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many cuts should I rep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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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윤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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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08/06/06
    [씨네21/유토디토] 누가 10대와 20대를 분리하는가 (19)
  2. 2008/03/09
    '20대 비례대표'에 찬성하지 않는 이유 (21)
  3. 2007/01/24
    386에 대한 냉소, 냉소 바깥
  4. 2007/01/22
    송호근의 미덕과 악덕
  5. 2007/01/20
    강풀의 26년 : 정치적 열망의 비정치적 해소
  6. 2006/11/28
    정치평론
  7. 2006/08/29
    저자의 책임에 대해

정국이 너무 빨리 변하죠. 가두시위가 시작되고, 20대들이 시위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기 이전에 쓰여진 글입니다. 이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원고는 잡지가 나간지 2주 후에 인터넷판으로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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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시위에 나온 10대들을 상찬하다가 “그런데 20대는…”이라고 비판하는 게 요즘 유행인 모양이다. 386들의 술자리에서 무럭무럭 자란 풍문은 실체없는 허깨비마냥 떠돌더니 급기야 “십대는 촛불시위하는데 대학생들은 원더걸스에 열광해”류의 기사를 만들어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원더걸스에 열광한 대학생들 중에선 촛불시위에 나간 사람이 없었을까? 촛불시위에 나선 십대 중에선 연예인에 열광한 친구들이 없었을까? 이 정도 수준의 보편화(?)가 합당하다면 내 눈에 보이는 풍경은 이런 것이다. ‘아내와 아이들은 촛불시위에 나가고 있는데 자신은 술을 마시며 20대나 씹고 있는 어느 386 남성.’ 제발 이렇게 유치하게 놀지 말았으면 좋겠다.


10대들의 목소리는 광우병 정국을 넘어선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 밀착한 문제에서 정치성을 느꼈고, 그 모든 것을 지금 현장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지적했듯이 그들은 광우병 문제뿐만 아니라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에 대한 불만도 털어놓고 있다. 그런데 왜 하필 그들은 쇠고기 문제에서 폭발한 것이었을까? 이 문제가 ‘약한 고리’였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물론 지금도 장학사와 교사들이 그들을 잡으려고 거리를 헤매고 있지만, 교사와 학부모들은 오히려 교육정책에 대해 당사자인 십대가 발언권을 행사하겠다는 선언을 더 불편하게 받아들였을 거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고, 부모의 승인을 받을 수 있는 전략적 목표를 타격했다. 훌륭한 일이다. 하지만 소녀들이 대통령을 궁지로 몰아넣었다고 기성세대들이 희희낙락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정치적이라고 상찬받는 그 청소년들이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고, 그 부조리에 저항할 권리 역시 철저하게 억압받는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라. 나는 그들이 거리로 나올 권리를 지켜주고, 그들의 ‘말’을 주의깊게 듣는 것이 ‘어른들’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10대와 20대 모두를 타자화시키는 10대 예찬론은 그런 의무를 다하고 있는 걸까? 나는 그 예찬이 왠지 386세대의 정치적 무기력을 숨기기 위한 자조적인 행동으로 보인다. 설령 이명박이 탄핵되더라도 박근혜가 대통령이 될 그 현실을 견디기 위해서, 그들은 10대에게서 희망을 보아야 할 것이다. 10대가 실제로 무엇을 생각하든 말이다.


‘20대의 보수성’이란 말은 ‘20대의 원자화’라는 표현으로 고쳐져야 한다. 학부제 실시 이후 혼자서 대학을 다니는 대학생들은 청소년들만큼도 조직화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그들은 2002년과 2004년의 촛불시위에 거리로 나온 경험이 있다. 이번에 그들이 시큰둥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지에 대해서도 고민해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바람과 참여에 정치권이 얼마나 무관심한지를 느꼈고, 그리하여 급속하게 냉소주의로 돌아섰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정말이지 참여정부의 공로가 혁혁했다. 이런 ‘과거’를 상기한다면, 슬프게도 오늘 거리로 나온 10대들이 훗날 그런 20대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물론 나도 안 그랬으면 좋겠다). 그때 개혁세력을 지지하는 우리의 기성세대들은, 오늘의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다시 새로운 10대를 예찬하고 있지 않을까? 또 한번 20대들을 안주로 삼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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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신당연대회의 당원게시판에도 올렸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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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라는 말이 널리 통용되게 된 것은 지금의 20대들의 대다수가 정규직에 취업하지 못하는 현실이 엄연히 존재함을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보수적인 종이신문들조차 그 사실을 부인하지 못한다. 다만 그들은 이 문제를 (반기업적인 좌파정부로 인한?) 경기침체 때문에 일어난 일시적인 현상으로 보고 싶어할 뿐이다. 하지만 '고용없는 성장'은 이 시대의 보편적인 문제이며, 지금의 20대들은 앞으로도 정규직으로 진입하기 힘들 것이라는 것이 <88만원 세대>의 우울한 전망이다. 사회복지제도가 빈약한 한국의 실정에서 지금의 20대가 받게 될 고난의 크기는 물론 다른 선진국의 젊은이들의 그것에 비할 바는 아니다.


<88만원 세대>의 문제의식을 총선에서 반영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20대 비례대표 후보'를 정하자는 흐름이 있는 모양이다. 민주노동당은 예의 이주희를 앞세워서 흐름에 편승하려는 모양이고 대통합민주신당의 경우도 무언가 조치를 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봤자 양쪽 모두 당선권에서 거리가 먼 순번에 후보를 배정하게 될 것 같다. 20대 비례대표에 관련된 운동을 전개하려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고 이들에게 매우 미안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나는 이런 방식의 정치적 행동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럴 리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진보신당이 이러한 흐름에 편승하는 것에도 찬성하지 않는다.


20대 누구가 국회의원이 되더라도 적어도 50대 누군가보다는 나을 거라는 우석훈의 주장에 특별히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당장에 20대 누군가가 국회의원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될 수 없다. 20대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사회가 인식하고 그 문제에 대한 대안을 찾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20대가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여성, 비정규직, 환경 등에 그렇게 하는 것처럼 부문운동에 대한 안배를 할 수 없는 것은 20대 중에서 20대 문제에 대한 운동세력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지금 막 생겨나고 있는 운동단체들에게 비례대표직을 제의할 것인가? 20대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의 모색은 20대의 정치적 무능함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 무능함이 그들만의 책임은 아니지만, 먹을 수도 없는 음식을 먹겠다고 달려드는 꼴은 우습다. 20대 비례대표가 문제해결의 의지를 과대하게 포장하는 일종의 '쇼'라는 사실은 20대들의 정치적 감각으로도 파악될 수 있는 일이고, 그런 쇼에 혹할 만큼 20대의 정치적 냉소주의가 얕은 것도 아니다. 정치공학적으로 따져도 이건 무의미한 정치적 기동이다.


과거 개혁당의 윤선희나 민주노동당의 이주희의 사례로 볼 수 있듯, 젊은 정치인(?)의 등장은 젊은이의 권익을 대변하는 것과는 크게 상관없고 '젊은 여성'의 이미지를 감각적으로 덧씌우는 정치세력의 홍보전략과 크나큰 상관이 있다. 더욱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이들은 동세대의 유권자가 아니라 젊은 여성에 대해 우호적인 중년의 남성 유권자들에게 어필한다. 이들이 주체적인 개인으로서 정치적인 발언을 하는 것을 나는 들은 적이 없다. 특정한 정치세력의 얼굴마담을 세워 놓고 문제해결의 단초를 발견했다고 말한다면 이건 아예 문제를 은폐하는 꼴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는 20대 운동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88만원 세대'의 통찰의 핵심은 지금의 20대는 30대가 되더라도 현재의 30대처럼 살지는 못할 거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88만원 세대'가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한 세대론은 아니다. 따라서 진보신당이 고민해야 할 지점은 당장에 어떤 20대 정치인을 만들 수 있을까라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물론 만들 역량도 없다.) 진보신당의 활동가들의 대다수를 차지할 386세대 아랫 세대들이 정당에 참여했을 때 밑바닥으로부터 올라올 수 있는 제도적 지원이나 문화적 변혁이 필요하다. 십 년쯤 세월이 지났을 때 지금의 20대들이 정당의 밑바닥에서부터 경험을 축적하여 일정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면, 그때는 그 세대에서 그 세대와 그 아랫세대의 문제에 대한 해결능력을 갖춘 비례대표가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자연스러운 성장을 유도하는 것이 그냥 20대 비례대표를 책정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인 건 사실이지만,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


총선에서의 생존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할 진보신당으로서는 지금부터 바로 이 프로젝트에 착수할 수는 없다. 88만원 세대의 문제에 대해서는 진보신당의 경제적 비전이 그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주장을 통해 대응하는 수밖에 없다. (사실 그것이 어떤 방식의 쇼보다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잘 먹힐 방법이기도 하다.) 후에 만약 진보신당이 의석도 얻고 국고보조금도 받게 된다면, 우리는 보좌관이나 대의원 같은 직책에서 후386세대 활동가의 정치력을 향상시키는 방안에 대해 고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반드시 그러한 고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지금의 한국 좌파들은 단지 한 세대의 집단적 정체성에 기대고 있고, 이것은 장기적인 정당의 발전을 위해서 바람직하지 못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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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노무현 정부의 정책의 내용과 방향이 민주화 세력의 기대에서 많이 벗어났다고 생각한다. 민주정부의 권위를 스스로 약화시키는 권력의 운영 스타일도 문제이고 민주주의의 가치를 존중하고 실천하는 측면에서도 문제가 많았다. 386 세력을 부당하게 매도해서는 안 되겠지만, 객관적으로 권력에 참여한 운동세력과 여기에 참여하지 않은 민주화운동 세력 간의 괴리는 굉장히 커졌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서는 권력에 참여한 사람과 세력의 책임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노무현정부가 민주화운동세력 전부를 대변하는 것도 아니다. 노무현 정부의 실패를 모든 민주화 세력의 책임으로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민주개혁 세력은 독자적으로 대안을 만들 수 있어야 하고 그 가능성을 확대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정부와 분명한 차이를 강조하고 싶었다.
                                                                                   -최장집 교수 한겨레 인터뷰 중에서


최장집 교수의 인터뷰는 한국정치에 대한 그 누구의 평결보다도 훌륭하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사회경제적 이슈를 정치권은 다루지 않고, 그런 이슈를 피해가는 여러가지 방식으로부터 현재 정치의 파행이 도출된다는 식이다. 한나라당 집권은 안 된다고 나서고 있는 여러 사람들(노무현 정권 바깥에 있는 사람들까지)에 대해서도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그는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글의 관심사는 그중 극히 일부다. 한 명의 생활인으로써 나는 한국 민주주의의 본원적 문제를 교정할 위치에 있지 않다. 노정태 말을 빌리면 방법론이 없는 것이다. 가령 나는 사회경제적 이슈가 부족해서 문제다, 라고 한마디 던질 수 있을지언정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공유하고 있는 정책적 조류를 벗어날 정책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도 없고,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지원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이건 매우 큰 문제다.)

그러므로, 정치에 대한 나의 발언은 '조중동 프레임' 안에서 놀게 된다. 조중동이 정치를 해석하는 방식 말이다. 그것은 내가 조중동에게 '세뇌'당한 탓도 있겠지만, 그것이 대중이 정치에 대해 발언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 대중들이 한국 사회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은, 도대체 386이 나라를 말아먹었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것밖에 없다.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거기서 시작해서 그 문제에 대한 최상의 결론을 도출하고, 거기서 나의 정치적 선택을 끌어내는 것이다.

연초에 한겨레가 386을 분류한 방식으로부터 시작해 보자. 386이란, 1) 35세부터 45세까지의 (처음 이름붙였을 때로부터 세월이 지나서 이젠 386세대의 절반은 30대가 아니다.) 세대 전체를 일컫는 말일 수도 있고, 2) 그중 진보적인 이들을 일컫는 말일 수도 있고, 3) 그중 정치권에 참여한 이들만을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다. 지금 조중동은 1)이나 2)가 나라를 말아먹었다고 매도하는 중이다. 최장집 교수의 발언은 무미건조하고 합리적인 것인데, 2)와 3) 사이에 심각한 괴리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무현정부가 민주화운동세력 전부를 대변하는 것도 아니다. 노무현 정부의 실패를 모든 민주화 세력의 책임으로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는 발언이 나온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것은 냉소에 대한 분석의 칼질이다. 그러나 이 무미건조한 말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면 좀 의미가 달라질 수도 있다. 오마이뉴스에서 손석춘도 저런 식의 말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일종의 도마뱀 꼬리 자르기인 것 같다. 말하자면 실패한 것은 노무현 정권이지 민주화운동세력이 아니므로, 민주화운동세력을 중심으로 한나라당 집권저지에 총력을 기울이면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최장집 교수와는 달리) 한나라당은 안 된다는 약간의 의식 내지 편견이 들어가버리면, (최장집 교수가 그리 긍정적인 것 같지는 않다고 평결한) 시민사회운동진영의 독자후보론으로 달려가게 된다.

냉소는 하나의 기질이므로, 거기에 대해 옳다, 그르다를 논한다는 건 무의미하다. 노무현 정부를 옹호하고자 하는 노빠들의 반론은, 대중들의 냉소에 심정적인 근거를 제공해준다. 나에게 술을 몇번 사준 열린우리당에서 보좌관을 하고 있는 형은 "노무현의 지지율이 떨어지면서 민노당의 지지율도 같이 떨어졌으므로, 노무현만 잘못했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발언엔 큰 의미는 없다. 손석춘에게 반론한 오마이뉴스 기자는 "노무현 정권만 잘못했고 민주화운동세력은 잘못한게 없다고 하는데, 그럼 시민사회단체나 민주노동당은 잘한게 있느냐."고 말한다. 이 말엔 좀 의미가 있다.

물론 나는 노무현 대통령이라는 케릭터를 무척이나 싫어한다. 로마 황제가 '제 1시민'이라면, 그는 '제 1노빠'다. 노무현 대통령의 진정성은 (데카르트식의) '기계 속의 유령'처럼 그의 육체 안에 위치하고 있지 않다. 그의 진정성은 서프라이즈라는 사이트에, 그 사이트에 올라오는 글들에 플러스를 꾹꾹 눌러대는 사람들의 손가락에 물리적으로 현존한다. 원포인트 개헌론은 서프라이즈라는 이름의 노빠수용소에 던져진 대통령의 떡밥이다. 그는 노빠만 바라보면서 정치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원적인 회의가 있다. 물론 그것이 문제를 더 심화시키기는 했겠지만, 이것이 노무현 대통령이라는 특이한 케릭터의 문제이기만 할까 하는. 대다수의 대중들은 이 문제에 대해 이미 결론을 내렸고, 이명박이라는 신화적인 케릭터에게로, 신화적인 선택으로 달려가버렸다. 거기에 대해 온전히 동의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들의 냉소는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다.

이른바 4대개혁입법이란 것을 만들 때 교수들도 많이 참여했다. 하지만 그 법안의 꼬라지는 관료들의 비웃음을 살 수준이다. 사립학교법은 그 취지가 올바름에도 불구하고 위헌적인 요소가 있어 통과된다 한들 '또' 헌법재판소로 넘어가 도루묵이 될 수 있는 수준이라고 하고, (이건 그냥 법공부하는 친구에게 들은 얘기라서 나 자신이 근거를 들어 자세히 설명할 수 있는 견해는 아니다.) 과거사 진상규명법은 굳이 이영훈의 비평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도대체 이해하기 힘들게 생겨먹었다. 극히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해방 직후에 만들어진 반민특위의 기준보다 친일파의 기준이 더 폭넓다는 것을 어찌 납득할 수 있단 말인가. 박정희가 포함이 되네 안 되네 하면서 한나라당과 열우당이 힘싸움을 하고 있을 때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소위 임관되고 몇 년 안되어 해방을 맞은 박정희는 친일파가 될 싹수는 보였을 망정, 반민특위 기준으로 치면 '부일배역자'에도 들지 못할 피래미였기 때문이다.

386들이 '참여'를 해서 노무현을 대선 후보로 만들고, 대통령까지 만들었을 때, 노무현 대통령 당사가 민주당과 축하를 나누자마자 바로 빠져나와 향했던 개혁당. 그 개혁당이 해산되었을 때 분개했던 사람이 나는 더 많을 줄 알았다. "백년가는 정당 만들겠다." 말한 후 일 년만에 당을 내팽개친 유시민에 분개하는 사람도 나는 더 많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리저리 찾아보면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그런 사람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불과하다. 물론 개혁당 사수를 주장한 노무현 지지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런 그들도 대개는 열린우리당 당원으로까지 흘러들어가서 자신은 여전히 참여를 하고 있다고 우기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노사모나 개혁당은 게시판 토론과 실제 구성원들이 따로 노는 모임이었다. 불현듯, 게시판에 비판 글을 올리니 반론은 안 나오고 수십 통의 '전화'가 걸려오더라는 '노사모 비주류' KDY의 경험담이 떠올랐다. 요새 하는 일과 모종의 관련이 있어 모임 하나를 취재하다보니, "아하, KDY가 (노사모) 게시판에 글을 올리든 말든, 김수민이 (개혁당) 게시판에 글을 올리든 말든, 이 사람들은 이렇게 모여서 술이나 먹고 있었구나. 이게 노사모고 개혁당이고, 열우당 진성당원이구나."라는 생각이 콱 들었다. 그런 그들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내가 '노빠'라는 말을 쓸 때, 이 사람들 전부를 칭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런 식의 참여는 한계가 명백해 보였다는 것이다.

관료들이 받아들일 만한 정책을 생산해 줄 싱크탱크의 역량도 부족하고, 지식인들에게 그런 역할을 강제할 만큼 지지자들의 참여가 분별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지금보다 정치를 '잘'할 수는 있었을 지언정 최장집 교수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책에서 분석한) '민주주의의 위기'를 약간이나마 타개할 수 있었으리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런 상황이니 노무현 정권과 민주화 운동세력을 분리해야 한다는 무미건조한 말에 일차적으로는 동의를 하지만, 기본적으로 민주화 운동세력의 역량 자체가 부족하다는 회의가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노빠들의 항변이 심정적으로 이해가 간다. 그들 중 많은 이들도 내심 깊은 곳에서 노무현 정권이 잘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며, 잘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면 나름대로 원인분석도 하고 있을 것이다. 조중동이 어쩌고 하는 노정권의 '실패의 알리바이' 논법말고, 다른 원인분석 말이다. 그들의 항변은 대중의 냉소와 통하는 지점에 있고, 어느 정도는 실제와도 합치한다. 다만 냉소는 틱 던지고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다면, 분석은 파헤쳐진 잔해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답답해 하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

그래서 이 상황을 타개할 장기적인 플랜을 무엇으로 잡건 간에, 일차적으로 올해 대선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은 '적극적 기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마도 올해는 적극적 기권과 소극적 기권을 분리해서 설명해야만 하는 한 해가 될 것이다. 그가 정확히 이런 용어를 썼는지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내가 들은 가장 적극적인 기권의 사례는 노정태의 것이다. 지방선거 때 나와 KDY가 4, 4, 4, 4번을 쾅쾅 찍은 후 4번이 없는 투표용지에선 1번을 찍고 있을 때, 노정태는 4번이 안 나오는 투표용지는 그냥 무기표한 상태로 집어넣었다고 한다. 만약 노회찬이나 심상정이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로 나와 TV토론에서 민주노동당 내 NL의 무분별한 준동을 까먹게 할 만큼이나 명쾌하고 뚜렷한 아젠다를 제시하지 않는다면, 올해의 나는 생애 첫번째 대선투표를 노정태를 본받아 실시할 가능성이 높다. (5년 전엔 그렇게 권영길 찍고 싶었어도 한 살 차이로 표가 없었는데!) '소극적 기권'과 행동주의적으로 분리하기 위해 투표소로 입장해서 투표용지도 받은 후, 도장을 아예 네모칸 바깥에다 찍고 집어넣을까 생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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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어떤 미래를 선택할 것인가>, 송호근, 21세기북스(2005) 읽다.


'이념갈등과 정책빈곤의 진보정치'라는 부제엔 동의한다.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이 '진보정치'를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이것은 이름의 문제일 뿐이니까.) 즉, 노무현 정권이 수사적으로는 굉장히 급진적이면서, 실제 정책의 차원에선 빈곤한다는 것, 수사적으로 보수층을 자극했기 때문에 별 것도 아닌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에 막대한 정치력을 소모하게 된다는 것, 그런 상황을 탈피하려고 하기는커녕 오히려 지지의 기반으로 삼고 있다는 것, 그 결과 정권의 개혁적 정체성을 구체적인 정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수구세력과의 말싸움을 통해서 과시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한국이라는 국가의 미래나 개혁세력의 앞날을 위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등의 사실에 동의한다. 이런 추세가 꼭 국내의 문제로 국한되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중국의 도약과 '동북아 중심국가' "라는 꼭지에서 적절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탄핵 사태나 과거사 청산법에 관련된 그의 미적지근한 칼럼에도 상당부분 동의한다. 그런 입장이 가능하다는 것, 그럼에도 '양비론자'로 몰려 네티즌들의 질타를 받는 그의 처지가 한국사회에 공론이라는 영역이 없음을 보여준다는 것에도 동의한다. 이상의 '동의'는 그의 언어가 아니라 내 언어로 정리한 것이지만, 내용상의 큰 차이는 없다고 믿는다.


다만 탄핵 사태나 과거사 청산법에 대해 열린우리당을 화끈하게 지지하지 않을 때에, 그는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을 동시에 비판할 수 있는 그만의 관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열린우리당, 혹은 한나라당의 방식이 '심하다'라며 '감성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런 접근도 의미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곤혹스러운 것 앞에서 곤혹스러움을 표시하는 것도 글쓰기의 힘이다. 하지만 나는 주류언론에 자주 글을 기고하는, '외국 학계에도 널리 알려진 한국의 중진사회학자'의 정치평론이 이 수준은 넘어섰으면 좋겠다. 아마도 그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따위의 수사에 감명받을 사람인 것 같다. 대선후보 '노무현의 눈물'에 감동받고, 대선 후엔 더 이상 그런 '눈물'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슬퍼하는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인간의 얼굴'이라는 애매한 수사를 사용하기보다는 침해받아서는 안 되는 사회구성원의 인권엔 무엇무엇이 있는지를 기술하는 것이 더 '공론'에 가깝다고 믿는 사람이다. 탄핵 사태 때 대통령, 열린우리당, 그 지지자들이 심하게 나아간 부분이 있다고 비판하려면 헌법적 시각에 기대야 하고, 과거사 청산법에 대해 회의를 표명하려면 '민족이 아니라 인권'이라는 이영훈의 시각 정도는 갖춰야 한다. 그가 그런 역량이 없다고 단언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 책에서 인용된 칼럼은 미진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나는 386세대와 포스트 386세대에 대한, 특히 포스트 386세대에 대한 그의 '세대론'에 동의하기 어렵다. 물론 그의 책은 열린우리당이 총선에서 압승한 직후, 정권과 여당에 대한 지지율이 이 정도로까지 급락할 줄은 몰랐던, 부동산 정책이 이토록 처참하게 실패할 줄은 몰랐던 상황에서 쓰여졌다. 지금이라면 그는 조금 다른 말을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가령 포스트 386세대가 인권, 환경, 평화, 분배, 차별금지, 자아실현 등을 우선시하는 탈물질주의에 경도되어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은 당장의 정치적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아야 하는 인식은 아니다. 그리고 나는 이런 상황인식에는 정말 동의하기 어렵다.


어쩌면, '그 이전 세대와 비교한다면'이라는 관용어구가 그의 모든 주장을 용서해줄 지도 모른다. 그의 조심스러움은 크나큰 장점이다. 그래서 노무현 정권을 높게 평가하진 않으면서도, '한국 현대사를 돌이켜본다면 노무현만한 사람이 대통령이 된 것도 다행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하는 그의 자세에 (그 말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나는 경의를 표한다. 하지만 '절대적 기준'이란 것도 있는 것이다. 김선일씨 피살 사건 때 보여준 한국인의 태도는 그들이 '인권'이란 단어에 대해서 아는 것이 철자법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포스트 386세대니, 20대니 하는 사람들도 그 점에서 세계평균보다는 한국평균을 따르고 있음을 증명했다. 그들은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마치 화투장을 집어던지듯 가볍게 내던져 버렸다는 사실엔 주목하지 않았고, 테러리스트들에 대해서만 분노했다. 이라크에 특전사를 보내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 중엔 20대도 많았을 것이다. 송호근 교수식으로 정의한다면 포스트 386세대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그위 세대들은 포탈사이트 리플을 그렇게 열심히 달지는 않으니까.


신기하게도 송호근은 포스트 386세대의 특징이 이렇기 때문에, 한국 정치에 큰 분란이 일어날 것처럼 말한다. 그의 '세대에 대한 우려'가 나에겐 '세대에 대한 극찬'이 되는 것이다. 현재 한국사회의 이념갈등이 심하고, 그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어떠한 정책적인 기제도 없다는 그의 판단, 그것이 한국사회의 큰 문제라는 그의 인식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그 원인이 세대의 분화에 있다는 그의 진단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가 보는 세대는 내가 보는 세대와는 전혀 관련이 없기 때문에, 나는 그가 논리적 정합성이 떨어진다기보다는 현실파악에 실패한 정치평론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그의 말을 절반만 신뢰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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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1 상세보기
강풀 지음 | 문학세계사 펴냄
1,000만 명의 누리꾼의 감동과 격려로 만들어진 광주민주화운동 이야기! 한국 만화계의 새로운 나침반, 강풀의 광주민주화운동 이야기, 만화 『26년』 제1권. 인터넷 만화의 모든 기록을 바꾸고 우리 시대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불리게 된 저자의 작품으로,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었던 남자와 시민군의 아들, 딸이 그로부터 26년이 흐른 후에 모여 법이 심판하지 못한 당시의 최고책임자를 처벌한다는 내용의 팩션 만화다



<26년>은 강풀만화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강풀의 나머지 작품들은 보기는 봤으나 취향에 그리 맞지 않았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내가 그전까지 강풀을 싫어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이유는 사람에 따라서는 그를 좋아할 이유가 될 수도 있다.)


첫째, 강풀만화는 감정을 증폭시키는 것을 장기로 한다. 강풀은 스크롤을 가장 잘 이해하는 만화가이다. 스크롤을 내리면서 독자의 감정은 점점 증폭된다. 인터넷 소설로 비유하자면, 중요한 대사가 나올 때엔 대사 하나 하나 사이의 간격을 넓게 배치하여 스크롤을 한참 내려야 다음 대사가 나오게 하는 그런 방식을, 강풀은 만화에 구현한다. 그 결과 독자들은 그가 의도한 감정선을 그대로 따라가게 된다.


하지만 가령 <순정만화>의 권하경-강숙 커플의 경우처럼, 딱히 별다른 관계도 없는데도 작가가 의도적으로 감정을 증폭시키려고 화면을 배치하고 있으면,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짜증이 나기 마련이다. 외려 감정이입에 방해가 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순정만화>에 감정이입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둘째, 강풀만화는 달짝지근한 휴머니즘이 지나치다. 어떤 케릭터도 악인으로 묘사하지 않고, 나름의 내러티브를 가진 사람으로 만들려다 보니 스토리에 무리가 온다. 가령 <바보>에 나오는 단란주점을 생각해 보자. 나는 단란주점을 관리하는 '어깨'가 로맨티스트라는 설정까지는 이해할 수가 있다. 하지만 여종업원에게 누드 사진 있으니 떠날 생각 말라고 협박하던 단란주점 사장님이 실은 그 여종업원을 좋아했고, 그가 말한 사진이란 것도 누드 사진이 아니라 언젠가 서울 타워 앞에서 찍은 사진이라는 식의 애틋한(?) 설정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 인물은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설령 있다 하더라도 자랑스럽게(?) 묘사할 필요도 없다. 나는 룸싸롱 한복판에서 인간적 고뇌를 느끼는 사람을 싫어한다. 일단은 룸싸롱을 안 가야 고뇌고 뭐고 맥락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바보>에 감정이입하는 데에도 실패하고 말았다. (<바보>에 대해서는 <웰컴 투 동막골>과 묶어서 '바보의 판타지'라는 별도의 글로 비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런 단점들이 <26년>에서는 장점으로 역전된다. 이 만화는 광주학살의 주역인 전두환을 죽이고 싶다는 매우 단순명쾌한 욕망에 기초해 있다. 이 욕망은 한때는 세대의 공통체험과 같은 것이었다. 가령 386세대를 정의하는 50대 사회학자 송호근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현정권이 배양한 개혁 의지의 수원지는 광주민주항쟁이다. 기성세대에게 한국전쟁의 상처가 있듯이, 현정권에게는 5.18민주항쟁이 있었다. 그 기저를 알지 못하면 현재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현정권에게는 광주사태와 같은 비극을 자행한 군부정치, 독재, 폭력적 국가기구, 그것을 지원하는 권력 실세들이 적으로 인식된다. 기성세대는 다음과 같이 물을 것이다. '너희들이 전쟁을 아느냐.'고. 그것은 우문이다. 젊은 세대에게 전쟁은 추상적 이미지로 남아 있지만, 5.18 민주항쟁은 너무나 생생한 체험으로 육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전쟁에서 몇 명이 죽었는지 아느냐.'고 묻는 기성세대가 있다면 그 또한 어리석다. 광주민주항쟁에서 죽은 500여 명의 시민군은 한국전쟁에서 목숨을 잃었거나 다친 2백만 명보다 더 무겁고 더 충격적인 기억으로 인화되기 때문이다. 현정권의 멘탈리티 내부에는 광주민주항쟁에 대한 속죄의식이 각인되어 있다. 그것은 청년 시절의 순박했던 의식을 느닷없이 후벼 파서 무엇으로도 사면될 수 없는 원죄의식을 마음 한가운데 심어놓았다. 386세대가 대학생활을 시작할때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최초의 필독서로 주어졌다. 그것은 광주에 잠입해서 살육 현장을 육안으로 목격한 작가의 르포르타주였다. 그 죽음을 넘지 않고는, 그 어둠에 젖어들어 죽임의 이유를 물어보지 않고는 386세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여명을 기다리는 것은 이들에게 사치였다...


그러나 이 세대의 공통체험은, 다음 세대에게는 망각되었다. <26년>의 정치적 의도는 물론 그 망각에 대한 거부이며, 공통체험을 좀더 젊은 세대로 확장하자는 것이다. 전두환에 대한 암살계획이라는 설정은 전적으로 젊은 세대를 위한 것이다. 국가 권력, 조직의 거대함에 짓눌려 같은 방식으로 이념과 조직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던 30대중반에서 40대중반의 세대와는 달리, 그 아래 세대에게는 즉각적이고 개인적인 복수라는 방식이 훨씬 더 윤리적으로, 아니 감각적으로 와닿는다.


그래서 이 만화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다. 전두환을 죽이겠다는 욕망을 천명했다면, 그것도 젊은이들에게 와닿는 방식으로 천명했다면, 이제는 그 욕망의 정당함을 설득력있게 증명하는 것이 이 만화의 목표가 된다. 그래야 이 만화가 품고 있는 정치적인 의도가 완성된다. 하지만 이 만화의 정치적인 의도는 그 자체로 비정치적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전두환을 벌함에 있어, 군부독재 세력을 벌한다, 그러므로 한나라당을 벌한다, 와 같은 정치적인 방식을 사용하지 않고, 테러라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 결과, 20대는 전두환을 싫어하는 데에는 기꺼이 동의할 수 있겠지만, 가령 '한나라당의 이명박'이 대선후보로 나왔을 때 그를 지지하는 것이 전두환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 (사실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  


아무튼 이 목표를 완수함에 있어 강풀만화의 특성이 좋은 영향을 미친다. 광주에서 사살당한 시민군을 부모로 둔, 자녀가 26년 동안 복수심을 키워나가는 장면은 '스크롤의 묘미'를 통해 아무리 감정을 증폭시켜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 증폭은 윤리적으로도 정당하고, 스토리의 완결성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만화의 주제가 단지 감상적인 복수로만 치닫는다면, 그 정치적 공정성은 심하게 훼손되지 않겠는가? 여기서 강풀만화의 다른 특징이 다시 긍정적인 영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단란주점 주인을 로맨티스트로 둔갑시킨, '열외 1명없는 로맨티스트'로 남자들을 서술한 <바보>의 휴머니즘은 분명 오바다. 하지만 과거사 문제를 얘기하기 위해선 우리는 분명 '내재적 접근법'을 따라야 할 이유가 있다. <26년>은 시민군을 사살한 계엄군으로써 전두환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는 재벌 회장, 같이 시민군을 사살한 계엄군이지만 그 때의 사건을 역사화시키고 정당화함으로써 전두환에 대한 (이념적?) 충성을 감행하게 되는 경호실장, 우연히 문익환 목사를 만나서 인간적 감화를 받고 안기부 고문실에서 나와 '빨갱이'들을 잡는 일에만 열중했던 민완형사 최계장 등의 이야기를 설득력있게 풀어냄으로써 과거사 문제를 극복하는 방식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제공한다. 즉, 과거의 아픔은 잘못된 부분을 쳐내거나, 단순히 덮어두는 방식으로 대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전자를 열린우리당 주장 중 극단적인 부분으로, 후자를 한나라당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이런 부분을 통해 <26년>의 주제의식은 오히려 열린우리당의 과거사 진상규명법보다 높은 위치에 올라서 있다.


이리하여 <26년>은 강풀만화의 특성을 그대로 담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나에게도 전혀 불편하지 않은, 유일한 만화가 되었다. 그러나 이 만화의 대중적 성공은 또한 더 이상 '독재세력 vs 민주화운동세력'이라는 대립구도가 현실정치판에서 명증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이 만화가 명백히 '한나라당 비판, 열린우리당 지지'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생각되었다면, (하나의 텍스트가 이렇게 이해되는 것은 그 텍스트의 내용보다는 주변의 맥락의 영향을 더 많이 받기 마련인데) 일개 정파의 프로파간다쯤으로 치부되어 버렸을 지도 모른다. 한나라당의 윤리적 부당성과 열린우리당의 윤리적 정당성이 흐릿해지는 지점에서 <26년>은 태어났고, 성공을 구가했던 것이다.  


정치적인 열망을, 비정치적으로 해소하는 방식에서 <26년>은 탁월하다. 수단적으로 탁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만화에 경의를 표하면서, 동시에 한국 정치의 실패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누구도 정치적인 문제를 정치적으로 풀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상황 인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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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만, 군인, 병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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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도 한번 언급한 적이 있지만, 온게임넷 스타리그에는 '가을의 전설'이라는 징크스가 있다. 그래서 많은 스타리그팬들이 가을과 프로토스에 대해서 설왕설래하지만, 그렇다고 그들 중에서 '가을의 전설'이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이나 프로토스라는 종족의 내적 본질과 관련이 있다고 믿는 이는 없을 것이다. 가을이면 프로토스가 우승하더라는 아름다운(?) 전설은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과는 무관한, 스타리그의 서사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서사는 단지 모니터 안의 점들의 조합에 불과한 유닛들을 내 삶의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는 구조다. 그렇다면 매니아들로부터는 꾸준히 비판을 받는 온게임넷 엄재경 해설위원의 필요성도 밝혀진 셈이다. 온게임넷 해설진은 (그들이 게임에 대한 분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지만, 타게임 방송국에 비해) 서사를 만드는데 치중하고 있다.


상업적인 면에서 본다면 그런 시도는 매우 긍정적이다. 가령 강민의 별명이 몽상가이며 박정석의 별명이 물량토스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2003년 말에야 스타크래프트를 처음 접한 내가 스타리그를 즐겁게 보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게이머의 특성과 업적에 따라 스타리그를 이해하는 것이, 종족 밸런스/맵 밸런스/유닛간의 상성관계를 숙지한 후 게임 실력을 일정한 레벨로 올려가면서 스타리그를 이해하는 과정보다 훨씬 쉽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스타리그 뿐 아니라 모든 '관람하는 스포츠'에는 나같은 일반적인 시청자가 있는가 하면 그 경기를 비교적 차가운 잣대로 분석하는 평론가 혹은 매니아들이 있다.


그러나 스포츠에서 성립하는 일이 정치에선 성립하지 않는다. 한국정치에선 서사와 구별되는 평론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없는 건 아니지만, 모든 관람자들이 서사가 평론이라고 믿고 있는 이곳에서 평론은 외계어보다 더 동떨어진 무력한 목소리로 되기 십상이다. 많은 종이신문들은 홍진호는 폭풍저그고, 조용호는 목동저그라고 규정하는 바로 그 수준으로 정치인들을 케릭터화하고, 그것으로 정치를 설명하고, 정치의 문제를 해명한다. 그들이 평소에 가장 큰 관심을 보이는 것은 대통령의 품성인데, 어느 정도인가 하면 바로 그것때문에 이 나라의 모든 문제가 발생했다고 주장할 정도다. 그런데 그들은 이런 식의 총체적인 인물평가는 서슴없이 내리면서도, 오히려 개별적인 사건에 있어서는 이 사건은 이래서 옳다. 혹은 이래서 그르다는 판단을 개진하기 보다 '이번 사건으로 이 케릭터와 저 케릭터가 싸우게 됐는데, 두 케릭터가 이런 식으로 상이하니 마찰이 있을 것 같다.'는 식으로 말하기를 좋아한다. sylent 님은 파이터포럼의 옐로우저널리즘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 정도의 기사는 신문 정치면에선 언제나 나오는 것들이다. 그들이 개별적인 사건에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경우는, 그 사건의 행위자가 대통령이거나, 북한이거나, 노조일 때 뿐인 것 같다. 그것은 그들의 평가가 '판단'이 아니라 '반응'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현실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내리는 정치인들에 대한 분석은 물론 중요한 일일 수 있다. 가령 <한미FTA 폭주를 막아라>의 저자인 우석훈 박사도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미국형 FTA의 협상 테이블에 서게 된 것인가?"라고 자문한 후 "이건 경제학적 분석대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이 필요한 대목"이라고 한탄한다. 그러나 그런 말은 이미 사건에 대한 계산은 모두 끝내놓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인물에 대한 설명이 사건에 대한 설명을 대체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건이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을 때에, 그 사건을 일으킨 인물에 대한 분석이 시작될 수 있는 것일 게다. 그리고 그때에 그 분석은 종이신문의 두께로 감당할 수 있는 분량은 결코 아니다. 사실 우석훈 박사도 자신의 책에서 그 '심리학적 분석'을 시도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종이신문들은 정치인들의 뇌구조를 조악하게 그려놓고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들의 심리학적 분석은 프로이트나 융이 아니라 (강준만의 말을 따르자면) '시기심-질투 결정론'에 근거하고 있다. 대통령과 386세대의 시기와 질투, 약자들의 원한이 이 나라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것이 종이신문과 그들을 좌지우지하는 이들의 세계인식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스타리그의 서사가 재미있을 것이다. 엄재경 해설위원의 출신(?)이 증명하듯, 스타리그의 서사는 소년만화를 모방하고 있다. 그리고 소년만화의 서사는 숭고와 과장 사이 그 어딘가에 있다. 과장은 기껏해야 우스꽝스러워질 뿐이지만, 도대체 누가 누구를 시기하고 있는지를 두고 서로 뿔잡기 싸움을 할 수밖에 없는 '시기심-질투 결정론'은 비생산적이면서도 끝없이 싸움을 확대시킨다. 사실 정치에 대한 우리의 담화는 노상 이러한 싸움의 과정이다.


정치평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면, 아마도 이러한 현실에 대한 우려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 때문에, 도대체 정치평론이라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다시 스포츠 평론에 비유하자면, 대중에게 영향을 미친 쓸만한 정치평론은 결국에는 팬클럽의 자장에서 출현해야만 했다. 그것이 중요한 순간 그 평론들의 발목을 잡았던, 크나큰 한계이다. 하지만 애초에 팬클럽의 바깥에서는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어떠한 정치평론도 불가능했던 데에야, 누가 그들을 욕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정치평론의 문제는 한번쯤은 '도대체 어떻게 정치평론이 가능한가?'라는 인문학적인 질문으로 돌아와야 하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정치현상에서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지, 정치평론들은 사람들에게 무슨 영향을 미쳐왔는지, 그리하여 우리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해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하는지, 그 영향은 긍정적인 것인지 아닌지 등을 해명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정치평론 역시 비생산적인 싸움의 재료로 소모되어 가는 것을 막을 수 없는 지도 모른다. 철학이 아무 것도 보살펴주지 않는 곳에서 모든 담론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정립하면서 자신의 활동을 시작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이 정치평론의 어려움이자 매력이다. 그리고 다시 정치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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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소! 카이만은 병장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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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은 <폭력과 상스러움>에서 학자라면 하나의 주장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 주장이 실제로 유통되는 방식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강준만은 명시적으로 그런 말을 한 적은 없더라도, 훨씬 더 이전부터 줄기차게 자신의 비평활동으로 그러한 명제를 웅변해 왔다. 내가 그들밖에 모르는 걸까? 하지만 내가 아는 한에선 한국 사회에서 유통되는 담론에 주목해서 그런 말을 내뱉은 사람들은 그들과 그들의 자장 안에 있는 이들 -학적으로는 아닐지라도 정치비평 활동 면에 있어서는 그렇다고 볼 수 있는- 밖에 없다. 그런 그들을 보고 나처럼 온순한 청년도 자라났고 기타 여러 시끄러운 아이들도 자라났다.

가령 비교적 최근에 있었던(2004년 말? 내가 입대하기 직전) 진중권의 이영훈 비판의 요지 역시 "학적 맥락이 정치적 맥락에 부적절하게 개입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의 오래된 견해의 리바이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저자가 자신의 주장이 유통되는 맥락에 책임질 의무가 있다는 견해에는 동의하지만, 그것이 일종의 '무한책임주의'로 해석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고 본다. 그리고 진중권이 이영훈에게 요구한 것은 '무한책임주의'에 가깝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 견해의 위험성은 진중권 스스로가 실천적으로 증명한 바 있는데, 그의 열린우리당 비판은 종종 조선일보에 인용된다는 이유로 노무현 지지자들의 원성을 샀던 것이다. "조선일보에 결코 인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일부 노무현 지지자들의 무한책임주의를 따르자면, 우리는 (글쓴이가 어느 정도 유명세가 있고, 조선일보가 부지런하다는 전제 하에) 조선일보에 인용되지 않기 위해 결코 열린우리당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

이런 종류의 규율과 관련된 사례 중 제일 흥미로운 것은 깜악귀님의 경우다. 깜악귀라는 아이디를 쓰는 필자가 서울대 학내 웹진에서 386세대에 대한 비판글을 쓰자, 그것을 조선일보에서 인용해버렸던 것이다. 깜악귀는 "멋지다, 내 학벌, 두렵다, 내 학벌!"이라는 글을 통해 그 인용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나는 깜악귀님의 당혹스러운 심정을 이해한다. 이건 글쓴이가 유명해서 실린 사례도 아니었고, 단지 '어느 서울대생의 386세대 비판'이라는 컨셉에 그가 동원된 사례였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해도 그의 반응은 조선일보에 인용된 것이 마치 그의 잘못인 것처럼 선언하는 것처럼 보였다. 막연한 죄책감이 윤리적 판단을 압도해 버린 것이다. 물론 욕을 먹지 않기 위해서라면 그보다 더 현명한 행동이 없었을 것이다.

만일 깜악귀님이 마지막에 받아들였던 규율이 하나의 윤리라면, 그것은 우리의 행위의 자유를 지나치게 구속한다. 아마 저자가 적절한 수준에서 맥락에 책임을 지는 방식이 있을 것이고 (가령 신문에 정정보도를 신청하고, 다른 루트로 자신의 글의 원래 의도를 해명한다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곡'되는 부분은 도저히 저자 개인이 책임질 수 없는 '증상'에 해당할 것이다. '증상'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요구는 실현불가능할 뿐더러 그 자체가 병리적이다.

물론 그 '증상'도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증상'을 어찌할 수 없다면 '분석' 이외의 또 어떤 대응방식이 있을까. 내 이름을 둘러싼 증상-이것은 '나의 증상'과는 또 다른 것인데-까지 분석하는 이를 보고 싶다는 내 욕망은 어찌된 것일까? 이런 내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변태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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