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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 칼럼과 장하준 (30)
- 2007/08/20
- 2007/03/25
- 2007/03/09
제목에 의아해 하는 분들이 많겠지만 기본적인 내 착상은 다음과 같다. “<디 워>는 애국주의 마케팅으로 성공한 영화다.” “그런데 <디 워>만 애국주의 마케팅을 사용했나?”라는 식으로 전개되는 계몽주의자와 냉소주의자의 대화는 각기 일말의 진실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것, 그러므로 이 대화를 넘어서는 분석이 없다면 결코 <디 워> 사태에 대해 깔끔하게 설명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이 설명만이 한국 영화 산업의 미래에 또 다시 닥쳐올 수 있는 “디 워-마케팅”의 위험성에 대해 적절하게 경고할 수 있을 거라는 것이다.
<디 워>와 다른 영화의 차이를 ‘애국주의 마케팅’으로 변별할 수 없다는 냉소주의자들의 지적은 합당하다. 왜냐하면 양자의 차이는 그저 상대적인 것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애국주의 마케팅’이 <태극기 휘날리며>를 +20% 정도 더 포장해서 헐리우드급 전쟁영화로 만드는데 기여했다면, <디 워>의 경우 +50% 정도 더 포장해서 준-헐리우드급 블록버스터로 만드는데 성공했을 거라고 말해볼 수 있겠다. 양자의 차이는 크다고 볼 수 있겠지만, 어찌됐건 ‘상대적’이다.
한국 영화 산업의 흘러간 십 년을 돌이켜보면, 우리는 언제나 자본이 영화 산업에서 철수를 고려할 정도의 시점이 되면 적절한 흥행작이 터져 나왔다는 사실을 기억해낼 수 있다. <쉬리>가 바로 그런 식으로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열었고, 다시 침체의 기미가 보일 때 마치 구원투수처럼 <살인의 추억>이 나타났다. 이것을 우리는 기가 막힌 ‘우연’이라 봐야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디 워> 논란을 봉합한 후 시작된 2008년의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과 <추적자>에 대한 우리의 열광을 생각해보라. 엄정한 비평적 시각에서 볼 때, 우리는 2루타 정도에 불과(?)한 <우생순>을 홈런으로, 3루타 정도에 해당하는 <추적자>를 만루홈런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디 워> 사태가 소위 평론가와 (이 말이 가리키는 사람의 범위가 확실한 것이지만) 관객 사이의 전쟁이었다고 해석되어 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애국주의가 일종의 견고한 동맹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해 내지 못했다. 한국 영화 산업의 애국주의 마케팅은 정부의 보호주의 정책(스크린 쿼터)과 저널의 의미있는 지원, 그리고 관객들의 ‘정치적 소비’의 삼위일체가 결합된 ‘애국주의 동맹’이었다. 나는 이미 2007/08/31 - [문화/영상물] - <디 워>의 흥행과 정치적 소비의 문제 에서 관객들의 <디 워> 관람이 일종의 산업정책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다고 지적했지만, 정치적 소비라는 행위 자체가 한국 영화 산업의 역사 전체를 포괄하는 포인트라는 사실은 아직 인지하지 못 했던 셈이다.
이런 ‘애국주의 동맹’은 나쁜 것이었던가? 그렇지 않다. 정부의 적절한 정책과 저널의 분별있는 지원, 그리고 현명한 관객들의 영악한 소비에 힘입어 한국 영화는 성장해 왔다. 마치 개발경제학자 장하준이 권장하는 개발도상국 성장 모델의 영화산업적 변형인 듯 싶다. 즉, 한국 영화 산업의 발전은 사실상 박정희가 주도한 한국 경제 발전사의 축소판이었다. 이 ‘성공’의 결과 우리는 미국의 어느 비평가가 (<디 워>의 허접함에 경악하면서) 인정했듯이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영화 언어를 소유한” 나라가 되었다. 2003년 중반 <살인의 추억>부터 2004년 초반 <태극기 휘날리며>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미국 영화를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 자국 영화 산업이 ‘주류’가 될 수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그 당시 한국 영화 관객들의 자부심은 엄청나게 고양되어 있었다. 당시 어느 게시판에서 발견한 기억에 남는 어느 네티즌의 덧글. “하하하!! 드디어 미국애들이 외국 영화 안 보는 이유를 납득할 수 있어. 자막 보기가 너무 귀찮아!!!” 이 언표는 한국어로 된 문화 콘텐츠가 우리를 만족시키는 데 충분하다고 느꼈던 어느 찰나지간의 영광의 순간에 대한 영원한 기념비다. 우리는 우리에게 이런 느낌이 가능했음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왜 한국 영화 산업은 그 ‘영광의 순간’을 지속하지 못 했던가? 사실 그 순간은 재능있는 감독들의 우수한 작품들이 우연히 겹친 기간이었고, 정상적인 침체과정을 겪은 후 우리는 다시 도약할 수 있을 거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국민경제에 비유하자면 단지 지금은 정상적인 경기 순환 과정에서 불경기에 해당한다는 주장이다. 올해의 한국 영화 라인업에서 기대가 되는 작품이 많기 때문에, 나는 이런 주장에도 전혀 일리가 없다고는 보지 않는다. 하지만 제작 현장과 저널에서 침체의 분위기를 감지하는 것이 ‘대세’라는 것도 또한 사실. 직접적으로는 이런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스크린쿼터 축소는 사실상 한국 영화시장의 파이를 절반으로 축소시켰다.” 국민경제에 비유한다면 보호주의 무역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하는 장하준 등의 반세계화론자들을 떠올리게 하는 설명 방식이다.
외재적 요인으로만 문제를 설명해서는 안 된다는 시각도 있을 수 있다. 어느 정도의 경쟁력을 확보했다고 믿은 한국 영화 산업이 어째서 스크린 쿼터 축소에 이다지도 취약한지를 물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국 영화 산업이 ‘애국주의 동맹’으로 키운 덩치를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구조조정에 실패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주장은 재벌 위주 경제성장의 취약함이 한국 경제의 커다란 문제라는 자유주의적 개혁을 옹호하는 경제학자들의 주장을 상기시킨다. 그들은 장하준 등과는 달리 IMF가 자유주의적 세계화 때문에만 생긴 사건이 아니라 재벌들의 독과점을 적절하게 규제하지 못한 데에도 그 원인이 있다고 본다. 90년 대 이후 국민경제에서 일어났던 일과 비슷하게, 스크린쿼터 체제 내에서 제작사들은 극장주와 겸업하는 사실상의 독과점 체제에 들어섰고 거대 기업의 이윤을 지키기 위해 한국 영화의 다양성을 훼손했다. 이것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득이었지만, 한국 영화 산업의 잠재력을 훼손시키고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시점까지 저널과 관객들은 반목하기는커녕 굳건한 동맹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김규항이 “타인의 취향”을 통해 ‘평론가 논쟁’을 일으켰을 때 관객들은 사실 평론가들의 글을 읽지도 않았을 거라고 말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이 말은 김규항이 지칭한 평론가를 저널 전체로 확장해서 생각한다면 (김규항의 의도가 그렇지는 않았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한국 관객들은 그 사실을 부인할 때조차도 알게 모르게 영화 저널들에게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게 나의 새로운 추측이다. <디 워>를 옹호하면서 디빠들은 충무로를 비난하면서 “조폭 영화의 저질성”에 대해 언급했다. 그들이 저널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그런 인식을 형성했을 거라고 믿는 건 너무 순진한 일이다.
문제의 핵심은 거대 제작사들이 독점을 강화해 나가면서 이 동맹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며, 이 균열에 책임이 있는 거대 제작사들이 오히려 그 책임을 가상의 적에게 돌리면서 파괴적인 방식으로 이윤을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쇼박스가 그간 어떻게 독점을 강화시켜 나갔으며, <디 워>의 흥행을 위해 어떤 마케팅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저 유명한 tango 님의 명문 2007/09/06 - [문화/영상물] - [펌] 선빵의 사실관계, 그리고 <디 워>의 마케팅에 대해서 한 말씀... / tango님 이란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쇼박스라도 언제나 심형래같은 감독이나 <디 워>같은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 사건은 어느 정도는 우연적이기도 하다. 앞서 나는 계속 영화 산업의 역사를 국민 경제의 역사에 비유해서 설명했는데, 양자 간엔 큰 차이도 있다. 우리의 국민 경제가 외화벌이를 위해 수출주도형으로 성장해 왔다면, 영화 산업은 문화 산업의 특수성 때문에 내수위주로 성장해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후자 쪽이 더 낫다. 한국은 영화제에서 상받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감독보다, 흥행을 위해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훨씬 많다는 점에서 진짜로 영화 산업을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나라다. 그런데 심형래는 애초에 수출주도형의 마인드로 자본을 끌어모은 인물이다. 아마도 그런 주장을 하지 않으면 돈을 끌어모을 수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수출주도형 산업에 대해 경험적으로 남다른 이해와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한국 관객들은 그의 욕망을 추인했다. 심형래의 욕망과 관객들의 욕망이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는 나의 글 2007/09/20 - [문화/영상물] - <디 워>, 페티시즘 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심형래의 욕망과 쇼박스의 마케팅이 적절하게 맞아 떨어졌고, 관객들이 그것을 추인하기까지 했다. ‘애국주의 동맹’은 깨어졌고 자본의 사주에 적극적으로 놀아난 관객들이 저널을 욕하기 시작했다. 이 사태의 문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관객들이 <디 워>가 애국주의의 포장으로도 극복하기 힘든 저열한 영화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 했다는 사실. (이 사실에 대해 나는 2007/09/20 - [문화/영상물] - <디 워>가 재미있다는 사람들이라는 글로 조소한 바 있다.) 다른 하나는 이 사태가 유발한 논쟁이 아마도 한국 영화 산업의 진짜 문제일 수 있는 제작사의 독과점 문제를 은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애국주의’가 애국적인 역할을 하려면 거대 제작사의 이해관계를 침해해야 한다. 당연히 거대 제작사는 그런 침해를 거부한다. 광고를 적절히 통제하여 직접적으로 저널의 입을 막고, 노이즈 마케팅을 통해 관객을 선동하여 간접적으로 저널의 입을 막는다. 한국의 재벌들이 협력업체들의 몫을 착취해서 내수를 부진하게 만들면서도 경제위기를 ‘반기업 정서를 퍼트린 좌파 정부의 탓’으로 돌리고, 삼성이 각기 광고와 소송을 통해 한겨레와 프레시안을 통제하는 광경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것은 더 이상 ‘애국적’이지 않다. 하지만 주장하는 그들은 ‘애국주의’라고 말한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것에 말려서 따라간다. 하지만 저널조차 통제받는 사회에서 이 세태에 맞설 대안은 찾기 힘들다. 이것이 사태의 본질이다.
이제 우리는 “한미 FTA에 반대하며, 스크린쿼터에 찬성하면서, <디 워>에는 반대하는 진보지식인의 어리석음”을 말했던 변희재(-그런데 이것이 '어리석음'이라면 변희재 자신은 정확하게 이것과 물구나무선 주장을 하고 있지 않은가? 비일관성이 어리석음이라면 그 비일관성을 모두 반대하는 것도 당연히 비일관적이고 어리석은 일일 텐데, 그는 자신이 자해행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가 어떤 식으로 헛다리를 짚었는지 직관적으로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다. 변희재의 주장은 냉소주의자들의 것의 집합체로, 진실의 일단을 보게 했다. 그러므로 내가 사태를 정리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진중권은 그다운 방식으로 반대자들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명확하게 (어쩔 수 없이 약간의 단순화를 수반하는 방식으로) 정리하여 논파했다. 언젠가 이택광이 다른 사건을 대하는 진중권의 태도를 보고 내게 보내는 메일에 적었던 것처럼, “작열하는 태양같은 계몽주의”였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고 주문을 외우는 순간 하늘에서 섬광처럼 마법의 빛이 터졌고 오크들은 눈이 멀었다. ‘애국주의’가 <디 워>만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던 하재근조차 그 빛에 그만 무릎을 꿇었다. 그것은 지식인이 자신의 전공 분야의 상식을 통해 부조리를 논파한 모범적인 사례였다. 이제 온 국민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무엇인지 안다. 놀랍지 않은가.
<디 워>를 내용적으로 분석하거나 두루뭉술하게 넘어 갔던 몇 명의 지식인들은 이 논쟁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 했다. 대중이 욕망한다고 여겨지는 그 무엇에 대해 지식인들이 그다지 강단 있게 나서지 못함을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그러므로 진중권이 디빠들 뿐 아니라 지식인들에게서도 문제를 발견하고 “<디 워>는 (이 모든 문제를 드러내준) 에피소드에 불과하다.”고 평한 것도 합당한 말이었다. 그러나 나의 이 글에 따른다면, 그도 사태를 간략하게 만드느라 놓친 부분이 있었고, 어쩌면 <디 워>가 에피소드가 아니라 전조일 거라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의 영화 산업과 국민 경제의 비유를 확장시켜 보면, 나는 쇼박스의 행태가 한미FTA 등 자유무역이 심화한 다음에 재벌이 한국 땅에서 무슨 일을 저지를지를 보여주는 우울한 예시라는 느낌이 든다. 지식인과 저널이 그들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도 비슷하고.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발현되고 있는 현실 그 자체다.
무엇보다 해악이 컸던 것은 김규항의 비평이었다. 그는 변희재처럼 일말의 진리를 발설하지도 못 했고, 논쟁 전체를 심각하게 먼 곳으로 워프시켰다. “타인의 취향”에 대한 그의 술자리 해설에도 나는 불만이 많지만, 김규항의 논리 자체보다는 김규항과 내가 같이 바라보고 있었던 사태에 대해 정확하게 기술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자세한 코멘트는 생략한다. 그러나 “민중이 알아듣지 못 하도록 어렵게 글을 쓰는 평론가”라는 개념은 ‘<디 워> 사태’가 아니라 그의 머릿속에만 들어 있던 것이라는 사실은 명확하게 지적되어야 한다. 그것은 쇼박스의 마케팅 전략에도 없던 개념이다. 사실 디빠들도 영화 잡지 기자들이 이전에 한국 영화를 옹호하듯 디 워를 옹호하지 않는다고 분통을 터트렸지, 글을 어렵게 쓴다고 말을 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김규항이 제 머릿속의 개념을 꺼내기 전에는.) <디 워>는 정석적인 영화 평론의 입장에선 진중권의 말대로 “평론할 가치가 없기” 때문에 어렵게 깔 수도 없는 영화다. 아무도 <디 워>를 어려운 언어로 깐 적은 없는 것 같다. 다만 이 사태에서 김규항보다 더 멍청했다고 단언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김휘영이 난해한(?) 언어로 횡설수설하면서 <디 워>를 옹호한 적은 있다. 진중권을 “시간을 달리는 교수”로 격상시켰던 그 김휘영 말이다.
김규항은 지식인은 대중을 비난할 수 없으며 대중이 왜 그렇게 행동하고 있는지를 따져야 한다고 말한다. 앞부분엔 동의하지 않지만, 뒷부분은 동의한다. 그들의 행동이 어째서 잘못되었느냐를 말하는 것보다는, (물론 이것도 필요하다.) 그들이 어째서 그런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는지를 밝히는 것이 언제나 더 심오하다. 하지만 이 문제 역시 내가 이 글에서 대략 밝혀 놓았으니, 이제 이 사태와 관련도 없는 ‘취향’이란 단어는 그만 거두어 주시는게 어떨지. 2003년에서 2004년까지의 인터넷 정치 평론의 시대를 돌이켜보면, 나는 진중권처럼 스피디하게 쓰지는 못 했지만 그가 싸움을 끝낼 무렵에는 언제나 그가 놓친 지점까지 포괄하는 (그와 그의 논적들의 주장을 모두 포괄해서 집대성하는) 글을 하나 쓰는데 성공하고 있었다. 바로 이런 글 말이다. 그런데 이번만은 <디 워> 사태가 몇 달이나 지난 다음에서야 이렇게 뒷북을 치게 되었다. 김규항은 나처럼 총명한 젊은이가 제대로 된 진상을 규명하게 되는 감격의 순간을 몇 개월이나 지연시켰다. 책임지라는 말은 아니고, 그냥 그렇다는 얘기다.
덧 : 변희재의 글이 신경쓰이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디 워>과 부가판권 시장과 기타 해외시장에서 큰 수익을 올렸다는 주장이다. 허지웅 님의 말처럼 그랬다 한들 문제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구지식인(?)을 질타하는 그의 산수 수준이 가히 예술이다. 총매출과 순이익을 구별하지 못하는 의도된 천진난만함. 나를 5살 때까지 키우신 우리 할머니는 내가 4살 때 이미 할머니 외출 시 그녀의 구멍가게를 맡을 만큼 총명했으되 내가 손님으로부터 받은 돈 전부를 내가 번 돈으로 인지하고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니까 변희재는 내가 4살 때와 비슷한 수준인 거다. 그리고 그는 쇼박스, 극장, 영구아트무비의 이익을 배분하는 일도 전혀 하고 있지 않고 기타 의심스러운 비용들을 모두 제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선 저 유명한
충격 님의 글 "디워-북미 와이드 릴리즈. 그 성과(?)를 중간점검한다." http://shougeki.egloos.com/1484861 를 참조하면 될 듯. 그의 비용 계산을 충실히 따라가다가, 변희재가 좋아하는 그 <디 워> 팬카페가 수집했다던 추가수익을 더 해주면 대충 감이 나온다. <디 워>는 아직도 그리 큰 이윤을 남긴 상품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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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가 극찬한 이단 경제학
그런데 반응이 호의적이지만은 않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와 파이낸셜타임스는 “역사적 기록이 불확실하다” “역사적 교훈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과거 보호주의로 성공했으면서도 개발도상국에는 자유무역 자유시장을 강요하는 선진국을 ‘나쁜 사마리아인’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참여정부 식으로 해석하자면 ‘주류’ 보수언론의 악의적 보도가 아닐 수 없다. 2년 전 비슷한 논지의 장 교수 책 ‘쾌도난마 한국경제’를 읽었다며 국정에 응용했던 대통령이 안다면 내심 난처할 것 같다. ‘대못질’을 지시할 수도 없고.
시장과 세계화를 중시하는 주류 경제학계의 시각에서 장 교수가 비주류인 건 사실이다. 빈부격차 등 세계화의 부작용에 대해서도 주류는 교육과 직업훈련 일자리를 통한 해결을 찾는 반면, 비주류는 세계화나 신자유주의 반대를 주장한다. 글로벌 시장을 주도하는 미국에선 시장보다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학자가 많아야 15%여서 ‘이단(heterodox)’으로 불린다. 장 교수의 프로그램 역시 이들이 정보를 나누는 이단 경제학(heterodox economics) 뉴스레터에서 찾아볼 수 있다.
3년 전 대통령이 성장과 함께 가는 분배를 강조하며 거론했던 조지프 스티글리츠도 남미 포퓰리즘 부활에 한몫한 인물로 평가된다. 참여정부 경제를 설계한 이정우 전 대통령정책실장의 정신적 스승 헨리 조지 역시 주류와는 거리가 멀다.
물론 학자에게는 학문의 자유가 있고 학문적 소신은 존중돼야 한다. 그러나 하필 우리나라 경제정책이 학계에서 인정받고 세계적으로 입증된 주류이론 아닌 비주류의 논리에 좌우됐다는 건 비극이다. 그 결과가 ‘잃어버린 5년’이고 외환위기 이후 11년 만에 닥칠 경상수지 적자다.
포퓰리즘의 큰 특징은 정권이 선거에 의해 뽑혔다는 이유만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는 데 있다. 경제에선 시장은 물론 재정적자를 무시한 분배정책으로 나타나고, 정치에선 헌법과 사법제도 등 ‘선출되지 않은 권력’을 무시한 비자유적 민주주의로 군림한다. 민주주의가 자유의 제도화를 뜻한다면 그 제도를 박살내고 정권의 자유만 추구하는 게 포퓰리즘이다.
시장이 경제발전을 촉진할 가능성은 거의 없고, 재정건전성 정책 또한 나쁜 사마리아인의 요구이니 ‘세입을 초과한 지출’도 해야 한다는 장 교수의 주장은 지난날 남미를 말아먹은 포퓰리즘과 다르지 않다. 더욱이 그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의 손에서 중요한 결정을 빼앗아 선출되지 않은 기술 관료들의 손에 넘기는 건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일’이라고 했다. 참여정부가 숱하게 외쳐 온 주장과 기막히게 일치한다.
나쁜 정책에 죄 없는 국민만 피해
영국에 살고 있는 장 교수는 쉽고도 당연하게 연구 결과를 밝혔을 것이다. 하지만 국책연구기관조차 재정지출 억제를 권고한 이 땅에 사는 우리는 내 아이가 짊어질 나랏빚이 무섭다. 정당과 국회는 물론 헌법도 우습게 아는 정권을 만난 탓에 대통령선거가 코앞인데도 범여권 후보조차 감감한 우리는 올해가 무사히 지나갈지 두렵기 짝이 없다.
정부 개입을 강조한 비주류 경제학자들은 죄가 없다. 그러나 무능한 정부를 모신 죄 없는 국민은 피해가 막심하다. 만일 미국의 새 대통령으로 힐러리 로댐 클린턴 상원의원이 당선돼 장 교수 주장대로 보호주의를 채택한다면 당장 우리나라가 피해를 볼 판이다. 착한 경제학자는 있을지 몰라도 착한 경제학은 없다. 되는 경제학(주류)과 안 되는 경제학(비주류), 그리고 이를 이용하는 정치꾼이 있을 뿐이다.
김순덕 편집국 부국장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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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 글써서 밥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은 몇명 되지 않는다. 그런 이들 중에 이렇게 무식한 사람도 섞여 있다는 걸 알면 화가 나는 것도 당연하다. 더욱 화가 나는 건 '집단지성'을 자랑하며 평론가와 지식인들을 우습게 여기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네티즌들께서도 이런 무식한 소리를 그냥 지나치신다는 사실.
장하준 가지고 검색하다가 발견한 글인데, 나온지는 벌써 2주나 지났다. 하지만 잠깐 검색해본 바로는 이 글을 비판한 블로거는 없는 것 같다. 이건 관점의 문제가 아니라 팩트의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나쁜 사마리아인> 아직 안 읽었다. 하지만 장하준은, 경제정책에 관한 한 박정희가 옳고 김대중-노무현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경제학자다. <쾌도난마 한국경제>에 나오는 그의 주장을 정리하면 박정희는 반민주주의-반자유주의자고, 노무현은 민주주의-자유주의자다. 박정희는 전자는 틀렸지만 후자 때문에 경제를 발전시켰고, 노무현은 전자는 옳지만 후자 때문에 경제를 말아먹고 있다, <쾌도난마 한국경제>에 나온 장하준과 정승일의 대담을 도식적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영어로 쓰여진 <나쁜 사마리아인>에서도 역시 서문에 자신의 모국인 한국 경제가 발전한 이유를 서술하면서, 개발도상국에게 자유무역을 하면 경제가 발전할 거라고 우기는 선진국들의 위선을 폭로하고 있다고 들었다.
이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을 수는 있다. 김순덕이 언급한 영국 언론들이 그랬듯이. 하지만 장하준=참여정부 경제학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쾌도난마 한국경제>는 첫페이지부터 마지막까지 참여정부 경제정책을 까고 있는데, 그게 "참여정부가 극찬한 이단 경제학"이라고? 이정우 등과 같이 엮은 건 웃기지도 않다. 장하준은 이정우 등과 토론회에서 언제나 싸워왔고, 심지어는 그들보다 오히려 중앙일보 (고)정운영을 편들었을 정도인데.
도대체 이런 거짓말을 늘어놓을 수 있는 강단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간단하다. 꼰대들은 동아일보는 읽지만 책을 안 읽고, 애새끼들은 인터넷은 하지만 책은 안 읽으니까. 그리고 책을 읽는 1만명 가량의 사람들 중에 인터넷에서 활동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설령 활동해봤자 무시당하기 일쑤니까. 기껏 이 칼럼을 비난한 네티즌 의견은 '참여정부 잘했다' 운운이다. 네티즌이 '무지'한 언론을 교정하고 싶다면, 적어도 그보다는 더 '유지'해야지. 이건 뭐 우리 다 같이 무지하니 니가 그 회사에서 돈받는거 인정할 수 없다는 '하향평준화' 논리도 아니고. (하긴 그런 논리도 성립하긴 한다.)
유시민의 <대한민국 개조론> 등식 박정희=노무현=한미 FTA
김순덕의 '착한 경제학자들' 등식 박정희=신자유주의↔노무현?
정말 대한민국을 양분하는 정치적 세력의 경제인식이 이 모양이니. 나라꼴 좋다.
두줄요약: 남 욕하는 건 안 말리겠는데, 제발 남의 총알 뺏어들고
자기 거라고 우기지는 말지 말입니다.
P.S
"만일 미국의 새 대통령으로 힐러리 로댐 클린턴 상원의원이 당선돼 장 교수 주장대로 보호주의를 채택한다면 당장 우리나라가 피해를 볼 판이다."
-> 힐러리가 FTA 비준 거부해준다면 나는 덩실덩실~
P.P.S
"되는 경제학(주류)과 안 되는 경제학(비주류)"
-> 설마하니 알고도 거짓말한 거라고 좋게 이해해 주려고 했는데, 이런 구절을 보니 일부러 거짓말 했다 해도 김순덕은 무식하고 천박한 사람이다. 경제학자 개인의 입장에서, 주류경제학이 되는 경제학이고 비주류 경제학이 안 되는 경제학일 수는 있다. 아무래도 주류 쪽이 교수자리가 더 많을 테니까. 하지만 주류가 한 나라 경제를 되게 하고 비주류가 한나라 경제를 말아먹는다는 견해는 성립하지 않는다. 학문적인 관점에서 주류와 비주류를 저렇게 나누는 건 중심화가 지나치게 심한 한국 땅의 관점에 뇌수를 푹 절여서 살다보니 기본개념이 마비되어서이다. ('15%'를 우습게 아는 것도 지극히 한국적이다.) 가령 의학에서 어떤 병에 대한 주류 견해와 비주류 견해가 있다고 쳐보자. 그 비율이 85% 대 15% 쯤 된다고 치고. 그럼 그때 주류 견해는 '사람 치료하는 견해'이고 비주류 견해는 '사람 더 아프게 하는 견해'인가? 지금 장난하나? (그렇게 썼다간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할 게다.)
P.P.P.S
......덕분에 저는 아주 가끔 이런 식으로 스트레스나 푸는 용도로 블로그를 유지하기로 하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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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한미 FTA 문제를 다룬 부분은 “선진통상국가, 박정희 대통령의 유산”과 “약제비 적정화와 한미 FTA” 정도다. 그중 후자는 보건복지부 업무와 관련된 각론이고 총론은 전자뿐이다. 이 챕터를 통해 한미 FTA의 정당성을 요약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박정희 대통령은 ‘성공한 독재자’이다.
2) 그 성공의 요인은 ‘수출주도형 불균형성장전략’이다.
3) 이 전략의 선택은 대한민국이 통상국가로 가는 운명을 부여했다. 다른 길은 다 봉쇄되었다. 대한민국은 이미 통상국가다.
4) 한미 FTA는 그 운명에 따라 예정되어 있는, 필연적인 선택이다.
5) 세계경제는 WTO 회원국이 150여개이고, 이미 체결된 FTA가 170개를 넘는 등 통합의 가속페달을 밟고 있다.
6) 내부개혁을 통해 우리의 규범과 제도와 정책이 국제사회의 요구와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한다.
7) 한미 FTA는 단순히 관세 이하를 통해 한미 간의 무역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선진통상국가를 위한 전략적 선택이다.
8) 대한민국은 밖으로는 선진통상국가 되어야 하고, 안으로는 사회투자국가가 되어야 한다.
정말 좋은 얘기다. 무슨 얘기냐 하면, 내가 토론해 본 모든 노빠들은 기본적으로 이 틀 위에서 놀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것만 비판하면 된다. 정태인이 이 책의 서평 제의를 거절한 것도 이해가 간다. 안 이어지는 것들을 추상 수준에서 억지로 붙여놓은 이 논변이 참여정부와 그 지지자들이 지난 일년간 앵무새처럼 반복해 온 논변이기 때문이다.
첫째, 박정희식의 ‘수출주도형 불균형성장전략’은 ‘한미 FTA'와는 명백히 다른 정책이다. 그리하여 장하준과 같은 사람은 “청와대 386들이 박정희 콤플렉스가 있어 그와 반대로만 하려고 하다보니 FTA같은 걸 하게 되는 거다.”라는 논지로 말을 한 적이 있을 정도다. 박정희식 경제개발 정책은 국가가 주도하는 산업정책이 중심이다. 유시민 책에 나온 말을 인용하면, “국내에 축적된 자본이 없는 상황에서 산업화를 시작한 박정희 정부는 원조와 차관 등 해외에서 조달한 투자 재원을 수출 중심의 경공업에 집중 투입한 다음 중화학공업으로 주력 산업을 교체하는 방식의 압축적 산업화를 추진했습니다.” 이런 정책은 FTA가 설파하는 자유무역의 이념과 명백하게 배치된다. 그저 양쪽 다 수출 늘리는 정책이라고 같은 것이 아니다.
박정희가 ‘성공한 독재자’라면, 왜 성공한 그 방법을 따르지 않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 박정희의 전략이 현 시대의 대한민국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판단했다면, 왜 한미 FTA가 박정희의 정책에 필연적으로 예정되었던 것이라고 ‘구라’를 치는 것인가? 선진국들은 후진국들에게 언제나 자유무역이 국가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해 왔다. 유시민에게는 논리적으로 두 가지 길이 있다. 첫째는 그 논리가 언제나 보편타당하며, 박정희가 저런 식으로 통제 안 하고 자유무역을 했다면 대한민국이 더 발전했을 거라고 주장하는 것. 둘째는 그 논리가 후진국에는 타당하지 않지만 대한민국 정도 레벨의 국가에는 타당하다고 주장하는 것. 그런데 그는 이 두 가지 길을 거부하고 '박정희=한미 FTA'라는 공식을 기입한다. 거짓말이다. 저열한 정치적 책동이다.
둘째, WTO와 FTA는 궤가 다른 문제다. 다자간 무역협상인 WTO가 완전히 시행된다면 양자간 무역협상인 FTA는 존재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니까 WTO 운운하며 개방이 대세라는 건 역시 개념을 대충 꿰어맞춘 ‘거짓말’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체결된 170개의 FTA'에 대해 말하자면, 그 중에서 한미 FTA만큼 덩치가 큰 FTA는 하나도 없었다. ‘통합의 가속페달’, 아니 FTA의 가속페달을 밟은 것은 세계경제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참여정부다. 그러니까 진취적인 선택이라고 자랑하는 게 아닌가? 아니 어디서는 필연적이라고 강변하고 어디서는 진취적이라고 자랑하면 그게 말이 될 소리인가? 제발 주어와 술어는 명확하게 연결하자.
셋째, 그는 FTA가 단순히 무역 더 하자는 조약이 아니라 선진통상국가를 위한 내부개혁을 위한 조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문장의 의미를 명확히 하자면, 대한민국 정부는 통상국가를 위한 개혁을 할 능력이 없으니 미국자본을 끌어들여 글로벌 스탠다드로 제도가 재편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글로벌 스탠다드’란 ‘미국식 체제’를 의미한다. 이익집단들의 반발이 두려워 개혁을 외국 자본의 힘으로 추진하겠다는 발상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그리고 미국 자본에 의한 개혁이 반드시 국익에 합치할 거라는 확신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피부색 노란 미국인 변호사가 던져준 프리젠테이션 자료에서?
이런 정책이야 말로 국민투표감인데 그저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 동의를 눈앞에 두고 있다.’고 얼버무린다. 국민의 여론수렴없이 국회만 동의받으면 된다는 식의 절차적 민주주의자라면, 왜 탄핵 때는 그렇게 울부짖으면서 끌려나갔을까? 절차적으로 볼 때, 당시의 탄핵은 ‘국민의 선택’이 아닌가? 물론 당시 국회의 선택은 곧 전국민적인 공분을 불러왔지만, 탄핵이 가결되던 당시에는 그걸 알 수 없었다. 미리 알고 울었다면 미아리에 점집이나 차릴 일이고. 또한 지금은 왜 책을 내면서 ‘국가의 주인인 국민’에게 읍소하고 있을까? 그저 국회에 읍소하면 될 일 아닌가? 국회가 생까면 그것을 국민의 뜻으로 알면 될 일이고. 자기 편할 땐 국민의 말을 들어야 되고 자기 불편할 땐 국회 비준만 통과하면 된다는 이런 정신세계를 가진 분이 얼마나 낯짝이 두꺼운지 ‘민주적 리더십’ 운운한다. 가소로운 일이다.
넷째, 미국 자본의 힘으로 개혁하여 선진통상국가로 가겠다고 주장했으면 적어도 “대한민국은 밖으로는 선진통상국가 되어야 하고, 안으로는 사회투자국가가 되어야 한다.” 따위의 거짓말은 늘어놓지 말아야 한다. 이 문장은 한미 FTA가 ‘단순한 통상조약’일 경우에야 겨우 의미를 지닐 수 있는 문장이다. 한미 FTA 반대론자들, 그리고 세계은행의 권고는 미국과의 FTA는 ‘단순한 통상조약’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미 FTA를 반대하는 몇몇 경제학자들이 우려하는 것은 이 협정으로 인해 시장경제에 대한 국가의 통제능력이 아예 사라지게 될 거라는 것이다. ‘투자자-직접소송제’는 뻘로 있나? 그런 제도들을 다 받아들여놨으면서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일까? 미국 정부는 FTA 협상시 한국의 법과 제도를 자기들 무역하기 편하게 바꾸라고 압력을 가하고 있는데, ‘안으로는 사회투자국가’가 되겠다니, 무슨 수로? 그리고 만일 그런 압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애초에 선전했던 ‘개혁’의 효과는 어디로 가는가? 둘 중 하나만 선택하지 않고 좋은 건 둘 다 가지려는 이 독특한 심보에 ‘유시민 심보’라는 이름을 붙일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유시민은 모두 비전2030이 언론과 진보세력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억울해한다. (정말 이놈의 정부는 억울해하라고 뽑아준 모양이다.) 설령 그게 쓸모있는 정책이라 해도 턱밑에 한미 FTA라는 이슈가 있는데 이슈화될리도 없거니와, 한미 FTA 이후에 그 정책들이 실행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그들은 답변한 적이 있는지? 한미 FTA가 단순한 통상협정인지, 아니면 단순한 통상협정이 아니라면 국가의 시장통제력은 어느 정도 남게 되는지, 그 통제력 안에서 적합한 정책은 무엇인지를 설명한 적이 있는가? 그런 설명이 없다면 저 논변은 공중에 붕뜬 논변일 뿐이다. 그저 오늘은 낚시하고 내일은 농사짓겠다는 식의, ‘좋은 게 좋은 거지.’ 수준의 변명이다.
다섯째, 한미 FTA처럼 사회 각 분야에 파급효과를 일으키는 이슈에 대해 논하려면 적어도 각 부문별로 분석을 해야 한다. 그런데 저 느슨한 총론에는 그런 ‘개념’이 존재하지도 않는다. 정말이지 한심한 일이다. 그러면서 어떻게 반대론자들과 논쟁을 하겠다는 건가?
유일하게 존재하는 각론은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에 약제비 적정화를 위해 자신이 뭔가 좋은 일을 했다는 변명뿐이다. 그냥 FTA하면 약제비가 치솟을 수 있었는데 자신이 직전에 제도개혁해서 막아냈단다. 그 말이 맞다고 치자. 그러면 미국자본이 와서 개혁을 해줄 거라는 그 잘난 믿음은 어떻게 되는 걸까? ‘개혁’은 FTA와는 또 다른 문제라는 걸, 미처 개혁이 안 된 상황에서 개방이 되면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유시민의 ‘잘난 척’은 무의식적으로 발설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일이 있었다면 다른 분야에서는 해야 할 법제화를 제대로 추진했는지 살펴보는 것이 최소한 영장류의 두뇌를 소유한 자가 해야할 일이 아닐까? “보건복지부는 미리 법제화를 해서 피해를 최소화했다. 내가 잘났기 때문이다. 다른 분야에 대해선 말 안한다. 하지만 FTA는 좋은 거다. 미국자본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이걸 지금 뭐라고 불러줘야 하나? 논증? 말? 거짓말? 괴성? 허튼 소리? 어린이 옹알이? 비문? 명명하기도 귀찮으니 읽는 사람이 알아서 선택하셨으면 한다.
또한 FTA 반대론자에 대한 비판을 요약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a) 박정희 경제체제의 대안으로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이 있었다.
b) 박정희의 선택으로 인해, 그 대안은 ‘이론적 모색’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제 와서 그것을 되돌릴 수는 없다.
c) 박현채의 제자들은 ‘수출주도형 불균형성장전략’의 폐해를 시정하기 위해 운동세력이 되었다. 그들이 ‘민주화 세력’이다.
d) 지금의 실정에서 FTA 반대는 ‘민족경제론’과 같은, 실현될 수 없는 안티세력에 불과하다.
e) 그들은 자신이 무조건적인 개방반대론자가 아니지만, 한미 FTA뿐만 아니라 모든 FTA를 반대하고 있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개방반대론자가 맞다.
f) 박현채 선생이 살아계셨다면 한미 FTA에 찬성했을 것이다.
a에서 c까지는 동의하지만 d,e,f는 궤변이다. 첫째, 한국 정도로 개방화가 진척화된 사회에서 ‘무조건적인 개방반대론자’하려면 적어도 WTO 탈퇴정도는 주장해야 한다. 그런 사람 대한민국에 없다. 지금이 대원군 시대인가? ‘쇄국주의자’라고 몰아붙이게. 둘째, 박현채의 제자들이 주장한 ‘외채망국론’이 들어맞지 않았던 것은 한국의 외자도입은 한국정부가 주도했기 때문이다. 참여정부의 한미 FTA는 (김영삼 정권 때의 무분별한 단기 외채도입과 마찬가지로) 그 모든 의사결정을 미국 자본에게 넘기겠다는 건데, 그 발상은 외채망국론이 잘 들어맞을 법한 나라를 만들어 후손에게 물려주겠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참여정부만큼 박현채를 사랑하는 집단도 없는가 보다. 입으로는 박정희가 맞고 박현채가 틀렸다고 하면서, 행동으로는 박정희가 틀렸고 박현채가 맞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애쓴다. 이쯤되면 정신분석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나, 그들의 음험한 정신세계를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상식인의 건전한 욕망이 그 위험한 시도를 가로막는다.
요약하자면 유시민의 한미 FTA 옹호론은 무식함을 드러내고, 독창적이지 않으며, 기본적인개념들의 사용이 옳지 않다. 이런 주장에도 국운을 걸 수 있다는 게 한국 사회가 지금 처한 곤경의 본질이다. 그렇지만 저런 말을 글로도 떳떳하게 쓸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너무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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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발 한발 협상 체결이라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한미 FTA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발언한다는 것은 정서적으로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 협상의 체결이 국민들의 삶에 미치는 광범위한 영향과, 국민들이 그것의 결정과 실행에 대해 끼칠 수 있는 영향력 사이에 존재하는 몇만 광년의 간극 때문에 그렇다. 일이 이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인식에서 분노라는 감정이 발생한다면, 일이 이렇게 될 줄 뻔히 알았다는 인식에서는 짜증만 생긴다. 한미 FTA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뉴스를 볼 때마다 무력한 짜증만 부리기 십상이다. 철학자 대통령의 머릿속에서 저 중요한 조약이 구체적인 상황과 상관없이 무조건 체결되기로 ‘추상적으로’ 결론이 도출되어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머릿속에서는, “한미 FTA가 한국에 득이 아니라 실이 되는 어떤 하한선”이라는 개념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여론은 근소하게 찬성이 앞선다. 찬성이 48%면 반대가 44% 정도라는 식이다. 이 점은 이렇게 설명될 수 있다. 한미 FTA는 참여정부가 최근에 추진한 정책 중에 가장 찬성하는 이가 많은 정책이다. 또한 한미 FTA는 민주노동당 등 좌파들이 최근에 반대한 정책 중에 가장 반대하는 이가 많은 정책이다. 이 찬성과 반대의 절묘한 균형의 이유는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참여정부가 압도할 수 있는 반대 집단은 이제 민주노동당 이외엔 없다. 민주노동당이 그나마 거의 찬성여론의 세력에 근접한 반대여론을 결집할 수 있는 상대 집단은 저 철학자 대통령을 추종하는 참여정부가 유일하다. 국민들의 눈으로 볼 땐 ‘덤 앤 더머’의 대결이라는 것이다.
한미 FTA의 효과에 대한 경제학적인 분석은 우석훈 박사가 이미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에서 다 해놓았다. 한미 FTA를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경제학자의 주장은 본 일이 없다. 적극 반대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회의적일 따름이다. 그러나 저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철학자 대통령이 최장집보다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우석훈보다 경제에 대해서도 많이 안다고 믿는다면, 그 어떤 논변도 요령부득이다. 나머지 FTA 찬성파들은 참여정부보다는 좌파를 더 싫어하는 사람들, 현자 노조를 너무 미워해서 외제차를 사서라도 그들을 망하게 해야 겠다고 믿는 사람들, 혹은 재벌 일반을 너무 미워해서 외국 자본의 힘이라도 빌려야 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가장 경제학적이고 수치에 의해 평가되어야 할 정책결정에 대한 논쟁 지형도가 “당신은 누구를 제일 싫어하십니까?”라는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같은 인간으로서는, 차라리 그들의 언어를 구성하는 어떤 통속심리학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하는 것이 짜증을 인체에 해가 되지 않을 수준에서 억누르는 길인지도 모르겠다.
국정홍보처와 노빠들이 한미 FTA를 옹호하는 언어의 파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세계는 개방경제로 가고 있다. 그 흐름에 뒤처지면 우리만 힘들어진다.
2) 과거에도 진보들은 개방을 반대해 왔으나 한국경제는 개방을 통해 성장해 왔다.
3) 한국경제는 잘 해 왔다. 앞으로도 잘할 수 있다.
4) 커다란 시장이 열린다. 한국에 기회다.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이 모든 논변은 철학자 대통령 본인의 것이기도 하다. 1)에 대해서는 정말 공부 좀 더 하고 오시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다. 세계은행도 2005년에 “미국과의 FTA가 가장 참혹”하다고 했다는데 그 가장 참혹한 FTA를 통해 개방경제의 흐름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국민경제가 거덜나면 개방경제고 뭐고 없다. 1)을 주장한다는 건 FTA를 특정한 구체적인 문맥에서가 아니라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맥락, 그저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을 신봉하는 정도의 맥락에서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하지만 협상에는 언제나 상대라는 것이 있으므로 “양자 모두 시장을 완전히 개방하였을 때”라는 비교우위론의 가정은 성립하지 않는다. 한-칠레 FTA, 한-중 FTA, 한-일 FTA, 그리고 한-미 FTA가 각각 효과가 다를 수 있다는 견해가 훨씬 상식적이고 게다가 그 협상이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따라 효과가 다를 것이라는 것도 상식적이다. 이런 것이 경험적이고 구체적인 문맥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하지만 그들은 지극히 이데올로기적으로 1)을 주장한 후 2)로 넘어간다.
2)는 진보는 이상적이고 무능하다는 것이다. 이상적이라는 말은 어떤 이가 구체적인 문맥보다는 자신의 내적 논리에 과도하게 집착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1)에 대한 분석에서 나는 구체적인 문맥보다 “FTA가 이득이다.”라는 이데올로기에 집착하는 것이 누구인지를 이미 밝혔다. 하지만 FTA 찬성론자들은 반대론자들이 이상적이라고 말한다. 386들이 젊었을 때 잘못된 이론을 신봉했다 하여 우리보고 잘못한다고 타박하는 꼴이다. 마치 뉴라이트로 넘어간 주사파들이 우리보고 북한 인권 문제에 무심하다며 ‘친북좌파’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과 꼭 같다. 왜 자신의 내적 모순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일까?
과도한 외자 유치가 한국 경제를 파국으로 몰고 갈 거라는 박현채의 주장이 사실상 그릇된 것으로 판명된 것에 대해서는 경제학적인 분석이 있을 수 있다. 가령 장하준처럼 그때는 외자는 많이 들어왔지만 (대한민국이 주주자본주의가 아니었기 때문에) 경영권을 간섭당한 것은 아니라는 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 경우 문민정부의 세계화 이후, 특히 국민의 정부 이후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외국자본은 박현채가 우려했던 바로 나라를 거덜낼 수 있는 외자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논쟁을 진행하는 방법은 이 모든 상황에 대해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일이다. 하지만 대통령과 그 지지자들은 이 섬세한 논쟁을 저 투박한 한마디로 요약하고 상대방의 입을 막은 후 한국 경제의 성장이나 건전한 순환을 위한 어떠한 논의도 없이 원하던 정책을 밀어붙이려 든다.
그런 다음 마침내 그들은 3)과 4), 이른바 “자신감” 혹은 “의지” 논증에 이른다. 철학자 대통령께서도 친히 영화배우 이준기에게 스크린 쿼터 관련해서 “그렇게 자신감이 없습니까?”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감이나 굳은 의지는 제다이나 아라곤, 주몽과 같은 이들이 가지고 있으면 뭔가 스토리 해결에 도움이 될 것 같은 물건이다. 이 통속심리학의 개념이 실제로 인간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지에 대해 나는 어떤 합리적인 논변도 들은 바가 없다. “자신감이 부족해서” “의지가 없어서”라는 분석은 대개 다른 합리적인 이유를 찾지 못했다는 변명의 고백일 따름이다. 자신감으로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면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정말로 미제에게 무자비한 징벌을 한 후 백악관을 정복하고 와인 파티를 벌이고 있을 지도 모른다.
더 황당한 건 철학자 대통령의 다른 말을 들어보면 그가 저 통상적인 논변의 과정과는 달리 한국 경제에 대해 전혀 자신감이 없는 것 같다는 것이다. 제조업이 아니라 서비스업의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그의 발언을 가만히 들어보면, 그의 머릿속에서 이미 한국 제조업은 중국에게 ‘발린’ 상태다. 앞으로 십년에서 이십년 사이에 그는 한국 제조업이 파탄나고 그 결과 한국 경제가 파탄날 수 있기 때문에 미국과의 경쟁으로 서비스업의 체질을 개선해야겠다고 판단한 것 같다. 이런 것이 과연 ‘자신감’ 논증일까. 나같은 범인은 미국과의 FTA에서 한국이 이득을 거둘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은 없는 반면, 한국이 당장 중국 때문에 망하리라는 걱정도 안 든다. FTA로 국민 경제가 파탄나면 그리 될 수도 있겠지만. 대통령의 머릿속 논리는 무협지 주인공의 내공을 3갑자로 한방에 증진시키려는 소설가들의 음험한 의도와 닮았다. 독을 쳐먹고 그 독이 울렁울렁 어쩌다가 내공으로 화(化)하는 기연을 통해 내공을 증진시키는 바로 그 방식 말이다.
하지만 그게 인간 세상에서 가능한 방식인가. 그건 결코 일반적인 판단이 아니기 때문에, 무협지 주인공이 독을 먹기 까지는 개연성을 위한 여러 가지 장치가 있다. 독인 줄 모르고 먹었다고 우기는 무지의 복선도 있고, 뭔가 괴팍한 성격의 케릭터가 나와 이상한 짓을 하다가 주인공에게 독을 먹이는 캐릭터의 복선도 가능하며, 차라리 이 독이라도 먹으면 살 확률이 1%는 되겠지만 그게 아니면 죽는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차근차근히 복선을 깔아가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나는 한국 경제가 한미 FTA라는 독이라도 먹지 않으면 죽어버릴 거라는 대통령의 일방적인 판단에 동의할 수 없다. 그런 판단을 내리고 싶다면 경제학자들에게도 폭넓게 자문을 구하고 각 산업단체들의 의견도 충분히 수렴해야 한다. 그러나 대통령께서는 그런 의미의 ‘민주주의’를 하기보다는, 나 말고는 이걸 할 사람이 없으니까, 내 임기까지 이 짓을 무조건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계신다. 그러니까 내가 보기에 ‘한미 FTA 무협지’는 “뭔가 괴팍한 성격의 케릭터가 나와 이상한 짓을 하다가 주인공에게 독을 먹이는 케릭터의 복선”이 실현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를 말릴 수 있는 어떠한 방법도 없다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처한 곤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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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도난마 한국경제 장하준 외 지음, 이종태 엮음/부키 |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 중계권을 둘러싼 갈등, 즉 스폰서 구단들의 대변자인 협회가 그 동안 실질적으로 게임방송을 일궈온 온게임넷과 MBC게임의 프로리그 독점 중계권을 인정하지 않고 중계권료 및 연단위로 갱신되는 자유로운 중계권 계약을 요구했다가 협상이 결렬되자 선수들의 개인리그 불참 불사를 운운한 사건을 보고 뭔가 정신이 얼얼했다. 마치 영화 <반칙왕>에서 주인공이 꿈에서 열심히 상대편을 때리다가 그의 마스크를 벗겨봤더니 직장 상사여서, 그 다음부터는 (현실세계에서와 마찬가지라) 쪽도 못 써보고 헤드락 걸리고 신나게 터지는 시츄에이션을 보는 느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