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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우익의 나라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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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관위와 정치평론 (3)
폴 크루그먼은 그의 저서 <대폭로>에서 부시 행정부를 ‘혁명적 우익’으로 규정한 바 있다. 재무설계사가 되기 전 인터넷 논객의 하나였던 김대영은 이 규정을 고스란히 노무현에게 적용하여 노빠들의 원성을 샀다. 이 규정의 내용을 재인용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겉으로 천명된 목표를 보고 정책 제안이 그 이치에 닿는다고 추정하지 말라.
2. 약간의 숙제를 해서 진짜 목표를 찾아내라.
3. 유용한 정치 규칙이 실제 적용된다고 지레 짐작하지 말라.
4. 혁명적 세력은 공격으로써 비판에 대응한다는 것을 예상하라.
5. 혁명적 세력의 목표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이렇게 적어보니 이것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겉으로 천명된 목표, 즉 물류 비용 감소나 사교육비 절감과 같은 수사를 보고 대운하나 영어몰입교육이 이치에 닿는다고 추정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약간의 숙제를 해서, 이 정책들의 실제 목표, 즉 땅값상승을 통한 경기부양이나 영어만 잘 하는 강남 중산층 자녀들의 비정규직 영어교사 채용이라는 그들의 목적을 간취할 필요가 있다. 유용한 정치규칙이 실제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도 마찬가지. 비리가 드러난다고 해서 장관이 경질될 거라는 기대는 버려야 한다. 이재오가 설친다고 대통령의 형님이 일선에서 물러날 거라는 기대도 버려야 한다. 총선 당시 공약에서 삭제되었던 정책이 다시 추진된다는 사실에 놀라서도 안 된다. 그들의 목표에 한계가 없다는 점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하고 있다. 그야말로 혁명적 우익 만세다.
하지만 한국의 실정에서 생각해 볼 때, 혁명적 우익이라는 개념에 대한 접근은 노무현이나 이명박에 대한 인물 분석을 뛰어넘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돌연변이와도 같은 부시 행정부의 행동을 마음껏 조소할 수 있었던 폴 크루그먼과 달리, 우리의 경우 과연 ‘혁명적 우익’이 특수한 현상이었는가라는 물음을 던질 수 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한국의 우익들은 언제나 혁명적 우익이었다. 지켜야 할 전통적 가치가 무엇인지 규명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의 우익이 ‘보수주의자’가 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한국의 우익 정치인들은 언제나 이전의 정권을 부인하면서, 혁신적인 수사를 내세우며 자신의 정당성을 강변해 왔다. 언제나 혁신을 얘기했지만 그런 행동만큼은 모두 비슷비슷했다.
반면 리영희나 장준하의 사례에서 보듯 오히려 정통적인 보수주의자의 성향을 지닌 이들이 비판적 지성의 전통을 이어왔다. 좌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인지 모른다. 진보신당이 자신의 테두리를 어디까지 확장할지는 모르지만, 2차세계대전 이전의 사민주의를 옹호하는 노회찬의 모습은 어느 우파 정치인들보다도 더 ‘보수적’이다. 좌파들이야말로 한국 사회에서는 (세계사적 맥락에서 볼 때) 전통적인 가치지향을 계승하려는 ‘보수주의자’인 경우가 많다.
혁신이라는 말은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요즈음엔 주로 경영학의 내용 안에 포섭되어 사용되고 있다. 부단한 자기 혁신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기업에게 필수적인 덕목이다. “처자식만 빼고 다 바꾸어라.”고 말했기 때문에 자신의 기업에 대한 처자식의 지분만은 필사적으로 고수하려고 하는 이건희 회장의 사례를 생각해 보건대, 과연 한국의 기업인들이 그토록 혁신에 철저한 사람들일까 하는 의문은 들지만, ‘혁명적 우익’을 요구했던 한국 우익의 전통(?)의 맥락에선 기업가가 새로운 정치 리더가 되는 것이 거의 필연적인 일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뭐가 문제가 된단 말이냐. 혁신은 필요한 것이며, ‘좋은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 될 수 있겠다. 혁신을 사랑하는 행동주의자들은 언제나 박정희의 경부고속도로 개발을 이야기하며, ‘반대를 위한 반대’론자들이 어떤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를 논증(?)한다. 하지만 나로서는 왜 그들이 혁신적으로 나라를 말아먹은 사례들, 가령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정책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지 의문이다. 보수주의자들을 조롱하는 매우 전통적인 우화로 ‘끓는 물에 삶아지는 개구리’의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를 이렇게 바꾸어 보면 어떨까. “개구리는 언제나 폴짝 뛰어 다른 냄비에 튀어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앞뒤 가리지 않고 언제나 다른 냄비로 뛰어드는 쪽을 선택하게 되었지요. 그러다가 그는 마침내, 펄펄 끓는 냄비에 제 발로 뛰어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참여정부가 혁명적(!)으로 추진한 한미 FTA나 이명박 정부의 대운하 정책을 보면, 정말이지 이 개구리가 어느 끓는 물에 뛰어들지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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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관위는 대통령 선거 180일 전인 지난 22일부터 선거일인 12월 19일까지 인터넷 게시판이나 자신의 홈페이지에 특정 후보자나 정당 등에 대한 지지나 반대의 글을 올리면 선거법에 의해 처벌을 받는다는 내용의 ‘선거일전 180일 도래에 따른 제한·금지 사항’을 발표하고 사이버 감시팀을 운영해 감시·단속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2002년의 내게 선관위의 기준을 소급적용한다면 일천여건의 범법행위가 적발될 것이다. 20대 중반이 되니 이제 겁이 많아져서 감히 선관위를 거스르는 일은 못할 것 같다. 그래서 선관위가 “특정 후보자나 정당 등에 대한 지지나 반대”를 하지 말라면 하지 말 수밖에. 대신 ‘선관위에 대한 반대’를 가지고 뭐라고 하진 않겠지?
특정 후보의 당선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대한민국이라는 정치공동체를 생각하는 입장에서 시민들이 인터넷에 정치적인 의사표현을 원하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정말로 하나마나한 소리인데,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떠들고 싶어하는 것이 당연한 만큼, 시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당연하다.
둘은 매체의 정치평론의 수준이 개판 이분전이기 때문이다. 가령 시민들이 직접 의사를 표현하지 않은 채 엘리트들의 정치싸움을 구경하는 엘리트 정치를 하려고 해도, 도대체가 감정이입할 대상이 없다. 그런 대상을 만들어내라고 요구하고 그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정치평론의 역할일 테지만, 정치평론은 전혀 그런 역할을 안 하고 있다. 이를테면 시민들은 직접 떠들지 않으면 원하는 것을 얻기는커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전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스스로 떠들고 싶을 수밖에.
내가 읽어본 것 중 정치평론에 대한 가장 탁월한 비평은 <역사와 사회> 2004년 여름호에 실린 정치학자 전인권의 “재판관의 얼굴을 한 독자의 노예 : 17대 총선 기간의 4대 신문 사설 분석”이다. 탄핵부터 2004년 총선까지라는 특정한 기간에 한정된 연구이지만, 그 시기의 특수성 때문에 한국 정치평론-물론 여기선 신문사설에 국한되어 있지만, 사실상 대부분의 정치평론이 사설을 본뜨고 있으므로-에 대한 가장 탁월한 비평이 탄생했다.
이 글은 요약하고 싶어도 전해주고 싶은 부분이 너무 많아서 요약할 수가 없다. 며칠 내로 타이핑해서 파일로 올려보던지 해야겠다. 다만 그는 그 기간에 신문들이 공론public opinion 형성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증거로 전혀 언급되지 않은 두 가지 문제를 거론한다.
이렇게 신문 사설이 자신의 본분을 잃고 정치적 쟁점에 끌려 다니며, 공론의 과정이 아니라 정치가들처럼 사태의 결과를 계산하며 이리 갈까 저리 갈까 걱정하거나, 노도 같은 대중의 눈치를 보다보니, 너무도 중요한 두 가지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그 하나는 애당초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 결정을 내린 선관위가 원래의 결정문과 다른 공문을 대통령에게 보냈다는 사실이다. 이 사건은 겉으로 보기에는 별것 아닌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이 거짓 공문은 3월 11일 대통령의 기자회견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고, 경우에 따라서는 탄핵 가결에도 실질적인 방아쇠 역할을 했을 정도로 중대한 사건이다. 이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국민과 대통령에 대한 기만행위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어느 신문도 이 문제를 제대로 거론하지도 못하고 있다. 선관위의 기만행위는 지금이라도 그 진실을 밝혀 엄중 문책해야 하는 사안이다.
다른 하나는 의문사진상조사위원회의 탄핵 반대 성명이다. 이 기관의 행동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 기관은 특별한 엄격함과 신중성, 그리고 민주화 과정에서 소리 없이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의 진실을 규명하는 한시적 역할을 맡고 있다. 이런 기관이 탄핵 찬반처럼 뜨거운 정치적 쟁점에 견해를 표명한다면, 늘 논란이 따르는 의문사진상규명의 신뢰성을 어떻게 담보한다는 말인가? 자신들의 견해를 표현하지 않아도 국민의 70%가 적극적으로 탄핵 반대를 표현하고 있는 마당에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것은 본래의 임무를 망각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이 위원회의 탄핵 반대 성명은 공무원노조나 전교조의 탄핵 반대와 전혀 성격을 달리하는 것인데, 어떤 신문도 이 위원회의 어처구니없는 행위를 효과적으로 규탄하거나 문책하지 못했다. 이 역시 대한민국이란 공동체나 정치평론가의 관점이 아니라 신문사의 편협한 시각 때문에 놓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문제들은 정치평론이 제기하고 시민들에게 수용되어야 하는 것인데, 신문이나 시민들 모두 당파적으로 접근하다 보니 지각되지 않는다. 가령 선관위의 기만행위.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에게는 선관위가 대통령이 선거법을 위반했다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 수구기득권 세력의 대변인이라는 증거가 되기 때문에 이것이 따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반면 한나라당 지지자들은 대통령이 누구에게 기만당하건 말건 아무 관심이 없다. 의문사진상조사위원회의 경우도 비슷하다. 열린우리당 지지자는 탄핵이 그냥 도덕적으로 부당한 사안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탄핵을 반대하는 것이 정상이다. 한나라당 지지자는 공무원노조나 전교조도 성명을 내서는 안 된다고, 혹은 아예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에 의문사진상조사위원회의 성명을 따로 문제삼을 이유가 없다.
최근의 논쟁구도도 이와 다를 바 없다. 대통령에 온정적인 사람들은 대통령이 특정 후보를 비판하는 것을 선거법 위반으로 규정한 선관위의 판결 자체를 ‘나쁜’ 것으로 보고, 그 나쁜 것에 대항하는 대통령의 행동은 ‘좋은’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그 반대편은 정확히 그 반대고. 도덕적으로 경직된 사고방식이다. 이 부분에서 선관위의 행동이 비판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기회주의적인 처신 때문이다. 선관위는 야당의 주장을 수용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대통령의 주장을 수용하는 것도 아니다. 일차적으로는 이 점이 가장 큰 문제다.
대통령의 특정 후보 지지나 반대 여부를 허용할 수 있느냐는 문제는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법규를 선택하는 문제다. 대통령이 무슨 ‘시민 불복종 운동’을 벌이듯이 자신이 원하는 법규를 내놓으라고 헌법기관들에게 투정을 부리는 것이 바람직한 정치행위라고 볼 수는 없다. 첫째로는 대통령을 한 명의 시민과 동등하게 볼 수 있느냐는 문제가 있고, 둘째로는 시민 불복종 운동 자체의 문제도 있다. 자연법의 관점에 입각한 시민 불복종이 용인되느냐의 문제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다만 선진국일수록 시민 불복종에 관용적인 법집행 문화가 있을 뿐이다.
안희정의 경우는 대통령이 가장이네 뭐네 하면서 선출된 대통령이 선출되지 않은 선관위에 통제받는 건 부당하다고 말하는데, 이 발언은 그의 천박함과 무식함을 보여줄 뿐이다. 첫째로 대통령은 가장이 아니고, 둘째로 중앙선관위는 헌법기관이다. 헌법기관이 자신의 고유한 업무사안에 대해 대통령을 통제하는게 ‘부당’하다면 도대체 대한민국에 ‘가당’한 건 무엇인지 스스로 탐구해 볼 일이다. ‘부당’이란 개념은 그럴 때 쓰는 게 아니다. 선관위는 대통령을 통제한 권한이 있다. 선관위의 대통령에 대한 판단에 반대한다면, “선관위의 판단이 부당(혹은 부적절)하다.”고 말해야지 “선관위의 통제가 부당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내게는 정치평론에 있어서, 두 가지 문제의식이 있다. 하나는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나눠먹고 있는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레토릭을 해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열린우리당은 이상주의적이지 않다. 그들은 정책적으로는 지극히 보수적이고, 정치행위 면에서는 (헌법을 우습게 알 정도로) 급진적인 ‘혁명적 우익’ 세력이다. (이 수사는 폴 크루그먼이 조지 부시 일당을 가리킬 때 사용한 것인데, 2002년에 생명연습이란 인터넷 논객이 참여정부에게 헌정한 바 있다.) 한나라당은 결코 현실주의적이지 않다. 그들은 시장지상주의를 추구하는 것을 도덕명제로 생각하는 도착증적인 정치집단일 뿐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부여된 레토릭은 물론, 상대편의 레토릭을 가지기에도 유능하지 않다. 이런 지점들은 정치학자 최장집이 가장 잘 폭로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하나는 정치평론 자체의 질이 높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을 잘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 앞서 언급한 전인권이었는데, 이 분은 안타깝게도 그리 많지 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다. 어쩌면 이제는 정치평론에 대한 고민은 시민들이 스스로 해야할 지도 모르겠다. 선관위가 특정 후보에 대해 너무 버닝하지 말라고 배려(?)해 주었으니, 조금 더 넓은 마음으로 포괄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것도 이 골치아픈 대한민국을 즐겁게 살아가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 [펌] 잡초와 골초, 송명수 2003/05/09 (3) | 2007/1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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