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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윤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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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08/09/25
    [경향신문/판] 장안동 ‘하비 덴트’와 한국 정치 (1)
  2. 2008/06/07
    촛불시위에 있는 것과 이끌어 내야 할 것 (11)
  3. 2008/04/15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선거 결과
  4. 2007/10/08
    [프레시안] "바야흐로 '구렁이들의 전쟁'이 도래했다." (29)
  5. 2007/05/28
    홍준표의 선택과 김근태의 선택 (9)
이중구 동대문경찰서장이 장안동의 성매매업소에 대한 집중 단속을 실시해 여론의 주목을 받았을 때 나와 지인들은 영화 ‘다크나이트’에 나오는 지방 검사 하비 덴트를 떠올렸다. 하비 덴트는 배트맨과는 달리 국가의 시스템 안에서 고담시의 범죄를 소탕하려다가 좌절한 인물이다. 그런 연상작용은 이 서장의 강단 있는 조치가 실질적인 효과를 보기는 어려울 거라는 우려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장 2000년 종암경찰서장으로 미아리 집창촌 단속을 진행한 ‘스타’였던 김강자 한남대 교수도 단속만으로는 사태를 개선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니 말이다. 유천동 성매매집결지 해체에 나선 것으로 뒤늦게 알려진 황운하 대전중부경찰서장에 비해서도 이 서장의 조치는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 같다. 같은 성매매라도 유천동의 경우 선불금 강요, 감금과 감시 등 인권의 문제가 존재하는 곳이라 강력한 처벌의 정당성을 강변하기가 훨씬 더 수월한 편이다.


하지만 일단은 이 서장의 행동에 지지를 보내고 싶다. 이 서장은 지역민의 민원을 받아들여 장안동 성매매업소에 대한 집중단속을 결심했다고 한다. 공직자가 민의를 수렴해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려고 하는 자세는 훌륭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설령 그 민의라는 것이 윤리적인 동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동네의 집값을 올리려는 욕망과 결부돼 있었고, 그 민의의 수렴이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의 지역구 관리에 도움이 될 거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의 행동이 지역민의 요구에 반응한 것이라면 그 요구의 동기나 그 행동의 결과가 어떻든 그 자체로 평가받을 만하다.


사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서장과 하비 덴트가 처한 환경의 유사함이 아니라 그 차이점이다. ‘다크나이트’의 하비 덴트는 재벌 총수 브루스 웨인(밤에는 배트맨이 되는 그 사람)이 주최한 정치자금 모금 행사의 주인공이다. 미국의 경우 대개 지방 검사가 선거를 통해 선출되고 그 검사들이 경력을 쌓아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 판사로 선출되거나 이후 정치권에 진출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하비 덴트가 대중의 지지를 받는다면 그는 더욱 책임 있는 지위에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 반면 한국의 하비 덴트들은 아무리 정의감을 뽐내도 그런 요행을 기대하기 어렵다. 시민의 요구에 귀 기울이기보다 대통령과 경찰청장의 심중을 읽고 촛불시위대를 검거하기 위해 노력하는 쪽이 훨씬 더 일신의 안위와 출세에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이 차이점은 한국 정치가 시민들의 총체적인 불신을 사게 된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국가 체제와 문화가 엄연히 다른 미국의 제도를 곧이곧대로 수입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경우 다른 민주주의 국가들에 비해서도 민의를 수렴하는 기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중앙정치’의 벽이 너무도 높아 사회로부터 분화된 그들을 ‘여의도 정치계급’이라 불러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수많은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나와도 선거날이 멀다는 이유로 그들은 의연(?)했다. 태풍이 몰아쳐도 문을 꼭 닫고 차를 마시면 찻잔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식이다. 촛불이 ‘찻잔 속의 태풍’이 아니라 여의도가 ‘태풍 바깥의 찻잔’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중앙정치와 시민들의 요구가 일상적으로 분리되고 한편으론 중앙정치의 권한만이 강력하다는 사실이 명백했기 때문에 우리의 정치평론은 일종의 ‘중앙정치 중독증’에 빠지게 됐다. 촛불시위의 성과의 미흡함에 대한 분석은 ‘대의민주주의의 한계’ 같은 추상적인 용어가 아니라 이러한 현실의 직시로부터 시작돼야 하지 않을까. 아울러 진보진영은 이 ‘중앙정치’의 딜레마를 지역사회로부터 어떻게 돌파해나갈 수 있을지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한윤형 |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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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 상황 브리핑


최초의 촛불시위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정을 계기로 터진, MB식 사회정책과 (아마도, 특히) 교육정책에 대한 (주로, 여성으로 구성된) 학부모와 청소년들의 참여를 통해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이 불씨를 지피는 데엔 MBC PD 수첩의 저널리즘이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정부와 조중동이 이에 대해 ‘잘못된 방송의 선동’, ‘비과학적인 괴담’, ‘배후세력론’으로 대응하면서 점차 ‘사람들이 뿔났다’. 다이나믹하고 감정적인 한국 사람들은 머슴을 자처하던 대통령의 흰소리를 참지 못했다. 갑자기 사람들의 정서는 “너는 대체 뭔 용가리 통뼈길래 우리 말을 이렇게 안 쳐듣는 건가효?”로 바뀌기 시작했다. 즉, ‘국민 여론을 수렴하지 않는 정부에 대한 항의’ 쪽으로 가닥이 잡히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동의하지 못할 정치세력은 거의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이 ‘민주주의’론은 촛불시위의 대세가 되었다. 박근혜와 이회창마저도 재협상론을 주장하고 나서고 있다.


성난 시민들의 ‘조중동 광고 기업 불매운동’은 조중동의 논조를 길들여 드디어 조중동조차 이명박 정부의 협상은 졸속적이었고, 이유야 어찌됐든 정부가 여론과 소통하는데 실패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한나라당과 조중동은 청와대가 제발 독자적으로 사고치지 말고 자신들의 ‘보수적(!)’ 태도에 귀기울이길 원한다. 거리에서 십만 명이 자신들을 욕하는 꼴을 감당하기 힘들었던 청와대 사람들도 사표를 던지고 있다. 하지만 대통령은 아직까지는 한나라당과 조중동에 항복할 의사가 없는 것 같다.   


(2) 시위의 성격


앞서 얘기했듯이 이 시위는 참여자들이 느끼기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에 이르렀는데, 여러 사람들이 지적했다시피 국제적으로는 ‘반-세계화 시위’의 범주에 포함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구호를 반-세계화의 문맥에서 파악하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무지(?)’를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이 시위가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명박이 독재정권이라서가 아니라, 1)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국가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2) 그 결과 국가가 국민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민주주의의 위기가 오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달라고 외치는 게 아니라, ‘민주주의’를 계속해서 외칠 수 있도록 국가의 권한을 시장에 양도하지 말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 사람들이 국가와 시장을 하나의 대상을 포섭하는 두 개의 다른 권력으로 생각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하여 국가가 삼성에 권력을 양도할 때 느끼는 위기감보다는, 국가의 바깥에 존재하는 외국기업에게 양도할 때 느끼는 위기감이 월등한 것이다. FTA에 대해서도 그것이 우리 국가를 허문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이 (말타고 벌판 달리는 참여정부의 공익광고의 이미지에서 드러나듯이) 우리의 국가를 더 강하게 만든다고 생각한 듯 싶다. 그것이 이 시위의 성격을 ‘친 참여정부’적인 것으로 만든다. 노빠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참여정부를 한번이라도 지지했거나 잠깐이라도 호감을 가졌던 이들이 모두 그러하다. 


여기서 참여정부의 성격을 간략하게 규명하면, 시위대의 성격을 규정하는 ‘민주주의’나 ‘국가’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가 어떠한 것인지를 대략적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참여정부는 간단하게 말하면 ‘관료들의 나라’였다. 정치경제적으로는 관료들이 대기업 편의적인 경제정책과 그 편의적 정책의 한 방편으로서의 자유무역을 추구하는 것을 장려하는 체제였다. 참여정부가 2002년 이회창 후보의 경제정책을 그대로 따라했다는 임종인 전 의원의 지적이나, 참여정부가 써버릴 수 있는 정책을 다 써버려서 (이명박 정부가)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이한구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의 지적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양극화의 심화는 참여정부의 정책이 실패해서 생긴 일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이 의도한 바대로 성공을 거두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참여정부는 관료조직의 외곽에 있는 ‘위원회’를 통해 문화적인 면에서는 민족-국가담론을 유포하는데 힘썼다. 민족주의자들의 용어를 활용하면 민족정기를 바로잡으려 한 것이다. 조중동이 비아냥거린 ‘위원회 공화국’이라는 명칭이 거기서 나왔다. 과거사 진상규명, 친일파 청산, 문화재 복원 등을 실시했던 이 위원회들을 한나라당과 뉴라이트는 이념적인 이유로, 그리고 이명박은 반실용주의적이라는 이유로 부인했다. 사람들이 느끼는 참여정부의 개혁성이라는 것은 바로 이 위원회에 있고, 이것을 통해 참여정부의 경제시책마저 국가를 강화시키는 것으로 정의된다. ‘희망의 군국주의자 노무현’이라 일컬어진 참여정부의 군비 확장 정책을 보자면, 참여정부의 담당자들조차도 지지자의 판타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즉, 그들은 실제적으로는 국가를 약화시키고 있었으면서도, 스스로는 국가를 강화시키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쇠고기 수입 정책은 이처럼 다소 혼란스러운 ‘국가’나 ‘민주주의’의 개념으로 봐도 ‘민주적으로 통제되는 국가’의 이념을 훼손시키는 것이 명명백백한 정책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참여정부의 ‘우파적 관료주의’를 더 오른쪽에서 혁명적으로 돌파하려다 삽질을 거듭하고 있다. 그래서 시위대와 그 지지자들은 그들이 이명박이 노무현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경험’했다고 믿는다. (이 믿음은 정당하다.) 따라서 참여정부의 문제를 갈파하는 이들이 아무리 분석한다 해도, 이 경험은 넘어설 수 없고, 참여정부에 대한 향수도 막을 수 없다. 할 수 있는 일은 이 시위대의 구호가 자기 진화하여 그 향수에 모순되는 행위에 나서도록 시위대와 ‘함께 하는’ 일이다.


반면 시위의 성격을 그 자체로 뜯어 고치려는 행위는 아예 가능하지 않고, 따라서 적절한 반응도 아니다. 차라리 그보다 일관성있는 비평은 아예 시위 자체를 비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위가 해야 할 일들이 좀 있기 때문에, 이 역시 적절한 반응은 아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른 파트에서 논의한다. 


(3) 이명박이 할 수 있는 일


카드가 별로 없다. 크게 보아 1) 계속 이대로 간다! 와 2) 한나라당(박근혜와 홍준표?)에 항복한다. 는 선택지만 있을 뿐이다. 재협상 수준에 근접하는 자율규제라는 카드를 내밀었지만 씨도 안 먹히는 소리다. 그것은 비관세 무역장벽이며, WTO 위반에 해당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재협상보다도 미국 행정부를 더 당황하게 만들 일이다.


이명박은 재협상을 실시하여 시위대를 만족 혹은 분열시키고 한나라당에 대한 청와대의 우위를 지속시킬 수도 있다. 현재로서는 이게 임기 초반 레임덕을 막을 유일한 카드다. 왜냐하면 계속 이대로 밀어붙여봤자 길게 보아 2년 후 지방선거 참패 이후에는 한나라당에 항복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명박은 그게 도저히 내릴 수 없는 결단이라 여기고 있을 것이다. 그는 결코 한미 FTA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바마는 멍청하다. 만일 그가 정말로 스스로 말한대로, “한미 FTA 협정은 한국에 유리하다.”고 믿고 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협상을 파기할 생각이라면 말이다. 어느 정도 멍청하냐하면, 한미 FTA가 한국 경제의 살 길이라고 믿는 노무현과 비슷한 수준이다. 이 두 멍청한 정치인들은 의도되지 않은 합작 플레이로 그 둘보다 멍청하다고 단언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위인인 이명박을 외통수로 몰아넣고 있다. 이명박이 처한 곤경을 ‘노무현의 덫’, 혹은 ‘거짓말쟁이의 늪’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명박과 한나라당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들이 정권을 ‘잃어버린 10년’ 동안 되뇌어 왔던 거짓말을 진실로 믿고 있다는 것이다.


1) 참여정부는 한미 동맹 관계를 훼손해 왔거등요~ 
2) 어머, 근데 참여정부가 한미 FTA를 체결했어!
3) 그러므로, 우리는 기본값으로 한미 FTA만은 비준해야돼!!


뭐 이런 논법이다. (덧붙여, 지금 한국의 모든 정치세력들이 성장의 방법으로 한미 FTA 이외의 대안을 못 찾고 있다는 점이 있고 이게 더 큰 이유일 수도 있지만, 이건 다른 파트에서 설명한다.) 그래서 부시 있을 때 협정처리하려고 다 퍼주며 매달렸는데, 촛불시위대에 부딪혀 어떻게 하지도 못하게 생겼고, 조금 있으면 또다른 멍청이 오바마가 나타나 친히 밥그릇을 차줄 운명이다. 이명박, 두 멍청이들의 뚝심에 아주 바보되게 생겼다.  


자 그렇다면 이것은 이명박과 박근혜의 대립인가? 박근혜라는 건 영남 보수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기호에 불과하고, 크게 보아 이 싸움은 한나라당 내부에서 ‘제가 한 거짓말을 진실로 믿고 있는 멍청이들’ vs ‘제가 한 거짓말이 거짓말이란 사실은 알고 있는 악랄한 놈들’의 싸움이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멍청이들보다는 악랄한 놈들이 이기는 쪽이 대한민국에는 좋다. 이명박은 멍청이들의 수장이고, 계속 전진하다가 악랄한 놈들에게 패배하거나, 바로 지금 항복하는 길밖에 없다.


(4) 시위대가 할 수 있는 일


이런 틀에서 볼 때 시위대가 할 수 있는 일, 또는 해야 할 일도 생기게 된다. 죽쒀서 개주는 꼴이지만 일단 한나라당과 조중동, 혹은 구체적인 인물로서 박근혜가 승리하는 것만으로도 시위대는 승리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 국면에서 좀더 완벽한 승리는 앞서 말했던 ‘악랄한 놈들’을 확실히 승리시키는 것이다.


이것을 ‘사회경제적인 면에서의 참여정부로의 회귀’라고 부를 수 있겠다. 재협상이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속단할 수 없지만, 대운하와 민영화를 저지하고, 다시 관료들의 느긋한 흐름에 나라를 맡길 수 있게 된다면 이 정부는 ‘위원회 없는 참여정부’가 된다. 박근혜와 홍준표를 지속적으로 압박하면 이 정도까지는 갈 수 있다. (아무리 그래도 정당의 지지기반이라는 것이 있어서 대북정책은 되돌리기 힘들 것 같기도 한데, 적어도 관료들에게 맡긴다 치면 지금의 꼴통 외교는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압박이 시위대가 할 일이다.


나는 2008년 6월에 이명박 정부에 우리가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낙관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명박이 입조심 좀 한다고 우리가 승리를 거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거리에서 시위할 수 있는 권리를 되찾았다고 우리가 승리를 거두고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이명박이 갑자기 미쳐서 한번 더 폭력진압을 하고 말 그대로 6. 10 항쟁이 일어나 정권이 붕괴할 가능성도 있기는 있다. 하지만 폭력진압이 오히려 사람들을 흥분시킨 학습효과를 바탕으로, 이명박 정부는 청와대 쪽 문만 굳게 걸어 잠그고 "너희들은 떠들어라. 하지만 국가는 내가 운용한다."라는 식으로 반응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대통령은 '인터넷 여론 담당자'를 두겠다고 밝혔지만 지금까지 그의 여론에 대한 태도를 고려해 보건대, 이 담당자는 '수렴'보다 '통제'를 위해 활동할 것이다. 정부는 네이버나 다음에 대해 어떤 식의 통제가 가능할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것이며, (이미 금칙어 설정 등의 사례가 보고되어 있다.) 올블로그에 대한 누군가의 해킹 시도도 석연치 않다. 만일 이명박의 속내가 그러하다면, 정말로 이제 변수는 화물연대의 파업이 된다. 유가폭등으로 인해 파업을 선언한 화물연대는 또한 미국산 쇠고기 거부 투쟁 역시 선언한 상태인데, 촛불시위와 ‘불법파업’을 분리시켜 대응하려는 정부에 대해 시위대가 어떤 식으로 반응할 것인지에 따라 이명박 정부의 레임덕의 시기가 달라질 수 있다. 화물연대 파업을 시위대가 지지하고 강경진압에 반대하는 거리행진을 시작한다면 이명박은 정말로 궁지에 몰린다.


그렇더라도 한국의 행정부는 힘이 세다. 지방선거가 참패한 이후라면 이명박은 박근혜에게 궁극적으로 패배하게 되겠지만, 그전까지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이명박 시대에 우리는 안타깝게도 ‘거리의 정치’를 지속적으로 보게 될 것이고, 거기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또한 박근혜가 승리한 이후라도 한나라당 정부의 남은 임기를 ‘위원회 없는 참여정부’의 수준은 되도록 압박하는 것이 시민의 역할이 된다. 여기까지만 하더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다고 나라가 확연히 좋아지는 건 아닌데도 그렇다.


천운이 도와 시위대가 이명박을 수월하게 패배시킨 경우에도 ‘민주주의’라는 시위의 구호에서 도출될 수 있는 정치적인 행위가 남아 있다. 이명박의 독선은 선거가 없는 기간에 대통령의 폭주를 막기 힘든 ‘87년 체제’의 허점을 드러낸다. 이 점에 대해서는 보수세력들도 불만이 있다. 조중동의 일각에선 ‘(노무현의 원포인트) 개헌안을 받을 걸 그랬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대통령이 단임제라서 여당이나 ‘여당 나팔수’말도 안 쳐듣는다는 것이다. 이명박이 하야하고 박근혜 스스로 대통령이 되는 사태가 오지 않는 이상, 박근혜와 홍준표의 한나라당은 내각제 개헌을 시도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정치 행위는 시위대가 원했던 ‘민주주의’와는 관련이 없거나, 오히려 배치되는 행위다. 행정부의 임기와 입법부의 임기를 일치시키는 노무현식 개헌안은 선거가 없는 기간 동안 국민들이 무력한 ‘위임 민주주의’를 오히려 조장한다. 내각제 역시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대통령제보다도 시위를 통해 압박하기 힘든 정치체제다. 이런 제안에 반대하여 국민소환제나 국민발의제 등을 고민하고 의미있는 의제로 주창해낼 수 있다면, 그리고 심지어 성취해낸다면, 시위대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아니 200% 이상 달성한 것이다.  


(5) 참여정부도 싫어하는 이들이 해야 할 일


참여정부에 향수를 느끼는 시민들의 시위대가 해야 할 일도 이렇게나 많기 때문에, 나는 이들에게 이 이상을 요구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보고 있다. (아마도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물론 이런 저런 비일상적인 변수가 오묘하게 개입하여 정말로 우리의 시위가 더 이상을 이룩해버릴 가능성도 없지는 없겠으나, 그런 가능성에 기대고 상황을 분석해야 하는가, 라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부정적이다. 참여정부의 그것과 구별되는 사회경제정책으로 민주화를 심층화시키려는 이들은 시위대를 통해서가 아니라 진보정당을 통해서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해야 한다. 말하자면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다른 종류의 실현성 있는 사회경제정책을 총괄적으로 수립해 나가고, 또한 홍보해야 한다. ‘거리의 정치’가 오랫동안 지속된다면 그러한 홍보의 장도 더 크게 열릴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시위대 자체의 성격을 바꿀 수는 없다. 이는 다른 문제다.


진보정당의 정치인들과 지지자들이 고민해야 할 지점이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관료주의의 문제다. 정책을 실현하는 것은 관료다. 지금껏 한 가지 방향으로 정책을 운용해온 우리의 관료들은 우리의 지향에 도움을 줄 수 없는데, 그렇다고 그들을 경험적인 면에서 이기기란 매우 어렵다. 구호를 통해 권력만 잡는다고 그들을 통제하여 올바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관료들을 닦달한 이명박 정부의 무능은 좌파 정치인의 무능으로 답습될 수도 있다. 과거 민주노동당의 정책보좌관 출신들이 대거 합류한 진보신당의 경우 이 문제에 신경쓰고 있다고 생각되지만, 관료들의 경험을 습득할 수 없는 진보정당의 입장에서 심화된 정책연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두 번째는 성장 동력의 문제다. 성장-분배 논쟁이란 건 이름부터가 성장주의자들의 승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이 (그 실현과 성과가 매우 의심스러운) 한미 FTA 이외에 한국 경제의 성장동력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가장 어필할 수 있었던 것은 문국현의 ‘중소기업론’이었겠지만, 그는 이 대안이 고통스러운 개혁을 수반한다는 사실을 언급하지도 않았고, 그것을 심화된 정책연구로 제시하지도 않았다. 다만 CEO 시절의 업적과 불가능한 구호(몇백만 일자리, 8% 성장)로 그 이미지를 압축시키면서 자신을 진정으로 이명박의 대항마인 코미디언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진보신당도 가령 심상정의 3박자 경제론 등을 보완 발전시켜 분배 문제뿐 아니라 우파 정당과 구별되는 성장 동력을 제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아마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좌파정당 있는 민주주의 정당체제’를 한국에서 보기란 어려울 것이고, 진보신당은 일본 공산당식으로 기초의원의 구역으로 내려가 지역 사회의 복리를 증진시키는 데에 힘쓰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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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히 만족스러운 선거 결과

총선과 연이은 중간고사 탓에 라캉 논쟁을 오랫동안 버려두고 있는 탓에 (아직 라캉에 대한 아이추판다 님의 글들을 제대로 다 읽지도 못했다.) 아이추판다 님의 이 글에 굳이 반응하지 않았는데, 노정태가 반박문을 썼다. http://basil83.blogspot.com/2008/04/blog-post_14.html  하지만 노정태의 글은 자신의 고유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어서 아이추판다 님의 글에 대한 반박이 명료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말이 나온 김에 나 역시 이 글에 대해 코멘트 해보려고 한다.


먼저 나는 “역사상 등장했던 민주주의는 언제나 시궁창이었는데 그나마 고여서 썩는 물보다는 흐르는 시궁창이 낫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하는 것이다. 항상 이상적인 의사결정이 이뤄진다면 그건 이미 인간계의 일이 아니다.”라는 아이추판다 님의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권력이 민주당에서 한나라당으로 넘어가지 않는것이야말로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어딘가 고장나 있다는 확실한 증거다.”라는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한국의 민주주의는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보더라도 정상적으로 잘 작동하고 있다.”는 진술이다. 그는 이 진술의 근거로 두 가지를 제시한다. 하나는 내용적 근거로, “프랑스의 국민전선 같은 극우정당이 활개를 치고 다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의 기능에 대한 것으로 “야심차게 추진한 영어몰입교육이 '오해'가 되어 스러지는 과정은 적어도 한국의 민주주의가 건강”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나는 이 두 가지 근거가 별로 설득력이 없다고 본다.


프랑스는 유럽에서 극우파가 가장 자유롭게 활동하는 편에 속한다. 워낙에 '똘레랑스' 정신이 강하기도 하고, 독일처럼 극우파들에게 심각하게 데인 적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정당들이 ‘프랑스의 국민전선 같은 극우정당’을 비웃을 만큼의 수준에 이르는지는 모르겠다. 르펜의 국민전선은 “이민의 중지, 노동조합의 권리 축소, 경찰 지원, 테러리즘과 마약부정거래자에 대한 사형 실시, 해외 영토에 대한 프랑스 지위의 유지, 국가의 경제제한 폐지” 등을 주창하여 유럽 사회를 경악시켰다. 단일민족 국가를 사랑하는 한국인들의 머리에 ‘이민’이란 개념이 없고 대한민국엔 해외 영토가 없다는 사실을 빼고 생각하면, 이 정도 얘기는 우리나라에선 네이버 리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나의 경우 한국처럼 이념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한나라당은 극우정당이고 민주당은 보수정당이다.”라는 식의 진술은 나이브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많은 서민들은 한 입에서 극우적인 얘기와 좌익적인 얘기를 서슴없이 내뱉는다. 엠네스티 회원인 아는 형이 지난 대선에 문국현 후보 지지 모임에 나갔다가, ‘불법체류자 추방’을 단호하게 주장하는 참석자와 그 참석자에 동조하는 다수 회원들을 보고 황당했다는 말을 전한 적이 있다. 이런 문제나 사형제에 대한 인식 수준을 생각해 보면 한국인들의 인권 감수성은 서구 민주주의 국가의 그것에 훨씬 뒤쳐져 있다. 물론 그것과 민주주의 기능은 상관없다고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는데, 그러려면 ‘프랑스의 국민전선 같은 극우정당’의 사례를 제시하지 말았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엔 꽤 많은 극우파들이 국회의원의 명패를 달고 설치고 다닌다. 이 점을 부인하기는 힘들 것이다.


다음으로 아이추판다 님이 민주주의의 기능이 작동하고 있다는 근거로 제시한 영어몰입교육의 사례를 살펴보자. 물론 새정부의 영어몰입교육에 대한 태도는 포퓰리즘이란 말로 비난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책이 좌절된 것은 민주주의의 기능이었다는 식의 서술까지는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문제는 이런 단편적인 사례는 심지어 남미의 위임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추판다 님은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례를 들어 "이래도 이게 정상이냐?"고 되물을지도 모르겠지만 어디까지나 '민주주의로서' 건강하고 정상적이라는 말이다.”라고 말하며 위에서 언급한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을 피력하기 시작하는데, 이 얘기가 이 맥락에서 나오는 것은 반칙이다. 이 문제를 논하려면 당연히 최근의 사례들의 다발에서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는지를 다져야 한다.


단적으로 말해 나는 다음과 같은 예시를 들겠다. 한나라당은 국민의 심판이 두려워 대운하를 공약에서 삭제했지만, 총선 후에는 여전히 그것을 추진하려고 의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이미 총선 과정에서 국민들에게 충분히 알려졌다. 지난 대선부터 한나라당 소속 정치인들은 TV 토론 등의 검증 절차를 회피하고 있다. TV 토론 시청률이 낮아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대놓고 TV 토론을 기피하는 데도 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적어도 후보들을 TV 토론의 장으로 끌어낼만큼 많지는 않다.) 이런 현상은 서구 사회와의 비교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맥락에 비추어 봐도 문제가 있다. 몇년 전에 비해서도 퇴보한 것이다. 실제로 이번 총선에선 모든 정당이 지난 총선에 비해 한달 정도 늦은 시기에야 공약의 제출을 완료했다고 한다. 즉 이번 선거는 정책에 대한 평가의 장이 되지도 못했다. 더군다나 평가를 회피하려는 정치세력들의 반칙이 규탄되지도 않았다. 이런 상황을 눈앞에 두고 민주주의가 잘 기능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매우 어렵다.


아이추판다 님은민주주의가 잘 정착된 국가일수록 투표율이 낮은데는 누굴 뽑아봐야 마찬가지라는 인식이 깔려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투표율이 낮다는 사실에서 민주주의가 잘 정착되어 있다는 사실을 역으로 추론하는 이 논법은 옳지 않다. 같은 논법대로라면 우리는 한국의 노령인구 비율을 두고 이 나라의 국민소득이 적어도 3만불은 넘을 것이라는 역산을 할 수 있다. 물론 이 계산은 사실이 아니다. 국민소득이 높아질수록 평균수명이 높아지고 출산율은 낮아져서 노령인구가 증가하게 되지만, 한국의 경우 양육과 육아에 대한 사회의 뒷받침이 없기 때문에 출산율이 다른 나라보다 더 빨리 떨어져서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하고 있다. 나는 투표율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한국 사회에선 누구를 뽑든 사회가 별로 변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투표를 안 하는 게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지난번에 대통령이 된 어느 말썽꾼은 한미 FTA라는 무지막지하게 파급력이 큰 정책을 밀어부쳤고 이번에 대통령이 된 말썽꾼은 대운하를 파겠다고 난리다.


언론매체에 보도된 부분만 보더라도 일반 서민들이 정치에 대해 요구하는 것은 매우 많다.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의 TV 광고에 나왔던 국밥집 할머니를 생각해 보라. 그 정도 목소리를 듣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요구하는 것이 많지만, 요구를 들어줄 것 같지 않기 때문에 냉소하게 되는 이 현상은 민주주의의 정상적인 기능이기는커녕 민주주의의 위기다. 물론 이런 상황은 양당제 국가의 한축을 담당하던 정당 하나가 우여곡절 끝에 결코 대안으로 선택받지 못할 지경으로 내몰렸기 때문이다. 한쪽이 바지에 똥을 싸고 있으니 한나라당은 민주주의의 정상적인 기능을 마음껏 방해하고도 다수당이 될 수 있다. 투표율이 낮아진다 해도 그들에겐 큰 문제가 아니다.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기업과는 달리, 정당이란 조직은 무조건 많은 지지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상대편보다 조금 더 많은 지지자면 충분하다. 


통합민주당이 대안이 아니며, 대안이 될 수도 없다는 사실은 명백했기 때문에 한나라당의 과반의석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선거 결과”다. 그러나 통합민주당의 몰락은 한나라당에 대한 새로운 파트너를 요구하고 있는데도 서민들이 그것을 발견해 내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이것은 결코 “대단히 만족스러운 선거 결과”는 아니다. 이게 만족스럽다면 이명박 정권이 남은 기간 무언가를 말아먹었을 때 다음 선거에서 그저 지금과 같은 수준의 통합민주당이나, 친박연대 혹은 자유선진당이 ‘선택’받는 것을 보고도 “대단히 만족스러운 선거 결과”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의 정국이 그렇게 흘러갈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런 현실은 대단히 우려스럽다. 내가 총선 정국에서 진보신당을 지지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실책에 대한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히 민주주의의 기능이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민주주의의 기능의 전부는 아니다. 민주화 이후에도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한 최장집의 (그리고 굳이 최장집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대다수 정치학자들이 동의할 수밖에 없을) 통찰은 시민들의 문제제기가 정치권에 받아들여지는 시스템이 얼마나 제대로 작동하고 있느냐를 문제삼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기능의 면에서 보더라도 아직 한국 민주주의의 수준은 미약하다 할 것이다. 의료보험은 우리보다 뒤지지만, 가령 미국 시민들의 경우만 해도 평균적으로 볼 때 (계층에 따라 편차가 크긴 하다.) 자신의 권리를 지킬 제도적인 방책들을 한국인들보다 훨씬 많이 가지고 있다. 아이추판다 님의 견해는 사실상 최장집보다는 “민주화의 완성”을 이야기한 중앙일보나 홍준표의 견해에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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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선, 삐딱하게 읽기 <3> 대선 기권을 탓하지 말라
  2007-10-08 오전 12:33:52
  
2007년 대선을 맞아 <프레시안>은 기존 매체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연재를 마련했다. 여론조사의 통계 수치로만 존재했던 20대의 생생한 목소리를 독자에게 들려주기로 한 것. 그간 정치 평론을 독점해 온 40대 이상과는 다른 위치에서 정치 현상을 바라보는 이들의 '새로운' 시각이 오는 대선을 둘러싼 얘깃거리를 더욱 풍성하게 해주리라고 본다.
 
  이번에 소개할 필자는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한윤형 씨다. 그는 이미 고등학생 때부터 '아흐리만'이라는 필명으로 한국 사회를 상대로 거침없는 논평을 쏟아내 주목을 받았었다. 그의 뾰족한 글은 적지 않은 팬을 가지고 있다. 한 잡지 칼럼을 통해 그의 글의 팬임을 공개리에 밝힌 고종석 한국일보 객원논설위원은 그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들이 부리는 지식과 정보의 총량은, 그리고 그 앎에 떠밀리는 생각과 느낌의 포물선은 이들 나이 때의 나에게 견주어서는 물론이고 지금의 나에게 견주어서도 한결 크고 아리땁다. 나이는 한 사람의 지적 정서적 윤리적 성숙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알겠다. 나는 이들보다 두 배는 더 산 듯싶다. 다행이다. 나이 차가 이만큼 크지 않았다면, 나는 질투심 때문에 이들의 글을 읽기 힘들었을 테니."

  검증된 이무기냐, 미확인 생물체냐
 
  검증된 이무기를 택할 것이냐, 미확인 생물체를 믿어볼 것이냐. 이것은 정치인의 능력을 평가할 자료가 부족한 한국의 유권자에게 고유한 문제다. 미국의 대선을 살펴보면 대개 주지사를 역임한 정치인들이 유력 정당의 대선 후보로 나온다. 유럽에서 정치인은 거듭되는 정권 교체 속에서 자신이 속한 정당이 정권을 잡았을 때 책임 있는 위치에서 역량을 발휘해볼 기회를 가진다. 반드시 그런 경험이 있어야만 훌륭한 정치인이 될 수 있는 걸까? 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유권자의 평가를 받기 위해선 결국엔 그런 식의 증빙 자료가 있어야 한다.
 

  1997년에 와서야 최초의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한국에선, 애초에 야당 지도자의 정치적 역량을 검증할 기회가 없었다. 자당 소속 국회의원을 관리하고, 정국의 담론을 유리한 쪽으로 끌어오고, 여당 정치인과 '쇼부'를 보는 등 우리가 흔히 '정치적 역량'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정권을 잡기 위한 능력이지 정부를 운영하는 능력은 아니다. 1997년 이전의 상황에서 국정 운영 경험을 상위의 가치에 두고 판단한다면, 우리는 무조건 1번을 찍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런 판단을 따른다면, 민주주의는 부정될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2002년 대선은 정치인의 역량을 어떻게 검증할 것인가, 이런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이른바 개혁 성향의 유권자는 '아직까지는 경험으로 역량을 파악할 수 없다'는 답변을 제출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몇 번이나 낙선했고 대선 주자의 '가오'를 위한 정치적 배려였던 짧은 기간의 해양수산부 장관 경력 밖에 없었던 노무현이, 당내 경선에서는 경기도지사 출신이었던 이인제를 꺾고 대선에서는 국무총리 경력을 지닌 이회창을 꺾었다. 정책적 지향이 동일하면서도 정치 경험이 있는 후보를 찾기 힘든 실정에서, 대다수의 유권자는 경험은 없을지라도 지향은 같은 방향에 있다고 믿은 후보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혹했다. '지역주의에 대항한 투사'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그 투사 근성을 발휘하여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향해 싸움을 걸기 시작했다. 그에겐 하나의 원칙이 있었는데, 그 싸움이 반드시 '세치 혀'의 영역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원칙을 표어로 표현해 본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한나라당처럼 행동하되 <조선일보>와 불화하라.'

 
  2002년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내세웠던 경제 정책을 하나씩 실현에 옮기면서도 이 정부는 <조선일보>와 싸우는 것으로 자신의 개혁성을 확인하려 했다. "홍보가 곧 정책이다"라는 대통령의 신념은 국정홍보처의 비대화를 낳았고 이 기관을 중심으로 정부는 줄곧 언론사와 줄다리기를 했다. 이렇게 정부가 정책의 생산자이기를 포기하고 담론의 영역에서 언론과의 말싸움에 몰두하는 동안, 그 지지자들이 내걸었던 희망, 상식, 개혁 등의 구호는 내용 없는 우스갯소리로 전락했다. 그러나 여전히 노무현과 그 (열성) 지지자는 이 모든 사태의 책임마저도 말싸움이나 홍보를 통해 한나라당과 조·중·동에 넘길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차라리 박근혜가 이명박보다 나은 이유
 
  이 얘기는 코미디 같지만 우리 일이라서 웃기 힘들다. '검증된 이무기를 택할 것이냐, 미확인 생물체를 믿어볼 것이냐.' 딜레마는 여전히 남는다. 한 번의 선택이 실패로 끝났더라도, 전자를 택하는 것이 반드시 올바른 선택도 아니다. 이것은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기 힘든 상황에서 나온 선택의 문제, 말하자면 도박장의 베팅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올해의 대선 정국에서는 이러한 베팅마저 허용되지 않을 듯하다. 각 정파에서 '검증된 구렁이'를 후보로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가 지난 5일 부산 동래구 학산여자고등학교를 방문해 학생식당에서 학생들의 카메라 세례를 받고 있다. ⓒ뉴시스

  가장 큰 구렁이는 대선을 약 2개월 남겨둔 지금까지 50%가 넘는 지지율로 고공 행진하고 있는 한나라당 대선 후보 이명박이다. 이명박의 핵심 정책은 이미 경선 과정에서 같은 당의 홍준표 의원에게 논박 당했다. 그의 주장은 이렇다. 경부 운하는 '환경 재난'이다. 만일 물류 운반이 문제라면 경부고속도로에 화물 전용 도로를 보강하면 된다. 7-4-7 경제론(7% 성장, 국민소득 4만 달러, GDP 세계 7위)은 잠재 성장률을 무시한 허구일 뿐이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인 대한민국의 사회 문제를 해결할 방안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CEO 대통령'이라는 수식어와 서울시장 경험이 훈장처럼(!) 남는다. CEO 출신 대통령이 경제를 살려줄 거라는 기대는 그야말로 지지자의 '희망 사항'에 불과하다. 그리고 '서울 시장 이명박'을 돌이켜보면 '대통령 이명박'이 해치울 일들이 걱정스러워질 뿐이다.
 
 
차라리 CEO도 서울시장도 안 해 본 박근혜가 이명박보다 나은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이유는 경제적인 것이다. 박근혜는 일종의 자유방임 경제를 약속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명박이 약속하고 있는 '토건 국가'에 비해 되돌리기 쉽다. 규제는 풀었다가 나중에 다시 만들면 그만이지만, 한번 파기 시작한 운하는 되돌릴 수 없다. 둘째 이유는 정치공학적인 것이다. 만일 박근혜가 한나라당 대선 후보로 나온다면, '독재자의 딸은 안 된다'는 정서를 가진 사람이 반대편으로 결집해서 이명박에 비해 상대적으로 근소한 차로 당선될 것이다. 이 경우 당선되더라도 박근혜는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의 요구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경제적인 면에서나 정치적인 면에서나 박근혜는 큰 힘을 발휘할 수 없는 '통나무'가 될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으로는 '통나무'가 '돌진하는 구렁이'보다 낫다.
 
 
박근혜가 이명박보다 나은 마지막 이유는 민주주의의 성숙에 관한 것이다. 박근혜가 전통적인 한나라당 지지층에 기대고 있다면, 이명박은 2002년에 노무현을 지지했던 사람의 지지마저 업고 있다. 이런 토양에서 당선된 그는 반대파의 의견을 묵살하고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사안을 처리하는 그의 '리더십'을 좀 더 강하게 밀어붙일 것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전격적으로 추진한 노무현에 이어 이명박의 '불도저' 공정이 시작되면 우리는 '민주적 리더십'이 무엇인지 논의할 공간마저 잃어버릴 것이다.
 

  이명박의 당선은 "너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줄 테니 알아서 우리를 잘 살게 해줘"라는 식의, 책임지지 않는 표를 행사하겠다는 남미식 '위임 민주주의' 모델에 가깝다. 이런 모델이 정착되면 사람들은 반복적으로 한 인물에게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을 가져다주고 일이 잘못되면 그 사람에게 화를 내는 일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사실상 민주화의 뒷문을 열어 제꼈고, 이명박은 그 문을 나서 역행의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을 위인이다. '독재자의 딸'이라는 박근혜보다 더 말이다. 이렇게 이명박은 본인의 캐릭터로 보나 지지받는 방식으로 보나 문제가 많은 사람이지만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가 되고야 말았다.
 

  차라리 이해찬이 정동영보다 나은 이유
  
▲ 지난 5일 오전 여의도 정동영 캠프 사무실에서 정동영 후보가 경선 관련 입장을 발표하기 위해 브리핑 룸으로 들어서고 있다. ⓒ뉴시스

  그보다 좀 작은 구렁이는 대통합민주신당 경선에서 1위를 차지할 가능성이 가장 큰 정동영이다. 대통합민주신당의 후보군은 매력은 없지만 특색은 있다. 유시민을 흡수한 이해찬은 "열린우리당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세력과는 연대하지 않겠다"라는 출사표로 알 수 있듯이 노무현 정부의 노선을 계승하겠다는 사람이다. 그에겐 교육부장관, 국무총리의 경력이 있다.
 

  한나라당에서 뛰쳐나온 손학규는 호남을 순방하며 '햇볕 정책' 지지의사를 밝혔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비한나라당 진영을 통째로 규합하려는 사람이다. 그에겐 경기도지사의 경력이 있다. 그렇다면 정동영은? 통일부장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 열린우리당 당의장을 역임한 나름대로 굵직한 경력의 소유자이건만 뚜렷이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다.

 
  그의 발언 중 기억에 남는 것은 두 가지 정도다. 하나는 2002년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당시 후보 노무현을 일컬어 '극좌'라고 칭했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탄핵 역풍으로 열린우리당이 다수로 등극한 2004년 총선 직후 열린우리당의 향후 노선을 '실용주의'라고 규정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그 자신을 '중도 실용주의자' 정도로 여기고 있는 모양인데 그 내용이 무엇인지 어떤 정책에 대한 뚜렷한 입장을 통해서 밝힌 적은 없다. 실용주의는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갖추어야 할 종류의 것이며, 혼자서 활동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이념과 결부시켜야 맥락을 가질 수 있는 말인데, 그는 그 맥락을 보여준 적이 없다.
 

  그의 특색, 그리고 그의 성공 요인은 정책적 지향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 그는 과거 노사모의 조직을 운용하던 사람을 설득해서 자신의 운동원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열혈 노무현 지지자의 성향은 이해찬에 가깝지만,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데는 정동영 캠프를 당할 수 없다. 자발적인 지지자들 중에서도 가장 열심히 일하던 사람을 그가 데려갔기 때문이다. 그는 2002년 대선 정국에서 개혁당과 노사모의 자발적인 봉사 활동을 보고 크게 느낀 바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느낀 것이라고는 고작, 저 자발적인 사람의 조직력이 다른 동원 조직보다도 강력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시민의 '참여'에서 '내용'을 소거하고 그들을 '자발적인 동원조직'으로 전락시켰다. 애초에 2002년의 참여자들이 뚜렷한 소신을 지녔다기보다는 감성적으로, 공동체적으로 모였다는 측면도 있지만, 정동영은 그 맹점을 탁월하게(?) 이용한 것이다. 이것이 그를 정책적으로는 그와 흡사한 대부분의 무색무취한 정치인들과 구별시키는 점이다.
 

  그는 참여정부의 '참여'가 공허한 것임을 과격하게 증명하는 변론가다. 내용이 없는 그가 대선 정국에 나와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추상적인 구호로 자신과 한나라당의 차이를 강조하고 이명박을 깎아내리는 것뿐이다. 그보다는 정직하게 참여정부의 노선을 심판받으려고 나오는 이해찬이 한국 정치의 발전에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열혈 지지자의 생각처럼 이해찬이 정동영보다 훨씬 나은 인물이라는 생각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민주노동당은 왜 권영길을 선택했나
  
▲ 지난달 28일 오전 임진각 자유의 다리 앞에서 민주노동당 권영길 대통령 후보가 '코리아연방공화국 5대 평화프로젝트'를 발표하고 있다. ⓒ뉴시스

  슬프지만 가장 작은 구렁이는 민주노동당의 대선 후보로 확정된 권영길이다. 민주노동당은 한국의 정당 중에선 유일하게 당원 중심의 정당으로, 원래 인물에 크게 치중하는 정당은 아니다. 인물보다는 정당을 보고 투표하면 된다. 그럼에도 현 시점에서 민주노동당의 대선 후보 경선의 결과에 실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현재의 민주노동당이 열린우리당만큼이나 조직의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의 문제는 중앙당의 상근자들의 임금이 체불되고 있다는 구체적인 현상으로 드러나고 있다. 바깥에선 임금을 올리려는 노동조합을 두둔하는 일이 많은 이 정당이, 안에선 자기 조직원에게 월급도 주지 못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 정당은 국고 보조금을 받는 정당이므로, 이 사실은 이 정당의 운용에 뭔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의 의정활동 성적은 우수한 편이었는데, 그 바탕에는 우수하고 헌신적인 보좌관과 정책위의 활동이 있었다. 하지만 조직이 흔들리면 그런 바탕도 사라진다. 민주노동당은 지금 김정일 정권보다도 더 위험한 상태다.
 
 
또한 정치적으로 볼 때 민주노동당은 당내 자주파의 입김에서 나오는 지나친 민족주의 정책을 탈피해야 할 필요가 있고, '민주노총당'이라는 이미지를 벗어 노동조합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을 대변할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 결국 민주노동당의 대선 후보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사람이어야 한다.
 
 
하지만 심상정, 노회찬과 달리, 권영길은 이런 문제의식이 절박하지 않다. 과거 그는 '말 많은 조직의 말없는 지도자'라는 표현으로 대변되는, 민주노동당 각 정파들을 조율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세 번째 대권 도전을 위해 자주파를 적극적으로 껴안고 특정 정파의 대변인이 되었다. 경선 승리 직후 그가 내세운 것이 '코리아 연방제'와 '100만 민중대회'다. 구태의 습속에서 여전히 머물고 있다. 남들은 다 변하라고 요구하고 있는데 정작 민주노동당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며 배 째라고 거리에 드러누운 격이다.
 
 
권영길의 경선 승리는 정치공학적 시각을 넘어서 민주노동당이라는 정치 세력의 존립 의의를 뒤흔든 사건이다. 이들이 한국 사회에 어떤 면에서든 도움이 될 거라는 기대를 쉽게 할 수 없는 것이다. 토론에 강한 노회찬과 경제에 해박한 심상정이라는 매력적인 카드를 짓밟고, 권영길은 이번 대선을 가장 재미없게 만드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구렁이들의 전쟁
 
  이제 이 세 사람이 대선을 앞두고 TV토론에 나왔다고 상상해 보시라. 이명박은 대운하의 정책 타당성이나 재산 축적 문제와 관련된 상대편의 질문을 능구렁이처럼 회피하는 데에 토론의 목표를 설정할 것이다. 정동영은 준엄하고 비장하지만 구체성이 결여된 논변으로 이명박을 공격하는 데에 치중할 것이며, 참여정부와의 연계는 되도록 부정하려 들 것이다. 권영길은 전날 외워온 당 정책을 두 사람의 공방의 맥락에 맞춰 힘겹게 풀어내느라 자신도 지치고 시청자도 지치게 만들 것이다.
 
 
  세 사람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토론을 통해 뭔가를 얻어낼 수 있는 타입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명박이 얻어야 할 것은 '위임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이들의 지지이며, 정동영이 얻어야 할 것은 이명박은 절대로 안 된다는 사람들의 지지다. 권영길이 얻을 수 있는 것은 민주노동당 골수표밖에 없다. 2002년에 노무현, 이회창, 권영길이 보여줬던 만큼의 대립각도 화면에 보이지 않는다. 바야흐로 구렁이들의 전쟁, 'K-War(Korean Ratsnake's War)'가 도래했다.
 
 
  심형래 감독의 <D-War>에 따르면, 이무기가 여의주를 얻으면 용이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구렁이가 여의주를 물면 이무기는 될 수 있을까? 십중팔구 구슬을 탐내 자기 뱃속에 집어삼키고 배탈이 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유권자들은 5년 후 찝찝한 표정을 지으며 식칼을 들고 구렁이 배를 갈라 그 구슬을 다시 토해내게 해야 한다. 이렇게 결과가 뻔히 보이건만, 다른 방도는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번 대선은 기권을 비난할 수 없는 선거라는 것이다. 유의미한 정치적 실천은 특정한 후보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 다른 부분에 있을 테니, 정치를 염려하는 사람들은 그 점을 고민하는 것이 좋겠다.
   
 
  한윤형/학생



......사람 쪽팔리고 무안하게 고종석 선생님 글을 소개글에 넣다니...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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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자의 여자>의 홍준표가 아무리 그 존재감에 덧칠을 하더라도, 국회의원 홍준표는 기억에 남을 정치인이다. '반값 아파트' 공약은 참여정부 임기 내에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을 망라해서 유일하게 반향을 일으킨 '서민' 공약이었고, 군기피자는 재외동표 혜택을 보지 못하도록 한 법률 개정안은 비록 악법이지만 민족주의를 실현해야 할 '우파'의 입장에서는 일관성을 지키려는 시도로 평가할 수 있었다. '민족'을 언급하면서도 '반민족적' 행위를 일삼는 숱한 국회의원들에 비하면 말이다. 그런 그가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 출사표를 던졌다.

그는 한나라당의 집권가능성에 의문을 던진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한나라당의 집권가능성에 의문을 던지는 홍준표의 행위가 한나라당의 집권가능성을 높인다. 그는 한나라당이 서민을 대변하지 못한다는 점을 알고 있고, 서민의 대변자로 자신을 위치지운다. 이명박의 경부대운하를 '환경재난'이라 규정하며 경부고속도로에 화물 전용도로를 보강하면 된다고 주장하고, 이명박의 7-4-7 경제론(7% 성장, 4만불, 세계 7위)에 조소하며 진짜 문제는 대한민국이 OECD 국가중 자살율이 1위라는 사실이니 국민소득보다 행복지수 개선에 신경써야 할 거라고 일갈하며, 북한에 대해 '마셜 플랜' 비슷한 것을 수립해야 한다고 천명하는 그는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을 튼튼하게 만드는 자양분이나 다름없다.

손학규의 경우, 서민적 이미지 혹은 서민성이라는 것이 있었는지 몰라도 컨텐츠면에서는 홍준표만큼 파격적이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는 어찌됐건 한나라당의 집권보다는 자신의 당선에 더 욕심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한나라당을 탈당해서 <근혜 명박 공방전>을 격화시킨 주역이 되었다. 이제와서 경선출마를 선언한 홍준표는 다르다. 비록 그의 말대로 정치인이 1%의 가능성에라도 도전하는 생물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자신이 말했든 그의 부차적인 목표는 두 사람의 대결의 완충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는 그 역할을 서민적 정책을 제시함으로써, 경선을 정책 검증 구도로 만들면서 수행하려는 것 같다. 홍준표는 아마도 이명박과 박근혜 두 '메이저' 후보에게 자신의 정책 일부를 받아들이게 하여 한나라당의 본선 경쟁력을 높이는 상황을 원할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본인의 정치적 입지가 탄탄해지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발상은 한국 정치판에서는 새로운 시도이니, 그의 '이기심'을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실 지금의 그는 "좋은 일을 하고 (불확실한) 이득을 바라는" 윤리적인 인간에 가깝다.

문제는 그 윤리성과 현명함의 수혜자가 한나라당이라는 것이다. 한나라당을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사실은 씁쓸한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미국의 역사에서도 공화당과 민주당의 위치가 한번은 뒤집혔음을 기억해야 한다. 홍준표의 운신은 기본적으로 열린우리당이 더 이상 서민을 대변하는 정당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열린우리당 탈당 1호 임종인 의원은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은 2002년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대 선공약과 거의 동일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게다가 한나라당으로서도 하기 힘들었던 한미 FTA까지 성사시켰으니. 참여정부가 말하는 개혁의 등식은, "한나라당과 똑같이 행동하면서 조선일보에게 욕먹는 이가 참다운 진보다."라는 것. 그들의 오도된 개념 속에서 모든 이가 혼돈에 빠져있을 무렵에, 오직 홍준표만이 -아마도 그의 본래 성향의 도움을 받아- 한나라당이 나아가야 할 가장 윤리적이고 또한 가장 전략적인 길을 제시한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의 한나라당이 -박근혜 라인이든, 이명박 라인이든- 홍준표 노선을 수용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한나라당은 올해 대선이 문제가 아니라 향후 십오년 이십년은 집권할 수 있을 터전을 닦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정당은, 유럽 기준으로 '극우파'에 해당하는 정당이 될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극우파'는 흔히 쓰이는 경멸어의 용법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문학평론가는 "박정희를 히틀러라고 표현하는 것은, 박정희에 대한 극존칭"이라고 표현한 바 있는데, 그와 비슷한 논지에서 나는 지금 극우파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만약 지금 한국에서 유럽적 의미의 극우파를 구성한다면, 그는 마땅히 홍준표처럼 북한에 대한 마셜플랜을 주장해야 한다. 북한정권을 혐오만 하다가 중국 공산당에게 남한보다 더 큰 땅덩이와 2천만의 값싼 노동력을 공짜로 넘겨줄 칠칠맞은 조갑제 류 극우파와는 차원이 다른 '극우파'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건설자재의 스케일 이외의 사이즈는 상상하지 못하는 이명박과 경상북도에 거주하는 아버지 친구들의 '말씀'을 얌전히 듣는 박근혜가 그런 식의 '극우'를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물론 그 주변인물들도. 그래서 다행스럽게도, 그토록 똑똑한 이가 도와줌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이 십오년 이십년 집권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한나라당의 실패에 안도했다면 이제 다른 쪽에서 뭔가가 나와줘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한나라당이 진짜 극우파 정당이 되는 것만도 못한 미래가 대한민국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나는 홍준표에 대응하는 범여권의 키플레이어는 김근태라고 생각한다. 물론 스타일로 볼때는 화끈한 홍준표와 결단이 느린 김근태 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지만, 두 사람은 개인의 커리어를 넘어 적어도 자신이 속한 집단의 미래를 큰 틀에서 고민한다는 공통점은 있다.

범여권의 딜레마는 앞서 말했듯 참여정부 그 자체다. 열린우리당은 경제정책을 한나라당처럼 수행한 후 여전히 서민들에게 표를 달라고 말해야 하는 처지인데, 덕분에 서민들은 '진짜 서민정당'이 나타나도 믿지 않고 이명박에게 표를 줄만큼 냉소적으로 변해버렸다. 이제 이 냉소주의를 타파할 유일한 방법은 열린우리당의 원래의 임무를 수행할 어떤 정치세력이 등장하는 것이다. 최장집 교수가 요구하고, 임종인 의원이 의도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일 게다. 그러나 비록 그것이 정답이라 하더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열린우리당은 자신의 노선을 바꿀 의사가 없다. 그게 제일 옳다고 믿고 있으니까. (다시 한번 열린우리당적 개혁의 준칙, "한나라당처럼 행동하고, 조선일보에게 욕먹어라."를 상기하라.) 이해찬 전 국무총리는 대선 출마 의사를 밝히면서 "열린우리당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세력과는 연대하지 않겠다."고 천명했다. 참여정부 인사들이 한나라당 경선에 참가한다면 범여권의 희망은 무럭무럭 자라난다. 하지만 결코 그런 일이 벌어질 리는 없다.

그런 열린우리당을 서민적인 견지에서 질타해야 할 민주당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원한감정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것 때문에 한나라당과 공조한 탄핵이라는 최악의 정치행위를 저질러놓고서도 말이다. 아마도 민주당은, 그 지지자들의 희망과는 달리, 김대중이라는 걸출한 정치인의 존재를 빼놓고 나면 호남 토호들의 정당에 불과했던 것 같다. 그들 역시 서민층을 대변할 능력도 의사도 없는 주제에, 대선 이후 총선 이후 조직을 건사할 궁리나 하면서 범여권의 미래에 암울을 드리우고 있다.

또한 시민사회단체들이 모여 만든 '희망연대'라는 것이 있는데, 이 분들 역시 '한나라당은 대안이 아니다.'라는 지극히 안이한 발상에서 출발하고 있다. 아마 대선이 가까워지면 범여권 후보에게도 단일화를 제의하고, 민주노동당에도 단일화를 제의하면서 찌질거리다가, 대충 사퇴 수순으로 갈텐데, 만일 범여권이 단일화에 실패한다면 끝까지 고하다가 피박을 쓸 가능성도 농후한 집단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대중은 범여권 후보 단일화, 즉 여권 대 야권 일 대 일 매치를 제안하고 있지만, 저 모든 집단들의 이해관계를 조율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비노의 '참여정부 무능론'을 "참여정부 무능론은 민주세력 무능론이며, 한나라당에 백기투항하는 것이다."로 받아치는 친노가 있는 한, 일반적인 절차로 단일 후보가 선출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최근 논의되고 있는 가설 정당(Paper Party)이 되었든, 최악의 경우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식 여론조사 방식이 되었든 정치공학의 압박을 강제한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단일후보를 도출할 수밖에 (가능하다면 말이지만) 없는 상황이다.

이런 구도를 만드는 데엔 누구보다도 김근태의 역할이 절실하다. 참여정부에 참여했지만 친노는 아니고, 민주당 분당과 같은 사태에서도 앞장 선 사람은 아니다. 원체 느리게 움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눈에 띄게 미움을 산 건 없다. 정치경력도 여러 정파에서 수긍할 만 하다. 지금껏 그의 단점으로 치부되었던 것을 장점으로 삼아, 새로운 구도를 만드는데 절치부심해야 할 때이다. 그의 위험성(?)을 본능적으로 감지했기 때문인지, 조선일보는 여러 사람이 언급했던 '가설 정당'론을 김근태의 주장으로 이해하며 비판했다. 가설 정당은 아무런 명분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가설 정당은 아무런 명분이 없고, 심지어 정당 정치조차 아니다. 하지만, 노빠들 이외에 자발적인 시민 참여세력이 실종된 상황에서, 범여권이 열린우리당 문제를 정정당당하게 극복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만일 범여권에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노무현-정몽준 단일화와 같은 방식으로 친노 세력을 떨구는 것이리라. 노무현 대통령은 명분없는 단일화로 역사의 시간 중 일부를 자기 것으로 삼았다. 이제 그의 부산물들을 명분없는 단일화로 떨궈낼 수 있다면, 거기에도 약간의 의미는 없지 않을 터이다. 아니 '의미'는 문제가 아니고 매우 고무적인 일이 될 게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김근태가 선택해야 할 것은 가능한 모든 방법이다. 열린우리당이 내팽개친 서민들을 대변하겠다는 다짐은, 친노세력을 떨군 후에야 겨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김근태가 멍석을 깔고, 가령 추미애와 같은 정치인이 돌아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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