”라고 말했지만, 수본좌께서는 “그건 뇌의 착각이며, 비겁한 변명에 불과해. 좌빨은 두 개 세 개 이런 거 모린다...좌빨은 모노닷!!”이라고 반응하여 (비록 본질은 겉은 빨갛고 속은 노란 사과에 불과했지만) 그의 포스를 증명하시기도 했다.



여하간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극우 헤게모니’라는 단어다. 이 단어는 안티조선 운동이나 소위 민주당 개혁파 노선의 유의미성을 강조하던 이들이 그때부터 수 년동안이나 심심할 때마다 읆조리던 단어다. 이 말은 강준만이 주대환과의 논쟁에서 사용했지만, 강준만이 만든 말은 아니다. 척봐도 강준만이 만들 어휘로 생기지는 않았다. 이 말을 21세기 한국사회의 어떤 모습을 지시하는 정치평론의 용어로 끌어온 건 홍세화, 파리의 택시운전사를 때려치고 한국사회의 ‘전사’로 거듭나기 위해 귀국한 그는 귀국 일성으로 강준만이 만들던 월간 인물과 사상에 장문의 글을 기고한다. 그 글의 제목이 바로 (워딩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 극우 헤게모니와 조선일보의 진지전과 기동전”이었다. 이 좌파의 언어가 안티조선 운동 진영으로 흘러들어와 강준만이 그간 경험적으로 추적해 왔던 “조선일보만의 특수성”이란 테제를 이론적 언어로 지시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고, 그 결과 강준만은 주대환과의 논쟁에서 자연스럽게 ‘극우 헤게모니’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왜 ‘극우 헤게모니’와 ‘진지전’과 ‘기동전’이란 단어가 필요했던가? 그것은 안티조선 운동을, 조선일보가 지지하는 한나라당을 정치적 경쟁자로 삼는 민주당 세력이 아닌, 좌파들에게도 의미있는 운동으로 만들기 위해 필요했다. 만일 어떤 이가 극우라면, 대충 이런 얘기들이 가능해진다. “유럽에서는 좌와 우가 힘을 합쳐 양극단을 몰아내더라... 좌파들이 자기 정치세력화를 위해 운동하는 건 또 따로 할 일이지만, 이들을 왕따시키는 데 힘을 보태는 것도 좌파가 마땅히 해야할 한 역할이 아니겠니?” 이게 이 논변에 대한 ‘약한 해석’이었고, (내가 만들었다는 ‘두개의 전선론’은 명백하게 이 ‘약한 해석’을 지지하는 입장이다.) “십라 극우 헤게모니가 살아있는데 사치스럽게 좌파는 무슨 좌파! 얼른 노무현 짱 밑에 와서 깃발을 바치라능!!”이라고 좌파들을 욕하는 게 ‘강한 해석’이었다. 몇몇 사람을 제외하면 약한 해석은 2002년 대선 국면이 닥치기 전에 폭넓게 수용이 되었다. 한편 강한 해석은 꾸준하게 지지하는 이들이 있었고... 이들이 좌파들한테 뭐라고 하면 좌파들은 또 “비판적 지지론자 개객기야!!”라고 반응을 하기도 하고... 약한 해석을 말하는 것처럼 여겨졌던 노빠 키워가 대선 때 상황이 급해지니까 갑자기 강한 해석으로 돌아서고.... 등등등의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이처럼 이 개념은 안티조선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긴 했는데, 2001년 말부터 거세게 전개된 ‘노사모 운동’ (...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하리라.)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지나칠 수 없는 개념이다. 비록 노사모의 외연 확장을 위해 노력한 노무현 지지자들이 직접적으로 이 단어를 언급하지는 않았더라도 말이다.



자 이제 이 담론이 구체적으로 조선일보에 어떻게 적용되었는지를 살펴보자. 말인즉슨 조선일보는 한국 사회의 ‘극우 헤게모니’를 유지시키기 위해 전략전술적 책동을 하는 그런 사악한 집단이다... 라는 얘기가 되겠다. 그런데 이 극우라는 개념은 한국사회에서는 반공주의나 사상의 자유에 대한 탄압이란 소재와 연결될 수밖에 없어서, 주로 장기수들에 대한 사상전향서(김대중 정부에서 ‘준법서약서’로 바뀐 후 나중에 사라짐)의 문제나 국가보안법의 문제, 그리고 문민정부 이후로 언론들이 주도했던 공직자에 대한 ‘사상검증’ 등이 어떤 이가 ‘극우’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 특히 조선일보 문제에 대해 가장 중요한 판단의 잣대로 작용한 것은 맨 마지막 것이었다.



김영삼이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로 들어가’ 문민정부를 탄생시킨 이후, 언론권력이 정부의 성향을 ‘통제’하는 기제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사상검증이었다. 말하자면 김영삼이 뭔가 진보적이라고 알려져 있던 학자를 장관으로 만든다.... 그러면 월간조선이 “그 개객기 빨갱이야!!”라고 소리친다... 조선일보가 “빨갱이를 공직자로 임명하다니...” 그러면 다른 신문들이 그 말을 그대로 따라하기도 하고 “빨갱이라고 소문난 이를 공직자로 임명하다니 엄훠 그런 경솔한...”이라고 하기도 해서 종국엔 인사에서 낙마하는... 그런 식이었다. 한모 장관, 김모 장관, 이모 장관 (이인제는 아니다.)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런데 김대중 정부 들어와서 조선일보가 저 유명한 “최장집 사건”을 일으켰을 때... 세월이 좀 바뀌었는지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월간조선이 선빵을 날리고 조선일보가 심혈을 기울여 지랄을 했는데도 다른 언론사들이 꿈쩍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당시 중앙일보 권영빈 논설위원은 “뭐냐 이 메카시즘....졸 지겹거든?!”이라고 칼럼에 쓰기도 했다. 말하자면 조선일보가 고립된 것이다.



이걸 보고 강준만이 “오케바리!!!! 딱이군!!!!!! 드디어 걸려들었어!!!!!!!!”이라며 조선일보를 신나게 맹비난해대다가...말지 정지환 기자와 함께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에게 명예훼손 고소를 당하고... 그걸 보고 분노한 홍세화가 한겨레에 “나도 고소하라능!”이라고 칼럼을 쓰고 어이를 상실한 진중권이 “낄낄. 이한우 학동 맛동산 사먹고 싶은가봐. 벌금은 네티즌들이 성금으로 모아서 주자고!”라며 인터넷에서 모금운동을 시작한 것이 소위 안티조선 운동이란 것의 우발적인(?) 시초다. 뭐 이런 식으로 잠깐의 시기 동안 좌파와 우파가 같이 모인 지식인운동이 하나 시작되었고 이것을 대중운동으로 확산시키려고 노력을 했던 것인데... 여기서 우리의 전설적인 홍세화짱의 정리는 이렇다.



“자자, 보라구!! ‘조선일보나 중앙 동아나 별 차이가 없다’고 말했지? 여기서 실천적으로 그게 아니라는게 드러나잖아? 뭐라고? 그건 그때 한번이고 지금은 별 차이없다고? 문화면에 좌파들 얘기도 잘 받아준다고? 에헤... 이 사람들 답답하네. 그러니까 설라무네 그때 저번이 ‘기동전’이었다면, 지금은 ‘진지전’을 하고 있는 거라능! 이렇게 진지전을 해서 평소에 부드러운 이미지로 지식인과 독자들을 속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그 영향력을 가지고 다시 기동전, 그러니까 빨갱이 사냥을 할거라능!!! 이제 정리되지? got it??"



......그렇게 조선일보는 나쁜놈이 되었던 것이다.    



홍세화의 논변은 당시의 구체적인 운동 정국에 대한 탁월한 분석이었다. 그렇게 기민하고 정확했던 분석의 사례를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에 와서 그의 ‘진지전’과 ‘기동전’론을 “조선일보만의 특수성”을 위해 적용하는데는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조선일보는 그후에 홍세화가 말했던 의미의 ‘기동전’을 펼친 적이 없다......OTL



물론 조선일보는 노무현도 괴롭혔고... 요번에 촛불도 괴롭혔다... 그런데 그 논변...혹은 논변 수준에도 못 미치는 땡깡들이 다른 신문들과 비교해 ‘극우’라고 규정지을만한 어떤 특수성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노무현 시대를 거치면서 이런 상황은 더욱 명백해져갔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두 가지 정도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조선일보의 ‘최장집 사건 학습효과’... 결국 최장집은 공직에서 낙마했고 월간조선에 걸었던 명예훼손 소송도 취하하긴 했지만... 조선일보로서도 두 번 다시 그런 식으로 왕따당하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둘은...중앙과 동아가 그후 더욱 꼴통이 되었다는 것... 그 계기는 2001년에 있었던 김대중 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였다. 솔직히 안티조선 초기에 중앙과 동아는 이 운동을 자신들의 영향력을 증대시키는데 이용해 먹고픈 유혹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한놈만 패! 그러면 효과는 나와!!”라는 전략전술적 거시기로 시작한 안티조선 운동의 참여자들이 바랬던 것이었다. 동아는 “신동아 보라능?! 우리 가끔 진보적이라능!!”이라고 말했고... 중앙일보는 “우리는 저렇게 허접한 반공주의자는 아니고 시장의 합리성을 믿는 보수거등여?!”라고 주장하고 싶어했다. 그런데 언론사 세무조사가 언론들을 강타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안티조선 운동은 대중운동의 영역에서 크게 확산되기는 했지만 ‘조중동’은 서로 결합해 버렸다. “아...안되겠다능?!! 우린 같은 편이라능!!!” 특히 90년대 말까진 ‘자유주의자’ 유시민이 칼럼을 쓸 수 있을 정도의 독립된 정체성을 지니고 있던 동아일보가 사주의 그릇된 판단으로 ‘조선보다 더한’ 길로 나아가기 시작하면서 ‘조선일보’의 특수성에 대한 논의는 점점 더 빛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최근의 정국을 통해 생각해보자. 사노련 관계자들 체포 때 조중동은 어떻게 반응했던가? 조선일보는 “옛날엔 사회주의자라고 말하는 문건만으로 법원이 영장 청구해줬는데 투덜투덜... 하여간 조사 좀 더 잘해보라능!”이라고 말했고 중앙일보는 “조사 좀 잘해서 넘기지 왜 바꾸를 맞고 지랄이냐능?”이라고 반응했다. 동아일보는 사설에선 반응이 없었다. 약간의 차이가 감지되기는 하지만, 이거 가지고 뭐라고 하기는 우습다. (예전처럼 조선일보가 ‘기동전’을 한번 더 뛰어준다면 “이...이건 진지전이라 비슷한 거라능!”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말이다.) 게다가 이명박에 대해선 동아일보가 가장 격렬한(?) 옹호자라는 사실이 알려져 있고, 시장권력에 대한 맹동적인 추종에서 중앙일보는 조선일보를 찜쪄먹는다. 이런 사정을 생각해 보면 더더욱 세 신문을 구별하기가 그렇다. 참여정부 말기에 언론운동 단체 관계자라는 사람들이 ‘조중동’이 아니라 ‘조동’이라고 해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참 한심했던 적이 있다. 중앙일보의 폐해도 만만치 않은데 단지 중앙일보과 노무현과 잠깐 밀월관계를 형성했다는 이유만으로 빼려고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히려 촛불시위 지지자들의 조중동 반대운동이야말로 안티조선 운동이 지니고 있던 실천적 효용성이 끝났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판단된다. 물론 조중동에 이번에 문제의식을 지니게 된 시민들은 과거 안티조선 운동의 참여자들이 만들어낸 많은 이론이나 서사를 통해 그들의 문제의식을 환기시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과거에는 ‘조선일보’로 특징지을 수 있었던 것이 이제는 ‘조중동’으로 묶어서 비판할 수밖에 없는 상황적 변화가 있었기에 그들이 ‘안티조선’이 아닌 ‘안티 조중동’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도 명백한 것으로 보인다. 21세기 초의 안티조선 운동과 촛불정국의 안티조중동 운동은 시민사회의 언론운동의 연장선상에 있고, 문제의식도 동일하다. 그러나 전략의 부분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조선일보의 특수성을 말하기 위해, 많은 이들은 친일, 친독재, 수구세력 옹호...의 레퍼토리로 대변되는 조선일보 88년의 역사를 모두 읊는다. 그것은 이른바 ‘극우 헤게모니’론을 통해 조선일보의 특수성이 이론적으로 분명히 정립된 상황에서는, 가능하고 필요한 서사였다. 하지만 그것이 무너져버린 지금 상황에서, 그 역사를 읊는 것만으로 조선일보와 다른 신문의 차이를 말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가령 친일을 생각해보자. 1930년대 조선일보의 맹목적인 친일은, 현재의 조선일보 문제와 연관을 지니는가? 큰 맥락에서 그들이 줄곧 권력추종적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고 말해볼 수도 있다. 하지만 친일로 따지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동아일보도 했다. 물론 프랑스에서 그랬듯 그런 신문들은 해방이 되자마자 폐간시켰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건 정당하다. 그런데 그 친일을 한 동아일보가 1970년대까지 ‘일등신문’이었고, 그것도 조선일보식의 ‘일등신문’이 아니라 권력에 대한 가장 매서운 비판자로서의 일등신문이다는 사실은 기억해야 한다. 박정희 정권의 광고탄압 사건 이전까지의 동아일보를 부인할 수 없다면, 친일을 했기 때문에 바로 너는 오늘도 ㅅㅂㄹㅁ다라는 식의 접근은 무리가 있다. 친일파야 개인의 정체성을 지니지만, 오늘의 언론사를 구성하는 이들은 그때의 구성원들과 전혀 다른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 조선일보 방우영 회장은, 물론 친독재였고 박정희한테 ‘밤의 대통령’이란 별명을 하사받기도 했다. 그런데 이 별명은, 훗날 그의 팔순잔치 때 조선일보 임직원들이 주장했듯 그가 정치적으로 힘이 세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 아니라 밤에 박정희랑 안가에서 술먹고 놀 때 기생이랑 잘 논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고 전해진다. 친일, 친독재 운운하지만 박정희 정권 때까지 조선일보는 굳이 안티를 해야 할 대상도 아니었다. 전두환 집권 당시 노골적으로 용비어천가를 부르고, 그후 파시스트 정권의 물심양면의 지원을 받으며 동아일보를 제끼고 일등신문이 된 이후의 조선일보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일보의 모태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조선일보가 80년전에 친일을 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한 일이 아니라, 역사의 흐름 속에서 우연성과 힘의 관계들이 조응하여 벌어진 일이다. 1990년대 후반의 동아일보가 나름의 품격은 지키고 있다가 급격하게 ‘수구’세력에 합류한 사건도 그렇고, 21세기 이후 소위 ‘조중동’이 예전에 비해서도 점점 더 친화성을 키워가고 있는 현실도 그렇다. 안티조선 운동의 분석틀은 여전히 유효하겠지만, ‘안티조선’이라 일컬어지는 전략의 부분에서는 분명 현실의 힘의 관계들을 토대로 다시 구성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제 애초의 질문으로 돌아오자. “안티조선이라는 프레임은 여전히 유효한가? 즉, 진보신당의 언론 정책에서, ‘조선일보’만을 특별히 배제해야 할 어떠한 실천적인 타당성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고 느낀다. 아예 안티조중동을 실천하는 것은 논변적으로는 깔끔하지만 현실에서는 지나친 손해를 보게 되고, 안티조선을 얘기하는 것은 굉장히 상징적인 의미에서 체면치레를 하는 수준에 그친다. 굳이 나더러 택한다면 후자를 택하는게 좋겠다고 주장하고는 싶지만, 이 정도 수준의 타당성이라면 이 모든 것을 반대하는 이들의 입장에도 일리가 없다고는 볼 수 없다. “김수민의 (안티조선 논변에 입각한) 주대환-최병천 비판이 이 단순하지 않은 문제에 대해 너무 단순한 대답을 도출해낸 상황에서 이루어진게 아닌가 생각”한다는 첫 번째 문단에서의 나의 말에 대한 의미가 이제는 드러났기를 바란다. 물론 맨처음에 언급했듯이, 이는 “주대환 논쟁”의 핵심적인 논점과는 관계없이 별도의 논점을 구성하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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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문화제에서 촉발된 거리시위가 굉장히 흥미로운 정치현상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또한 그것이 (그것이 가진 모든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 정치 문화를 곧바로 담보하지는 못한다는 사실 역시 명백한데, 그 이유는 이 시위가 '통합의 제의'이기 때문이다.


거리에는 무당파와 좌파와 민주당 지지자가 모두 나와 있다. 심지어 박근혜 지지자도 나와 있다. 이들은 아주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 존재하지 않았던 '정치적인 통합성'을 경험하는 중이다. 이 경험에 준하는 사례를 끌어올려면, 결국에는 정치적인 행사가 아니라 다른 종류의 축제를 언급해야 한다. 즉, 월드컵 당시의 거리응원 말이다.


2002년 당시 월드컵 거리응원이 파시즘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했던 박노자의 진단에 대해 나는 반만 동의했다. 그것이 파시즘으로 전환될 요소가 있다고 말한다면 거기에는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체로 파시즘의 발현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전근대적이었다. 박노자는 그 거리응원의 동력을 박정희 전두환의 독재정치로부터 끌어왔다. 반면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는 그 연원을 동맹, 영고 등의 고대국가에서 통합의 기능을 담당했던 제천 행사와 비교했다. 당시 나는 차라리 후자가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대한민국'이라는 외침은 온 천하를 뒤덮었고 거기에 나는 조금 충격을 받았는데, 왜냐하면 내가 읽는 모든 책들에서 '한국'은 온전한 조국이 아니라 '둘로 갈라진 조국의 반쪽'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붉은 악마'는 그 사실을 부정했고, 이 하나의 국가에서 우리가 온전하게 통합성을 느낄 수 있음을 주장하고 또한 증명했다.  (관련글:
붉은악마와 민족주의 )


우리가 바로 전세대를 계승하지 않고 저 먼 고대를 계승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당시의 내 생각은 이런 식으로 수정해야겠다. 우리의 독재자들도 그런 식의 통합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는 가설을 세워보는 것이다. 가령 윤해동은 박정희에 대해, 박정희가 대부분의 국민들을 설득하려고 노력한 후, 결코 설득이 되지 않는 소수자들에게만 폭력을 행사하는 식의 리더십을 발휘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바로 이것을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시대를 잘 모르지만, 여전히 이견의 존재를 용인하기 힘들어 하는 현대 한국 사회의 문화를 생각해 볼 때, 이 의견은 굉장히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가령 한국적 폭력의 축소판이며 한편의 희극이기도한 <디 워> 사태에 대해 생각해 보자. 아주 선량한 어느 디빠는, 최선을 다해 상대방을 설득하려고 노력할 것이며, 그런 노력이 전혀 무용하다고 생각되는 상대에게만 사이버 테러를 가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폭력을 가한 건 자신이 아니라 '통합'을 거부하고 이죽거린 상대방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의 마음 속에서 그것은 완벽한 진실이다. 이 얼마나 한국적인 현상인가?


민주주의 정치 문화는 근본적으로 이견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위에서 타협을 추구하는 기술이 되어야 한다. 투표를 해서 패배한다 해도 나는 생각을 바꿀 필요가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전근대 사회와, 근대화 시기의 한국 사회에선 그런 문화가 수용되지 않았음이 틀림없다. 박정희식 통합의 리더십은 되도록 우리가 같은 생각을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의 아버지 박정희는 그것을 위해 최대한 노력한 후, 다수에 합류하기를 한사코 거부했던 소수자들에겐 폭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독재국가에서도 대다수의 시민들은 폭력을 당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빨갱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견해는 '막걸리 반공법' 같은 것을 생각해면 굉장히 러프한 면이 있는데, 우리의 문화적 감수성을 설명하는 하나의 가설로 이해해 주면 되겠다. 실제의 박정희가 이렇지는 않았더라도, 대부분의 국민들은 박정희에게 이런 식의 판타지를 투영한 후에야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고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관련글 :
혼네의 민주주의 )


민주화가 이루어진 후 도래한 김대중-노무현 시대는 정치적인 면에서 이러한 (한국인들이 어머니의 요람처럼 마음 편하게 받아들이는) 통합의 정치가 사라진 시대였다. 조중동은 자신들이 대통령을 우습게 여길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미칠듯이 저주했다. 정신분석적으로 바라보면 아버지가 자신을 때려주길 바라면서 히스테리를 부리는 아이같은 증세였다. 이 시기에 우리가 갈등을 그대로 드러내고 그것을 조율하는 민주주의적 정치의 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모두 알다시피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대신 김대중-노무현 시대의 정책을 있는 정책 그대로 보고 비판하려는 사람들과 그래서는 안 된다고 본 민주당 지지자-노빠들의 싸움이 있었다. 물론 큰 틀에선 한나라당-조중동 동맹과 기타 세력의 싸움이 있었지만, '통합성'이란 측면에서는 오히려 전자가 더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지도 모른다.


다음 아고라를 잠깐이라도 살펴보면, 이명박이야말로 골수 한나라당 지지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반대할 수 있는 강력한 유인을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그러다가 누군가 민주당의 무능함을 질타하면, 찬성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금세 반대하는 이들이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요즘 시위의 '대중성'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다. 만일 노무현이 이런 짓을 했다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 명이 이탈한다는 것은 단순하게 -1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 한명은 또 남들이 노무현을 씹는 것을 참을 수가 없기 때문에, 씹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싸움을 걸고 있다. 한명이 이탈할 때마다 -2 혹은 -3의 효과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 시대에 그런 것을 걱정할 이유는 없다. 이제 한때 청소년들 사이에 퍼졌다는 "이명박이 독도를 포기했다."라는 괴담에 대해 생각해 보자. "청소년들은 자신들에게 피부로 와닿는 교육정책과 급식문제에 관련된 쇠고기 정책에 일어났다."는 표준적인 설명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다. 괴담이 있었어야 했다면 왜 "이명박이 사립학교 1천개를 지으려 한다."가 아니라 "독도를 포기하려 한다."는 것이어야 했던 것인가? 왜냐하면 그들은 이명박을 외국인으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10대들은 물론 윗세대와 구별되지만, 한국 사회의 문화적 맥락에서 전적으로 독립적이지는 않다. 그들이 말하는 바는 명백하다. "이명박은 '대한민국'이 아니다. 이명박은 '우리'가 아니다."


노빠와 창빠와 박빠와 문빠와 주사파와 좌파가 다툴 필요가 없는 시위다. 앞열에 선 예비역과 그 뒤에선 페미니스트들이 굳이 으르렁댈 필요가 없는 그런 시위다. '좋은' 것인가? 지금으로선 그렇다. '잃어버린 십년'이란 말도 안 되는 레토릭에 사람들이 동의했던 것은 그동안 이런 식의 통합성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이명박을 '이방인 통치자'로 만드는 판타지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고유한) 정체성을 회복했다. 그래서,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거기에 대한 '답'은 아직 없다. 그게 우리의 거리시위가 아직 온전한 민주주의를 담고 있지는 못한 이유다. 하지만 '진화'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다시 이 출발점으로 돌아와야 했을 것이다. 거리의 인파들은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매우 긍정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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