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many cuts should I rep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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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윤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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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에 해당되는 글 12건

  1. 2008/04/27
    [씨네21/유토디토] 운동 망해도, 나 안 망한다 (3)
  2. 2008/03/12
    [경향신문] ‘20대 비례대표’ 찬성않는 이유 (1)
  3. 2008/03/09
    '20대 비례대표'에 찬성하지 않는 이유 (21)
  4. 2008/03/03
    [대학내일] 새내기들을 위하여 (4)
  5. 2008/02/14
    왜 학생 운동 조직은 20대로부터 멀어졌나? (10)
  6. 2008/02/01
    "엄마의 늪"? 먼저 경제적 문제로 접근해 보자. (16)
  7. 2008/01/24
    '일반과목 영어수업'론과 교육정책의 기조에 대해 (12)
  8. 2007/12/04
    '88만원 세대', 그리고 파시즘 (10)
  9. 2007/11/12
    [프레시안] 이회창은 왜 돌아왔는가? (14)
  10. 2007/09/29
    세대론과 X세대 키보드 워리어들 (32)

총선 기간 동안 진보신당의 임시 당직자가 되어야 했던 어느 분의 얘기다. “할머니와 통화를 하는데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절대로 그 당에 얽혀들지 마라. 그 당에는 희망이 없어요, 희망이. 할머니 말 허투루 듣지 말고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뭐라 대답할 말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분은 정규직 회사원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안정적인 소득을 올리고 있는 사람이다. 무급으로 일하는 동안 손해가 없진 않겠지만, 잠깐 선거운동에 참여했다고 미래에 일감이 줄어들 상황도 아니다. 그런데도 ‘희망이 없는 당’에 얽혀들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희망이 없는 당에 얽혀들면, 내 인생도 희망이 없어지나?


시절이 좋아져서 무슨 운동에 잘못 참여한다는 이유만으로 끌려갈 상황이 아닌데도, 사람들은 운동을 두려워한다. 하긴 자신의 정치적 지향과 상관없이 ‘될 사람’을 찍는 쪽이 마음에 편하다는 사람도 많은 나라이니 오죽할까. 다양성에 대한 정치적인 억압은 사라졌을지 몰라도 문화적인 억압은 여전하다. 문제는 실제로 정치적 탄압을 경험한 기성세대뿐 아니라, 젊은 세대에서도 이러한 억압의 기제가 강고하다는 데 있다. 언제나 우리가 희망의 근거를 무언가로부터 자유로운 ‘다음 세대’로부터 찾아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다.


물론 그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들도 그렇게 교육받았고, 그렇게 생각할 만한 환경에 처해 있으니까. 온 가족이 힘을 합쳐 아이를 지원해주는 무한경쟁의 청소년기를 거친 뒤, ‘좋은 시절’과는 거리가 먼 대학으로 들어온다. 학점에 토익에 기업의 인턴 경험까지 관리해도 취직이 안 되는 이들에게 대학 생활은 그저 고통스러웠던 고등학교 시절의 연장일 뿐이다. 남들 사는 것처럼 안 살면 곧바로 인생의 낙오자가 되는 것처럼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래서 <88만원 세대>에서 그랬던 것처럼 “토익책을 덮고 짱돌을 던져라”고 주문하기엔 무리가 있다. 영어가 필요없는 직장에서도 토익점수 900을 요구하는 한국사회에서 토익책을 덮으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한경쟁 속에서 연대성을 체험해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 짱돌을 들라고 말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들은 짱돌이 무엇인지는 알까. 혼자서 우두커니 골목길에서 짱돌을 던질 수도 없는데.


하지만 토익책을 덮지 않고도 정치적 행동은 할 수 있다. 아무리 인생이 팍팍해도 여가시간을 전혀 즐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만일 여가시간이 전혀 없는 사람이 있다면, 어찌 그에게 정치적 행동을 권유하겠는가). 드라마도 보고, 애니메이션도 보고, 만화책도 본다. 약간의 정치적 관심을 가지고, 어떤 활동의 지지자가 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일 리 없다.


당연히 비용이 조금은 든다. 나는 진보신당에 입당하면서 매달 당비 1만원과 비정규직 연대기금 1만원을 내기로 했고, 창당특별기금 10만원을 별도로 냈다. 창당특별기금은 선택 사항이라 하여 친구들에게 입당을 권유할 때는 내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국고보조금도 전혀 받지 못하는 이 신생정당이 자금이 풍족할 리가 없는지라 중앙당에서도 지역구 선본에서도 특별당비를 부탁하는 연락이 왔지만, 차마 그것까지 내지는 못했다. 시간과 체력이 허용하는 만큼의 미약한 자원봉사를 했고, 주소록에 저장되어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정당투표 지지 부탁 문자를 보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쓰지는 않았다. 그리고 사실은 이만큼 하지 않아도 가능한 것이 정당 참여다.


요즈음에 ‘먹히는’ 언어로 바꾸어보자면, 운동은 재테크처럼 생각해도 된다. 원금 보전을 하기 힘들 만큼 리스크가 크지만, 잘될 경우 많은 것을 바꾸어낼 수 있는 그런 재테크 말이다. 다른 투자가 그렇듯 운동에도 장기투자가 필요하다. 미국 주식의 역사를 보면 짧은 시간 동안 폭발적으로 주식이 오른다. 점쟁이가 아닌 이상 그 기간을 알 수 없으니, 확률적으로 볼 때 그 기간에 주식을 보유하여 이득을 챙긴 사람은 장기투자자들뿐이었다고 한다. 운동 역시 그렇다. 대개의 운동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한 운동에 힘을 빼고 환멸을 느끼며 그만둬버린다면, 단타매매에 올인했다가 손을 털고 사라지는 어리석은 개미투자자들과 비슷한 꼴이 되는 것이다.


운동이 망하면 참여자도 망해야 한다고 믿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순혈주의 운동권들이고, 다른 하나는 냉소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운동이 망했는데도 참여자들이 살아남아 다른 운동으로 갈아타는 꼴을 보기 싫어한다. 제 살 궁리 찾아가면서 적당히 운동에 힘을 보태는 것은 모순적인 행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이런 모순적인(?) 행위의 결집 속에서만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운동 망해도, 나 안 망한다. 그런데 뭐가 두렵겠는가.

글 : 한윤형 (인터넷 논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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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블로그에 썼던 글을 [경향신문 블로그 속으로]에 싣기 위해 수정 편집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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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라는 말이 통용되는 것은 지금 20대의 대다수가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복지제도가 빈약한 한국의 실정이 이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88만원 세대’의 문제의식을 총선에 반영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20대 비례대표 후보’를 정하자는 얘기가 나온다. 민주노동당은 4년 전에도 비례대표 후보였던 20대 여성 이주희를 전면에 내세웠고 진보신당 역시 ‘88만원 세대’의 대표자를 고민해보겠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20대 비례대표’ 담론에 찬성하기 어렵다.


첫째, 명분이 없다. 20대 아무개가 당장 국회의원이 되더라도 적어도 50대 누구보다는 나을 거라는 우석훈 박사의 주장에 특별히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당장에 20대 누군가가 국회의원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20대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사회 전체가 인식하고 그 문제에 대한 대안을 찾는 일이다. 20대가 현재의 자신들 처지를 잘 알고 있고, 그동안 모종의 운동을 통해 그 사실을 알리려고 했다면, 그들은 충분히 자신들을 대의할 역량이 있음을 사회에 증명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그들은 윗세대가 쓴 책을 통해 이 문제를 알게 됐고 이제 겨우 움직이기 시작했다. 20대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 모색은 20대의 정치적 무능함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 무능함이 그들만의 책임은 아니지만, 무능함을 그대로 둔 채 사태를 해결할 수는 없다.


둘째, 운동 자체의 정치적 효과 역시 희박하다. 정치공학적으로 볼 때 20대 비례대표를 배정하는 정당이라도 당선권에서 거리가 먼 순번에 후보를 배정하게 될 것이다. 20대 국회의원이 탄생할 가능성이 거의 없단 뜻이다. 그렇다면 20대에 대한 투표 독려 효과는 있을까? 20대 비례대표가 문제해결 의지를 과대하게 포장하는 일종의 ‘쇼’라는 사실은 20대들의 정치적 감각으로도 파악될 수 있는 일이고, 그런 쇼에 혹할 만큼 20대의 정치적 냉소주의가 얕은 것도 아니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셋째, 이 운동의 목표가 실현된다 하더라도 별다른 의미가 없다. 개혁당과 열린우리당에서 활동했던 윤선희나 민주노동당 이주희의 사례로 볼 수 있듯, 젊은 정치인의 등장은 젊은이의 권익을 대변하는 것과는 크게 상관없고 ‘젊은 여성’의 이미지를 감각적으로 덧씌우는 정치세력의 홍보전략과 크나큰 상관이 있었다. 자신들의 역량없이 홍보전략에 의해 간택된 이들 정치인들이 주체적인 개인으로서 발언을 하는 것을 나는 들은 적이 없다. 그런 식의 얼굴마담을 세워 놓고 문제해결의 단초를 발견했다고 말한다면 오히려 문제를 은폐하는 것이다.


‘88만원 세대’의 우울한 통찰의 핵심은 경제구조상 지금의 20대는 30대가 되더라도 현재의 30대처럼 살지는 못할 거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고민은 당장에 어떤 20대 정치인을 만들 수 있을까라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가장 정치적인 세대였던 386 아래 세대들이 정치적인 힘을 결집하지 못하는 현실을 자각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20대 비례대표라는 선정적 제안보다는 지금의 20대들이 정당활동에 참여했을 때 밑바닥으로부터 차근차근 올라올 수 있는 제도적 지원이나 문화적 변혁을 요구해야 한다. 십년쯤 세월이 지났을 때 지금의 20대들이 정당의 틀 안에서 경험을 축적하여 일정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면, 그때는 이 세대에서 이 세대와 그 아랫세대의 문제에 대한 해결능력을 갖춘 비례대표가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과정이 ‘20대 비례대표’라는 대안보다 더 어려워 보이지만, 문제해결은 언제나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한윤형 yhhan.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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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신당연대회의 당원게시판에도 올렸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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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라는 말이 널리 통용되게 된 것은 지금의 20대들의 대다수가 정규직에 취업하지 못하는 현실이 엄연히 존재함을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보수적인 종이신문들조차 그 사실을 부인하지 못한다. 다만 그들은 이 문제를 (반기업적인 좌파정부로 인한?) 경기침체 때문에 일어난 일시적인 현상으로 보고 싶어할 뿐이다. 하지만 '고용없는 성장'은 이 시대의 보편적인 문제이며, 지금의 20대들은 앞으로도 정규직으로 진입하기 힘들 것이라는 것이 <88만원 세대>의 우울한 전망이다. 사회복지제도가 빈약한 한국의 실정에서 지금의 20대가 받게 될 고난의 크기는 물론 다른 선진국의 젊은이들의 그것에 비할 바는 아니다.


<88만원 세대>의 문제의식을 총선에서 반영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20대 비례대표 후보'를 정하자는 흐름이 있는 모양이다. 민주노동당은 예의 이주희를 앞세워서 흐름에 편승하려는 모양이고 대통합민주신당의 경우도 무언가 조치를 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봤자 양쪽 모두 당선권에서 거리가 먼 순번에 후보를 배정하게 될 것 같다. 20대 비례대표에 관련된 운동을 전개하려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고 이들에게 매우 미안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나는 이런 방식의 정치적 행동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럴 리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진보신당이 이러한 흐름에 편승하는 것에도 찬성하지 않는다.


20대 누구가 국회의원이 되더라도 적어도 50대 누군가보다는 나을 거라는 우석훈의 주장에 특별히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당장에 20대 누군가가 국회의원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될 수 없다. 20대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사회가 인식하고 그 문제에 대한 대안을 찾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20대가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여성, 비정규직, 환경 등에 그렇게 하는 것처럼 부문운동에 대한 안배를 할 수 없는 것은 20대 중에서 20대 문제에 대한 운동세력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지금 막 생겨나고 있는 운동단체들에게 비례대표직을 제의할 것인가? 20대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의 모색은 20대의 정치적 무능함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 무능함이 그들만의 책임은 아니지만, 먹을 수도 없는 음식을 먹겠다고 달려드는 꼴은 우습다. 20대 비례대표가 문제해결의 의지를 과대하게 포장하는 일종의 '쇼'라는 사실은 20대들의 정치적 감각으로도 파악될 수 있는 일이고, 그런 쇼에 혹할 만큼 20대의 정치적 냉소주의가 얕은 것도 아니다. 정치공학적으로 따져도 이건 무의미한 정치적 기동이다.


과거 개혁당의 윤선희나 민주노동당의 이주희의 사례로 볼 수 있듯, 젊은 정치인(?)의 등장은 젊은이의 권익을 대변하는 것과는 크게 상관없고 '젊은 여성'의 이미지를 감각적으로 덧씌우는 정치세력의 홍보전략과 크나큰 상관이 있다. 더욱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이들은 동세대의 유권자가 아니라 젊은 여성에 대해 우호적인 중년의 남성 유권자들에게 어필한다. 이들이 주체적인 개인으로서 정치적인 발언을 하는 것을 나는 들은 적이 없다. 특정한 정치세력의 얼굴마담을 세워 놓고 문제해결의 단초를 발견했다고 말한다면 이건 아예 문제를 은폐하는 꼴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는 20대 운동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88만원 세대'의 통찰의 핵심은 지금의 20대는 30대가 되더라도 현재의 30대처럼 살지는 못할 거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88만원 세대'가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한 세대론은 아니다. 따라서 진보신당이 고민해야 할 지점은 당장에 어떤 20대 정치인을 만들 수 있을까라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물론 만들 역량도 없다.) 진보신당의 활동가들의 대다수를 차지할 386세대 아랫 세대들이 정당에 참여했을 때 밑바닥으로부터 올라올 수 있는 제도적 지원이나 문화적 변혁이 필요하다. 십 년쯤 세월이 지났을 때 지금의 20대들이 정당의 밑바닥에서부터 경험을 축적하여 일정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면, 그때는 그 세대에서 그 세대와 그 아랫세대의 문제에 대한 해결능력을 갖춘 비례대표가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자연스러운 성장을 유도하는 것이 그냥 20대 비례대표를 책정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인 건 사실이지만,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


총선에서의 생존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할 진보신당으로서는 지금부터 바로 이 프로젝트에 착수할 수는 없다. 88만원 세대의 문제에 대해서는 진보신당의 경제적 비전이 그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주장을 통해 대응하는 수밖에 없다. (사실 그것이 어떤 방식의 쇼보다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잘 먹힐 방법이기도 하다.) 후에 만약 진보신당이 의석도 얻고 국고보조금도 받게 된다면, 우리는 보좌관이나 대의원 같은 직책에서 후386세대 활동가의 정치력을 향상시키는 방안에 대해 고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반드시 그러한 고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지금의 한국 좌파들은 단지 한 세대의 집단적 정체성에 기대고 있고, 이것은 장기적인 정당의 발전을 위해서 바람직하지 못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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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이란 소재에 맞춰서 글을 써달라고 해서 쓰긴 썼는데,
역시 난 이런 글은 별로 안 어울리는 듯.
어쨌든 개강날 아침입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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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과 새내기 대학생은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 있었다. 고3때는 공부하느라, 새내기는 노느라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격언(?)이건만, 요즈음의 세태와는 너무나도 다르다. 입시지옥을 뚫고 도착한 곳은 낭만의 공간이 아니라 취업 전쟁에 필요한 ‘스펙’을 높이느라 무한경쟁을 펼쳐야 하는 또 다른 지옥이다.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너무 많은 사람들이 대학에 온다. 80%가 넘는 대학진학률은 그 자체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어떤 선진국에서는 지식이 많이 필요하지 않은 직종의 경우 고졸 학력만으로도 충분히 고용이 되기 때문에 굳이 대학을 갈 필요가 없지만, 학벌사회에서 대학을 포기한다는 건 그 자체로 차별의 근거가 된다. 그래서 아무리 힘들어도 울며 겨자먹기로 다닐 수밖에 없는데, 설상가상으로 등록금은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다. 신입생들은 내가 입학했을 때보다 두 배 이상 많은 등록금을 학교에 납부한다. 한해 등록금 1천만원 시대. 그런데도 정부 보증 학자금 대출의 금리는 시중금리와도 별 차이가 없다. 대학생들이 취업에 목매는 현실을 비난할 수 없는 이유다. 앞으로도 이런 사정이 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대학생활에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윤리적인 행위, 혹은 어떤 종류의 사치가 되어 버렸다.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



급기야 지난해엔 ‘88만원 세대’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고용없는 성장’의 시대에 20대의 대다수는 평생 비정규직으로 살아갈 운명에 놓여 있다는 주장이었다. 암울함에 암울함이 더해지는 느낌이지만, 어쩌면 바로 그 지점에서 희망이 보이는 것일 터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경제구조는 몰개성화된 우등생들을 정규직으로 고용해 줄만한 상황이 아니다. 취업 전쟁의 요건이 갈수록 까다로워지는 이유는 기업이 슈퍼맨을 원해서가 아니라 일자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의 인격과 개성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으로도’ 현명한 일일 수가 있다. 모두가 가판대에 제 영혼을 진열해도 악마가 거들떠보지 않는 시대엔, 영혼을 가슴 속에 감춰두는 이가 오래 살아남는 법이다.


씀씀이가 평균 수준인데도 용돈이 남지 않는 처지라면 굳이 재테크 책을 봐야 할 필요가 없다. 그 책들은 단지 잠시동안 ‘나는 미래를 열심히 준비하고 있어.’라는 만족감을 주기 위해 소비될 뿐이다. 그 시간에 정말 읽고 싶은 다른 책들을, 혹은 그런 것이 없다면 전공에 관련된 책을 한권이라도 더 읽는 것이 낫다. 토익 공부를 안 할 수는 없지만 거기에만 정신이 팔려 전공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그건 어리석은 일이다. 어차피 우리는 자신의 전공으로 세상과 승부를 볼 수밖에 없다. ‘쓸모’라는 말을 너무 좁게, 근시안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공부의 쓸모라는 것은 원래 돌아서 돌아서 생각하지도 못한 부분에서 오는 것이니까.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마음에 맞는 친구와 만나서 수다를 떠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시간낭비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런 낭비가 없다면 우울함에 젖어드는 시간이 더 길어진다.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는 것도 물론 좋은 일이지만, 언제 어디서나 그렇게 생각하려고 억지로 애쓸 필요는 없다.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하기 위해 언제나 미소지어야 한다는 생각도 버리자. 미소짓는 것이 일의 일부인 사람이라도, 언짢을 때 찡그릴 수 있는 공간을 어딘가에 마련해야 하는 거니까. 그리고 가끔은 서로를 향해 돌아보기. 힘든 것이 나 혼자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이상은 이기는 법이 아니라 견디는 법밖에 알려줄 수 없는 무능한 선배의 어줍잖은 조언이었다.


한윤형 서울대 인문 01 (대학내일 4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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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의 당사자 조직을 고민하는 희망청 포럼에서 발제문으로 쓰였던 글입니다. 포럼은 어제였죠. 발제를 할 때는 중간중간에 사례 설명을 좀 했는데, 글 자체는 건조하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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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쉽지 않은 얘기다. 원인을 찾아야 하는데 자칫하면 ‘탓’ 공방이 되기가 쉽다. 사회구조를 통한 접근이나 20대 자질론 양쪽 다 그렇다. 그래서 여러 가지 측면에서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일단 대한민국 성립 이후 한국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진 방식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미국대사관의 문정관으로 근무하던 그레고리 핸더슨이란 사람은 해방 후 한국 사회의 중앙정치의 과잉현상을 ‘소용돌이의 정치’라고 표현했다. 회사, 조합, 교회, 우애단체 등 시민사회의 성립을 이야기할 수 있는 개인과 국가 간의 중간 단체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그런 구조에서 중앙 정치가 아무런 여과 없이 개인을 대량으로 동원했던 현상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런 중앙 정치는 생활세계의 이슈를 다루는 것은 아니었다. 독재정권이 들어서면서 민주화라는 화두가 사람들의 정치의식을 지배할 때조차 상황은 그러했다. 민주화 이후 사람들은 정치에서 무엇을 논의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지역주의라든가 삼김이라는 상징을 만들게 되었다. 지금의 20대는 그러한 ‘소용돌이의 정치’가 자신의 삶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한 최초의 세대라 볼 수 있다. 어려운 문제는 그것 이외에 다른 종류의 정치가 어떻게 가능하냐는 것이다. 20대뿐 아니라 다른 세대도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은 가지고 있지 않다.


  ‘소용돌이의 정치’의 세계에서 대학생들이 일정한 영역을 차지했던 이유는 쉽게 추론될 수 있다. 대학생이라는 신분 자체가 일종의 특권신분, 엘리트로 받아들여졌고, 비교적 모임을 쉽게 조직할 수 있었다. 그런 대학생들에게 사회가 하나의 역할을 부여했다. 마르크스가 먹고 살만 하고 조직을 쉽게 만들 수 있는 대공장 노동자들에게서 혁명의 희망을 보았던 것과 비슷한 이치다. 이런 대학생들의 역할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여러 가지 요인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념적인 측면에선 80년대 운동권을 지배했던 이념인 NLPDR이 사회의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고, 문화적인 면에서는 20대가 대학생이 되는 비율이 현저하게 높아지면서 엘리트라는 상징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고, 경제적인 접근으로는 ‘고용없는 성장’의 시대가 개막되면서 더 이상 대학이 경쟁의 무풍지대가 아니라 가장 가혹한 경쟁의 장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대학생이 한국 정치의 주역이 되는 시대는 저물어 갔다고 볼 수 있겠는데, 여기서 “중앙정치에 간섭하던 대학생들이 왜 자신들의 문제를 이슈로 하는 정치적 조직을 결성하는데 실패했는가?”라는 질문이 가능해진다.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은 원론적인 차원에선 다시 ‘소용돌이의 정치’라는 개념으로 돌아갈 수 있다. 즉 우리는 중앙정치와 생활세계의 문제가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경험적 학습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대학생들로서는 자신들의 문제가 바로 사회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말해보자. 2000년 이후 소위 ‘등록금 투쟁’이 운동권에서도 이슈로 등장했다. 하지만 운동권들은 이것을 정치문제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대개 운동권 정파들은 그것을 ‘복지 공약’으로 생각했고, 복지 공약으로 학생들의 인심을 얻은 후 총학 집권에 성공하여 우리 정파의 정치 활동을 강화해 나가겠다는 식으로 사고했다. 학생운동이 퇴조하고 있던 그 시점에서 아마도 등록금 문제는 전체 학생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단 하나의 문제였을 것이다. 각 대학에서 공동으로 대응을 하고, 각 학교와 협상하는 수준을 넘어 정부 차원으로 문제를 가져가 학자금 대출 문제 등에 대해서도 이슈를 제기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때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결국 그것은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판단은 어디까지나 사후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경제적인 차원에서 20대 문제라는 것이 제기된 것은 사실상 <88만원 세대>의 출판 이후 부터이기 때문이다. 학생정치조직(학정조)의 쇠퇴기에 학생들은 이념의 시대가 저 멀리 날아감을 아쉬워하거나, 더 이상 학생들이 모여서 무언가를 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해야 했다. 그러한 두 개의 감상 사이에서 학정조는 꾸준히 쇠퇴했다. 외양간이 헐리는 것을 잠자코 보고만 있었는데, 나중에야 그 안에 소가 들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격이다.


  한편으로는 대학교 중심 운동이 가져온 고유한 폐해도 있다. 한참 안티조선 운동을 할 때의 일이다. 처음에는 안티조선 우리모두 사이트 내의 청년우리모두라는 공간에서 20대 청년들이 모였다. 그때는 학생운동이라는 공간에서 만나기 힘든 사람들을 조금씩 만날 수 있었다. 가령 대학교에 가지 못하고 페스트푸드점에서 알바를 하고 있던 청년같은 이들을. 하지만 ‘운동’을 위해서 우리는 대학별로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각 대학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한 대학 안티조선 모임들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운동권과 비운동권이 미묘한 비율로 섞여 있던 그 모임에서, 연세대의 연고전 축제에 은근슬쩍 편승해 안티조선 문화제라는 것을 개최했고, 그 여세(?)를 몰아 전국 대학생 조선일보 반대모임이란 것을 만들고 기자회견을 했다. 그 활동의 효용은 거기서 끝이었다. 아마도 그 활동의 의의는 ‘기자회견을 했다’는 것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 우리는 어떤 사람들은 더 이상 우리 모임에 나오지 않게 되었음을 깨달아야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쉬운 부분이다. 조직력의 동원과 정치적인 공정성이라는 것이 충돌할 수 있는 가치임을 깨닫게 한다.


  학생 운동을 하거나, 학생 신분으로 정치에 관심을 가지다가 정치적 단체에 가입을 하여 활동한 사례에 대해서는 별도의 분석이 필요하다. 비록 전반적인 20대가 그들을 지지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정치현장에서 경력을 쌓고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면 20대들의 구심점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노사모에 참여했던 20대들, 개혁당에 참여했던 20대들, 그리고 민주노동당에 참여했던 20대들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부딪혔던 문제는 제각각이었지만, 기본적으로는 동일했다. 조직에서는 그들을 ‘일꾼’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노사모나 개혁당에 참여했던 대학생들의 경우 오히려 상대적으로 활발한 토론문화를 가졌으나 조직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그보다는 조직을 잘 알았던 학정조 출신의 민주노동당 대학생들의 경우, 조직의 의사에 자신의 생각을 맡기는 경우가 허다했다. 건조하게 말한다면 참여한 20대가 절대적인 숫자로 많지 않기 때문에 윗세대들에게 지분을 요구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인 것 같다. ‘젊은 여성’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는 젊은이들을 대의하는데 활용되는 것이 아니라 중년 남성들에게 어필하는 데 소모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결과적으로 생각해 볼 때 학생 운동권, 혹은 학생 정치조직에서 20대 문제를 해결할 대안이 나오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것은 단지 그들이 부족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례별로 다르겠지만 그들은 총학 선거에서 나름대로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 같다. 그렇지만 평균적인 20대들이 정치적인 접근이나 연대를 통한 문제해결이라는 방식 자체에 대해 신뢰를 잃었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특정한 가치지향이 아니라, 어떤 집단이나 어떤 연대의식이 특정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 그러므로 가치지향을 품고 다른 이들에게 말하는 것은 결코 손해보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다. 이 인식이 없는 상황에서 정치조직의 가입을 권유한다는 것은 곱셈의 효용성을 의심하는 이에게 인수분해를 가르치는 것과 같다. 학생 운동 조직이 ‘88만원 세대’의 미래에 돌파구를 가져오리라는 희망이 들지 않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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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 엄마의 늪

경제구조나 교육제도의 비리 같은 건 누구나 감지할 수 있다. 어쨌거나 공론장 속에서 행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족의 이름으로, 엄마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일들은 당사자도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철저하게 사적인 행위로 치부되는 까닭이다. 그래서 그것은 ‘늪’이다.


가정 안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폭력이 "철저하게 사적인 행위로 치부"되기 때문에 늪과 같다는 진단에 동의하지만, 이 현상을 이와 같은 비평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싶다. 스캇 펙의 <거짓의 사람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아이가 부모의 선의가 자신을 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거짓의 사람들>의 사례에서와 달리, 한국에서 중산층의 자녀들은 사교육 시장에서 단지 부모의 볼모로 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공모자이다.


그들은 "의식주에서 입시와 취업정보, 친구 관계까지 일일이 챙겨주는 ‘엄마’들에게 몸과 마음이 온통 길들여진 탓에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 속으로’ 발을 내디딜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겐 정글의 법칙에 순응하는 싸움 자체가 엄마 아빠와 함께 해야 하는 일이다. 부모들만 자식들을 다른 집 자녀들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학생들은 다른 부모를 거론하며 부모들에게 더 많은 사교육을 요구한다. 그것이 그들에게 이득이 된다고 당연히 생각하기 때문이다. 슬픈 현실이지만, 어떤 도덕적 당위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나라면 중산층들에게 좀 더 경제적인 관점에서 조언을 해주고 싶다. 사교육 종사자들을 지나치게 살찌우는 대신 보험 설계사의 타당한 조언을 받아보라고 말이다. 나는 중산층들에게 사교육을 시키지 말라고는 말할 수 없다. 한국 사회의 실정에서 그건 너무 크나큰 희생을 요구하는 (그러므로 아무런 울림도 없을) 주장이다. 나는 사교육비의 한계비용과 한계편익의 균형점을 찾아보라고 중산층들에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쉽게 말하자면 이런 얘기다. 어느 중산층이 고등학생 자녀에게 50만원 어치의 사교육을 시키고 있다고 치자. 그리고 그 사교육 비용이 발생시키는 편익이 50 정도라고 치자. 이 중산층이 자신의 욕심으로, 혹은 자녀의 입방아에 넘어가 100만원 어치의 사교육을 시킨다면 그 편익은 어느 정도나 될까? 55나 60이나 되면 다행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사교육비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중산층이 자녀에게 제공할 수 있는 교육레벨에서는 더 이상 편익의 증가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계효용이 급격하게 체감하는 것이다. 상류층이나 강남 중산층들을 쳐다보면 분통이 터질 수도 있겠지만 현실은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나머지 50만원은 자녀가 아무리 다른 집 자녀 얘기를 하면서 투덜거리더라도 연금보험에 들어두는 것이 이득이다.


부모들의 노후설계는 지금과 같은 경제구조에서는 결국엔 자녀들에게도 이득이 된다. 88만원 세대는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매우 오랫동안 부모의 용돈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많은 비용을 때려박더라도 결국 좋은 직장에 집어넣으면 회수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물론 자녀의 '싹수'에 따라 사례별로 그 판단은 달라지겠지만, 상당히 많은 경우 부모들이 그냥 돈을 쥐고 있는 쪽이 훨씬 이득이 되고, 결국엔 자녀 입장에서도 용돈줄이 고갈되지 않는 상황이 더 좋다고 여길 수 있다. 지금 강남에선 조기유학을 다녀와서도 취직이 되지 않는, 할줄 아는 건 영어밖에 없는 실업자들이 스타벅스에 앉아 교사가 될 궁리나 하고 있다고 한다. 이명박과 이경숙의 영어 교육 강화(?)는 그 친구들을 교사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겠다는 것이다. 오직 부자들의 실패만 정부가 나서서 변상해주는 나라라니 꼬라지가 말이 아니다. 이건 시장경제도 아니고 자본주의도 아니다. 하여튼 강남중산층이 저럴 정도이니 평균적인 중산층들은 자식에 대한 투자의 합리성을 재검토해봐야 한다. 그들의 자식들을 이명박이 챙겨줄 리는 없으니 말이다.  


나의 경우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께서 암수술을 받으시며 가세가 기우는 바람에 고등학교 시절 거의 사교육을 받지 못하다시피 했지만, 여동생은 특목고에 다닌 탓에 거의 한달에 100만원씩 사교육비를 지출했다. 어머니는 여동생이 들으면 안 좋아하겠지만, 이란 단서를 붙이면서도 요새 그 사실을 후회한다. 그렇게 돈을 들여 등록금이 싼 대학을 보낸 것도 아니고, 그때 한달에 50만원씩만 연금보험을 들었다면 지금 훨씬 덜 답답할 것 같다는 거다.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말이다.  


한국의 경제상황이 안 좋기는 하지만, '고용없는 성장'의 문제는 세계적인 추세며 경기가 좋아진다고 해결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캐나다에서도 문제는 비슷한데, 다만 정부가 사회적 기업 등을 동원하며 젊은이들에게 월수 50만원 짜리 직장을 주고, 그 50만원으로 겨우 먹고 살 수는 있을 정도의 주거혜택이나 의료혜택을 지원해준다고 한다. 부모 돈 타먹으며 사는 건 아니니까 우리 젊은이들처럼 찌질해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잘 먹고 잘 사는 건 아니다. 그렇게 십년쯤 지내다 일자리가 하나 생기면 한명 씩 한명 씩 겨우 겨우 취직을 한단다. 이 실정이 바뀌긴 힘들 것이고, 게다가 한국에선 정부가 이런 식의 지원을 하는 꼴을 보기도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중산층 부모들의 선택은? 바뀐 현실을 직시하고 돈줄을 자기가 계속 쥐고 있는 쪽이 더 이득이다. <88만원 세대>에 나온 경제적 현실을 보고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자녀들도 능력 이상의 돈을 끌어다 쓰고 취직 잘한 '엄친아'들과 비교당하느니 차라리 먼저 부모를 이런 식으로 설득해 볼 수 있다.


중산층들만 이렇게 정신을 차려도 사교육 거품이 조금은 꺼질 것이다. 중산층 이하 집단들은 그냥 대학진학을 포기하는 쪽이 경제적으로 더 현명할 수 있다. 자녀가 아주 공부에 취미가 있다면 모르겠으나, 대학을 졸업해서도 88만원짜리 비정규직 정도밖에 얻을 수 없다면, 대학을 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학력을 보지 않는 외국계 보험회사에 세일즈맨으로 입사하는 쪽이 더 현명하다. 공부를 잘하는 축이라서 투자를 한다 하더라도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공무원 시험 학원에 들어가는 쪽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이미 어떤 이들은 그렇게 하고 잇는 것으로 안다. 대학을 간다 해도 날로 치솟는 등록금 속에서 졸업을 포기할 확률이 높을 뿐더러, 졸업에 성공한다 해도 높은 금리의 빚만 지고 나올 뿐이다. 지금은 대학진학율이 85%에 이르지만, 어차피 조금 있으면 많은 대학들이 망할 것이다. 그들이 등록금을 이렇게까지 올리는 데에는 학생수가 줄어들 거라는 예상 속에서 미리 실탄을 조금이라도 쌓아두려는 계산이 있다. 교육열이 높고 계층이동의 욕구가 강한 한국인들의 심성상 받아들이기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이제는 우리도 자식들의 삶은 부모의 경제력에 상당부분 구속되어 있음을 받아들이고 그에 맞춰 대책을 세워야 한다. 보험설계사가 되어 사교육비를 100만원씩 쓰는 중산층 가정에 들어가 50만원짜리 연금보험 가입을 권유하는 것이, 이 엄혹한 환경에 적응하는 사적인 대응일 수가 있다.


공적으로 문제에 대응해야 한다는 고민을 하는 사람들 역시 반드시 필요하겠지만 사적인 자기구제책 역시 언제나 중요하다. 일자리도 없고 복지정책도 없을 우리의 미래에서 중산층과 서민이 가져가야 할 키워드는 보험밖에 없는 것 같다. 부자가 되려는 욕망을 버리고 조신하게 방책을 세우면 그럭저럭 버텨나갈 수는 있을 것이다. 적어도 효용 없는 경쟁에 밑빠진 독에 물붓듯 돈을 쏟아붓는 것보다는 낫다. 그것이야말로 '희망의 늪'이며, 거기에서 빠져 나와야 뭔가 대책이 나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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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에서 분리된 한국형 토익시험을 실시할 것이라는 보도에 이어 수학 과학 등 일반과목도 영어로 수업할 수 있다는 이경숙 인수위원장의 말이 보도되었다. 두 가지 정책 모두 말하기 쓰기가 가능한 영어 교육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덧붙여 영어 사교육비를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이명박 당선자의 발언도 운위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조치가 오히려 사교육을 확산시킬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이다. 지금 인수위의 아마추어리즘은 참여정부를 가볍게 찜져먹고 있는데 어떤 언론도 그 단어를 입에 올리지는 않는 걸 보니, 역시 초록은 동색이고 가재는 게편인 모양이다. 하지만 이 정책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그들의 주장의 진의를 충분히 검토해보고 그 효용성을 평가하는 것이 좋겠다.


어느 경제신문이 1면에서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일반과목 영어수업을 통해 영어 말하기와 쓰기 능력을 배양한 국가들은 경쟁력이 향상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핀란드나 덴마크, 싱가포르 등의 성공사례를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영어를 가르칠 수 없는 교사가 없다면 일반과목 영어수업론은 현존하는 우리 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라 대체역사물과 같은 SF의 영역으로 넘어가 버린다. 마치 영어 공용화론이 그렇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그들도 얘기했듯이, 이 정책이 시행되려면 외국의 성공사례와 마찬가지로 교사의 영어권 국가로의 해외연수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즉, '일반과목 영어수업'론을 위한 필요조건을 그들이 내세우는 당위와 함께 엮어서 서술하면 다음과 같은 주장이 도출된다.  


첫째, 한국 경제의 침체는 영어 능력의 부재와 큰 관련이 있다. 영어 말하기 능력과 쓰기 능력의 배양은 국가경쟁력 향상을 위해 거부할 수 없는 당위다.


둘째, 그 당위는 모든 초중고교급 교사들의 2-3년 가량의 해외연수를 국비로 지원해서라도 해결해야 할만큼 심각하다. 우리는 그러한 천문학적인 비용의 지출을 마땅히 감수해야 한다.


이러한 얘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을까. 상식으로 따진들 경제학적으로 따진들 결론은 비관적일 것 같다. 먼저 첫째 논거부터 검토해 보자. 이것은 증명될 수 없는 얘기이다. 현재의 영어광풍은 국가경쟁력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다. 영어실력이 향상되면 한국의 국가경쟁력이 다소 향상되기는 하겠으나, 지금까지 대한민국이 영어실력으로 경제를 키워왔던 나라는 아니었고, 그 구조가 하루아침에 달라질 것 같지도 않다. 물론 영어실력이 유능한 인재가 필요한 일자리가 있겠으나, 그 일자리를 채울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전국민의 영어교육이 필요하다는 당위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오히려 일자리가 지극히 부족한 한국의 경제상황이 영어광풍을 불러일으켰다는 주장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많은 직장에선 영어능력이 직접적으로 필요하지는 않지만, 수많은 지원자들 중에서 일부를 추리기 위해 토익 점수나 토플 점수를 보게 되었다. 기업의 취업담당자가 "우리도 토익점수가 영어실력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토익점수가 높다는 사실은 지원자의 성실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경쟁률이 높아질수록 당연히 커트라인은 높아질 수밖에 없고, 예비 구직자인 학생들은 그 기준에 맞추기 위해 영어교육에 힘쓰게 되었다. 중산층이 사교육에 돈을 쓰는 이유는 제자식을 취직시키기 위해서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입시제도만으로 사교육을 해소할 수 있다고 믿은 참여정부만큼이나, 현재의 인수위는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또한 일반과목 영어수업의 사례에는 성공사례만이 존재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도 지적되어야 한다. 영어가 사실상 공용어로 쓰이는 필리핀에서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수준높은 영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ASIA 6호에 나온 필리핀의 사례를 보면 추상적인 과학과 수학개념을 이해하려는 아이는 먼저 낯선 어휘와 씨름해야 하기 때문에, 결국은 기계적인 암기, 즉 주요단어나 정의, 계산법을 단순암기하는 것으로 학습이 전락하고 말았다고 한다. 필리피노로된 교재로 과학과 수학을 가르쳤을 때 학생들의 성적이 크게 향상되었다는 사례도 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일반과목 영어수업'은 학생들의 영어실력을 향상시키기 전에 학생들의 수학실력과 과학실력을 현저히 떨어뜨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에 하나, 누군가가 마술지팡이를 휘둘어 인수위가 원하는 교육환경을 만들어 준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솔직히 말하면 나는 대한민국이 망한다고 생각한다. 한국 경제가 유지되는 이유는 한국인들이 한국어밖에 못 해서 다른 곳으로 도망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영어를 능통하게 구사하는 구직자들이 한국에서 직장을 잡지 못한다면, 그들은 당연히 미련없이 외국으로 나갈 것이다. 한국에서 합당한 평가를 받기 어려운 고급인력부터 먼저 그렇게 될 것이다. 그때는 삼성이 눈물 콧물 흘리며 사죄를 한다 하더라도 아무도 들은체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상상해보면, 인수위의 상상력은 나름대로 윤리적이긴 하다. 단, 국가를 위해서라기보단, 한국인 개개인들을 위해서.)  


첫째 논거의 주변에 붙여 그들은 "영어 사교육을 줄여주겠다."는 주장도 덧붙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영어 사교육이 성행하는 원인은 공교육이 영어 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므로, 공교육에서 영어 교육을 강도높게 실시하면 문제는 해소될 거라는 주장이다. 우스운 얘기다. 법으로 사교육을 금지하고 학생들을 새벽까지 학교에 붙잡아 놓는다면 몰라도, (물론 이런 짓을 하면 안 된다.) 무한경쟁체제가 존재하고 공부는 하면 할수록 이득이라는 합리적인 기대가 존재하는 한 사교육은 성행할 수밖에 없다. 미션의 난이도가 높아지면 당연히 지출비용은 증가한다. 게다가 국가경쟁력 운운과 사교육 줄이겠다는 주장이 양립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만일 그들의 주장대로 영어 말하기 능력과 쓰기 능력의 배양만이 국가경쟁력 향상의 길이라면, 그 길을 지향하는 사교육 역시 전적으로 긍정되어야 한다.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국가가 지출해야 할 비용을 대신 지출하는 이들을 왜 비난한단 말인가? 그렇게 해서라도 영어만 잘하면 되지.


그래도 지금까지 얘기는 주장의 영역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둘째 논거를 검토하면 상황은 더 참담해진다. 현존하는 모든 교사를 몇년씩 해외에 연수보내는데 드는 비용은 얼마일까? 모르긴 몰라도 천문학적일 것이다. 어쩌면 우파들이 그토록 현실성 없다고 비난했던 민주노동당의 '무상의료 무상교육' 공약을 가볍게 능가할 만한 수준일 것이다. 대한민국의 실정에서 그런 일을 추진해야 하는가? 그보다 더 급한 일은 없는가? 그것만이 당장 필요하다는 사실에 모든 사람이 동의하고 있는가? 국가의 역할이 필요한 다른 일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가령 빈곤층에 대한 지원은 그런 일보다 훨씬 도덕적이고 효용성이 있다. 빈곤층의 자녀들에게도 노동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은 국가에게도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들에 대한 고민은 없이 '작은 정부'를 말하던 정부가 대운하와 교사 해외연수에 천문학적인 돈을 쓴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일까? 오늘자 동아일보 사설은 "작은 정부화 방해는 반국민적 행위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공무원 자르는 거 방해하지 말라는 얘기다. 공무원 줄이면서 혈세를 펑펑 써대면 그게 '작은 정부'가 되는 길인지 묻고 싶다. 앞서 언급했던 일반과목 영어수업을 통해 성과를 거둔 몇몇 국가들은 북유럽 국가들과 싱가포르, 즉 이른바 '큰 정부'를 가진 나라다. 국가가 세금을 많이 징수하고 그 세금을 통해 정책을 펼치는 것이 자연스러운 나라들이다. 그런 국가들의 정책을 모방하려면 적어도 '작은 정부'니 뭐니 하는 소리는 집어치워야 하고 그들 국가가 국민들의 생활을 어떻게 보살피고 있는지도 참조해야 한다. 참여정부의 소소한 복지예산 증가를 문제삼던 그 입으로 인수위원장의 헛소리를 비난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모든 사실을 감안하면서도, 오직 영어실력 배양만이 국가 중대사이고,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선 막대한 혈세 지출을 감수할 수 있다고 치자. 그렇더라도 정책의 순서가 잘못되었다. 인수위는 영어 시험을 손대기 전에 먼저 교사들의 해외연수를 논했어야 했다. 모든 교사들의 해외연수는 당장의 예산에는 불가능할 것이므로, 먼저 영어교사들에 대한 해외연수 방안부터 논하고 시험을 바꾸든지 했어야 했다. 정책은 그렇게 가능한 방향으로 순차적으로 가는 것이다. 무턱대고 시험부터 바꾸면 당연히 사교육이 성행하고, 이미 사적으로 돈을 쓰고 있는데 정부가 세금을 쓰는 것을 납득할 리 없다. 이 대목만 보면 인수위가 처음부터 생각을 하고 정책을 내놓는 것인지 이미 뱉어놓은 말을 수습하기 위해 다음 말을 내뱉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하지만 인수위의 주장을 그저 성토만 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은 아닐 것이다. 인수위의 정책이 갈팡질팡하는 데에는 사람들이 교육정책에 요구하는 바가 분명하지 않다는 사실에도 하나의 이유가 있다. 사실 사람들의 바램은 모순된다. 그들은 이명박에게 성장제일주의를 바라고, 또한 서민층을 보듬아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런 모순된 욕망은 충족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합리적 문제해결 방식이 부족한 곳에서 우리는 좌파니 우파니를 따지기 전에 말이 되는 소리를 추구해야 할 것 같다.


앞에서 충분히 증명된 것과 같이 인수위가 교육정책에 설정한 목표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1) 국가경쟁력 향상 2) 사교육비 경감이다. 비록 우선순위의 차이는 있었을지라도, 참여정부 역시 이와 비슷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1)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나는 이 문제에 대답할 수 있는 식견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현재 한국의 국가경쟁력의 문제가 과연 교육개혁을 통해 극복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우석훈과 박권일의 <88만원 세대>와 <샌드위치위기론은 허구다>가 이 문제와 관련된 생각을 하게 해주었으니, 그들의 다음 작업을 기다릴 뿐이다.) 2)의 문제가 과연 큰틀에서의 대입제도 변경을 통해 극복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나는 사교육비 문제는 마땅히 계층적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사교육을 실시할 형편이 못 되는 빈곤층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 사교육을 받지 않고 자란 학생의 노동자로서의 능력이 사교육을 받고 자란 이들과 너무 벌어지지 않도록 국가 권력이 공교육을 조직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겨우 겨우 사교육을 따라가고 있는 중하층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 이들 계층은 어떤 부분에서 자녀의 사교육비를 지출하고 있는지를 따져보고, 그들의 부담을 덜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아마 태권도나 피아노 학원의 부담이 경감되면 그들은 다음으로 영어학원을 찾을 지도 모른다. 사교육비 자체는 줄어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그들의 계층적 위치는 상승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교육을 통한 신분상승의 욕망이 다른 어느 사회보다 강한 한국 사회에서, 사교육 자체를 악으로 단죄해서는 문제의 해법을 찾을 수 없다. 사교육의 문제는 국민 모두에게 단일한 문제가 아니라 계층의 문제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각각의 계층별로 사교육의 양태를 분석하고 검토하여, 아래로부터 그들의 부담을 경감하는데 힘써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야 그들은 실질적인 경감이 이루어졌다고 느낄 것이다. 여기까지는 우파와 좌파의 구별도 없다. 우파들의 입장이란, 국가가 책임져야 할 것은 오직 빈곤층 뿐만이라는 것이다. 좀더 진보적인 입장이라면 빈곤층 뿐만 아니라 노동계급 전체의 교육을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식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인데, 그 책임의 정도의 문제에 있어선 물론 여러가지 입장이 있을 수 있다. 대체로 이 정도 지점에서 시작해야 우리는 정책들의 경쟁, 대중적 설득의 과정, 그리고 대중들의 합리적 선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중산층의 사교육비 지출은 우파적 시각에서 볼 때는 "자율적인 경제주체가 합리적인 선택을 통해 비용을 지출하고 있으면서도, 괴롭다고 난리를 치는 촌극"에 지나지 않는다.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았다고 환호하는 보수진영에서 사교육비 경감을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다는 사실은 눈꼴사납다. 이런 사회에선 우파도 우파가 아니고, 좌파도 좌파가 아니다. 향후 교육정책의 기조에 대해 고민하면서, 우리는 한국 사회의 담론지형도가 어떻게 일그러져 있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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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가 보통 명사가 된 것 같다. 그것이 이미 우리 사회에 존재했던, 그러나 아무도 인지하기를 거부했던 경제적 현실을 밝혀 드러나도록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88만원 세대>라는 책의 가치는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또한 한편으로는 '정치의 계절'에 정책적으로 얘기하는 후보들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언론들이 이 얘기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그런 부분도 있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보도는 차이가 있지만 한 부류로 뭉뚱그려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이 현상의 경제적 원인을 '몇년 동안 경기가 안 좋아서 20대가 (특정한 세대가) 취직을 못해서 생긴 문제'라고 정의한다. 새롭게 형성된 경제 구조의 문제로 보지 않고 경기순환의 문제로 본다는 것이다. <쾌도난마 한국경제> 논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무슨 놈의 경기가 7-8년 동안이나 계속 저점에서 멈춰있나? 여하간 이런 논법에선, 그렇게 경기를 바닥으로 만든 건 좌파/반기업 정서의 참여정부, 따라서 정권교체가 너희 젊은이들의 희망, 뭐 이런 등식이 성립한다. 이렇게까지 말은 안 하지만 의도는 그렇다. 조선일보의 경우 이게 지금껏 추구(?)해 왔던 386과 포스트 386에 대한 이간질의  경제적 판본인 것 같다.

경향신문의 특별 취재는 책의 의도를 충실하게 따라가고 있다. 취재된 개별사례 중에는 아는 사람도 있어서 개인적으로 마음이 짠했다. 취재의 시작은 이렇게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정말 같은 사회에 사는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만큼 힘들게 사는 젊은이들이 많다. 하지만 '88만원 세대' 담론을 부정하는 윗 세대들에게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려면, 이젠 좀더 일반적인 청년들 얘기를 할 필요가 있다.

비율로 어떻게 되는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88만원 세대'에 어느 정도 공감하기도 하고 그래서 뭐 어쩌라구, 라고도 말하는 (구)중산층 자녀들의 경우 20대 중반은 아직 (어느 정도는) 부모님 용돈으로 살면서 취업준비를 하는 단계다. 문제의 핵심은 이 친구들이 자신은 이렇게 해서 스펙을 높이면 취직할 수 있을 거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다는 것이고, 설령 그렇지 않다 해도 다른 방도가 뭐가 있냐고 볼멘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윗세대들의 냉소어린 손가락질은 대개 이들의 찌질함에서 기인한다. (가령, 김형태의 '카운셀링'을 생각해 보길.)

하지만 이들이 이러고 있다는 것 자체가 또한 사회문제인 것이다. 찌질하니까 그러는 게 당연하다고? 사실 조직에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공부하고 있으면, 어지간히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 이상 찌질하기 마련이다. 많은 사람들이 찌질한 상태에서 취업해서 그 안에서 깨지고 박살나면서 소위 사회성이라는 것을 학습해 나간다. 그런 기제가 없다면 이들은 서른이 넘어도 여전히 이 상태일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계속해서 타당한, 혹은 부당한 경멸을 받을 것이다.  

윤리적인 판단을 떠나 두려움이 든다. 일전에 몇몇 냉소주의자들과 얘기해 보았지만, 이들은 정치성을 지닌다는 것 자체가 386세대에게 놀아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야 정동영의 내용없는 사탕발림에 넘어간다면 그렇게 되겠지만, 다른 방식의 정치성도 있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20대의 상당수가 정규직이 된다는 것은 도저히 그들의 상상 속에서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20대에게 숨통을 트이는 방법으로 윗세대들이 모두 (혹은 대다수가) 비정규직이 되는 해법을 주문하고 있었다. 이런 해법은, 이번 경향신문 취재에 응했던 어떤 이에게서도 나온다.

5-6년 후, 이들이 더 이상 용돈을 받지 못할 처지에 내몰렸다고 치자. (당연히 그렇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경기가 안 좋아서 그랬다'는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사탕발림이 이명박 집권 기간 동안 '오류'로 판명되었다고 치자. (이 역시 99% 그렇게 될 것이다.) 지금도 이들의 네이버 댓글에선 월수 200을 넘는 모든 노동자들에 대한 원한감정이 스멸스멸 기어나오는데,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이미 한국 정치는 정당 정치나 기타 시스템과는 상관없이 '바람'에 의해 움직이는 취약한 구조가 되었는데. 이명박 이후의 파시즘을 운위하는 건 결코 과장이나 왜곡이 아니라 그저 약간 비관적인 현실 진단일 뿐이다.

사회문제라는 것이 그런 것 아니겠는가. 재수없으면 철밥통들도 모두 잘려나갈 수 있다. 만일 20대들이 자신들의 에너지를 포지티브한 데 쓰는데 실패한다면, 그들은 몇년 후 그것을 다른 모든 이들을 자신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데 사용할 것이다. 특히 386들은 정신차려야 한다. 그들이 일어났을 때 누가 먼저 타깃의 대상이 될지는 분명하니까. 88만원 세대의 문제가 단지 '그들 세대가 불쌍하다'의 문제가 아닌 이유는 그것이다. (누가 누가 더 불쌍한가? 따위의 논쟁을 시작하면 끝이 없다. 이게 무슨 군대 내무반의 군번 논쟁도 아니고.)  가장 최근에 이택광 선배와 만나 술을 먹을 때 주로 논의되었던 얘기가 바로 이것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이타적인 것' 따위 바라지도 않는다. 제발 우리 모두, '현명하게' 이기적으로 처신하자. 당장 빼먹기엔 곶감이 달다고 인생이 끝나는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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