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many cuts should I rep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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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윤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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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Y'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07/05/10
    원쓰리 치킨 (1)
  2. 2007/01/27
    만 원의 음주 (1) - 완산정 편 (5)
  3. 2006/12/15
    애정결핍이 평론가들에게 미치는 영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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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우석 영화와 중산층 의식 (2)
  5. 2005/10/20
    연애의 목적 (스포일러 만땅데스) (1)
  6. 2005/08/02
    ssy의 충무로 리포트
  7. 2005/07/29
    말아톤

전역 직후 사당동 근처 고시원에 살 때부터 이곳을 찾았다. 전역 후 채 한달이 지나기 전에 나는 그 집 단골이 되어 있었다. 주변을 답사하다 보니 닭한마리 가격이 제일 쌌던 것. (참숯전기구이의 경우 4천원. 후라이드나 양념은 6천원.) 물론 싼 만큼 양이 많지는 않지만, 치킨-맥주를 저녁 식사 대용으로 하는 성격은 아니었기 때문에, 밤 늦게 잠깐 한잔 하고 오기엔 그쪽이 훨씬 좋았다.

원쓰리 치킨 사당점은 부부가 함께 운영하는 그리 크지 않은 점포다. 아저씨를 보거나 아줌마를 보거나 나는 무조건 '사장님~'이라고 부른다. 처음 갔을 때, 맥주를 적당히 마시고 계산하고 나오면서 가게에 폐식용유 캔이 쌓여 있는 걸 보고 호기심에 질문을 던졌다.

"저기요.  이 폐식용유들은 어떻게 처리하나요?"

"업체에서 가져가요."

"아 그렇군요.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제가 전역한지 얼마 안 됐는데, 군대에서 제가 이걸 반납하고 다녔거든요. 사회에선 어떻게 처리하는지 궁금해서...^^;; "

한 세번째 갔을 때부터 아저씨 아주머니는 날 대번에 알아 보았다. 하긴, 젊은 남자애 혼자 와서 술을 먹는 게 흔한 일은 아니었을 게다. 그 시기 나는 주로 혼자 술을 먹었다. 전역 후 KBS에서 잠시 일을 하던 때였고, 늦게 끝나면 딱히 연락할 친구도 없었다. 친한 친구 몇 명이 다들 사정이 있던 시기였다. 대개 완산정에 가거나, 아니면 이 원쓰리 치킨에 갔는데, 생각해 보면 이때는 술값이 많이 안 나왔던 것 같다. 술은 상대가 있어야 서로가 서로를 북돋으며 경제력을 초과해서 마시게 된다.  

몇번 더 가다 보니 굳이 4천원짜리 닭 한마리를 시킬 필요가 없었다. 닭꼬치 하나에 1천원, 맥주 500cc 한잔에 2천원이니, 이론상으로는 혼자 가면 3천원으로도 술을 마실 수 있다. 아무래도 여동생이랑 자주 가게 되는데, 둘이 가도 1만원 안팎으로 먹는다. 친구를 한명쯤 데려갔을 때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물론 친구랑 갔을 경우엔 이 집에서 마시는 것만으로 끝내지는 않지만.

이 집에서 술을 마시는 것에 유일한 단점이 있다면, 점포가 너무 좁고, 따라서 내가 친구들과 떠드는 소리가 다 들리며, 그래서 가끔 이미 안면이 있는 아저씨 아줌마를 보기가 민망하다는 것이다. 내가 구매력이 그렇게 좋은 손님은 아니지만, 동네에서 맥주 마실 때엔 언제나 이 집에 오다보니 어쩔 수 없이 단골손님이 되어 버렸다. 심지어 월급 받는 날 전날에 외상으로 술을 마신 적도 있다.

어제도 친구 몇을 달고 결국 이곳으로 갔다. 며칠전에 내가 필름이 끊긴 상태에서 이곳에 왔다는 친구의 증언이 생각나 아줌마에게 "사장님- 저 며칠 전에도 왔다면서요? 생각이 안 나는데..."라고 했더니, "아이구, 기억 안나세요? 정태씨랑 여동생이랑 같이 왔는데. 하긴 셋다 무지 취해 있었어-"라고 답변했다. 정작 내 이름은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한편 어제 만난 친구 중 하나인 SSY씨는 요새 내 블로그에서 'SSY'라는 태그가 사라져 가는 것 같다고 좀더 분발해야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 포스트는 그의 선언에 대한 존중인 것이다.

...2차는 곱창을 먹었다. 제기랄, 사주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이렇게 술을 먹으니 술값이 무지무지하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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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산정. 서울대입구역 7번 출구에서 나온 후 모퉁이를 돌면 바로 보이는 술집. 군생활 동안 꿈에서 이 술집을 간게 족히 20번은 넘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도 2년간 가지 못했다. 휴가 땐 왜 안 갔느냐고? 휴가 땐 대개 여럿이서 놀게 마련인데, 이 술집은 여럿이서 가기 좋은 술집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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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콩나물국밥, 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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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모주 한 항아리, 5천원.


합하면 1만원이다. 혼자서 이렇게 먹으면, 적당히 취기가 올라서 집에 돌아갈 수 있다.

원래 콩나물국밥 하나에 모주 한 항아리를 먹기는 좀 벅차다. 음주 타입이 나처럼 '폭음'이 아닌 분들은, 둘이서 콩나물국밥 두 개 시켜놓고 모주 한 항아리 정도면 된다. 혼자 갔을 때는 잔으로 시켜먹으면 된다. 모주는 한 잔에 1천원. 다섯잔 이내로 먹으면 지출을 1만원에 끊을 수 있다.
 
콩나물국밥은 어쨌든 안주가 아니라 '밥'이므로, 천천히 먹겠다고 의식해도 30분 안엔 먹게 된다. 그러므로 모주 한 항아리도 30분만에 비워야 한다. 콩나물국밥이 나오기 전에, 모주를 두 잔 정도 원샷해두면, (당연히 모주가 먼저 나오니까) 모주 한항아리와 국밥 한 그릇을 비슷한 시간에 비울 수 있다.

모주는 동동주에다가 이런저런 약재를 넣어 만든 술이라고 하는데, 맛도 괜찮고 (확실하진 않지만 체감으론) 동동주보다 도수도 더 센 것 같다. 전주에서 직접 모주와 콩나물국밥을 먹은 적은 없기 때문에, 원산지의 맛과 비교할 수는 없다. 여하간 완산정은, 어쩌면 내 나이보다 오래되었을 굉장히 오래된 술집이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술집이다.


완산정 에피소드 1 : 상도동쯤에서 술을 쳐먹고 있다가, 갑자기, "모주가 먹고 싶어----" 뭐 이런 모드가 되어, 같은 모드에 빠져든 SSY씨 (아무렴, 내가 술 얘기하고 있으면, 자네가 나와야지.)와 함께 택시타고 가서 먹으려고 했는데, 돈이 없었다. 현금카드를 인출할 수 있는 곳을 찾으려고, 중앙대병원 앞 우리은행 인출기에서 내려 돈을 뽑은 후, 다시 서울대입구역으로 가서 끝내 완산정으로 입성하고야 말았다. 그때 택시기사 아저씨는 전주 사람이었다. "아니, 거기가 그렇게 맛있어요?"라며 웃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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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도말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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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휴가 때 노정태군과 SSY씨와 함께 오후 세시부터 열시까지 노가리를 까면서 맥주 3천씨씨를 7개 비운 적이 있다. 그때 어쩌다가 갑자기 나온 얘기다.


"나도 서태지 좋아하는 사람이긴 한데, 평론가들이 서태지를 찬양하는 걸 보면 굉장히 불편할 때가 있거든....왜냐하면 그 사람들이 서태지를 좋아하는 이유는 대충 이런 감정선을 타고 있단 말야.

너와 나는 비슷하다.

나는 실패했고, 너는 성공했다.

그러므로 너는 위대하다.


딱 이거야. 굉장히 배배꼬인 감정으로 서태지를 좋아하는 거지."


(이 말은 그날 술자리에서 꽤 히트를 쳤고, 노정태와 SSY는 즉석에서 리바이벌을 요청했다.)


저런 식의 과도한 찬양이 조금만 변하면 과도한 비판이 되기 십상이다. 사실 저 문장은 한 문장 한 문장이 다 틀렸다. 일단 '너와 나는 비슷하다.'부터 틀렸다. 그런데 그들은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 이렇게 서태지를 찬양하던 그들이 서태지를 비난하게 되는 감정선을 요약해 보면 이렇게 된다.


너와 나는 비슷하다.

왜 너는 그 사실을 부인하려 드는가.

나는 실패했고, 너는 성공했다.

그러므로 너는 부정직하다.



서태지만큼 그들의 비뚤어진(?) 욕망을 적실하게 보여주는 대상이 없긴 하지만, 여하간 이런 식의 사유전개는 서태지에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니다. 많은 평론들이 분석대상에 대해 주목을 요구하는 대신 평론가 자신의 정신상태에 대한 주목을 요구한다. 나 자신도 그런 글을 많이 써봤다는 전제하에서 하는 얘기다. 물론 나는 아직 그런 글을 돈 받고 써본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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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만, 군인, 상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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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도둑은 소도둑과 다르다. 바늘도둑에서 소도둑이 파생되지는 않는다." 몇몇 강우석 영화에서 울려퍼지는 목소리다. <투캅스1>에서 안성기는 박중훈에게 수갑을 채우면서 이렇게 말한다. "자네가 인정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예전에도 경찰이었고 지금도 경찰이야." 후배에게 소소한 부정행위를 가르쳐주기는 했지만, 그것과 마약을 빼돌려 꿍쳐먹는 행위는 엄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한편 ssy의 표현을 빌리자면 "악당이 악마를 만났을 때" 정도의 부제를 붙여도 괜찮을 <공공의 적 1>의 설경구는 마약을 빼돌려 꿍쳐먹는 경찰에서 - 아마 이게 강우석에게는 경찰로서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느낌을 주는 행위에 속하는 모양이다. - '공공의 적'을 처단하는 '민중(?)의 지팡이'로 변신한다. 그런데 그의 행위의 변화라는 것이, 길거리의 노점상 물건을 그냥 뺏는 수준에서 원가는 내고 뺏는 수준으로 바뀐 것이다. 물론 그 노점상은 그것도 고마워서 감찰과 직원에게 "(그는) 돈을 냈다"고 증언하기는 하지만, 3천원짜리 사과를 2천원 내고 쳐먹는 것을 일상언어의 어법에서 "돈을 냈다"고 표기하지는 않는다.

이와는 전적으로 다른 인식을 우리는 <올드보이>의 이우진에서 발견할 수 있다. "모래알이든 바윗덩어리든 가라앉기 마련"이라는 그의 윤리의식은 여러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한국사회에서 그토록 깐깐하고 까탈스러운 윤리의식을 가진 사람을 만나기란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박찬욱이 복수 - 그것도 사적인, 윤리적 처단으로서의 복수 - 시리즈를 만들 수 있는 배경도 그 자신이 어느 정도는 이우진의 그런 윤리의식에 공감하거나 흥미를 가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강우석의 영화에선 이우진과 같은 캐릭터가 설 자리가 없다. 강우석의 세계에서 인간은 세 종류로 표상된다. 1) 바늘도둑 - 2) 소도둑 - 3) 악마. <투캅스 1>이 1)과 2)의 관계에 대한 얘기라면, <공공의 적1>은 1), 2)와 3)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3)과 관계한 인간이 2)에서 1)로 성숙해 가는 얘기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 사회의 중산층 의식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소소한 부정에도 불구하고 상류층의 큰 부정에 분노할 수 있는, 그리고 '싸이코'를 배격할 수 있는, 우리 사회 평균적인 남성들의 윤리의식의 근간이다.

...라고 단언하고 다음으로 그 윤리의식의 허위성에 대해 이죽거리는 것이 어떤 종류의 문화비평의 양식이겠지만, 나는 그런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매체에 투영되는 윤리의식은 사회의 평균보다 더 높은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방금 나는 그것이 '우리 사회 평균적인 남성들의 윤리의식의 근간'이라고 말했지만,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우리가 바늘도둑이기 때문에 소도둑에게 성질을 부리는 건 웃긴 일이라는 '일관된' 윤리의식을 견지하고 있다. 상류층이나 중류층 뿐 아니라 상당수의 중산층들마저도, 신분상승의 가능성을 버릴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런 인식에 동조한다.

그에 비한다면 강우석 영화의 중산층 의식은 차라리 권장할 만한 것인지도 모른다. '많이 번다'고 하면 '월 600'밖에 상상하지 못하는 '강동서 강력반 강철중', 그리고 실제로 월 600 벌면서 자신이 많이 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그들이 행한 소소한 탈세와 감세 때문에 부유층의 탈세에 대해 냉소적인 - '다들 그렇게 사는 거지 뭐!' 따위의 - 반응을 보인다면, 그것도, 아니 그것이야말로 웃기는 짬뽕이다. 장르로 따지자면 '안쓰러운 희극'에 들어갈 것이다.

강우석 영화는 적어도 중산층의 삶을 그들의 입장에서 긍정한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주인-도덕이다. 반면 바늘도둑과 소도둑을 동일하게 보는 하나의 방법인 냉소주의는 중산층의 삶을 상류층의 시각에서 교정하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노예-도덕이다. 물론 바늘도둑과 소도둑을 동일하게 보는 다른 방법도 있다. 그것은 자기 혐오인데, 반항적인 십대를 넘기면 예술가를 자칭하는 이들 외에는 괴로워서 소유하기가 힘든 의식이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도 필요하지만, 그런 것을 중산층 의식으로 삼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일관성이라는 면에선 가장 문제가 있지만, 나는 강우석 영화의 주장을 그런대로 긍정한다.

비루함에서 코미디를 엮어낸다는 점에서 강우석은 주성치와 동일하지만, 양자가 비루함에서 코미디를 끌어내는 방식은 확연히 다르다. 주성치가 다루는 것은 '소년의 비루함'이고, 강우석이 다루는 것은 '중년의 비루함'이다. 주성치 영화에서, 소년은 세계의 근원적인 비루함에 걸려 과장되게 쓰러진다. 그리고 그 과장됨에서 우리는 웃게 되는데, 그것은 희극이면서도 비극이다. (중국영화의 과장법에 불쾌감을 느끼는 이들도, 주성치 영화의 과장은 소년의 심리적 세계를 표상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반면 강우석에겐, 그 인간의 비루함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며, 웃음은 그것에 대한 모사(模寫)에 연유한다. 그것은 비극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과장되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강우석은 주성치와는 달리 현실성이라는 이름을 획득하게 된다. 현실성이라는 이름의 가상만큼 막강한 효과를 발휘하는 것도 없다. 중산층 의식이 그 효과를 발휘할 때, 그들은 사회의식을 대표하게 된다. 나는 중산층 의식이 우리 사회의식을 대표하는 현상에 별다른 불만이 없다. 마땅한 흐름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강우석 영화가 표상하는 그 의식이, 상류층에 의해 전이되고 왜곡된 중산층 의식을 이겨내고 중산층 의식의 대표가 되고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식의 대표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도 나는 아무런 불만이 없다. 비록 내가 그에 동의하지는 못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가끔, 부시를 욕하면서도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카우치는 마약을 먹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그들을 보고 있자면, 어쩔 수 없이 짜증이 확 돋는 경우가 있다. 주체적인 중산층의 의식은 필요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견제할 수 있는 대항마도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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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만, 군인, 일병이었다. 군에서 내가 쓴 글이 대개 그렇듯, 읽고 보는 것이 한정되어 있다보니까 거기서 좀 과도한 의미를 이끌어내는 구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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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에서 9시간 연속 수면을 취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하긴, 내가 워낙에 수면을 좋아해서 그렇지, 보통 사람들은 사회에서도 그런 기회를 갖는 일이 흔치 않을 것이다. 기회를 가져도 사용하지 않을 것이 뻔하고.) 그래서, 오랫만에 금요일 밤에 찾아온 비번에 나는 감격했고, 오늘은 반드시 9시간 취침을 하리라 다짐했다.

그것을 방해한 것이 중대장이 놓고 간 디빅스였고, 그 디빅스에서 나온 영화 "연애의 목적"이었다. 나는 이 영화를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잠을 청하다가도 몇몇 대사를 듣고 다시 몸을 돌리기를 반복해서, 결국 중반 이후부터는 잠자기를 포기하고 영화를 몰입해서 보게 되었다.

나는 드라마나 영화와 같은 영상매체를 평가할 자격이 없는 수용자라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뼛속 깊이 영상매체보다 문자매체를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에 만났을 때 내 여동생은 여동생들이 학창시절에 흔히 하는 경험 - 오빠가 컴퓨터에서 보다 만 야동을 발견하는 일 - 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내가 성욕이 거의 없는 인간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고, 내가 그 분야에서조차 영상매체보다는 문자매체를 추구했음을 밝혔다. 상황이 그 정도쯤 되니 내가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는 장면을 보지 않고 드러누워서 귀로만 들어도 스토리가 무리없이 연결되는 것들이다. 이건 매체를 올바로 대우하는 일이라고는 볼 수 없고, 그래서 영화관에 보면 화면을 열심히 쳐다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남들처럼 화면이 잘 보이지는 않는다. 게다가 이번에는 잠을 청하려다 말고, 청하다가 말고, 하면서 봤으니, 내가 이 영화를 거의 라디오처럼 '들었다는' 사실을 이해해 주길 바란다. "연애의 목적"은 그렇게 라디오처럼 들어도 별 무리가 없는 영화였다.

전반부에서 이 영화는 홍상수꽈의 영화인 것처럼 위장한다. 적당히 귀엽게 찌질거리고 찐득거리고 찝적대면서 온갖 성폭력을 행사하는 박해일은 "연애의 목적? 그것은 섹스!"(홍상수식의 전형적인 질문과 전형적인 대답)라고 말하는 듯 하다. 내가 처한 공간이 내무실이 아니었다면, 숙취로 뒹굴거릴 때 친구 방에서 나온 영화였다면, 이 영화 전반부를 견디지 못하고 책이나 보러 다른 방으로 퇴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군대에서는 퇴장할 곳이 없었고, - 꿈나라를 제외한다면 - 박해일이 온갖 범죄를 너무 어이없이 귀엽게(;;) 저지른 데다가, 대사빨이 꽤 받는 시나리오였는지라 그저 키득키득하면서 보고 있었다. (극중 인물의 이름이 잘 생각이 안 나는 관계로 - 영화 내내 그냥 '이선생', '최선생'이라고만 부른다. 거의. - 그냥 배우 이름으로 쓰겠다. 배우들에겐 좀 미안하지만.)

내가 뭔가 기대하고 흥분하기 시작한 것은 이 영화의 시나리오가 남자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었다는 징후가 드러나면서부터였다. 박해일의 욕망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전반부의 스토리는 (홍상수처럼) 그것을 보여주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있지 않다. 어느 순간부터 그것은 강혜정의 상처의 문제로 넘어가게 된다. 강혜정의 스토리는 박해일의 지적대로, '뻔한 것'이다. 하지만 뻔하다는 건 세상에 흔히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고 - 사실 그렇게 흔히 일어나는 일이라고 보기엔 사건이 심각했지만 - 그만큼 일반적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여자는 어느 남자와 밀애를 즐겼는데, 그 밀애가 들키고 남자의 명예에 손상이 갈 가능성이 보이자, 남자는 모든 책임을 여자에게 떠넘기고 상황을 종료시킨다. 그 사회에서 얼굴을 들 수 없게 된 것은 여자뿐이고(정말로 정말로 흔히 그렇듯이), 그래서 그 여자는 그 세계를 떠난다. 강혜정이 '교사' 박해일보다 한 살 많은 '교생'이 된 이유는 그 때문이다.

6년 사귄 여자친구가 있는 박해일, 결혼할 상대가 있는 강혜정의 밀애는 또 한번 들킬 경우 그들의 사회적 관계를 손상시키는 종류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여자 혼자 피박을 쓰게 되는 상황이 도래하고 있었다. 학교에 그들 사이의 관계가 소문이 나게 되고, 강혜정이 이전에 다니던 대학에서 어떤 이유로 쫓겨나게 되었는지까지 소문이 퍼진 것이다.

그리고 문제의 장면. 교육청인지 어딘지에서 나온 감사관들 앞에서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박해일. 둘이 사귄 적도 없고, 그냥 좀 친근하게 지냈는데 애들이 짖궂어서 소문이 났다고 한다. 박해일의 '거짓말'은 강혜정을 버리겠다는 것도 아니었고, (그 시점에서 박해일은 강혜정을 '무진장' 좋아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들의 입장에서는 두 사람의 사회적 관계를 훼손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연애를 추구할 수 있는 '현명한' 대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한가지 간과하는 것, (혹은 별거 아니라고, 혹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그 경우 강혜정이 여기저기서 꼬리를 치는 여자라는 세간의 소문은 '그대로' 남게 된다. 그것 얼핏보면 봉합인 것 같지만, 이미 여자 입장에서는 또 한번 (그 세계, 교직원과 학생들의 세계의) 사회적 죽음을 당한 이후의 봉합이다. 그리고 또 하나, 그렇게 문제가 봉합된다면 그후의 연애의 전개에서 두 사람의 권력 관계는 박해일 쪽에서 강혜정을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체제로 정립(;;)된다.

그래서 나는 저 교육청 감사관들이 그대로 떠나간다면 도대체 이 영화가 어떻게 결말지어질지 참 난감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불편해하지 않는 방식으로 영화가 끝날 것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강혜정은 울부짖으면서 감사관들에게 박해일이 교사의 교생에 대한 권력을 이용해서 성폭행을 행사했다고 고발한다. 여기서부터 마지막 20분간 영화는 아예 성격이 달라져버린다. 이제 이 영화와 홍상수 영화의 거리는 우리 은하계에서 안드로메다 은하계 정도가 된다. 나는 이 쿠데타(?)를 보고 마음 속으로 꺄악꺄악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벙찐 것은 우리 내무실 병장/상병들. 그들에게 이 상황은 해독불가능이었고, - 멀쩡하게 박해일을 좋아하던 강혜정이, '현명한' 행동을 한 박해일에게 저렇게 뒤통수를 때린다는게 -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그리고 그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그나마 그 중에서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어느 상병에게 내가 상황을 순화시켜서 전달한 설명은 이랬다.

"상황이 반복되는거 아닙니까. 여자 입장에서는, 이런 식으로 상황이 정리되고, 또 자기만 바보가 된 채로 버림받는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뭐 남자는 여자를 버리려고 저렇게 감사관들에게 설명한 건 아니지만, 여자 입장에서는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지 말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자기가 당하기 전에 먼저 쳐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사실 이것도 정확한 설명은 아니다. 첨가되어야 할 두가지.

1) 강혜정이 감사관들에게 설명한 내용에는 한점의 거짓도 없다. (-_-;;) 일단 박해일이 한 짓은 다 성폭행이 맞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 나는 영상을 보기보다 듣기만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수위인지까지는 정확히 판단이 안 선다.)

2) 이 시점에서 강혜정의 속마음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본인은 그걸 알았을까? 이 상황엔 이미 이성의 간지가, 시나리오 작가의 의지가 작용하고 있다. 어떤 병장은 "얘기가 왜 이렇게 되나. 쓴 놈도 여기까지 쓰곤 어떻게 수습할 지 몰라서 후회했을 거야."라고 했는데, 천만에! 이제 이야기는 예정된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

박해일과 강혜정은 서로를 좋아한다. 그러나 이러한 '진실'의 차원으로 넘어가려면, 먼저 '사실'의 차원의 문제가 정립되어야 한다. 이것이 1)의 의미다. 무엇보다 중요한 2)의 의미는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는 헤겔의 공식을 따르고 있다. 그리고 그 반복은 강혜쩡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반복이다. 강혜정은 박해일의 '수혜(?)'를 입고 이미 사회적 죽음을 당한 상황에서 사랑을 할 수는 없다. 그녀가 사랑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다른 출발점이 필요하다. 대단히 판타지적이지만, 강혜정은 박해일을 과거 자신의 입장으로 몰아넣은 후, 박해일을 구원해야 하는 것이다. 그 행위를 통해 물론 그녀 자신도 구원을 얻는다.

결국 박해일은 깔끔하게 학교에서 짤리고, 강혜정은 주변 교사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모든 오해(는 아니지만)를 해소한다. 그리고 학원계에서 빌빌대고 있느 박해일에게 어느날 -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것도 매력적이다. 1) 3일후? 2) 3달후? 3) 3년후? 대략 2)에 가까울 것 같긴 하다. - 강혜정이 찾아온다. 예의바르게 인사하던 박해일은 술이 들어가자 예전에 자기가 그토록 비웃던 강혜정의 방식대로 자신의 상처를 토로한다. 이제 헤겔의 말대로 진리가 오인을 통하여 구성될 시간이다. 강혜정이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자러 갈까?"라고 말한다. 이 옥신각신 시츄에이션이 두 사람이 제일 '귀여워' 보이는 시점인데, 그 대사 중 강혜정의 "책임질께~"에서 나는 그냥 뒤로 넘어가 버렸다.

요약하자면, 이 영화는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제물로 삼아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고, 그 과정에서 좋아하게 된 그 남자를 책임까지 진다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다. 이런 상황은 현실세계에선 거의 가능하지 않다. 상처의 연쇄고리는 대개 무한히 소급되며, 다들 그저 안 그런 척 하고 살아갈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이야기는 일종의 동화같은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내무실의 다른 모든 이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오직 나 하나만을 즐겁게 만든 그런 종류의 동화였다.

옥신각신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소주를 그딴식으로 들이키면 두 사람은 다음날 아침 여관에서 깨어날 수 밖에 없는데 말이다. 그 장면을 보고 웃은 사람도 나 하나밖에는 없었다. 고참들이 보기에 박해일은 강혜정에게 한바탕 욕을 하거나 주먹을 휘둘러야 마땅했던 것이다. 그래서 여관에서 나온 후 '대충' 연인이 되어 걸어가는 엔딩에 만족한 사람도 나 하나였다. 강혜정을 너무 귀엽다고 생각한 상병 한 사람을 제외하고. "책임지면 되지-. 뭐 다른 문제 있나." OTL

연애에도 목적이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연애는 그것 자체로 충족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애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부산물은 있다. 나 자신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 인식을 바탕으로 한 성숙. 이런 부산물이 수반되는 연애는 나쁘지 않았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연애도 끝나는 날이 올지 모르지만, 그땐 적어도 이 연애의 종말로 인해 더 이상 상대방 성(性)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느니, 사랑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느니 따위의 소리는 하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은 영화가 시작할 때보다 상태가 좋아졌고, 연애도 일단은 하게 될 것 같으니 이만하면 이 영화는 해피 엔딩.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연애의 목적'을 점검해 보자.

박해일: 좋아하는 여자를 맛있게 먹는 것,을 넘어서는 뭔가도 가지고 있는데, 이 녀석은 그걸 말로 풀어낼 능력이 없다.

강혜정: 상처를 치유하기, 불면증을 치료하기, 자신이 상처입힌 사람 책임지기 (orz)

덧글: 이 글은 쓴지 오래되었다. 그동안 ssy, njt와 이 영화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는데, ssy는 "홍상수의 자장에서 자라난 이가 자기 식의 로맨틱 코메디를 선보일 때" 나올 수 있는 작품이었다는 반응이었지만, "기본적으로 박해일은 강간범이라 평을 하기가 뭣하다."고 했다. njt는 "계속 '밀애'할 수 밖에 없는 처지인데 해피엔딩은 무슨 (웃음)."이라고 일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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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만, 병장, 일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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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엔 면회까지 와서 6시간 동안 노가리를 까다가 돌아간 ssy. 훈련소 시절부터 꾸준히 내게 보낸 편지가 10여통에 이른다. 최근 그의 편지의 동향은 1) 요새 그가 쓰는 시나리오에 관한 잡설들 과 2) 최근 그가 본 영화들에 관한 영화평 으로 이루어진다. 그가 스스로 '충무로 리포트'라 이름붙인 2)의 내용이 혼자 보기 아까워 일부 인용한다. 가끔 문맥의 이해를 돕기 위한 '편주' 있음.

* 혈의 누
<혈의 누>는 너무 친절하였다. (...) 버릴 곳이 거의 없도록 만들어놓았다. (...) 다만 옴팡지게 잔인한 스릴러라면 그냥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로만 쭈욱 밀고 나가도 괜찮을 것 같은데, 너무 많이 가르쳐준다.

* 남극일기
미안한 말이지만 양수리에서 찍어도 될 영화였다. 굳이 남극장면은 조금만 나가서 처리해도 되었을 듯. (...) <지구를 지켜라>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블록버스터급 B-무비가 나오는 충무로는 참 신기한 영화세상이다.
(...) 남성신파. 남성들의 로망, 두명의 사내가 나오고, 서로가 대립하면서 또한 이끌리고, 그렇게 끝까지 가고, 파국(혹은 구원)으로 치닫는 쎈 사나이무비. 뭐 이런 영화들의 극한에 와있는게 아닌가 한다. 그게 태극기에서 끝날지, 앞으로 몇편이 더 나올지 혹은 이종교배를 통해 변화할지...

* 스타워즈 에피소드 3 - 시스의 복수
(편주: 이것도) 남성신파다. (...) 오비완 케노비와 다스베이더(아나킨 스카이워커)의 오랜 대결을 그린 영화다. 허허. (...) 내 소년기를 지배했던 신화 하나가 부서지는 그런 심정으로 그 영화를 보았다.

* 극장전
조악하고 급작스럽게 찍었는데 홍상수는 홍상수다. 그는 다른듯 똑같은 영화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 짧은 러닝타임 (...) 80분이 채 안되는 것 같다. (...) (편주: 다른 영화들은) 뭐 그렇게 할말들이 많은지... 2시간을 넘게 보고 싶은 영화는 <반지의 제왕> 시리즈 정도 밖에 없는데...

* 홍상수
홍상수 이야기가 나오면, 사람들은 경끼를 일으킨다. "그의 스토리들이 다 거기서 거기야." 내가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선배 여자 따먹기" 쯤 되겠지. 물론 좋아하는 이들은 그 따먹기까지의 과정에서 쾌감을 느끼고 대사빨에 죽어나가지만 또 한편으로는 시시하다는 의견이 많다.
(...) F언니들은 (편주: 페미니스트를 지칭) 여자를 따먹는 스토리와 그 물신성 때문에 홍상수라면 치를 떤다. (...) 이제 알았으리라 김기덕이나 홍상수나 이창동이나 매한가지라는 사실을...
(...) 내게 있어 김기덕이 피곤한 이유는 유아기적 발상 때문이다. (편주: 마초성 때문이 아니다) 예를 들면 김기덕은 사람을 묶어놓고 자지를 빤 다음 정액이 쏟아지는 것을 보고는 '너도 좋아했잖아' 하는 식이다.
(...) 하지만 나는 홍상수를 바라보는 관객과 평단 두 가지 지점 모두 답답하다. 특히 평단에서 논의되는 일상성이나 스토리 같은 지점은 지겹다. 무슨 소린고 하니, 내가 볼 때 홍상수가 진짜 승부하고자 하는 지점은 거기가 아니란 얘기다. 홍상수는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대한 논의를 하고자 하는 것 같다. 이번에 극장전을 보면서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영화의 여러가지 구성 요소들, 스크립(시나리오), 플롯(이야기의 구성), 인물과 캐스팅, 공간과 헌팅, 촬영의 여러가지 장치들, 편집과 음악 등 여러 요소를 가지고 장난치고 실험하는 소년이다.
(...) 그는 언제나 정말 똑같은 이야기, 똑같은 트라우마를 가진 스토리를 이렇게 변주하면서, 동시에 그 안에 소속된 인물을 조금씩 바꾸면서 (예를 들면 계급, 성별, 직업...) 그것이 다른 영화 언어와 조합될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살피는 것이다.

* 신시티
근사하다, 근사하다, 근사하다. 근데? 근데 좀 느끼하다. 느끼한 영화의 광팬을 자처하는 나이지만, 내 눈에는 좀 느끼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과 적을 구별하는 첫째 기준은 여성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달렸다. 당연히 그들은 로맨티스트들이니까. 근데 나는 셋 중에 하나쯤은 좀 다를거라고 기대했는데, 이런 셋 다 로맨티스트네. 쩝...
(...) (편주: 이런 종류의 폭력물은) 강한 남성성을 내세우고 끝까지 가는 과정에서 그게 순간순간 오버될 때마다 유치하다는 느낌과 졸라 오바다는 느낌이 들면서 피식피식 웃음이 나는 경우가 있다. 작가는 거기서 웃음을 줄 수도 있고, 정말 비장하게 갈 수도 있는데... 신시티는 너무 한쪽으로만 간다. 이게 리듬감 있게 배치가 되면 훨씬 좋은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 정말 놀라운 강점 하나. 공간을 묘사하는 파워는 엄청났다. 또한 끝없이 갇혀 있는 듯한 느낌. 세트 촬영과 특수효과로 도배해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정말 빠져나올 수 없는 미궁과 같은 공간감은 정말 엄청난 절망을 선사한다.

* 우주전쟁
스필버그는 버그다(내 친구 曰). 맞다 그는 버그다. 항상 그의 영화는 잘 나가다가도 특유의 버그스러움으로 보수에 회귀한다. 하지만 나는 스필버그를 사랑해왔다.
(...) 이런 호의적 시선 때문에 같은 과 친구들과 많이 다퉜다. 왜냐면 그들이 보기에 스필버그는 악의 축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팝콘 부스러기들을 만들어낸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천부적인 재능을 오직 돈에게 팔아치운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팝콘 부스러기 영화들은 늘 있어왔고, (영화는 원래 좀 속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버는게 나쁘다 생각한 적도 없고, 한 인물에게 너무 많은 것을 투영해서 욕하는 건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주인공(톰 크루즈)은 전형적인 스필버그의 영화답게 영화가 시작할 때는 철없는 남자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는 진정한 아빠가 된다. (늘 빠지지 않는 가부장의 귀환. 버그의 핵심키워드) 하지만 나는 마지막 커트에서 존 포드의 <수색자>를 발견하였다. 그는 귀환했지만, 가정에 들어가지는 못한다. 그는 집 밖에 있다. 그는 다시 부두 노동자로 돌아갈 것이다. 심정적으로 그는 구원을 얻고 아빠가 되지만, 결코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 각본을 쓴 데이비드 코엡 曰 "이건 반이라크전에 대한 영화입니다"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거대한 착각을 하고 계신 거 같다. 개새끼 어디서 옳은 척까지 할라 그래? 아무래도 전쟁 가해자들임에도 자신들도 희생자였다는 자기 위안 내지는 윤리적인 당위성 같은 걸 요구한다. 굉장한 퇴행이다.
(...) 스필버그는 버그다. 근데 그 버그스러움이 지금의 스필버그를 있게 했다. 그는 더 할 수 있는데 결코 선을 넘지 않는, 얄미운 인간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그의 영화가 조금씩 맑아지는 기미가 보인다. 특히 <수색자> 커트에서는 뭔가 뭉클했다.
(편주: ssy는 자신의 <우주전쟁> 평론이 며칠 후 잡지에서 본 좋아하는 평론가의 글과 흡사했다고 쑥스럽게 웃었다.)

* ssy는 도대체 왜 '좌파'일까? -_-;; "마이클 무어는 총기협회나 부시만 없어지면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묘사해. 그건 진짜 문제해결을 위한 숙고를 방해하지."라는 말을 듣고, '아니, 학습도 안 받은 친구가 왜 이리 귀여운 청년좌파야? +_+'는 생각이 들었다는. 외려 내가 웃으면서 "그런 사람의 역할도 의의가 있지."라고 했더니 "그건 알지만 그 사람이 하니까 나는 그런 짓 할 필요 없어."란다. 뭐 그도 맞는 말이다.

한가지 더, 대화내용 공개 -_-;;

ssy : '내 이름은 김삼순' 자주 봤어?
카이만 : 아니, 1회 반 정도 밖에. 근데 난 그렇게 재미있진 않더라. 웃기긴 웃겼지만.
ssy : 왜?
카이만 : 블로그에도 썼듯이, '우리나라 사람들 성질부리기 참 좋아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구. 남자들이 성질부리는 건 현실에서 노상 보니까 드라마에서 보면 짜증날테고, 이젠 '여성'이 성질부리게 해서 그걸 보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자기 성질에 대한 자기위안이 아닐는지. 뭐 드라마 주제는 것과 거리가 멀지만, 사람들에게 웃음을 준 방식은 그랬다구.
sst : 여자들이 성질부릴 때가 되긴 했지. 남자들은 성질을 룸싸롱에서 풀고 나오니까.
카이만 : 쿡! (웃음)

강릉에서 칩거하는 그가 좋은 시나리오를 쓰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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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만, 군인, 일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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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에서 제공한 프로젝터로 본 첫번째 영화. -_-;; 내가 훈련소에 있을때 개봉한 영화였던가? ssy가 보낸 편지에서는 평이 극찬까지는 아니어서 그닥 기대를 하지는 않았는데, 꽤 만족스러운 영화관람이었다.

그런데 장르가 전혀 다르건만 "태극기 휘날리며"가 연상되는 것이었다. 두 영화의 공통점을 간략히 언급한다면,

1) 민감한 소재를, (한쪽은 '한국전쟁', 다른 쪽은 '자폐아')
2) 매우 정석적인 방법으로 풀어낸다.
3) 그 결과 수용할 수 있는 관객층이 매우 넓어진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휴머니즘이나 가족주의는 기존의 반공 이데올로기의 입장과는 다르지만, 전쟁영화의 '정석'의 틀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것은 위험하면서도 위험하지 않다. 말아톤이 한명의 장애인과, 그 장애인을 억압하는 사회를 다루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장애인에 대해 부당한 얘기를 하지는 않지만, 그러면서도 누구도 불편하게 만들지 않고 눈물만 짜낸다. 사실 이는 매우 힘든 테크닉인데, 많은 한국인들은 종종 사회운동을 하는 이들에게도 이런 '칼날 위의 균형'을 요구하기도 한다. 말아톤이야 관객만 많이 받으면 그만이니까 그게 가능하지만, '정치적 설득'이란 것이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지는 좀 의문이다. 여하간 말아톤의 경우 그러한 대중성은 장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초원이 어머니의 고뇌와 갈등을 그려낸 부분은 '정석'을 넘어서 있는, 훌륭한 부분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부모님의 사랑'에 대한 비판적인 거리를 취해본 적이 '거의' 없는 한국의 실정에서는 더욱 그렇다. 전반부의 "엄마는 자식이 좋아하는 걸 알거든요."와 조응하는 "애 속이요? 그걸 내가 알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같은 대사는 매우 잘 '기획'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것 역시 이 영화의 장점일 것이나, 결국 초원이는 마라톤을 좋아했다는 식의 해석이 가능한 결말은 역시 '진실을 너무 흉측하게 드러내지는 않는' 수준에 머문다. 하긴 이 영화의 결말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으니.

가끔은 그 '기획'이 영화에의 몰입을 방해하기도 했다. 주연 배우 이미숙, 조승우를 제외한 다른 캐릭터들은 대체적으로 이마에 성격을 써붙이고 다니는 캐릭터로 보였고 생동감이 없었다. 가령 초원이 아빠 : 초원이 엄마와 초원이의 상상적인 관계에 염증을 느끼지만 이를 어찌 해결해야 할 지 모르는 무기력한 인물. 근본적으로는 선하다. 초원이 동생 : 엄마에게 소외되었다고 생각하여 반항적인 성격이 됨. 엄마에게 깨달음의 계기를 제공한다. 코치 : 보스턴 마라톤 우승자이지만 그 후 술에 절어사는 위악적 인물. 초원이를 통해 다시 뛰는 즐거움을 깨닫고 친근감을 느끼며, 초원이 엄마와 신경질적으로 대립한다. 흠, 이정도면 '성격'이 아니라 '설정 자료집'인가? -_-;; 하지만 영화의 초점이 '엄마의 각성'에 맞춰져 있으니 나머지 캐릭터들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어 버리는 건 (어느 정도는) 불가피한 일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주연배우 조승우를 칭찬해야 할 듯. 바보처럼 보이면서도 언듯언듯 매력을 드러내는 그가 아니었다면 이 영화의 설득력은 반감되었을 것이다. 많은 경우 우리가 장애인을 차별하는 (정서적인) 이유가 그러한 '매력의 결여'에서 나온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것은 이 영화를 성공시킨 '씁쓸한' 요인이다. 여하간 영화는 성공했고, 엔딩 크레딧엔 한국의 자폐아가 4만명이라고 뜨는데, 우리는 일상에서 자폐아를 천명에 한명 꼴로는 커녕 십만명에 한명 꼴로 보기도 힘드니 대한민국은 여전히 좋은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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