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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윤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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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에 해당되는 글 16건

  1. 2008/06/06
    [씨네21/유토디토] 누가 10대와 20대를 분리하는가 (19)
  2. 2008/02/18
    [프레시안] 새로운 진보정당, 이렇게 만들자 (5)
  3. 2007/06/29
    선관위와 정치평론 (3)
  4. 2007/01/22
    송호근의 미덕과 악덕
  5. 2004/06/30
    박용진 대의원께 질의합니다.
  6. 2004/06/30
    대한민국 '개혁' 요망
  7. 2004/06/30
    현실론과 정치공학 -Sophist와 RVD에 대한 반론 포함
  8. 2004/06/29
    탄핵과 퇴진은 어떻게 다른가.
  9. 2004/06/29
    퇴진이 아닌 탄핵으로 노빠와 대립각 세워야
  10. 2004/06/29
    지금이 노무현 탄핵 투쟁을 할 때다

정국이 너무 빨리 변하죠. 가두시위가 시작되고, 20대들이 시위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기 이전에 쓰여진 글입니다. 이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원고는 잡지가 나간지 2주 후에 인터넷판으로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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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시위에 나온 10대들을 상찬하다가 “그런데 20대는…”이라고 비판하는 게 요즘 유행인 모양이다. 386들의 술자리에서 무럭무럭 자란 풍문은 실체없는 허깨비마냥 떠돌더니 급기야 “십대는 촛불시위하는데 대학생들은 원더걸스에 열광해”류의 기사를 만들어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원더걸스에 열광한 대학생들 중에선 촛불시위에 나간 사람이 없었을까? 촛불시위에 나선 십대 중에선 연예인에 열광한 친구들이 없었을까? 이 정도 수준의 보편화(?)가 합당하다면 내 눈에 보이는 풍경은 이런 것이다. ‘아내와 아이들은 촛불시위에 나가고 있는데 자신은 술을 마시며 20대나 씹고 있는 어느 386 남성.’ 제발 이렇게 유치하게 놀지 말았으면 좋겠다.


10대들의 목소리는 광우병 정국을 넘어선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 밀착한 문제에서 정치성을 느꼈고, 그 모든 것을 지금 현장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지적했듯이 그들은 광우병 문제뿐만 아니라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에 대한 불만도 털어놓고 있다. 그런데 왜 하필 그들은 쇠고기 문제에서 폭발한 것이었을까? 이 문제가 ‘약한 고리’였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물론 지금도 장학사와 교사들이 그들을 잡으려고 거리를 헤매고 있지만, 교사와 학부모들은 오히려 교육정책에 대해 당사자인 십대가 발언권을 행사하겠다는 선언을 더 불편하게 받아들였을 거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고, 부모의 승인을 받을 수 있는 전략적 목표를 타격했다. 훌륭한 일이다. 하지만 소녀들이 대통령을 궁지로 몰아넣었다고 기성세대들이 희희낙락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정치적이라고 상찬받는 그 청소년들이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고, 그 부조리에 저항할 권리 역시 철저하게 억압받는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라. 나는 그들이 거리로 나올 권리를 지켜주고, 그들의 ‘말’을 주의깊게 듣는 것이 ‘어른들’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10대와 20대 모두를 타자화시키는 10대 예찬론은 그런 의무를 다하고 있는 걸까? 나는 그 예찬이 왠지 386세대의 정치적 무기력을 숨기기 위한 자조적인 행동으로 보인다. 설령 이명박이 탄핵되더라도 박근혜가 대통령이 될 그 현실을 견디기 위해서, 그들은 10대에게서 희망을 보아야 할 것이다. 10대가 실제로 무엇을 생각하든 말이다.


‘20대의 보수성’이란 말은 ‘20대의 원자화’라는 표현으로 고쳐져야 한다. 학부제 실시 이후 혼자서 대학을 다니는 대학생들은 청소년들만큼도 조직화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그들은 2002년과 2004년의 촛불시위에 거리로 나온 경험이 있다. 이번에 그들이 시큰둥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지에 대해서도 고민해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바람과 참여에 정치권이 얼마나 무관심한지를 느꼈고, 그리하여 급속하게 냉소주의로 돌아섰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정말이지 참여정부의 공로가 혁혁했다. 이런 ‘과거’를 상기한다면, 슬프게도 오늘 거리로 나온 10대들이 훗날 그런 20대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물론 나도 안 그랬으면 좋겠다). 그때 개혁세력을 지지하는 우리의 기성세대들은, 오늘의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다시 새로운 10대를 예찬하고 있지 않을까? 또 한번 20대들을 안주로 삼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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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진보정당, 이렇게 만들자 
  [기고] "'이념' 논쟁 대신 '제도' 논쟁이 필요하다" 
 

  2008-02-17 오후 6:24:22    
 
 
 
 
 
  어차피 당원의 다수는 자주파였다. 심상정 비상대책위원회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원 총투표가 아니라 대의원에게 안건을 제출하는 방법을 택했다. 정파를 좌지우지하는 소수들을 모아놓고 "너희들도 당을 깨고 싶진 않지? 그러니까 여기까진 합의를 해."라고 속삭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자주파는 비대위의 엉덩이를 걷어차 버렸다. 그 광경은 자주파니 평등파니 하는 말에 별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에게조차 자주파의 실체를 폭로했다. 북한 정보부에 정당 활동가에 대한 정보를 넘긴 이를 '국가보안법 피해자'라는 이유로 두둔하는 게 그들이었다.

 
  그들은 당대회에서 "종북주의는 없다"고 선언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앞으로도 계속 대중에게 거짓말을 할 테니 협조하지 않으면 재미없다는 으름장이었다. 거짓말을 거짓말이라 주장하는 사람에게 "재를 뿌린다."고 비난했다. 어느 지식인은 대법원 확정 판결까지 나온 사건을 범죄자가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양심의 자유'를 지켜줄 것을 호소했다.

 
  일부 탈당파는 정말로 '양심의 자유'에 대해 숙고해야 할 것 같기는 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동안 자주파의 실체를 알면서도 대중에게 그것이 드러날까 봐 자주파와 함께 전전긍긍했기 때문이다. 양심을 속이면서까지 당을 지키려고 했건만, 그들이 변할 거라고 믿었건만, 돌아온 결과는 이런 것이었다. 정파연합당으로써의 민주노동당은 종말을 맞이했다.

 
  심상정 비대위는 약간의 정치적 성과를 거두었다. 2ㆍ3 당대회를 지켜본 모든 매체들이 드디어 민주노동당 분당의 명분을 추인했다. 신당을 만들려면 홍보가 필요하고 그 홍보엔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기 마련인데, 특히 제 입맛대로 민주노동당을 비판한 조ㆍ중ㆍ동 등 수구언론은 자발적으로 그 역할을 떠맡기까지 했다.
 

  사건의 규모에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2004년의 '탄핵 역풍'에 비견할 수 있을 정도의 성과다. 하지만 그런 성과는 반대측의 책임을 요구한다. 이제 한국의 좌파들은 대중적인 좌파정당을 건설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만을 남겨두었다. 이번에는 "자주파 때문"이라는 변명으로 사람을 납득시켰지만, 다음에는 어떠한 핑계도 불가능하다.

 
  바야흐로 좌파들이 두려워해야 할 시간이다. 그 사실을 납득한다면 지분 싸움 따위에 허비할 시간은 없다.
 

  진보신당의 평당원이 되고 싶은 사람들, 그리하여 한국 사회의 변혁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싶은 사람들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먼저 우리는 진보신당도 정파연합당이 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진보신당은 양당제의 한축을 담당하는 정당이 되려고 노력하는 정당이어야 되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런 정당이 되려고 노력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다른 방법은 없다고 답변해야겠다. 현재 상황에선 자민련과 같이 한 지역의 맹주가 되지 않는 이상 소수정당으로써 지속적으로 생존하는 일이 매우 어렵다. 가령 서구 녹색당과 같은 군소정당이 성립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진보신당이 대중적인 영향력을 통해 상당한 수준의 정치 제도적 변혁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므로 진보신당 역시 민주노동당이 그랬던 것처럼 좌파 진영 안에 포함되는 수많은 정치세력들을 포괄하는 정파연합당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제 정파의 정치인이나 활동가들도 이런 상황을 (적어도 본능적으로는) 알고 있는 만큼, 평당원 지망생으로써 정파연합당에 반대하는 것은 소득이 없는 일이다. 정 정파연합당이 싫다면, 아마도 진보신당은 당신의 대안이 아닐 것이다.

 
  다시 정파연합당이 될 거라면 어째서 자주파와는 당을 함께 하지 못하고 뛰쳐나와야 했는가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시효가 지난 질문이다. 왜냐하면 자주파는 민주노동당의 당헌을 인정하지 않았음이 이미 밝혀졌기 때문이다. "왜 자주파와는 함께 할 수 없는가?"라는 질문은 자주파나 그들을 옹호하려는 지식인들에게나 맡겨두고,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왜 민주노동당은 자주파를 제어하지 못했나?"

 
  '자주파가 아닌 당원의 숫자가 적었기 때문이다.'라는 답변은 문제의 실체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 답변은 자주파가 최고위원회 선거에서 완승을 거둔 2004년 이후의 상황에 대한 답변은 될 수 있다. 하지만 2001년 이후 속속들이 입당하기 시작한 자주파들이 여기저기서 종파적 사건을 일으킴에도 불구하고 수수방관한 2004년까지의 상황에 대해선 설명하지 못한다. 정파연합당이라는 명칭이 경멸적인 것으로 전락한 데에는, 당헌과 당 체제를 사수하는 데에 소극적이었던 민주노동당 지도부의 한심한 행태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2001년에 자주파들이 용산 지구당(준)을 장악하려고 한 소위 "용산 지구당 사태"가 있었다. 그들의 시도는 당시로서는 당규에 비추어도 하자가 없었다. 당시의 민주노동당은 입당하는 당원이 소속 지구당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이 사태를 수수방관하다가 평당원들이 모임까지 만들어 난리를 치자 그제야 제도를 바꾸었다.

 
  이후 자주파들은 자신들이 다수를 장악한 지구당에서 온갖 편법적 행위를 일삼았으나 당으로부터 처벌되지는 않았다. 굳이 자주파에 대한 처분이 아니더라도, 당헌과 당규를 수호하려는 중앙당의 의지는 언제나 의심스러웠다. 당기위의 처벌이 웃음거리가 되는 세태 속에서 정파연합당은 정파 분할 통치당이 되어 갔다.
 

  그러다가 2004년 자주파가 최고위원회 선거에서 승리한 이후에는 선거승리를 위해 당비 대납을 시도해도, 기관지 편집장을 부당하게 해고해도, 대표 선거에서 상대편 후보에 대한 허위사실을 유포해도, 심지어 명명백백한 회계부정을 저질러도 당은 당원들을 처벌할 줄을 몰랐다.
 

  이는 엄연히 당을 수호할 수 있는 제도적 수단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수호를 포기한 정치적 자살행위에 다름 아니었다. 바이러스가 뇌수에 침투하고 있는 데에도 '당이 깨질까봐' 비판을 하지 않은 소수파도에게도 반성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 반성은 새로운 정당을 만듦에 있어 어떤 행동으로 구체화될 수 있을까. 나는 정파연합당이 하나의 정당으로 존속할 수 있는 당원 민주주의의 제도에 대해서 고민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민주노동당의 실패를 이념의 문제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주파의 이념이 낡아서 실패한 것이라면, 그에 반대한 소위 평등파의 이념은 어느 정도나 참신한 것인가.

 
  <레디앙> 등에서 1980년대의 여러 이념적 지향에 대해 좋은 얘기가 많이 나오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진보신당의 구성원들이 그런 지향을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지금 이 순간 진보신당에 참여할 수 있는 이들이 '변신'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념적인 변화가 미래의 약속이 되고, 단지 그것만으로 과거의 구태가 인정받고 반복된다면, 진보신당에도 미래가 없다. 우리는 마땅히 민주노동당의 실패를 당원 민주주의의 실패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민주주의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단순히 투표라는 절차와 다수결의 원칙이 있다고 해서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1987년에 대통령 직선제 성취 이후 민주주의가 완전히 성립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가 잘 기능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섬세한 제도적인 디자인이 필요하다. 민주노동당으로부터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느꼈다고 말하는 것을 '좌파적'인 인식이라 착각하고 의원단이나 활동가 중심의 정당을 만들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퇴행을 주도하는 것이다.

 
  개별 정파들이 이합집산하겠지만 결국엔 하나의 정당이 만들어질 것이다. 아마도 총선 전에 창당이 시작되어 총선 후까지 그 흐름이 이어질 것이다. 정치 공학적으로 볼 때 이처럼 뻔한 사실에 대한 찬반을 표현하기 위해 평당원 지망생들이 오래 논쟁해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진보신당의 의사결정 구조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추상적인 선언이 아니라, 과거 민주노동당에서 기능했던 모든 제도들을 모조리 검토하여 추려낼 것은 추려내고, 덧붙여 새로운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일단 목표만을 얘기한다면, 정파연합당이라는 현실에서, 정파들이 공개적으로 활동하면서 정당한 경쟁을 보장받으면서도, 무정파 평당원들의 권리구제가 가능한 제도의 확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에 관한 논쟁을 통해, 정파의 활동의 자유는 당헌과 당규를 통해 제약받아야 한다는 당연한 원칙을 모두가 공유해야 한다.

 
  이 논쟁은 심지어 이념 논쟁보다도 중요하다. 가령 사민주의-사회주의 논쟁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용한 것인가. 사민주의를 옹호하는 주대환의 주장은 대중들에게 어떤 본보기를 보여주지 않으면 대중정당이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조봉암의 진보당과 유럽의 사민당을 내세우는 그의 전략은 유효하다. 반면 반대편의 논자들은 사민주의는 이미 유럽에서 한계를 드러낸 체제이며, 그것에 대한 집착은 미래를 위한 상상력을 가로막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 역시 일리는 있는 말이다.

 
  결국 이 논쟁은 신학에 비유하자면 눈에 보이는 십자가와 예수상을 만들고 포교를 해야 한다는 쪽과 그것은 참된 신앙을 담보하지 못하는 우상숭배라는 쪽의 대립에 해당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을 개발할지 또한 그중에서 정치적으로 무슨 정책을 우선적으로 내세울지에 대한 논쟁이라면 몰라도, 무엇이 무엇에 대해서 우선하는지에 대해 논하는 것은 별스런 의미가 없다. 비유한 그대로 이것은 차라리 신학 논쟁에 가깝다. 당연히 조봉암의 진보당을 계승하고 유럽의 사민당을 참조하면서도, 자본주의를 넘어설 다양한 대안들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어느 쪽에 방점을 찍건 다시 문제는 당원 민주주의를 관철시키는 체제다. 사민주의를 지지한다 해도 유럽의 제도를 곧바로 우리 현실에 수입할 수는 없을 것이며,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한다고 해도 이론가의 상상력을 곧바로 현실정책에 그대로 반영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당원과 대중을 설득하고 추인받는 과정에서 발전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당원 개개인의 권리가 강화되고 그들을 설득하려는 정파들의 경쟁이 공정해야 한다. 정당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 역시 구체적인 제도에 대한 찬반논쟁을 통해서 실천적인 논의의 맥락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평당원 지망생들은 소속된 정파나 활동하는 사이트를 넘어 당원 중심 정당의 구체적인 시스템을 디자인하는 일에 다같이 참여해야 한다. 이합집산의 과정에서 서로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활동가나 이론가뿐만 아니라 평당원 지망생들끼리도 활발한 논의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나 역시 다음부터는 구체적인 제도에 대한 논의로 미래의 당원들을 찾아뵙고자 한다. 
   
 
 
  한윤형/인터넷 논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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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관위는 대통령 선거 180일 전인 지난 22일부터 선거일인 12월 19일까지 인터넷 게시판이나 자신의 홈페이지에 특정 후보자나 정당 등에 대한 지지나 반대의 글을 올리면 선거법에 의해 처벌을 받는다는 내용의 ‘선거일전 180일 도래에 따른 제한·금지 사항’을 발표하고 사이버 감시팀을 운영해 감시·단속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2002년의 내게 선관위의 기준을 소급적용한다면 일천여건의 범법행위가 적발될 것이다. 20대 중반이 되니 이제 겁이 많아져서 감히 선관위를 거스르는 일은 못할 것 같다. 그래서 선관위가 “특정 후보자나 정당 등에 대한 지지나 반대”를 하지 말라면 하지 말 수밖에. 대신 ‘선관위에 대한 반대’를 가지고 뭐라고 하진 않겠지?


특정 후보의 당선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대한민국이라는 정치공동체를 생각하는 입장에서 시민들이 인터넷에 정치적인 의사표현을 원하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정말로 하나마나한 소리인데,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떠들고 싶어하는 것이 당연한 만큼, 시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당연하다.


둘은 매체의 정치평론의 수준이 개판 이분전이기 때문이다. 가령 시민들이 직접 의사를 표현하지 않은 채 엘리트들의 정치싸움을 구경하는 엘리트 정치를 하려고 해도, 도대체가 감정이입할 대상이 없다. 그런 대상을 만들어내라고 요구하고 그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정치평론의 역할일 테지만, 정치평론은 전혀 그런 역할을 안 하고 있다. 이를테면 시민들은 직접 떠들지 않으면 원하는 것을 얻기는커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전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스스로 떠들고 싶을 수밖에.


내가 읽어본 것 중 정치평론에 대한 가장 탁월한 비평은 <역사와 사회> 2004년 여름호에 실린 정치학자 전인권의 “재판관의 얼굴을 한 독자의 노예 : 17대 총선 기간의 4대 신문 사설 분석”이다. 탄핵부터 2004년 총선까지라는 특정한 기간에 한정된 연구이지만, 그 시기의 특수성 때문에 한국 정치평론-물론 여기선 신문사설에 국한되어 있지만, 사실상 대부분의 정치평론이 사설을 본뜨고 있으므로-에 대한 가장 탁월한 비평이 탄생했다.


이 글은 요약하고 싶어도 전해주고 싶은 부분이 너무 많아서 요약할 수가 없다. 며칠 내로 타이핑해서 파일로 올려보던지 해야겠다. 다만 그는 그 기간에 신문들이 공론public opinion 형성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증거로 전혀 언급되지 않은 두 가지 문제를 거론한다.


이렇게 신문 사설이 자신의 본분을 잃고 정치적 쟁점에 끌려 다니며, 공론의 과정이 아니라 정치가들처럼 사태의 결과를 계산하며 이리 갈까 저리 갈까 걱정하거나, 노도 같은 대중의 눈치를 보다보니, 너무도 중요한 두 가지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그 하나는 애당초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 결정을 내린 선관위가 원래의 결정문과 다른 공문을 대통령에게 보냈다는 사실이다. 이 사건은 겉으로 보기에는 별것 아닌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이 거짓 공문은 3월 11일 대통령의 기자회견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고, 경우에 따라서는 탄핵 가결에도 실질적인 방아쇠 역할을 했을 정도로 중대한 사건이다. 이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국민과 대통령에 대한 기만행위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어느 신문도 이 문제를 제대로 거론하지도 못하고 있다. 선관위의 기만행위는 지금이라도 그 진실을 밝혀 엄중 문책해야 하는 사안이다.


다른 하나는 의문사진상조사위원회의 탄핵 반대 성명이다. 이 기관의 행동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 기관은 특별한 엄격함과 신중성, 그리고 민주화 과정에서 소리 없이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의 진실을 규명하는 한시적 역할을 맡고 있다. 이런 기관이 탄핵 찬반처럼 뜨거운 정치적 쟁점에 견해를 표명한다면, 늘 논란이 따르는 의문사진상규명의 신뢰성을 어떻게 담보한다는 말인가? 자신들의 견해를 표현하지 않아도 국민의 70%가 적극적으로 탄핵 반대를 표현하고 있는 마당에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것은 본래의 임무를 망각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이 위원회의 탄핵 반대 성명은 공무원노조나 전교조의 탄핵 반대와 전혀 성격을 달리하는 것인데, 어떤 신문도 이 위원회의 어처구니없는 행위를 효과적으로 규탄하거나 문책하지 못했다. 이 역시 대한민국이란 공동체나 정치평론가의 관점이 아니라 신문사의 편협한 시각 때문에 놓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문제들은 정치평론이 제기하고 시민들에게 수용되어야 하는 것인데, 신문이나 시민들 모두 당파적으로 접근하다 보니 지각되지 않는다. 가령 선관위의 기만행위.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에게는 선관위가 대통령이 선거법을 위반했다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 수구기득권 세력의 대변인이라는 증거가 되기 때문에 이것이 따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반면 한나라당 지지자들은 대통령이 누구에게 기만당하건 말건 아무 관심이 없다. 의문사진상조사위원회의 경우도 비슷하다. 열린우리당 지지자는 탄핵이 그냥 도덕적으로 부당한 사안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탄핵을 반대하는 것이 정상이다. 한나라당 지지자는 공무원노조나 전교조도 성명을 내서는 안 된다고, 혹은 아예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에 의문사진상조사위원회의 성명을 따로 문제삼을 이유가 없다.


최근의 논쟁구도도 이와 다를 바 없다. 대통령에 온정적인 사람들은 대통령이 특정 후보를 비판하는 것을 선거법 위반으로 규정한 선관위의 판결 자체를 ‘나쁜’ 것으로 보고, 그 나쁜 것에 대항하는 대통령의 행동은 ‘좋은’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그 반대편은 정확히 그 반대고. 도덕적으로 경직된 사고방식이다. 이 부분에서 선관위의 행동이 비판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기회주의적인 처신 때문이다. 선관위는 야당의 주장을 수용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대통령의 주장을 수용하는 것도 아니다. 일차적으로는 이 점이 가장 큰 문제다.


대통령의 특정 후보 지지나 반대 여부를 허용할 수 있느냐는 문제는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법규를 선택하는 문제다. 대통령이 무슨 ‘시민 불복종 운동’을 벌이듯이 자신이 원하는 법규를 내놓으라고 헌법기관들에게 투정을 부리는 것이 바람직한 정치행위라고 볼 수는 없다. 첫째로는 대통령을 한 명의 시민과 동등하게 볼 수 있느냐는 문제가 있고, 둘째로는 시민 불복종 운동 자체의 문제도 있다. 자연법의 관점에 입각한 시민 불복종이 용인되느냐의 문제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다만 선진국일수록 시민 불복종에 관용적인 법집행 문화가 있을 뿐이다.


안희정의 경우는 대통령이 가장이네 뭐네 하면서 선출된 대통령이 선출되지 않은 선관위에 통제받는 건 부당하다고 말하는데, 이 발언은 그의 천박함과 무식함을 보여줄 뿐이다. 첫째로 대통령은 가장이 아니고, 둘째로 중앙선관위는 헌법기관이다. 헌법기관이 자신의 고유한 업무사안에 대해 대통령을 통제하는게 ‘부당’하다면 도대체 대한민국에 ‘가당’한 건 무엇인지 스스로 탐구해 볼 일이다. ‘부당’이란 개념은 그럴 때 쓰는 게 아니다. 선관위는 대통령을 통제한 권한이 있다. 선관위의 대통령에 대한 판단에 반대한다면, “선관위의 판단이 부당(혹은 부적절)하다.”고 말해야지 “선관위의 통제가 부당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내게는 정치평론에 있어서, 두 가지 문제의식이 있다. 하나는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나눠먹고 있는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레토릭을 해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열린우리당은 이상주의적이지 않다. 그들은 정책적으로는 지극히 보수적이고, 정치행위 면에서는 (헌법을 우습게 알 정도로) 급진적인 ‘혁명적 우익’ 세력이다. (이 수사는 폴 크루그먼이 조지 부시 일당을 가리킬 때 사용한 것인데, 2002년에 생명연습이란 인터넷 논객이 참여정부에게 헌정한 바 있다.) 한나라당은 결코 현실주의적이지 않다. 그들은 시장지상주의를 추구하는 것을 도덕명제로 생각하는 도착증적인 정치집단일 뿐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부여된 레토릭은 물론, 상대편의 레토릭을 가지기에도 유능하지 않다. 이런 지점들은 정치학자 최장집이 가장 잘 폭로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하나는 정치평론 자체의 질이 높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을 잘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 앞서 언급한 전인권이었는데, 이 분은 안타깝게도 그리 많지 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다. 어쩌면 이제는 정치평론에 대한 고민은 시민들이 스스로 해야할 지도 모르겠다. 선관위가 특정 후보에 대해 너무 버닝하지 말라고 배려(?)해 주었으니, 조금 더 넓은 마음으로 포괄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것도 이 골치아픈 대한민국을 즐겁게 살아가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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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어떤 미래를 선택할 것인가>, 송호근, 21세기북스(2005) 읽다.


'이념갈등과 정책빈곤의 진보정치'라는 부제엔 동의한다.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이 '진보정치'를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이것은 이름의 문제일 뿐이니까.) 즉, 노무현 정권이 수사적으로는 굉장히 급진적이면서, 실제 정책의 차원에선 빈곤한다는 것, 수사적으로 보수층을 자극했기 때문에 별 것도 아닌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에 막대한 정치력을 소모하게 된다는 것, 그런 상황을 탈피하려고 하기는커녕 오히려 지지의 기반으로 삼고 있다는 것, 그 결과 정권의 개혁적 정체성을 구체적인 정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수구세력과의 말싸움을 통해서 과시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한국이라는 국가의 미래나 개혁세력의 앞날을 위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등의 사실에 동의한다. 이런 추세가 꼭 국내의 문제로 국한되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중국의 도약과 '동북아 중심국가' "라는 꼭지에서 적절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탄핵 사태나 과거사 청산법에 관련된 그의 미적지근한 칼럼에도 상당부분 동의한다. 그런 입장이 가능하다는 것, 그럼에도 '양비론자'로 몰려 네티즌들의 질타를 받는 그의 처지가 한국사회에 공론이라는 영역이 없음을 보여준다는 것에도 동의한다. 이상의 '동의'는 그의 언어가 아니라 내 언어로 정리한 것이지만, 내용상의 큰 차이는 없다고 믿는다.


다만 탄핵 사태나 과거사 청산법에 대해 열린우리당을 화끈하게 지지하지 않을 때에, 그는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을 동시에 비판할 수 있는 그만의 관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열린우리당, 혹은 한나라당의 방식이 '심하다'라며 '감성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런 접근도 의미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곤혹스러운 것 앞에서 곤혹스러움을 표시하는 것도 글쓰기의 힘이다. 하지만 나는 주류언론에 자주 글을 기고하는, '외국 학계에도 널리 알려진 한국의 중진사회학자'의 정치평론이 이 수준은 넘어섰으면 좋겠다. 아마도 그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따위의 수사에 감명받을 사람인 것 같다. 대선후보 '노무현의 눈물'에 감동받고, 대선 후엔 더 이상 그런 '눈물'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슬퍼하는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인간의 얼굴'이라는 애매한 수사를 사용하기보다는 침해받아서는 안 되는 사회구성원의 인권엔 무엇무엇이 있는지를 기술하는 것이 더 '공론'에 가깝다고 믿는 사람이다. 탄핵 사태 때 대통령, 열린우리당, 그 지지자들이 심하게 나아간 부분이 있다고 비판하려면 헌법적 시각에 기대야 하고, 과거사 청산법에 대해 회의를 표명하려면 '민족이 아니라 인권'이라는 이영훈의 시각 정도는 갖춰야 한다. 그가 그런 역량이 없다고 단언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 책에서 인용된 칼럼은 미진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나는 386세대와 포스트 386세대에 대한, 특히 포스트 386세대에 대한 그의 '세대론'에 동의하기 어렵다. 물론 그의 책은 열린우리당이 총선에서 압승한 직후, 정권과 여당에 대한 지지율이 이 정도로까지 급락할 줄은 몰랐던, 부동산 정책이 이토록 처참하게 실패할 줄은 몰랐던 상황에서 쓰여졌다. 지금이라면 그는 조금 다른 말을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가령 포스트 386세대가 인권, 환경, 평화, 분배, 차별금지, 자아실현 등을 우선시하는 탈물질주의에 경도되어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은 당장의 정치적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아야 하는 인식은 아니다. 그리고 나는 이런 상황인식에는 정말 동의하기 어렵다.


어쩌면, '그 이전 세대와 비교한다면'이라는 관용어구가 그의 모든 주장을 용서해줄 지도 모른다. 그의 조심스러움은 크나큰 장점이다. 그래서 노무현 정권을 높게 평가하진 않으면서도, '한국 현대사를 돌이켜본다면 노무현만한 사람이 대통령이 된 것도 다행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하는 그의 자세에 (그 말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나는 경의를 표한다. 하지만 '절대적 기준'이란 것도 있는 것이다. 김선일씨 피살 사건 때 보여준 한국인의 태도는 그들이 '인권'이란 단어에 대해서 아는 것이 철자법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포스트 386세대니, 20대니 하는 사람들도 그 점에서 세계평균보다는 한국평균을 따르고 있음을 증명했다. 그들은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마치 화투장을 집어던지듯 가볍게 내던져 버렸다는 사실엔 주목하지 않았고, 테러리스트들에 대해서만 분노했다. 이라크에 특전사를 보내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 중엔 20대도 많았을 것이다. 송호근 교수식으로 정의한다면 포스트 386세대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그위 세대들은 포탈사이트 리플을 그렇게 열심히 달지는 않으니까.


신기하게도 송호근은 포스트 386세대의 특징이 이렇기 때문에, 한국 정치에 큰 분란이 일어날 것처럼 말한다. 그의 '세대에 대한 우려'가 나에겐 '세대에 대한 극찬'이 되는 것이다. 현재 한국사회의 이념갈등이 심하고, 그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어떠한 정책적인 기제도 없다는 그의 판단, 그것이 한국사회의 큰 문제라는 그의 인식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그 원인이 세대의 분화에 있다는 그의 진단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가 보는 세대는 내가 보는 세대와는 전혀 관련이 없기 때문에, 나는 그가 논리적 정합성이 떨어진다기보다는 현실파악에 실패한 정치평론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그의 말을 절반만 신뢰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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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김선일 씨 사건 국면에서, 대통령 탄핵을 주장한 어느 인터넷 글쟁이의 마지막 러시였다. 박용진 대의원은 답변하지 않았다. 그가 이 글을 보았다는 건 사적인 루트를 통해 확실히 확인했다. 몇달 후, 진보누리 송년회 모임에서인가 그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나는 굳이 이 사건을 언급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글이 내 마지막 기력이었고, 나는 내가 민주공화국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한 후 마음편히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사건을 계기로 민주노동당과 진보누리에 대한 애정을 버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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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중앙위원 결의문과 박용진 동지의 제안글을 함께 읽었습니다. 두 글 모두 같은 정세인식을 담고 있지만, 결의의 수위는 달랐습니다. 그리고 저는 중앙위원 결의문보다는 박용진 동지의 제안글을 훨씬 더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박용진 동지의 제안글이 짚어내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저의 소견을 간략히 밝히고 동지의 답변을 기대합니다.


1) 저는 김선일씨 피랍살해사건과 이라크 파병강행은 별도로 분리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라크 파병강행 역시 “침략전쟁을 부인한다”는 헌법에 위배되는 것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16대 국회의원들은 그것이 침략전쟁이 아니라는 잘못된 인식하에서 파병에 동의했으므로, 그것이 절차적으로도 위헌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경우 우리의 투쟁은 헌법수호 투쟁이 아니라 정세인식에 관한 투쟁이 될 것이며, 결과적으로는 정책적인 투쟁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김선일씨 사건은 다릅니다. 이 사건은 박용진 동지의 제안글이나 민주노동당 중앙위원 결의문에서도 지적하듯, 국가에 의한 선행살인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이라크 테러범들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가 예정된 시한을 18시간이나 거슬러서 “파병재확인” 입장을 밝힐 때에, 김선일씨는 이미 살해된 것입니다. 이는 모든 민주주의 국가의 헌법을 뒷받침하는, 국가와 개인 간의 선험적인 사회계약에 대한 의도적인 위반으로, 이러한 행위를 저지른 정권이 더 이상 통치의 정당성을 가지지 못함은 충분히 증명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 동지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김선일씨 사건이 이라크 파병건과 어느 정도 분리가 가능하고, 또한 그렇기에 별도의 방법을 통해 매듭지어져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있으십니까?


2) 저는 이 경우 김선일씨 피랍살해사건에 대한 책임묻기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으로 귀착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헌법의 기본을 위반한 대통령을 헌법에 의거해 단죄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고, 책임여부를 명확히 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합니다. 퇴진 즉 ‘물러나라’는 구호는 너는 더 이상 잘할 가능성이 없으니 그만 내려오라는 뜻으로 읽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 필요한 것은 노무현의 낙마가 아니라 노무현의 책임입니다. 그 책임을 탄핵으로 대신하라는 뜻에서 탄핵은 퇴진보다 당위적으로 정당합니다.

‘퇴진’ 구호는 비록 민주노동당의 투쟁에서는 아닐지라도 그간 여러 투쟁에서 관성적으로 사용되어 왔으므로, 일반인들의 입장에서 ‘요식행위’로 이해할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의회에 진출해 의회정치를 실천해야 할 민주노동당의 입장에서 의회의 제도를 투쟁수단으로 활용한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시민들은 이미 탄핵 정국을 현실적으로 겪었으며, 누구 문제가 있는 사람 있으면 “탄핵시켜야 한다.”는 농담을 할 만큼 탄핵을 실제적인 책임추궁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 역시 민주노동당 의원만으로는 탄핵 발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민주노동당이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감임을 천명한다는 것, 그리고 탄핵을 위해 노력할 것임을 천명한다는 것이며, 이를 위해 당원의 투쟁역량을 집결한다는 것입니다. 형식적 불가능함으로 따지자면 퇴진 구호도 불가능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퇴진을 행위할 수 있는 위인은 노무현 본인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며, 그 요구가 투쟁입니다. 따라서 탄핵 역시 퇴진과 마찬가지로 실제적인 투쟁이며, 그 효과는 더욱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당게 일부에서는 탄핵은 가능하지 않다는 패배주의적인 인식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중 일부는 더 많은 희생이 나온 후에 정권을 흔드는 것이 정치적으로 바람직하다는, 그야말로 인간의 목숨을 사물화시키고 수단화시키는 주장을 거리낌없이 개진합니다. 저는 김선일씨 피랍살해사건에 대한 투쟁이 이러한 정치공학에 가로막힐 만큼 사소한 사건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박용진 동지의 결의안 역시 김선일씨 사건에 대한 책임추궁보다는 이라크 파병 문제에 치우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정치투쟁에 한 개인의 권리가 묻혀버리는 것으로, 도의적으로 용납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선일씨 사건에 대해 민주노동당이 탄핵 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저의 주장에 대한 동지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동지의 조속한 답변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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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일씨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무관심에 충격을 받은 결과 아래와 같은 냉소적인 인식이 나온다. 뉴라이트조차도 나라를 이렇게 바꾸자고는 안 할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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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논의의 결과를 종합해본다면,

1> 현행헌법상 '부당한' 사유에 의한 탄핵은 수월히 이루어지고,  현행헌법상 '정당한' 사유에 의한 탄핵은 냉소를 받는 현실이라면, 탄핵이라는 제도 자체가 헌법과 관련해서 이해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므로, 그런 제도는 없애는 것이 옳음.

2> 의회가 대통령을 규제할 방법이 없어진다면, 대통령은 현행헌법의 대통령보다 더 우월한 존재가 되며, 그런 점에서 '입헌 군주제'로의 '개혁'이 불가피함.

3> 이에 의거해 우리 국민의 위상은 '시민'에서 '신민'으로 격하되는 것이므로, 기본권의 제약이 불가피함. 신민의 목숨은 군왕의 수중에 있으므로, 유사시에 군왕이 신민의 목숨을 판단하는 것 역시 불가피함.

4> 오직 위의 '개혁'이 이루어졌을 때 현재 김선일씨 사건과 관련한 논의가 이해될 수 있음. 대한민국은 자신의 국가 형이상학을 폭로하고, 그것이 서구의 사회계약론적 민주주의보다 우월함을 체제경쟁으로 증명해야 함.

5> 한나라당 지지자는 위에 설명한 제도로써나 충족되는 국가 형이상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개헌'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솔직하지 못함. 이중적임. 그리고 노무현 지지자는 그런 국가 형이상학을 시인하면서도 서구 선진국의 길로 가는 '개혁'을 입에 담는다는 점에서, 정신분열적임. 민주노동당의 패배주의에 대한 해석은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함.

6>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헌법을 가져야 함. 괜히 쓸데없는 헌법 때문에, 사회구성원들을 피곤하게 만들 필요가 없음. 일단 자기 수준대로 낮춰놓고, 나중에 피흘리며 투쟁하며 고치던지 말던지 맘대로 하라고 하고 싶음.

7> 국가는 교육을 '엉터리'로 하여 마치 자신이 민주공화국이라는 듯이 사기를 친 것에 대해 반성하고 전국민들,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사과를 해야 마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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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적 개인의 입장에서 김선일씨 피살사건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단 두가지임.

즉, 입헌군주제로의 개헌을 주장하고 운동하거나,
헌법에 의한 탄핵을 주장하고 운동하는 것 뿐임.

이 두가지 선택지를  피해갈 자유도 물론 개인에게 있으나, 그 경우엔 '애도'니 '추모'니 헛소리 집어치우고 침묵하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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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일 씨 사건 관련해서 나의 '탄핵' 주장이 그르다고 본 이들에 대한 반론 성격의 글이다. 한쪽은 우파들의 현실론을 비판하고, 한쪽은 좌파들의 무조건 전민항쟁 좋아하는 취향을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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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빠들이 오늘날 저꼴로 몰락하여 세인들의 조롱거리가 된 이유는, 자신들을 노무현과 동일시한 나머지 마치 스스로 대통령이나 되는 양 굴었기 때문이다. 시민의 입장에서 평론을 쓰지 않고 대통령의 입장에서 평론을 썼기 때문이다. 노무현 밑에는 자신이 제갈공명이라고 믿는 '자칭 참모'들이 적어도 2천명은 있었다. 나는 가끔 노무현이 그들중 몇명이나 알고 있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지금의 진보누리를 보니, 민주노동당 당원이나 지지자들 중에서도 '당원'이나 '지지자'를 넘어 당대표와 의원단을 걱정하시는 분들이 상당히 많은 것 같다. 물론 걱정이 되겠지. 그러나 걱정하지 마시라. 당원은 당원의 입장에서 논지를 전개해야지, 당대표나 의원단의 입장까지 고려해서는 '변명 제조기'밖에 될 것이 없는 것이다.


1.
나보다 우파라고 스스로 생각하실, Sophist 님의 질의에 대해 먼저 반론을 하겠다.


'현실'이라는 말이 그토록 남용되기 때문에, 나는 일찌기 옥석논쟁 시절에 현실성을 세가지로 구별한 바 있다. 그 중 맨 앞의 것은 적용될 만한 맥락이 없어 그후 입에 담지 않았으나, 두 종류의 구별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 두가지는 "잠재적 현실성"과 "확률적 현실성"이다.


잠재적 현실성은 쉽게 말하자면 물리법칙의 현실성이다. 그것은 세계 내에 잠재되어 있는 법칙성으로, 중력법칙을 거스를 수 없는 것처럼 그것을 거부할 도리가 없다. 따라서 그것이 실재라면, "차가운 실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확률적 현실성은 그보다는 세계에서 자유로운 사회법칙의 현실성이다. 그것은 세계 내에 잠재되어 있다기보다는, 인간들 간의 관계에서 확률적으로 구성된 규범성이다. 비록 어느 사회에서 어떤 법안이 확률적으로 지지를 받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다른 법안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구호는 바로 "확률적 현실성"이 마치 "잠재적 현실성"인양 행세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다. 따라서 그것이 실재라면, 우리의 노력에 의해 바뀔 수 있다는 점에서 "뜨거운 실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인식능력은 한계가 있으므로, 차가운 실재와 뜨거운 실재의 경계선은 모호할 것이다. 그러나 특정한 사안에 있어 어떤 것이 좀더 뜨거운 실재인지, 혹은 차가운 실재인지는 충분히 판단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내가 이렇게 두 개의 현실성을 구별해야만 했던 동인은 앞서 말했던 것처럼 옥석논쟁 때문이었다.


강준만은 진중권이 좌파를 비판한 글을 가져와, 그가 말하는 '현실성'을 물고 늘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진중권의 비판은 일부 좌파들의 신학적 어법에 관한 것으로, 좌파들이 '차가운 실재'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강준만은 이 두가지의 실재를 혼용하여, 선거에서 이문옥이 서울시장이 될 확률이 없다는 '뜨거운 실재'를 진중권이 인정하지 않는것은 일관성의 상실이라고 비판한다.


좌파들은 모든 실재를 '뜨거운 실재'로 치환시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상상력'이 없는 이를 천시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반면 우파들은 모든 사회적 실재를 '차가운 실재'의 반영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들이 좌파에게 "현실성이 없다."는 이념 공세를 취할 때, 그리고 좌파가 이에 대해 "그렇지 않다."는 반론을 할 때, 이는 관념의 투쟁이요 관념의 문제인 것이다.


이제 이런 관점에서 Sophist의 질문에 답해보자. 한국군이 테러리스트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은 내가 보기엔 '차가운 실재'의 영역에 들어간다. 이에 반대하는 이들의 텍스트를 보라. 한국군의 대 게릴라 전략이 세계최고라는 둥, 한국인의 복수심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둥, 혼자 오줌을 싸고 자빠졌잖은가. 원래 '차가운 실재'를 부인하는 이들의 글은 상상력으로 가득차 있고, 낭만적이다.


(만약 이들이 관점을 바꾸어 "이런 억울한 일을 막기 위해 세계정부가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면, 나는 그것이 지난한 일임은 알았겠지만 '차가운 실재'를 거스르고 있다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 일 역시 이러한 개별사건을 해결하기에는 턱없이 시간이 많이 잡아먹는 일이다. 그래서 속편하게 보복전쟁을 낭만적으로 '꿈꾸는' 이들이 생긴 것이다.)  


반면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때는, 그것은 정치공학적인 문제이며 확률적인 문제이다. 노무현에 대한 탄핵이 실제로 이루어졌을 때 '안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건 사유실험만으로도 충분히 추론 가능한 일인데, 심지어 얼마 전에 '실전'까지 한번 뛰어봤다. 탄핵의 비현실성은 확률적이고 규범적인 문제이지 잠재적이고 법칙적인 문제는 아니다. 따라서 나는 당위에 의해 탄핵을 주장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며, 명백한 당위에 대해 진보정당은 그 확률적 현실성을 높이기 위해 조금이라도 노력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지지율 하락을 우려하고 있다. 먼저 나는 이번의 명분이 너무도 당위적인 것이라 일정 부분 민주노동당의 손해를 감수할 만한,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하는 식으로 순수하게 정치공학적으로 보더라도, 최근 민주노동당에 대한 불신을 키우는 요인은 '어정쩡함'에 있지 '과격함'에 있는 것은 아니다. 민주노동당은 당장 국민 40%를 바라보는 수권가능한 정당이 아니다. 지지자 10%에서 20%를 바라보며 정치하는 군소정당이다. 앞서 탄핵했던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몰락이 눈에 밟히는가? 그러나 역사는 반복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2.
이제 나보다 좌파라고 생각하실 RVD님의 주장에 대해서도 반론해 보자. 처음에 RVD님의 쪽글을 봤을 때, 나는 그가 느끼는 아이러니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RVD는 스스로를 아흐리만보다 더 과격한 좌파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노빠들이 자신에게보다 아흐리만에게 더 성질을 부리는 아이러니를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 후 자신을 추스린 그는 정리에 나선다. 그에게 '퇴진'운동은 전민항쟁을 포함한 대중투쟁의 요소가 포함된, 근본적인 투쟁이다. 그러나 '탄핵'운동은 구호는 의회주의에 이용당할 확률이 많은, 개량적인 투쟁이다. 여전히 아이러니는 남아 있다. 그는 더 과격하고 근본적인 것을 주장하는 주제에 '탄핵'운동이 정치공학적으로도 자살행위라고 말한다. 왜 덜 과격한 것이, 정치공학적으로 더 리스크가 클까.


"설령 지금이 전민항쟁이 가능한 시기라 하더라도 먼저 유도를 해야 할 것은 탄핵이다. 제도가 왜 있는가. 폭력적인 충돌 이전에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제도가 있는 것이 아닌가. 만약 지금이 전민항쟁이 가능한 시기라 하더라도, 정치인을 전민항쟁의 ‘가능성’으로 협박해서 탄핵을 추진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다."


나는 이렇게 말했었다. 그런데도 RVD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한다. 탄핵이라는 제도가 있는데도 굳이 퇴진을 언급하는 것이 정답이라는 RVD의 말은 스트리트 파이터의 논리다. 짧게 요약하면 "좋은 주먹 놔두고 왜 말로 싸워~ 바보들~"이다. 유럽에는 자본주의를 전복하는 노동자들의 힘이 길들어지는 것을 두려워 노동조합 건설을 반대했던 좌파들이 있었다. RVD의 의식은 그들과 궤를 같이 한다. 이런 좌파들은 자본주의가 행여 성공할까 두려워 재를 뿌리며 방해해야 한다. 비록 자신들의 깽판질때문에 지금 민중의 삶이 고통스러울지라도, 미래의 승리를 위해 정당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종의 뒤틀린 '형이상학'이므로, 굳이 반론하지는 않기로 한다.


그러나 RVD가 모르고 있거나, 외면하는 사실이 있다.  현시기의 탄핵운동이 반드시 그가 바라는 '대중운동'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과, 그가 말하는 퇴진운동 역시 전민항쟁에까지 이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실제로 자신이 주먹을 쓸 일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말로만 스트리트파이터"인 것이다. 이게 그의 아이러니에 대한 해답이다. 나는 대중운동의 구호로도 탄핵이 훨씬 실재적이라고 생각한다. '퇴진'은 일부 좌파신학자들에게는 모르겠거니와, 대중들에게는 밋밋하고 느슨한 구호다. 시위하는 사람들에게서 매번 들어온 구호이기도 하거니와, 함의하는 바가 너무 크다.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제스처나 읍소에서, 전민항쟁까지를 포함하는 지나치게 넓은 개념인 것이다.


그러나 '탄핵'은 훨씬 구체적인 절차의 이름이며, 사람들이 이미 현실적으로 맛을 본 상황의 이름이기도 하다. RVD가 말했듯, 탄핵운동이 정치적으로 리스크가 더 큰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퇴진'운동을 말하는 이들은 결과적으로 민주노동당이 이 정국을 '대충' 지나보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삼국지의 참모들이 군주에게 권하는 지혜다. 노빠들이 노무현에게 권하면서, 우리에게 이해하라고 윽박지르는 그 지혜다. 명분을 잃지 않으면서 적당히 실리의 손실이 큰 상황을 견뎌내라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핵심 당직자와 의원단도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지지자까지 그렇게 타락해서야 어찌 진보정당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3.
나는 파병반대 문제와 김선일씨 사건 문제는 별개로 분리될 수 있는 문제라고 거듭 강조해 왔다. 그런데 노빠는 물론이거니와 좌파들도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


김선일씨의 사건은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의지적으로 타자에게 양도해 버린 사건으로, 그 결과 국가의 존립근거를 무너뜨린 사건이다. 무너진 존립근거를 도로 세우는 것이 올바르다면 정권이 책임을 져야하며, 그 책임을 져야할 사람은 궁극적으로 대통령 노무현이다. 따라서 그에게 책임을 지우는 입장에서 탄핵을 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정확히 말하면 내가 주장하는 대통령 탄핵은 "파병강행에 대한 탄핵"이 아니라 "김선일씨 사건에 대한 탄핵"이다.


파병찬반에 대한 문제는 이보다는 훨씬 더 정치적인 문제에 속한다. 물론 우리의 헌법이 침략전쟁을 부인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이도 위헌-합헌의 문제이긴 하나, 16대 국회는 이라크 전쟁을 침략전쟁으로 규정하지 않은 채로 파병에 승인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정치적 쟁점으로 남아 있다. 이를 근거로 민주노동당이 탄핵까지 나서는 것이 조금은 오버액션이라고 보는 이유다.


그런데 진보누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1차 파병때 탄핵결의안을 헌법재판소에 제출하는 원칙적인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나는 이도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앞서 말했듯 민주노동당의 입장과 지지자의 입장 (가령 진보누리의 입장)이 다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때 탄핵운동에 나섰던 진보누리가 그보다 훨씬 더 명백한 사안에 대해서 침묵한다면, 이것이 어찌 공정한 일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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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진보누리 사람들에게도 나는 상궤를 벗어난 인물로 보였음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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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진은 '물러나라'는 말이다. 정치적인 의사표현의 방식이다. 대통령과 내가 아주 다르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 구호는 파병강행과 같은 정책에 대해 사용되어야 한다. "이라크파병강행하는 노무현 정권 퇴진하라." 이건 말이 된다.


내가 말하는 것은 다른 부분이다. 김선일씨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선일씨는 죽기 전에 이미 국가로부터 인권을 유린당했다. 그 과정은 길게 말하고 싶지도 않다. 지금 진보정치 기사로 나와있는 것처럼, "이건 국가가 아니"다. 그 책임은 정권이 져야 한다. 최종적으로는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 져야 한다. 그래서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자는 것이다. 퇴진은 책임을 묻는 방식이 아니다. "이라크파병강행하는 노무현 정권 퇴진하라."나 "이라크 파병강행하는 노무현 정권 탄핵하라."는 둘 다 말이 된다. 그러나 "김선일씨 죽인 노무현 정권 퇴진하라."와 "김선일씨 죽인 노무현 정권 탄핵하라."는 다르다. 전자는 나이브한 주장이다. 나는 정치적 의사표현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노무현에게 책임을 지워야 한다는 것이다. 탄핵은 대통령에게 책임을 물리는 방식으로서, 퇴진과 구별된다.


다들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는지, 가슴만 답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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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나는 이 짓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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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김선일씨 사건 이후 상대적으로 조용하던 노빠들이 '탄핵' 얘기하니까 우루루 다 튀어나온다. 이게 우리 할 일이다.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들 중에 김선일을 위해 우는 것이 아니라 노짱의 고뇌의 결단을 동정하며 우는 이들을 분리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까지 노무현을 지지한다는 것은 죄다. 그 점을 상기시켜야 한다. 그게 죄가 아니라고 방방 뜨는 놈들과 싸워야 한다. 왜냐하면 그건 죄니까.


현실 좋아하는 노빠들, 내가 현실을 알려줄까? 노정권은 앞으로 3년간 조선일보 따라하는 거 말고는 할 일이 없다. 극렬빠돌 5-6만을 제외하곤 지지자들을 모두 실망시킨 정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단 말이냐. 노무현이 무슨 일을 하든 노무현 찍은 사람은 좋아하지 않을 것이고, 노무현이 조선일보를 따라하면 이회창 찍은 사람은 좋아할 것이다. 그런 상황이라면 노무현은 조선일보를 따라하게 되어 있다. 이게 현실이다. 이 정권 이미 끝났다. 그러려니 차라리 지금 탄핵시키는 게 노무현과 국민 모두에게 이롭다. 잘 생각해 봐라. 이 노빠들아.


오해가 있다. 이런 오해가 있는 것을 보면 좌파들의 인권감각도 세계평균보다는 한국평균을 따르는 모양이다. 김선일씨 피납사건에 대한 정부의 대처는, 파병강행이라는 정책과 구별되는 부분이 있다. 이라크 파병은 물론 헌법 제5조 1항에 현저히 위배되는 행위다. 그러나 국회가 침략전쟁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파병을 결의했으므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최소한 이라크 전쟁의 성격에 대한 '토론'이나 할 여지가 있다. 그리고 국회가 정한 정책을 수행하다가 발생하는 손실이 있다면, 그것을 감수해야 하는 것도 맞다. 군인의 죽음이나 테러로 인한 민간인의 죽음 자체가 탄핵사유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김선일씨에 대한 정부의 대응을 보라. 새벽 5시에 알자지라 방송에서 24시간 내에 파병철회 안하면 자국민을 죽인다고 했는데, 오전 10시에서 11시 사이에 일제히 외무부와 국방부가 "파병방침 불변"이라는 입장을 발표한다. 당연하게도, 이 사실은 알자지라와 외신에 대서특필된다. 외국인들은 한국 정부가 왜 저러고 자빠졌는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심지어 일부 한나라당 의원들조차 정부의 잘못된 대응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것은 국가에 의한 선행살인이다. 한 국가가 자국민의 목숨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데에, 아니 새벽 다섯시부터 오전 열한시까지 단 '여섯 시간'만 고려했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여기엔 토론의 여지가 없다. 대한민국은 이미 국가가 아니며, 헌법은 유린당했다. 노무현은 헌법 위에 엉덩이를 까고 똥을 쌌다.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는가?


혹자는 벌써 퇴진투쟁을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아 글쎄 퇴진이 아니라 탄핵이라니까. 하여간 내게 이 논리는 이렇게 들린다. "어이, 이게 끝이 아니야. 좀 있으면 사람 더 죽게 되어 있어. 그때 몰아서 단칼에 때리자구. 그게 정치 아니야?" 그렇게 못 하겠다. 이 문제는 그렇게 유치한 정치공학으로 풀어야 할 만큼 시시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노무현이 대통령일 수 없음은 상대적인 근거 때문이 아니라 절대적인 근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국가가 되려면 노무현은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최선은 시민사회의 영역에서 탄핵운동을 전개하고 민주노동당이 못 이기는 척 따라가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민주노동당은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에, 정말이지 차선책이라도 탄핵선언을 하라고 압박해야 할 판이다. 둘중 어느 쪽이라도 진보누리는 먼저 입장을 세워야 한다. 생명연습이 말했다 시피, 1차파병 때 탄핵 서명운동을 했던 진보누리가 지금 가만히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때의 서명운도이 '오류'였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인가? 아니면 딴잔련의 탄핵안 발의를 두고 탄핵이라는 제도 자체에 회의가 든 것인가?


그런 것이 아니라면 지금의 침묵은 이해될 수 없다. 지금은 진보누리가 선도적으로 나서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